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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마복음한글역주, 제65장 - 포도원 주인 아들을 때려죽인 사악한 소작농부들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65장 - 포도원 주인 아들을 때려죽인 사악한 소작농부들

건방진방랑자 2023. 3. 25. 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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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5

 

 

포도원 주인 아들을 때려죽인 사악한 소작농부들

 

 

65

1그께서 가라사대, “포도원을 소유한 한 사람(고리대금업자)이 있었나니라. 그 사람이 포도원을 소작농부들에게 빌려주어, 그들이 포도원을 경작하게 하고, 그리고 그는 그들로부터 소출을 거두려 하였다. 2그는 그의 종을 보내어, 소작농부들이 종에게 포도원의 소출을 주도록 하였다. 3그들은 그의 종을 붙잡아, 그를 때리고, 거의 죽일 뻔하였다. 그 종이 돌아와 그의 주인에게 아뢰었다. 4그의 주인이 이르기를, ‘아마도 그들이 너를 알아보지 못한 것 같구나하였다. 5그는 또 다른 종을 보내었다. 그러자 소작농부들은 그 종까지도 마찬가지로 구타하였다. 6그러자 그 주인은 그 아들을 보내며 이르기를, ‘아마도 그들은 나의 아들에게는 충분한 존경심을 보일 것이다하였다. 7그러나 그 소작농부들은 그가 이 포도원의 상속자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를 붙잡아 죽여버렸다. 8귀가 있는 자는 누구든지 들으라!”

1He said, “There was a man(usurer) who owned a vineyard. He leased it to tenant farmers so that they might work it and he might collect its produce from them. 2He sent his servant so that the tenants might give him the produce of the vineyard. 3They seized his servant and beat him, all but killing him. The servant went back and told his master. 4The master said, ‘Perhaps he(they) did not recognize them(him or you).’ 5He sent another servant. The tenants beat this one as well. 6Then the owner sent his son and said, ‘Perhaps they will show respect to my son.’ 7Because the tenants knew that it was he who was the heir to the vineyard, they seized him and killed him. 8Whoever has ears should hear.”

 

 

여기 본 장에 나타나는 예수의 비유를 접할 때, 또 다시 황당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 도마의 자료가 명백하게 예수 자신의 수난사(受難死)를 예시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은 순전히 우리가 이런 비유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선입견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본 비유는 현행 복음서의 수난드라마의 결구(結構)와 전혀 관련이 없다. 이 비유는 이미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혹은 사악한 농부들의 비유(the Parable of the Wicked Husbandmen)’로서 공관복음서 전부에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이미 공관복음서 작가들에 의하여 해석된 알레고리로서 이 비유를 접하고 있고, 또 그 선입견 속에서 도마자료를 읽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아킴 예레미아스(Joachim Jeremias, 1900~1979)를 위시한 많은 예수비유 주석가들이 도마자료가 공관자료에 선행하는 어떤 프로토타입의 자료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특히 이 장의 내용은 역사적 예수가 말씀한 어떤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는 데 대부분의 학자들이 일치하고 있다(Arland J. Hultgren, the Parables of Jesus 14).

 

우리가 이미 앞 장(Th.64)에서 도마자료(혹은 그것에 해당되는 원자료)가 어떻게 누가를 거쳐 마태로 변형되었나를 생생하게 목도하였다. 그것은 꼭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다. 신약성서 속의 예수는 그를 전하는 초대교회의 사정에 의하여 가려질 수밖에 없었다. 초대교회는 불트만의 말대로 종말론적 공동체였으며, 위태로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수없는 문제에 내외로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초대교회는 새로운 국면에 직면할 때마다 예수의 말과 행동, 그리고 그 심상을 그때그때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하면서 그 국면을 타개해 나간 것이다. 우리는 4복음서 저자들의 시대에만 내려와도 바울이 그의 목회서한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공동체 내의 문제들이 성숙할 대로 성숙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에게 전승된 예수의 말이나 삶의 보도는, 있는 그대로, 즉 역사적 예수의 원형을 보존하려는 자세 속에서 기술되기에는 그들 자신의 문제가 너무도 절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자료들은 그들 자신이 봉착한 교회의 사정에 따른 이해와 해석에 의하여 윤색되고, 변형되며, 부연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예수 본래의 모습은 숨겨지고 은폐되어 버리게 마련이다.

 

불트만은 그의 신약성서신학의 중심을 바울과 요한복음에 놓았다. 이미 바울에 의하여 케리그마화된 그리스도가 그의 신학의 원점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예수는 불트만에게는 불가지론적 전제에 불과했다. 이것은 실제로 역사적 예수의 거부를 의미하는 것이다. 불트만에게는 그만큼 추상적 체계에 대한 경건주의가 있다. 그리고 그 체계를 실존주의적 결단의 맥락 속에서 의미지우려고 하였다. 이러한 실존주의적 결단은 그에게서 비신화화(demythologization)를 의미하는 것이었지만, 비신화화가 과학적 세계관에 적응하려는 노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케리그마라는 원점을 드러내기 위한 노력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비신화화를 해야만 케리그마의 원점이 선명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불트만이 가지론(可知論)의 절대적인 시점인 것처럼 고수하는 케리그마의 원점을 해체시키려고 했다. 우리는 케리그마의 그리스도를 역사화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케리그마화된 그리스도만을 고수하고 역사적 예수를 포기하는 것은 오히려 초대교회의 역사적 정황 속에서 허구화된 상대적 가치에 집착하는 것이다. 그것을 아무리 실존주의적으로 해석해도 그 실존의 의미가 그릇된 역사적 전제로부터 출발된 것이라면, 그것은 기존의 권위에 복속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역사적 예수의 실체를 우리가 영원히 확정지을 수 없다 하더라도, 새롭게 만날 수 있는 역사적 예수를 다시 케리그마화 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새롭게 됨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첩경이 된다. 이 첩경의 문이 바로 예수의 말씀(로기온) 자료였다. 그것은 성경 중의 성경이었고, ‘그리스도를 넘어서 예수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복음서 저자들의 내러티브 드라마 속에 파묻혀버린 로기온자료들을 캐내는 작업을 통하여 역사적 예수의 정체에 접근하는 줄기찬 작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작업 속에서 가설적으로 전제된 문헌이 바로 큐자료였다. 그런데 이 큐자료의 가설이 도마복음서의 출현(1945)으로 가설 아닌 현실로 부상되었고, 따라서 큐자료는 큐복음서로서 격상되었다. 이미 도마복음서가, 사경연대와 무관하게, 114개의 로기온자료(가라사대 파편 자료)만으로 구성되었다는 그 형식성만 보더라도, 그리고 도마복음서에 그리스도케리그마적 제가설, 신비로운 탄생이나 족보, 수난, 죽음, 부활, 그리고 재림, 그리고 예수 자신의 메시아적 자의식 등등의 부재만 보더라도, 이것이 큐자료보다도 더 오리지날한 역사적 예수상에 접근하는 자료라는 사실, 최소한 그러한 오리지날한 전승이 보존된 문헌이라는 사실은 너무도 명백한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을 몇몇의 반증가능성의 사례를 가지고서 부정하는 것은 졸렬한 학인들의 밴댕이 콧구멍과도 같은 심사에 속하는 것이다. 큐자료만 해도 기존의 복음서 속에서 가설적으로 이끌어낸 문헌이기 때문에 복음서 저자들의 윤색이나 왜곡을 완벽하게 탈색하거나 바로잡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도마복음서는 큐복음서보다도 더 완정한 독자적인 자료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도마복음도 완벽하게 개칠이 되지 않은 생생한 어록자료라고만 주장할 수는 없다. 보이지 않지만 어떤 의도 속에서 편집되었고, 그 배열에도 부분적으로 자의성을 넘어서는 흐름이 감지되며, 어떤 통일적 상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나레이터(편집자)를 우발적인 한 개인이라고 규정하기 어렵다고 한다면, 우리는 어떤 도마공동체의 존재를 상정하게 된다. 그렇다면 기독론적 기독교운동이 이미 AD 450년대에 바울에 의하여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면 그 시기는 바울만의 독무대가 아니라, 예수를 소재로 하는 다양한 운동이 공존하고 있었다는 역사적 실상을 전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최소한 도마공동체는 바울공동체와는 다른 성격의, 그러면서도 역사적 예수의 실존적 상이나 그 말씀에 더 근접하는 어떤 성격을 지닌 운동체였다는 팩트를 우리는 감지하게 되는 것이다.

 

역사적 예수의 말씀의 탐색에 있어서 가장 강렬한 장르 중의 하나가 바로 비유(Parable)’라는 것이다. ‘비유에 대한 정확한 규정이 어렵지만 하여튼 예수는 자기 생각을 비유로서 표현하는데 특이한 재능을 발휘한 인물이었다. ‘비유를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그 숫자를 카운트하는 방식도 달라지지만 통상적 규정에 따르면, 도마복음에도 비유가 14개가 등장하고 있다. 그 중 10개가 공관복음서와 병행하고 있고(Th.9, 20, 57, 63, 64, 65, 76, 96, 107, 109) 4개가 공관복음서와 병행하지 않는 도마 독자의 전승이다(Th.8, 21, 97, 98). 재미있는 사실은 요한복음에는 비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만큼 요한복음은 관념적이고 논설적이며 역사적 예수의 상에서 멀어져 있다비록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어떤 정보는 역사적 예수의 인간적 측면을 전승하고 있다고 사료된다. 그만큼 비유는 살아있는 예수의 모습과 체험과 생각을 전하고 있다.

 

본시 비유파라볼레(Parabolē)’라는 희랍어에서 온 말인데 비교라는 것이다. 자기가 말하고자 하는 추상적 주제를 비교될 수 있는일상적 체험의 사태나 자연적 사태를 빌어 표현하는 것이다. 대체로 비유는 간단한 경구 스타일이 아니라 스토리화되어 있다. 그런데 본시 역사적 예수의 비유는 직설적이고 자질구레한 수식이 없으며, 전면적이고(단계적인 축적태가 아니다), 주석적이 아니며, 개방적이며, 삶의 비근한 체험을 소재로 하며, 판에 박은 전형성을 탈피하고 있다고 여겨져왔다. 예레미아스는 이것을 알레고리화(allegorization)’ 되지 않았다고 표현했다.

 

알레고리(allēgoria)’란 말은 알로스(allos, 딴 것)’아고리아(agoria, 말함)’의 합성어인데, ‘말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딴 것을 말하고 있다는 뜻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알레고리적 표상(allegorical representation) 그 자체가 아니라, 알레고리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인데, 이것은 이 비유가 어떠어떠한 알레고리적 표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지정하는 해석을 가리키는 것이다. 본 장에 해당되는 마가자료를 본다면, 이 비유의 표면적 논리와는 달리 실제적으로는 매우 구체적 딴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도록 구성되어 있다.

 

포도원은 이스라엘, 소작농부들은 이스라엘의 지배자들과 지도자들, 포도원 소유주는 하나님, 파견된 종들은 예언자들, 그리고 최후로 파견된 아들은 다름아닌 예수 그리스도이며, ‘농부들의 처벌’(12:9, 21:41)은 이스라엘이 거부당함을 상징한 것이며, ‘다른 사람들’(12:9) ‘다른 백성’(21:43)은 이방교회임이 분명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유 전체가 순전한 하나의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 이러한 알레고리적 성격이나 해석은 매우 부차적인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도마복음서는 놀라웁게도 14개의 비유가 모두 이렇게 특정한 목적을 위하여 알레고리화(초대교회의 사정이 반영)되기 이전의 어떤 프로토타입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도마복음서에는 알레고리적 해석이 전무하다. 알레고리화되면 비유는 개방성을 상실하고 폐쇄적이 되어버린다. 상상력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고 그 해석이 강요되는 것이다. 이미 19세기말에 아돌프 쥐리허(Adolf Jülicher, 1857~1938)는 예수의 본래적 비유가 알레고리일 수 없다고 선포했던 것이다그의 전2권의 역저, 예수의 비유담론(Die Gleichnisreden Jesu)1권은 1886년에, 2권은 1899년에 출간되었다.

 

과연 본 장의 비유가 마가나 마태가 윤색시켜서 주장하고 있는 그러한 알레고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일까? 우선 제1절의 포도원을 소유한 한 사람한 사람(a man)’은 콥트어로 크레스토스(chrēstos, χρηστότης)’인데 중간부분이 판독불가능하게 일그러져, 그것은 크레스테스(chrēstēs)’로 읽힐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고리대금업자(usurer)’ 혹은 채권자(creditor)’라는 뜻이 된다. 마르빈 메이어는 ‘A usurer owned a vineyard’로 번역했다. 구태여 고리대금업자가 아니더라도, 포도원의 소유주는 부자이며, 그 포도원에 대하여서는 부재자지주였음에 틀림이 없다. 예수 당시, 요단강의 상부계곡 전체뿐 아니라, 갈릴리호수 북쪽과 북서해안 지역, 그리고 갈릴리 산간지대의 대부분이 라티푼디움(latifundium: 부재자지주가 노예를 부려서 경영하는 광대한 소유지)의 성격을 지닌 대사유지였다.

 

이 대사유지는 대부분 부재자지주들의 손아귀에 있었고, 이들에게 반항하는 갈릴리 농부들에게는 열심당원들(우리나라 1970·80년대 위장취업한 의식화된 학생들을 연상할 것)이 고취시킨 혁명적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는 사실을 연상한다면 이 비유의 분위기는 우리가 생각했던 색깔이 싹 바뀌어 버린다. 종을 파견하고, 그 종이 농부들에게 죽음 직전에까지 두드려 맞았고, 재차 종을 파견하여 동일한 사태가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자기 아들을 아무 대책없이 파견하는 지주의 무모한 행동을 우리는 구속사적 알레고리 속에서 너그럽기만 한 하나님 아버지의 품처럼 해석할 수는 없다. 그것은 아들까지 희생시켜가면서 소출을 획득하려는 악랄한 고리대금업자, 부재자지주의 무모한, 경계심을 가지고 바라보아야 할 행동으로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들만 죽이면 포도원을 소유하게 되리라는 소작농부들의 무모한 소망도 참으로 어리석은 계산일 뿐이다.

 

예수 당시 이러한 무모한 획득과 무모한 항거의 대립, 무모한 인간의 욕망의 표출은 결코 무모한 비유가 아니었다. 그것은 갈릴리 농촌의 처참한 현실에 대한 사실적 보고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계를 대표하는 영국의 신약학 학자 다드(C. H. Dodd, 1884~1973)도 도마복음이 출현하기 훨씬 전인 1935년에 초간된 천국의 비유들(The Parables of the Kingdom)에서 이 비유의 상황을 영국의 부재자지주에게 항거하는 아일랜드 농부들의 분위기에 대비시키고 있다. 이 비유의 스토리는 기본적으로 매우 사실적인 보고라는 것이다(the story in its main lines is natural and realistic in every way). 이러한 분위기에서 이 비유를 이해하면, 이 비유의 스토리라인에서 아들의 죽음을 예수의 십자가라는 구속사적 사건과 연결시킬 수 있는 하등의 연결고리가 없다. 포도원농장에서 소출을 극대화시켜 착취하려는 소유주나 탐욕스러운 농부들 쌍방이 다 결국 상실자가 되고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 비유는 앞 두 장, 63돈을 많이 지닌 부자, 64거래인들(비지니스맨)과 상인들에 대한 이야기와 동일한 주제의 연속적 맥락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 부에 대한 집착은 모두를 상실케 만든다.

 

이 비유를 영적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주인의 소출의 거둠이라는 행위를 본래적 자기의 추구로 파악하고, 그러한 추구가 농부들(비본래적 자아)에게 의하여 박해당하고 좌절당하는 모습을 통하여, 그러한 추구의 어려움을 단적으로 나타냈다고 주석하기도 한다. 하여튼 예수의 비유는 알레고리화되지 않았으며 어떠한 하나의 주제를 단순하게 말하고 있으나, 그 해석은 개방된 상태로 머물러 있다. 공관복음서의 병행문을 살펴보기로 하자.

 

 

(12:1~11) 1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그것을 두르고, 포도즙 짜는 구유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라. 2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3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4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다.

5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인지라, 또다시 그의 많은 종들을 보내었으나 혹은 때리고 혹은 죽여버렸다.

6주인이 보낼 사람이 아직 하나 더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그들이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7저 농부들이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이니, 자아, 죽이자! 그러면 그 유업이 우리 것이 되리라' 하고, 8이에 잡아 죽여 포도원 밖에 내어 던졌느니라.

9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뇨?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盡滅)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

10너희는 성서에서,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한 말을 읽어 본 일이 없느냐?’

 

(20:9~18) 9다음의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었다.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 10때가 이르매,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바치게 하려고 한 종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농부들이 종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다.

11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도 심히 때리고 능욕하고 거저 보내었다. 12다시 세 번째 종을 보내니 이도 상하게 하고 내어 쫓은지라.

13포도원 주인이 가로되, ‘내 어찌할꼬? 내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혹 그는 공경하리라하였더라. 14농부들이 그를 보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이는 상속자이니, 죽이고, 그 유업을 우리의 것으로 만들자하고, 15포도원 밖에 내어쫓아 죽였느니라. 그런즉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16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 이 말씀을 사람들이 들었을 때에, 그들은 어디 그럴 수가 있겠나이까?” 하였다.

17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을 똑바로 보시며 말씀하시었다: “그러면 기록된 바,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함이 무슨 뜻이뇨? 18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누구든지 산산조각이 날 것이며,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21:33~44) 33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그것을 두르고, 거기 포도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라. 34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 보내니, 35농부들이 종들을 잡아,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다.

36다시 주인은 다른 종들을 처음보다 더 많이 보내니, 저희에게도 똑같은 짓을 하였나니라.

37후에 주인이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하였더니, 38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이니, 자아!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하고, 39이에 잡아 포도원 밖에 내어 쫓아 죽였느니라.

40그러면 포도원 주인이 올 때에 이 농부들을 어떻게 하겠느뇨?” 41저희가 예수께 대답하였다: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 때에 실과를 바칠 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42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었다: “너희가 성서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주께서 하시는 일이라. 우리에게는 놀랍게만 보인다한 말을 읽어본 적이 없느냐?

43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를 잘 생산해내는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리라.(44무릇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누구든지 산산조각이 날 것이며,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저를 가루로 만들어 흩으리라.)”

 

 

만약 이 세 자료 중에서 마가자료가 가장 선행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미 마가자료에서 알레고리화가 상당히 진척되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마가의 알레고리화를 극단적으로 밀고간 것은 마태자료이다. 이에 비하면 누가는 오히려 담박한 기술이며 마가-마태와는 달리 도마의 원형을 많이 보존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렇지만 15절 이후의 전개에서는 명백하게 알레고리적 해석이 드러나고 있다. 일례를 들면, 마가에서는 아들을 먼저 포도원 안에서 죽이고 그 시체를 밖으로 내어던진다. 이것은 단순히 잔악성의 정도를 극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며, 예수의 수난사건을 상기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마태와 누가에서는 그 아들을 우선 포도원 밖으로 쫓아낸 후에, 포도원 밖에서 죽인다. 이것은 명백히 예수가 예루살렘성 밖에서 살해되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리고 마태에서는 마가에서 볼 수 있는 점층법(漸層法)적인 진행이 완전히 파괴되고 있다. 당장에 많은 수의 종이 파견되고 한꺼번에 이들 중 일부는 폭행을 당하고, 일부는 살해되고, 일부는 돌에 맞아 죽는다. 그 다음에 또 한 번 단 일회의 파견만이 서술되고 있는데, 이번의 수효는 첫 번보다 많고, 그들의 운명은 첫 번의 경우와 같다. 마태는 이 두 번의 파견을 전기 예언자들과 후기 예언자들로 생각한 것이다. 분명하게 예언자의 운명을 가리키는 것은 마가나 누가에 없는 돌로 쳤다라는 표현이다(대하 24:21 ), 도마나 누가에서 읽을 수 있는 단순한 이야기, 즉 한 사람씩 되풀이해서 보낸 종이 소작농부들에 의하여 망신과 욕만 당하고 빈손으로 쫓겨나는 것만을 말하는 단순한 스토리는 마태에서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상세한 삼자의 비교에 관해서는 예레미아스의 예수의 비유를 참고할 것. 공관복음서와 도마자료를 전체적으로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두드러진다.

 

1) 마가와 마태의 도입부에 나타나는 포도원의 생성과 꾸밈에 관한 이야기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규정짓는 알레고리로서 이사야서 5:1~7포도원 노래와 연관된 것인데 도마에는 그런 표현이 전혀 없다.

2) 마태, 마가, 누가에 명료하게 타국에 갔다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소작인들의 어리석은 계산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데 그러한 표현이 도마에는 없다.

3) 종을 집단으로 파견하는 표현이 도마에는 없다. 도마에서는 처음에 단 하나의 종을 보내었고, 다음에 다시 한 번 한 명의 종, 그리고 아들을 보낸다. 이 단순한 3층의 구조는 실제로 말로 하는 이야기(oral storytelling)의 전형적 특징이다.

4) 도마에서는 아들 이전에는 살해된 사람이 없다.

5) 도마에서는 아들을 죽인 방식에 관한 언급이 없다. 예수의 수난과 무관하다.

6) 그리고 도마에서는 청중에게 던지는 결어적인 질문이 없다.

7) 도마에는 소작농부들에 관한 처벌기사가 전혀 없다.

 

이상의 사실로만 보아도 도마복음은 알레고리화가 진행되기 이전의 순결한 자료라는 것이 입증된다. 이러한 도마자료가 초대교회의 입장에 따라 제멋대로 변형의 과정을 거치면서 오늘의 정전복음서들을 형성시켰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63부터 65까지 연속되는 비유의 테마가 세속적 부에 집착하는 사람들의 삶의 허망한 결과를 담박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그 오리지날한 의미 맥락은 너무도 스스로 명백한 것이다.

 

 

 포도를 수확하는 사람들, 이집트 테베지역, 왕들의 계곡 근처 세이크 아부드 알쿠르나(Sheikh Abd el-Qurna)에 있는 나크트의 무덤(Tomb of Nakht) 벽화, 뉴킹덤(New Kingdom) 18왕조, 기원전 1390년경, 옛부터 비옥한 초승달 지역 전역에 포도재배가 성행했음을 말해준다.

 

 

인용

목차

본문

성경

주제상관도표

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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