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어째서 그러한가? 만약 보살이 상에 머물지 않고 보시한다면, 그 복덕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으리라.
何以故? 若菩薩不住相布施, 其福德不可思量.
하이고? 약보살불주상포시, 기복덕불가사량.
불교가 중국에 들어오기 전, 이미 선진시대(先秦時代)에 불교와 무관하게 성립한 중국의 지혜의 서(書)인 『노자(老子)』 제7장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러하므로 성스러운 사람은 몸을 뒤로 하기에 그 몸이 앞서고 |
是以聖人後其身而身先 시이성인후기신이신선 |
몸을 내던지기에 그 몸이 존한다. |
外其身而身存 외기신이신존 |
이것은 사사로움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
非以其無私邪? 비이기무사야 |
그러므로 능히 그 사사로움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니. |
故能成其私 고능성기사 |
여기서 말하는 ‘무사(無私)’는 곧 불교의 ‘무아(無我)’로 이해될 수 있다. 그런데 진정하게 무사(無私)하면 곧 그 사(私)를 이룰 수 있다고 하는 역설이 여기 숨어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성사(成私)하기 위해서 무사(無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성사(成私)는 무사(無私)의 자연스러운 결과일 뿐이다. ‘신선(身先)’이란 ‘후기신(後其身)’의 결과로 자연스럽게 그 몸이 앞서는 것이다. ‘신선(身先)’이라 했지, ‘선신(先身)’이라 하지 않았다. ‘선신(先身)’의 선(先)은 신(身)을 목적어로 갖는 타동사이다. ‘신선(身先)’의 ‘선’은 신(身)이라는 주어에 붙는 자동사일 뿐이다. ‘불주상보시(不住相布施)’에도 복덕(福德)은 따른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하게 우리가 ‘불주상(不住相)’할 때에 따라오는 결과일 뿐이다. 즉 여기서 보살운동은 무아(無我)의 도덕성을 윤회(saṃsāra)와 결부시켜 논의하는데, 그 인과는 우리가 말하는 세속적 인과관계는 아닌 것이다. 왕필(王弼)은 그의 명저 『노자미지예략(老子微旨例略)』의 끝머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몸을 뒤로 하기에 그 몸이 앞선다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그 몸이 앞서는 것일 뿐이지, 그 몸을 앞세움으로써 이루어지는 그러한 것은 아니다. 몸을 내던지기에 그 몸이 존한다 함도, 결과적으로 몸이 보존되는 것일 뿐이지, 그 몸을 보존하려 해서 이루어지는 그러한 것은 아니다.
後其身而身先, 身先非先身之所能也; 外其身而身存, 身存非存身之所爲也.
후기신이신선, 신선비선신지소능야; 외기신이신존, 신존비존신지소위야.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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