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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도마복음한글역주, 제100장 -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나의 것은 나에게 본문

고전/성경

도마복음한글역주, 제100장 -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나의 것은 나에게

건방진방랑자 2023. 3. 25.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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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나의 것은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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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그들이 예수에게 한 개의 금화를 보이며, 그에게 말하였다: “카이사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세금을 요구하나이다.” 2그께서 그들에게 가라사대, “카이사의 것들은 카이사에게 주어라. 하나님의 것들은 하나님에게 주어라. 그리고 나의 것은 나에게 주어라.”

1They showed Jesus a gold coin and said to him, “Caesar's people demand taxes from us.” 2He said to them, “Give Caesar the things that are Caesar's, give God the things that are God's, and give me what is mine.”

 

 

여기 도마복음서 중에서 가장 충격적일 수 있고, 기독교의 성격을 근원적으로 전환시켜야 할 매우 중대한 로기온 파편을 발견한다. 그리고 도마의 원자료가 어떻게 복음서 구성작가들에 의하여 활용되고, 왜곡되고, 확대되고, 드라마 타이즈되고, 해석되었는가 하는 사실에 관한 생생한 보고를 우리는 듣게 된다. 그러나 현재 서구의 주석가들은 도마의 자료에 의하여 현행 복음서를 재해석하는 용기를 발휘할 엄두를 내지 못한다. 마가에 의하여 구성된 드라마가 워낙 잘 짜여져 있고, 그것이 그 나름대로 매우 복합적인 의미맥락 속에서 유기적 통일성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도마 자료라는 새로운 잣대에 의하여 재해석하기에는 기존의 신학적 체계의 관성과 하중이 아직은 너무도 강하게 굴러가고 있는 것이다. 나 도올과 같은 방식으로 정직하게 도마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기독교의 가장 심오한 신념들이 붕괴되는 결과가 초래되는 것은 너무도 명확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불트만의 말대로 마가가 되었든, 마태ㆍ누가가 되었든 현행 복음서는 이미 바울이 개척한 헬레니즘 문화권의 초대교회의 문제의식 속에서 생겨난, 기독교(Christianity)의 독창적 작품이다. 소위 정경 4복음서는 헬레니즘 기독교의 그리스도 예배, 성찬, 그리고 기독론적 신화와 논설 속에서 자라난 것이다. 복음서는 결국 교리사와 예배사의 산물인 것이다.

 

그러나 도마복음서는 이러한 헬레니즘적 기독교 이전의, 팔레스타인 전승의 순결성을 보존하고 있다도마복음서가 시리아 지방에서 전파되고 보존된 것은 상당한 역사적 근거가 있으나, 그 성립은 오리지날한 팔레스타인 전승에 속하는 것이다. 교리사, 예배사 이전의 역사적 예수의 실제상황에 더 근접하는 보도가 그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승의 근원적 차이를 우리는 인정하고서 양자를 비교해야 하는 것이다. 본 장의 내용은 불트만이 아포프테그마라고 규정한 전승양식인데 공관복음서에 모두 등장하고 있다.

 

 

(12:13~17) 저희가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중에서 몇 사람을 보내매, 그들이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시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 카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우리가 바치리이까, 말리이까?” 한 대,

예수께서 그 위선됨을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라하시니,

그들이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그들이 예수께 가로되, “카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하시니, 저희가 예수께 대하여 심히 기이하게 여기더라.

 

(22:15~22)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론하고, 자기 제자들을 헤롯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말하되, “선생님이시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며, 아무라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 하심이니이다. 그러면 당신의 생각에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이르소서, 카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 하니이까?”한대,

예수께서 저희의 악랄함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세를 내기 위한 그 돈을 나에게 보이라하시니, 그들이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그들이 가로되, “카이사의 것이니이다.”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라사대, “그런즉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하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기이하게 여겨 예수를 떠나가니라.

 

(20:20~26) 이에 저희가(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 엿보다가, 예수를 총독의 치리(治理)와 권세 아래 붙잡아 놓으려 하여 정탐들을 보내고,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의인(義人)인 체하며 예수의 말을 책잡게 하니, 그들이 물어 가로되, “선생님이시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 하시고, 오직 참으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우리가 카이사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하니, 예수께서 그 간계를 아시고 가라사대,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 뒤 화상과 글이 여기 있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카이사의 것이니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가라사대, “그런즉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라하시니, 저희가 백성 앞에서 그의 말을 능히 책잡지 못하고 그의 대답을 기이하게 여겨 잠잠하니라.

 

 

이 세 개의 파편을 비교해보면 명백하게 마가자료가 오리지날이고, 그 자료를 마태와 누가가 자신들의 정황에 따라 변조시켰음을 알 수 있다. 대체적으로 마태는 마가자료를 충실하게 계승한 편이고, 누가는 마가자료를 많이 뜯어고쳤다. 마가와 마태는 대질하는 주체가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되어 있으나, 누가는 주체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로서 설정하고 그들이 보낸 정탐들을 대질자로 삼고 있다. 누가 시대에는 이미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별로 의미가 없었을지도 모른다헤롯당원들(Herodians)’은 누가와 요한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하여튼 누가는 예수를 총독의 치리와 권세 아래 붙잡아놓으려 한다’ ‘스파이를 보내다’ ‘스스로 의인인 체하게 한다는 등등 드라마적 의도와 분위기를 매우 강렬하게 노출시키는 언사를 사용하고 있다. ‘세금이라는 용어도 마가 마태는 켄소스(kēnsos)’라는 라틴말 차용어(census)를 쓰고 있으나, 누가가 그것을 조공, 공세를 의미하는 포로스(phoros)’로 바꾸었다(tribute). 마가는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 그리고 나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라로 되어 있는데 누가는 데나리온 하나를 내게 보이라로 간결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마태는 세금을 내기 위한 그 돈을 나에게 보이라라고 하여, 그 돈이 직접 세금을 내는 수단으로 쓰이는 화폐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하여튼 이러한 소소한 문제들은 대의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크게 중요하지 않다. 가장 중요한 것은 공관복음서의 기술과 도마복음서 기술의 큰 차이를 파악하는 것이다. 공관복음서는 마가자료가 오리지날한 것이므로 마가자료를 중심으로 분석해보겠다.

 

우선 불트만은 이 아포프테그마12:17에 나오는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라는 독립된 로기온 하나를 자료로 하여 마가가 전체 스토리를 구성한 것이 아니라, 13절부터 17절까지가 처음부터 통일적으로 구상된 유기적인 하나의 아포프테그마이며, 이것을 후대의 교회작품으로 생각할 근거는 없다고 주장했다(Rudolf Bultmann, 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 26. 13절에 약간 마가의 편집이 감지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트만의 주장이야말로 하등의 논거가 없다. 도마자료에 비교해보면 이 아포프테그마는 마가의 탁월한 상상력의 소산이며, 아주 소박한 원시자료를 교회의 이념에 맞추어 극화시키고 확대시킨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도마에는 일체 그들에 대한 규정이 없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문제상황을 예수에게 보고한 것뿐이다. 예수를 책잡힐 난감한 처지에 빠뜨리려는 계략의 의도 같은 것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도마의 전후 맥락에서 보면 그들은 그냥 돈 잘 버는 상인이나 비즈니스맨들이다. 예수에게 대적적인 존재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드라마는 항상 적대관계를 중심으로 설정된다는 것이다. 특히 예수의 수난드라마(Passion drama)의 구조가 그러하다. 도마는 수난드라마에 본질적으로 관심이 없다. 그러면 얼마나 정교하게 마가가 도마자료, 혹은 최소한 도마류의 원자료를 극화시켰는지를 우리는 살펴보아야 한다.

 

우선 바리새인들과 함께 등장하는 헤롯당원들은 헤롯 안티파스(Herod Antipas)의 치세와 정책을 지지하는 극우파이다. 이들은 당연히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가지고 있다. 이들과 극대점에 서있는 사람들이 열심당원들(Zealots)이라고 불리는 민족주의 좌파이며, 이들은 반로마적인 급진파 유대인들이었다. 당시 열심당원들은 반란의 불씨였으며 로마의 치자들에게는 탄압의 대상이었다. AD 6, 퀴리니우스 총독 때 갈릴리의 유다(Judas the Galilean)와 그를 따르는 자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들이 바로 열심당원들이었다. 이 반란은 처참하게 진압되었지만 그 불씨는 꺼지지 않고 계속 살아나서 다양한 형태의 애국운동으로 발전한다. 그러다가 결국 AD 66년의 반란에 결정적인 촉매 역할을 하였고 다양한 좌파그룹들을 결집시켜 결국 AD 70년의 예루살렘 멸망이라는 비극을 초래케 하였던 것이다. 예수는 근원적으로 이 열심당원이나 시카리(Sicarii: 단검을 소지하고 다니는 어반 테러리스트들)의 폭력혁명이나 정치노선에 회의적이었다. 그의 유명한 산상수훈도 어떤 의미에서는, 마하트마 간디를 연상케 하는, 열심당원 노선에 대한 평화선언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대의 보수주의자들에게는 예수의 천국사상의 래디칼한 성격은 열심당적 이데올로기의 표현처럼 곡해될 수도 있었다. 이러한 복합적 감정이 이 스토리의 배경에 깔려있는 것이다.

 

여기 문제가 되고 있는 세금은 앞서 말했듯이, ‘켄소스라는 것으로 우리말로 하면 인두세(人頭稅, poll tax)’라고 불리는 것이다. 즉 재산이나 수입, 수확에 대하여 매기는 세금이 아니라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두당 내는 세금이다. 이 세금을 걷기 위해서 호구조사를 했기 때문에 우리가 호구조사켄소스즉 센서스(census)라고 말하는 것이다. 로마의 세금을 모든 사람들이 내기 싫어했지만, 열심당원들이 특별히 극렬하게 반대했던 것이 바로 이 켄소스였다. 퀴리니우스 총독 때 반란을 일으켰던 것도 퀴리니우스 총독 시절에 호구조사를 무리하게 강행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예수가 이 켄소스에 관한 질문에 를 하면 예수는 열심당원으로 몰리게 되어 로마 당국의 탄압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옛스를 하면 친로마세력이 되어 열심당원들에게 공격의 표적이 된다. 이들은 예수에게 이러한 딜레마를 제시했다. 그리고 예수가 이런 딜레마를 성공적으로 빠져나가자 질문자들이 경악하는 장면으로 끝난다(‘심히 기이하게 여기더라’). 그러나 도마의 로기온에는 전혀 이런 딜레마의 텐션이 없다.

 

그리고 이들 질문은 정치적인 맥락뿐 아니라, 매우 미묘한 종교적·신학적 맥락이 개재되어 있다. 도마에는 장소에 대한 보고가 없다. 그러나 마가에는 이 대화의 배경이 예루살렘으로 설정되어 있다. 여기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갈릴리는 로마의 직할구역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두세를 내지 않았다. 이 인두세는 유대지방의 사람들 즉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문제였다. 그리고 열심당원들도 주로 유대지방에서 활약했다. 따라서 갈릴리 사람인 예수는 이 문제에 대하여 매우 객관적일 수 있는 입장에 있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 켄소스는 로마직접통치지역의 로마세였기 때문에 반드시 로마의 돈으로 내야했다. 유대지방에 통용되는 동전이 있었지만, 그런 돈으로는 낼 수가 없었다. 여기 데나리온은 로마의 은화인데, 물론 로마의 황제가 발행한 돈이다. 이 은화에는 그 돈이 유통되는 당대의 황제의 얼굴이 그려져있다. 이 황제를 카이사라고 불렀는데, ‘카이사라는 것은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줄리어스 시저(카이사, Julius Caesar, BC 100~BC 44)’ 그 개인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 이후의 황제들을 일반화해서 부르는 명칭이다. 줄리어스 시저가 워낙 탁월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사후에 그는 신격화되었고, 그 이후의 황제들의 이름에는 그 신성의 후계성을 상징하는 카이사라는 명칭이 꼭 따라다녔다. 그러니까 예수시대의 카이사는 옥타비아누스의 양아들인 티베리우스 황제였다(풀네임은 Tiberius Julius Caesar Augustus, BC 42~AD 37. 2대 로마황제이며 치세기간은 AD 14~37).

 

티베리우스의 은화(데나리온)에는 그의 얼굴이 가운데 부조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그 얼굴 주변으로 삥 둘러 다음과 같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TI CAESAR DIVI AUG F AUGUSTUS’ 동전은 면적이 작기 때문에 동전장인들은 약호를 새겨 넣었다. 이 약호는 다음과 같다: “티베리우스 카이사, 하나님이 되신 아우구스투스의 아들, 신성한 황제(Tiberius Caesar, son of the deified Augustus, Augustus).” 그리고 그 뒷면에는 또 최고 제사장이라는 뜻의 ‘PONTIFEX MAXIMUS’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법왕(法王)’이라는 뜻이다. 줄리어스 시저가 37세 때 선거에 의하여 그 자리에 앉았고 로만 포럼에 자리잡고 있는 로마의 수호여신 베스타(Vesta)를 모신 후로 그런 전통이 이이졌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 동전 자체가 황제숭배(emperor worship)’의 상징이며 황제를 하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통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것은 매우 불경스러운 우상숭배(idolatry)를 뜻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통용되는 로칼한 동전에는 일체의 우상숭배적 화상이 그려져 있질 않았던 것이다.

 

 

 

 

여기 예수가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하고 데나리온 하나를 가져오라라고 한 것은 매우 절묘한 드라마가 숨겨져 있다. 예수는 그 은화를 소유하고 있지 않았던 무소유의 사나이였다. 따라서 그것을 가져오라고 했을 때, 이미 예루살렘의 이스태블리쉬먼트를 점하고 있었던 질문자들(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그 은화를 주머니 속에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은 이미 그들이 엄격한 유대인의 계율에 의하면 우상숭배의 불경죄를 범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벌써 그들은 예수에게 한 수 먹은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묻는다: “이 화상과 이 글이 뉘 것이냐?” 그들은 대답한다. “카이사 티베리우스의 것입니다.” 그들은 이미 로마황제의 권위를 인정하는 시스템 속에 들어가 있는 타협자들인 것이다.

 

이에 예수는 최종적 결론을 내린다: “카이사의 것은 카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 여기 바치라라는 동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 번역판에는 14절의 질문과 17절의 대답이 모두 바치다로 되어 있지만, 14절의 질문에 쓰인 동사는 디도미(didōmi)’로서 그냥 주다이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에 쓰인 동사는 아포도테(apodote)’인데 이것은 돌려주다의 뜻이다. 즉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준다는 뜻이다. 로마의 통치에 의하여 이득을 보고있는 자들은 이득 본 것을 주인에게 되돌려줌으로서 빚진 상태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이다.

 

바울의 편지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自取)하리라(13:1~2, 7절까지 같은 논지 계속됨, 벧전 2:13~17에도 같은 논지가 있음).

 

 

바울은 로마당국의 정치적 권위에 대해서 매우 철저히 타협적이었다. 그러한 그의 정치적 입장이 로마세계에서 기독교 교회운동을 일궈나가는데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정치적 타협이 없이는 모든 종교의 초기형태는 살아남기 힘들다. 여기 마가의 아포프테그마가 이러한 바울의 사상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그렇게 생각하기를 꺼린다. 오히려 여기 마가가 활용한 자료에서 바울의 사상이 유래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그러한 가능성은 전무하다. 예수는 로마의 권세에 대한 충성과 하나님의 권세에 대한 충성을 병치시켰다. 두 충성이 결코 충돌될 필요가 없는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본 것이다. 마가의 예수 디펜스는 일단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이러한 마가의 정교한 드라마를, 마가의 논리에 따라 교묘하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연상케 하는, 두 권위의 분리 내지는 타협으로써 모든 인간사의 문제가 해결된단 말인가? 아무리 주석가들의 미사여구가 예수의 재치를 극찬한다 해도 찜찜한 구석은 남는다. 예수는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좌우양도론(左右兩道論)을 주장하는 회색분자였을까?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마가드라마의 원본 중핵이 되고 있는 도마복음서의 충격에 새롭게 눈을 떠야 한다. 도마를 정직하게 바라봐야 하는 것이다.

 

도마의 원문을 다시 한번 세밀히 검토해보자! 도마의 원문은 그들로 시작하고 있다. ‘그들은 물론 예수의 주변에 있던 불특정의 사람들을 말할 수도 있고, 예수의 따르는 자들 중에 몇 사람일 수도 있다. 예수운동의 지지자들 중에는 부유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래서 공동식사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로기온 속에서 계속 부정과 긍정의 대상으로 등장하였던 상인들(merchants)’ ‘비지니스맨들(buisinessmen)’일 수도 있다. 여기 금화"라는 표현이 데나리온보다는 한급이 위라는 사실도 중요하다. 티베리우스 시대에도 많은 종류의 금속화폐가 주조되었는데 금화도 많다. 금화(aureus)는 고액의 거래에서만 통용되었으며, 하급의 상인들은 만져볼 수가 없었다. 일반 서민 시장에서는 동화가 주로 통용되었던 것이다. 금화에 새겨져 있는 화상과 글씨는 데나리온의 경우와 동일하다. 필자가 직접 확인해본 실물에도 이와 같이 쓰여 있다: “TI CAESAR DIVI AUG F AUGUSTUS.” 로마의 통화제도의 기본은 은본위였으며 데나리온이 가장 지속적인 기준이었다. 그러나 금화도 예수시대에는 많이 통용되었다. 줄리어스 시저가 갈리아지방(Gaul)과 브리타니아지방(Britania)을 정복하면서 이 지역으로부터 금이 대량 유입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금화와 은화의 가치비율은 1:25 정도이다. 내가 본 금화의 무게는 7.8g 정도이다.

 

도마에는 화상과 글씨에 대한 언급이 없다. 뿐만 아니라 데나리온을 하나 가져오라는 예수의 요청도 없었다. 금화를 보인 것은 처음부터 상인들이었다. 그리고 로마의 세금부과가 너무 지독하다는 것을 투정했을 뿐이다. 이런 투정에 대해 예수는 충고의 말을 했을 뿐이다. ‘카이사의 것들은 카이사에게 주어라. 하나님의 것들은 하나님에게 주어라. 그리고 나의 것은 나에게 주어라.’ 이것이 전부다. 외면상으로 마가의 구성과 비슷한 느낌을 주지만 그 함의는 소양지판이다. 예수의 어법이 항상 그러하듯이, ‘카이사 하나님 의 나열은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점층적(漸層的) 화법이다. 이 삼자의 나열의 궁극적인 강조점은 에게 있다. ‘나의 것(what is mine)’에 있다. 카이사와 하나님의 대비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즉 카이사와 하나님은 에 대하여 객체화된 동급의 두 항목일 뿐이다.

 

금화를 가지고 그 로마황제권력의 유통필드에서 수익을 올리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세금을 내야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것은 본시 로마황제의 것이기 때문에 로마황제에게 되돌려주는 것은 너무도 정당하다. 다음으로 객체화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다. 이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숭상하는 하나님이다. 바로 로마치세에서 득을 보면서 민중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유대인 이스태블리쉬먼트가, 로마황제처럼 숭상하고 있는, 여호와 하나님이다. 예수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는다. 예수는 오직 아버지를 말할 뿐이다. 질투와 징벌과 율법과 사망과 분열된 아담의 창조주 야훼, 엘로힘은 예수에게는 부정의 대상이다. 예수는 구약적 세계관에 대해 일말의 관심도 없다. 예수시대에만 해도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있는 구약이라는 바이블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대부분 그것은 구전으로 형성된 엉성한 관념들의 집합일 뿐이었다. 예수의 신념 중에 가장 중요한 측면이 여기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로마의 치세는 사실, 그 이전의 어떠한 형태의 치세에 비해서도 관대한 것이었으며 다양한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는 관용이 있었다.

 

유대인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로마의 집정관들이 아니라, 이들 이방세력을 등에 엎고 율법을 앞세워 자국민을 탄압하는 율법사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제사장들 등등 모든 유대교 이스태블리쉬먼트였다. 예수가 열심당원들과 같은 좌파들과 행동을 같이 할 수 없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단순한 로마의 정치권력으로부터의 해방이 유대인민의 해방을 가져올 수 없다는 예수의 신념 때문이었다. 이 땅에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지 않는 한, 새로운 지배구조(바실레이아, βασιλεία)가 정착되지 않는 한, 이스라엘의 정치해방은 의미없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오늘날 이스라엘이 자국만의 해방을 외치면서 세계인민 모두를 불행에 빠뜨리고 있는 것과도 같다. 오늘날 이스라엘 정치의 가장 파국적 측면은 야훼가 불어넣어준 선민의식율법주의이다. 보편 윤리가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나치 유대인 학살에 대한 반동이라고는 하지만, 그 반동의 성격이 너무 지나치게 반동적인 것이다.

 

예수는 카이사를 단순히 정치적 권력으로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옥타비아누스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그것은 절대적 하나님의 위치를 점하고 있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현세의 실제적인 하나님이었다. 따라서 예수가 두 번째로 제시하는 하나님, 즉 구약의 하나님은 예수의 문제의식 속에서는 카이사와 동일시되고 있다. 구약의 모든 내용은 구약의 하나님에게 되돌려주어라! 카이사와 야훼는 다 똑같은 존재들이다. 예수는 이 로기온에서 이미 콘스탄티누스 이후에 전개되는, 황제권력화 되는 기독교의 모습을 예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 예수의 것만 나에게로!

 

마가는 이러한 래디칼한 예수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할 수가 없었다. 유대인을 포용하지 않으면 초대교회공동체는 성립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가는 나의 것은 나에게 주어라라는 제3의 명제를 드롭시켰다. 그리고 제1의 명제와 제2의 명제를 대립시켰다. 그렇게 되면 예수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로마의 권력세계와 아버지의 나라의 정면충돌을 원치 않았던 예수의 입장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변용을 의미있게 하기 위하여 온갖 텐션을 자아내는 드라마 장면들을 설정했다. 마가는 이러한 식으로 도마원자료를 변용시켜 나가면서 오늘날 기독교의 원점이 된 수난드라마복음서를 창작해낸 것이다. 불트만은 말한다:

 

 

마가라는 저자는 그에게 가능했던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원래의 전승들을 특별한 방향으로 맞추어 놓고, 바울 영역의 헬레니즘교회가 요구하는 대로 전승의 의미를 부각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즉 전승을 헬레니즘 기독교의 기독론적 케리그마(the Christological Kerygma of Christendom)에 결합하고, 기독교의 비의(秘儀)인 세례와 성만찬을 전승 안에다 세움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예수 생애의 서술을 인류사에 최초로 탄생시켰다 우리가 본 바에 의하면, 예수의 생에 서술이기도 한 복음서를 쓴 첫 시도자가 마가라는 사실은 마태와 누가에서 보다도 더 강하게 마가에서 신화적 요소(mythical element)가 나타난다는 사실과 일치한다. 마태와 누가에도 이적적인 것이 고조되고 새로운 신화적 요소가 끼어들었지만, 역시 마태ㆍ누가의 전체윤곽에서는 그리스도 신화가 지상에서 활동한 예수상 뒤로 후퇴하고 있다The History of the Synoptic Tradition 346~348: 불트만이 마가가 마태·누가보다 더 신화적이라고 본 것은 매우 기발한 관점이다.

 

싯달타는 무신론자였다. 사실 여기서 무신론이라는 말은 신이 있다 없다는 것과는 무관하다. 근원적으로 신의 존재가 인간의 구원과 무관할 때 모든 사유는 무신론이 아니 될 수 없다. 유일신론적인 브라마니즘이 아무리 고상한 철학적 언어를 제공해도 결국 인간을 의타적인 존재로 전락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싯달타는 '마음의 혁명을 부르짖고 나선 것이다. 예수도 메타노이아를 부르짖는다.

 

나는 생각한다. 예수는 니체보다도 더 본질적인 무신론자였다. 예수에게는 살해해야 할 하나님이 그렇게 강압적으로 그의 정신세계를 압박하고 있지 않았다. 예수는 단지 구약의 하나님과의 결별을 선언하고 새로운 아버지의 나라를 선포하고자 했다: “하나님(야훼)의 것은 하나님(야훼)에게로! 나의 것은 나에게로!” 구약이여, 안녕!

 

 

예수의 고향 나사렛에 있는 수태고지교회 마당의 회랑에 걸려 있는 아기 예수와 성모의 모자이크상. 마리아와 예수가 한복을 입고 있다. 이와 같이 예수의 모습은 한국인에게는 한국적 인식구조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이다. 꽃 장식도 무궁화. “평화의 모후여 하례하나이다라는 표현도 격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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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성서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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