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인자무적(仁者無敵)
1a-5. 양혜왕이 말하였다: “나의 나라 진국(晉國)【이것은 실제로 위(魏) 나라를 가리킨다. 요즈음 출토된 유물로써도 당시 위나라를 진국(晉國)이라고 불렀음이 확인된다】이야말로 천하에 이처럼 강한 나라가 없다는 것은 맹자 당신께서도 잘 아시는 바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과인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동쪽으로는 제나라에 패하였고 장남이 전사하였습니다【BC 341년의 유명한 마릉(馬陵) 전투를 가리킨다. 장자 신(申)이 포로가 되었다】. 서쪽으로는 진나라에게 700리의 땅을 잃었고【양혜왕 31년의 일】, 남쪽으로는 초나라에 굴욕을 당하였습니다【양혜왕 후원(後元) 11년의 일: 이상의 사건이 『사기(史記)』 「육국연표」에 의하면 양혜왕 사후의 사건이 된다. 그런데 사마천의 연대추정이 틀린 것이다. 그만큼 이 양혜왕의 대화는 진실한 사실의 기록임이 입증된다】. 과인은 진실로 이를 치욕으로 생각합니다. 원컨대 죽은 동포들을 위하여 한번 화끈하게 전부 설욕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노선생이시여, 어떻게 하면 제가 죽기 전에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나이까?” 1a-5. 梁惠王曰: “晉國, 天下莫强焉, 叟之所知也. 及寡人之身, 東敗於齊, 長子死焉; 西喪地於秦七百里; 南辱於楚. 寡人恥之, 願比死者一洒之, 如之何則可?”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왕이시여! 나라를 키운다고 장땡이 아닙니다. 땅이 사방 백 리만 되어도 제가 말씀드리는 왕도를 실천하기만 하면 천하에 왕노릇을 하실 수가 있습니다. 위나라 정도만 되면 천하가 모두 귀순할 것입니다. 만약 왕께서 백성에게 인정을 베푸시어, 형벌을 감면하고, 부세를 경감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땅을 깊게 갈고 제때에 일찍 제초를 하여 비를 기다릴 수 있게 하며, 또한 장성한 청년들이 농사의 여가가 생기기만 하면 효(孝)ㆍ제(悌)ㆍ충(忠)ㆍ신(信)의 덕성을 닦아 집에 들어가서는 부모ㆍ형제를 잘 섬기고 나와서는 윗 어른들을 잘 섬기도록 하게만 한다면, 전쟁이 난다 하더라도 백성들은 모두 나무몽둥이라도 치켜들고 나아가 진나라 초나라 병사들의 견고한 갑옷이나 예리한 무기를 모조리 쳐부수고 말 것입니다. 孟子對曰: “地方百里而可以王. 王如施仁政於民, 省刑罰, 薄稅斂, 深耕易耨; 壯者以暇日修其孝悌忠信, 入以事其父兄出以事其長上; 可使制梃以撻秦楚之堅甲利兵矣. 이와는 반대로 진나라나 초나라에서는 백성들을 시도 때도 없이 부려먹으니 밭을 깊게 갈고 김매어 부모를 봉양하는 일이 도무지 불가능합니다. 돌보는 자식 없는 부모들은 얼고 굶주리고, 형제와 처와 자식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맙니다. 그 나라에서는 인민을 도탄에 빠뜨리고 있을 뿐이니, 이런 상황에서 왕께서 나아가 정벌하신다면, 사람들이 모두 왕께 귀순하고자 할 텐데 감히 누가 왕께 대적하오리이까? 옛말에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왕이시여! 부디 의심치 마소서! 부디 왕도를 실천하소서!” 彼奪其民時, 使不得耕耨以養其父母, 父母凍餓, 兄弟妻子離散. 彼陷溺其民, 王往而征之, 夫誰與王敵? 故曰: ‘仁者無敵.’ 王請勿疑!” |
역시 맹자의 진언은 무모하다. 어떻게 견고한 갑옷과 예리한 병기를 갖춘 대국의 군대를 도덕적인 민중의 나무몽둥이로 쳐부술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이 비록보다 근원적인 해결책이라 할지라도 이미 시류의 대세는 상앙(商鞅)이 말하는 ‘이전거전(以戰去戰)’의 논리로 치닫고 있었다. 양혜왕은 맹자의 간곡한 논리를 수긍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이미 늙었다. 더 이상 맹자의 논리를 실천할 수 있는 여력을 갖지 못하는 나이였다.
불행하게도 우리의 주인공 양혜왕은 『맹자』라는 서물에서 불과 다섯 장의 기록만을 남기고 역사의 무대 뒤로, 저 현부의 세계로 사라지고 만다. 맹자를 만난 다음 해 불귀(不歸)의 객이 되고 마는 것이다. 맹자에게 호되게 쿠사리(くさり, 핀잔)만 맞고 쓸쓸히 패도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그의 모습에 연민의 정까지 느낀다. ‘인자무적’의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며 ‘왕이시여! 의심치 마소서!’라고 매달렸지만, 그러한 맹자의 절규는 결국 공허한 메아리만을 남겼을 뿐이다. 그러나 그 공허한 메아리는 2300년을 넘어, 오늘날까지 우리의 가슴을 울렁거리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위나라에 관한 기사는 다음에 나오는 한 장이 더 있다. 양혜왕이 죽 고 그의 아들 사(嗣)가 등극했는데 그가 곧 양양왕(梁襄王)이다. 양양왕은 BC 318~296년간 재위했는데 등극 시의 나이는 잘 모른다. 혜왕이 오래 살았으니까 어느 정도 나이가 있었을 것이다. 맹자는 혜왕이 죽고 난 후 곧 양왕을 만났는데 영 ‘같지 않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위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간다. 다음 장은 위나라를 떠나기 전의 맹자의 심정을 그린 파편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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