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달갑게 사람을 죽이려 하지 않는 사람
1a-6. 맹자께서 얼마 전에 작고한 양혜왕의 아들 양양왕을 만나시었다. 만나시고 난 후 조정을 나와 주변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었다: “멀리서 봐도 백성을 다스리는 임금 같다는 느낌이 전혀 안 들고, 가까이서 얘기해봐도 외경스러운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 인물이더군. 게다가 초면의 인사치레도 없이 느닷없이 묻더군: ‘천하가 지금 어지러운데 도대체 어떻게 정리될 것 같소?’ 그래서 내가 말했지 ‘반드시 하나로 정리될 것이외다.’ 또 묻더군: ‘누가 과연 천하를 하나로 만들 것 같소?’ 그래서 내가 대답했지 ‘사람을 죽이는 것을 가슴속으로부터 좋아하지 않는 인물이어야 천하를 하나로 만들 수 있소.’ ‘그렇다면 과연 누가 그런 인물과 더불어 할 수 있을 것 같소?’ 1a-6. 孟子見梁襄王. 出, 語人曰: “望之不似人君, 就之而不見所畏焉. 卒然問曰: ‘天下惡乎定?’ 吾對曰: ‘定于一’. 語, ‘孰能一之?’ 對曰: ‘不嗜殺人者能一之.’ ‘孰能與之?’ 그래서 내가 대답했지: ‘진정으로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인구만 있다면야, 천하사람 모두가 그와 더불어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외다. 왕께서는 모종한 벼의 새싹을 잘 아시지요! 7ㆍ8월에 가뭄이 들면 이놈들이 펴나지 못하고 비실비실 말라 쪼그라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짙은 뭉게구름이 드리우더니 패연(沛然)하게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면 이 말라버린 벼싹들이 버쩍버쩍 기운을 차리고 발연(浡然)하게 솟아오릅니다. 이와 같다면 과연 누가 이 솟아오르는 생명의 기운을 막겠습니까? 지금 천하에 사람의 목자 노릇을 한다는 임금치고 사람을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습니다. 만약 진실로 사람을 죽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임금이 있기만 하다면 천하의 백성들이 모두 목을 빼고 경쟁적으로 그를 바라보려고 할 것입니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천하의 백성이 그 임금에게로 귀순하려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폭포물이 아래로 쏟아지는 것과도 같이 패연할 터이니, 과연 누가 이것을 막을 수 있겠나이까?’” 對曰: ‘天下莫不與也. 王知夫苗乎? 七八月之間旱, 則苗槁矣. 天油然作雲, 沛然下雨, 則苗浡然興之矣. 其如是, 孰能禦之? 今夫天下之人牧, 未有不嗜殺人者也, 如有不嗜殺人者, 則天下之民皆引領而望之矣. 誠如是也, 民歸之, 由水之就下, 沛然誰能禦之?’” |
오늘날과 비슷한 전국시대에 대한 맹자의 개탄
양혜왕은 BC 319년에 승하하였고, 양양왕은 그 다음 해인 BC 318년에 즉위한다. 즉위한 바로 직후 양양왕은 아버지의 손님이었던 맹자를 만난다. 그러나 양왕은 전혀 시대감각이나 사명이나 비전이나 열정 같은 것이 없는 인물이었던 것 같다. 양혜왕은 자기보다 한참 어린 맹자에게 그토록 쿠사리(くさり, 핀잔)를 맞으면서도 맹자를 깍듯이 존경했다. 이 나라의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명백한 비리와 실정을 지적했다고 대법원을 임의 대로 조종하여 비판자를 감옥에 집어넣는 작금의 최고권력자의 꼬락서니에 비교해봐도 양혜왕 같은 전국의 군주들의 기본소양과 그릇됨이 어떤 수준의 것인가 하는 것은 쉽게 가늠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양왕은 그러한 그릇을 지니지 못했다. 여기 ‘불사(不似)’라는 표현은 ‘같지 않은 놈’이라는 뜻이니, 임금으로서의 풍도와 인격을 전혀 갖추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졸연문(卒然問)’이라는 뜻은【졸연(卒然)은 졸연(猝然)과 같다】, 밑도 끝도 없이 다짜고짜 묻는다는 뜻이니, 초면의 의례를 전혀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좀 터무니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맹자가 대답하는 것을 보면 상대방을 존중해주지 않는 쿨한 느낌이 강하게 배어있다. 맹자에게도 어떤 진실을 전하려는 열정이 느껴지지 않는 문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천하를 누가 통일할 것 같냐는 식의 질문은 전혀 질문자 자신의 앙가쥬망(engagement)이 배제되어 있는 것이다. 책임감이나 자신감이 없는 질문인 것이다. 그래서 맹자는 냅다, ‘지금 천하에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군주는 없다’라고 쿨하게 선언해버리는 것이다.
맹자의 이런 말은 너무 심한 극언 같이 느껴질지 모르지만, 오늘날 한 국사회의 패자(霸者)들도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지 않는 자가 없는 것 같다. 대기업이라는 패권을 장악한 자들은 동네동네마다 온갖 마트를 독점하고 있다. 하나의 대기업마트가 들어서면 동네의 수십 년 정감 어린 구멍가게들은 다 죽는다. 민주의 법질서를 저촉 안 한다는 핑계를 대겠지만 실제로 갑자기 나타나서 따발총을 쏘아대는 미친놈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이 사회의 모든 패자들이 자기만의 이익을 위하여 타인을 죽이는 것을 리버랄리즘의 지선으로 여긴다. 대기업은 하청업체를 쥐어짜 죽이는 것이 좋은 운영이고, 국가는 대기업중심으로 중소기업을 죽이는 것이 좋은 정책이고, 미국과의 자유무역은 한국의 농촌을 죽이는 것을 너무도 자연스러운 추세로 받아들인다. 북한의 인민은 모두 죽여야 할 빨갱이들이고, 대학의 인기 없는 인문학과는 모두 죽여 없애야 마땅한 것이다. 도대체 ‘죽이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하지 아니 하는 권력’이 이 땅에 있어본 적이 있는가? 맹자의 절규는 전국시대에 대한 과장된 진단이 아니라 오늘 여기 우리의 현실에 대한 개탄이다.
천하 통일의 염원과 제나라
그리고 여기 맹자가 ‘정우일(定于一)’이라고 한 것만 보아도 맹자 또한 천하통일에 대한 비젼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공자처럼 주나라의 분봉 제도를 고수하려는 것은 아니며, 전국의 현실을 인정하고 그 중에서 누군가가 천하를 하나로 통일하리라는 기대가 서려있는 것이다. 그러나 맹자는 ‘정우일(定于一)’을 오직 왕도와 인정으로써 달성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다. 위나라에서 맹자는 마지막까지 자기 소신을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자신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인물이 사라졌다고 생각하자 그는 가차없이 위나라를 떠난다. 그의 다음의 행선지는 제나라였다.
대량(大梁)에서 제나라의 수도 임치(臨淄)까지 결코 만만한 거리가 아니다. 더구나 한 300명의 대부대를 거느리고 이동한다는 결코 만만한 사건이 아니다. 앞서 말했지만 우선 비용이 엄청 든다. 이 비용은 누가 대었을까? 양양왕이 댔을 리가 없다. 제선왕이 댄 것이다. 맹자는 결코 초청받지 않고 가지 않는다. 초청받지도 않았는데 그 대부대를 거느리고 갔다가 거절당하면 그 낭패와 창피는 수습하기 어렵다. 초청 안 받으면 맹자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니까 맹자는 비록 종횡가와 같은 책략가는 아니지만 전국시대의 영웅다운 연출을 한 것이다. 맹자가 거느리고 다니는 대부대는 당대 수천 명의 식객을 거느린 맹상군의 행렬을 오히려 초라하게 만든다. 그러니까 300명의 식솔을 거느리고 다니는 대사상가의 위용은 전국시대 분위기에서는 매우 매력적인 것이다. 뭔가 있을 법한 인물이라는 위압감과 권위를 주는 것이다. 맹자가 위나라에 갔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열국의 군주들에게 일단 호기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그래서 위나라에 있을 동안에도 맹자는 끊임없이 추파를 받았을 것이다. 거렁뱅이라도 진짜로 쎄게 놀면 위대하게 보이는 것이다. 게다가 맹자는 진짜 실력이 있는 인물이었다. 맹자에게 추파를 던진 사람은 다름 아닌 제나라의 군주 제선왕(齊宣王)이었다.
제나라는 우리가 잘 아는 강태공(姜太公)의 나라이다. 낚시꾼 강태공이 서백 즉 문왕을 도와 혁명의 기업을 닦고 그의 아들 무왕(武王)을 도와 혁명을 완수시킨 위대한 영웅담은 우리가 잘 아는 일이다. 이 그릇이 큰 인물, 강태공이 분봉된 나라가 제나라이다. 강태공은 봉국에서 매우 모범적인 정치를 폈다. 그래서 금방 대국이 되었다. 그 후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관중(管仲), 포숙아와 같은 훌륭한 신하를 거느린 제환공(齊桓公, BC 685~643 재위) 때에 이르러 제나라는 매우 견실한 나라가 되었고 춘추오패 중에서도 아주 강건한 나라로 꼽히었다. 그러나 그 이후 제나라는 계속 몰락한다. 제환공 14년(BC 672)에 진(陳)나라라는 소국의 공자 완이 국내에 내란이 일어나 제나라로 도망쳐왔는데, 제환공이 완(完)을 후대했고 공정(工正)이라는 벼슬을 주었다. 진완은 제나라에 정착하면서 성을 갈아 전완(田完)이라고 했다. 이것이 전씨가 제나라에 정착하게 된 최초의 계기이다. 제나라가 점점 혼미하게 되어가는 와중에 이 전씨는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술책을 써서 제나라 사람들의 민심을 얻고 국정을 전횡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결국 제강공(齊康公) 19년(BC 386)에는 전화(田和)가 전권을 장악해버렸고 주(周) 나라의 천자는 정식으로 그를 주실(周室)의 인정한다. 이로써 강태공의 제나라는 끝이 나버린다. 강씨의 제사가 술주정뱅이였던 강공(康公)으로 끝나버린 것이다. 여기까지를 보통 강제(姜齊)라 하고, 전화(田和)로부터 시작되는 제나라를 전제(田齊)라 부른다. 그러니까 같은 제나라이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나라가 된 것이다. 『사기(史記)』 세가에도 강제는 「제태공세가(齊太公世家)」로, 전제는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로 분립되어 있다.
전화(田和)는 태공(太公)이라 불리고, 전화의 아들 전오(田午)는 환공(桓公)【같은 제환공이라도 춘추5패의 제환공과 다르다. 『사기』를 읽을 때 혼동하지 말 것】이라 부른다. 전오(田午)의 아들 전인제(田因齊)【영제(嬰齊)라고도 불림】에 이르러 칭왕하니 이가 바로 그 유명한 제위왕(齊威王)이다. 위왕이 바로 손빈을 전략가로 대접하여 양혜왕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겨준 마릉대첩의 주인공이며, 지금 맹자를 모셔가고 있는 제선왕의 친아버지이다.
제위왕의 변심과 직하학파
중국역사에서 강국 진(晋)나라가 삼진(三晋)으로 분립하여 그 중 위나라가 패권을 장악한 사건과 강제(姜齊)가 전제(田齊)로 바뀌는 사건이 대체적으로 전국시대의 개막이라고 보면 된다.
이 전국시대의 개막에 두 위대한 문화적 영웅이 태어났으니 그들이 바로 위문후(魏文侯, BC 445~396 재위)와 제위왕(齊威王, BC 356~320 재위)이다. 항상 문화적 영웅들은 세종대왕의 역사적 상황을 더듬어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새로운 왕조의 출발초기에 태어난다. 위문후도 진나라의 적통을 이었지만 새로 탄생된 위나라의 창업리더이고, 제위왕도 새로 탄생된 전제의 군주이다. 이들은 새로운 적통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전통적 인습에 젖어있는 귀족세력을 배제하고 시류에 조응하는 새로운 인재군을 형성하여 직접 민중의 마음을 얻기를 원한다. 그런 배경에서 위문후의 자하학단이 형성된 것이고, 그 바톤을 이어 탄생한 것이 그 유명한 제위왕의 임치(臨淄)의 직하학파이다. 자세한 설명은 회피하겠으나 이미 위문후를 도와 위나라의 문물을 재정비한 재상 이극(李克)【중국 최초의 본격적이라 말할 수 있는 성문법 『법경(法經)』을 썼다】, 오기(吳起), 단간목(段干木), 서문표(西門豹), 전자방(田子方)ㆍ적황(翟璜, 위나라의 상경上卿), 악양(樂羊, 위나라의 장수) 등등의 인물에 관한 이야기는 전술한 바와 같다. 그런데 이 인물들의 특징은 법가계열의 합리주의를 주축으로 하며 실무관료형에 해당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들은 당장의 부국강병에 도움을 주는 현실적 방안을 내는 사람들이었으며 개인의 내면적 도덕수양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상앙(商鞅)도 이들 계열에서 배출한 탁월한 인물이다. 그 일차적 원인은 이미 연횡이냐 합종이냐를 둘러싸고 대진전략을 어떻게 짤 것인가를 고민해야만 하는 가장 지정학적 요충을 차지하고 있는 전위적 나라가 위나라였다는 데 있다.
전국시대 지도를 펼쳐놓고 보면, 극에 진(秦)나라가 위치하고 극동에 제(齊)나라가 위치한다. 다시 말해서 제나라는 광활한 농지를 배경으로 워낙 기반이 탄탄한 나라이기도 했지만 중원으로부터 동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진나라의 동진에 대한 압박감을 덜 받았다. 게다가 춘추전국의 고등한 문명의 진원지인 노나라와 가장 밀접하게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위문후의 지원으로는 사회과학이 발달했지만 제왕의 지원으로는 순수한 인문과학이 발달한 것이다. 직하에 모인 인물들은 위문후의 휘하에 모인 인물들과는 달리 실무형 인간들이 아니었다. 제멋대로의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편안하게 자기의 이즘(-ism)을 펼 수 있는 인문학적 공간을 마련해준 것이다. 이 직하학파의 융성은 제위왕(齊威王)-제선왕(齊宣王)-제민왕(齊湣王) 3대에 걸친 것이다.
아마도 전제가 전국시대에 태어나 비록 6국의 한 나라로서 마지막까지 버티다가 최후로 진나라에게 멸망하였지만, 직하학파의 융성 하나만으로 인류사에 너무도 위대한 업적을 남기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까지 중국문명의 위대함을 인정하게 되는 것은 전국시대의 백가쟁명의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백가쟁명의 유산이 없다면 중국은 지루한 로마제국의 지속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헤겔이 중국문명을 ‘지속의 제국’ ‘역사 없는 역사(unhistorical history)’라고 규정하여 그 정체성을 비판했지만, 그 지루한 듯이 보이는 지속의 이면에 서구역사가 따라올 수 없는 사상적 다양성과 역동성이 엮여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을 정도로 동양문명에 대한 관(觀)이 천박하고 무식하고 관념적이었다. 헤겔의 두뇌 속의 역사철학이야말로 역사 없는 역사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내가 말하는 중국역사의 다양성과 역동성은 그 본원이 전국시대의 백가쟁명에 있으며 그 백가쟁명의 본원이 바로 직하에 있었다. 사마천은 「전경중완세가(田敬仲完世家)」에서 바로 맹자를 초빙한 제선왕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나라의 선왕은 문학유세(文學游說)의 학자들을 너무도 좋아하여, 추연ㆍ순우곤ㆍ전병ㆍ접여ㆍ신도ㆍ환연과 같은 당대의 선비들 76명에게 모두 같은 지역에 나란히 대저택을 하사하였고, 또 그들을 상대부(上大夫)로 삼았으며, 관직에 얽매이거나 정치에 종사하지 아니 하고 자유로이 토론하게 하였다. 이리하여 제나라의 직하에는 학사(學士)들이 다시 많아졌고, 그 수가 수백 명에서 천 명을 넘어섰다.
宣王喜文學游說之士, 自如騶衍ㆍ淳于髡ㆍ田騈ㆍ接予ㆍ愼到ㆍ環淵之徒 七十六人, 皆賜列第, 爲上大夫, 不治而議論. 是以齊稷下學士復盛, 且數 百千人.
여기 ‘학사복성(學士復盛)’이라는 말을 쓰고 있는 것은 직하학파가 선왕 때에 이르러 ‘다시 성하게 되었다’는 뜻이므로 그 전에 위왕 때 이미 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제는 이국의 사람들이면서 위대한 강 태공의 나라 제나라를 배은망덕하게 삼켜버린 사람들이기 때문에 제나 라를 도둑질했다는 느낌이 강할 것이고 그러한 죄의식은 상대적으로 문화적 포용성으로 표현된 측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사들을 자기의 세력기반으로 삼고, 또 한글을 반포하는 행위를 통하여 국민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갈망했다고 한다면 하여튼 제위왕에게도 그런 비슷한 역사적 상황이 있었을 것이다.
제위왕은 양혜왕과 만나 회견하고 같이 수렵을 즐기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양혜왕이 물었다: “그대 제나라는 대국인데 굉장한 보물이 있겠군요?” “보물이라니요. 그런 것은 변변한 것이 없습니다.” 양혜왕은 자랑하면서 말했다: “과인의 나라와 같이 작은 나라에도 직경이 일촌이 되는 찬란한 보석구슬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면 앞뒤로 수레 12승을 환하게 비춰줍니다. 그러한 보석구슬이 10개나 있습니다. 당신의 나라와 같이 만승이나 되는 강대국에 그런 보물이 없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그러자 위왕이 말했다: “과인이 보물로 여기는 것은 양혜왕께서 보물로 여기는 것과는 다릅니다. 제 신하 중에 단자(檀子)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로 하여금 남쪽 의성을 지키게 하면 초나라가 감히 얼씬거리지 못하며, 사수(泗水)가의 12 제후가 모두 충실하게 조공을 합니다. 그리고 제 신하 중에 반자(盼子)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에게 고당(高唐)지방【산동성 고당현(高唐縣) 동북쪽】을 지키도록 하면 조나라 사람들이 감히 동쪽으로 와서 고기를 잡지 못합니다. 그리고 제 신하 중에 검부(黔夫)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로 하여금 서주(徐州)【산동성 등현(滕縣)의 남쪽. 설국(薛國)】를 지키게 하면, 우리가 침입할까 무서워서 연(燕)나라 사람들이 북문에 제사를 올리고, 조(趙)나라 사람들이 서문에 제사를 올리며, 또 그에게 귀순하는 자들이 7천여 가호나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 신하 중에 종수(種首)라는 인물이 있는데 그에게 도적들을 방비ㆍ단속하도록 하면 사람들이 길거리에 떨어진 것도 주워가지 않습니다. 이 네 신하야말로 천리를 밝히는 보물들입니다. 어찌 열두 수레를 밝히는 것들을 보물이라 말할 수 있겠나이까?” 양혜왕은 얼굴을 붉히고 씩씩거리며 사냥을 거두고 떠나버렸다.
양혜왕이라는 캐릭터와 제위왕이라는 캐릭터의 대비가 매우 극렬하다. 위왕은 인재를 중시했고, 국방을 탄탄히 했다. 그는 국방을 탄탄히 함으로써 생기는 여력을 모두 백가쟁명의 인물들을 키우는 데 썼다.
그런데 위왕은 등극 직후에는 매우 술과 여색에만 빠져 지내고, 밤새도록 주연을 베풀었다. 국정을 경과 대부들에게 위임해버리고 국사를 거의 돌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런 상태가 9년이나 계속되었는데, 주변의 제후들이 번갈아 제나라를 침범하여 나라사람들은 계속 불안에 떨었다. 즉위 원년에는 삼진(三晋: 한ㆍ위ㆍ조)이 제나라의 상(喪)을 틈타 내습하였고, 6년에는 노나라가 침공하였으며 7년에는 위가 제나라의 땅을 빼앗았고, 9년에는 조나라가 공격해왔다. 이것은 모두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니까 위왕은 매우 흐리멍텅하고 능력없고 음락(淫樂)에 빠져 있는 철없는 인물처럼 보였다. 그는 왕으로 등극한 후에 주변의 신하나 제후들에게 깔보이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9년이나 지난 어느 날, 세상이 확 변하였다. 놀랄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위왕이 갑자기 즉묵(卽墨)【산동성 평도현(平度縣)의 동남】 지방의 대부를 소환하였다. 그리고 말했다: “그대가 즉묵에 재임하고 있는 동안에 나의 귀에는 매일매일 그대에 관한 험담이 끊이지 않았소. 그래서 내가 몰래 사람을 파견하여 즉묵을 시찰하게 해보니, 전야(全野)가 잘 개척이 되어 물자가 풍부하게 돌아갔고, 관청에는 밀린 일들이 없이 깔끔히 처리되어 있어 우리 제나라의 동쪽이 탄탄하게 방비되고 있었고 인민들은 태평을 구가하고 있었소. 이것은 그대가 내 주변의 총신들에게 빌붙어 환심사고 명예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하오. 나라의 어지러움과 무관하게 그대의 정도를 걸어갔소” 그리고 그에게 만호의 식읍을 봉하였다.
그리고 또 아(阿)【산동성 동아현(東阿縣) 서남】 지방의 대부를 소환하여 말하였다: “그대가 아(阿)를 지키고 있는 동안에 나의 귀에는 매일매일 그대에 관한 찬사가 끊이지 않았소. 그래서 내가 몰래 사람을 파견하여 아를 시찰하게 해보니, 전야가 개척되지 않고 팽개쳐 있었고 백성은 가난과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소. 예전에 조나라가 우리 땅 견(甄)【산동성 견성현(甄城縣) 북쪽】을 침공해 들어왔을 때 그대는 그것을 구원할 능력이 없었소. 뿐만 아니라 위나라가 우리 설릉(薛陵)【산동성 양곡현(陽谷縣) 동북】을 빼앗었을 때는 그 사실조차 알지도 못하였소. 이것은 명백하게 그대가 나의 좌우 총신들에게 뇌물을 바치고 그들을 구워삶아 명예를 구하였기 때문이오.” 그리고 즉석에서 그를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큰 가마솥에 삶아 죽이는 팽형에 처하였다. 그리고 그를 칭찬했던 총신들을 모조리 삶아 죽였다.
그리고 국정을 크게 개혁하여 추기(鄒忌)ㆍ전영(田嬰)과 같은 명철한 인물들을 차례로 재상으로 삼았고, 전기(田忌)를 장군으로, 손빈(孫殯)을 군사(軍師)로 삼고 국력을 증강시키면서 병을 일으켰다. 서쪽으로 조(趙)ㆍ위(衛)를 공격하였고, 위나라를 탁택(濁澤)에서 패배시키고 위혜왕을 포위하였다. 위혜왕은 관(觀)【하남성 청풍현(淸豊縣) 남】땅을 헌납하고 화해를 청하였다. 그리고 또 조(趙)나라는 제나라의 장성(長城)【당시 각국의 국경에 연하여 장성이 있었다. 진나라 통일 이후 무의미하게 되어 역사에서 사라졌다】을 반환하였다. 이로써 제나라의 국내사람들은 두려워 떨었고 가식과 비리를 저지를 생각을 못하였다. 그리고 백성이 모두 성심을 다하였기 때문에, 제후들이 이러한 국내사정을 알고는(내우가 사라짐) 감히 제나라에는 출병할 엄두를 못 내었다. 제나라는 20여 년 동안 평화를 구가하였던 것이다.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우선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였다는 의미에서 매우 신빙성이 높다. 그런데 이 제위왕이라는 캐릭터에 관하여 우리는 매우 신비로운 느낌을 감출 수 없다. 어떻게 9년 동안이나 흐리멍텅하게 술주정뱅이 노릇하던 자가 그토록 상벌을 명료히 하고 간언을 허심하게 수용하며 부국강병의 판단에 조금도 흐림이 없는 위대한 성군으로 돌변하게 되었는가? 인간에게 찾아오는 어떤 내면적 트랜스포메이션은, 종교적 컨버젼(Conversion)의 체험 같은 경우에는 쉽게 설명이 가능하지만【윌리엄 제임스의 『종교적 체험의 다양성(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를 참고할 것】, 정치적 행위에 있어서의 그러한 역설은 쉽게 설명이 가능하지 않다. 위왕은 당초로부터 아주 음험하게 영민한 인물이었을까? 세상을 방치하듯 관조하면서 흑백의 상벌을 정확히 가리기 위한 시간을 벌고 있었을까? 하여튼 이러한 위왕의 변신과 관계되어 『사기(史記)』에는 또 하나의 인물이 등장하니, 그가 곧 순우곤(淳于髡)이라는 희대의 걸물이다. 순우곤을 이해하면 위왕과 직하의 비밀이 풀려 나간다.
직하학파 초대총장인 순우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순우곤은 직하궁의 초대총장이다. 거대한 학단의 총장이라고 하면 우리는 왕족이나 귀족 출신의 빈틈없이 화려한 인물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순우곤은 정반대의 인물이다. 다양한 철학을 가진, 개성 있는 사상가 집단의 영수가 되려면 우선 학문적 실력이 있어야 할 것이나, 만약 치열하고 엄격하기만 한 논리와 성품의 소유자라고 한다면 포용력을 결하여 그러한 다양한 인물군을 거느리기 어렵다. 그런데 순우곤은 돈과 권력을 우습게 알고 성품인즉 엉성하고 허술하게 보이지만 상대방의 심중을 정확히 간파했으며, 일체의 권위주의가 없었고, 무엇보다도 코믹한 인물이었다. 수수께끼와 유모아의 도사였다. 사실 순우곤이야말로 거대학단의 수장이 되기에 너무도 적절한 인물이었으며, 순우곤이야말로 전국시대의 자유분방한 학풍을 개척한 개조의 일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에 「골계열전」을 집어넣었는데, 「골계열전」은 순우곤 때문에 설정한 목차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사마천은 「골계열전」을 다음과 같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로써 시작하고 있다.
공자는 말했다: “여섯 가지의 학문[六藝]이 있지만 그것들이 세상을 다스린다고 하는 기능에 있어서는 다 한 가지이다. 예(禮)라는 것은 사람을 절도 있게 만드는 기능이 있으며, 악(樂)이라는 것은 사람들을 조화롭게 뭉치게 하는 기능이 있으며, 서라고 하는 것은 옛 일을 본받게 하며, 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의 내면의 기분을 창달하게 해주며, 이라고 하는 것은 우주의 변화를 신비롭게 인식하게 만들며, 춘추(春秋)라고 하는 것은 대의명분을 가리게 만든다.”
孔子曰: “六藝於治一也. 禮以節人, 樂以發和, 書以道事, 詩以達意, 易以神化, 春秋以義.”
이에 태사공은 말한다: “하늘의 이치는 너르고 넓어 엉성한 듯이 보인다. 이 세상 이치도 하도 많아서 문제해결방법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말하는 언어가 은미하면서도 급소를 찌른다면 또한 세상의 엉크러진 난제들을 풀 수도 있다. 그러니 골계 또한 육예(六藝)와 같은 다스림의 기능이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太史公曰: “天道恢恢, 豈不大哉! 談言微中, 亦可以解紛.”
골계(滑稽)를 육예(六藝)와 같은 레벨의 사회적 기능(social function)을 갖는 해분(解紛, 분규해결)의 책략으로 인정하는 사마천의 자세에서 우리는 사마천의 육경관이 얼마나 경직되지 않은 자유로운 것이었으며, 또 학문의 사회적 실천기능을 얼마나 중시했는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역으로 인간세에 있어서 유모아의 중요성을 육경(六經)의 수준으로 높여 생각한 사마천의 통찰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오늘날에도 유모아가 없는 학자는 B급, C급에 불과하다. 모든 A급 학자는 골계의 대가일 수밖에 없다. 학문 그 자체가 골계인 것이다.
‘골계(滑稽)’라는 말의 의미에는 원래 술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술병[酒器]의 뜻이 있다. 그리고 ‘골(滑)’은 ‘어지럽다’는 뜻이 있다. 술병에서 거침없이 쏟아지는 술처럼 술술 쏟아지는 말이 마구 사람을 어지럽게 하면서도【변첩지인(辨捷之人)이 비(非)를 말해도 시(是) 같고, 시(是)를 말해도 비(非) 같다. 『사기』 색은】 그 어지러운 가운데 계고할 만한 씨알맹이가 들어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천하의 분란을 해결하는 데 골계처럼 효율적인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 골계의 일인자로서 사마천은 순우곤을 꼽았다.
순우곤은 본시 제나라 사람이다. 그런데 출신이 아주 천했다. 『사기(史記)』에 ‘췌서(贅壻)’라고 적혀있는데 보통 이것을 ‘데릴사위’라고 해석하지만 이것은 너무도 판에 박힌 평범한 해석이다. 여기 ‘췌(贅)’라는 말은 ‘우췌(疣贅, 혹ㆍ사마귀)’, ‘여잉지물(餘剩之物, 군더더기)’이라고 주가 달려있으니, 이것은 한 집에 엄연히 적자가 있는데 남자가 또 필요해서 노비의 남편으로서 사들이는 형식으로 들여온 사위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노예와 같은 반열의 사람이다. 옛날에 여종의 남편을 또 종으로 부리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다. 순우곤은 노예출신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노예신분의 사람이 서울대학교 총장이 된다는 것은 요즈음 감각으로도 좀 생각하기 어렵다. 그러나 전국시대의 위대함은, 다시 말해서 그 격동의 소셜 모빌리티(social mobility)의 실상은 바로 순우곤이라는 캐릭터에 의하여 상징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순우곤이야말로 전국시대의 인물군의 모든 극단적 이데아 티푸스를 구현한 캐릭터였다.
순우곤은 키가 7척도 되지 않았다고 했으니[長不滿七尺]【7척을 요새 도량 형으로 계산하면 160cm 정도】, 한 155m 정도의 작은 사람이었다. 성이 순우(淳于)고 이름이 ‘곤(髡)’이니, 아마도 대가리를 빡빡 밀었을 것이다. ‘곤(髡)’은 대가리를 빡빡 민다는 뜻이다. ‘곤겸(髡鉗)’은 대가리를 밀고 큰칼을 채우는 형벌이다. 155cm에 대머리를 한, 보기만 해도 웃음이 저절로 나오는 코믹한 사나이, 그가 세상을 크게 움직였다. 그가 사신으로 나가기만 하면 골계다변으로 소신을 굽히거나 욕되게 행동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사마천은 기록하고 있다.
순우곤은 태어나면서부터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였다. 당시 학문이 란 학점이나 학위가 있는 것이 아니고 고정된 커리큘럼도 없었다【유가만이 6예를 기본으로 하는 커리큘럼이 있었다】. 그러니까 놀라운 기억력의 소유자는 무수한 고사를 암송하고 타인의 이야기를 기억하니 자연 지식세계에서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다. 강기박식(强記博識)으로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타인의 안색을 살피면 그 사람의 심중을 읽는 놀라운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는 양혜왕에게도 불려간 적이 있다. 순우곤이 워낙 유명했기에 양혜 왕은 그를 불러 재상 자리를 주려고 했다. 우리의 주인공 양혜왕은 그 가 도착하자 좌우의 신하들을 물리치고 혼자 앉아 그와 독대하기를 두 번이나 했다.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러나 순우곤은 양혜왕을 멍하게 쳐다보고 있을 뿐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물러간 후에 혜왕이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를 소개한 식객에게 야단을 쳤다. “그대가 순우곤 선생은 관중(管仲)이나 안영(晏嬰)이 못 미치는 훌륭한 사람이라 하여 과인이 만나보았지만 그 자는 꿀벙어리였다. 그를 상대하기에는 과인이 부족하다고 깔본 것이냐? 도대체 이게 뭔 까닭인고!” 그래서 식객이 순우곤에게 말하니, 곤은 말한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제1차 회견 때에 왕의 마음은 말달리는 데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2차 회견 때에는 왕을 뵈오니 왕의 마음은 음악소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양혜왕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아~ 놀랍도다! 진실로 순우곤 선생이야말로 성인이시로다! 전에 순우곤 선생이 오셨을 때 어떤 사람이 좋은 말을 바쳤는데, 과인이 그 말을 보기도 전에 선생이 도착하였던 것이다. 뒤에 다시 선생이 오셨을 때도 어떤 사람이 노래를 기똥차게 잘한다는 사람을 소개하였는데, 내가 그를 시험해보기도 전에 역시 선생이 오셨던 것이다. 내 비록 좌우를 물리기는 하였으나 내 마음이 그들에게 있었으니 순우 선생의 말씀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제3차로 회동하였을 때는 한 번 말문이 터지자마자 3일을 밤낮으로 계속 대화를 나누었는데 서로 지루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흥미 진진하게 빨려들어갔던 것이다. 양혜왕은 그를 재상으로 대접하려 하였으나 순우곤은 사양하고 물러갔다. 그래서 혜왕은 그를 전송하는데 4두마차의 최고급 수레에 그를 앉히고 비단두루마리에다가 또 벽옥을 보태주었다. 그리고 황금을 백일(2,400냥)이나 주었다. 사마천은 말한다: “순우곤은 죽을 때까지 한 번도 벼슬을 하지 않았다[終身不仕].” 이 사건은 맹자가 양혜왕을 알현하기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다. 우리의 주인공들은 전국 역사의 장에서 다 이렇게 얽혀있다.
이제 우리는 순우곤과 위왕의 극적인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위왕이 즉위 후에 음락에 빠져 세월 가는지 모르고 장야지음(長夜之飮) 만을 즐기는 사나이였다는 것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런데 이때 위 왕은 수수께끼를 내며 놀기를 좋아했다. 이때 제나라 사람으로 수수께끼의 도사인 순우곤이 불려온 것이다. 그런데 제나라의 운명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경ㆍ대부들에게 정사를 일임했으나 그들은 도무지 문란하여 질서가 없었고, 주변의 제후들이 제나라를 마구 침범하여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으나 그 어느 누구도 위왕에게 바른 말을 하지 않았다. 이때 순우곤이 용감하게 수수께끼를 빗대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라 안에 큰 새가 있어 대궐 뜰에 멈추어 있습니다. 3년이 되어도 날지 않으며, 또 울지도 않습니다. 왕께서는 이 새가 과연 무슨 새인지 아시옵나이까?” 왕이 대답한다: “이 새는 날지 않으면 그뿐이나 한번 날면 솟아 하늘을 찌르며, 울지 않으면 그뿐이나 한번 울면 천하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리라[此鳥不飛則已, 一飛沖天: 不鳴則已, 一鳴驚人].”
이것이 실상 「골계열전」에 쓰여져 있는 두 사람의 해후에 관한 기술의 전부이다. 앞서 말한 즉묵(卽墨)의 대부를 상(賞)하고 아(阿)의 대부를 팽형(烹刑)에 처한 이야기가 중복되어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전왕세가」에서는 정치적 사건만을 자세히 기술하였으나 그 배후를 밝히지 않았다. 「골계열전」에서 비로소 그 사건의 배후에 순우곤이라는 인물이 있었다는 것을, 수수께끼의 문답으로써 교묘하게 그 전말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대궐의 뜰에 멈추어 3년이 되도록 날지도 않고 울지도 않는 큰 새!’ 순우곤은 ‘3년’이라 말했지만, 그것은 실상 ‘9년’의 세월이다. 그 수수께끼에 대 한 위왕의 대답은 참으로 놀랍다. 그는 그 순간 지기자(知己者)를 만난 것이다. ‘한번 날면 솟아 하늘을 찌르며, 한번 울면 천하의 모든 사람을 놀라게 하리라!’ 이러한 대답이 나오도록 위왕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곧 순우곤의 골계였고 그의 초탈한 인품이었다. 순우곤이라는 인물에 감화를 받아 위왕은 크게 뉘우쳤고 크게 변신했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순 우곤은 위왕에게서 직하를 따내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위왕이 순우곤의 기지(奇地)로 초나라를 물리치자 위왕은 크게 기뻐하여 후궁에 술자리를 마련하고 순우곤을 불러 미주를 하사했다. 그리고 물었다: “선생은 얼마나 술을 마셔야 취할 수 있소[先生能飮幾何而醉]?” 그러자 곤이 대답하여 말한다: “신은 한 말을 마셔도 취하고 한 섬을 마셔도 취합니다[飮一斗亦醉, 一石亦醉].” 위왕은 놀라 묻는다: “선생은 한 말만 마셔도 취한다 했는데, 어찌 한 섬을 마실 수 있단 말이오? 그 이유를 들을 수 있겠소?” 이후로 곤(髡)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아름다운 골계의 언어는 내가 여기다 소개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술이란 작(酌)하는 상대와 그 분위기에 따라 취기가 좌우되는 것이지 결코 고정된 주량은 없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아무리 주량이 세다 한들 그것은 말짱 황이라는 식으로 논리를 유도해나간다. 그리고는 결론 짓는다: “술이란 극도에 이르면 어지럽게 마련이요, 즐거움이란 극도에 이르면 슬퍼지게 마련이요. 만사가 모두 이와 같소. 사물이란 극도에 이르면 아니 되는 것이며, 극도에 이르면 곧 쇠한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요[酒極則亂, 樂極則悲. 萬事盡然, 言不可極, 極之而衰].” 위왕은 이 말을 들은 후로 밤새 술 마시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곤을 제후의 주객으로 삼았다. 그 후 왕실의 주연에는 항상 곤이 위왕을 곁에서 모셨다. 그러니까 순우곤은 위왕을 도덕적 교훈으로 가르친 것이 아니라 골계로써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전국책(戰國策)』 「제책삼(齊策三)」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있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순우곤이 하루 동안에 7명의 인물을 위왕에게 천거하였다. 그러자 위왕은 놀라서 이와 같이 말했다: “그대 와서 내말 좀 들어보오. 과인이 듣기로는 천리사방에서 한 명의 선비만 얻어도 어깨가 부딪힐 만큼 많은 사람을 얻는 셈이요, 백세에 한 분의 성인만 나와도 뒤꿈치가 닿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나오는 셈이라 했는데, 그대는 하루아침에 나에게 선비를 7명이나 추천하였으니 너무 심한 것이 아니요?” 그러자 순우곤은 아주 태연하게 다음과 같이 답한다: “새는 같은 것을 가진 것끼리 모여 살고, 짐승도 같은 발굽을 가진 것끼리 몰려다닙니다. 지금 시호(柴葫)나 길경(桔梗)을 물가에서 찾는다면 몇 세대를 가도 한 뿌리도 캐지 못하지만 고서(睾黍)산이나 양보(梁父)산의 북쪽에 가면 빈 수레를 가지고 가도 가득 싣고 돌아올 수 있나이다. 무릇 세상 사물은 같은 것들끼리 모여 사는 밭이 있습니다. 저 순우곤은 바로 어진 선비들이 모여 사는 밭이올시다. 그러니 왕께서 선비를 저에게서 구하시는 것은 냇가에서 물긷는 것처럼, 부싯돌에서 불을 얻는 것과 같이 지당하고도 쉬운 일입니다. 아직도 추천할 사람이 많은데 어찌 고작 일곱 사람뿐이겠습니까[豈特七士也]!” 바로 순우곤의 이러한 논리가 직하를 탄생시킨 것이다. 자아! 과연 직하란 무엇인가?
제나라 수도 임치의 직하
제나라의 수도 임 동북쪽 약 150킬로 되는 곳에 태산의 위치하고 있다. 전국시대의 이곳은 굴지의 대도시였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한(漢)나라도 그것을 이어받아 수도를 장안(長安)으로 정했는데 한나라 시대에도 임치(臨淄)의 번화함은 수도 장안에 못지 않았다고 한다. 임 치성의 유적으로 7킬로나 되는 성벽이 현존하는데 원래는 전장이 20킬 로 정도였다고 한다. 『전국책(戰國策)』 「제책일」에 보면, 소진(蘇秦)이 조(趙) 나라를 위하여 합종책을 강구하면서 제선왕(齊宣王)을 설득하는 말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임치에는 7만 호가 있습니다. 신이 홀로 계산해보니, 하호에는 남자가 셋이 있게 마련이므로, 삼칠이 21만, 먼 현에서 군대를 징발해오지 않아도 이미 임치의 병사만으로도 21만이 됩니다. 임치는 너무도 부유하고 내실이 있습니다. ……
臨淄之中七萬戶, 臣竊度之, 下戶三男子, 三七二十一萬, 不待發於遠縣, 而臨淄之卒, 固以二十一萬矣. 臨淄甚富而實. ……
이러한 말에서 유추해보면 장정이 21만 갹출(醵出)될 수 있다면 그 도시 인구는 6ㆍ70만은 충분히 될 수 있다고 보아야 한다. 70만의 대도시 임치의 풍요로운 모습은 이어 다음과 같이 표현되고 있다.
임치(臨淄)는 너무도 부유하고 내실이 있습니다. 성내의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음악이나 놀이로 삶을 향유하지 않는 사람이 없지요. 취우(吹竽)【생황 비슷한 악기를 분다】, 고슬(鼓瑟)【25현금을 탄다】, 격축(擊筑)【13현의 쟁 비슷한 악기를 탄다. 좌수로 안현(按絃)하고 우수로는 튕긴다. 거문고 스타일】, 탄금(彈琴), 투계(鬪鷄)【닭싸움 경기】, 주견(走犬)【개달리기 경기에 돈 건다】, 육박(六博)【흑백 각 6개의 말을 쓰는 비슷한 게임】, 답국(蹹踘)【오늘날의 축구의 원조 게임: 축구의 유래는 중국으로 인정됨, 공은 우피(牛皮)로 만들었고 속은 가득 차있었다】 등의 놀이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 없지요. 또 임치의 거리는 어찌나 번화한지 수레는 바퀴가 서로 부딪히고 사람은 어깨가 쏠려 걸을 수가 없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깃이 이어져 휘장을 드 리운 것 같고, 사람들이 소매를 들면 장막을 이루며, 땀을 뿌리면 비 오듯 할 정도입니다. 시민들의 집은 돈목하여 부유하며, 뜻이 고매하고 의기가 양양합니다. 이제 대왕(제왕)의 현명하심과 제나라의 강성함을 합치면 천하에 그 누구도 당할 자가 없습니다.
臨淄甚富而實, 其民無不吹竿ㆍ鼓瑟ㆍ擊筑ㆍ彈琴ㆍ鬪鷄ㆍ走犬ㆍ六博ㆍ蹹踘者. 臨淄之途, 車轂擊, 人肩摩, 連衽成帷, 擧袂成幕, 揮汗成雨. 家敦而富, 志高而揚. 夫以大王之賢與齊之强, 天下不能當.
과장적 수사도 있겠지만, 임치의 변화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말들이다. 우리나라 한양성은 문이 대문과 소문을 합쳐 8개가 있었지만, 임치 성에는 13개의 성문이 있었다. 이 문들 중에 서쪽에 있는 문들 중의 하나가 직문(稷門)이었다【최근의 고고학적 발굴보고에 의하면 직문은 서문(西門)이 아니라 남문(南門)이어야 한다고 한다】. 이 직문 부근에 큰 저택을 즐비하게 지어 천하의 학자들을 초빙한 것이 곧 직하학파인 것이다【서문측계수좌우(西門側系水左右)라고 했는데 그것이 성안인지 성밖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혹자는 후직의 사당이 있는 직산(稷山)의 아래라고도 주장한다】. 이들에게 정부의 관직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학문과 사상에 관해 제각기 연구하고 토론하게만 했다. 이들은 상대부(上大夫)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오늘날로 치면 차관급 정도】. 이곳에 모여든 학자나 사상가를 그들이 사는 지역의 이름을 붙여서 ‘직하학사(稷下學士)’라 불렀던 것이다. 제위왕 때 시작하여 제선왕 때는 천여 명에 이르렀고, 제민왕 때는 만여 명에까지 이르렀다고 하니 그 융섭한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한 학자 밑으로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들기 때문에 수천수만이라는 숫자가 허수는 아니다】. 전국시대의 모든 학술활동의 중심지로서 기능하였으며 이후 중국문명의 모든 학술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 최초의 총장이 순우곤이었고 그 마지막 총장이 순자(荀子)였다.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자! 우리나라의 현재 대기업만 해도 세계적으로 만만한 기업이 아니다. 그리고 그 소득의 잉여 부분을 잘 처리하지 못해 난감해할 때도 있다. 사원들에게 불필요하게 과도한 보너스를 지급한다든지 해서, 하청업체들의 원성을 살 때도 많다. 그러나 대기업 정도가 되면 어떤 효율적인 사회적 환원 시스템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문제를 대기업의 수준에 맞게 과감하게 실천하는 사례가 거의 없는 것 같다. 사회적 환원의 효율적 운영은 그 회사의 신용을 높게 만들며 보이지 않는 사회적 지원효과가 생겨나서 그 기업을 튼튼하게 만들며, 엄청난 선전효과가 발생한다. 그러니까 광고비용만 가지고도 그 몇 배의 효용을 거둘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예를 들면, 내가 모기업의 결정권자라고 한다면, 종로 한복판, 그러니까 지금 종로타워가 들어서있는 그런 상징적인 구심위치에 100세대가 들어가 살 수 있는 아파트와 여러 부대시설을 짓고, 한 세대당 500만 원을 주면서(그 이상 주어도 좋겠지만 학자들에게 큰돈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자유롭게 거주하게 하겠다. 국내ㆍ국외의 학자들이 1년이나 2년 정도의 기간 동안 그곳에 아무 부담없이 와서 생활하면서 서로 토론하고 글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미국 프린스턴대학에는 고등연구원(Institute for Advanced Study)이라는 비슷한 기구가 있다. 세계의 우수한 학자들이 편하게 기거하면서 자유롭게 토론하고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최고급 식당시설, 최고급 운동시설, 사우나시설을 확보해놓고 아주 자유롭게 놀게 해준다면 10년의 세월만 지나도 한국의 직하 태동하기 시작할 것이다. 학자들이 집약적으로 아무 제약 없이 모여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수없이 많은 부대적 프로그램들을 만들어낼 수 있다. 이런 프로그램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문화의 핵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정도의 프로그램은 짭짤하게 운영하면 일 년에 200억만 네트로 써도 충분히 가능하다. 10년이래야 2000억! 무슨 큰 기계설비 하나 사는 돈도 되지 않는다. 헛된 시설투자 할 때도 얼마나 많은가! 이런 투자는 실패가 없는 투자가 아닐까? 하여튼 제나라의 위왕은 이런 비슷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을 저지르게 만든 장본인이 순우곤이었다.
직하학파의 저작물, 관자
혹설에 의하면 직하의 궁은 이미 제환공 시절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하는데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들을 묶는 이념적 토대가 관중(管仲)이라는 탁월한 제나라의 정치가이며 사상가였기 때문이다. 현재 관중의 작으로서 관중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책으로서 『관자(管子)』라는 서물이 현존하고 있다. 그런데 이 책을 관중 본인의 저작으로 간주하기에는 너무도 방대하고 너무도 다양하며 언어의 패러다임이 후대의 어휘나 사건, 문화, 풍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공자 이전의 시대에 이미 한 사람의 사상가에 의한 단일저작이 있는 사례가 거의 없기 때문에 관중의 저작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 사계의 통론이다.
이 『관자(管子)』는 크게는 경언(經言, 9편), 외언(外言, 8편), 내언(內言, 9편), 단어(短語, 18편), 구언(區言, 5편) 잡편(雜篇, 13편), 관자해(管子解, 5편), 관자경중(管子輕重, 19편)이라는 8개의 카테고리로서 분류되는데 이 8개의 카테고리 속에 총 86편의 논문들이 배속되어 있다. 이 중에서 경언ㆍ외언ㆍ내언의 부분은 관중의 정책이나 사적을 중심으로 기술한 일관성이 엿보이며, 특히 경언이라고 이름하여 묶은 모두의 아홉 편은 이 『관자』라는 서물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 핵심적 부분마저도 그 언어를 분석해보면 전국시대의 패러다임이라는 것이 입증된다. 그렇다면 이것은 전국시대의 사람들이 관중의 사상임을 표방하여(물론 관중의 사상으로서 전승되어 내려오는 파편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편찬한 어떤 사상논문집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의 생각으로는 이 『관자』야말로 직하학파에 모인 사람들이 만든 ‘관중기념논문집’같은 성격의 앤톨로지(anthology)라는 것이다. 오늘날 발굴되는 많은 죽간자료에 의해서도 이러한 가설은 점점 구체적인 증거를 확보해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인생에서 한때 『관자』에 미친 적이 있다. 동경대학에서 수학할 때 오노자와 세이찌(小野澤精一) 선생님 슬하에서 『관자(管子)』를 강독하였고, 펜실바니아대학의 앨린 리켓트(W. Allyn Rickett) 교수가 『관자』 영역의 조수로서 나를 초빙하였기 때문에 나는 『관자』를 열심히 읽었다. 나는 그 사상의 깊이와 다양성에 관하여 경악하면서 고전한문의 미로들을 헤매었던 것이다【나는 펜실바니아대학에 한 학기만 머물렀다. 하바드대학에서 엄청난 장학금을 지급하여 나를 불러갔기 때문에 『관자』영역의 꿈은 아쉽게 사라지고 만 것이다. 리켓트 교수는 훵 여우란(馮友蘭)의 『중국철학사(中國哲學史)』를 영역한 더크 보드(Derk Bodde)의 수제자이다】.
전국시대 사상의 알갱이가 담긴 책자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관자(管子)』라는 서물의 첫 줄 하나만 생각해보자! 『관자(管子)』를 펴면 제일 먼저 나오는 편의 이름이 「목민(牧民)」이다. 정약용이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썼는데 그 ‘목민(牧民)’이라는 말은 정통 유가의 책에서 온 말이 아니고 바로 『관자』에서 온 말이다. ‘목민(牧民)’하면 양 떼를 몰고 가는 목자 예수의 모습과 오버랩되어【실상 예수는 목자 노릇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아주 서구적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예로부터 농경은 가축을 기르는 것과 분리되지 않았다. 그래서 소나 양 같은 가축의 방목은 고대중국에서도 흔한 풍경이었다【한문에는 양(羊)과 관련된 글자가 너무도 많다. 아름다울 미(美)자도 큰 양의 아름다움에서 유래된 글자이다】. 하여튼 ‘목민(牧民)’은 ‘치민(治民)’과 같은 뜻이다. 따라서 우선 『관자』의 첫 편의 이름이 ‘목민’이라는 사실은 관중 혹은 직하학파의 관심이 현실적으로 국가를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대한 정치적 주체를 우선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맹자의 경우도 동일하다. 맹자가 아무리 도덕주의(moralism)를 표방한다고 하지만 그의 궁극적 관심은 ‘목민’에 있었다. 공자의 ‘상달(上達)’의 초월적 관심과는 매우 대조를 이루는 것이다. 공자의 초월을 자사는 ‘내재적 초월’로 심화시켰지만, 맹자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어떻게 생을 구하느냐는 것을 그의 일차적 관심으로 삼았다. 그런데 그 「목민(牧民)」 편의 첫 구절은 다음과 같다.
대저 토지를 소유하고서 백성을 먹여 살리려고 하는 자가 힘써야 할 것은 사계절의 때를 존중하여 정치를 운영하는 것이고 지켜야 하는 것은 국가의 창고에 곡식이 가득해야 하는 것이다.
凡有地牧民者, 務在四時, 守在倉廩.
간단한 첫 구절에서 우리는 너무도 많은 정보를 캐낼 수 있다. 일단 주어가 ‘목민(牧民)’으로 되어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함의를 끌어낼 수 있다. ‘목(牧)’의 의미에는 ‘소를 멕인다’와 같은 아주 구체적인 물질적 토대가 명시되어 있다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가축에게 사료를 제공하듯이 백성에게 먹을 것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치민(治民)’과 ‘목민(牧民)’은 그런 의미에서 뉘앙스가 다르다. 후자가 훨씬 더 하부구조적이고 구체적이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목민(牧民)’ 앞에 ‘유지(有地)’라는 한 단어가 더 있다는 것이다. 소를 방목하려면 반드시 땅이 필요하듯이, 백성을 먹이려면 반드시 토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미 ‘유지목민자(有地牧民者)’라는 단어에서 우리가 캐치할 수 있는 것은 이 단어가 ‘영토국가’라는 전국시대의 국가패러다임을 표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토를 확실하게 소유하고 그 안에 거주하는 인민들을 확실하게 먹여살려야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치세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가?
관중(직하학파)은 그것이 ‘사시(四時)’에 있다고 보았다. ‘무재사시(務在四時)’는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힘써야 할 것은 사시에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 ‘사시(四時)’라는 것은 자연률(自然律, the laws of nature)에 대한 준수와 순응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을 운행시키고 있는 절대적인 법칙이 있으며 그것을 ‘도(道)’라고 부르든 ‘성(誠)’이라 부르든, 그 생성의 법칙에 맞추어 인간세의 질서를 운영해야만 문명의 진정한 발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이미 ‘시령(時令)’의 사상과 ‘오행(五行)’의 사상이 배태되어 있고, 그것은 농업생산중심의 문명구조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유지목민자(有地牧民者)’라는 주어는 두 개의 술부를 병행해서 갖는데, 처음 것이 ‘무재사시(務在四時)’이고, 두 번째 것이 ‘수재창름(守在倉廩)’이다. 그것은 사시에 순응하여 정령을 잘 운영하면 국가의 창고에 곡식이 가득차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지켜야 할 것은 창름이다[守在倉廩]’의 본뜻이다. 사시에 어긋나지 않게 정치를 운영하면, 다시 말해서 농번기에 전쟁을 일으킨다든가, 봄에 장정을 노역에 동원한다든가 하는 짓을 하지 않는다면 국가의 재정이 튼튼하게 된다는 것이다. 맹자가 말하는 ‘무항산(無恒産)이면 무항심(無恒心)’이라는 사상의 원형을 바로 우리는 『관자』의 벽두에서 접하게 되는 것이다. 『관자』의 핵심이 이미 전국 패러다임이라는 것은 너무도 명백하다. 너무도 구체적이고 하부구조적이다. 그리고 긴박한 국제상황의 경쟁구조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재사시(務在四時)하여 수재창름(守在倉廩)하면 어떻게 되는가?
국가에 재화가 풍족하게 되므로 멀리서부터 사람들이 모여들어 인구가 증가하고, 토지가 구석구석 편벽한 데까지 다 개간되면 백성들이 자기 사는 곳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國多財則遠者來, 地辟擧則民留處.
그 다음에 또 매우 중요한 메시지들이 이어지고 있다.
국가의 창고가 가득차게 되면 인민들이 예절을 알게 되고, 의식이 풍족하게 되면 인민들이 영과 욕을 구분할 줄 알게 되며, 통치자가 법도에 어긋나지 않게 행동하여 모범을 보이면 인민들의 육친간에 화목이 단단하게 되며, 또 예(禮)ㆍ의(義)ㆍ염(廉)ㆍ치(恥)라는 네 가지 덕목이 사회 윤리로서 긴장을 유지하면 임금의 정령이 쉽게 실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벌을 줄이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지나친 사치나 문명의 기교를 금지시키는 데 있으며, 국가의 질서를 유지시키는 가장 기본적인 원칙은 예ㆍ의ㆍ염ㆍ치라는 사유(四維)를 잘 관리하는 데 있다. 인민을 순화롭게 만드는 기본적인 원칙은 귀(鬼)와 신(神)을 명료하게 대접하고, 산(山)과 천(川)의 정령들을 잘 제사 지내며, 종묘의 제사를 공경하게 받들고, 선조로부터 알고 지내는 사람들을 공손하게 대접하는 데에 있다.
倉廩實,則知禮節;衣食足,則知榮辱;上服度,則六親固;四維張,則君令 行.故省刑之要,在禁文巧;守國之度,在飾四維.順民之經,在明鬼神,祇 山川,敬宗廟,恭祖舊.
이 정도만 읽게 되어도 우리는 『관자(管子)』라는 디스꾸르(discours)의 핵심이 결코 『맹자』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받는다. 치세 즉 목민의 근본은 민중에게 있다. 민중의 욕구를 역이용하여 민중의 도덕을 홍성시킨다는 것이다. 민중에게는 이익추구의 본능적인 심리가 있다. 이 심리를 적극적으로 용인하면서 민생을 충실하게 함으로써 국가를 부강시키는 것이다.
‘민중에게 줌으로써 취한다’는 것이다. 공리적 목민정책이지만 그 목표는 유가적 도덕을 다 포괄하는 어떤 사회윤리를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그 사회윤리를 도덕 그 자체의 힘으로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법’이라는 객관적 질서에 의하여 확보해야 하며, 군주의 사정(私情)이나 인혜(仁惠)에 의존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도(道)’를 유교적 도덕으로 환치하지 아니 하고, 그것을 오히려 ‘법(法)’과 상응시킨다. 노자의 ‘도’가 천지자연의 불인(不仁)한 법칙인 것과 같이 ‘법’도 군주에 우선하는 것이며 자연의 ‘도’처럼 절대적인 그 무엇이지 않으면 안된다. ‘도’가 만물에게 매우 합리적인 법칙인 것처럼 ‘법’도 민중에게 합리적인 것으로 수용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게 ‘도’와 ‘법’이 상응될 때에 만이 진정한 부국강병의 법칙이 확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법가ㆍ유가ㆍ도가 등등의 사유를 포괄하는 어떠한 혼의 사상이며 이것은 직하학파의 다양한 사유를 배경으로 한 것이다. 『관자』에 관하여 내가 할 말이 무척 많으나 전국시대사상의 거대한 샘물이라는 것만 지적하고 넘어가고자 하는 것이다.
맹자에게 영향을 준 것들
맹자는 추나라에서 자랐고 노나라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추(鄒魯)의 지역은 제나라와 문화적 연속선상에 있다. 공자도 제나라에 가서 가장 풍요로운 선진문물을 접했고 알찬 필드웍(fieldwork)을 많이 했다. 우리는 말했다: 『맹자』라는 서물은 양혜왕과의 만남으로부터 시작한다. 양혜왕을 만나기까지, 53세 이전의 역사적 맹가에 관해서는 확실한 정보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만난 53세의 맹가는 너무도 놀라운 달변과 철학과 국가비젼과 대화술의 능자이다. 과연 맹자는 이러한 능력을 어디서 배웠을까? 젊은 시절의 맹자가 바로 이웃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직하의 광경을 무시할 수 있었을까? 나의 가설은 맹자가 38세 전후하여 직하를 방문하였고, 거기서 머물면서 직하학사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엄청난 사상적 자극과 계발을 받았다는 것이다. 공자가 30대의 젊은 시절에 제나라에서 공부하면서 많은 새로운 문물을 접했듯이.
우선 맹자는 순우곤에게서 그 골계와 달변을 배웠을 것이다. ‘사람을 칼로 찔러 죽이고서도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 칼의 죄라고 말하는 것과 뭐가 다르리오?’라고 말하는 맹자의 논법은 순우곤류의 달변이다. 순우곤은 일정한 학파의 예속감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그가 달성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하여 모든 논리와 골계와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는 독심 술을 자유자재로 동원한다. 순우곤은 무엇보다도 비유적 화법을 매우 적재적시에 교묘하게 사용하는 시중의 달인이다. 그러한 천재적 웅변술을 맹자는 순우곤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그리고 맹자는 직하에서 제나라에 전승되어 내려오는 『춘추』의 다양한 해석학을 체득하였을 것이다. 공자가 『춘추』를 작(作)하였다고 하지만 그것은 실상, 공자가 『춘추』를 지은 것이 아니고, 전해내려오는 구전의 노나라 역사를 강술하였다는 뜻일 것이다. 강술과정에서 다양한 해석을 제시하였고 그것이 유파를 형 성하여 내려오다가 후대의 어느 시점엔가 성문화되었을 것이다. 맹자는 제나라에서 독자적인 역사철학을 발전시켰을 것이다.
맹자는 어려서부터 이미 공문(孔門)의 적통을 이었기 때문에 공자ㆍ자사에 대한 아이덴티티를 확고히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공문의 학통은 시대의 조류에 비하면 고루한 보수성이 있었다. 따라서 맹자는 그러한 아이덴티티를 새로운 사상조류와의 교우 속에서 새 푸대에 담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직하야말로 그러한 교육의 신천지였다. 직하학사 중에서도 제후들의 관심을 가장 크게 끈 사람들은 음양가의 인물들이었다.
추연(鄒衍)이 한번 떴다 하면 제후들이 사족을 못쓰고 융숭하게 대접했다고 사마천은 기술하고 있다. 추연이 오자 양혜왕은 교외까지 마중나와 극진한 주빈의 예로써 대우하였고, 조나라에 갔을 때는 평원군(平原君)이 옆으로 걸어가면서 옷자락으로 자리를 쓸어 감히 주빈의 주인행세를 아니 하였고, 연(燕)나라에 갔을 때는 소왕(昭王)이 빗자루를 가지고 길을 쓸면서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고 갈석궁(碣石宮)을 건축하여 그를 머무르게 하면서 몸소 찾아가 스승으로 받드는 예를 다하였다고 사마천은 기술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제후들에게 이토록 대접을 받은 이유는 이들의 담론이 새로웠기 때문이다. 웅대한 우주론의 틀을 수리적 방식으로 이야기하여 과거와 미래를 관통하여 구라를 치기 때문에 환상적이고 어리둥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음양가의 이론은 전국시대의 사상가들에게 우주를 바라보는 거시적 담론의 기초적 틀을 제시했다는 의미에서 매우 새로운 차이트 가 이스트(Zeitgeist, 시대정신)였고 사이언스였다. 추연의 생몰연대를 맹자보다 많이 늦게 잡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맹자가 직하를 처음 방문했을 때 과연 그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추석(騶奭), 추기(騶忌)와 함께 삼추자(三騶子)가 거론되고 있으므로【삼추가 모두 음양가이며 모두 제나라 사람이다】, 맹자는 음양가와도 분명 교류가 있었을 것이다. 맹자는 이들로부터 거대담론을 배웠고, 또 역사의 순환을 거시적으로 바라보는 오덕종시(五德終始) 세계 류의 관을 자기 나름대로 흡수했을 것이다.
그러나 맹자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들은 후대에 도가로 분류되지만 당시에 도가라는 아이덴티티로써만 규정될 수 없는 웅혼한 사상가들이었으니, 그들이 바로 송견(宋鈃)ㆍ윤문(尹文)ㆍ환연(環淵)ㆍ접자(接子. 접여接予)ㆍ전병(田騈) 같은 무리들이다. 이들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저작이 『관자』에 보존되어 있다. 보통 「심술(心術)」 상ㆍ하편, 「백심(白心)」편, 「내업(內業)」편, 4편을 ‘관자사편(管子四篇)’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매우 유니크한 사유체계로서 도가적 저작으로 분류되지만 그러한 규정성이 내가 보기에는 무의미한 것이다. 하여튼 「심술(心術)」 상ㆍ하편만 읽어보아도 『노자도덕경』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생각될 수 있을 정도로 그 사유체계가 유사점이 많다. 그러나 노자가 보다 비도식적이고 웅혼한데 비해 심술은 도식적이고 보다 구체적인 문제의식들이 노출되어 있다. 「심술(心術)」을 펼치면 다음과 같은 언어가 우리의 주목을 사로잡는다.
마음은 우리의 몸에 있어서 군의 위치를 차지한다. 아홉 개의 감각 구멍은 제각기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대소변ㆍ섹스의 직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정부에 있어서 관리가 분화된 것과도 같다. 임금인 마음이 도(道)를 잘 지키고 있으면 아홉 개의 감각구멍은 리(理)를 따라 순조롭게 기능한다. 그러나 임금인 마음이 빔이 없이 기욕(嗜欲)으로 가득차 있으면 눈은 색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귀는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다.
心之在體, 君之位也; 九竅之有職, 官之分也. 心處其道, 九竅循理. 嗜欲 充益, 目不見色, 耳不聞聲.
그러므로 말하노라! 임금된 자가 도를 떠나 버리면, 신하된 자들은 모두 자기의 직분을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왜 말처럼 뛰어가려고 발버둥치는가? 네가 뛰지 말고 말로 하여금 잘 뛰게 하면 그만이다. 어리석은 인간들이여! 왜 새처럼 날려고 발버둥치는가? 새로 하여금 그 날개를 유감없이 퍼득이게 해주면 그만이다. 너 자신이 사물에 앞서서 움직이려 하지 말라! 뒷짐지고 편안하게 사물의 법칙을 관찰하면 그뿐이다.
故曰上離其道, 下失其事. 毋代馬走, 使盡其力; 毋代鳥飛, 使獘其羽翼; 毋先物動, 以觀其則.
함부로 움직이면 그대의 정당한 자리를 잃고, 조용히 사유하면 만물의 이치를 저절로 얻게 마련이다. 도는 결코 우리 일상에서 멀리 있지 아 니 하지만 그것을 다 안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같이 살고 있지만 그를 얻기란 지극히 어렵다. 욕망을 비우라! 그리하면 하느님이 나에게로 들어와 거하시리라. 내 몸의 불결한 것, 정욕을 싹 쓸어버려라! 그리하면 하느님이 편안히 나에게 거하시리라. 사람들은 지혜를 갈망하면서도, 어떻게 지혜를 얻을지를 참으로 생각하는 자는 없도다. 지혜! 지혜! 그 지혜일랑 저 바다 밖으로 내던져버려라! 지혜로 하여금 나를 빼앗지 않도록 하라! 지혜를 구하는 자는 지혜 속에 사는 자에 영원히 미치지 못한다.
動則失位, 靜乃自得. 道不遠而難極也, 與人並處而難得也. 虛其欲, 神將入舍; 掃除不潔, 神乃留處. 人皆欲智, 而莫索其所以智乎. 智乎! 智乎! 投之海外, 無自奪. 求之者不得處之者.
대저 바른 사람(성인)은 지혜를 구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인은 자신을 비우고 ‘무위(無爲)’할 수 있는 것이다. 허무하고 형체가 없는 것, 그것을 도(道)라 일컫고, 만물을 화육(化育)케 하는 것, 그것을 덕(德)이라 일컫는다.
夫正人無求之也, 故能虛無. 虛無無形謂之道, 化育萬物謂之德.
이 놀라운 문헌으로부터 우리는 노자의 논리가 새로운 개념적 틀 속에서 자사의 논리와 융합되어 있는 상황을 발견한다. 노자가 마이너하게 다룬 ‘심(心)’이라는 개념을 도보다도 더 중요한 인간학적 과제상황으 로 전면으로 내밀고 있다. ‘심(心)’은 우리 ‘몸[體]’의 군주이다. 그리고 모든 신체의 기관들, 그 감각기능들은 국토ㆍ신하ㆍ인민 등등의 다양한 직분을 부여받는다. 군주인 심(心)은 허정(虛靜)의 상태에 있을 때 신체의 각 기관들은 외부적 간섭이 없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기능을 충분히 발현할 수 있다. 여기 인용된 짧은 문장 속에서도 ‘심(心)’과 ‘(기욕嗜欲, 욕망)’의 문제, ‘외(外)’와 ‘내(內)’의 문제, ‘허(虛)’와 ‘무(無)’, ‘동(動)’과 ‘정(靜)’, ‘도(道)’와 ‘덕(德)’, 그리고 ‘지(智, 지식)’를 거부하는 반주지주의(anti-intellectualism)적 경향, 그리고 ‘허정(虛靜)’을 중시하는 주정주의(主靜主義, quietism)적 경향 등등을 읽어낼 수 있는데, 그것을 또다시 ‘가리(可離), 비도야(非道也)’라는 자사의 ‘수신(脩身)’의 논리와 융합시키고 있다. 맹자에게 있어서도 ‘이목지관(耳目之官)’과 ‘심지관(心之官)’의 대비는 여기서 말하는 군신의 기능과 비슷한 논지를 가지고 있으며, 맹자가 인간의 ‘심(心)’의 보편성과 능동성을 강조하는 근원적인 모티프는 여기 「심술」편의 논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 성인은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공허하게 하여 기(氣)를 기를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맹자의 호연지기론과 상통한다. 맹자는 이들의 기(氣)의 논리와 자사의 성(誠)의 논리를 융합시켜 ‘호연지기’라는 매우 신비로운 사상을 대장부론과 함께 제시했던 것이다. 「심술」 하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신체의 물리적 외관을 반듯하게 하지 않으면 덕이 깃들지 않는다. 인간의 내면이 정결하고 순결하지 않으면 마음은 다스려지지 않는다. 외 관의 형체를 바르게 하고 내면의 덕을 쌓아 나가면, 만물이 모두 정당하게 제 모습을 얻어 날개를 퍼득이듯이 스스로 그러하게 발전해나가고 신묘한 기운도 제한을 알지 못한다. 그리하여 천하의 모든 사태를 명료히 파악하고 천지사방의 모든 이치에 통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말한다: 외물(外物)로써 신체의 감각기능을 어지럽히지 말고, 신체의 감각기능으로써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 이러한 수양을 ‘내덕(內德)’이라고 부른다.
形不正者, 德不來; 中不精者, 心不治. 正形飾德, 萬事畢得, 翼然自來, 神莫知其極. 昭知天下, 通於四極. 是故曰無以物亂官, 毋以官亂心. 此之謂內德.
그러므로 인간의 의기(意氣)가 정해진 연후에 신체는 바름으로 돌아간다. ‘기(氣)’라는 것은 몸[身]을 충실케 하는 것이요, ‘행(行)’이라는 것은 바름의 의로움이다. 몸의 충실함이 아름답지 아니 하면 마음이 바르게 작동할 수 없고, 행동이 바르지 아니 하면 백성들이 복종하지 아니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하늘 그대로의 모습과 같아서 사사로이 덮지 아니 하고, 땅 그대로의 모습과 같아서 사사로이 싣지 아니 한다. 사사로움이야 말로 천하를 어지럽히는 근본이다!
是故意氣定然後反正. 氣者, 身之充也; 行者, 正之義也. 充不美, 則心不得; 行不正, 則民不服. 是故聖人若天然無私覆也, 若地然無私載也. 私者, 亂天下者也.
‘기자(氣者), 신지충야(身之充也) 행자(行者), 정지의야(正之義也)’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맹자의 호연지기론의 프로토타입을 발견할 수 있다. 또 「백심(白心)」 편에는 이런 말이 있다. ‘백심(白心)’이란 문자 그대로 마음을 하얗게 한다는 뜻이니, 마음 담박하게 하여 허정(虛靜)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타인이 나에 대하여 좋게 말할지라도 그 말을 듣지 말지어다. 타인이 나에 대하여 나쁘게 말할지라도 그 말을 듣지 말지어다. 자신의 신념을 견지하면서 그것이 스스로 평가될 때까지 기다려라! 마음을 텅 빈 채로 남겨두어라. 그것을 두 쪽으로 갈라 판단하려 하지 말라! 맑은 채로 스스로 깨끗해지도록 내버려두어라! 타인의 무책임한 언론에 귀를 기울여 실제로 사태가 그렇게 된 것처럼 착각하지 말라! 사태를 살펴 증험할 뿐, 타인의 변론에 귀를 기울이지 말라. 만물이 나의 신념과 일치하는 그런 때가 오면 아름다움과 추함은 스스로 드러나게 마련이다.
人言善, 亦勿聽; 人言惡, 亦勿聽. 持而待之, 空然勿兩之, 淑然自清. 無以旁言爲事成, 察而徵之, 無聽辯. 萬物歸之, 美惡乃自見.
이런 구절을 읽으면 맹자의 평소 인생관이나 신념을 견지하는 태도에 깔려있는 철학을 듣는 것 같다. 그리고 「내업(內業)」편의 첫머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만물의 정기인 음양이 교합하여 끊임없는 생성이 이루어진다. 아래(땅)로는 오곡을 생성하고 위(하늘)로는 반짝이는 별들이 생성된다. 천지 지간에 가득 차 흐르는 생명의 기운, 그것을 우리는 ‘귀신(鬼神)’이라 부른다. 그 귀신을 가슴에 다 품은 자를 우리는 ‘성인(聖人)’이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백성의 기는 높게는 하늘에 다다르고, 깊게는 저 깊은 연못에 들어가며, 넓게는 저 바다에 펼쳐지지만 끝내 그것은 나 자신 속에 있는 보편적인 것이다.
凡物之精, 比則爲生. 下生五穀, 上爲列星, 流於天地之間, 謂之鬼神. 藏 於胸中謂之聖人. 是故民氣, 杲乎如登於天, 杳乎如入於淵, 淖乎如在於海, 卒乎如在於己.
이런 언어들은 맹자의 호연지기를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하여튼 맹자는 이들과의 교섭 속에서 유교의 새로운 심성론적 바탕을 구축했을 것이다. 그리고 묵자(墨子)의 공리주의적 겸애론(兼愛論)과 양주의 감각론적 위아주의(爲我主義)를 배척하고 공자 - 증자 - 자사의 적통을 고수한다고 하는 새로운 명분과 사상적 투쟁의 무기를 획득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제나라에 가는 맹자의 갈등
제위왕(齊威王)이 위대한 치세를 마감하고 세상을 뜬 것은 바로 맹자가 양혜왕을 만난 그 해의 일이다(BC 320). 그리고 그 이듬해에 제선왕(齊宣王)이 즉위하여 제나라의 통치를 시작했고 직하를 융성하게 만들려는 의욕에 차있을 바로 그 시점에 양혜왕이 죽는다. 그리고 맹자는 상갓집개가 되고 만다. 이때를 놓칠세라 제선왕은 맹자를 초빙한 것이다. 제선왕의 나이는 확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아마도 맹자와 비슷한 나이였지만 약간 맹자보다 어렸을 것이다. 그러니까 양혜왕은 노구에 죽어가는 몸이었고 제선왕은 의욕에 차, 이제 막 통치를 시작하려 할 때 맹자를 만나는 것이다. 맹자는 만감이 교차했을 것이다.
맹자는 제나라의 어디로 갔을까? 생각해보라! 300여 명의 식솔(食率)을 거느린 맹자가 살 곳은 직하밖에는 없다. 그러나 맹자는 직하의 일원으로 취급받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직하그룹의 한 ‘멤버’로 취급되는 것을 맹자는 극히 싫어했다. 많은 사람들이 『맹자』를 읽을 때, 이런 미묘한 텐션을 고려하지 않는다. 나의 가설에 의하면 맹자는 직하에 두번 째 간 것이다. 처음에는 무명인으로 배우러 갔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맹자』를 피상적으로 앞대목만 읽고, ‘양혜왕과 맹자의 만남’이 가장 대표적인 대목인 것처럼 생각하는데 양혜왕과 맹자의 대화는 전편에서 5장에 그치는 것이다. 맹자의 문답의 메인 테마는 제선왕과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양혜왕」편만 해도 제선왕과의 대화는 12장에 이르고 있다. 맹자는 제선왕이 통치하는 제나라에서 자그마치 7년을 머물렀다.
앞서 말했지만 맹자는 왕이 모든 예의를 다하여, 맹자의 사상을 실천 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이며 초청할 때에 비로소 그에 응한다. 그는 왕과 군신관계를 원하지 않는다. 그가 원하는 것은 주ㆍ객, 즉 주ㆍ빈의 관계이며 대등한 친구로서의 만남이다. 아무리 대국의 군주[大國之君]라 할지라 도 현인을 친구로 대할 때만이 진정으로 그 덕(德)을 공유할 수 있게 된다. 그가 원하는 것은 같은 수준의 내면적 덕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천위(天位)를 공유하고, 천직(天職)을 더불어 다스리고, 천록(天祿)을 같이 먹는 것이다(「만장」 하3). 그러한 수준에까지 이르지 아니 하면 왕자의 존현(尊賢)의 자세라 할 수 없다.
제나라에 두 번째로 가는 맹자에게 미묘한 갈등이 있을 수 있었다. 그가 젊은 시절에 만난 사람들이 대부분 계속해서 직하에 머무르고 있 었기 때문이다. 물론 순우곤은 맹자가 제선왕을 만나러 갔을 때도 직하의 총장이었다. 맹자와 순우곤의 대화는 『맹자』라는 서물에 두 번 기록 되고 있다(「이루」 상17, 「고자」 하6). 물론 맹자의 관점에서 기록된 문헌이므로 순우곤의 특색이 충분히 살아있지 아니 하지만 그래도 순우곤의 관점은 매우 날카롭다. 우리나라 번역자들이 마치 순우곤이 맹자의 수하의 제자인 것처럼 번역하고 있는데 가소로운 무지의 소치이다. 순우곤은 맹자보다 한 세대가 위인 사람이다. 순우곤은 맹자에게 ‘하게’ 정도의 말투를 사용했을 것이다. 맹자는 직하의 사람들이 상대부의 지위를 부여받은 데 반하여 제국 제1위의 상경, 국정의 최고고문의 지위를 받았다.
맹자와 제선왕의 대화를 잘 살펴보면 맹자는 비교적 정중하다. 양혜 왕과의 대화처럼 직설적으로 쑤시고 들어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달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양혜왕과의 체험을 통해 맹자도 약간은 더 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왕도의 사상은 인간의 심성적 근거를 파고드는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제선왕은 우리나라 조선조의 선조(宣祖)와 같은 선(宣) 자 돌림이라서 그런지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일지도 모르겠다. 선조 때도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학자군이 융성했다. 그리고 선조 또한 영민한 인물이었으며 정치적인 비젼도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판단에 있어서 항상 유보적인 자세를 유지하다가 실기(失期)하고 만다. 제선왕은 선조가 전란으로 나라를 말아먹는 데 비하면, 제나라를 다시 강성하게 만들고 직하의 학자들에게 자유로운 강학(講學)의 기회를 주었다. 제선왕 치세하에서 전국시대의 백가쟁명의 자유로운 학문풍토가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맹자를 7년이나 머물게 했지만 결국 맹자의 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지 못했다. 제선왕은 독자 여러분들이 잘 아는 ‘계명구도(鷄鳴狗盜)’의 식객을 거느린 맹상군(孟嘗君)의 큰아버지뻘 되는 사람이다. 맹상군의 성도 전씨(田氏)이며, 정곽군(靖郭君) 전영(田嬰)의 아들이다. 마릉의 전투에서 전기(田忌)와 함께 전공을 세운 전영은 제위왕의 막내아들로서 제왕의 이복동생이다. 자아~ 이제 독자들 스스로 맹자와 제선왕의 대화를 음미해가면서 머릿속에 스스로의 그림들을 그려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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