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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맹자한글역주, 공손추장구 하 - 3. 어찌 군자가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랴 본문

고전/맹자

맹자한글역주, 공손추장구 하 - 3. 어찌 군자가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랴

건방진방랑자 2022. 12. 16. 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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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어찌 군자가 재물에 마음을 빼앗기랴

 

 

2b-3. 맹자와 여로를 같이 한 제자 진진(陳臻)이 맹자께 여쭈어 말하였다: “얼마 전에 제나라에 계실 때에는 왕이 겸금(兼金)좋은 순금이라는 뜻인데, ‘()’은 보통 것보다 값이 두 배 나간다는 뜻에서 붙은 것이다. 그런데 전국시대 때 ()’이라는 것이 오늘 우리가 말하는 황금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라는 것은 동()을 가리킨 것이다. 무게를 달아 화폐가치로 통용되었다. 혹자는 ()’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동일 확률이 더 크다 100()1()=20() 혹은 24()을 선물로 주었는데 받지 아니하셨고, ()나라에서는 70일을 선물 했는데 받으셨고, ()나라에서도춘추시대의 설()은 이미 제나라에게 망해 없어졌다. 여기의 설은 제나라 정곽군(靖郭君) 전영(田嬰)의 봉읍이며 춘추시대의 설나라가 아니다. 현재 산동성 등현(滕縣) 동남 44, 1b-14를 참조 50일을 선물했는데 받으셨습니다.
2b-3. 陳臻問曰: “前日於齊, 王餽兼金一百而不受; 於宋, 餽七十鎰而受; 於薛, 餽五十鎰而受.
 
만약 전일(前日)에 받지 않은 것이 옳은 일이라고 한다면 금일(今日)에 받은 것이 틀린 일입니다. 만약 그 반대로 금일 받은 것이 옳은 일이라고 한다면 전일에 받지 않은 것이 틀린 일입니다. 이 양자 중에서 어느 하나는 반드시 선생님의 오류에 속하는 것이겠지요.”
前日之不受是, 則今日之受非也; 今日之受是, 則前日之不受非也. 夫子必居一於此矣.”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그렇지 않다. 두 경우가 다 옳은 것이다. 송나라에 있을 때는 나는 멀리 가는 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여행을 떠나는 손님에게 전별금을 주는 것은 예의에 속하는 상식이다. 송나 라의 임금이 나에게 정중하게 이것은 변변치 않지만 송별금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나에게 건네주는데, 내가 어찌 아니 받을 수 있단 말이냐? 그리고 또 설나라에 있을 때는 내가 신변을 보호해야만 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설나라의 군주가 나에게 정중하게 신변위험이 있다고 들었나이다. 이 돈으로 무기와 무사를 장만하는 데 쓰시옵소서라고 말하면서 나에게 건네주는데, 내가 어찌 아니 받을 수 있단 말이냐?
孟子曰: “皆是也. 當在宋也, 予將有遠行. 行者必以贐, 辭曰: ‘餽贐.’予何爲不受? 當在薛也, 予有戒心. 辭曰: ‘聞戒. 故爲兵餽之,’ 予何爲不受?
 
그러나 제나라에 있을 때는 상황이 달랐다. 내가 돈을 필요로 하지도 않았고 돈을 받을 명분도 없었다. 정확한 명분이 없이 돈을 받는다면 그것은 뇌물에 속하는 것이다. 유덕의 군자로서 어찌 뇌물로 그 마음이 더럽혀진다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若於齊, 則未有處也. 無處而餽之, 是貨之也. 焉有君子而可以貨取乎?”

 

이것은 제나라를 떠나, 송나라, 설나라를 거쳐 추나라로 돌아온 후에 이루어진 대화이다. 진진은 제나라로부터 추나라까지 여로를 같이 한 제자이다. 아마도 맹자를 가까이서 평생 모신 제자 중의 한 사람일 것이다. 2b-10에 자()로 호칭되는 것을 보면 그도 제자를 거느린 중후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중국의 사학자 치엔 무(錢穆, 1895~1990)는 이 기사가 맹자가 젊은 날에 제1차로 제나라 갔을 시기의 사건이며 여기서의 은 제선왕이 아닌 제위왕이라고 본다. 치엔무의 고증은 그 나름대로의 논리를 가지고 있지만 근원적으로 맹자의 생명을 구성하는 연대가 나와 다르기 때문에 전혀 여기의 논의에 적합하지 않다. 여기의 은 분명 제선왕이다. 제왕이 100, 송왕(그때 송도 칭왕했다)70, 설의 군주가 50일을 주었다면, 나라의 싸이즈로 볼 때, 제나라의 대접이 빈곤했다고도 볼 수 있고, 송ㆍ설의 대접이 매우 후했다고 볼 수 있다. 세 경우가 다 떠날 때 받은 송별금이다. 그런데 문장의 흐름상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송ㆍ설의 경우는 왕이 직접 정중하게 말하면서(辭曰) 건넨 반면, 제나라에서는 그러한 친밀한 해후가 없이 돈만 보내온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맹자는 기분이 나빴을 것이다.

 

전국시대의 유세객들이 먹고사는 방법 중의 하나가 전별(餞別)’이었다. 그 돈을 얼마나 많이 받느냐 하는 것이 그들의 삶의 성공여부와 걸리는 문제였다. 그래서 벼라별 치사한 작전을 다 썼던 것이다. 그러나 맹자의 원칙은 명료하다: ‘정확한 명분이 없이는 군자는 돈을 받아서는 아니 된다. 어떠한 경우에도 뇌물로써 마음이 더럽혀져서는 아니 된다.’ 맹자는 역시 당당한 사표의 모습을 남겨주었다. 그러나 그가 제선왕과 이별할 때는 전별금도 받지 않고 쓸쓸하게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매우 슬픈 이별이었다. 그 자세한 정황은 뒤에 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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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맹자

전문 / 본문

중용 강의

논어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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