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본성은 선하다
6a-6. 공도자가 맹자에게 말하였다: “고자는 ‘성(性) 그 자체에는 선(善)도 없고 불선(不善)도 없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어떤 다른 학파의 사람은 이와 같이 주장합니다: ‘성(性)은 선하게 될 수도 있고, 불선하게 될 수도 있다【沃案: ‘선을 행할 수도 있고 불선을 행할 수도 있다’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문왕(文王)ㆍ무왕(武王)과 같은 성군이 일어나면 인민은 선(善)을 좋아하고, 유왕(幽王)ㆍ려왕(厲王)과 같은 폭군(暴君)이 일어나 설치게 되면 인민 또한 포학(暴虐)을 좋아하게 된다.’ 6a-6. 公都子曰: “告子曰: ‘性無善無不善也.’或曰: ‘性可以爲善, 可以爲不善; 是故文ㆍ武興, 則民好善; 幽ㆍ厲興, 則民好暴.’ 그런데 또다른 학파의 사람들은 이런 주장을 합니다. 그 성이 근본적으로 선(善)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그 성이 근본적으로 불선(不善)한 사람도 있다. 생각해보라! 요(堯)임금과 같은 성군을 임금으로 모시는 시대에도 순(舜)의 이복동생인 상(象)과 같은 악인이 있었고, 고수(瞽瞍)와 같은 사악한 인간을 아버지로 두었는데도 순과 같은 선한 인간이 있었고, 주왕(紂王)과 같은 희대의 폭군을 조카로 두었고, 또한 임금으로 모셨는데도, 미자계(微子啓)와 왕자비간(王子比干)과 같은 현인이 있었다【미자계ㆍ왕자비간이 모두 주왕의 삼촌이 되는 셈인데, 『사기(史記)』에 의하면 비간은 삼촌이지만 미자계는 주왕의 이모형(異母兄)이다. 문장기법상 같은 반열로 처리한 것이다. 2a-1에 기출】. 그런데 지금 선생님께서는 ‘인간의 성(性)은 선(善)하다’라는 한 가지 주장만을 고집하시오니, 그렇다면 나머지 사람들은 모조리 틀렸다는 것일까요?” 或曰: ‘有性善, 有性不善; 是故以堯爲君而有象, 以瞽瞍爲父而有舜; 以紂爲兄之子且以爲君, 而有微子啓, 王子比干.’ 今曰‘性善’, 然則彼皆非與?”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물론 인간의 성에는 불선(不善)한 측면이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에 다양한 학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본래적 정감의 바탕으로 돌아가서 생각해보면 인간은 누구든지 선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성선(性善)을 주장하는 근거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인간은 명백하게 불선(不善)한 행동을 하지 않느냐고. 그러나 그것은 원래 성(性)의 자질의 죄는 아니다【여기 자질은 ‘재(才)’인데, 가공되지 않은 재질, 초목의 초기상태[草木之初]를 기준으로 하는 바탕이다】. 외물에 이끌리어 일시적으로 잘못된 것일 뿐이다. 孟子曰: “乃若其情, 則可以爲善矣, 乃所謂善也. 若夫爲不善, 非才之罪也. 이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간이라면 예외없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요, 수오지심(羞惡之心) 또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요, 공경지심(恭敬之心) 또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요, 시비지심(是非之心) 또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다. 측은지심은 인(仁)의 발로이며, 수오지심은 의(義)의 발로이며, 공경지심은 예(禮)의 발로이며, 시비지심은 지(智)의 발로이다. 인ㆍ의ㆍ예ㆍ지라 하는 것은 밖으로부터 나에게 덮어씌워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沃案: 여기 ‘삭(鑠)’은 녹인다. 아름답게 꾸민다. 도금[鑠金]한다 등의 뜻이 있다.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다’에 해당되는 원문은 ‘고유지(固有之)’이다】. 단지 사람들이 그것을 자각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惻隱之心, 人皆有之; 羞惡之心, 人皆有之; 恭敬之心, 人皆有之; 是非之心, 人皆有之. 惻隱之心, 仁也; 羞惡之心, 義也; 恭敬之心, 禮也; 是非之心, 智也. 仁義禮智, 非由外鑠我也, 我固有之也, 弗思耳矣. 故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그대가 갈구하면 할수록 얻어지는 것이요, 그대가 방치하고 버리면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선과 악, 현(賢)과 불초(不肖)의 차이가 두 배, 다섯 배, 혹은 헤아릴 수 없도록 벌어지게 되는 것은 그에게 원래 고유한 재질을 충분히 발현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나만의 사적 의견이 아니다. 曰: ‘求則得之, 舍則失之.’ 或相倍蓰而無算者, 不能盡其才者也. 『시』【대아 「증민(烝民)」】에 다음과 같은 유명한 노래 구절이 있다: ‘하느 님께서 백성을 내시사, 사물이 있으면 항상 고유한 법칙이 같이 있도록 하시었다. 인간이란 항상스러운 성품을 잡고 있게 마련이니,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는도다!’ 『詩』曰: ‘天生蒸民, 有物有則. 民之秉夷, 好是懿德.’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이 시를 지은 사람은 사람의 도리를 깊게 깨달은 자이로다! 그래서 사물이 있으면 반드시 그에 고유한 법칙이 있다고 하였고, 백성들이 항상 성품을 견지하려 하기 때문에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한다고 한 것이다.’ 이 시는 인간의 성이 본래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다.” 孔子曰: ‘爲此詩者, 其知道乎! 故有物必有則, 民之秉夷也, 故好是懿德.’” |
본문의 해석을 통하여 충분히 설명하였으므로 구구한 주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의 주장에 관한 맹자 본인의 매우 포괄적이고 간략한 설명으로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맹자의 성선(性善) 주장 외로, 고자의 성무선무불선(性無善無不善), 그리고 ‘혹(或)’으로 표기된 두 다른 학파의 설이 있는데, 주희는 이를 모두 고자학설의 변용으로 처리하고 있으나, 당시 다양한 성론의 학파가 엄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러한 정황과 관련하여서는 왕충(王充)의 『논형(論衡)』의 「본성(本性)」 편을 참고하여도 좋을 것이다. 여기 중요한 사실은 성(性)을 악(惡)으로 실체화하여 규정하는 논의는 없다는 것이다.
맹자(孟子) | 성선(性善) |
고자(告子) | 성무선무불선(性無善無不善) |
혹왈(或曰) | 성가이위선(性可以爲善), 가이위불선(可以爲不善) |
혹왈(或曰) | 유성선(有性善), 유성불선(有性不善) |
그러나 본문에 즉하여 보면 맹자도 나머지 의견들과 근본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성(性)을 존재론적으로, 전적으로 선(善)으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말하는 ‘성선(性善)’은 ‘가이위선(可以爲善)’일 뿐이라는 입장을 확실히 해놓고 있다.
맹자의 성선(性善) | 가이위선(可以爲善) |
그것 또한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함장(函丈)일 뿐이다. 따라서 ‘구사(求舍)’의 후천적 행위가 ‘득실(得失)’의 주체가 된다. 단지 그 가능성을 가능성으로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유물유칙(有物有則)’의 ‘칙(則)’으로 생각하는 것만 다르다.
문중(文中)에 ‘정(情)’이라는 말은 ‘감정(感情, sentiments)’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고유한 정황(original situation)의 의미이다. 그리고 ‘재(才)’도 인간의 재질(才質)의 초기조건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단(四端)의 문제는 「공손추」 상6장과 같이 대조해보는 것이 좋다. 예(禮)에 해당되는 ‘사양지심(辭讓之心)’이 여기는 ‘공경지심(恭敬之心)’으로 되어있다. 감정의 상태를 기술하는 말들이 전문용어화 되어있지 않았었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리고 ‘측은지심(惻隱之心), 인야(仁也)’라고 되어있어, ‘지단(之端)’이 결락되어 있는데, 이것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서는 아니 된다. 측은지심이 곧 인의 덕 그 전체와 등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인야(仁也)’는 ‘인지단야(仁之端也)’의 축약태로 보아야 한다. ‘유물유칙(有物有則)’도 ‘물이 있고, 칙이 있다’라는 식으로 병렬되는 문장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물(物)이 있으면 반드시 칙이 있다’는 식으로 조건절을 가진 하나의 연속체로 이해하여야 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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