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전심치지(專心致志)
6a-9.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제선왕의 지혜롭지 못함을 탓할 건덕지도 없다. 천하에 아주 잘 자라나는 식물이 있다 할지라도, 하루만 햇빛을 쬐어주고 열흘 동안 계속해서 어둡고 차가운 그늘에 있게 하면 잘 자라날 길이 없다. 내가 그를 만나는 기회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내가 물러나가기만 하면 곧 어둡고 차가운 그림자들이 그를 에워싸 버린다. 난들 어떻게 그의 양심의 싹을 틔우게 할 수 있단 말인가? 6a-9. 孟子曰: “無或乎王之不智也. 雖有天下易生之物也, 一日暴之, 十日寒之, 未有能生者也. 吾見亦罕矣, 吾退而寒之者至矣, 吾如有萌焉何哉? 지금 바둑을 한 예로 든다 해도, 그것의 술수라 해봤자 결국 작은 놀이의 술수밖에 되지 않는 것이지만, 마음을 집중하고 뜻을 거기에 다 바치지 않으면 결코 제대로 배울 수가 없다. 혁추(弈秋)【‘혁(弈)’은 바둑을 잘 두는 명인에게 공통으로 쓰는 접두어, ‘추(秋)’가 이름이다】는 나라를 통틀어 바둑을 가장 잘 두는 명인이다. 혁추로 하여금 두 사람에게 바둑을 가르치도록 했다고 하자! 한 사람은 마음을 집중하고 뜻을 이룰 수 있도록 혁추의 가르침을 잘 듣고 존숭하였다. 今夫弈之爲數, 小數也; 不專心致志, 則不得也. 弈秋, 通國之善弈者也. 使弈秋誨二人弈, 其一人專心致志, 惟弈秋之爲聽. 또 한 사람은 비록 혁추의 가르침을 듣기는 하였지마는, 마음 한 구석에서 곧 귀한 백조 고니가 날아올 것이라고 예상하여 활시위를 당겨 쏠 생각만 하고 앉아 있었으니, 비록 더불어 같이 배웠다 한들 바둑공부에 전념한 사람의 성취를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이 사람의 총기가 앞 사람에게 떨어지기 때문일 것인가? 나는 말한다: 결코 그렇지 아니 하다.” 一人雖聽之, 一心以爲有鴻鵠將至, 思援弓繳而射之, 雖與之俱學, 弗若之矣. 爲是其智弗若與? 曰: 非然也.” |
여기 ‘왕(王)’이라고만 표현하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냥 일반화된 이야기로서 무미건조하게 해석해버리고 마는 경향이 있다. 조기의 주에도 이 ‘왕(王)’은 ‘제왕(齊王)’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명기하여 놓았고, 또 「고자」상 전체가 제나라를 배경으로 한 것이므로, 이것은 제선왕을 구체적으로 지칭하면서 맹자의 쓰라린 실존적 체험, 그 회한을 토로한 것이다. 조기는, 당시 사람들이 제선왕이 지혜롭지 못함에 대하여 맹자가 잘 보좌하지 못한 것을 나무라는 것에 관하여 맹자가 변명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그러한 변명은 결코 아니다.
맹자에게 있어서 제선왕은 왕도의 유일한 희망이었으며 또 내심으로 서로를 사랑하는 친구였으며, 미운 정 고운 정 들대로 들었다. 그러나 제선왕이 ‘부지(不智)’한 것은 구조적인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말함으로써 인간의 허약함 그 자체를 탓하고, 친구 선왕에 대한 동정과 애련(哀憐)의 정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일폭지(一日暴之), 십일한지(十日寒之)’라는 이 한마디는 모든 권좌의 한계 상황을 폭로하고 있는 것이다. 하루 잠깐 햇빛이 들었다 한들, 열흘 동안 계속 총신과 간신들의 차갑고 어두운 그림자가 휘덮어 버리는 권좌, 그 권좌에 앉아있을 수밖에 없는 왕이 자신의 양심, 왕도의 지향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은 전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맹자는 훗날 쓸쓸하게 중원의 역사가 자기가 생각한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제선왕과 꿈꾸었던 옛날을 회상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빛이었지만, 과연 그 빛이 그를 둘러싼 어둠을 이길 수 있었던가?
그리고 갑자기 화두를 돌려, 바둑과 같은 하찮은 잡기를 몸에 익히는 것도 고도의 정신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을 언급함으로써 인간의 선의 실 현, 그리고 왕도의 실현과 같은 거대한 인간세의 역사는 특별한 집중과 수련과 헌신과 의지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위대한 담론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 우리가 명심해야 할 사실은 인간의 ‘선(善)’은 끊임없이 햇빛을 골고루 쬐고 수분과 통풍의 조건을 맞추면서 가꾸어야 건강하게 존속하는 난초처럼 끊임없는 가꿈 속에서만 성취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단에 관한 이기론적 논쟁을 아무리 잘 한다 한들 그것은 선의 실천과는 무관한 사태이다. 퇴계(退溪)의 꽁무니를 잇는 조선 향유(鄕儒)들의 한심한 갑론을박의 작태는 사상사적으로 다루어질 별다른 가치가 없다. 여기 맹자가 역설하고 있는 것은 사단(四端)의 리(理)에 대한 본체론적 가설이 아니라, ‘집중된 공부’를 통해서만 인간의 선은 달성된다고 하는 것이다. ‘공부(工夫, gong-fu)’란 몸(Mom)에로의 선의 축적이다. 인간의 지력(智力)의 보편성이 확보된다 할지라도, 즉 성인과 내가 동류라 할지라도, 중요한 것은 오늘 내가 위성(爲聖)의 공부를 집중해서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일 뿐이다. ‘조즉존(操則存), 사즉망(舍則亡)’이라고 하는 테제의 또 하나의 전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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