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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더 중요한 의지에 대해
6a-10.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물고기는 맛있기에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웅장(熊掌)【곰의 손바닥 요리. 곰의 발바닥은 웅번(熊蹯)이라고 한다. 물고기든 웅장이든 모두 미식가들의 최상의 기호품이었다. 맹자 당대에 이미 중국요리가 엄청난 고도의 발전을 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맛있기에 내가 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나는 물고기를 희생하고 웅장을 취할 것임이 분명하다. 생명을 유지한다는 것, 즉 산다는 것, 이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의(義)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얻을 수가 없는 상황이라고 한다면, 나는 산다는 것을 희생하고서라도 의(義)를 취(取)해야 할 것이다. 孟子曰: “魚, 我所欲也; 熊掌,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魚而取熊掌者也. 生, 亦我所欲也; 義, 亦我所欲也, 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 사는 것은 내가 소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소망하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간절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구차스럽게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죽는 것, 그것은 또한 내가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나 싫어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도 더 극심한 것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죽음의 환난을 구차스럽게 피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生亦我所欲, 所欲有甚於生者, 故不爲苟得也; 死亦我所惡, 所惡有甚於死者, 故患有所不辟也. 如使人之所欲莫甚於生, 則凡可以得生者, 何不用也? 使人之所惡莫甚於死者, 則凡可以辟患者, 何不爲也? 만약 인간이 소망하는 것이 사는 것보다 더 간절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면, 무릇 인간은 살기 위해서 못하는 짓이 없을 것이다. 만약 인간이 싫어하는 것이 죽는 것보다도 더 극심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한다면, 무릇 인간은 죽음의 환난을 회피하기 위하여 못하는 짓이 없을 것이다. 由是則生而有不用也, 由是則可以辟患而有不爲也. 그러나 인간은 실제로 이렇게 하면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가 있고, 이렇게 하면 환난을 피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가 있다. 이것이야말로 현실적인 인간의 위대함이다. 그러므로 소망하는 바가 삶보다 더 강렬하고, 혐오하는 바가 죽음보다 더 강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을 단지 현자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단지 현자(賢者)는 그 마음을 항상스럽게 간직하여 잃지 않을 뿐인 것이다. 是故所欲有甚於生者, 所惡有甚於死者, 非獨賢者有是心也, 人皆有之, 賢者能勿喪耳. 한 소쿠리의 밥, 한 사발의 국【‘일두갱(一豆羹)’의 ‘두(豆)’는 액체를 담는 그릇이고, ‘갱(羹)’은 국이다. ‘일단사(一簞食), 일두갱(一豆羹)’은 아주 단촐한 최소한의 식사, ‘일단사(一簞食)’는 3b-4에 나왔다. ‘단사두갱(簞食豆羹)’은 7a-34, 7b-11에 나온다】을 얻어먹으면 살고 얻어먹지 못하면 죽는 절박한 상황에서도, 옛끼 이거나 처먹어라 하는 식으로 던져주면 길 가던 배고픈 사람도 받지 아니 하며, 그것을 발로 차듯 내던 져주면 거지라도 달갑게 생각치 아니 하여 치사하게 손 내밀지 않는다. 一簞食, 一豆羹, 得之則生, 弗得則死. 嘑爾而與之, 行道之人弗受; 蹴爾而與之, 乞人不屑也. 그런데 인간이라는 게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 그렇게 예의염치를 따지던 사람들도 일만 종(鍾) 정도의 후록(厚祿)이 눈앞에 걸리면 예의염치를 가리지 않고 냅다 받아 처먹는 성향이 있다. 그런데 한번 잘 생각해보라! 과연 갑자기 일만 종(鍾)을 받아서 그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萬鍾則不辨禮義而受之. 萬鍾於我何加焉? 그것이 과연 나에게 무엇을 보태줄 것인가? 내가 사는 집을 으리떵떵하게 꾸미기 위해서인가? 처첩이 날 잘 시봉(侍奉)하게끔 하기 위해서인가? 그렇지 않으면 내가 아는 빈궁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이 나에게 감격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인가?【‘득아(得我)’는 내가 베푼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이다】 결국 다 허세가 아닐까? 爲宮室之美, 妻妾之奉, 所識窮乏者得我與? 아까는 굶어죽어도 비례(非禮)의 물건을 받지 않겠다던 사람이 지금 은 궁실을 으리떵떵하게 꾸미기 위해 불의(不義)를 행하고, 아까는 굵어죽어도 비례(非禮)의 물건을 받지 않겠다던 사람이 지금은 처첩이 자기를 시봉(侍奉)케 하기 위하여 불의(不義)를 행하고, 아까는 굶어죽어도 비례(非禮)의 물건을 받지 않겠다던 사람이 지금은 자기가 아는 빈궁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이 자기에게 감격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불의(不義)를 행한다! 과연 이런 짓들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짓이란 말인가? 본말이 전도되어도 한참 전도된 것이다! 나는 이것을 일컬어 그 본심(本心)을 잃었다라고 말한다.” 鄕爲身死而不受, 今爲宮室之美爲之; 鄕爲身死而不受, 今爲妻妾之奉爲之; 鄕爲身死而不受, 今爲所識窮乏者得我而爲之, 是亦不可以已乎? 此之謂失其本心.” |
나는 이런 장을 읽을 때마다 인간 맹자에게 눈물겨웁도록 고마운 느낌을 갖는다. 인생이란 이론이 아니다. 우주의 이치를 잘 깨달았다고 해서 인간이 잘 사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란, 인생이란 그냥 사는 것이다. 삶이란 행동의 과정이다. 지금 이 장의 논의는 논리적인 반증이나 규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맹자는 너무도 강렬하게 우리 인간에게 도덕적인 삶의 실천을 ‘권유(exhortation)’하고 있는 것이다. 희랍사상에는 이러한 도덕적 권유가 철학의 테제가 되질 않았다. 플라톤전집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전집에서 맹자의 이와 같은 도덕적 권유는 발견하기 어렵다. 이 권유는 이론적 각성이 아니라 즉각적인 삶의 반추이며 실천이다.
맹자는 인간이 서있는 자리가 이미 도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말하는 성(性)은 문명 속의 성(性)이며, 이미 도덕적 장(Moral Field) 속에 있는 성(性)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성(性)은 자인(Sein)이 아닌 졸렌(sollen)이다. 맹자의 철학은 논리적 규명이 아니라, 우리 마음에 곧바로 호소하는 양심의 소리일 뿐이다. 이러한 맹자의 외침을 수천년 동안 들어온 인간들의 공동체가 동아시아문명의 가치적 기저를 형성한 것이다. 문명은 알고 보면 설득을 통한 가치의 축적일 뿐이다. 그것을 우리가 보통 ‘교화(敎化)’라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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