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나무와 마음의 공통점
6a-8.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제나라 우산(牛山)【염약거의 고증에 의하면 우산은 제나라의 수도 임치현(臨淄縣) 남쪽 10여리, 약 6.5km에 위치한 산이다. 일명 남교산(南郊山). 천제연(天齊淵)이 있다. 제(齊)나라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에는 본시 우람찬 수목들이 아름답게 들어차 있었는데 그 산이 임치와 같은 대도시【‘대국(大國)’은 큰 도시를 가리키는 말이다】의 근교에 위치한 까닭에 많은 도시 사람들이 땔감이나 건축자재를 구하기 위하여 도끼나 자귀【‘부근(斧斤)’은 모두 도끼류로서 나무를 베는 데 쓰는데 대ㆍ소의 차이가 있다고 한다. 1a-4에 기출】를 들이대어 벌채를 일삼으니, 어찌 그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6a-8. 孟子曰: “牛山之木嘗美矣, 以其郊於大國也, 斧斤伐之, 可以爲美乎? 그래도 나무의 그루터기가 남아있고 씨가 뿌려졌으니, 낮과 밤으로 끊임없이 성장하는 기운이 가득하고, 비와 이슬이 윤택하게 하는 바가 있으면 새싹들이 여기저기 솟아오르게 마련인데, 또다시 거기에 소와 양을 풀어 먹이니 저 모양으로 까까머리 민둥산이 되고만 것이다. 是其日夜之所息, 雨露之所潤, 非無萌蘖之生焉, 牛羊又從而牧之, 是以若彼濯濯也. 사람들이 저 민둥산을 보고, 저 우산(牛山)에는 옛부터 나무[材]가 없었다고 생각하니, 이것이 어찌 저 산의 성일까보냐? 人見其濯濯也, 以爲未嘗有材焉, 此豈山之性也哉? 이것은 산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문제는 아니다. 사람의 몸에 본래적으로 있는 것을 말한다 해도【沃案: 여기 ‘존호인자(存乎人者)’라는 표현은 4-15에도 나왔다】 어찌 인의(仁義)의 마음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몸에 고유한 선한 마음【沃案: 여기 쓰인 말이 ‘양심(良心)’이다. 우리가 현재 쓰는 용법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양(良)’에는 ‘선하다’ ‘고유하다’는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가 있다. 본래적이다, 고유하다라는 뜻으로 6a-17에 ‘양귀(良貴)’라는 표현이 있고, 또 7a-15에는 ‘양능(良能)’ ‘양지(良知)’라는 표현이 있다】을 방치하고 내버려두는 것은 마치 도끼와 자귀로 나무를 계속 베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매일매일 나무를 벌채하여 없애버리듯이 양심을 잘라 내버리니 그 아름다운 마음이 유지될 수 있을까보냐? 雖存乎人者, 豈無仁義之心哉? 其所以放其良心者, 亦猶斧斤之於木也, 旦旦而伐之, 可以爲美乎?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도 저 우산(牛山)의 경우와도 같이, 낮과 밤으로 끊임없이 생장하는 기운이 가득하기 때문에, 깊은 잠을 자고 새벽에 날이 밝을 즈음이면 청명한 기운이 감도는 것이니, 그때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인간의 본래적 모습에 근접하는 마음이 적지 않게 일어나게 마련이다【沃案: 나의 해석은 기존의 해석과 다르다. ‘기호오여인상근야자(其好惡與人相近也者)’를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인간의 본래적 모습으로 본다. 그리고 또 ‘기회(幾希)’를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적지 않다’로 해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대낮에 하는 세속적인 행위는 그러한 청명한 기운을 또다시 구속시켜 사라지게 만든다【마치 소ㆍ양을 방목시키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질곡을 반복해서 행하면 그 야기(夜氣)【沃案: ‘야기(夜氣)’는 몸(Mom)의 현상으로 꼭 밤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약동(élan vital)이며 엔트로피의 감소를 의미하는 상향(上向)이며 역행(逆行)이다. ‘주기(晝氣)’는 피로(Fatigue)를 향해 진행한다면 ‘야기(夜氣)’는 피로에 역행하는 이성(Reason)의 회복이다. ‘단주지소위(旦晝之所爲)’는 문명의 피로와 관련된다】의 청명한 기운은 존속할 수가 없게 된다. 야기가 존속할 수가 없게 되면, 그 인간은 금수와 다를 바가 없게 된다. 其日夜之所息, 平旦之氣, 其好惡與人相近也者幾希, 則其旦晝之所爲, 有梏亡之矣. 梏之反覆, 則其夜氣不足以存; 夜氣不足以存, 則其違禽獸不遠矣. 금수와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그 인간에게 본래적인 선한 자질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다. 어찌 그 인간의 본래적 정황이 그러할 수 있단 말인가?【여기 ‘인지정(人之情)’의 ‘정(情)’은 ‘감정’의 의미가 아니다. 앞의 ‘재(才)’와 통하는 말로서 본래적 정황을 가리킨다. ‘정(情)’은 실정(實情), 실태(實態)의 뜻이며, 인간의 성의 실상을 의미한다】. 人見其禽獸也, 而以爲未嘗有才焉者, 是豈人之情也哉? 그러므로 모든 사물이라고 하는 것은 올바른 양육의 조건을 갖추 게 되면 자라나지 아니 하는 것이 없고, 그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결국 애석하게도 소멸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공자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잘 가꾸고 조절하면 존속하지만, 버리고 방치하면 없어지고 만다. 출입에 일정한 때가 없으며 그것이 어디로 향할지도 잘 모르겠다.’ 이 공자님의 말씀이야말로 인간의 마음을 두고 하신 말씀이 아니겠는가?” 故苟得其養, 無物不長; 苟失其養, 無物不消. 孔子曰: ‘操則存, 舍則亡; 出入無時, 莫知其鄕. 惟心之謂與.’” |
맹자가 스스로 자신의 성선설(性善說)을 설파한 가장 명료하고도 중요한 로기온자료로 꼽히는 장이다. ‘우산(牛山)’이 대도회지 옆에 있어서 민둥산이 되었다는 심볼리즘 자체가 인간의 문명이 인간의 본성을 해치기 쉬운 양태의 집합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암암리 맹자에게도 노자적 자연주의의 일면이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 단지 ‘자연(自然, 스스로 그러함)’을 도덕적으로 파악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맹자의 ‘성선(性善)’은 성(性) 자체에 선의 가능성을 두는 데서 출발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다이내믹한 시공성 속에서 끊임없이 양육되어야만 존속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항상 간파해야 한다. 이러한 후천적 존양성찰의 측면에서는 순자의 학설과도 근원적으로 상치되지 않는다. 인간을 격려하는 시좌(視座)의 설정이 다를 뿐이다. ‘야기(夜氣)’와 ‘주기(晝氣)’【이 말은 정확하게 맹자 말은 아니고 내가 만든 것이지만 맹자의 뜻을 요약한 것이다】의 문제에 관하여 나는 베르그송과 화이트헤드와 같은 이들의 관점에서 해설하였지만 거의 동일한 시각이라고 확신한다. 맹자의 이성은 기하학적 이성이 아니라 생물학적 이성(Biological Reason)이다.
‘야기(夜氣)’를 잘 길러[養] 확충시킨다는 주제는 궁극적으로 색우천지지간(塞于天地之間)하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기른다는 주제와 상통하는 것이다(2a-2). 그리고 여기 ‘조즉존(操則存)’이라는 표현의 ‘조(操)’에서 우리 일상 한국어에서 아주 잘 쓰이고 있는 ‘조심(操心)’이라는 말이 나왔다. ‘조심’은 7a-18에 나온다. ‘조심’이란 내재적 본심을 조지(操持)하는 것으로, 그 본래적 마음을 항상 일깨움으로 심관(心官)의 사(思)의 공능을 충분히 발휘시켜 만사에 응(應)하게 하는 것이다. ‘조심’이야말로 맹자 심학(心學)의 키워드이며 ‘구기방심(求其放心)’의 다른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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