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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맹자한글역주, 고자장구 상 - 7.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본문

고전/맹자

맹자한글역주, 고자장구 상 - 7.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건방진방랑자 2022. 12. 28. 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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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

 

 

6a-7. 맹자께서 말씀하시었다: “풍작으로 풍요롭게 되는 해에는 청 소년들이 나태하게 되는 경향을 보이고()’를 조기는 (, 착하다)’이라 하였고 주희는 (, 의뢰한다)’라 하였는데, 나는 완원(阮元)()’ ‘()’로 풀이한 설을 취했다. 차주환은 조기에 의거하여 얌전하고라고 번역했다, 흉작으로 흉흉하게 되는 해에는 청소년들이 난폭하게 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은,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한 본래적 자질이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시대적 분위기에 함닉(陷溺)된 그들의 마음이 그러한 다른 성향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이다.
6a-7. 孟子曰: “富歲, 子弟多賴; 凶歲, 子弟多暴, 非天之降才爾殊也, 其所以陷溺其心者然也.
 
지금 모맥(麰麥)주희는 모()를 보리, ()을 밀이라고 분리시켜 말했는데, 모맥(麰麥)은 한 개념으로 대맥(大麥)’ 즉 보리를 의미한다의 예를 들어보자! 파종을 하고 그 위에 흙을 잘게 부숴 고르게 잘 덮어주면, 같은 밭의 토양에서 같은 시기에, 같은 조건 하에서 뿌려진 이 씨들은 쑥쑥 싹을 내며 자라 오르는데, 시차는 있다 하더라도 결국 하지(夏至) 경에 이르게 되면 모두 다 성숙하게 되는 것이다.
今夫麰麥, 播種而耰之, 其地同, 樹之時又同, 浡然而生, 至於日至之時, 皆熟矣.
 
비록 성숙하여 열매를 맺는 모습에 다소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땅의 비옥함과 척박함의 차이가 있다든가, 비와 이슬의 내림과 농부 손길의 보살핌의 불균(不均)이 있다든가 하는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결코 보리라는 종자 그 자체의 근본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무릇 동류(同類)라고 하는 것은 모두 서로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찌 홀로 인간이라고 하여 서로 다르다고 우겨댈 수 있을까보냐? 여기 중요한 최종적 사실은, 성인이야말로 우리와 동류의 존재라는 것이다.
雖有不同, 則地有肥磽, 雨露之養, 人事之不齊也. 故凡同類者, 擧相似也, 何獨至於人而疑之? 聖人與我同類者.
 
그러므로 고대의 현인, 용자(龍子)3a-3에 기출. 고대의 현인이라는 것 외로는 구체적으로는 상고할 길이 없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발 생긴 것을 모르고 짚신을 삼아도 그것이 삼태기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나는 안다.’ 짚신이 대강 비슷한 것은 천하사람들의 발이 거의 비슷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故龍子曰: ‘不知足而爲屨, 我知其不爲蕢也.’屨之相似, 天下之足同也.
 
인간의 입과 미각(味覺)의 관계를 예로 들어보아도, 맛의 기호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것이 있다는 것이다. 옛 맛의 달인, 역아(易牙)역아(易牙) 또는 맛의 달인으로서 선진문헌에 다양하게 출현하고 있다. 옹무(雍巫)가 원래 이름인데 옹() 나라 사람이다. 명이 무()이고 자가 역아(易牙)이다. 제환공(齊桓公)의 총신이었다. 제환공이 맛있는 것은 다 먹어보았는데 어린아이 고기만 못 먹어보았다고 하니까, 자기 어린 아들을 삶아 요리하여 바친다. 관중(管仲)은 병들어 죽기 전에 환공에게 역아를 내칠 것을 간곡히 권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공에게 충성하기 위하여 자기 자식을 삶아 죽일 수 있는 자가 어떻게 환공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겠냐고 반문한다. 관중이 죽은 후 환공은 역아를 내쳤으나 입맛을 잃고 정사를 다스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곧 복직시킨다. 역아는 수조(豎刁), 당무(堂巫), 개방(開方)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환공을 죽음에 이르게 하니, 구더기가 드글거릴 때까지 환공의 시신을 염습할 사람이 없었다. 관자』 「소칭가 그토록 위대한 요리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인간의 입이 맛있어 하는 바를 먼저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만약 역아의 입맛의 취향이 타인들과 다른 정도가, 만약 개ㆍ말의 입맛이 우리 인간과 다른 정도로 달랐다고 한다면, 천하의 그 누가 맛을 좋아하는 방식이 역아의 맛의 취향을 따라가겠는가? 인간의 미각이라고 하는 측면에 있어서, 천하사람들이 모두 역아에게 기대를 걸 수 있는 것은 천하사람들의 입의 감각이 대체로 공통되기 때문이다.
口之於味, 有同耆也. 易牙先得我口之所耆者也. 如使之於味也, 其性與人殊, 若犬馬之與我不同類也, 則天下何耆皆從易牙之於味也? 至於味, 天下期於易牙, 是天下之相似也.
 
청각에 있어서도 동일한 유비(類比)가 성립한다. 음악이라고 하는 인간의 기호에 있어서, 천하사람들이 모두 사광(師曠)고대 중국의 유명한 음악가, () 평공(平公) 때의 태사(太師). 4a-1에 기출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천하사람들의 귀의 감각이 대체로 공통된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惟耳亦然. 至於聲, 天下期於師曠, 是天下之耳相似也.
 
그뿐인가? 인간의 시각 또한 마찬가지다. 자도(子都)고대의 미인으로서 유명하나 그가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시경정풍(鄭風) 산유부소(山有扶蘇)에도 그 이름이 나온다에 관하여 이야기하자면, 천하사람 누구든지 그 아름다움을 찬미하지 않는 자가 없다. 자도의 아름다움을 모른다는 것은 이른바 당달봉사와도 같은 인간이다.
惟目亦然. 至於子都, 天下莫不知其姣也. 不知子都之姣者, 無目者也.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입과 맛의 관계에 있어서는 같이 맛있어 함이 있으며, 귀와 소리의 관계에 있어서는 같이 좋게 들음이 있으며, 눈과 모습의 관계에 있어서는 같이 아름다워함이 있다. 어찌 유독 마음[]에 이르러서만이 홀로 같이 함이 없을 수 있을까보냐? 인간의 마음이 같이 그러한 바가 무엇이뇨? 나 맹자는 말한다: 그것이 바로 리(), (). 성인은 우리 마음이 같이 그러한 바, 즉 공유할 수밖에 없는 도덕적 성향을 먼저 자각한 자이다. 그러므로 리()와 의()가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은 소나 양, 개나 돼지의 맛있는 고기요 리가 우리의 입을 즐겁게 하는 것과 동일하다.”
故曰: 口之於味也, 有同耆焉; 耳之於聲也, 有同聽焉; 目之於色也, 有同美焉.’至於心, 獨無所同然乎? 心之所同然者何也? 謂理也, 義也. 聖人先得我心之所同然耳. 故理義之悅我心, 猶芻豢之悅我.”

 

맹자의 논의가 후대의 성리학적 논의와 근원적으로 차원을 달리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위대한 담론이라 할 수 있다. 주희는 물론, 우리나라의 퇴계(退溪)나 율곡을 막론하고 그들이 말하는 리()가 얼마나 유교의 본의와 동떨어진 것인가를 보여주는 위대한 로기온자료라 할 것이다. 여기에는 리()와 기()의 체용론(體用論)적인 논의가 삽입될 수 있는 일말의 여지가 없다. 맹자의 리는 철저히 형이하학적인 신체(Mom)에 속하는 것이다.

 

신체의 보편성은 논리적으로 얼마든지 상대적인 예외를 허용하기 때문에 관념적인 절대성을 추구하는 자들은 신체 즉 몸(Mom)에다가 인간의 절대적 가치의 근거를 설정하는 것을 기피해왔다. 인간의 미각이 공통성이 있는가 하면, 또 극도의 상반성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형이하학적 시공의 변화태에 어떤 절대적 근거를 마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절대성은 관념이나 특별한 약속체계로 귀속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맹자는 신체의 모든 다양적 사태에도 불구하고 그 궁극적 자질에는 엄연한 보편성이 상존한다는 것을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모든 인간의 인식의 보편성(epistemological universality)이 존재론적 약속체계가 아니라 인간의 생물학적 몸의 조건에 귀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언(確言)하고 있다. 맹자의 도덕성은 어디까지나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을 융합시키는 장에 내재한다는 것을 나는 말하려 한다. 미각, 청각, 시각의 공통성을 가지고 마음의 공통성을 말하는 것은, 마음을 특수한 리()나 형이상학적 본체(metaphysical substance)나 선험적 주체(transcendental subject)나 초월적 성()으로서 몸(Mom)으로부터 유리시키지 않겠다는 결의를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객관적 도덕성도 주관적 도덕성의 확충에 의한 것이며, 주관적 도덕성이란 유아론적 광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이미 몸의 도덕성을 구유(具有)하는 객관적 사태라는 것이다.

 

공자도 호색(好色)하는 것만큼 호덕(好德)하는 자를 아직 보지 못하였 다(논어(論語)19-17, 15-12)고 했는데, 인간의 도덕성의 근거를 몸의 성향과 같은 차원에서 추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감각적 동감(同感)과 심()의 공감(共感)을 동차원에 변론한 이 장은 맹자의 철학의 근본이 몸철학(Philosophy of Mom)의 기본가설에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웅변하고 있다.

 

맹자는 DNA를 알지 못했지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난다는 속담을 매우 구조적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보리의 종자가 비슷한 조건 하에서는 거의 동일한 열매를 맺는 사실에 근거하여, 맹자는 성인과 범인에게도 동일한 염색체 구조가 있다는 것을 입 증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단순한 염색체 구조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체의 공통성이 확보되는 이상 도덕성의 근원도 공통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맹자의 사상을 이렇게 이해하면 매우 쉬울 것이다: ‘인간의 염색체 염기배열 속에 인ㆍ의ㆍ예ㆍ지라는 유전자가 자리잡고 있다고 나 맹자는 생각합니다.’ 이것이 황당한가, 아닌가를 따지기 전에 우리는 이것이 맹자의 주장의 실질적 의미라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인용

목차 / 맹자

전문 / 본문

중용 강의

논어한글역주

효경한글역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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