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편
형(形)
4편의 제목은 ‘형(形)’은 ‘군형(軍形)’이라고도 한다. ‘형’의 뜻은 군의 편제와 진법 같은 군대의 전술적 형태를 말한다. 이런 전술적 형태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형세다. 이 부분은 5편 ‘세 중복되는 감이 있는데, 형세에서 앞 단어인 ‘형’을 강조한 것이 4편이고 ‘세’를 강조한 것이 5편이라고 할 수 있다.
1. 예전에 전쟁을 잘하는 자는
예전에 전쟁을 잘하는 자는 먼저 적이 아군을 이길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하고, 적이 잘못을 저질러 아군이 이길 수 있는 상태가 되기 기다렸다. 적이 나를 이길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것은 나에게 달렸고, 내가 적에게 승리하는 기회를 잡는 것은 적에게 달렸다.
孫子曰: 昔之善戰者, 先爲不可勝, 以侍敵之可勝. 不可勝在己, 可勝在敵.
그러므로 전쟁을 잘 하는 사람은 적이 나를 이길 수 없게 만들 수는 있지만, 적이 반드시 내가 승리하게 하도록 만들 수는 없다. 그러므로 승리는 예측할 수 있지만 반드시 승리하게 만들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故善戰者, 能爲不可勝, 不能使敵必可勝. 故曰: 勝可知, 而不可爲.
적과 마주쳤다. 적국은 우리보다 크고, 군대는 사납고 병력도 많다. 일단 가장 안전한 요새에 거하면서 적의 동향을 본다. 내부 첩자를 심어 정보를 캐내려고 하고, 정찰대를 풀어 적의 진로, 공격 목표를 파악한다.
전쟁사를 보면 대부분의 지휘관이 이렇게 한다. 그리고 손자의 이 구절을 적절한 전거로 이용한다. “먼저 적이 나를 이길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안전한 곳에 머물면서 적의 동향을 관찰하고 약점을 포착하자.”
나폴레옹의 천재 참모였던 조미니는 이런 행동은 전술이 아니라 회피, 주저앉기라고 비판한다. 한일 월드컵 4강을 이끌었던 히딩크 감독이 부임하기 전, 한국 축구에서는 시합 개시 5분 정도까지는 탐색전을 벌이는 것이 관행이었다. 전투를 바로 시작하면 당장 아나운서와 해설자가 탐색전도 하지 않고 서두른다고 비판했다.
히딩크 감독은 5분간 공 돌리기를 금지했다. 탐색전을 해야 한다고 항의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탐색전이란 명확한 목표를 가지고 탐색하는 것이다. 상대 공격수나 스위퍼가 몸이 안 좋다는 첩보가 있다면 그것을 확인해 본다거나 하는 식의 의도적이고 계획적인 행동이어야 한다. 그냥 공을 돌리면서 상대가 행동하기를 기다리는 건 무의미한 시간 낭비다.”
한국 감독들도 하릴없이 공을 돌리게 한 건 아니겠지만, 히딩크의 눈에 명확한 목표와 예리함이 부족하게 보였던 것 같다. 이는 조미니의 비판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적과 싸우려면 그전에 먼저 적의 전략적 목적을 파악해야 한다. 최소한 몇 가지 가설은 세우고 탐색해야 한다. 이 정도는 전쟁이 벌어지기 전에 할 수 있고, 해야 한다. 이것도 안 된다면 전쟁을 치를 자격이 없다.
손자가 적이 나를 이길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한다고 말한 의미는 공격해 온 적이 자신들의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율적인 움직임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적의 식량이 일주일 치뿐이라면 일주일 안으로는 공략할 수 없는 요새에 웅거(雄據)하는 것만으로도 적의 전략 목표를 좌절시킬 수 있다.
조급하고 당황한 적은 철수하든가 무리수를 저지르게 된다. 이것이 손자가 말한 적이 잘못을 저질러서 아군이 이길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해주는 단계이다. 이 내용에 가장 적절한 사례로 마라톤 전투를 들 수 있다.
공격이 불가능한 두 군대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군이 아테네 북동쪽 마라톤 병원에 상륙했다. 소아시아 지역에 산개한 그리스 식민도시들의 저항에 골머리를 앓던 페르시아 제국은 이들의 배후가 아테네라고 확신했다. 뱀의 머리를 친다는 전략으로, 망명한 아테네의 참주 히피아스(Hippias, BC560?~BC490)【1대 참주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를 앞세워 침공한 것이다.
페르시아군이 아테네 항구로 직행하지 않고 마라톤에 상륙한 이유는 상륙 작전의 부담을 피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아테네에 있는 히피아스 지지자들의 호응을 기대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을 맞이한 사람은 히피아스의 지지자들이 아니라 아테네의 중장보병대였다.
병력을 비교하면 아테네군은 중장보병 1만 1,000명, 페르시아군은 보병 2만 5,000명에 기병이 2,000명 정도였다. 양측은 희한한 상성을 지니고 있었다. 기병과 궁병 능력에서 압도적인 페르시아군에게 평원은 약속의 땅이었다. 아테네 중장보병대가 공격해오면 화살로 타격하고, 기병이 측면으로 돌아 공격할 것이었다. 중장보병대는 정면만 강하고 측면과 후면은 무방비 상태였기에 기병의 측면공격을 방어할 수단이 없었다. 이를 잘 아는 아테네군은 감히 페르시아군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런데 페르시아군도 아테네군을 공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아테네군은 평원에서 1,500미터 정도 떨어진 골짜기에 웅거하고 있었다. 화살 공격으로는 방패와 바리케이드 뒤에 위치한 아테네군을 섬멸할 수 없었다. 기병은 산비탈에 취약했고, 중장보병대의 측면은 산비탈과 바리케이드로 엄호되었다. 유일한 방법은 보병으로 정면 대결을 벌이는 것인데, 페르시아의 보병대는 갑옷도 입지 않고 투구도 없으며 나무 방패를 든 경무장 보병이었다. 이들은 온몸을 청동으로 감싼 채 밀집한 그리스 중장보병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어느 쪽도 공격이 불가능하다 보니 서로 노려보기만 하면서 시간이 흘렀다. 양측 다 적이 나를 이길 수 없는 상황을 조성하고 있었지만, 손자의 정석에 부합하는 쪽은 아테네군이었다. 배를 타고 온 원정군인 페르시아군은 식량과 기한에 제한이 있었다. 무승부는 곧 침공군의 패배였다. 페르시아군이 마라톤 평원에 상륙하기로 했으면 ‘적이 나를 공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먼저 구상하고 왔어야 했다.
다음 단계는 초조해진 상대가 실수를 해서 ‘내가 적에게 승리하는 기회를 잡는 것’이다. 페르시아군은 교과서처럼 이 단계로 진입한다. 난감하고 곤혹스러운 상황에서 누군가가 아이디어를 냈다. 아테네의 전 병력이 여기에 있다. 아테네가 비어 있다. 예상치 못한 아이디어였다. 페르시아군은 해안에 1만 5,000의 보병과 궁수만 남겨두고 밤에 기병을 배에 태우고 몰래 아테네로 향했다.
발상은 훌륭했지만, 두 가지 큰 실수를 했다. 마라톤에 기병을 남겨두지 않았고 보안에 실패했다. 육상국이었던 페르시아는 소아시아에 진출한 그리스인을 수송선 선원으로 고용했다. 이들 중에는 그리스 스파이가 득실득실했다. 이들은 즉시 아테네군 진영으로 달려와 소리쳤다. “기병이 떠났다!” “기병이 떠났다!”
이제 남은 과제는 적의 실수를 이용해서 아테네군이 승리할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이 역할을 해낸 사람이 명장 밀티아데스(Miltiades, BC550?~BC489)였다.
아직 보병대에게 불리한 궁병이 남아 있었다. 밀티아데스는 밀집대형 중장보병대의 정석을 무시하는 창의적인 공격 전술을 사용했다. 둔하고 느린 중장보병을 속보로 돌격시킨 것이다. 병력이 적은 아테네군의 가로 길이를 페르시아군에 맞추고 적의 화살 공격에 의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병사들의 간격을 평소보다 2배로 넓혔으며, 중앙의 보병을 줄여 좌우로 배치했다. 아테네 병사들은 당황했을 수 있다. 이것은 공격과 방어 모두 촘촘한 방패진을 골격으로 하는 밀집대형 중장보병의 모든 장점과 원리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원래 그리스의 밀집대형 방진인 팔랑크스는 한 개의 방패를 두 사람이 나누어 쓰게 되어 있다. 자신의 방패는 자신의 반만 가리고 나머지 반은 옆 사람의 방패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야 중장보병들이 밀집대형을 유지하고, 집단 전술로 싸울 수 있다고 보았다.
밀티아데스의 요구는 집단전의 장점을 포기하고 중장보병이 일대일 전투로 페르시아 보병을 격파하라는 것이었다. 페르시아군 주력이 아테네 병사들의 고향으로 향하고 있지 않았다면 아테네 병사들이 절대 수용하지 못했을 모험적인 전술이었다.
밀티아데스는 페르시아군에 남아 있는 유일한 위협적인 무기, 궁수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화살 사거리에 도달한 순간 달리기를 명령했다. 32킬로그램의 중무장을 한 병사들이 달린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다. 그러나 완전군장을 하고 구보하듯이 전력 질주는 못 해도 조깅 정도의 구보는 충분히 가능하다. 건장한 중장보병들은 약 1,500미터 정도의 거리를 달렸다.
속도는 페르시아 궁수들이 예측하고 연습한 속도보다 빠르기만 하면 되었다. 적진에 근접한 마지막 단계에서는 아마도 숨을 고르고 속도를 높였을 것이다. 이 구보 공격은 의외의 효과를 더해주었다. 그리스 전사들은 중장갑의 무게에 가속도까지 더해서 페르시아군의 나무 방패와 부딪쳤다. 페르시아군의 약한 방패와 창은 손쉽게 부서졌다. 그다음에 페르시아 보병들을 막아주는 것이라고는 천으로 만든 겉옷과 피부뿐이었다. 밀티아데스의 전술을 대성공을 거두었고, 마라톤에서 페르시아군 6,400명이 전사했다. 그리스군 전사자는 192명이었다.
전투 후에 아테네 전사들은 쉴 틈도 없이 40킬로미터의 거리를 거의 3시간 만에 주파하는 속도로 고향을 향해 달려갔고, 페르시아군이 항구에 상륙하기 직전에 해안에 도착했다. 그들은 탈진해서 서 있을 수도 없는 형편이었지만, 항구에 도열한 중장보병을 본 페르시아군은 상륙을 포기하고 회군했다.
손자의 공식에 맞추어보면 페르시아군이 아테네가 무방비 상태라는 생각을 떠올렸을 때, 빈집털이가 아니라 아테네군이 절대적으로 불리함에도 은신처인 골짜기에서 평원으로 나와 ‘페르시아군을 공격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을 떠올렸어야 했다.
약탈의 효율이 떨어진다고 해도 마라본에 기병을 남겨두었다면 마라본은 패전장이 되었을 것이다. 아테네군은 집과 가족을 구하기 위해 무조건 싸움을 걸어야 했을 것이고, 페르시아군은 기병과 궁수를 활용해 마라톤 평원을 그리스인의 무덤으로 바꾸어놓을 수 있었다. 패배했더라도 최소한 아테네군을 마라톤에 묶어놓을 수는 있었다. 그랬더라면 페르시아군의 아테네 약탈도 성공할 수 있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승리가 아니다
절대 열세인 전력 탓에 적이 나를 이길 수 없는 상황을 만들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때 물리적 승리를 저지할 수 없다면 실질적 승리를 저지하는 방법이 있다. 적이 원하는 것, 승리의 개가를 얻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원리를 교과서적으로 구현한 전투가 1189년 예루살렘 방어전이다.
예루살렘 공국의 십자군 연합부대는 살라딘(Saladin, 1138~1193)의 이슬람군과 무리하게 야전 승부를 추구하다가 하틴의 뿔에서 몰살당했다. 이제 살라딘의 진격을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살라딘은 의기양양하게 전진해 최종 목표였던 성지 예루살렘을 포위했다. 예루살렘은 고대 가나안 왕국 시절부터 뛰어난 요새였다. 그러나 성을 사수할 병력이 없었다. 이 공방전은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의 영화 『킹덤 오브 헤븐』의 소재가 되었다.
영화에 몇 가지 과장이 있기는 해도, 기사 발리앙 디블랭(Balian d'Ibelin, 1143?~1193)을 중심으로 뭉친 예루살렘 주민이 영웅적인 방어전을 펼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절대 전력이라는 것이 있다. 성의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살라딘은 영화에서 미화된 것처럼 한없이 자비로운 인격자가 아니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현실주의자였다. 포로를 죽이는 것보다는 노예 시장에 팔거나 몸값을 받고 넘기는 편이 이득이었다. 복잡한 아랍 땅에서 통치를 하려면 자금도 필요했다. 살라딘은 쿠르드족 출신으로 이슬람 세계를 통일하고, 십자군을 몰아세운 업적이 있음에도 정치적 입지는 불안했다. 실제로 살라딘이 죽자마자 왕조는 멸망한다. 수십 개의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는 왕조를 통치하려면 돈과 명예, 그에 따르는 존경심이 필요했다,
궁지에 몰린 발리앙은 살라딘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예루살렘을 양도할 테니 자신들의 귀환을 용인해줄 것을 요구했다. 살라딘이 응할 리 없었다. 어차피 예루살렘은 함락될 것이고, 자신은 중동의 영웅이 될 것이다. 많은 아랍 부족들이 십자군에 원한이 있었고, 예루살렘을 탈환하면 십자군에게 최후의 복수를 하고 싶어했다. 살라딘이 이슬람 왕국의 통합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그들의 염원, 그들의 복수를 이루어주어야 했다. 자비로운 살라딘은 예루살렘에서만은 피의 복수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있었다.
살라딘의 속셈을 눈치챈 발리앙은 살라딘이 원하는 승리의 과실을 파묻어 버리기로 했다. 그는 자신들을 놓아주지 않으면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이슬람계 주민을 먼저 몰살시키겠다고 살라딘을 협박했다. 그렇게 되면 살라딘이 얻는 것은 잿더미와 비난뿐이었다. 사라센 제국의 내부는 살라딘의 흠을 잡으려는 야심가들로 가득했다. 정치계는 냉혹해서 이슬람인들이 학살당하면 살라딘의 정적들은 예루살렘 탈환을 칭송하기보다는 학살을 용인한 죄를 물어 트집만 잡으려 들 것이었다.
살라딘은 예루살렘 탈환 이후의 상황도 고려했을 것이다. 유럽에는 십자군에 가입하고 싶어 안달이 난 기사와 모험가들이 즐비하다. 예루살렘을 빼앗는다고 해서 유럽이 호락호락 물러설까? 만약 대학살을 감행하면 그것은 유럽인을 자극하고 결집하는 엄청난 동기를 제공할 것이다. 실제로 예루살렘을 사라센에 빼앗기자 유럽에서는 십자군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영국의 ‘라이언하트(Lionheart)’ 리처드 1세(Richard Ⅰ, 1157~1199)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Philippe Ⅱ, 1165~1223), 독일의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Ⅰ, 1122?~1190)가 참전하는 3차 십자군이 조직되었다. 나중에 살라딘은 그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했고, 예루살렘의 순례길을 열어주는 것으로 십자군과 타협했다.
3차 십자군이 서로 갈등하지 않고 좀 더 조직적이고 열정적으로 전쟁에 임했더라면 살라딘은 정말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 뻔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탈환하지 못해도 전쟁이 장기화되고 격렬해졌다면 살라딘의 왕국은 분열할 수 있었다. 만약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탈환할 때 기독교도 대학살을 감행했다면 3차 십자군은 대의에 의한 압박에 더 단합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모른다.
살라딘은 기독교도들이 몸값을 내고 해안으로 철수하는 것을 허용했다. 단 몸값을 내는 경우였다. 돈이 없는 사람들도 살라딘의 관용으로 일부 석방되었지만, 나머지는 노예로 팔렸다. 아무튼 이 조치 덕분에 살라딘은 실리와 영광을 얻었다. 유럽에서 살라딘은 거친 유럽의 깡패 기사들보다 더 숭고한 인격을 갖춘 기사도의 전형으로 숭상되었다. 『신곡(神曲)』을 쓴 단테(Dante Alighieri, 1265~1321)는 이교도의 왕이며 십자군 왕국을 몰락시킨 살라딘을 지옥 불에 던지지 않고 구제해주었다. 단테가 구상한 지옥에는 비록 예수를 알지 못해 지옥에 떨어졌지만, 인류에게 공헌한 양심적인 현자들을 위해 만든 특별 거주 구역이 있다. 지옥이지만 고통이 없고 천국처럼 편안한 이 빛의 공간에는 소크라테스(Socrates, BC470?~BC399)와 같이 르네상스인들이 숭상한 현자들이 산다. 친구가 없어 외롭기는 하겠지만, 특별구역에 거주하는 유일한 무슬림이 살라딘이었다.
2. 적이 승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수비
적이 아군에게 승리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수비다. 아군이 승리하게 하는 것이 공격이다. 수비는 내게 남음이 있게 하는 것이고, 공격은 적에게 부족함이 있게 하는 것이다.
不可勝者, 守也; 可勝者, 攻也. 守則有餘, 攻則不足.
적이 공격하고 아군이 방어한다. 참호를 팔 위치를 정하고, 기관총을 설치할 곳, 박격포와 야포를 설치할 곳, 예비대 배치지점을 정한다. 적의 공격 지점을 예측하고, 포격지점을 설정한다. 탄약저장고의 위치를 정하고, 공급선을 긋는다. 탄약, 식량의 소모량을 계산하고 추진 계획을 세운다.
전투를 앞둔 지휘관들은 이런 준비만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상급 지휘관의 책상에는 적의 병력, 공격 예상 지점, 움직임, 상부의 염려와독촉, 병력·탄약·무기 부족을 호소하는 하위 부대들의 아우성으로 가득하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두려움에 사로 잡힐 시간조차 부족하다. 이런 상황에서 사령관 이 순시를 나와 묻는다. “방어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는가?”
이런 말이 누구의 입에서 나오든 “수비의 원리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방어 전략은 원리에 기반하고 있습니까?”라는 대화가 진행될 수가 있을까? 절대 없다. 방어는 당연한 것이고 지켜야 할 곳과 절대 버리지 말아야 할 곳은 정해져 있다. 여기에 그 이상 무엇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축성과 요새전
보통 방어나 공격 계획은 추상적 원칙보다는 지형지물과 적의 배치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다 보면 주도권을 적에게 던져주거나 지형에 선사한다. 이 과정을 거치며 전투는 예술이 아닌 작업이 된다. 일상처럼 진행되는 전투를 예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능동적인 삶, 주도하는 삶을 살고 싶다면 상황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상황을 창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손자의 방식대로 원칙과 목적을 기준으로 상황을 분석하고 방법을 창조하는 프로세스를 분실해서는 안 된다. 손자가 말한 수비의 원칙 ‘수비는 내게 남음이 있게 하는 것’이란 너무나 불투명한 개념 같지만, 알고 보면 상당히 놀랍고 역동적인 개념이다.
손자가 말한 수비의 원리는 축성(築城)의 원리에 잘 구현되어 있다. 성이라고하면 강력한 성벽과 기발한 구조적 장치를 떠올린다. 하지만 돌과 단단함에만 의지해서는 수성전에 성공할 수 없다. 축성의 원리는 성이라는 공학적인 구조를 통해 적을 분산시키고, 아군은 집중시킨다. 훌륭한 성은 이런 원리를 효과적으로 구현한 성이다.
중동에 있는 십자군의 성은 축성술의 교과서다. 탁 트인 조망은 적의 이동을 빠짐없이 감지한다. 어떤 경우에도 공격해 오는 적군을 먼저 감지하고 수비대를 효과적으로 운용할 수 있다. 적이 오지 않는 곳에 아군을 배치해서 병력을 낭비할 일이 전혀 없다.
성벽은 이중 삼중이다. 적이 외성을 점거해도 외성과 내성 사이 공간이 좁아 병력을 밀집시킬 수 없다. ‘수비는 남음이 있게 하는 것’이란 원리의 실현이다. 성벽의 높이도 내성이 더 높아 외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다.
성은 벌집 형태로 여러 개의 섹터로 구분되어 있다. 섹터와 섹터는 지하 통로, 계단으로 연결되어 병력을 신속하게 투입할 수 있고, 섹터가 함락되면 차단하고, 이차적인 공세를 할 수 있다. 거미줄 같은 통로는 수비대 병력의 이동을 숨겨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준다. 십자군이 철수한 뒤에 무슬림은 이런 미로 구조에 매력을 느껴 더 섬세하게 보강하고 숨겨진 통로가 없는 방이 없게 뚫어놓았다. 여담이지만 이런 미로 구조는 걸프 전쟁 때 도심 시가전에서도 재현되었다. 무슬림 전사들이 중세 요새에서 영감을 얻고 훈련을 했는지까지는 알 수없다.
구불구불하거나 각진 성벽, 이중 삼중의 벽, 곳곳에 설치한 탑과 치(雉)는 공격군의 측면과 뒤를 공격할 수 있게 해서 공격의 효율성을 높인다. 화력집중의 효과도 크다. 성벽과 탑은 복층으로 되어 있어서 탄착점에 삼중 사중으로 화력을 집중한다. 해자와 장애물은 이런 화력 집중 지점에 적을 오래 붙잡아 두는 역할을 한다.
구조가 복잡한 성에는 곳곳에 함정과 저격을 위한 구멍이 있다. 동굴 같은 터널을 지날 때 천장에 뚫어놓은 구멍에서 화살이나 총탄이 날아온다. 저격은 적의 입장에서 짜증 나고 공포스러운 전술인데 그것도 단 한 명이 적의 행진대열을 멈춰 세울 수 있다는 것이 더 큰 장점이다. 공격해오는 쪽이 힘들게 저격지점을 제압하면 저격병은 벌써 뒤로 뚫어놓은 통로나 탈출구로 빠져 나간 다음이다. 가끔은 퇴로가 없는 저격지점도 있는데, 실전에서 사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상대가 공격을 망설이게 하는 구조로는 충분히 기능한다.
1차 십자군이 설립한 예루살렘 왕국은 1099년부터 1187년까지 근 100년을 버텼다. 왕조의 생명으로 100년은 짧은 기간 같지만 적대적인 이슬람 세력에 둘러싸인 상황을 고려하면 이 작은 유럽인들의 왕국이 100년을 버텼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생존의 비결은 십자군이 축성한 강력한 요새들이었다. 예루살렘이 살라딘에게 함락된 이후에도 일부 성들은 1291년까지 살아남았다.
이 훌륭한 요새들은 살라딘조차 매료시켰다. 당연한 일이었다. 십자군의 요새를 아랍 전사들로 채워서 십자군을 괴롭히자는 생각은 충분히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살라딘은 축성술에는 감탄했지만 축성에 의지하는 방어전략이라는 유혹은 물리쳤다. 살라딘이 『손자병법』을 읽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손자병법』에 의거해서 설명하면 이렇다. ‘수비의 관건은 여유가 있게 하는 것이다.’ 십자군의 성둘은 성 한 채만 보면 수비군을 여유롭게 하는 데는 탁월하지만, 전체 요새망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살라딘의 병력을 분산시킨다. 십자군 왕국은 작은 영지들로 분할되어 있어서 영지마다 몇 개의 요새가 전부였다. 이 요새들은 적은 병력으로 효과적인 수비를 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살라딘의 왕국은 지금의 이집트에서 이라크, 시리아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살라딘이 지켜야 하는 땅 전체로 보면 십자군 요새에 수비대를 배치하는 것은 여유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여유를 분산시키는 것이다. 게다가 살라딘의 왕국 내에는 살라딘의 지위를 노리는 불만세력이 가득 했다.
정치적으로 중동은 예나 지금이나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다. 살라딘은 이슬람 왕국 내에서도 정복자였지 진정한 전제군주는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현재의 이라크 소수민족인 쿠르드족 출신이다. 용병으로서는 탁월한 명성을 얻었지만, 중동에서 한 번도 주류가 된 적이 없는 종족이다.그 외에도 아랍종족의 분열은 심각했다. 1차 십자군 전쟁 때 안티오크 같은 시리아의 주요 도시들은 매수 대상이 되었다. 십자군의 요새를 남겨두면 야심가와 반란군들에게 강력한 요새를 헌납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3차 십자군이 접근해오자 살라딘은 시리아에 있던 요새들을 과감하게 헐어버리고 그곳에 배치한 수비대를 자신의 야전군에 편입시켰다. 살라딘의 전술은 성공했다. 3차 십자군은 살라딘을 격파하지 못했고, 살라딘 왕국의 분열을 야기하는 데도 실패했다.
어설픈 전략가들은 살라딘이 『손자병법』의 수비 원리를 몰랐다고 비판하겠지만, 손자가 살아 있었다면 살라딘이야말로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이해한 사례로 만점을 주었을 것이다.
공격의 요의는 적이 부족하게 만드는 것이다
아군은 1만 명이고 적은 10만 명이 있다고 하자. 보통 공격할 때는 2~5배의 병력이 필요하다. 아군이 공격하고 적이 수세를 취한다면 아군은 20~50만 명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런데 이런 계산법에 따르면 전쟁사에서 알렉산드로스, 한니발, 칭기즈칸, 나폴레옹의 승리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들은 모두 적보다 적은 병력으로 광대한 영토를 정복했다. 물리적인 수가 아니라 전술로 병력의 우위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상대가 10만 대군을 보유했더라도 100개의 요새에 1,000명씩 분산되어 있다면 1만의 병력으로 수의 우위를 누릴 수 있다.
좀 더 구체적인 사례로 보자. 적은 아군의 5배다. 아군은 네 개의 요새에 나뉘어 주둔한다. 적군도 적절히 병력을 나누어 요새를 공격한다면 요새마다 6배의 적의 공격을 받는다. 이때 아군은 요새라는 이점을 이용해서 최소의 인원으로 버티기 하고, 기동으로 병력을 한 곳으로 결집해서 적을 타격한다. 네 곳의 병력이 모여 한 곳의 적을 치더라도 병력은 적보다 열세겠지만, 예상치 못한 공격이다. 거기다 부대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이동해 와서 측면과 후면을 치면 적은 약간의 병력 우위로는 버텨내지 못하고 무너진다. 이런 방식은 산악전투에서 유용하며 나폴레옹이 알프스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할 때 사용했다.
몽골 기병들은 빠른 기동력과 강력한 전투력으로 적의 후방으로 깊이 파고들어 가 보급과 지원 체제를 단절시켰다. 아무리 강력한 조명이라도 전선을 끊으면 성능을 발휘할 수 없다. 몽골 기병은 후방에서 닥치는 대로 날뛰며 전선을 품고 마지막에는 지치고 굶주린 적을 강타했다.
‘적은 분산시키고 아군은 집결한다.’ 전술의 기본이 되는 이 간단한 말을 손자는 왜 어렵게 했을까? 손자의 말이 줄기라면 분산과 집중은 가지다. 좀 어렵지만 원칙을 이해하는 사람이 다양한 상황에서 더 많은 가지를 창조한다. 전술은 공간의 변화나 기술의 발달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한다. 새로운 정복지, 낯선 땅에서의 전쟁을 염두에 두었던 손자는 이런 이유로 쉽고 구체적인 교훈 대신 원칙을 던져주었던 것 같다. ‘공격 전술이란 적이 아군보다 부족해지는 상황을 창출하는 것이다.’
부족함의 타깃을 정확히 선정해야 한다
공격이 적의 부족을 초래하는 것이라고 했을 때, 부족하게 만드는 것이 병력만은 아니다. 대표적인 타깃이 군량과 탄약이었다. 현대전은 기술전, 물량전이다 보니 타깃도 많아졌다.
제2차 세계대전 내내 항공기의 활용 방안과 타깃을 놓고 격론을 벌였다. 적의 정유시설, 산업시설, 철도와 같은 전략적 목표에 우선권을 두자는 주장과 전투 현장에서 적의 병력을 타격해서 아군 부대를 지원하는 전술 목표에 주력하자는 의견이 대립했다. 가장 황당한 목표가 ‘국가 혹은 국민의 전쟁 의지’라는 추상적인 목표였다. 전쟁 의지를 꺾는 타깃은 민간인과 민간가옥, 도시의 생활시설이었다. 이 이상한 이론으로 무차별적 도시 공습이 시작되었고, 참담한 비극을 낳았다.
태평양전쟁의 시발점이 된 진주만 공습은 전쟁사상 가장 요란하게 진행된 전쟁의 서막이었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일본의 군용기들이 진주만과 하와이의 곳곳을 공습했다. 이 기습으로 미군은 군인 3,581명이 사망하고 전함, 구축함 등 10여 척이 침몰했다. 전투기도 188대가 파괴되고 155대가 손상을 입었다.
기습 작전이란 관점에서 보면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단한 성공이었다. 여섯 척의 항공모함으로 구성된 거대한 함대가 전혀 들키지 않고 태평양을 건너 습격에 성공했다. 그러나 전략적 목표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무런 성공도 거두지 못했다. 기습의 목적은 미국 태평양 함대를 6개월에서 1년 정도 기동할 수 없게 만들고, 그 사이에 일본군이 남태평양까지 석권하고 요새화함으로써 미국의 개입을 원천 차단하는 것이었다. 태평양 함대를 마비시키기 위한 타깃이 두 개가 있었다. 첫째가 항공모함이었고, 두 번째가 유류저장고였다.
용의주도한 준비도 보람없이 하필 미군 항공모함들은 훈련을 나가 진주만에 없었다. 유류저장고는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있었는데, 일본군 지휘부는 유류저장고 공격을 후순위로 돌렸다.
항공모함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일본군 장교들이 다시 출격해 항공모함을 공격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사령관 나구모(南雲忠一, 1887~1944)는 이를 무시했다. 이 정도면 충분한 성공이라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유류저장고를 파괴했으면, 미군 함대는 1년은 꼼짝할 수가 없었다. 일본군이 왜 유류저장고를 간과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미국의 산업력을 가장 잘 이해하는 인물이었다고 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1884~1943)조차도 산업시설보다는 군용 시설을 중시했거나, 당시 일본인의 마인드로는 그 정도 대규모의 유류저장시설을 한곳에 모아놓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부족함’을 야기한다는 관점에서 가장 기발하고 잔혹했던 성공 사례는 소련군의 포로 공세였다. 1941년에 시작된 독일의 소련 침공은 처음에는 파죽지세였다. 전의를 상실한 소련군 수백만 명이 무더기로 항복했다. 1941년 8월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은 붕괴하는 전선을 막기 위해 포로로 잡히는 것도 반역 행위로 처벌한다는 명령을 내렸다. ‘스타프카 명령’이라고 불리는 이 조치는 전투 중에 항복한 자는 누구든 탈영병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가족은 서약의 파괴자이자 배신자의 가족으로 체포된다. 탈영병은 잡히는 순간 그 자리에서 총살된다. 항복한 자들은 어떤 수단을 써서든 척살될 것이며 그 가족은 모든 국가 수당과 보조금을 박탈당할 것이다. 이 명령에 따라 독일군에게 잡혔다가 도망쳐온 사람, 포위망에 갇혔다가 탈출해 온 사람도 수용소에 갇혀 조사를 받고 처벌당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조치 때문에 포로가 된 소련군 병사들은 독일군이 놓아준다고 해도 돌아가지 않았다. 독소전쟁에 투입한 독일군 병력이 약 1,800만 명인데, 520만 명에 가까운 소련군 포로는 독일군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들을 수용하고 감시하는 데 엄청난 수고와 병력이 필요했다.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이었다. 전쟁 말기로 가면서 독일군도 식량 부족으로 고통받는 와중에 300만 명이나 되는 소련군 포로를 먹여 살려야 했다.
소련군 포로에 대한 독일군의 대우는 악명이 높았다. 사실이 아니지만, 식량이 부족해지자 그들을 모두 아사시켰다는 얘기까지 나돌 정도였다. 독일군이 연합군 포로에 비해 소련군 포로를 푸대접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마어마한 소련군 포로는 독일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상황이었고 독일은 그들을 먹여 살릴 능력이 없었다. 소련군이 고의적으로 독일군의 포로가 되게 해서 적의 식량을 축내는 전술을 사용했던 것은 아니었는데도, 결과적으로는 포로들이 소련의 비밀 병기가 되고 말았다.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진주만의 모습
뒤바뀐 두 개의 단어
‘수비는 내게 남음이 있게 하는 것이고, 공격은 적이 부족함이 있게 하는 것이다[守則有餘, 攻則不足].’
이 구절은 『손자병법』 전체에서 가장 난해한 구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인들 역시 의미를 알기 어려웠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어느 틈에 문장이 ‘守則不足, 攻則有餘’라고 ‘부족’과 ‘여유’가 자리를 바꿨다.
그러면 해석이 좀 쉬워진다.
‘아군의 전력이 부족하면 수비를 한다. 힘에 여유가 있으면 공격한다.’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실전에서 지휘관 대부분이 이렇게 행동한다. 조조도 『손자병법』 주해서를 쓰면서 이 구절을 이렇게 해석했다.
어쩌면 조조도 수준이 너무 떨어진다고 의문을 가졌을 수는 있지만, 조조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였다. 아마도 그는 보통의 장교들에게는 이런 교훈이 더 유용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1972년에 한나라 귀족의 무덤에서 『손자병법』 죽간본이 발견되면서 비로소 이 구절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런데 죽간본이 발견되기 전에도 이 구절과 조조식 해석이 손자답지 않다는 의문을 지녔던 천재가 있었다. 당태종(唐太宗, 599~649) 이세민은 안시성 전투에서 패전한 것만 빼면, 중국 역사상 최고의 장군이자 전술가였다. 그가 휘하의 최고 병법가였던 이정(李靖, 571~649)과 대담한 기록이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인데, 당태종과 이정은 이 구절에 대한 조조의 해석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당나라 때 이미 잘못된 원문만이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이를 바탕으로 해석해야 했다. 이정은 장군들이 이 구절을 전장에서 자주 인용하면서 실전에 적용하고 있다고 말한다. 현상적 진리이기 때문에 지휘관들에게 무난하게 받아들여지고, 그들은 손자의 권위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할 수 있었기에 기분도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정은 조미니와 마찬가지로 이런 식의 대응은 회피이자 방관이라고 생각했다. ‘요새에 박혀 적의 행동을 보고 대응한다’는 것은 스스로 주도권을 양도하고, 그다음의 처분을 기다리는 행동밖에 되지 않는다.
당태종과 이정이 보기에 손자쯤 되는 전술의 대가가 적의 군세에 겁을 먹고 자진해서 주도권을 포기하는 행동을 지시했을 리가 없었다. 이정이 죽간본을 보았더라면 “그러면 그렇지”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보는 본문은 이미 단어가 뒤바뀐 문장이었다. 고민하던 그는 중국의 천재 전략가답게 기발한 해석을 한다.
이정은 이 구절에서 말한 부족과 여유가 군사력의 강약을 말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정의 다음 해석이 궁금하지만, 이세민이 즉시 이 말에 동의하고 새로운 해석을 제공하는 바람에 이야기가 끊어져 버렸다. 본문은 이세민의 해석으로 옮겨 간다.
‘수비의 요령은 적에게 우리가 부족한 것처럼 보이게 하고, 공격의 요령은 적에게 우리가 여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것【『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 하편】’이다.
조조보다 진일보한 이 해석은 사람들의 심리를 꿰뚫고 뒤통수치기를 좋아하는 탁월한 정치가답다.
3. 수비를 잘하는 자
수비를 잘하는 자는 지극히 깊은 땅 밑에 웅거한 것 같고 공격을 잘하는 자는 가장 높은 하늘에서 움직이는 것 같다. 그런 까닭에 능히 스스로를 보전하고 승리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善守者, 藏於九地之下; 善攻者, 動於九天之上. 故能自保而全勝也.
손자는 수비란 수비지점에서 병력과 화력에 여유를 유지하고 적의 공세 지점에서 병력이든 전투력이든 부족이 발생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참호에 웅크린 것처럼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 구절도 참 모호하다. ‘땅 밑에서 웅거한다’는 말이 ‘수비군은 바리케이트 뒤 웅크려서 악착같이 버텨야 한다’는 의미는 절대로 아니다. 전투에서 그런 자세가 필요하긴 하지만, 『손자병법』을 관통하는 정신은 효율이다. 맹목인 감투정신, 무조건적인 강요는 훌륭한 투지이기는 하지만 전쟁을 효율적으로 치르는 자세는 아니다.
‘참호 안에 웅크린 것처럼’이라고 말한 이유의 해답은 6편 ‘허실’에 손자는 공격을 능숙하게 잘 하는 자는 적이 수비할 방법을 모르는 곳을 공격하고, 수비를 능숙하게 잘 하는 자는 적이 공격할 방법을 모르는 곳을 지킨다고 말했다.
공격은 행동을 노출하지만 수비는 행동을 감출 수 있다. 수비자는 적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적을 관측하면서 아군의 움직임은 숨기고, 적이 공격하는 지점에 병력을 집중해서 운용한다. 병력이 적어도 효과적인 포진으로 병력 집중과 같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 역시 축성의 원리에 잘 반영되어 있다.
우리나라 성은 대체로 상부가 노출된 개방형 성벽이다. 반대로 왜성, 십자군의 성, 중세유럽의 성들은 성벽에 벽과 천장을 세워 밀폐된 공간으로 만든 곳이 많다. 섹터와 섹터를 연결하는 통로로 지하를 이용하거나 성벽을 터널처럼 만든다. 이런 구조는 수비대를 추위와 비바람에서 보호하는 장점도 있지만, 병력배치와 손실을 공격하는 쪽에서 전혀 볼 수 없게 한다는 것이 최고의 장점이다.
이런 지적에도 불구하고, ‘참호 안에 웅크린다’를 철벽 요새 안에서 단단하게 버티며 적의 전투력을 소모시킨다는 의미로 이해하고 싶은 유혹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이 방어의 이유이자 장이 아닌가? 전쟁사에서 그런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런 방어전의 필요성과 유용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손자가 원칙, 원론, 기본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원리를 이해하고 원리에서 시작해야 응용과 창조를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이 기본을 문자 그대로 실천하면 성공과 실패 사례가 반반이거나 더 낮아진다. 그런 대표적인 실패 사례가 있다.


▲ 일본 성의 외부(히메지성)와 내부. 성벽이 터널처럼 되어 있어 내부의 움직임을 적이 알 수 없다.
수비 전술과 마지노선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지옥의 참호전을 경험한 프랑스는 독일과 접한 국경에 철벽의 요새선을 구축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삽으로 판 참호만으로도 희생 비율이 100 대 1이 넘는 공격과 수비 비율을 창출했다. 콘크리트와 강철로 된 지하요새라면 이 비율이 1만 대 1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으로 탄생한 괴물이 마지노(Maginot)선이다. 강철 토치카, 사각지대가 없는 완벽한 화망, 병력과 탄약은 지하공간에 머물고, 신속한 이동을 위해 지하에 철로까지 깔았다.
병력의 집중과 분산을 위한 이동이 지하에서 이루어져 공격군은 프랑스군의 이동 상황을 볼 수 없었고, 독일군의 포격으로 병커를 파괴할 수도 없었다. 얼핏 마지노선은 ‘수비는 남음이 있게 하는 것’과 ‘참호에 웅크린 것처럼’이란 원리의 완결판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말로 참호에 웅크린 것이 문제였다. 강철문을 닫고 지하 깊숙이 웅크려 있다 보니 멀리 있는 적은 포격할 수 있지만, 지상으로 근접한 적군을 상대할 방비가 없었다. 마지노선의 벙커 파괴를 위해 투입된 독일 특공대는 벙커까지 접근하는 동안 상당한 희생을 치르고 고생하기는 했지만, 일단 벙커에 도달하면 사실상 이들을 제거할 방법이 없었다. 프랑스군은 문을 단단히 잡고 안에서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튼튼한 보호벽이라고 헤도 수비병이 안에서 웅크리고만 있으면 지켜낼 수 없다. 독일 특공대는 폭약으로 강철문을 폭파할 수 있었다. 파괴된 구멍 안으로 폭탄이나 가스탄을 던져 넣으면 지하의 밀폐된 공간은 지옥으로 변했다.
손자의 교훈이 철벽 안에 결사적으로 웅크리고 있으라는 뜻이었을까? 아군을 감추고 적군을 관측하며, 접전 지역에서 시간과 공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힘의 효율을 우세하게 하라는 의미였을까? 마지노선의 운명을 보면 답은 후자다.
공격의 원리: 하늘을 나는 것처럼
현대전에는 스텔스기가 날아다니고, 야습과 기습 작전 능력이 획기적으로 발달했지만, 아직도 일반적인 공격 시도는 적에게 노출되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노출을 피할 수 없다면 상대가 아군의 타격지점과 목표지점, 집결지점을 예측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가능한 한 빠르게 움직이고, 적의 예상에서 벗어나는 기동을 해야 한다. 공격은 언제나 적의 시야와 예상 위에서 움직여야 한다. 이것이 손자가 말한 창공을 나는 것 같은 공격이자 공격의 철칙이다.
독수리가 창공에 있으면 지상의 상태를 훤히 불 수 있다. 공격 목표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수비군의 방어가 부족한 지점을 발견하면 독수리가 내리꽂듯, 까마귀 떼가 몰려들듯 신속하게 달려들어야 한다. 포메이션 이동, 교란 작전, 양동 작전 등 온갖 수단을 망라한 공격의 성공과 효율이 이 원리에 달려 있다.
평범해 보이지만, 여기에 손자의 통찰이 빛나는 부분이 있다. 손자의 시대는 아직 전차에 의존하던 시기였다. 전차는 평지에서만 사용할 수 있고 일직선상의 질주는 빠르지만 선회는 힘들다. 손자의 ‘창공을 날아다니는 것처럼’이란 비유는 기둥과 기승을 주무기로 하는 유목 기병에게는 아주 쉬운 일인데, 중국의 보병부대나 전차병에게는 난감한 요구다. 적의 시야를 벗어나는 빠른 기동은 애초에 불가능하며, 빠르게 움직이고 적을 기만한다고 평원에서 모이고 분산하는 것을 반복하다 보면, 보병 대형은 혼란에 빠지고 전차는 뒤엉키며 충돌 사고로 바퀴가 빠지는 등 엄청난 혼란이 발생할 것이다.
우리는 손자의 명성에 익숙해서 손자의 말이라고 하면 일단 경청할 자세를 보이지만, 손자 생전에 그의 명성은 후대만큼 화려하지 않았다. 손자가 지휘관들 앞에서 공격의 원리를 강론했다면 그들 대부분이 말은 그럴듯하지만 현실적인 난관이 많다며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이다. 북쪽 국경에 유목지대를 접하고 있는 조나라나 연나라의 장수라면, 그건 변방의 유목민에게나 가능한 전술로 우리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것이 손자를 포함한 모든 선각자가 마주치는 운명이다. 춘추시대나 고대 그리스의 전쟁에서 공격 측 지휘관을 괴롭히는 문제는 적이 아군의 대형만 봐도 공격 방향을 알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수백 년을 싸워오면서 손자의 공격 이론이나 유목 기병의 공격 전술이 자신들의 방식에 비하면 얼마나 가공할 위력을 발휘하는지 깨달을 기회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의 장수들은 이 문제를 타개하거나 변화를 추구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한나라 이후 당나라 시대에 와서야 손자의 학설은 중국군의 표준 전술에 반영되어 제대로 된 실체를 지니게 되었다. 그 비결은 기병의 도입과 전술 개량이었다.
한나라는 흉노를, 당나라는 돌궐족과 몽골 계열의 유목 부족을 포섭해서 기병을 조달했다. 간단한 듯하지만 수백 년이 필요한 힘겨운 발상의 전환이었다.
기병만이 하늘을 나는 듯한 공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남북전쟁 때 스톤월 잭슨(stonewall Jackson, 1824~1863) 장군의 부대는 도보 기병대라고 불린 보병으로 멋진 기동전을 치러냈다. 셰넌도어 계곡에서 벌인 소위 계곡 전투에서 잭슨의 부대는 일반적인 보병의 이동 속도를 상회하는 기동력으로 북군이 예상치 못한 지역을 공격하고, 자신들보다 월등한 병력의 부대를 기습해서 승리했다. 48일간 그들은 1,000킬로미터를 기동했다. 잭슨 병력의 20퍼센트 정도가 낙오해서 전투에 참전하지 못했으나 개의치 않았다. 잭슨의 총병력은 1만 7,000명이었지만 맥다월(|rvin McDowell, 1818~1885)이 지휘하는 3배가 넘는 6만 명의 북군을 농락하고 다섯 번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잭슨의 활약상에 놀란 링컨은 남부의 수도 애틀랜타를 공격하고 있던 북군을 지원하기로 되어 있던 예비대의 이동을 철회하고, 전군을 워싱턴 방어로 돌렸다. 애타게 기다리던 지원군이 오지 않자 북군의 애틀랜타 공략(반도 전역) 역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 셰넌도어 전역. 수적으로 열세였던 잭슨의 부대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와 적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기동해 5월 8일, 마침내 맥다월에 도착해 밀로이 부대를 격파했다.
4. 최선의 승리
여러 사람이 알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한 승리를 거두는 것은 최선의 승리가 아니다. 전쟁에서 이겨 천하 사람들이 잘했다고 말하는 승리도 최선의 것은 아니다.
見勝不過衆人之所知, 非善之善者也; 戰勝而天下曰善, 非善之善者也.
가벼운 털 한 가닥을 드는 것은 가지고 많은 힘을 썼다고 하지 않고, 해와 달을 보는 것을 가지고 눈이 좋다고 하지 않으며, 천둥소리를 듣는 것을 가지고 귀가 밝다고 하지 않는다. 예전에 전쟁을 잘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승부를 쉽게 이길 수 있게 만들어놓고 이기는 자다.
故擧秋毫不爲多力, 見日月不爲明目, 聞雷霆不爲聰耳. 古之所謂善戰者勝, 勝易勝者也.
그런 까닭에 전쟁을 잘하는 자의 승리는 지혜롭다는 명성도 없고. 용감했다는 공로도 없다. 그런 까닭에 그의 승리는 틀림이 없다. 틀림이 없는 이유는 그가 반드시 승리하도록 조치해놓았기 때문에 이미 패배한 자에게 승리를 거두는 것이다.
故善戰者之勝也, 無智名, 無勇功. 故其戰勝不忒. 不忒者, 其所措必勝, 勝已敗者也.
전쟁을 잘하는 자는 자기가 패배하지 않을 곳에 서서 적의 패배를 놓치지 않는다. 이런 까닭으로 이기는 군대는 먼저 이긴 뒤에 전투를 벌이고, 패배하는 군대는 먼저 싸움을 벌이고 승리를 추구한다.
故善戰者, 立於不敗之地, 而不失敵之敗也. 是故勝兵先勝而後求戰, 敗兵先戰而後求勝.
용병을 잘하는 자는 도를 닦고 법을 보존한다. 고로 승리와 패배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것이다.
善用兵者, 修道而保法, 故能爲勝敗之政.
프로야구에 외야수가 전력 질주로 달려가 멋진 다이빙 캐치를 했다. 진짜 명수비였을 수도 있지만, 가끔은 타구 판단과 스타트가 늦어서 다이빙을 하는 경우도 있다. 수비수가 타구를 빨리 예측하고 몸의 중심에서 편안히 잡으면 TV 하이라이트에 등장하기 어렵다.
손자가 말하는 최선의 승리가 이런 것이다. 사람들은 극적인 승부와 역전승에 환호하지만, 뛰어난 지휘관이었다면 그런 극적인 위기 상황까지 가지 않고 전투를 쉽게 끝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전투를 쉽게 끝내는 최고의 전술은 전투 현장에서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싸우기 전에 내게 유리한 상황을 선점하고 쉽게 싸워 이기는 것이다. 쉽게 이길 수 있는 전투 상황을 조성하는 방법은 전술, 기술, 지리 등 모든 것을 종합해서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지점을 선택하고 그곳으로 적을 끌어내는 것이다.
이길 수밖에 없는 최적의 조건을 만들다
공중전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처음 등장했다. 전사 간의 일대일 대결은 중세의 전설에서나 등장하던 방식인데, 특이하게도 최첨단 기술이 충돌하는 공중전에서 일대일 대결이 재현되었다.
프로펠러가 달린 페가수스를 타고 공중에서 벌이는 현대판 기사들의 전투는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다소 특이한 기록을 낳았다. 공중전이 처음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의 창공에서는 독일 조종사들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했다. 붉은색으로 칠한 포커 삼엽기를 몰아 ‘붉은 남작(Red Baron)’이란 별명을 얻은 만프레드 폰 리트호펜(Manfred Albrecht Freiherr von Richthofen, 1892~1918)은 80~100대의 연합군 항공기를 격추했다. 붉은 남작이 전사하자 그의 비행 대대를 지휘한 사람은 나중에 나치의 2인자가 되는 헤르만 괴링(Hermann wilhelm Göring, 1893~1946)이었다. 그의 격추기록은 22대였다.
영국과 프랑스에도 붉은 남작에 비견하는 뛰어난 에이스들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독일 상공에서 진행된 공중전은 독일군이 우세했다. 공중전의 기본 준칙, 다양한 공중 전술도 독일 조종사들이 먼저 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 접어들자 상황이 바뀐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에이스 출신으로 독일 공군 사령관이었던 괴링은 항공력만으로 영국을 침몰시키겠다고 자신하고 대서양 항공전을 벌인다. 어마어마한 폭격기와 전투기 부대가 영국을 공습했고, 양측의 전투기 조종사들은 도버해협과 영국 상공에서 필사의 대결을 벌였다. 영화로도 제작되었던 이 유명한 공중전은 결국 영국군의 승리로 끝났다.
뒤바뀐 승패의 원인에 관해서 전투기의 성능, 조종사의 능력, 레이더 기술 등 다양한 해석이 있다. 그러나 당시 영국·프랑스·독일의 기술력은 사실 오십보백보였다. 조종사들의 능력도 극심한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다. 결정적 차이는 홈그라운드 문제였다. 공격하는 쪽은 적을 기다리고 있는 쪽에 비해 이미 상당한 피로를 느끼게 마련이라, 자연히 집중력이 저하된다. 1초도 안 되는 시간에 승부가 갈리는 공중전에서 피로와 집중력 저하는 상당히 불리한 요인이다.
더 결정적인 요소는 바람과 시간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전투기들은 독일 상공에서 맞바람을 맞으며 싸워야 했다. 오늘날의 경차보다도 허약한 엔진을 달고 있던 당시의 항공기에 맞바람은 심각한 장애였다. 게다가 연료 문제로 독일 상공에 머무를 수 있는 시간이 고작 30분 정도였다. 시간과 연료의 압박을 받으며 싸우다가 타임아웃이 되면 적에게 등을 보이며 달아나야 했다. 연합군 조종사들에게는 대단히 치명적인 핸디캡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양상이 바뀌었다. 독일군 조종사들이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 땅으로 들어갔다. 독일군의 주력 전투기 메서슈미트는 작고 가볍고 빠른 경전투기의 대명사와 같았다. 그런데 이런 전투기는 항속거리에 문제가 있다. 더 치명적인 단점은 가속했을 때 연비가 급속히 나빠진다는 점이었다. 평균 속도라면 메서슈미트의 항속거리는 도버해협을 왕복하며 임무를 충분히 수행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적과 조우해서 엔진 출력을 최대로 가속하면 연료 게이지도 급속히 떨어졌다. 독일군 조종사들은 연료 게이지를 보면서 싸워야 했다. 0.1초의 순간 판단력이 좌우하는 승부에서 이것은 심각한 핸디캡이 된다.
게다가 영국군 조종사들은 격추되어 땅이나 바다로 떨어져도 살 가능성이 컸지만, 독일군 조종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많은 독일군 조종사들이 연료 부족으로 도버해협에 추락했다. 하늘에서 대규모 항공전이 벌어지는 동안 바다에서는 어부들이 추락한 조종사들을 구하기 위해 돌아다녔다. 전쟁에서 인도주의를 추구하기는 쉽지 않다. 영국 어부들은 바다에 떠 있는 조종사에게 접근하면 구해주기 전에 먼저 국적 확인부터 했다. 그가 독일인이거나 영어를 못하면 버려두고 떠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연료와 바람, 시간의 압박도 큰 부담이었는데, 영국군은 레이더라는 신무기까지 보유하고 있었다. 레이더는 독일군 항공기를 미리 포착했고, 영국 전투기들은 자신들이 가장 유리한 지접에서 기다리다가 독일 공습부대를 요격했다.
‘독수리의 날’은 제2차 세계대전 대서양 전선의 운명을 가른 중요한 전투 중 하나였다. 그리고 독일은 이 대회전에서 실패함으로써 치명적인 일격을 당하게 된다. 이 무리한 작전의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공군 사령관 괴링이었다. 괴링은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해 공군만의 독자적인 작전을 펴고 싶어 했다. 공군 소속의 지상부대까지 거느리고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항공기의 위력으로는 공군에 의한, 공군을 위한 승리를 거두기에는 무리였다. 공군 내부에서도 자존심이 좀상하기는 하지만 지상군을 지원하는 것이 공군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조직이건 개인이건 자신의 독자적 능력을 과시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보편적 욕구다. 영국과 미국 공군도 간간이 이런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욕구를 실현하기 위해 절대 불리한 요건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면, 혹은 능력 이상의 욕심을 부린다면, 손자의 경고처럼 모두가 찬탄하는 승리, 과시적인 승리를 추구하다 쉬운 승리를 포기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패배한다면 조직의 발전도 요원해질 것이다.
언론에서 찬양하는 승리를 추구하지 말라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승리, 모두에게 찬양받는 승리는 오늘날로 치면 언론에서 열광하는 승리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열광의 이면에는 꼭 정치가 있다. 정치가의 야망이나 권력으로 진출하고 싶은 사령관의 야망이 전투를 망친다. 전쟁사에서 가장 참혹한 패전의 배경에는 늘 그릇된 정치와 정치적 야심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최대의 살육장은 동부 전선이었다. 소련은 민간인을 포함해서 2,000만~2,500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고 추정하고 있다. 독일군도 300만 명이 넘는 생명을 소련 평원에 뿌렸다. 그 참혹했던 전장에서 가장 참혹한 광경이 펼쳐진 도시가 두 곳이 있다. 레닌그라드와 스탈린그라드다. 두 도시는 알고 보면 그 정도로 중요한 전략 요충이 아니었음에도 소련에서 가장 중요한 리더 두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스탈린그라드는 볼가강 연안의 공업도시였다. 원래 지명은 볼고그라드였지만, 1925년에 스탈린그라드로 바뀌었다(현재는 다시 볼고그라드로 불린다). 독일군의 볼가강 공세는 볼가강을 기준으로 수련을 남북으로 양단하고 코카서스의 유전지대를 획득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스탈린그라드는 점령해도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그런 목표였다. 그러나 도시가 전쟁터로 변하면서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가 스탈린그라드라는 명칭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스탈린(Joseph Stalin, 1879~1953)은 스탈린대로 자신의 이름이 걸린 도시를 방어하기 위해 전 주민을 희생시켜도 좋다는 각오로 인간방패로 맞섰다.
폐허와 먼지뿐인 도시, 점령해도 아무 의미 없는 도시를 점령하기 위해 독일군 6군 전체가 투입되었다. 독일군의 패전이 자명해졌을 때, 히틀러는 자신의 실수를 덮고 명예를 지키기 위해 6군의 철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철수를 허락했다고 해도 이미 늦었지만, 독일 6군은 스탈린그라드에서 무려 76만 명이 전사하고 9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독일군 포로들은 독일에서 버림받았을 뿐 아니라 소련군에게서도 엄청난 학대를 받았다. 종전 후에도 스탈린그라드의 포로들은 전범이라고 송환을 거부당했다. 1956년에서야 아데나워(Konrad Adenauer, 1876~1967) 총리의 노력으로 완전한 송환이 이루어졌는데 생환한 포로는 겨우 5,000명이었다.
숫자상으로 보면 소련군의 희생은 더 끔찍했다. 소련군은 무기도 지급하지 않은 채 병사를 전선에 밀어 넣었다. 독일에 저항하는 사람이 스탈린그라드에 한 명도 남지 않아야 완전히 점령당한 것이라는 신조에 따라 민간인 철수조차 허용하지 않은 탓에 소련군 112만 명이 전사하고 47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민간인 희생자는 정확한 통계도 없다. 중공군의 인해 전술도 이런 식은 아니었다. 그야말로 병사와 민간인이 뼈와 살로 독일군의 총알과 포탄을 소모시키며 도시를 사수했다.
좌우간 성공은 했다. 보급이 줄어들고 독일군 전선이 동강 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스탈린그라드의 독일군은 거꾸로 포위되고 보급이 끊겼다. 마지막 순간에 히틀러는 6군 사령관 파울루스(Friedrich paulus, 1890~1957)를 원수로 진급시켰다. 진급의 의미를 깨달은 파울루스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보헤미아의 상병(히틀러를 가리킴)을 위해 자살 따위는 하지 않을 걸세.”
한편 나폴레옹에게 최고의 영예를 안겨준 전투는 앞에서 살펴보았던 아우스터리츠 전투다. 전쟁사에는 ‘산 뒤쪽의 사정’이라는 숙어가 있다. 위대한 승리의 이면에는 상대의 실수가 있다는 의미다. 아무리 뛰어난 장군이라도 상대의 도움(?)이 없다면 역사에 기록될 대승리를 거두기 힘들다.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도 그랬다. 나폴레옹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획기적인 기동과 나폴레옹의 신산, 예지력이 승리의 요인이지만,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 입장에서 보면 그들만의 치명적인 실수가 있었다.
아우스터리츠에서 나폴레옹은 사면초가의 위기 상황을 맞았다. 프랑스군과 러시아-오스트리아 연합군이 대치 중인 상황에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군이 대패했다. 이 소문이 파리로 전해지면서 파리에서는 쿠데타가 발생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쿠데타를 우려했던 나폴레옹의 부하들은 바로 회군할 것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전망도 여의치 않았다. 이미 나폴레옹군은 병력에서 열세였는데, 프로이센 군대가 연합군에 합류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고, 러시아의 2차 지원군도 다가오고 있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었다. 7만 5,000명이 넘는 적을 바로 앞에 두고 파리까지 돌아가자면 절반의 희생은 각오해야 했다. 버티고 있으면 적은 2배로 늘어나 자신들을 포위하고 섬멸할 것이다. 유일한 해결은 현 상황에서 빨리 승부를 결정한 뒤에 승전보를 가지고 파리로 개선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나폴레옹이 원하는 대로 속전속결로 나와 줄 리가 만무했다.
러시아군 원수 쿠투조프(Mikhail Illarionovich Kutuzov, 1745~1813)는 서두를 마음이 없었다. 시간은 연합군의 편이었다. 쿠투조프는 지원 병력이 모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참이었다. 그러나 젊고 감상적이고 평생 헛된 명예욕을 주체하지 못했던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Aleksandr Ⅰ, 1777~1825)가 조바심을 견디지 못했다. 젊은 차르(제정 러시아 때 황제의 칭호)는 나폴레옹을 격퇴했다는 명성을 얻고 싶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기다려야 했지만, 상황이 나폴레옹에게 너무 불리해서 당장이라도 도망쳐 버릴지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다. 황제는 지구전을 요청하는 쿠투조프의 지휘권을 박탈하면서까지 전투 개시를 촉구했다. 마침내 연합군은 빠른 승부를 원하던 나폴레옹의 함정에 걸려들고 말았다.
아우스터리츠 전투만이 아니다. 많은 지휘관들이 명예를 좇느라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사회와 일반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오너와 CEO의 개인적 취향, 단기적이고 가시적인 업적을 위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경우는 수도 없이 많다. 언론을 의식하고 명예욕을 추구하느라 과장한 창립자의 신화가 엉뚱하게 기업의 덫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명성을 위해 성공담을 조작하고 수치와 통계를 변경하면 그 조직은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 이런 경향은 조직뿐만 아니라 내부 구성원이나 개인사업자에게 무수한 오류를 양산한다.
5. 도량수칭승(度量數稱勝)
병법의 한 구절에서 말하기를, 첫째는 도(度, 측정), 둘레는 양(量, 계량), 셋째는 수(數), 넷째는 칭(稱), 다섯 째는 승리라고 했다. 지형에 따라 측정하고, 측정한 수치에 의해 계량하고, 양에 의거해 수를 산출한다. 수에 의거해 칭, 즉 양측의 전력을 비교하고, 이에 의거해 승부를 판정한다.
兵法: 一曰度, 二曰量, 三曰數, 四曰稱, 五曰勝. 地生度, 度生量, 量生數, 數生稱, 稱生勝.
그러므로 승리하는 군대는 저울이 무거운 추를 얹은 쪽으로 기우는 것과 같다. 패배하는 군대는 가벼운 추로 무거운 추를 이기려는 것과 같다. 승리하는 사람이 백성을 싸우게 하는 방법은 천 길 계곡에 막아놓은 물을 트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형(形)이라고 한다.
故勝兵若以鎰稱銖, 敗兵若以銖稱鎰. 勝者之戰民也, 若決積水於千仞之谿者, 形也.
전략과 전술을 실행할 때는 명예욕이나 기타 감정적 요인을 배제해야 한다. 철저하게 현장과 현실만을 보고, 객관적이고 계량적인 수치를 통해 양측의 전력을 비교하고 승부를 예측해야 한다.
손자는 그 예를 제시한다. 먼저 자국과 적국 국토의 거리와 면적을 측정한다. 이것이 ‘도’다. 거리와 면적이 나오면 부피 계산이 가능하다. 이것이 ‘양’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식량 생산력, 말, 무기 등이다. ‘수’는 전쟁에 필요한 병사나 물자의 구체적인 숫자다. 적국의 규모, 도시의 수, 거리, 도로, 군대 상황을 토대로 전투에 필요한 병력, 점령과 유지에 필요한 병력과 보조 인력의 수를 산정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 수치가 나오면 양측의 전력을 비교한다. 그 후에 전쟁의 승부도 판단할 수 있다. 이 단락에서는 시야를 좁혀 구체적으로 한정하기는 했지만, 이미 1편의 내용에 포괄되는 내용이다. ‘도’에서 시작하는 5단계는 이성적이고 정직한 분석을 강조하기 위해 수학 문제의 풀이 순서같이 도식적인 예를 제시한 것이다. 굳이 각각의 의미를 현학적으로 주해할 필요는 없다.
그래도 손자의 말인데 소홀히 넘겨서는 곤란하지 않을까? 그렇다. 흥미로운 것은 다음 부분이다.
형세란 접전 지역에서의 실전 전투력이다
손자는 정확한 분석과 통찰을 발휘하면 싸우기 전에 승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전력 분석만으로 승부를 예측하고 결정할 수 있을까?
스포츠의 세계에는 객관적 전력이 떨어지는 팀이 승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리 강팀도 리그에서 전승 우승은 어렵다. 아무리 정확히 분석한다고 해도 기상, 사고, 자연재해 등 예측할 수 없는 요소가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싸우기 전에 승부가 결정된다면 이편의 내용은 필요가 없다.
결론부터 말하면 손자는 기계적인 승부 결정론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손자는 왜 이런 오해받을 만한 발언을 했을까? 손자의 말들을 다시 음미해보자.
1. 양측의 전력을 비교하고, 이 비교에 의거해 승부를 산출한다.
2. 승리하는 군대는 저율이 무거운 추를 없은 쪽으로 기우는 것과 같다.
3. 승리하는 사람이 백성을 싸우게 하는 방법은 천 길 계곡에 막아놓은 물을 트는 것과 같다. 이것을 형이라고 한다.
이 세 문장 사이에는 교묘한 비약이 있다.
1의 전력 비교는 객관적인 전력 비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군과 적군의 비교한 뒤에 구상한 전략 및 전술까지 포함한 비교다. 다른 편에서 말한 손자의 발언을 보면 전력 비교가 승부를 결정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아무리 정확해도 승부는 아직 예측 단계다. 전력 비교를 기반으로 전술을 세우고 승부는 여기서 갈려야 한다.
그런데 2에서 군대가 승리하는 것은 저울추가 무거운 쪽으로 기우는 것 같다고 단언해버린다. 갑자기 결정론이 된다. 그러나 진정한 핵심은 3이다. 3에서 갑자기 논지가 바뀐다.
승리를 확신하고, 전력 분석에서 이미 승리를 확신하더라도 실전에서 승리를 거두려면 백성(병사)들이 댐을 폭파했을 때 쏟아지는 물처럼 싸우게 만들어야 한다고 한다.
예측은 아무리 정확해도 예측이다. 예측에서 실행으로 넘어오는 과정에는 격차와 손실이 있다. 실전에서 시행해야 하는 마지막 과제가 병사들이 확신을 가지고 총력을 발휘하게 하는 것이다.
명나라 최고의 명장 척계광(戚繼光, 1528~1588)은 중국의 무장답게 손자의 형세론을 제대로 이해하고 활용한 장군이다. 그가 청년 장교 시절 저장성에 부임해서 왜구와 대면했을 때 맞부닥친 딜레마가 명나라 병사들의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머릿수만 많지, 반은 민간인인 농민병으로, 숙달된 직업 전사인 왜구를 상대하기는 버거웠다.
왜구도 형세론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었다. 비록 병력이 적어도 강력한 전투력, 숙달된 전투 경험에서 얻은 전술 운용 능력과 현장 대응 능력으로 어떤 지형, 어떤 상황에서 명나라 군대와 부딪쳐도 자신감이 넘치게 전술을 운용하며 명군을 격파했다. 전술통이라는 척계광이 그들의 전투 방식을 보고 배울 정도였다.
예를 들면 왜구는 명군과 조우하면 자신감을 잃고 후퇴하는 척하며 산비탈 위로 물러가 포진한다. 명군은 지형적으로 아래에서 위로 공격하는 것이 조금 불리한 줄은 알았겠지만, 왜구가 물러서는 모습을 보고 용기백배해서 공세로 나간다. 명군의 지휘관들은 왜구를 향해 물밀듯이 쏟아져 올라가는 명군 병사들을 보면서 분명 머릿속에서 손자의 형세론을 떠올렸을 것이다.
명군이 관념적 형세론에 의지했다면 왜구는 물리적, 경험적 형세론을 장착했다. 그들은 비탈 위에 앉아서 숨을 고르며 명군의 선제공격을 유도했다. 경사로, 위에서 아래로 달려가는 힘, 자신들의 전투력과 명군의 다소간 체력 소모가 실전에서 자신들에게 얼마나 유리하게 작용하는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명군이 가까워지면 왜구는 일제히 일어나 명군을 향해 돌진했다. 이때도 일본도처럼 명군의 종심을 가르며 베고 앞으로 나갔을 것이다. 그 결과 명군은 순식간에 형세를 잃고 그때까지 두 저울추의 비등비등하던 무게가 갑자기 왜구로 기울었을 것이다.
척계광은 깃발을 흔들고 함성을 지르는 것은 스스로를 속이는 형세에 불과하다고 깨달았다. 군복을 입히고 무기를 들려준다고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무기를 다룰 줄 알고 그 숙련도에 자신감을 가져야 군인이다. 무기를 쥐여 주고 군인을 모아놓는다고 군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사기 충만한 군대는 함성도 크겠지만, 역으로 함성이 크고 퍼포먼스가 요란하다고 사기나 실력이 오르는 건 아니다.
전술로 형세를 만들고 전술에 대한 자신감이 있어야 강한 군대가 된다. 전술적 형세를 위해 척계광은 두 가지를 창단했다. 하나가 원앙진, 다른 하나가 화포 전술이었다. 여기서는 원앙진보다 화포 전술에 대해 살펴보겠다.
화약무기는 명군에겐 독보적인 신무기였다. 숙적인 왜구, 만주족, 몽골족 등은 아직 화약 무기가 없었다. 그런데 이 시대의 화약 무기는 소리만 요란했지, 불발탄과 오발탄이 많았고 명중률이 형편없었다. 말들을 놀라게 해서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는 데 상당한 효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다양한 상황에서 기대만큼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1467년 이시애(李施愛. ?~1467)의 난에 종군했던 유자광(柳子光, ?~1512)은 세조(世祖, 1417~1468)에게 자신이 목격한 전투 보고서를 올렸다. 정부군이 비밀 무기였던 화차로 반군을 향해 신기전을 맹렬하게 발사했는데, 명중한 것은 하나도 없고 모두 적의 뒤로 넘어가 떨어졌다는 내용이다. 당시 화차부대의 지휘관인 우공(禹貢)이 조선군 최고의 화약 병기 전문가였는데도 그 모양이었다.
이 보고서로 유자광은 세조의 관심을 끌었지만, 화차부대 지휘관은 억울했을 것이다. 척계광에 의하면 신기전이 적의 뒤로 넘어간 것은 아주 올바른 사용법이었다.
척계광의 시대에도 화약 무기의 명중률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척계광은 적을 향해 포격할 때는 맞추려고 애쓰지 말고 높게 조준해서 적의 머리 뒤로 날리라고 조언하고 있다. 유자광이 목격한 조선군의 포격과 동일한 방식이다. 유자광은 이 포격을 보고 코웃음을 쳤고, 세조는 절망했다. 그런데 왜 척계광은 이런 조언을 했을까? 수십 차례의 실전 경험을 쌓으면서 그는 예상치 못한 현상을 알아냈다. 신기전을 써서 포성과 연기가 진동하고 적진에서 불길이 솟으면 병사들이 용기백배해서 적진으로 돌격하더라는 것이다. 실제 적군이 화기에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이는 감정적 흥분을 유도하는 것이 아닌가? 포화의 허상에 속는 것은 신병들에게나 먹히는 것이 아닐까? 척계광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척계광은 고참병들도 신병들과 똑같이 흥분하고 용감해지는 것을 발견했다. 고참병들은 신병들과 달리 포격의 결과에 헛된 기대를 걸지 않지만, 형세의 힘을 깨닫고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부여함으로써 전사가 되는 법을 알게 된 것이다. 이시애의 반군과 치른 전투에서도 결국은 우공의 총통군이 가장 먼저 고지를 점령해서 결정적 승기를 제공했다. 포격이 주는 이런 효과는 현대전에서도 여러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
이젠 흔한 방법이 되었지만, 배지(badge)와 깃발을 만드는 것, 멋진 로고에 공을 들이는 것, 훈포장을 하거나 이달의 사원을 뽑아 매장에 거는 등의 행위는 모두 이런 노력의 산물이다. 이 원리를 기억한다면 구체적인 방법은 앞으로도 얼마든지 창안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근원적인 자신감은 조직에 대한 신뢰와 구성원들과 함께 하는 작은 성공의 경험에서 양생한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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