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섞임
몽골 제국 시절부터 중국은 일찌감치 세계화의 길로 나선다. 그러나 낡은 제국 체제는 발전에 내내 걸림돌이 되었고, 결국 중국은 밀려오는 서양 세력 앞에 비참하게 몰락한다.
통일보다 분열이 자연스러웠던 인도는 영국의 손에 의해 통일을 이루면서 식민지 시대를 맞는다.
일본의 대외 진출은 곧 침략 전쟁이었다. 한반도를 놓고 중국과 경쟁하던 일본은 마침내 꿈을 이루지만 군국주의의 덫에 걸려든다.
7장 중국의 화려한 시작과 비참한 종말
1. 역사상 가장 강했던 제국
슈퍼스타의 등장
한족의 송 제국을 강남으로 밀어내고 화북을 지배한 거란의 요나 여진의 금은 예전과 같은 유목 국가가 아니었다. 예전의 북방 민족들은 힘이 강성해지면 중국을 침략하고 약탈하는 데 그쳤지만, 요와 금은 아예 중원에 들어앉아 중국 대륙을 공동 명의로 하자고 나섰던 것이다. 그래서 흔히 이전의 유목 국가들을 침투 왕조라고 부르고, 요나라 이후의 유목 국가들을 정복 왕조라고 부른다【정복 왕조라는 용어는 20세기의 경제학자인 카를 비트포겔(Karl August Wittfogel)이 10세기 이후 크게 달라진 유목 국가의 성격을 나타내기 위해 만든 용어다. 사실 이 용어는 문제가 있다. 중국의 한족 국가들을 기준으로 중국 역사를 볼 뿐 아니라, 남북조시대 화북에 자리 잡았던 북방 민족 계열의 국가들을 포함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0세기 이후의 유목 국가들은 한 왕조가 수백 년씩 지속적으로 중원을 지배하면서 한족과 본격적인 패권 경쟁을 벌이게 된다는 점에서 그 이전과는 다른 성격을 부여하는 것도 일리가 있다】.
일찍이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강남 지방이 한족 문화권에 포함된 뒤부터 한족은 중원 북부와 만주, 몽골, 중앙아시아의 초원 지대에 사는 다양한 유목민족에게 ‘오랑캐’라는 낙인을 찍고 자신들과 확실히 구분했다. 오랑캐라는 낙인이야 옳은 표현일 수 없겠지만, 문명적으로 보면 그 구분 원래부터 중원 문화권이 아니더라도 중원의 본래 한족처럼 농경 생활을 영위한 데 반해, 북방 지역은 반농반목 또는 유목 생활을 하는 민족들이 사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생활 방식의 차이만큼 큰 차이가 또 있을까?
물론 한족이 북방 민족을 미개하게 여긴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국가의 성립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최초의 유목민족 국가가 생긴 것은 한족 최초의 통일 국가가 생기는 것과 때를 같이한다. 진 제국이 중국을 통일했을 무렵, 그 북방에서도 강력한 흉노 제국이 탄생했다. 4장에서 본 것처럼, 흉노는 한 제국 초기까지만 해도 한의 조공을 받을 정도로 세력이 강성했으나 기원전 2세기 중반 한 무제의 공략에 밀려나 중앙아시아로 이주했다(이로 인한 도미노 같은 민족이동은 5장에서도 본 바 있다). 그 후 1세기 무렵에 이르면 중국 주변에서 흉노는 이리저리 갈라져 본래 형체를 찾을 수 없게 되지만, 유럽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 북방 민족의 고향 중국의 중원을 위협하고 멀리 서방 세계에 이르는 민족이동으로 세계사의 무대에서 큰 몫을 한 흉노, 돌궐, 몽골 등은 모두 이 몽골 초원에서 발흥한 유목민족이다. 특히 흉노는 서방의 고대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에게서 금속 문화를 전래받아 일찍부터 막강한 물리력을 보유했다.
동유럽에 자리 잡은 흉노(훈족)는 5세기 중반 ‘신의 재앙’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아틸라(Attila)의 지휘 아래 유럽 세계를 공포에 떨게 했다. 당시 로마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고트족과 반달족 등 이미 적잖은 유목민족들의 침탈을 받은 일이 있었지만 동방에서 온 흉노는 전혀 다른 막강한 상대였다. 흉노의 최대 무기는 말과 활이었다. ‘그들은 말 등에서 밥을 먹고 밤에는 말의 목덜미에 엎드려 잠을 잤다.’ 이런 로마 장군의 말처럼 흉노는 말을 다루는 솜씨가 뛰어났다. 또한 짐승의 뿔과 나무를 덧대어 만든 흉노의 활은 길이가 짧으면서도 힘이 좋았다. 이 말과 활의 무기는 훗날 몽골에까지 이어지는 전통이 된다.
흉노 이후 북방 민족들은 5호16국 시대와 남북조시대에는 번갈아 중원을 지배하며 중국 역사의 주요한 일부로 참여했다. 그러다 한족의 통일 제국 수가 들어서면서 중원에서는 쫓겨나지만, 북방은 여전히 그들의 것이었다. 이 시대에는 돌궐이 강성해져 랴오둥과 황하 이북,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돌궐 제국을 세웠다.
▲ 몽골의 기병 몽골군은 유목민족답게 말을 다루는 기술이 능했다. 그들은 말 위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잤다고 한다. 중국의 전통적인 병법에는 보병과 기병이 분리되어 있는 데 반해, 몽골군은 모두가 기병이었으므로 뛰어난 기동력을 전투에 활용할 수 있었다.
이후 돌궐은 수 문제의 분열책으로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뉘었고, 서돌궐은 중앙아시아까지 진출해 튀르크 제국을 세웠다. 흉노와 돌궐 등 고대 북방 민족들의 성장과 발전은 유럽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니, 가히 세계를 무대로 활동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흉노와 돌궐이 세계사에 영향을 주게 된 것은 한족의 통일 제국들에 밀려났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북방 민족의 세력이 한족에 밀려나지 않을 만큼 강했다면? 그 가정에 대한 현실의 답이 바로 요와 금이다. 이들은 한족의 통일 제국을 남쪽으로 밀어낸 다음 한족 문화권의 중심지인 중원을 차지하고 직접 지배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밀려나지 않을 만큼 강했기 때문에 고대 북방 민족들처럼 민족이동으로 세계사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다음에 등장하는 북방 민족 국가는 요와 금처럼 중국을 지배하면서도 흉노나 돌궐처럼 세계사를 쥐고 뒤흔든 슈퍼스타였다. 바로 몽골 제국이다.
▲ 배를 대신한 배다리 드넓은 초원에서 성장한 탓에 몽골군에는 수군이 없었다. 일본과 자와를 정복하지 못한 것도, 일본 정벌을 계획할 때 고려에 선박을 만들게 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중국 대륙에는 바다에 못지않은 큰 강이 있었는데, 이 강들을 건너기 위해 몽골군은 배들을 묶어 배다리를 만들었다. 그림은 배다리를 건너 남송을 공략하는 몽골군의 모습이다.
불세출의 정복 군주
12세기 후반까지 몽골은 금의 지배 아래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금의 힘이 약해지면서 몽골 초원에도 통일의 바람이 불었다. 통일의 중심은 일찍이 부족들 간의 다툼에서 아버지를 잃은 테무진이라는 청년이었다. 테무진은 먼저 자신의 부족인 보르지기드족을 통합한 뒤 케레이트족의 왕칸, 같은 부족의 자무카와 동맹을 맺고 주변 부족들을 하나하나 복속시켰다. 예상보다 빠르게 테무진이 세력을 키운 데 놀란 왕칸과 자무카가 등을 돌리자 그들도 통일의 적이 되었다. 결국 케레이트족을 정복하고 마지막 남은 서쪽의 나이만을 복속시키는 것으로 몽골 초원의 주인은 정해졌다. 1206년 테무진은 쿠릴타이(몽골족의 부족 연맹 회의)에서 몽골 제국의 대칸(황제)으로 추대되었는데, 그가 바로 칭기즈 칸(1162~1227)이다【칭기즈 칸은 대칸, 즉 왕 중의 왕이라는 뜻이다(한자로는 成吉思汗이라 쓰는데, 뜻과는 무관하게 발음만 한자로 옮긴 것이다). 동북아시아에서 칸, 간, 한 등은 왕이나 수장을 뜻하는 말이었다. Khazar(하자르, 카자르), kazakh(카자흐, 카자크), Bach(바흐, 바크) 같은 명칭에서 보듯이 k음과 h음은 원래 서로 통하므로 칸, 간, 한은 같은 말이라고 보면 된다. 우리 고대사에서도 부족의 왕이나 수장을 ‘한’이라고 불렀다. 신라의 초기 역사에 등장하는 왕명인 거서간, 마립간의 ‘간’도 모두 같은 말이다. 나아가 이사금의 ‘금’이나 단군왕검의 ‘검’, 임금의 ‘금’도 간과 같은 어원일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칭기즈 칸은 그저 몽골 초원의 주인이었을 뿐이며, 기껏해야 장차 금을 대신해 중국 북부를 장악할 군주로만 보였다. 그러나 칭기즈 칸의 행보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몽골 초원을 완전히 통일했는데도 고삐를 늦추기는커녕 전쟁 준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우선 그는 몽골의 전통적인 부족 조직과 연합체를 모두 해체하고 천호(千戶), 백호(百戶), 십호(十戶)라는 군사 조직으로 개편했다(이것을 천호제라고 부른다). 그리고 천호와 백호의 책임자인 천호장과 백호장의 자제들로 케시크테이(怯薛)라는 친위대를 편성했다. 이런 식으로 절대 권력을 구축한 점에서 몽골 제국은 부족 연합체를 기반으로 했던 예전의 돌궐이나 위구르 제국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달랐다.
성격이 다르니 활동도 다를 수밖에 없다. 모든 제도를 군대화하고 모든 권력을 대칸에게로 결집시킨 칭기즈 칸은 곧이어 활발한 정복 사업에 나섰다. 그는 먼저 북방의 오이라트와 키르기스의 부족들을 정복하고 말머리를 서하로 향했다. 서하는 일찍이 북송에서도 조공을 받았던 강국이다(4장 참조). 그러나 칭기즈 칸의 군대가 물밀듯이 밀고 들어가 수도를 접수할 즈음에 이르자 서하는 즉각 자세를 낮추고 조공을 바치겠노라고 맹세했다.
서하는 중국 북서부, 중앙아시아의 관문에 위치해 있었으므로 서하를 제압했다면 당연히 그다음에는 중앙아시아 방면으로 갔어야한다. 그러나 칭기즈 칸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와 1211년부터 숙적이던 여진의 금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종횡무진이 따로 없다. 4년 만에 베이징을 함락시키자 금은 남쪽으로 달아나 북송의 수도였던 카이펑으로 도읍을 옮겼다. 내친 김에 아예 여진족의 뿌리를 도려내려 할 때 서쪽에서 이상한 소식이 들려왔다. 칭기즈 칸에게 멸망당한 나이만의 왕자 쿠출루크가 서쪽으로 도망가서 서요(西遼)의 왕위를 빼앗고 그 일대에서 무역을 독점해 떵떵거리며 잘산다는 소문이었다. 그러자 1218년 칭기즈 칸은 맹장인 제베를 보내 서요를 멸망시킨다.
▲ 몽골족의 슈퍼스타 인류 역사상 최대 영토의 세계 제국을 이룩한 칭기즈 칸. 그는 원래 중국 대륙보다 중앙아시아를 정복해 당시 성업 중이던 동서 무역을 독점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중원이 천하의 중심이라 여긴 한족 왕조의 폐쇄적인 사고방식에 비해 훨씬 국제적이고 세계적인 시야를 가졌던 셈이다.
사실 칭기즈 칸은 원래부터 서역, 즉 중앙아시아에 관심이 컸다. 금을 공격한 것은 몽골족의 숙원을 이루는 동시에 후방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을 뿐, 정작으로 그의 관심은 당시 중국에 미지의 세계인 서역과 교역하려는 데 있었다【한족의 역대 중화 제국들은 한 무제가 비단길을 개척한 이후 대외적인 관심이 오히려 점점 더 퇴보했다. 한 → 당 → 송으로 갈수록 안방 제국으로 전락해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그에 비해 북방의 강성한 유목민족들은 고대부터 서역과 교역했고 중화적 관점에서 벗어나 있었다. 중화 제국들이 안으로 수그러들수록 그들은 바깥으로 향했다. 그 정점이 몽골 제국이다. 몽골은 갑자기 정복 국가로 등장했다기보다는 오랜 북방 민족의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중앙아시아에 진출해 동서 무역의 요지들을 손에 넣어야 했다.
기다리던 칭기즈 칸에게 기회가 왔다. 그가 보낸 450명의 대상들이 중앙아시아의 호라즘에서 살해당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1219년 그는 직접 20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호라즘의 응징에 나섰다. 호라즘은 무려 40만 대군으로 맞섰지만 용병들이 주축이었다. 충성심이 약한 용병들이 대칸의 명령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용맹한 몽골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얼마 가지 않아 수도인 사마르칸트가 함락되었고, 호라즘의 왕인 무함마드 샤는 카스피 해까지 도망치다 병사했다. 지금의 투르크메니스탄, 이라크, 이란,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 영토로 거느렸던 대국 호라즘을 정복함으로써 몽골 제국은 세계 제국으로 발돋움했다.
1225년 칭기즈 칸은 호라즘 정벌을 끝으로 일단 정복 사업을 중단하고 몽골로 귀환했다. 이제 몽골 제국은 서쪽으로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동쪽으로 북중국과 만주, 몽골에 이르는 방대한 영토를 거느리게 되었으니 한 사람이 다스릴 수 없는 규모였다. 그러므로 나중에 권력의 승계를 놓고 분란이 일어나기 전에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는 일이 시급했다. 몽골의 관습은 막내아들이 재산을 지키도록 되어 있었다. 그래서 칭기즈 칸은 막내 툴루이에게 몽골 본토를 주고, 맏아들 주치에게는 카스피 해 북쪽의 킵차크, 둘째 차가타이에게는 서요가 있는 지역, 셋째 오고타이에게는 나이만의 영지를 주었다.
이렇게 아들들에게 영토 분봉을 마친 다음 칭기즈 칸은 재차 정복 전쟁에 나섰다. 하지만 처음 정복에 나설 때와 사정이 다른 만큼 전략도 달라졌다. 이제는 영토를 확장하는 일보다 기존의 영토를 확실하게 다지는 일이 필요하다. 몽골의 강역 내에서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나라는 서하와 금이다. 칭기즈 칸은 먼저 서하를 정벌하기로 하고 직접 군대를 이끌고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정복을 눈앞에 둔 1227년 그는 예기치 않게 병사하고 말았다.
몽골이 서쪽으로 간 까닭은?
불세출의 정복 군주 칭기즈 칸이 죽었으니 정복 사업은 끝난 걸까? 천만의 말씀이다. 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 역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사실 그는 역사적 명성에서만 아버지에게 뒤질 뿐 실상은 아버지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정복 군주였다. 보통 칭기즈 칸을 대칸이라고 부르지만 그 이름의 뜻이 ‘위대한 칸’이었을 뿐이고, 칭기즈 칸 본인도 대칸이라는 직위를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고타이는 스스로 대칸이라고 자처했으니 그의 야심을 짐작할 수 있다.
과연 오고타이는 즉위하자마자 쿠릴타이를 열어 칭기즈 칸의 정신을 이어받아 제국을 통치하겠다고 선언했다. 무시무시한 정복자가 죽었다는 소식에 혹시나 하던 주변 국가들, 특히 금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그러나 눈을 질끈 감고 기다린 몽골군은 즉시 중원으로 달려오지 않았다. 오고타이는 곧바로 정복 사업을 재개하지 않고 먼저 국내 정비에 힘썼다. 새로운 제국의 수도로 카라코룸(지금의 울란바토르 서쪽)을 정해 그곳에 궁성을 짓고 여기에 연결되는 도로망을 건설했다. 또 예법과 의식을 만들고 화폐제도와 조세제도를 정비했다. 중국의 여느 왕조였다면 이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마치고 안정을 찾았을 것이다. 그러나 오고타이에게는 즉위할 때의 선언에 따라 아버지의 위업을 이어받는 게 더 중요했다.
대내 정비는 대외 정복을 위한 발판이었다. 이 발판을 튼튼히 굳힌 뒤 오고타이는 다시 정복에 나섰다. 그는 먼저 고려를 복속시키고(고려는 30년 가까이 항쟁하다 1260년에 정복된다), 1234년에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던 금을 완전히 멸망시켜 아버지의 숙원을 이루었다. 이때 몽골의 요청으로 남송의 군대가 협력했는데, 중국의 역대 한족 왕조들이 즐겨 쓰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을 몽골이 거꾸로 구사한 격이다. 6장에서 보았듯이, 이 전략은 이후 일본 침략에도 사용되었다.
▲ 정복 군주의 대물림 오고타이 칸이 쿠릴타이에서 대칸에 추대되는 장면이다. 중국 역사에서 뛰어난 군주가 연속되는 경우는 드문데, 칭기즈 칸의 아들 오고타이는 내치를 안정시키고 유럽 정복에 나서는 등 유명세만 떨어질 뿐 아버지에 결코 뒤지지 않는 큰 업적을 남겼다.
금을 정복한 것으로 몽골의 정복 활동은 끝났어야 한다. 중앙아시아의 무역로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과거에 몽골족을 억압한 여진족을 무너뜨렸으니 더 이상 군대를 앞세울 일은 없었다. 그러나 몽골 제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앞에서 본 것처럼 칭기즈 칸은 개인적인 집착이나 욕심 때문에 영토를 늘린 게 아니라 동서 무역을 독점하려는 경제적인 이유로 정복 사업을 벌인 것이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의문이 생겼다. 중앙아시아를 손에 넣고 보니 서역보다 더 서쪽의 세계가 궁금해진 것이다. 서쪽에는 어떤 세계가 있기에 오래전부터 서역과 활발하게 교역했던 걸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중앙아시아까지였던 정복의 목표는 더 서쪽으로 연장되었다.
1235년 오고타이는 새 수도 카라코룸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역사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제는 유럽 원정이다. 칭기즈 칸에게 제베가 있었다면 오고타이에게는 바투가 있다. 그는 조카(그의 형 주치의 아들)인 바투를 총사령관으로, 수부타이를 부사령관으로 삼아 20만 명의 대군으로 유럽 원정군을 편성했다.
말을 이용한 유목민족 특유의 기동성은 대단했다. 이듬해 봄 바투의 원정군은 남러시아의 볼가 강 상류에 있는 킵차크를 순식간에 점령하고 이어 랴잔, 블라디미르, 로스토프 공국 등을 차례로 공략했다. 그렇게 계속 북진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말머리를 남쪽 후방으로 돌려 이번에는 중앙아시아 근처의 카프카스를 정복했다. 그러고는 다시 서쪽의 키예프로 향했다. 좌충우돌이요 무인지경이었다. 무시무시한 몽골군을 피해 킵차크와 러시아의 왕들이 헝가리 방면으로 도망치자 몽골군은 그들을 추격하면서 자연스럽게 동유럽까지 진출했다.
동유럽의 관문인 키예프에서 바투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북쪽의 폴란드와 남쪽의 헝가리를 동시에 공격했다. 북군은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를 손쉽게 함락시킨 뒤 독일 접경 지역의 슐레지엔까지 밀고 들어갔다. 여기서 처음으로 전투다운 전투가 벌어졌다. 위기에 처한 유럽 세계를 구하기 위해 슐레지엔의 왕 하인리히 2세가 독일과 폴란드 연합군을 조직해 발슈타트에서 맞선 것이다. 그러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심지어 손가락에까지 철갑으로 무장한 유럽군은, 가벼운 무장을 갖추고 한 손으로 능숙하게 말을 몰면서 다른 손으로 가볍고 강력한 활을 다루는 몽골군의 기동력을 당해내지 못했다. 이 발슈타트 전투에서 유럽 연합군은 크게 패하고 하인리히마저 전사했다. 몽골이 유럽 원정에 나선 지 불과 6년 만의 일이었다.
▲ 유럽의 성을 공격하는 몽골군 당시 유럽의 군주들은 수백 년 전 훈족의 아틸라 대왕을 저승사자처럼 두려워했던 조상들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몽골군은 저승사자가 아니라 염라대왕이었다. 유럽의 군대는 단 한 차례도 몽골군을 이기지 못했다. 그림은 몽골군이 유럽의 성을 공격하는 장면이다. 유럽의 그림인 탓에 양측의 복색이 비슷한데, 성 바깥의 병사들이 몽골군이다.
한편 헝가리로 진입한 남쪽의 몽골군도 헝가리의 반격을 무찌르고 수도 부다페스트를 폐허로 만들었다. 폴란드와 헝가리의 함락으로 동유럽이 몽골의 손에 들어가자 이제 서유럽마저도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운명이 되었다. 더욱이 당시 유럽 세계는 십자군의 실패로 로마 교황의 권위가 실추되어 분열 상태에 있는 데다 몽골의 진격을 막아내기란 불가능했다. 몽골군은 서유럽까지 정복할 계획이었는데, 만약 계획대로 실행되었다면 이후 세계사는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최소한 오늘날 우리가 서유럽의 아름다운 성이나 문화재를 구경하기는 어려웠을 게다. 몽골군은 곳곳에서 닥치는 대로 약탈과 파괴를 일삼았으니까【고려를 정복할 때 몽골군은 신라시대에 건립된 고찰인 황룡사와 동양 최대의 목탑인 황룡사탑을 불태워버렸다(지금은 넓은 탑의 터만 황량하게 남아 있다). 고려는 몽골의 침입을 불심으로 막기 위해 대장경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지금까지 전한다(그 이전의 거란 침략 때 제작한 대장경은 몽골 침략으로 소실되었다). 외적의 침략으로 한 가지 문화유산을 잃고 한 가지 문화유산을 만든 셈이다. 남아 있는 터로 미루어볼 때 높이가 80미터는 되었을 황룡사탑이 불타 없어졌기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일본의 35미터짜리 호류지 목탑이 현재 동양 최대의 목탑이라는 영예를 누리고 있다】.
서유럽의 구세주는 몽골 제국의 내분이었다. 희대의 정복 군주 오고타이가 사망한 것이다. 칸위의 계승을 둘러싸고 세력 다툼이 일어나자 바투의 유럽 원정군은 헝가리에서 회군해 1244년 카라코룸에 개선했다(바투는 주치의 아들로 황족이었으므로 후임 칸을 선정하는 문제에 큰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의 황실에서는 몇 년 동안 치열한 권력투쟁이 벌어지다가 1251년 바투의 지지를 등에 업은 툴루이의 아들 몽케 칸이 즉위하는 것으로 사태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오고타이와 차가타이 가문이 불만을 품고 자기 영지에서 제각기 독립함으로써 몽골 제국은 분열의 위기를 맞았다.
▲ 기동성의 차이 왼쪽은 몽골군의 군장이고, 오른쪽은 유럽군의 군장이다. 몽골 병사는 말을 타고 활만 지닌 경장 차림인 데 비해, 유럽의 병사는 얼굴은 물론 손가락에까지 갑옷으로 중무장하고 말의 몸도 쇠로 둘렀다. 자신을 보호하는 데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이 차림으로는 몽골군의 뛰어난 기동성을 감당할 없었다. 장거리 원정군치고는 비교적 소수였던 몽골군에 대해 유럽인들이 동에 번쩍, 서에 번쩍했다고 기록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중국식으로 살자
1211년 금을 공략하면서 시작된 몽골의 정복은 몽케 칸에게서 끝났다. 서유럽 입성을 눈앞에 두고 바투의 원정군이 유럽 전선에서 철수한 게 마지막이다. 몽케 칸은 왜 정복을 계속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 중 하나는 남송 때문이었다. 주변의 모든 나라가 몽골군의 말발굽에 짓밟힐 때도 남송은 여전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몽골은 서쪽으로만 진군했을 뿐 100여 년 전부터 금에 눌리면서도 강남에 버티고 있는 남송의 숨을 끊지는 않았다. 언제든지 손만 대면 집어삼킬 수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정복을 늦추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몽케 칸에 이르러 몽골의 대외 정책은 크게 바뀐다. 몽골 제국이 분열되어 오고타이 칸국, 차가타이 칸국, 그리고 바투의 킵차크 칸국이 사실상 독립했다. 이런 마당에 몽케 칸은 자기도 독자적인 영지가 필요하다는 점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는 툴루이 가문이었으므로 몽골 본토밖에는 물려받은 게 없었다. 명색이 몽골 제국의 황제인데 그럴 수는 없다. 그래서 그는 남은 한 곳, 남송을 노리게 된 것이다. 막상 남송에 눈을 돌리고 보니 그 가치가 새삼 새롭다. 물자가 풍부한 데다 유목 생활을 청산하고 안정과 번영을 누려야 할 몽골 제국이 근거지로 삼기에 딱 알맞은 곳이다. 그전까지 몽골은 중국 대륙을 단순히 조세를 징수하고 군수품을 조달하는 곳으로만 여겨왔으나 이제는 직접 지배의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
몽케는 먼저 남송의 주변국들인 윈난의 대리국과 티베트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의 아바스 왕조를 멸망시키고 그곳에 일 칸국을 세우는 것으로 서역 원정을 완료했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남송 왕조를 접수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그러나 1259년 남송을 공격할 즈음 그는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유지는 동생인 쿠빌라이가 받들었다. 형의 뒤를 이어 칸이 된 쿠빌라이는 맨 먼저 남송을 완전히 멸망시켰다(이후 명이 들어설 때까지 100여 년간 중원에는 한족 왕조의 대가 끊겼는데, 그때까지의 역사상 가장 긴 이민족 지배였다). 그런 다음에 그는 한반도의 고려를 정복하고, 안남과 캄보디아, 타이 등 인도차이나도 복속시켰다. 이로써 몽골 제국은 칸국들까지 합쳐 인류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자랑하게 되었다. 유라시아 대륙에서 몽골 제국의 영토가 아닌 곳은 서유럽과 인도, 이집트, 일본, 동남아시아의 섬들뿐이었다【이 지역들은 어떻게 몽골의 지배를 모면할 수 있었을까? 서유럽은 몽골이 원정을 중단했기 때문에 정복을 피했고, 인도와 이집트는 더운 기후 때문에 정복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인도와 이집트는 동서 무역로에서 상당히 벗어나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지역들은 몽골이 정복 자체를 시도하지 않은 곳들이다. 그러나 일본과 자와는 몽골이 원정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드문 경우에 속한다. 둘 다 섬이라는 지역적 특성의 덕택이었다】.
▲ 툴루이 가문의 왕자들 막내에게 유산을 상속하는 몽골 관습에 따라 칭기즈 칸은 막내 툴루이에게 몽골 본토를 물려주었다. 오고타이에게 권력을 빼앗겼던 툴루이 가문은 오고 타이의 사후에 권력을 되찾았다. 그림의 윗부분에 있는 세 사람은 각각 몽케, 쿠빌라이(원을 세움), 훌라구(일 칸국을 세움)의 모습이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즉위는 툴루이 가문의 재집권이었으므로 당연히 오고타이 가문의 반발을 샀다. 제국은 정상에 오른 순간부터 내분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언뜻 보면 제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벌어진 분쟁인 듯하지만, 실상 여기에는 몽골 제국의 성격과 향후 노선을 둘러싼 대립이 숨어 있었다. 젊은 시절부터 중국에 영지를 소유했고 주변에 중국의 유학자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쿠빌라이는 유목 사회와 농경 사회가 융합된 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 반면 오고타이 세력은 유목 사회를 중심으로 몽골의 전통 지배 체제를 만들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쿠빌라이가 즉위했다는 것은 제국이 장차 어떤 노선을 취할지를 예고하고 있었다.
과연 그는 즉위한 즉시 자신의 구상을 실천으로 옮겼다. 우선 국호를 중국식 원(元)으로 고치고, 수도를 남쪽으로 옮겨 상도(上都, 내몽골 지역)와 대도(大都, 지금의 베이징)로 정했다(상도는 여름 수도이고, 대도는 겨울 수도다). 이로써 쿠빌라이는 원 제국의 건국자가 되었다. 그는 나중에 시호도 중국식으로 고쳐 세조(世祖)가 된다.
원 제국은 비록 영토의 면에서는 이전 몽골 제국의 일부분에 불과했으나 이것만 해도 중국 전체와 만주, 몽골, 인도차이나 일대를 포함하는 대제국이었다. 세조의 중국화 노선은 행정제도에도 나타난다. 그는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기본 통치 기구로 삼았다. 중앙 행정을 총괄하는 중서성, 군정의 최고 기관인 추밀원, 감찰 기관인 어사대는 모두 중국의 전통적인 통치기관들이었다. 그러나 지방 행정은 중국식 주현제(州縣制)를 따르지 않고 행성(行省)과 다루가치라는 몽골 특유의 제도를 도입했다.
행성은 중앙 정부의 지방 출장 기관이라 할 수 있는데, 원래는 임시로 설치하는 것이었으나 영토가 확대되면서 항구적인 행정기관으로 재편되었다(일본 정벌을 위해 고려에 설치한 정동행성도 이 행성 제도의 일부다). 이 행성들이 훗날 중국의 성(省)으로 발전하게 되어 오늘에까지 이른다. 또한 다루가치는 원래 칭기즈 칸이 어느 지역을 점령할 때마다 그곳의 행정관으로 두었던 직책인데, 쉽게 말하면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총독이라 할 수 있다. 다루가치에는 상위 신분인 몽골인과 색목인(色目人)만이 임명되었으며, 이들은 중앙 정부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몽골의 신분제에서는 몽골인이 서열 1위였고, 색목인이 2위였으며, 이들이 함께 지배층을 구성했다. 그 아래 피지배층으로는 한인(漢人)과 남인(南人)이 있었는데, 한인은 금의 치하에 북중국에서 살았던 한족과 여진, 거란, 고려인을 가리키며, 남인은 몽골에 끝까지 저항한 남송인을 가리키는 말이다. 인구 비례로는 몽골인과 색목인이 각각 100만 명이 넘지 않았던 데 반해 한인과 남인은 7000만 명이나 되었다. 불과 3퍼센트의 지배층이 97퍼센트의 피지배층을 다스린 것이다. 색목인은 위구르, 탕구트, 나이만, 티베트, 이란, 아랍 등 중앙아시아와 서역의 여러 종족을 가리킨다. 그들은 문화적 자질이 우수하고 중국 문화권이 아니었기 때문에 제국의 중요한 협력자가 되었다. 특히 그들은 제국의 재정과 경제, 조세 분야에서 역량을 발휘했다. 흥미로운 것은 조선의 건국자인 이성계의 조상이 바로 고려에 파견된 다루가치였다는 사실이다. 다루가치가 될 수 있는 신분은 몽골인과 색목인이었으니 이성계는 그 혈통을 지녔을 가능성이 있다. 색목인은 서역 출신을 가리킨다. 당 제국을 세운 이연(李淵)도 한족이 아닌 북방 군벌이었고, 몽골의 첫 정복 대상이었던 서하의 왕도 이씨였다. 중국의 이씨 중에는 중앙아시아계가 많았다. 그렇게 보면 이씨 조선의 가계에도 중앙아시아 혈통이 포함되었을지 모른다】.
▲ 중국식 몽골 황제 몽골 제국을 중국식 제국으로 바꾸고 원 제국을 세운 쿠빌라이다. 그는 한화 정책을 추진했다는 점에서는 할아버지 칭기즈 칸의 뜻에 어긋났으나 동서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는 점에서는 할아버지의 유지를 충실히 받들었다.
동서 문화의 교류
세조의 한화(漢化) 정책은 35년의 긴 재위 기간 동안 꾸준히 실천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중국식을 모방하는 데 그쳤을 뿐 그다지 독창적인 요소는 없었다. 겉으로만 보면 중국식 관료제를 충실히 따랐지만 핵심 부서의 최고책임자는 몽골인 또는 친몽골적 한인만 중용했기 때문에 내실 있는 관료제가 되지는 못했다.
1315년에 부활된 과거제(科擧制)도 합리적으로 운영된 게 아니라 철저한 신분 차별을 바탕으로 했다. 이를테면 문제 출제도 몽골인과 색목인에게 유리했을 뿐 아니라 한인들은 과거에 합격한다 해도 승진할 수 있는 한계가 정해져 있었다. 더욱이 민족마다 별도로 합격 정원제를 두었으니 요즘으로 말하면 심각한 ‘인종차별’이었다.
그러나 경제정책에서는 종전의 모든 한족 제국을 뛰어넘는 수준과 독창성을 보였다. 방대한 통일 제국이 건설된 덕분에 원 제국 시절에는 역대 어느 왕조에서도 실시하지 못한 단일 통화 정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특히 이 단일 통화는 지폐를 매개로 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지폐는 송 제국이 세계 최초로 만들었으나 실생활에 널리 사용된 것은 원대에 들어와서였다. 처음에는 주화를 보조하는 역할로 지폐가 발행되었지만, 점차 복잡한 기존의 화폐를 통일하는 유통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원대에 와서 지폐가 발달한 배경에는 송대에 발달한 인쇄술이 있었다. 지폐를 조잡하게 인쇄한다면 아무도 이용하지 않았을 테니까.
전국을 단일 경제권으로 만든 데는 운하도 일익을 담당했다. 원은 남송을 정복한 직후부터 새 운하 건설에 착수했다. 7세기 초반에 수 양제가 건설한 강남과 강북을 잇는 운하를 북쪽으로 연장해 대도까지 잇는 사업이었다. 그 목적은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수도권으로 운반하는 것이었으나 예상외의 수확도 있었다. 이 운하로 인해 몽골 지역에 건설되었던 기존의 도로망과 운하가 연결된 것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동서 교통의 양대로인 육로(서역에서 대도까지)와 해로(아라비아에서 중국의 강남까지)가 이어짐으로써 대도를 중심으로 한 세계적 교통망이 완성된 것이다. 이것은 원대에 이르러 동서 문화의 교류가 크게 활발해진 배경이 된다.
오리엔트 세계(서아시아)와 유럽은 원래 역사적으로 매우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기원전 10세기경 그리스에 문명의 빛을 전해준 것도 오리엔트였고, 알렉산드로스의 동방 원정으로 헬레니즘이 꽃피우게 된 무대도 오리엔트 세계였다. 또한 7~8세기에 북아프리카와 에스파냐까지 진출한 이슬람 제국의 고향도 바로 이곳이었다. 중국에 당 제국이 있던 시절부터 오리엔트는 중국과 유럽 문명을 서로 이어주는 중개자의 노릇을 했다. 몽골의 유럽 원정이 벌어지기 바로 전인 11~13세기에는 십자군 전쟁으로 유럽과 오리엔트 세계와의 접촉이 빈번해진 상태였다. 여기에 중국과의 직접 교통이 보태진다면 세계적 교류망이 형성될 것이다.
▲ 문명이 오간 길 둔황에서 사마르칸트까지 이어지는 비단길은 원래 한나라 시대에 개척되었으나 몽골 시대에 크게 활성화되었다. 그림은 둔황의 동굴 벽화에 묘사된 비단길이다. 이 길을 통해 화약, 나침반, 종이 등 중국의 선진 발명품이 유럽으로 전해졌다.
이런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몽골이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은 동서 교류를 폭발적으로 증진시켰다. 우선 교류의 장애물이 사라졌다. 예전에는 무역로 주변에 터를 잡은 작은 왕국들이 무역을 방해하거나 독점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제는 이 지역이 모두 단일한 정치 질서에 편입되었으므로 그런 문제가 없어진 것이다【유럽 역사가들은 몽골이 유라시아에 걸친 대제국을 이룩하면서 국제적 정치 질서의 안정을 가져온 13~14세기를 ‘타타르의 평화(Pax Tatarica)’라고 부른다. 고대 로마가 지중해를 통일하면서 구가한 ‘팍스 로마나(Pax Romana)’를 염두에 두고 만든 용어다. 그런데 몽골을 타타르라고 부른 것은 좀 문제다. 타타르는 오히려 몽골족을 통일한 칭기즈 칸이 일차 타도 대상으로 삼았던 숙적이다. 하지만 유럽인들은 몽골이 유럽을 침략했을 때도 그들을 타타르인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13세기 중반 로마 교황의 명으로 몽골 제국을 방문한 플라노 카르피니(Plano Carpini)는 유럽에 돌아가 『우리가 타타르인이라 부르는 몽골인의 역사』라는 책을 써서 유럽인의 시각 교정에 일조했다(후일 원 제국이 멸망하고 몽골족이 다시 몽골 초원의 군소 부족으로 되돌아갈 무렵에는 몽골인과 타타르인의 구별이 거의 사라지게 된다)】. 게다가 몽골은 애초부터 무역을 염두에 두고 서역 원정을 시작한 것이므로 무역을 적극 장려했다. 무역에 필요한 도로망을 정비했을 뿐 아니라 도로마다 상인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공용 역사를 설치해 숙박과 역마를 제공했다. 잠치라고 부르는 이 시설은 동서 무역만이 아니라 몽골 제국 내의 물자 이동, 중앙 정부와 지방 정부간의 교통 등에 크게 기여했다.
초원의 길과 비단길이 새삼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초원의 길은 선사시대부터 유목민들이 이동하던 길로서, 일찍이 고대의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와 흉노가 이 길을 통해 동서를 왕래했다. 초원의 길은 북중국에서 시작해 볼가 강에까지 이르는 길이었으므로 북방 민족들이 주로 애용했다. 그 반면 비단길은 남중국과 중원을 서역으로 이어주었으므로 한족 왕조들의 중요한 교통로였다. 비단길은 한 무제의 명으로 장건(張騫)이 개척했다고 되어 있으나, 원래는 그전부터 유목민들이 자주 이용하던 길이었다. 이 양대 육상로는 몽골 시대에 와서 본격적으로 동서 교류에 사용되었으며, 특히 비단길은 지중해 쪽으로 연결되었으므로 더욱 중요한 무역로였다.
예전부터 활발하게 교류한 유럽과 오리엔트, 여기에 양대 육상로를 통해 오리엔트와 중국이 연결되면서 오리엔트를 매개로 유럽과 중국도 간접 교류를 시작했다. 유럽과 오리엔트 측은 천문학과 지리학, 수학, 역학, 그리스도교 등을 중국에 전했고, 중국에서는 중세의 3대 발명품인 나침반과 인쇄술, 화약이 아라비아 상인들의 손을 거쳐 유럽에 전달되었다【중국이 중세 유럽에 전한 화약과 나침반, 인쇄술은 중국에서보다 유럽 세계의 발전에 더 큰 공헌을 했다. 유럽인들은 나침반을 이용해 대항해시대를 열었으며, 아라비아인은 화약으로 대포를 만들어 그 기술을 오히려 중국에 역수출했다. 그리고 인쇄술은 훗날 구텐베르크의 활자 발명으로 이어지면서 성서의 대량 보급에 한몫함으로써 종교개혁을 뒷받침했다.】.
일찍이 당 제국의 수도인 장안은 서역의 색목인들이 많이 왕래하는 국제도시로 이름을 날렸으나 원 제국의 수도인 대도는 색목인만이 아니라 유럽인들도 출입하는 세계적 도시로 성장했다. 로마 교황이 그리스도교를 전파할 목적으로 파견한 카르피니와 기욤 드 뤼브룩(Guillaume de Rubruk), 원 세조의 총애를 받으며 17년간 제국의 관리로 재직한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 폴로(Marco Polo, 1254~1324) 등이 당시 육로를 통해 중국에 온 유럽인들이다.
▲ 몽골 복장의 마르코 폴로 고향인 베네치아로 돌아온 마르코 폴로의 모습이다. 그는 삼촌을 따라 육로로 중국에 가서 쿠빌라이 칸의 총애를 받으며 17년 동안이나 살다가 고향에 돌아왔다. 24년 만의 귀환인 데다 이렇게 몽골 복장을 했으니 당연하겠지만, 처음에는 친척들까지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깨어나라, 한인들아!
대규모 정복 활동을 전개할 때 드넓은 전선을 하나의 일사불란한 지휘로 감독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몽골은 칭기즈 칸 때부터 전선에 파견된 군 지휘관들의 독자적인 작전권을 인정했다. 이 지휘관들은 언제 어느 방면으로 진격하라는 등의 기본 전략은 중앙의 지시를 받았으나 전투 지역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작전을 수립하고 실행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방식은 몽골군 특유의 기동력을 더욱 활성화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이 아니면 효율성이 떨어졌다. 정복 전쟁이 끝나고 안정적인 정치와 행정이 필요할 때는 오히려 제국의 통합성을 저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칭기즈 칸이 죽은 뒤 원 제국이 몰락할 때까지 내내 이어진 치열한 권력 다툼과 분열은 바로 그 점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 더구나 일찌감치 제위의 세습제가 발달한 한족 왕조들과는 달리 몽골의 관습에는 칸위의 계승을 위한 고정된 제도가 없었으므로 다툼이 더욱 심했다. 장기 집권한 세조의 치세가 지난 뒤 14세기 후반까지 70여 년 동안 즉위한 황제만도 열 명에 이를 정도였다.
게다가 경제에 어두운 몽골 황실은 국가 재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사치를 일삼았다. 원래 무능한 중앙은행은 모든 재정 문제를 은행권(화폐) 발행으로 해결하려 들게 마련이다. 제국 정부는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지폐를 남발했다. 그것도 약효가 떨어지자 이번에는 국가 전매 상품인 소금 값을 올려 재정난에 대처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런 미봉책은 물가를 불안정하게 하고 농민들의 생활을 궁핍하게 만들었을 뿐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이것이 원 제국의 상층부가 약화되는 주요 원인이었다면 하부의 동요는 원 제국을 몰락시키는 주요 동력이었다. 장작이 잔뜩 쌓여 있어도 불씨가 없으면 불을 땔 수 없다. 그런데 이내 그 불씨가 솟았다. 바로 한인들이 들고일어난 것이다.
비록 세조의 한화 정책으로 완화되었다고는 하지만, 몽골의 한족 지배는 몽골 지상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오랜 기간의 민족 차별(혹은 인종차별)에 불만이 팽배한 한인들은 제국의 통치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각지에서 봉기했다. 사회 혼란이 오래 지속되면 미륵 신앙이 발달하게 마련이다. 남송 시대에 불교 정토종의 한 갈래로 출발한 백련교(白蓮敎)는 혼탁한 시대를 만나 미륵 신앙으로 바뀌었다. 봉기가 잇따르면서 백련교 세력은 자연스럽게 군대화되었다.
백련교를 모태로 중국의 남방에서 일어난 홍건군(紅巾軍)은 금세 반원(反元) 항쟁의 핵심으로 성장했다. 홍건군의 우두머리인 주원장(朱元璋), 1328~1398)은 난징을 함락해 강남을 장악했으나 거기서 말 거라면 애초에 거병하지도 않았다. 내친 김에 그는 제국의 심장부를 향해 북벌을 감행했다. 마침내 1368년 대도가 함락되면서 원 제국은 100여 년간의 중국 지배를 끝내고 고향인 몽골 초원으로 쫓겨났다. 이후 몽골은 새로 북원(北元) 왕조를 세우고 중원 복귀를 꿈꾸지만 서산에 진 해를 다시 띄우지 못하고 소멸하고 말았다.
▲ 서역으로 가는 중국 상인 중국의 상인들이 초원의 길과 비단길이 합쳐지는 지점인 둔황 부근을 지나고 있는 모습이다. 초원의 길과 비단길은 오래전에 개척되어 중국에도 알려졌으나 원대에 이르러 가장 활발하게 이용되었다.
2. 전통과 결별한 한족 왕조
황제가 된 거지
몽골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한족의 품에 돌려준 주원장(朱元璋)은 1368년 새 제국의 국호를 명(明)으로 정했다. 일설에 의하면 그는 백련교(白蓮敎)의 한 갈래인 명교(明敎)의 우두머리인 탓에 국호를 명이라고 정했다지만, ‘밝다’는 뜻도 한몫하지 않았을까 싶다.
명 제국을 세운 주원장(朱元璋)은 역대 어느 왕조의 건국자보다도 희한한 이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일찍이 수, 당, 송 제국을 세운 양견(楊堅), 이연(李淵), 조광윤(趙匡胤)은 모두 중원 북방의 유력한 무장 출신이었으며, 더 이전의 진시황(秦始皇)은 전국시대 제후라는 당당한 신분이었다. 실력이든 가문이든 배경이든 이들은 제각기 내세울 만한 요소가 있었다. 한 고조 유방(劉邦)도 이들에 비해서는 한참 떨어지는 신분이지만 변방의 하급 관리 정도는 되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그보다 더욱 못한 걸식승(乞食僧) 출신이었다.
주원장은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머슴살이를 하다 전염병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고아가 되었다. 자라서는 거지 중의 신분으로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먹는 생활을 했는데, 이때 보고 들은 농민들의 비참한 생활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그의 대세 감각을 크게 키워주었다. 그러던 차에 가입하게 된 비밀 조직 백련교(白蓮敎)가 그의 뜻을 펴기 위한 물리력이 되었다. 백련교의 군조직인 홍건군에 자원입대해 맹활약하던 그는 홍건군 지역 대장인 곽자흥(郭子興)의 부관으로 승진해 그의 딸과 결혼했다. 장인이 전사하면서 지휘관이 된 뒤에는 연이어 무공을 세우면서 난징을 중심으로 강남의 동부 일대를 장악했다.
이미 원 제국은 힘이 현저하게 약해져 강남 지방의 통제력을 상실한 때였다. 주원장은 당시 강남에서 세력을 떨치던 진우량(陳友諒)과 지주 세력의 대표인 장사성(張士誠)을 물리치고, 마침내 100여 년 만의 한족 통일 왕조를 세웠다.
▲ 한족의 구세주 걸식승 출신의 주원장은 탁월한 식견과 난세를 배경으로 제국의 건국자가 되었다. 오랜 이민족 지배 끝의 한족 왕조, 더구나 보잘것없는 신분으로 건국한 명 제국이었으므로 주원장은 모든 국정에 일일이 간섭하면서 강력한 황제 독재 체제를 이루었다. 이 초상은 일반 백성들 사이에 알려진 모습으로 한족의 구세주라기보다는 고약한 인상이다.
국호를 명이라고 정한 데는 평민 출신의 무명소졸(無名小卒)이 세운 제국이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 진우량이나 장사성만 해도 각각 중국의 옛 역사에 등장하는 한(漢)과 오(吳)의 후예라고 자칭했지만, 주원장(朱元璋)은 굳이 전통의 왕조를 계승할 필요가 없었다.
명 제국은 남쪽에서 흥기했다는 점에서도 여느 왕조와는 달랐다. 역대 중국의 통일 왕조들은 대부분 중원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 남쪽으로 확장하는 게 기본 공식이었다. 그러나 주원장은 강남에서 출발해 중원을 정복했다는 점에서 그 반대다(난징을 수도로 한 통일 왕조도 명이 유일하다), 그 이유는 주원장 자신도 원래 강남의 안후이 출신인 데다 당시 중원은 아직 몽골의 손아귀에 있었으므로 강남을 근거지로 삼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 이민족 지배를 끝내고 탄생한 한족 왕조, 평민 출신의 건국자, 특이한 건국 과정, 이렇게 역사적 전통에서 한 걸음 비껴나 있는 데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듯이, 명은 여러 가지 점에서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다.
‘빽’ 하나 없는 자신의 출신이 마음에 걸리기도 하고, 또 이전 한족 왕조인 송대의 취약한 황권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를 잘 알고 있는 명 태조는 신생 제국의 안정을 위해 무엇보다 황제 중심의 강력한 독재 체제가 시급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이민족 왕조인 몽골도 본뜬 한족 왕조의 정치 체제를 대대적으로 수술했다.
우선 황권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던 승상직을 아예 없애고 중서성도 폐지했다. 자연히 중서성이 관할하던 이ㆍ호ㆍ예ㆍ병ㆍ형ㆍ공의 6부(六部)는 황제 직속으로 귀속될 수밖에 없었다. 또 원대의 군사 기관인 추밀원을 5군 도독부로 바꾸고 감찰 기관 어사대도 도찰원(都察院)으로 고쳐 모두 황제 직속으로 만들었다. 행정, 사법, 군정을 모두 황제 개인이 장악하게 된 것이다. 예로부터 중국 황제는 천자의 절대적 지위를 누렸으나 항상 그에 걸맞은 현실의 권력을 지녔던 것은 아니다. 명대에 이르러 비로소 천자라는 명칭에 부합하는 황제의 절대 권력이 확립된 것이다.
나아가 태조는 중앙 관제만이 아니라 지방 행정에까지도 황제 독재의 원칙을 관철했다. 그래서 만든 게 이갑제(里甲制)다. 우선 한 지역의 농가들을 갑수호(甲首戶)라고 부르는 일반 농가 100호와 이장호(里長戶)라로 부르는 부유한 농가 10호로 나누고 이 110호를 묶어 1리(里)로 한다. 100호의 갑수호는 다시 10갑으로 나누고, 이장호가 매년 번갈아가며 이장을 맡는다. 이장은 각 갑의 대표인 10명의 갑수들을 통해 마을 행정을 담당한다. 이처럼 마을 단위로 치안을 유지하는 제도는 예전에도 있었지만, 이갑제의 이장은 권농과 교화, 재판은 물론 조세 징수까지 담당했으므로 지역의 독재자인 셈이었고 중앙 정부와 밀접한 연관을 유지했다. 겉으로는 일종의 지방자치제처럼 보이지만, 이갑제는 실상 국가(황제)가 농촌의 지주들과 결탁해 일반 농민들에까지 지배력을 관철시키는 제도였다【이갑제는 송대에 향촌 사회에 뿌리내린 형세호 중심의 사대부적 질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므로 전통과 전혀 상관이 없는 제도는 아니다. 당시 형세호도 조세를 징수하고 요역을 배정하는 등 국가 기관의 업무를 일부 담당했다. 그러나 송의 황권은 명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그것을 제도화시켜 중앙 정부의 일률적인 지배를 관철시키는 수단으로 삼지는 못했다】.
▲ 형률의 근본 새 나라가 들어서면 법부터 제 정하는 게 순서다. 명 태조는 당 제국의 법을 바탕으로 1367년 『대명률(大明律)』을 제정했다. 『대명률』은 당률과 비슷했으나 주원장(朱元璋)의 철권통치가 반영되어 그보다 훨씬 잔혹한 형벌 조항들이 많이 섞였다.
군사 제도 역시 독창적이면서도 과감하게 개혁되었다. 당의 부병제(府兵制)가 붕괴하는 과정에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역대 통일 왕조들은 초기에는 예외 없이 징병제, 즉 의무병제를 시행했다(오늘날과 같은 한시적인 의무병제의 개념이 아니라 평생 의무병, 즉 병농일치제도다). 그러나 이는 일반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다. 게다가 병역 대신 병역에 상당하는 조세를 납부하는 제도가 일반화된 탓에 의무병제를 일관되게 유지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면 초기의 ‘신성한 병역 의무’라는 정신은 사라지고 모병제, 즉 직업군인제를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그렇게 갈 거라면 차라리 처음부터 그렇게 하자. 명 태조는 순수 징병제를 포기하고 징병제와 모병제를 절충한 군사 제도를 택했는데, 이것이 곧 위소(衛所) 제도다. 이 제도는 국가 방위의 전략적 요충지(위소)를 정하고 하나의 위소당 5600명의 병력을 배정해 주둔시키면서 경비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병사들은 군적(軍籍)을 가진 군호(軍戶)로서, 일반 민호(民戶)와는 달리 처음부터 병역의 담당자로 내정된 일종의 직업군인이었다. 이들은 대대로 병역이 세습되었고 마음대로 군호에서 이탈할 수도 없었다. 물론 그에 필요한 경비는 민호에서 납부하는 조세를 통해 해결되었지만 필요한 식량은 모두 군전(軍田)으로 충당했다. 또한 원래부터 중국 변방에 살고 있던 소수 이민족들은 그대로 위소로 편성해 자치 겸 국방 수비에 임하게 했다. 이 위소 제도는 병농일치라는 의무병제의 장점과 더불어 뛰어난 전투력을 자랑하는 직업군인제의 장점도 수용한 것이었다.
주원장(朱元璋)은 평민, 혹은 기껏해야 반란군 무장 출신이라는 신분답지 않게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정치 감각과 행정 솜씨를 보인 인물이었다. 더구나 전통을 답습하려 하지 않고 창조적으로 모든 제도를 완비한 그의 능력은 ‘근본 없는’ 신생국 명을 일찌감치 제국의 반열에 올려놓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중기 이후 무능한 황제들이 속출하는데도 명 제국이 그런대로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은 개국 초에 그가 다져놓은 각종 제도의 덕이 크다
▲ 명 제국 군대의 전투 장면 앞열의 병사들이 총포를 든 것에서 과거의 군대와는 다른 면모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일찍부터 병사 계층이 분리된 서양이나 일본과 달리 중국은 명대까지도 ‘직업군인’이나 ‘상비군’의 개념이 없이 전통적인 병농일치가 일반적이었다.
영락제의 세계화
걸출한 군주인 명 태조는 자신의 사후에 대한 배려도 아끼지 않았다. 원래 나라를 처음 세운 건국자가 죽으면 후계를 둘러싸고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는 법이다【우리의 조선조 역사에서는 이를 ‘왕자의 난’이라 부르지만 이런 종류의 사태는 거의 모든 나라의 개국 초기 역사에서 볼 수 있다. 고려의 건국자 왕건이 죽고 나서는 그의 배다른 아들들이 각자 자기 어머니의 외척 세력을 등에 업고 정권 다툼을 벌였으며, 조선의 이성계는 살아 있는 동안에 정권 다툼의 와중에 한 아들(이방원)이 두 아들(방석과 방번)과 개국공신(정도전)을 죽이는 비극을 목격했다. 중국 역사도 마찬가지다. 진시황(秦始皇)이 죽자 승상이 태자를 죽이고 자신이 지지하는 황자를 즉위하게 했는가 하면, 한 고조 유방(劉邦)이 죽었을 때는 여태후가 집권해 황제를 멋대로 갈아치웠다. 당의 건국자 이연(李淵)이 조선의 이성계와 같은 비극을 당한 것은 앞에서(151쪽 그림 설명) 본 바 있다. 절대 권력자인 건국자가 죽고 새로운 권위가 필요해진 상황에서 이러한 ‘개국 초기 증후군’이 발생하는 것은 이해하기 쉽다. 다행스런 점은 앞서 말했듯이 ‘왕자의 난’을 배경으로 즉위한 당의 태종, 조선의 태종, 명의 영락제가 모두 유혈로 집권한 뒤에는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했다는 점이다】. 이런 사태를 예방하기 위해 태조는 26명에 이르는 아들들을 모두 중앙에서 멀리 내쫓아 변방의 요지를 지키는 번왕(藩王)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방법은 제위 계승 분쟁의 씨앗을 없애는 한편 국경 수비를 도모하고 변방의 반란도 제어한다는 일석삼조의 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중앙 권력이 강할 때만 그런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뿐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번왕들은 국경 수비를 담당했으므로 언제든 부릴 수 있는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태조가 죽자 즉각 폭탄이 터졌다. 원래 태자가 일찍 죽은 탓에 주원장(朱元璋)은 손자를 태자로 책봉해두었는데, 일단은 손자인 건문제(建文帝)가 즉위해 그의 구상이 관철되었다. 하지만 호랑이 같은 아버지가 죽었으니 건문제의 삼촌들은 두려울 게 없었다.
과연 그 삼촌들 중 가장 강력한 연왕(燕王, 연경의 번왕)이 군대를 몰고 난징으로 쳐들어왔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만큼 국경 수비대는 강하다. 북쪽으로 먼 연경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거느린 연왕은 이미 인근의 몽골 잔당을 물리쳐 전공이 드높았다. 조카를 손쉽게 제압하고 제위를 차지한 연왕이 바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로 더 잘 알려진 영락제, 즉 성조(成祖, 1360~1424)다【명대부터는 연호를 묘호(廟號)와 함께 사용하기 시작했다. 명 태조의 연호는 홍무(洪武)였으므로 홍무제라도 불린다】.
▲ 위풍당당 영락제 영락제는 한 무제, 당 태종에 버금가는 중국 역사상 걸출한 군주였다. 그는 대내외적으로 신생국인 명을 강력한 제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영락제 이후로 명의 황제들은 모두 쭉정이였으므로 그의 치세는 아직 건국 초기였음에도 제국의 최전성기이자 쇠락의 시작이었다.
영락제가 즉위하자마자 맨 먼저 한 일은 수도를 난징에서 북쪽 연경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 목적은 몽골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려는 것도 있었으나 여기에는 자신의 세력 근거지를 전국의 중심으로 만들려는 뜻도 있었다. 1420년 궁성(지금의 쯔진청紫禁城)이 완성되자 영락제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고 베이징(北京)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전 수도인 금릉(金陵)은 난징(南京)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 지금까지 우리는 편의상 베이징과 난징이라는 이름을 계속 써왔지만 실은 영락제가 처음으로 만든 이름들이다.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집권한 영락제는 대외 정책에서도 태조와 어긋났다. 적극적인 북방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일찍이 송 태조 조광윤은 전대(당말오대)의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북방을 포기하면서까지 내적 안정을 꾀했고, 그보다 오래도록 큰 혼란(이민족 왕조)을 겪은 명 태조 주원장(朱元璋)도 조광윤과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영락제는 오히려 북방을 평정하는 것만이 나라의 안정을 꾀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 그의 판단은 옳았다. 당시 몽골 초원에는 오이라트(Oyrat Oirat, 瓦剌)족이 강성해지면서 호시탐탐 중국 북방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불과 50년 전까지도 지긋지긋한 몽골 치하에 있지 않았던가? It‘s now or never! 지금이 아니면 영영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영락제는 1410년부터 15년에 걸쳐 직접 50만 대군을 이끌고 다섯 차례나 출정한 끝에 마침내 북방을 평정했다. 이제 한동안은 북변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다. 역대 한족 제국의 황제로서 직접 고비 사막을 넘은 것은 그가 최초이자 마지막이었다.
오랜만의 한족 제국인 탓에 건국 직후 변방을 다지는 일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북방만큼 걱정할 것은 아니었으나 변방은 남방에도 있었다. 영락제는 먼저 베트남 지역을 복속시켰으나 더 이상 나아가려면 육로로는 불가능했다. 그래서 그는 정화(鄭和, 1371~1435년경)에게 군대와 함선을 주고 역사적인 남해 원정을 명했다【정화는 이슬람교도로 일찍부터 영락제의 곁에서 시중을 들던 환관이었는데, 원래 이슬람교도로 마(馬)씨였다. 무함마드에서 음차한 성일 것이다. 색목인은 이미 몽골 시대에 정부에 중용되었으므로 영락제에게는 어릴 때부터 그 혈통이 친숙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복귀한 한족 왕조였지만 몽골 제국의 유산이 완전히 근절된 것은 아니었다】.
▲ 웅장한 궁성 주원장(朱元璋)이 언제까지 강남의 난징을 수도로 할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아들 영락제는 연경(베이징)을 세력 기반으로 하고 있었으므로 이 쯔진청(紫禁城)을 짓고 수도를 연경으로 옮겼다. 쯔진청(자금성)이라는 이름은 북극성과 그 주변의 별을 가리키는 자휘원(紫微垣)이라는 말에서 나왔는데, 천자를 북극성에 비유한 고대 중화사상(中華思想)의 맥을 따르고 있다.
1405년에 시작된 정화의 원정은 이후 1433년까지 일곱 차례나 진행되었다. 주로 가까운 남중국해 일대를 순회했으나 때로는 멀리 인도양과 아프리카 동부 해안에까지 가기도 했다. 1차 원정대는 62척의 큰 배와 2만 8700명의 병사들, 의사, 통역관, 목수, 사무원까지 거느렸으니 규모로만 보아도 얼마나 엄청난 계획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원정이 장기적으로 지속되었더라면 유럽보다 조금 앞서 중국의 ‘대항해시대’가 열리고 ‘지리상의 발견’이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정화의 원정에는 큰 한계가 있었다. 유럽의 대항해시대를 연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는 국책으로 장려되기는 했지만 주로 민간 상인들이 일선에서 뛰었고 무역 활동이라는 경제적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반면 중국의 남해 원정은 전적으로 정부가 기획하고 추진했으며, 새로운 통일 제국 명(明)의 위용을 만방에 과시하려는 정치적 의도가 강했다. 때마침 중앙아시아를 석권하고 있던 티무르 제국을 견제한다는 의도도 있었고, 일설에 따르면 행방불명된 조카 건문제를 찾기 위해 원정대를 파견했다고도 한다. 사실 중국은 유럽 세계처럼 분열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처럼 경쟁적으로 지리상의 발견에 나설 필요도 없었다. 어쨌거나 원정의 의도와 외부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당시 유럽과 중국은 차이가 컸다.
그래도 원정의 효과는 꽤 컸다. 우선 남방의 여러 나라와 국제 관계(중국 측 말로는 조공 관계)를 맺었으며, 부차적인 목적인 무역의 성과도 적지 않았다. 특히 원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동남아시아 지역에 관한 정보가 강남 지방의 중국인들에게 전해져 이들이 남방으로 진출하는 사례가 급격히 증가했다. 오늘날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살고 있는 화교(華僑)들은 바로 이 시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 남방 원정선 정화의 남방 원정대는 화물선을 개조해 만든 함선으로 원정을 떠났다. 그런데도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워낙 대규모인 데다, 무력을 앞세운 원정이 아니라 신생국의 권위를 널리 알리는 ‘해외 사절단’의 임무를 주로 수행했기 때문이다.
환관의 전성시대
영락제는 대외적으로 한 무제와 당 태종에 맞먹는 탁월한 군주였으나, 대내적으로는 장차 제국의 운명을 위태롭게 할 씨앗을 뿌려 놓았다. 그것은 곧 환관이었다. 역대 한족 왕조들은 사대부 국가인 송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환관의 발호로 인해 정치 불안과 부패가 빚어졌다. 이 점을 일찌감치 간파한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환관의 정치 개입을 금지하는 것은 물론 환관에게는 문자조차 습득시키지 말라는 유시를 남기고 이 내용을 적은 철패(鐵牌)까지 세웠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은 환관 문제에서도 어긋났다. 영락제는 조카의 권력을 찬탈하는 과정에서 환관의 협조를 받은 일이 있었던 탓에 환관에 대한 경계심이 없고 오히려 그들을 깊이 신뢰했다. 권력의 정통성이 결여되었다는 불안도 작용했을 것이다. 정당한 권력이었다면 당연히 사대부 세력에게 의존했을 테니까.
남해 원정의 사령관인 정화가 환관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게다가 영락제는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1420년에는 동창(東廠)이라는 일종의 특수 경찰 조직을 설치하고 그 우두머리로 환관을 임명했다. 동창은 황제 한 사람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감시할 권리를 지닌 막강한 권력체였다.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하는 기관이 흔히 그렇듯이 동창은 황제의 인물됨이나 권위에 따라 약도 되고 독도 될 수 있었다. 그래서 동창은 강력한 군주 영락제의 시절에는 황제 권력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나 나중에는 환관의 유력한 무기로 전락해 환관의 적수인 사대부를 탄압하는 데 앞장섰다.
영락제 자신이야 절대군주였고 당시 환관은 충심으로 그를 받들었으니 무슨 염려가 있을까? 그러나 그는 태조처럼 앞날을 내다보는 눈이 없었다. 영락제 이후 환관을 중용하는 악습은 아예 황실의 전통으로 굳어졌다. 1435년 일곱 살의 어린 황제 영종(英宗, 1427~1464)이 즉위하자 즉각 문제가 터져 나왔다. 태자 시절부터 영종의 시중을 들던 환관 왕진(王振)은 황제를 대신해 권력을 장악하고 태조가 세운 환관을 경계하라는 철패(鐵牌)마저 부수어 버렸다. 한동안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기고만장하게 앞으로만 내달리던 그는 1449년에 마침내 전복 사고를 일으키고 만다. 북방의 오이라트가 다시 흥기하자 왕진은 무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황제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출정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다. 만용의 대가는 컸다. 토목보(土木堡) 전투에서 대패하는 바람에 왕진은 전사하고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국가적 망신을 빚었다.
그러나 왕진의 몰락으로 환관 정치가 끝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활개를 쳤다. 환관 정치는 이미 그전에 ‘음지’에서만 작용한 게 아니라 제도권 정치에 직접 개입할 수 있는 계기까지 만들어놓았다. 영락제의 뒤를 이은 선종(宣宗, 그사이에 인종이 8개월간 재위하다 죽었다)이 만든 내각(內閣) 제도가 바로 그 계기를 제공했다.
사실 태조의 치세에 모든 권력을 황제에게 집중시킨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과정에서 승상을 없애고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6부까지 황제의 직속으로 한 것은 무리수였다. 어차피 황제 혼자의 힘으로 국정을 다 처리할 수는 없으므로 태조는 황실 비서 겸 고문으로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라는 직책을 두었다. 하지만 이들은 정해진 품계가 워낙 낮아 제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했다. 그래서 선종은 6부의 책임자(상서) 중 한 사람에게 내각대학사를 겸임하게 했는데, 오늘날로 치면 장관들 가운데서 한 사람을 뽑아 국무총리를 겸임시킨 셈이다. 자연히 그 상서는 권한이 강화되어 예전의 승상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무는 승상의 업무이되 공식적으로는 승상이 아닌 상서의 지위였으므로 아무래도 문제가 없을 수 없었다.
바로 이 공식과 비공식의 틈을 환관이 파고들었다. 내각에서 올라오는 문서를 황제에게 전달하는 일은 환관들이 하는 게 역대 전통이었다. 명대에는 사례감(司禮監)이라는 환관들의 기구가 그 일을 맡고 있었다. 그 우두머리인 사례태감은 보직상으로는 단지 문서를 황제에게 전하고 황제의 칙서를 다시 내각에 전하는 통로의 역할만 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도 권력이 부패하면 대통령보다 비서실장이나 경호실장이 판치는 법이다. 점차 권한이 커진 사례태감은 국가의 기밀 내용까지 두루 꿰게 되었을 뿐 아니라, 내각에서 오는 문서를 제멋대로 재단하고 결재까지 할 정도였다. 그런데 옛날의 승상 같은 고위직이라면 몰라도 내각대학사를 겸하는 상서 정도의 신분으로는 사례태감을 제어할 수 없다는 게 더 큰 문제였다. 점차 환관들의 권력은 내각을 능가하게 되었고 내각과 황제의 소통을 차단하는 것은 물론 때로는 내각의 의견까지 재단하고 견제하기에 이르렀다. 감히 환관의 권력에 도전한 내각의 사대부들은 걸핏하면 동창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기 일쑤였다.
▲ 꼭두각시의 대명사 일곱 살에 제위에 올라 어릴 때는 왕진에게 휘둘렸고 만년에는 환관들의 손아귀에서 농락당한 영종의 초상이다. 심지어 그는 오이라트조차도 포로로서의 가치가 없어 1년 만에 풀어줄 정도로 철저한 꼭두각시였다.
건국 초기 건강했던 시절이 지나고 명대 중기에 이르러 어리고 무능한 황제들이 출현하자 그러한 환관 정치는 더욱 기승을 부렸다. 명 제국은 역대 어느 왕조보다도 환관들이 날뛰던 시대였다. 명 중대에 환관들은 숫자만 해도 무려 10만 명에 달했다. 왕진, 유근(劉瑾), 위충현(魏忠賢) 등 역대 ‘환관 스타들’의 상당수가 명대의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명은 그렇게 많은 환관도 부족해 조선에까지 환관을 보내라고 명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환관을 많이 쓰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무리한 요구였다. 처음에는 상국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할 수밖에 없었으나 조선에서도 이내 보낼 환관이 부족해졌다. 더구나 중국에 갔던 환관들이 방문이라도 할 때면 세도를 부리는 통에 각종 폐단이 많아졌다. 세종이 명에 청원한 끝에 환관을 중국에 보내는 일을 겨우 중단할 수 있었다】.
환관을 멀리하고 모든 기관을 황제 직속으로 만들어 황제의 절대 권력을 유지하려 했던 태조 주원장(朱元璋)의 국가 운영 방침은 환관을 중용한 영락제와 내각을 만든 선종에 의해 이미 제국 초창기인 15세기 초반부터 여지없이 무너져버렸다. 주원장(朱元璋)의 꿈은 너무 이상에 치우친 것이었을까? 어쨌든 이렇게 해서 명은 너무도 일찍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것도 역대 최고 기록일 것이다.
사람 잡는 은납제
역대 한족 왕조들이 그렇듯이, 명 제국도 전성기는 짧았고 퇴조기는 길었다. 294년의 사직 중 처음 100년도 채 못 되는 시점에서부터 벌써 정치가 부패하기 시작했다【중국 역대 통일 왕조들의 평균 수명은 300년이 채 못 되는데, 세계사적으로 보면 결코 짧지 않다. 그러나 한반도에 들어선 역대 왕조들의 평균 수명은 무려 600년이 넘는다. 중국에 비해 한반도 왕조들이 정치를 잘했기 때문일까? 물론 아니다. 우선 한반도는 중국만큼 넓지 않기 때문에 중앙 정부의 통제가 지방에까지 쉽게 전해졌다. 또 한반도는 신라의 삼국 통일 이후 외교와 군사 측면에서 중국의 지휘를 받았다. 중국 역대 왕조들은 한반도의 군대 징발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반도의 국제 관계도 거의 중국이 관장하는 식이었다. 왕조가 교체되려면 ‘반란’이 필요한데, 중앙의 통제를 벗어나는 지방이 없고 군사권이 중국에 있었으므로 우리 역사에서는 그런 반란이 드물었으며(그런 탓에 고려와 조선의 왕조 교체는 중국의 분열기와 일치한다), 왕조의 수명도 더 길 수 있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는 사회의 기반을 이루는 경제가 흔들리는 데 있었다.
사회가 발달함에 따라 생산력도 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명대에는 특히 농업과 산업 생산력이 크게 발달했다. 태조 시절부터 국가적으로 자영농 육성책이 실시된 결과 경지 면적이 크게 늘어났고, 품종 개량과 시비법의 발달 등 생산 기술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또한 수공업도 처음에는 농가의 부업으로 시작했다가 점차 대규모 공장들로 발달했다. 특히 송대에 수입되어 원대에 보급되기 시작한 면화로 인해 명대에 들어 방직 공업이 크게 발달했다(이에 따라 임금노동자 계급도 급속히 성장했는데, 예를 들어 쑤저우에서는 중국 최초의 노동운동이라 할 방직공들의 폭동이 발생하기도 했다).
상업 역시 농업과 산업에 못지않았다. 산업과 도시가 발달하면서 원거리 상품의 유통을 담당한 객상들이 전국을 누비고 다녔다. 그 과정에서 전국적인 유통망을 가진 대규모 객상들이 출현했다. 당시 화북을 무대로 활약한 산시 상인들은 군대에 군량미를 조달한 대가로 정부에서 소금의 판매권을 양도받아 급속히 성장했다. 또 안후이의 신안 상인들은 산시 상인과 쌍벽을 이루는 객상으로 강남의 상권을 장악했다.
▲ 난징의 번영 강남에 기원을 둔 최초의 통일 제국답게 명대에는 강남이 크게 발달했다. 항저우는 이미 남송 시대에 발달했으나 명대에는 난징과 쑤저우 같은 다른 강남 도시들도 큰 번영을 누렸다. 그림은 당시 난징 시가지의 광경인데, 많은 사람이 모인 도심을 보여준다.
경제성장이 지속되면 그에 따라 경제구조도 변해야 한다. 몸은 커졌는데 작은 옷을 그대로 입을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가뜩이나 정치 불안에 시달리던 정부는 민간에서부터 급성장하는 경제를 감당하지 못했다. 산업과 상업이 발달하면 화폐를 더 많이 사용할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다. 당시 정부가 발행하는 화폐로는 주화인 대명통보(大明通寶)와 지폐인 대명보초(大明寶鈔)가 있었다. 그런데 정부는 은을 아끼려는 얄팍한 생각에서 주화보다 지폐의 사용을 적극 권장했고, 민간에서 널리 쓰이던 은의 유통을 법으로 금지했다. 경제 규모의 성장으로 화폐 사용량이 급증하자 정부에서는 지폐만 마구 찍어댔으니 이게 온전할 리 없다. 지폐 가치는 급락을 거듭하다 나중에는 종잇조각과 다를 바 없어졌다. 그제야 비로소 정부는 은의 유통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허가하는데,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가 따로 없다【이 점이 중국 명 제국과 비슷한 시기에 유럽에서 생겨난 절대왕정 체제의 차이다. 황제를 중심으로 한 절대 권력의 외양은 같지만, 그전까지 중국에서는 강력한 중앙집권의 전통이 있었던 데 비해, 유럽에는 분권적인 봉건제의 역사가 있었다. 봉건제의 유럽에서는 민간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산업과 상업의 성장에 대해 정치권력이 관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모든 게 관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민간 영역이라는 게 애초에 없었다. 이 차이는 서양에서 시민사회가 역사 발전에 따라 자연스럽게 성장한 데 반해 동양에서는 그에 해당하는 세력이 생겨나지 못한 이유를 말해준다】.
급기야 1436년에는 관리들마저 녹봉을 곡식 대신 은으로 달라고 요구했다. 예나 지금이나 공무원의 급료는 국가 재정에서 큰 몫을 차지한다. 관리들의 녹봉을 은으로 주기 시작하자 정부는 많은 양의 은이 필요해졌다. 부족한 은은 세금으로 메울 수밖에 없었다. 결국 정부는 백성들에게 세금을 은으로 내라는 은납제(銀納制)를 시행하게 된다.
▲ 쓰촨 지역에서 유통된 은화 화폐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여건에서 돈으로 세금을 납부하라는 것은 일종의 이중과세였다. 농민들은 현물을 그림과 같은 화폐로 바꿔 조세를 내야했다.
절대 권력의 시대에 정부의 방침은 전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마련이다. 정부의 명이 떨어지자 모든 백성은 세금을 내기 위해 은을 구해야만 했다. 상업이 발달한 도시에서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일반 농민들에게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예전에는 수확한 곡식을 그냥 조세(‘租稅’라는 한자어에 곡식을 뜻하는 ‘禾’자가 들어 있는 것은 현물을 세금으로 냈던 흔적이다)로 납부하면 되었지만, 이제는 곡식을 팔아 은을 구입해서 내야하니 결과적으로는 세금이 더 무거워진 셈이 되었다(일찍이 당의 양세법(兩稅法)으로 현물 납부를 금납제로 바꾸었을 때도 농민들은 똑같은 피해를 겪었는데, 수백 년이 지났어도 화폐경제가 실현되지 않은 것이다). 농민들은 은을 구입하기 위해 쌀이나 보리 같은 일반 작물만이 아니라 돈이 될 만한 작물을 널리 재배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미작을 해야만 하는 지역에서도 특용 작물을 재배한 탓에 미곡이 부족해지는 경우마저 있었다.
이렇게 은 구입이 어려웠던 이유는 애초에 중국의 은 생산량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족하면 수입해야 한다. 그게 정부의 의무다. 하지만 정부가 그 점을 깨달은 것은 은납제가 시행된 지 무려 150년이나 지나서였다. 16세기 말에 정부가 대외 무역을 활성화하는 조치를 취해 멕시코산 은이 유입되면서 비로소 은이 부족한 현상이 해소되었다. 급변하는 현실에 한참이나 뒤늦은 행정은 경제 혼란과 백성들의 고통으로 직결되었다.
은납제로 인해 세금을 현물 대신 은으로 납부하게 되자 세금 제도도 바뀔 수밖에 없었다(물론 은납제가 시행되었다고 해도 현물로 내는 세금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은으로 대체된 것은 주로 요역에 관한 세금
이었고 토지에 매기는 세금, 즉 전부田賦는 현물이 위주였다). 원래 중국의 세금 제도는 당대 이후 양세법(兩稅法)을 기본으로 했다. 4장에서 보았듯이 양세법의 원래 취지는 조용조(租庸調)로 나누어진 징세 체계를 하나로 단일화해 조용조의 폐단을 없애고 국가 세수를 늘리는 데 있었다. 그러나 시대를 거치면서 양세법의 기본 취지는 점차 약화되고 여름과 겨울 두 차례에 걸쳐 세금을 납부한다는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그나마 원대에는 강남 지역에만 양세법을 실시했는데, 여름에는 특산물을 징수하고 가을에는 곡물세를 징수한다는 내용이었으니 명칭만 양세법이지 과거의 조용조나 다를 바 없었다.
당 제국 시대에 균전제(均田制)가 무너지고 양세법이 생겨난 원인은 농
민들이 토지에서 이탈했기 때문이다. 명대 중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당대의 균전제가 몰락한 것처럼 명대에도 붕괴한 게 있을 터이다. 그것은 바로 제국 초기부터 통치의 근간이었던 이갑제(里甲制)다.
▲ 수력의 이용 명대의 농서에 나오는 수전번차(水轉翻車)의 모습이다. 이미 기어의 원리가 이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갑제(里甲制)의 주요한 취지는 향촌 사회의 질서를 이용해 조세 징수와 요역 부담을 제대로 처리하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마을에 균등하게 조세와 요역을 부담시킨 데서 생겨난다. 같은 110호의 마을이라 해도 마을마다 경제 사정이 다른 것은 당연한 이치인데, 이 점이 무시된 것이다(세금의 용도를 사회적인 측면이 아니라 지배층을 유지하는 것으로 여기는 동양식 왕조의 한계다). 조세까지는 그런대로 견딘다 해도 요역은 큰 문제였다.
그렇잖아도 농민들의 부담이 큰 데다 향사(鄕士)라고 불리는 관료나 생원 등 마을의 지식인층은 요역이 면제되었고, 유력 지주들도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요역을 회피하는 경우가 많았다. 여기서 생긴 요역의 공백은 일반 농민들이 메워야 했다.
예로부터 조세보다 무거운 게 요역이었다. 가혹한 부담에 견디지 못하고 도망치는 농민들이 늘어갔다. 남은 농민들은 향촌 지배층의 면제된 요역분에다 마을에서 도망친 농민들의 요역분까지 부담해야 했으니 죽을 맛이었다.
똑같은 범인이 균전제(均田制)를 죽이고 수백 년 뒤에 이갑제(里甲制)도 죽였다. 그렇다면 사건 해결도 똑같은 형사가 맡을 수밖에 없다. 다만 예전에 이름이 양세법(兩稅法)이었던 형사는 이번에는 일조편법(一條鞭法)이라는 이름으로 변장하고 현장에 출동한다. 1513년에 시행된 일조편법의 기본 내용은 본래의 양세법과 같다. 곡물세와 요역의 여러 항목을 단일화해 은납하게 하고, 이갑제(里甲制) 하에서 마을마다 부과하던 세금의 양을 다시 옛날처럼 토지와 사람을 기준으로 부과한다는 내용이다. 일조편법이 양세법과 다른 점이 있다면, 세금을 연 중 두 차례로 나누어 내지 않게 됨으로써 ‘양세’라는 이름을 떨구었다는 것과 당 제국 시대와 달리 은납제가 제법 광범위하게 통용되고 있다는 배경의 차이밖에 없다.
양세법과 마찬가지로 일조편법도 초기에는 어느 정도 효과를 보았다(사실상 같은 내용인데도 양세법과 일조편법은 중국의 세금 제도 역사상 양대 개혁으로 불린다). 과세의 기준이 명확해지면서 세금을 둘러싼 관리들의 농간도 사라지고, 탈세의 여지가 적어져 국가의 수입도 늘어났다. 게다가 농민이나 정부나 세금을 납부하고 징수하기가 수월해졌다. 그러나 농민들의 세금이 경감된 측면은 사실상 없었고, 앞에서 본 것처럼 완전치 못한 은납제 때문에 농민들이 겪는 이중고(곡물을 팔아서 은을 사야 하는 고통)를 오히려 증폭시킨 의미가 있었기 때문에 그 효과는 한시적일 따름이었다.
▲ 철의 제련 노동자들이 용광로를 이용해 철을 제련하는 모습이다. 당시 공업 노동자는 첨단의 기술자로 취급받았으므로 일하는 표정이 즐거워 보인다. 하지만 명의 백성들은 세금 제도의 폐해에 몹시 시달렸다.
조공인가, 무역인가
중화사상(中華思想)이 이론과 현실에서 완성된 것은 송대의 일이었으나 물리력이 약한 송은 중화사상을 실현하지 못하고 이상으로만 간직했다. 그러다 결국 ‘오랑캐’인 몽골족에게 나라를 빼앗겼다. 그런데 100여 년 뒤 한족의 명 제국이 복귀했다. 송대에 지금은 비록 오랑캐 세상이지만 한족이 다시 중심이 되리라던 주희(朱熹)의 이론이 사실로 증명된 걸까?
한족 왕조 명은 그 점을 의식했는지 개국 초부터 적극적으로 중화적 세계관을 주변에 강요했다. 영락제 시대 정화의 남해 원정도 그 작업의 일환이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정화의 원정은 유럽이 본격적인 대항해시대를 여는 것보다 시기적으로 앞섰으므로 충실하게 진행되었더라면 이후 중국사, 아니 세계사의 물줄기를 크게 바꾸었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17~18세기에 동남아시아 일대가 유럽 열강에 침탈당하는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화의 원정은 활발한 대외 무역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중국처럼 강력한 중앙집권의 역사가 오랜 곳에서는 민간 주도를 기본으로 하는 무역이 활성화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거니와 당시는 대외 무역이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바로 왜구 때문이었다. 원대부터 중국과 한반도 인근 해상을 무대로 활동하던 왜구는 갈수록 기승을 부렸다. 이따금 해안 지방의 주민들과 무역을 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노략질과 약탈을 일삼는 경우가 더 많았다. 더구나 명 초기에는 해안 지방의 주민들까지 왜구에 가세했으므로 피해가 더욱 가중되었다. 그래서 주원장(朱元璋)은 1371년에 해안 주민들에게 일체의 사무역(私貿易)과 해외 출항을 금지하는 해금령(海禁令)을 내렸다【지리적 위치상 중국보다 왜구의 피해가 더 심했던 조선에서는 초기에 회유책으로 삼포를 개항하기도 하고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를 무력으로 토벌하기도 했다. 당시 쓰시마는 일본 열도와 무관한 독립국이나 다름없었고, 왜구도 일본 본토인과 같은 민족이라는 의식이 없었다. 조선 정부는 나중에 극약 처방으로, 아예 연안의 섬과 해안 지방을 비워버리는 공도(空島) 정책을 폈다. 그래서 왜구가 근절될 때까지 한동안 한반도 주변의 섬들은 거의 무인도가 되다시피 했는데, 오늘날 독도의 소유권 문제가 복잡해진 데는 이 공도 정책도 한몫했다】. 송과 원을 거치면서 활발해졌던 민간의 대외 무역은 이 해금령으로 인해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사무역이 금지되었으니 남은 것은 국가의 공식적인 무역밖에 없다. 그런데 말이 공식적인 무역일 뿐 정상적인 무역은 아니었다. 중화사상(中華思想)에 투철한 명 정부는 국가 간의 무역조차 인정하지 않았다. 원래 국제 무역이란 서로 대등한 관계에 있는 국가들 간에 행해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중화사상으로 보면 천하의 중심인 중국과 대등한 국가란 있을 수 없다. 따라서 명은 중국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나라만을 대상으로 무역을 허가했다. 이것이 조공 무역이다.
▲ 청 제국의 조공무역 왕의 행차를 보는 것 같은 거창한 행렬이다. ① 법란서 사절이다. 법란서는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② 오란다 사절, 즉 네덜란드 사절이다. ③ 대서양 사절단으로서 서양의 여러 나라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④ 영국 사절단이다.
조공 무역의 골자는 “공(貢, 공물)이 있으면 사(賜, 하사품)가 있다.”라는 것이었다. 즉 주변국 입장에서는 중국에 조공을 바치는 것이고, 중국 입장에서는 임금이 신하에게 물건을 하사하듯이 조공의 대가를 내주는 것이다. 명 정부는 이 조공 무역만을 정상적인 무역으로 간주했으며, 그 이외의 모든 무역 관계는 사무역, 즉 밀무역으로 규정하고 해금령으로 다스렸다. 주변국이 중국의 종주권을 무시할 경우 조공 무역조차 중지되었다【이런 무역 방식은 조선도 그대로 답습했다. 중국을 본떠 조선은 주변국인 일본이나 여진에 대해 조공을 바치면 그 대가를 하사한다는 식으로 무역에 임했다. 다만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첫째, 조선은 중국에 사대하는 처지였으므로 그 자신도 조공을 바치는 위치였다. 둘째, 조선의 생각과 달리 일본과 여진은 조선을 상국으로 받들지 않았다. 셋째, 위(중국)로는 바치고 아래(일본, 여진)로는 베푸는 조선의 무역은 만성 적자에 시달렸다】.
이렇게 성격 자체가 비정상적이었으니 당연히 무역의 절차도 매우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우선 명 정부는 조공 무역을 원하는 나라에 일종의 징표로 감합(勘合)을 발부했다. 중국에 조공 무역을 하기 위해 오는 무역선은 배 한 척마다 한 장씩 감합을 지니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감합만 가지고 와서는 무역을 할 수 없었다. 천자의 서신을 받았으니 의당 답신이 있어야 할 것이다. 무역선은 자기 나라 왕이 명의 황제에게 보내는 답신을 가지고 와야 했는데, 이것을 표문(表文)이라 불렀다. 발부하는 감합의 양도 중국 측에서 일방적으로 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명의 국력이 강할 무렵에는 이 조공 무역도 그런대로 무역의 구실을 했다. 그러나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 중대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진다. 국력이 약화되고 조공 무역이 유명무실해지자 밀무역이 그 자리를 메우게 된 것이다. 은납제(銀納制)를 가능케 한 멕시코 은의 공급도 처음에는 이 밀무역으로 충당한 것이었다. 17세기 초반부터 중국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한 유럽 국가들은 중국으로부터 비단과 면직물, 도자기, 차 등을 수입하고 은으로 지불하는 사례가 많았는데, 그 덕분에 명의 은 가뭄이 해갈되었다. 재정난에 처한 정부를 살린 것은 밀수였던 셈이다.
▲ 마카오의 기원 1522년 명 조정은 외국 상인들을 모조리 내쫓았다. 그러자 외국 상인들은 사무역, 곧 밀무역을 활발히 전개했다. 그림은 광저우에 최초로 상륙한 포르투갈인들이다. 처음 정착한 곳이 광저우였던 탓에 19세기 열강의 중국 침략기에도 포르투갈은 광저우 부근의 마카오를 조차하게 되었다. 현재 중국 속의 유럽 도시인 마카오의 기원이다.
기회는 죽고 당쟁은 살고
명대에는 농업과 공업, 상업이 그 어느 때보다도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무능한 황제와 무능한 정부, 무능한 정치에 발목이 잡혀 사회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총체적 무능으로 일찌감치 쇠락의 길을 걸었던 명이 그나마 300년 가까운 사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따금씩 운 좋게도 수명을 늘리는 특효약을 처방 받은 덕분인데, 그중 하나가 장거정(張巨正, 1525~1582)의 개혁이다.
송에 왕안석(王安石)이 있었다면 명에는 장거정이 있다. 장거정은 1572년 신종(神宗, 1563~1620)이 열 살의 나이로 즉위하자 어린 황제를 대신해 전권을 위임받았다. 그 전대 수십 년간의 정치 문란을 목격하면서 개혁의 뜻을 품고 있었던 장거정은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강력한 혁신 정치를 폈다. 먼저 그는 부패하고 무능한 관료들을 축출해 관료제의 기강을 확립한 다음, 황허 일대에서 대규모 수리 사업을 전개했다. 그의 가장 탁월한 업적은 토지 장량(丈量)을 실시한 것이다.
위기를 타개하려면 개혁이 필요하고, 개혁은 정부가 주도해야 한다. 또한 정부가 제 구실을 하려면 무엇보다 재정이 튼튼하고 예측 가능해야 한다. 그러자면 토지조사가 급선무였다. 1578년에 장거정은 전국적인 토지조사 사업을 벌여 세수에서 누락된 대지주들의 토지를 적발하고 전국 토지의 실제 면적을 정확히 조사했다. 그리고 이 성과를 바탕으로 그전까지 산발적으로 적용되어오던 일조편법(一條鞭法)을 전국적으로 확대했다. 대외적으로도 그는 북방과 남방의 이민족들을 토벌하고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등 적극적인 국방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장거정의 개혁은 결실을 충분히 맺기에는 그 기간이 너무 짧았다. 개혁 정치 10년 만에 안타깝게도 장거정이 죽었다. 더구나 신종은 ‘신(神)’이라는 묘호에 걸맞지 않게 무능한 군주였다. 공교롭게도 명 제국 역사상 가장 유능한 관료와 가장 무능한 황제가 한 시대에 공존한 셈이다. 만력(萬曆, 신종의 연호) 연간은 명의 사직에서 가장 긴 48년 동안이지만 개혁의 초기 10년이 지나고나서부터는 언제 그런 개혁이 있었느냐는 듯 또다시 기나긴 정치 부패의 터널이 이어졌다【북송 시대 왕안석(王安石)의 개혁(4장 참조)과 명 시대 장거정의 개혁은 배경이나 결과가 비슷하다. 둘 다 나라의 기틀이 흔들리고 정치가 부패했을 때 등장했고, 지나친 급진성으로 수구 세력의 배척을 받아 실패했다. 게다가 두 경우 모두 개혁의 실패가 곧장 격심한 당쟁을 낳았다. 북송의 당쟁은 신법당과 구법당으로 갈라졌고, 명의 당쟁은 동림당과 비동림당이 맞섰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까지 닮았다는 점이다. 왕안석(王安石)과 장거정의 개혁은 모두 ‘신종(神宗)’이라는 묘호를 가진 황제가 밀어주었다. 다만 묘호는 같았어도 북송의 신종은 개혁 의지가 투철한 군주였는데 아쉽게도 서른여덟의 젊은 나이로 죽은 반면, 명의 신종은 철저히 무능한 군주였는데 쉰일곱까지 살았다는 점이 다르다】.
▲ 황제의 교과서 송의 신종 때는 왕안석이 개혁 정치를 펼쳤는데, 명의 신종 때는 장거정이 그 일을 맡았다. 묘호는 같지만, 송의 신종은 스무 살의 청년 황제인 데 비해 명의 신종은 열 살의 어린이였다. 그래서 장거정은 왕안석처럼 황제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그 대신 황제를 먼저 교육해야 했다. 사진은 당시 장거정이 황제의 교과서로 썼던 『제감도설(帝鑑圖說)』로, 역대 황제들의 선행을 기록한 책이다.
게다가 이 시기부터는 예의 환관 정치에다 당쟁까지 겹쳐 정치의 실종에 한몫을 거들었다. 정치에 관해 무능하고 무관심으로 일관한 신종의 치하에서 본격적인 붕당이 형성되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조정의 관료들은 이미 다섯 개의 붕당을 만들어 대립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게 된 계기가 생겨났다. 일찍이 당쟁이 극성을 부렸던 송대의 유학자 구양수(歐陽修, 1007~1072)는 『붕당론(朋黨論)』에서 대도(大道)를 논하는 군자의 붕당과 눈앞의 이익을 따지는 소인배의 붕당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보면 소인배들은 서로의 이해관계에 따라 붕당을 이루어 다투다가도 군자의 붕당이 출현하면 이에 대항하여 약삭빠르게 일치단결하는 생존의 본능을 보여준다. 그 다섯 개의 붕당이 공동의 적으로 삼은 ‘군자의 붕당’은 동림당(東林黨)이었다.
1594년 신종은 멀쩡한 맏아들이 있는데도 애첩의 소생을 마음에 두고 태자 책봉을 차일피일 미루었다【못난 아비와 잘난 아들은 어울리지 않지만 신종의 맏아들은 훌륭한 군주가 될 자질을 갖춘 잘난 아들이었다. 그러나 인물을 살리고 죽이는 것도 시대다. 그는 어렵사리 제위에 올랐다가 한 달도 못 되어 설사약을 잘못 먹고 죽었는데, 독살의 가능성이 농후하다. 결국 그는 태창(泰昌)이라는 연호와 광종(光宗)이라는 묘호만 역사에 남겼다. 그가 그렇게 급사한 탓에 그의 아들은 허겁지겁 제위를 계승해야 했다. 그런데 광종이 맏이이면서도 태자 책봉이 여의치 않았던 사정은 엉뚱하게도 조선 왕실에 영향을 미쳤다. 당시 광해군(光海君)은 차남으로서 세자 책봉을 받으려 했다가 태자 책봉을 놓고 당쟁을 벌이던 명 조정의 분위기 때문에 늦어졌다】. 강직한 관료였던 고헌성(顧憲成)은 이에 항의하다가 파직된 뒤 낙향해 동림서원(東林書院)을 세우고 학문과 시국에 관한 토론을 벌였는데, 여기에 기원을 둔 게 동림당이다. 재야의 동림당이 조정의 양식 있는 관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자 기존의 붕당들은 한데 뭉쳐 ‘비동림당’을 이루었다. 동림당과 비동림당은 이후 중요한 사건이 생길 때마다 사사건건 대립했다.
당쟁 자체도 나빴지만 이 당쟁이 종식된 과정은 더 나빴다. 시정잡배 출신의 위충현(魏忠賢)은 “출세하려면 환관이 되어 황제의 눈에 들라.”는 원칙에 따라 환관이 된 인물이다. 광종의 아들인 ‘까막눈’ 황제 희종(熹宗, 1605~1627)의 신뢰를 얻어 권력을 장악한 그는 1626년 비동림파와 내통해 동림당의 여섯 거물을 처형하고 당쟁을 종식시켰다. 다음 황제이자 명의 마지막 황제인 의종(毅宗, 1611~1644)은 즉위하자마자 위충현을 처형하고 동림당의 인물들을 등용해 꺼져가는 제국의 불씨를 되살리려 애썼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 정치조직으로 변질된 서원 말뜻 그대로라면 서원(書院)은 공부하는 장소, 즉 학교여야 한다. 그러나 유학 이념이 지배하는 국가에서 공부란 곧 정치였다. 그래서 조선 역사에는 학자 관료라는 독특한 계층이 있었으며, 중국에서나 한반도에서나 원은 당쟁의 진원지였다. 사진은 당시 군자의 붕당이라 불렸던 동림당의 동림서원이다.
우물 안의 제국
정확한 비교는 불가능하겠지만 서양에 비해 경제와 문물에서 앞섰던 동양이 서양에 뒤처지기 시작한 것은 중국의 명대부터라고 볼 수 있다. 몽골족의 원 제국은 처음부터 동양과 서양의 교류에 대한 관심 때문에 중앙아시아로 진출해 세계 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뒤이은 명대에는 원대에 발달한 해외 무역과 교역이 거의 단절되었으며, 송대에 비해서도 상업과 무역이 크게 위축되었다.
여기에는 몽골이라는 이민족의 지배가 100여 년간 지속된 탓도 있다. 명은 오랜만에 복귀한 한족 왕조였으므로(내내 북방 민족에 억눌려 지낸 송대까지 합치면 당 제국 이후 무려 400년 만의 제대로 된 한족 통일 왕조다) 초창기부터 제국 운영에서 경제 논리보다는 정치 논리를 앞세웠다. 정화의 원정이 서양에서와 같은 대항해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나 감합 무역이라는 비정상적인 무역 형태로 일관한 것은 그 때문이다. 그나마 정치 논리라도 제대로 세웠으면 좋았겠지만 그렇지도 못했다. 정치에서도 독창적인 감각을 보였던 태조 시절을 제외하고는 다분히 예전의 강성했던 한족 왕조인 당 제국을 모방하고 답습하려는 복고적인 경향이 짙었다.
중국이 깊은 복고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가운데 시대는 과거와 크게 달라졌고 나날이 새로워지고 있었다.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서양 세계에서는 오랜 중세가 끝나고 대항해, 르네상스, 종교개혁, 자본주의의 발생 등 세계사적으로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면서 장차 세계의 중심으로 성장할 싹을 보이고 있었다【동양의 질서는 수천 년 동안 기본적으로 중국이라는 고정된 축을 중심으로 전개 되었지만, 서양의 질서는 서서히 중심이 이동하면서 다원적인 중심을 형성하는 방식으로 발전했다. 오리엔트에서 발생한 문명은 점차 서쪽으로 이동해 소아시아로 전달 되었고, 소아시아의 문명은 다시 서진해 크레타를 거치고 그리스 반도에서 에게 문명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스가 몰락한 뒤 역사의 중심은 서쪽의 로마로 이동해 지중해 시대를 열었으며, 로마가 멸망한 뒤에는 서유럽으로 옮겨갔다. 그러나 동양의 역사에서 는 그와 같은 중심 이동이 없었고, 중국 대륙이라는 불변의 중심을 한족과 북방 이민족들이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이는 방식으로 역사가 전개되었다】.
게다가 동양 세계에서도 중국 중심의 고정된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변방에서부터 대규모 변화의 조짐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오랜 내전을 끝내고 유사 이래 처음으로 전국이 통일된 일본은 16세기 말 중국을 상대로 국제 무대에 등장하고자 했다. 일본은 임진왜란(壬辰倭亂)에서 일단 패배의 쓴잔을 마셨으나, 이것은 일본의 성장을 알리는 예고탄이었다(일본은 19세기 중반에 다시 국제 무대에 복귀한다).
▲ 흥청거리는 베이징 명대 말기 베이징의 광경. 명 제국은 이렇게 상업이 번성하고 문물이 발달했으나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를 맞아 세계적 대세관이 어두웠던 탓에 끝내 우물 안 개구리의 신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중국 내부 역시 느리지만 변화의 움직임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윗물(정치)에서는 침체와 정체를 면하지 못했어도 아랫물(민간 영역)에서는 엄청난 에너지가 들끓고 있었다. 사무역이 금지되고 해금령이 내려졌어도 민간의 욕구는 활발한 밀무역으로 분출되었고, 국가가 은의 통용을 금지했어도 민간에서는 은 본위의 화폐경제를 밀고 나가 결국 은납제(銀納制)를 시행하도록 만들었다.
농민들이 주도한 변화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명대 초기부터 성장한 자영농과 신흥 지주 들은 부패한 정치 상황에서도 대주주들을 견제해 대토지 겸병을 늦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명대의 대토지 겸병이 다른 왕조에 비해 더디게 진행된 이유는 전적으로 그들의 덕분이다). 전호(소작인)들의 힘과 의식도 크게 성장해 지주와 근대적인 의미의 계약관계를 맺게 되었다.
명대 후기에 생겨난 일전양주제(一田兩主制)는 토지의 소유권과 경작권을 분리해 경작권도 하나의 권리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소유권은 ‘땅 밑의 권리[田底權]’, 경작권은 ‘땅 위의 권리[地面權]’라고 불렀다).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물권이 소유권과 점유권으로 분화되는 것에 해당한다. 경작자는 토지 소유자의 동의 없이 자신의 ‘땅 위 권리’를 매매 양도하거나 저당을 잡힐 수 있었으니 오늘날의 집 주인과 세입자 관계나 다름없다.
이렇게 신분이 높아지고 의식이 깨인 농민들은 이제 예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지주가 가혹한 소작료나 불합리한 신분적 예속을 강요할 경우에는 복종하기를 거부하고 맞서 싸웠다. 1448년에 소작료와 요역의 감면을 내걸고 최초의 항조(抗租)운동이 벌어진 이래 전호들은 여러 차례 조세 저항 운동으로 지주와 국가 권력에 맞섰다. 농민들은 단지 가뭄이나 홍수, 전염병 등의 재해를 당해 소작료 감면을 요구한 게 아니라 제도 자체의 불합리를 시정하지 않으면 조세를 납부하지 않겠다고 당당히 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국내외적, 세계사적 변화에 눈감고 있었던 것은 지배층 뿐이다. 이들은 환관 정치와 당쟁이라는 ‘수구와 복고’로만 일관했을 뿐 대내외적 변화를 정치에 반영하기는커녕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했다. 이른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대를 맞아 중국으로 밀려오는 서구 열강이 어떤 의도를 지니고 있는가도 알지 못했고, 서양의 선교사들이 왜 그리스도교를 포교하기 전에 중국의 습속부터 먼저 익히는지도 알지 못했다(16세기부터 중국으로 오는 선교사들은 곧이어 밀어닥칠 서양 제국주의 침탈의 앞잡이와 같은 역할을 했다)【그 시기에 서양의 선교사들이 중국에 온 데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다. 16세기 초의 종교개혁으로 유럽에서는 신교가 우세해졌다. 그때 가톨릭 측을 지원한 것은 아라비아의 지배에서 막 벗어난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였다. 마침 이 지역은 대항해시대의 주역이었으므로 구교 선교사들은 자국의 상선을 타고 아메리카와 아시아로 갔다. 중국은 말하자면 구교의 ‘종교 마케팅’을 위한 좋은 시장이었던 것이다】.
원대에 싹튼 주체적 대외 교류의 움직임이 완전히 단절된 데다 중화사상(中華思想)이라는 허풍 섞인 오만으로 명의 지배층은 스스로 우물 안의 개구리를 선택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주체적으로 내릴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으며, 그들이 지배하는 나라를 중국 역사상 마지막 한족 왕조로 만드는 선택이었다.
▲ 동서양의 원정 대항해를 출범하는 포르투갈의 함대, 정화의 남방 원정은 시기적으로 서양 국가들이 앞다투어 지리상의 발견에 뛰어들기 이전이었으나 이 탐험의 함대에 비하면 진취적이지 못했고, 결국 후대에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3. 최후의 전성기
급변하는 만주
역대 통일 왕조가 그랬듯이 명 제국도 외부의 침략이 아니라 내부에서 자멸했다. 마지막 황제인 의종이 즉위하던 해부터 발발한 농민 반란은 점차 전국으로 번지며 규모가 커졌다. 비가 잦으면 벼락이 치는 법이다. 중원 북서쪽 산시에서 벼락이 울렸다. 지방관이던 이자성(李自成, 1605~1645)은 그 지역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나자 관직을 팽개치고 반란군을 규합했다. 쿠데타와 건국의 차이는 나라를 바꾸느냐, 못 바꾸느냐에 있다. 1643년에 그는 시안에서 대순(大順)이라는 새 왕조를 세우고, 이듬해에는 베이징을 공략해 손에 넣었다. 도성이 함락되고 의종이 목을 매 자살하는 것으로 명 제국의 사직은 명이 끊겼다.
이자성이 계속 권력을 유지했더라면 명 제국을 대신해 ‘순(順) 제국’이 한족 왕조를 이어 갔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같은 성씨가 같은 시대에 중국과 한반도의 왕실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당시 명의 주력군은 만주에 있었기 때문에 이자성의 반란군을 미처 막지 못했을 뿐이다. 왜 만주에 있었을까?
그때까지 역대 통일 왕조들 가운데 만주를 지배한 것은 몽골족의 원 제국뿐이었다. 명의 영락제(永樂帝)가 직접 몽골 초원까지 원정을 떠난 적이 있듯이 중원의 북쪽은 제압한 적이 있었으나 만주만은 예외였다. 사실 수ㆍ당 시대 이래 중국은 만주를 정복하려는 시도를 한 적이 없었다. 따라서 14세기에 원이 멸망하자 만주는 다시 중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났다【만주는 고려시대까지도 한반도와 인연이 있었다. 원 황실은 딸을 고려의 왕에게 출가시켜 고려를 부마국으로 복속시켰다. 충렬왕(忠烈王)부터 공민왕(恭愍王)까지 몽골 지배기의 왕들은 모두 원 황제의 사위다. 굴욕적이기는 하지만 만주에 관해서는 중요한 혜택도 있었다. 원은 고려 왕족을 심양왕(瀋陽王: 심양의 중국식 명칭은 지금의 선양이다)으로 봉해 고려에 만주의 관할권을 맡겼던 것이다(심양왕의 지위도 세습되었다). 당시에 고려 왕실은 그것을 ‘혜택’으로 여기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것은 만주를 영토화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때 만주를 잘 관리하고 그곳에 살고 있던 여러 부족을 동화시켰다면 만주는 그때부터 한반도와 한 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고려는 원의 속국이었으나 당시 만주는 원에도, 또 이후 명에도 중요한 지역이 아니었으므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몽골 지배기 고려의 왕과 심양왕 들은 그럴 만한 기개와 의지가 없었다. 이후 만주는 청 황실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봉금책(封禁策)이 시행되면서 성역화되어 중국인이나 조선인의 이주가 금지되었고, 우리 민족과 영원히 분리되었다(그 때문에 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비가 무려 1500년이나 뒤인 19세기 말에 ‘발견’되었다. 봉금책으로 만주 통행이 어려워진 조선시대에 실학자들은 그 비석을 금 나라의 시조비로 오해하기도 했다)】.
▲ 만주족의 영웅 누르하치가 제위에 오르는 장면이다. 누르하치까지는 아직 후금일 뿐 청 제국이 아니었으나 그의 후손들은 중국식 체제를 소급해 그를 청 태조로 취급했다
명에 있어 만주는 ‘변방’에도 포함되지 않는 그 바깥이었고, 정복과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제압의 대상일 뿐이었다. 당시 만주의 주인인 만주족(여진족)에게 명은 관작도 주고 조공 무역도 허락하는 등 북변을 침범하지 않도록 무마하는 정책으로 일관했다. 그 정책이 계속 약효를 지니려면 명의 힘이 강해야 했으나 명이 쇠약해지면서 만주에는 서서히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었다.
1588년 만주족의 영웅 누르하치(Nurhachu, 1559~1626)는 만주 일대를 통일했다. 이후에도 계속 세력을 확장하더니 1616년에는 칸(후금 태조)을 자칭했다. 수도는 남만주의 선양이었고, 국호는 300여년 전 조상들이 세운 강국 금을 좇아 후금(後金)으로 정했다. 누르하치는 국호만이 아니라 북중국을 지배한 조상들의 역사까지 재현하려 했다.
후금이 랴오둥에서 랴오허를 건너 랴오시까지 진출하자 아무리 쇠락해가는 명이라 해도 더 이상 두고 볼 입장이 아니었다. 정부는 후금을 저지하기 위해 다급히 군대를 파견했다. 그래서 이자성이 베이징을 점령했을 때 명의 주력군은 만주 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누르하치는 새 제국의 기틀을 세우고 전장에서 얻은 부상으로 죽었지만, 그의 야망은 그에 못지않게 유능한 아들에게로 이어졌다. 칸위를 물려받은 홍타이지(태종, 1592~1643)는 아직 ‘재야 세력’인 후금을 본격적인 ‘수권 정당’으로 탈바꿈시킨 인물이다. 그는 우선 투항해온 한인들을 중용해 중국의 6부제를 도입하는 등 후금을 중국식 전제 국가로 만들었다. 그리고 곧이어 1627년과 1636년 두 차례에 걸친 조선 정벌(정묘호란과 병자호란)로 후방을 다지는 동시에 중국 정복을 위한 재정을 확보했다. 마지막으로 1636년에 그는 국호를 중국식 대청(大淸)으로 고쳐 드디어 대권을 위한 포석을 완료했다.
한편 이자성이 베이징을 장악하는 바람에 만주로 파견된 명의 군대는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 총사령관인 오삼계(吳三桂, 1612~1678)는 베이징과 선양 사이의 요충지인 산하이관에 머물면서 사태를 관망했다. 떠날 땐 정부군이었는데 돌아갈 땐 반란군이 될 수도 있었다. 그럴 바에는 아예 진짜 반란군이 되자. 그는 차라리 청에 항복해 이자성의 ‘반란군’을 진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무렵에는 청 태종이 사망하고 그의 아홉째 아들인 세조(世祖, 1638~1661)가 제위를 이은 상태였다. 황제의 나이는 겨우 여섯 살이었으므로 삼촌인 도르곤(1612~1650)이 섭정이자 실권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도르곤은 오삼계에게 후한 대가를 약속하고 그의 안내를 받아 손쉽게 입관했다(만주에서 중국 본토로 들어가는 것은 산하이관을 통과한다는 의미에서 입관入關이라고 불렀다). 곧이어 1644년에 청은 이자성을 물리치고 꿈에도 그리던 베이징에 입성했다.
▲ 정복 군주의 양면 누르하치를 칭기즈 칸에 비유한다면 청 태종은 오고타이나 쿠빌라이에 비유할 수 있다. 대외적인 정복 활동과 대내적인 전제정치 확립을 통해 후금을 대청 제국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에 버금갈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킨 인물로 악명이 높다.
해법은 또다시 한화 정책
베이징을 점령한 뒤에도 청은 한동안 통일 제국의 면모를 갖추지 못했다. 한 번 이민족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는 한족의 저항은 매우 거셌다. 강북은 그런대로 지배할 수 있었으나 강남은 여의치 않았다(남북조시대부터 북방 민족은 중원을 여러 차례 지배했으나 강남까지 손에 넣은 이민족 왕조는 몽골이 유일했다). 그래서 청은 강남에 대해 간접 지배의 형식을 취하기로 했다. 마침 청이 중원을 지배하게 된 데는 투항한 한인들의 공이 컸으니 이들을 이용하면 된다. 청은 오삼계를 비롯해 한인 공신 세 명에게 각각 번국(藩國)을 할당해 그 세 개의 번국으로 강남을 통제했다.
한동안 번국들은 거의 독립국이나 다름없이 행세했다. 각자 군사권을 지니고 있었던 데다 청 제국으로부터 막대한 재정 지원까지 받았으니 당연히 세력이 나날이 확대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강남의 윈난 지역을 차지한 오삼계는 마음대로 영향권을 확대하고 독자적인 재정을 꾸리기 시작했다. 심지어 청의 동의를 구하지도 않고 관료들을 임의로 임명하는 등 은근히 청의 지배와 간섭에서 벗어나려 했다. 청의 입장에서도 이제 번국은 중국 통일만이 아니라 중원 지배에도 화근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상황이 고착되면 강북에는 금, 강남에는 남송이 지배했던 12세기처럼 될지도 모른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즉위한 황제가 바로 강희제(康熙帝)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성조(聖祖, 1654~1722)다. 강희제는 중국 역사상 최장 기간인 61년 동안 재위하면서 청 제국을 안정시키고 강대국으로 끌어올린 뛰어난 군주였다.
화북의 지배에만 만족한다면 제국 자체도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강남을 평정하지 않으면 중국 지배가 불가능하고, 3번(三審)을 그대로 두고서는 강남을 평정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3번을 철폐하기로 결심했다. 청의 강경한 태도에 번들은 오삼계를 중심으로 힘을 합쳐 반기를 들었다. 이들은 각지에서 한인 무장들의 지원을 받아 한때 양쯔 강 너머 화중(華中)까지 세력을 떨쳤다. 청으로서는 대륙 통일을 위한 마지막 시험을 치르는 셈이다.
이 ‘통일 입시’에서 강희제는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다. 뜻하지 않은 반란군의 기세에 부딪히자 청은 처음에 전선을 고착시킨 채 대치했다. 하지만 무릇 반란이라면 단기전에 끝내야만 승산이 있지 장기화되면 견디지 못하는 법이다. 몇 년간 대치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번들 간의 연락이 두절 되면서 반란군 세력은 분산되었다. 이를 틈타 먼저 상대적으로 약한 두 개의 번을 복속시키자 나머지 오삼계의 번도 세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었다. 그리하여 1681년 강희제는 마침내 반란을 종식시키고 전 중국을 손에 넣었다. 2년 뒤에는 청이 입관할 무렵에 대만으로 도망쳐 명맥을 유지한 명의 잔존 세력마저 제압함으로써 확고부동한 중국 대륙의 새 주인이 되었다.
▲ 곰과 되놈 왼쪽이 재주를 부린 ‘곰’ 오삼계이고, 오른쪽은 돈을 거둔 ‘되놈’ 강희제다. 강희제는 한인 오삼계를 앞잡이로 이용해 중국 내의 반청 세력들을 하나씩 제거하고 청을 완전한 통일 제국으로 만들었다. 오삼계는 사냥이 끝난 뒤의 사냥개처럼 축출을 당했다.
기왕 정복 전쟁을 시작한 판에 강희제는 국방을 두루 손보기로 결심했다. 이 과정에서 청은 유럽의 러시아와 처음으로 접촉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에서는 강희제에 못지않은 걸출한 황제인 표트르 대제가 유럽의 후진국 러시아를 일약 강대국으로 끌어올리는 중이었다. 17세기 말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팽창정책은 유럽이 주요 무대였지만, 부동항(不東港)을 찾아 동진을 계속하면서 표트르는 시베리아 경략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예전의 중국 왕조, 예컨대 명 제국이었다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중국 북쪽에는 몽골이 있었고 만주에는 여진이 있었으므로 이들 북방 민족과 러시아가 접촉했을 테니까. 그러나 만주가 고향인 청이 중국을 지배함으로써 이제 중국의 강역은 만주까지 포함하고 있다. 동진을 계속해온 러시아군과 만주의 청군은 헤이룽 강(黑龍江, 러시아 측 명칭은 아무르 강)에서 맞닥뜨리게 되었다.
만약 그때 유럽과 아시아의 두 신흥 강국이 맞붙었다면 승부는 어찌 되었을까? 하지만 현명한 강희제는 자칫 위기가 될 수 있는 사건을 슬기롭게 넘어갔다. 1689년 그는 표트르에게 친서를 보내 헤이룽 강을 양측의 국경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북방에 모든 힘을 기울일 수 없는 청의 입장에서나, 유럽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러시아의 입장에서나 불만일 수 없는 조건이다. 이리하여 역사상 최초로 동양과 서양은 네르친스크 조약이라는 정식 국제 관계를 맺었다. 이 조약으로 표트르는 동방 진출을 단념하고 유럽 무대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최북단의 문제를 해결한 뒤 강희제는 이제 마음 놓고 변방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서북쪽으로 가서 오이라트의 후예인 중가르족을 평정하고, 그 남쪽의 투르키스탄 동부까지 복속시켰다. 여기까지만 보면 강희제는 명의 영락제(永樂帝)와 동급의 정복 군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도 문무에 모두 능한 팔방미인 강희제는 자신의 위엄을 떨치는 데 급급했던 영락제보다 여러모로 한 수 위였다. 이 점은 그의 대내 정치에서도 확인된다.
▲ 장신의 러시아 차르 1689년 형과 함께 러시아를 다스리던 열일곱 살의 청년 차르인 표트르 대제는 강희제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고 청과 러시아의 국경을 확정했다. 그는 키가 2미터가 넘는 거인이었을 뿐 아니라 조국 러시아를 유럽의 후진국에서 강대국으로 끌어올린 거목이기도 했다.
우선 그는 그동안 정복 사업에 가려 미루어져온 통치 제도를 손보았다. 입관 이전 후금 시대의 통치 제도는 일종의 부족 연맹체인 사왕회의제(四王會議制)였다가 태종 시절에 중앙집권화가 추진되면서 의정왕대신회의(議政王大臣會議)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것은 최고 결정 기구일 뿐이므로 실무를 위한 중앙 기구가 필요했다. 그래서 강희제는 중국식 내각을 도입하고 영락제(永樂帝)를 본받아 내각대학사를 두었다.
또한 강희제는 유학의 지식인들을 존중하고 학문을 장려했다(다만 명대에 발달한 양명학보다는 그 전대의 주자학을 더 중시했는데, 아무리 포용력이 넓다 해도 적국의 학문을 지지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명의 역사서인 『명사(明史)』, 한자들을 총정리한 『강희자전(康熙字典)』, 특히 중국식 백과사전인 1만 권의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등이 모두 그의 명으로 편찬된 문헌들이었다【원래 중국에서는 새로 들어선 왕조가 그 전대 왕조의 역사를 편찬하는 게 전통이었다. 우리 역사에서도 왕명에 따라 고려의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조선의 정도전이 『고려사』를 썼다】.
강희제의 치세에 청은 비로소 완전한 통일 제국의 기틀을 마련하고 번영을 구가했다. 희망에 찬 새 시대를 맞아 그는 1711년에 즉위 50주년을 기념하면서 획기적인 조치를 발표했다. 그 이듬해인 1712년부터 출생하는 백성들에게는 인두세를 부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그때부터 새로 증가하는 인구를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 번영의 시대에 증가한 인구)’이라 불렀는데, 자신이 지배하는 시대를 스스로 ‘성세’라 말할 정도로 자신의 치적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최초의 만주족 왕조라고 해서 예전의 이민족 왕조와 특별히 다르지는 않았다. 청의 기본 노선은 중국식 통치 제도를 도입하고, 유학을 장려하고, 과거제(科擧制)를 실시하는 등 한족의 선진적인 제도와 문화를 바탕으로 제국을 다스리는 것이었다. 사실 초기에 청의 중국 지배는 언제 다시 3번의 반란과 같은 사건이 일어날지 모를 만큼 토대가 불안정한 상황이었다(실제로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구호는 청대 전체에 걸쳐 지속적으로 터져 나온다). 특히 중화사상(中華思想)에 물든 한족의 지식인들은 힘에 눌려 제압당했을 뿐 ‘오랑캐’의 지배를 여전히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원래 정복은 무력으로 해도 지배는 문화로 하는 법이다. 강희제의 한화 정책은 한편으로 중국의 선진 문화를 흡수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족의 반발을 회유하고 무마하려는 의도도 컸다. 그러나 노회한 강희제는 강압책도 병용했다. 만주식 변발을 전 국민에게 강요하고, 청의 중국 지배에 반발하는 내용의 책을 금서로 묶었다. 그는 자신의 지배에 자신감을 가지게 된 뒤에도 소수의 이민족이 다수의 한족을 지배한다는 긴장감을 결코 내려놓지 않았다.
▲ 성세를 찬양하는 그림 강희제는 자신의 즉위 50주년을 기념해 1711년에 ‘성세자생’ 조처를 내렸다. 이 그림은 건륭제 때 그려진 「성세자생도(盛世滋生圖)」의 일부다. 그림에서 보듯이 번영의 시대인 것은 틀림없었으나, 강희제의 의도는 태평성대를 기념한다는 것 이외에 인두세를 단순화하고자 하는 취지가 있었다.
아이디어맨 옹정제
실로 오랜만에 중원을 정복한 이민족 왕조였으므로 강희제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체제를 안정시키기 위해 민심을 얻으려 했다. 하지만 중심이 약해지면 언제든 다수가 들고일어날 것이다. 지배하는 소수는 관용만이 아니라 강력한 힘을 보여주어야 한다. 이것이 그다음 황제인 옹정제(雍正帝, 1678~1735)의 과제였다.
지배 체제를 공고화하려면 무엇보다 강력한 중앙집권이 필요하다. 우선 그는 의정왕대신회의(議政王大臣會議)와 내각으로 이원화되어 있는 통치 체제를 단일화하기로 결정하고, 군기처(軍機處)를 설치해 두 기관의 기능을 한데 통합했다. 군기처는 만주족과 한족의 군기대신으로 구성된 최고 의사 결정 기구였으나 황제 직속이었으므로 황제의 비서실과 같은 기능을 했다. 지금으로 치면 대통령이 국무위원 전체를 비서로 거느린 격이다.
중앙집권이 이루어졌으면 그다음 과제는 권력을 행사하는 메커니즘, 즉 관료제를 정비하는 것이다. 옹정제는 강력한 황권을 이용해 관료들에 대한 통제와 감시를 강화했다. 민생이 안정되려면 우선 관료들의 부패가 없어야 하며, 부패가 없으려면 관료들이 급료로 충분히 먹고살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고안한 방법이 양렴은제(養廉銀制)다.
명대 중기부터 은납제(銀納制)가 시행되었으나 조세는 여전히 현물이 위주였다. 각 지역은 농민들이 조세로 납부한 곡물을 집수해 중앙으로 보냈다. 그런데 곡물을 중앙으로 수송하는 과정에는 아무래도 손실분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지방관은 미리 손실분을 감안해 재량껏 농민들에게서 세량을 더 받았는데, 이런 관행에 문제가 없을 수 없다. 점차 그 몫은 관리들이 챙기게 되었고 걸핏하면 부패의 온상이 되곤 했다.
양렴은제는 이런 현상을 방지하기 위해 아예 관리들의 급료를 그만큼 올려주는 제도였다. 말하자면 음성적인 수입을 양성화하려는 의도로 일종의 수당을 지급한 셈이다. 이것을 양렴은(養廉銀), 즉 ‘청렴을 배양하는 돈’이라 불렀으니, 아무리 철면피 탐관오리라고 해도 양렴은을 받으면서 따로 삥땅을 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옹정제는 지방의 사정을 자세히 파악하기 위해 지방의 고위 관료들과 자주 서신을 주고받았다. 지방관이 황제에게 올리는 보고서를 친전서(親殿書)라고 불렀는데, 옹정제는 이 친전서에 붉은 글씨로 직접 주석을 달아 답신을 보냈다. 정성도 정성이려니와 황제의 친필이 담긴 서신을 지방관이 무시하기란 쉽지 않았다.
▲ 짧고 굵은 치세 아버지 강희제가 워낙 오랫동안 장기 집권한 탓에 옹정제는 넷째 아들이면서도 마흔넷의 늦은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불과 13년 동안의 재위 기간에 치밀하고 정교한 정책을 구사해 굵직하면서도 탁월한 치적을 남겼다.
그렇듯 모든 정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 옹정제의 태도는 황태자밀건법(皇太子密建法)에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강희제가 오랜 기간을 통치한 탓에 그 아들들은 수도 많았고 장성해 나름의 세력을 구축하기도 했다. 따라서 오랜만에 이루어지는 제위 계승이 복잡하지 않을 수 없다. 강희제의 넷째 아들인 옹정제 자신도 치열한 암투 끝에 즉위한 터였다. 그는 가뜩이나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는 판에 제위 계승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하면 제국의 안정이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전혀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제위 계승 제도를 만든다.
전통적인 방식은 황제가 재위할 때 태자를 책봉하는 것이었다. 그 장점은 명확하다. 후계자가 미리 확정되면 중앙 권력을 안정시킬 수 있고, 태자에게 장차 군주가 되기 위한 교육을 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보통 열 살 전후의 어린 맏아들을 태자로 책봉하는데, 그 아들이 장차 현명한 군주감이 될지를 보장할 수 없다. 송 제국이나 명 제국은 초반에는 잘 나가다가 중대 이후 어리석은 황제들이 제위에 오르며 중앙 권력이 무너졌다. 권력 안정을 위한 태자 책봉이 오히려 권력 불안을 가져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태자밀건법은 획기적이었다. 무조건 맏아들을 태자로 책봉하지 않고 황제가 평소에 아들들 가운데 후계자감을 점찍어둔다. 그리고 예전처럼 태자를 미리 공표하는 게 아니라 그 이름을 써서 상자에 밀봉해두었다가 황제가 죽을 무렵에 공표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제위 계승자를 유언으로 정하는 방식인데, 강력한 전제군주가 남긴 유언을 어길 자는 없다. 어느 나라에나 있었던 ‘왕자의 난’이라는 홍역을 청이 겪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옹정제가 만든 태자밀건법의 덕분이었다.
옹정제의 세심함은 제도만이 아니라 사상의 측면에도 고루 미쳤다. 아버지 강희제가 한화 정책으로 정권 안정에 기여했다면, 옹정제는 한족 지식인층에게 내재해 있는 반청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애썼다. 그 방법으로는 강압과 논리가 병용되었다. 우선 그는 『대의각미록(大義覺迷錄)』이라는 책을 직접 저술해 청의 중국 지배를 이론적으로 정당화하고자 했다. 이렇게 이론적 논거를 확립하고 나서는, 여기에 어긋나는 사상에 관해서는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심한 탄압을 가했다. 강희제 시절에도 문자옥(文字獄, 일종의 필화 사건)이라고 부르는 지식인 탄압 사건이 있었지만, 옹정제 시절에는 문자옥이 여러 차례 연이어 발생했다.
▲ 황제를 결정하는 문서 옹정제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유례가 없는 태자밀건법이라는 독창적인 제위 계승 제도를 마련했다. 전 황제가 죽기 전에 황태자를 미리 정하고 밀봉해놓았다가 유언으로 발표하는 방식인데, 진작 도입되었더라면 중국 역대 제국들을 괴롭힌 제위 계승이 한결 안정적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옹정제의 치세에는 세제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발전이 이루어졌다. 그 이전까지 청의 세제는 명대에 만들어진 일조편법(一條鞭法)이었다. 그러나 명대에도 중기 이후부터는 실효를 거두지 못했던 일조편법이 청대에 제대로 기능할 리 없었다. 항상 골치 아픈 문제는 사람에게 매기는 세금, 즉 정은(丁銀)이었다. 토지가 없는 가난한 농민들은 인두세를 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요역 위주라면 몸으로라도 때우겠는데 은납제(銀納制)에서는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더구나 지주나 관료, 부호 상인 들은 갖가지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이 부담해야 할 정은마저 요리조리 탈세했다. 이러한 정은의 손실분은 가난한 백성들에게 전가되었으므로 백성들은 이중삼중의 고통을 겪었다.
그동안 그런 모순을 알고도 고치지 못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정은은 인구를 대상으로 하므로 제대로 부과하려면 자세한 인구 조사가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차례 인구조사를 해보았으나 워낙 넓은 지역에 워낙 많은 인구인 탓에 정확한 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 문제를 해결해준 게 바로 1711년 강희제의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에 관한 조치였다. 이 조치는 1711년 이후의 인구에 대해서는 정은을 부과하지 않는 것이므로 사실상 전국의 총 정은액을 고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정은이 상수화되면 변수는 토지 하나뿐이다. 그래서 옹정제는 아예 정은을 토지에 대한 세금인 지은(地銀)에 통합시켜버렸다. 그래서 새 세제의 명칭은 지정은제(地丁銀制)였다.
지정은제가 도입된 덕분에 가난한 농민들은 부당하게 부과되는 정은으로 인한 고통을 한층 덜게 되었다. 그러나 지정은제(地丁銀制)는 단기적인 성과 이외에 역사적인 의미도 가진다. 중국 역사상 세법의 개정은 무수히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토지와 사람을 세금의 부과 대상으로 삼는다는 정신은 늘 변하지 않았다(그런 의미에서 모든 세제는 당대의 조용조(租庸調)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지정은제로 인해 ‘땅’과 ‘사람’이 통합됨으로써 근대적인 단일 항목의 세제가 출현하게 된 것이다.
300년에 걸친 청 제국의 중국 지배 기간 중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말까지 약 130년간을 청의 전성기라고 말한다. 이 기간 동안 강희제와 건륭제(乾隆帝, 1711~1799)의 치하가 무려 120년에 이르기 때문에 이 시대를 강희ㆍ건륭 시대라고도 부른다. 그러나 그사이에 불과 13년간 재위한 옹정제는 짧은 기간에 청을 중국식 통일 제국으로 탈바꿈한 굵직한 치적을 남겼다.
▲ 서양인이 그린 황제 말을 탄 건륭제의 당당한 모습이다. 그림에서 서양식 분위기가 보이는데, 그 이유는 화가가 예수회 선교사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이기 때문이다. 그는 랑세녕(郞世寧)이라는 중국식 이름으로 개명하고 중국에서 선교와 더불어 그림을 그렸다.
현대의 중국 영토가 형성되다
옹정제가 만든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의 첫 수혜자는 건륭제 고종(高宗)이다. 건륭제 역시 아버지 옹정제처럼 맏이가 아닌 다섯째 아들로서 제위에 올랐으며, 아버지와 할아버지처럼 문무를 겸비하고 제국의 전성기를 이끈 걸출한 군주였다.
건륭제는 강희제의 『고금도서집성』과 더불어 청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편찬 사업으로 꼽히는 『사고전서(四庫全書)』를 11년에 걸쳐 완성했다. 『사고전서(四庫全書)』는 당대의 문헌들을 유학ㆍ역사ㆍ사상ㆍ문학의 네 가지[四庫]로 분류해 총정리한 대규모 출판 사업이었다. 『고금도서집성』과 마찬가지로 『사고전서(四庫全書)』 역시 일종의 백과사전이었으나, 학문적인 목적 이외에 정치적인 의도를 상당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우선 편찬 과정에서 만주 시대의 야만성과 후진성이 드러나는 부분은 임의로 수정했고, 중국 역사서들 중 요(遼)ㆍ금(金)ㆍ원(元) 등 북방 민족의 제국들에 관한 부분도 수정을 거쳤다(역사가 정치 이념에 의해 왜곡된 사례다). 또 각 지방 관청에 보관된 문헌들 중 반만적(反滿的) 요소를 담은 것들은 전부 압수했다.
『사고전서(四庫全書)』의 편찬을 기점으로 건륭제는 광범위한 금서 정책을 단행했다. 이미 청의 중국 지배가 100년이 넘어 확고한 뿌리를 내린 상태에서 건륭제의 사상 교화는 더 이상 한족 지식인층이 다른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종지부를 찍는 셈이 되었다.
▲ 동양의 계몽주의 시대 중국식 백과사전이라 할 『고금도서집성』(왼쪽)과 『사고전서』(오른쪽). 중국의 학문을 발달시킨 것은 주로 한인들이었으나 그 성과를 총정리한 것은 만주족의 청 제국이었다. 당시는 세계적인 계몽주의 시대였던 걸까? 『사고전서』가 간행된 시기와 거의 같은 때에 마침 프랑스에서도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노력으로 『백과전서』가 빛을 보게 되었다.
내치에서는 탁월한 업적을 남겼으나 대외적인 측면에서는 다소 소극적이었던 (혹은 그럴 여유가 없었던) 옹정제와 달리 건륭제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재개했다. 중국의 서북방을 계속 위협하던 중 가르를 두 차례에 걸친 원정으로 평정하고, 비단길 인근을 장악하고 있던 이슬람 세력도 완전히 축출했다. 그런가 하면 다시 기수를 남쪽으로 돌려 미얀마와 월남을 복속시켰으며, 나아가 히말라야까지 원정을 보냈다. 그 가운데 미얀마와 월남은 직접 지배하지 않았으나 중가르와 이슬람 세력이 있던 곳, 그리고 히말라야 근방은 이때부터 청의 영토가 되었다. 지금의 신장(新疆)과 시짱(西藏)이 바로 그곳이다. 당시에 새로 얻은 강역이라는 뜻으로 붙인 ‘신장’이라는 이름은 오늘날에도 이 지역의 지명으로 사용되고 있다.
건륭제 시대에 비로소 중국의 영토는 오늘날과 같은 면적과 모양을 이루게 되었다. 명대까지만 해도 중원과 강남 정도였던 중국의 영토는 만주족이 입관해 중국을 지배함으로써 만주까지 확대되었고, 강희제의 정복 사업으로 북만주 일대까지 이르렀으며, 건륭제 치세에 신장과 시짱이 포함되면서 3분의 1이 더 늘어나 유럽 대륙 전체를 능가하는 광대한 면적이 되었다. 영토의 면에서 청은 어느 한족 왕조보다 큰 최대의 강역을 자랑했다. 중국의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한족은 소수 만주족의 지배에서 오히려 이득을 본 셈이다.
▲ 오늘날의 중국 영토 건륭제는 한동안 중단되었던 대외 정복 사업을 다시금 활발히 전개했다. 오늘날의 중국 영토는 건륭제 때 이르러 확립된 것이다. 그림은 1759년 회부의 곽집점이 신장 남쪽 지역을 차지하자 건륭제의 군대가 파미르 고원을 차지하고 있던 곽집점을 진압하는 장면이다.
장수의 비결
청 제국 이전에 북방 민족들이 세운 국가는 대개 정복에는 능했어도 통치에는 서툴렀다. 남북조시대에 화북을 지배한 북조 나라들이나 10세기 거란의 요, 12세기 여진의 금, 13세기 몽골의 원 등은 모두 군사력에서는 뛰어났으나 지배 기술이나 문화에서는 전통의 한족 왕조에 미치지 못했다. 게다가 중국에 북방 민족의 제국이 들어설 때에는 언제나 지배 민족이 소수였고 피지배 민족이 다수였다. 그래서 소수의 북방 민족은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 주로 차별과 억압의 수단을 사용했다.
그러나 힘만 세다고 해서 뒤진 문화가 앞선 문화를 오래도록 지배할 수는 없다. 더구나 힘이란 언제까지나 강할 수만은 없는 법이다. 차별과 억압을 통한 지배는 지배하는 측의 힘이 약해지면 금세 밑천이 드러나고 만다. 북방 민족의 제국들이 중국을 지배한 기간이 한족 제국들에 비해 훨씬 짧았던 이유는 거기에 있었다.
그에 비해 청은 무려 300년 동안 중국을 지배했으니 여느 한족의 통일 제국에 못지않게 장수한 셈이다. 게다가 당시 중국의 인구는 1억 명가량이었는데 반해 만주족은 60~100만 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소수의 지배층이 압도적 다수의 피지배층을 오랜 기간 동안 지배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우선 강희제가 출범시킨 적극적 한화 정책의 덕분이 크다. 앞서 보았듯이, 강희제는 한족 문화를 활발하게 수용했을 뿐 아니라 제도적인 면에서도 한족에게 차별을 두지 않았다. 예전의 몽골은 소수 지배층인 몽골인과 색목인을 특별히 우대하고 국가 기구의 주요 부서장으로는 반드시 몽골인을 임명하는 등 철저한 차별 정책으로 일관했지만, 강희제는 정복 국가의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오히려 한인들을 중용했다. 또 승진에 제한을 두었던 원대와 달리 청대에는 한족 관료도 얼마든지 고위직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정부의 주요 부서에서 일하는 관리들은 가급적 만주족과 한족의 동수로 구성했다. 예를 들어 내각에서 일하는 내각대학사의 수는 만주족 2명, 한족 2명이었다. 6부의 책임자들도 만주족과 한족이 비슷한 비율로 섞였다. 물론 그렇게 한 의도는 민족 간의 차별을 두지 않고 형평을 맞추려는 데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인 관료들에 대한 감시와 견제를 늦추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이와 같은 강희제의 한화 정책은 시기에 따라 강도와 비중이 달라졌어도 청대 내내 이어졌다(원대에도 한화 정책을 추진한 쿠빌라이의 치세에 번영을 누리지 않았던가?).
그러면서도 청은 만주족 고유의 특성을 잃지 않았다. 입관 후에까지도 의정왕대신회의와 같은 만주 시대의 제도를 유지했으며, 공식적으로는 한문을 사용하면서도 누르하치 시절에 만든 여진 문자도 계속 사용했다. 특히 정복 국가에서 매우 중요한 군사 제도는 만주족 전통의 팔기제(八旗制)를 주축으로 삼았다. 또한 전국에 변발의 풍습을 강요한다든가, 만주 지역에 봉금책을 적용한다든가, 문자옥이 여러 차례 발생한 데서 보듯이 한족에게 회유와 더불어 탄압책도 적절히 섞었다. 한마디로, 고도로 능란한 통치 기술을 구사한 것이다.
▲ 화려한 군복 청 제국의 군사 제도인 팔기군의 복장이다. 정황ㆍ양황ㆍ정백의 3기는 황제의 직할대이고, 양백ㆍ정홍ㆍ양홍ㆍ정남ㆍ양남의 5기는 제후들이 관할하는 군대였다. 각 기마다 무기와 급료도 달랐으니 이 복장은 곧 계급장인 셈이다.
한족과의 관계를 잘 정립한 게 장수의 첫째 비결이라면 둘째 비결은 영토와 관련이 있다. 실은 북방 민족이 중원을 지배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여느 한족 왕조에 비해 유리한 조건이었다. 이유는 명확하다. 바로 지배자가 북방 출신이므로 북방의 수비를 염려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한 당ㆍ송ㆍ명 등 중국 역대 한족 왕조들의 국력이 약화된 것은 늘 만주와 서북변의 북방 민족들에게 시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주 출신의 청이 중원을 차지했으니 만주 쪽의 국방은 자동으로 안정적이었다(그 이북은 러시아와의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정리되었다). 또한 강희제와 건륭제의 정복 사업으로 서북변까지 평정됨으로써 청은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이민족의 공격을 걱정할 필요가 없어졌다.
장수의 셋째 비결은 대내적인 요인, 즉 태자밀건법(太子密建法)이다. 이 제도로 거의 모든 신생국에서 나타나는 왕자의 난이 방지되었다. 사실 옹정제까지는 제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약간 있었지만 태자밀건법 덕분에 다음 황제인 건륭제가 즉위할 때는 그런 조짐이 전혀 없었다【엄밀히 말하면 태자밀건법이 실효를 거두었다고 볼 수는 없다. 다섯째인 건륭제가 태자로 공표될 때는 이미 네 형이 다 죽은 뒤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옹정제는 자신이 즉위할 때부터 건륭제를 후계자로 점찍고 특별 교육을 시켰다. 그 덕분에 건륭제는 ‘준비된 지배자’로서 제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강희와 건륭이 워낙 오래 재위한 탓에 태자밀건법이 실제로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청은 역사 상 가장 매끄러운 권력 승계를 선보였을 것이다】. 비록 건륭제가 워낙 오래 재위한 탓에 실제 효력은 건륭제로 끝났으나 동서양의 어느 역사에서는 왕위 계승이 항상 문제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그 의미는 컸다.
더구나 태자밀건법은 자질이 우수한 황제를 제도적으로 배출할 수 있게 해주는 의미도 있었다. 예전처럼 어릴 때 태자가 책봉된다면 나중에 자라서 어떤 황제가 될지 예측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태자밀건법을 취하면, 비록 황제의 아들들만을 후보로 한다는 제한적 선택이라 해도 오랜 기간에 걸쳐 인물됨을 보고 나서 군주감을 고를 수 있으므로 매우 합리적인 제위 계승이 이루어질 수 있다. 중대 이후 무능한 군주들이 연이었던 명 제국을 연상해본다면, 그런 제도가 없을 경우 청도 역시 강희제와 옹정제의 안정기를 거치고 나서는 무능한 군주가 즉위할 확률이 높지 않았을까?
▲ 명ㆍ청의 강역 건륭제의 시대에 이르러 중국의 영토는 오늘날과 거의 비슷해졌다. 지도에서 보듯이, 청 제국의 강역은 명 제국의 강역에 비해 거의 두 배이며, 스칸디나비아까지 합친 유럽 대륙 전체보다도 크다. 물론 강희제와 건륭제의 정복 사업도 활발했으나 그보다 만주 출신의 민족이 세운 청 제국이기에 가능했다.
안정 속의 쇠락
예전까지 중국의 역대 통일 제국들은 대부분 전성기가 건국 초기 수십 년에 불과했고, 100년을 넘겨 번영한 나라는 당 제국이 유일했다. 그에 비해 청은 사직도 여느 왕조에 못지않았고 번영을 누린 시기도 당보다 좀 더 길었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어느새 근대의 문턱에 들어왔다. 중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것은 이제 중국 자체보다 동북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의 정세였다.
일단 대내적으로 청은 번영을 누릴 만한 모든 요건을 갖추었다. 강희제의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 조치 덕분에 인구가 급속히 증가했다. 1712년부터 백성들은 아무리 아이를 많이 낳아도 인두세를 추가로 물지 않았다. 장기간의 번영으로 가뜩이나 불어나는 추세에 있던 중국의 인구는 그것을 계기로 봇물 터진 듯 늘어났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1700년에 2000만 명이던 인구는 50년 뒤에는 1억 8000만 명(여기에는 정복지의 인구도 포함되었다)으로 늘었고, 1800년에는 3억 명, 1850년에는 4억 명을 상회했다. 이 무렵에는 인구 증가가 제국의 근간을 위협하는 요소로 대두되었다.
그 많은 인구가 먹고살 수 있었던 것은 농업과 산업 생산량이 크게 증대한 덕분이었다. 청대의 농업은 뚜렷한 생산 기술상의 진보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노동 집약적 농경으로 단위면적당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농업에는 인구 증가가 약이 된 반면 수공업에는 독이 되었다. 명대에 이어 청대의 수공업도 크게 발달했고, 부유한 상인이나 고리대금업자들 중에서는 일부 근대적 자본가라 할 만한 계층도 생겨났다. 그러나 더 이상의 근대화는 없었다. 그 이유는 인구가 증가한 덕분에 어디서나 쉽게 값싼 노동력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영국에서는 노동력이 귀해 여성과 어린이의 노동력까지 착취했고 노동시간의 감축을 법으로 금지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환경에서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해 각종 산업 기계가 연이어 발명되어 자본주의가 만개할 수 있었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면, 청에서는 발명을 낳아줄 어머니가 없었다】.
그러나 인구 증가가 농업 생산력에 도움이 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인구가 지나치게 늘어나자 중국은 맬서스의 인구 법칙이 정확히 들어맞는 사례가 되어버린다. 식랑은 더하기로 증대하는 데 비해 인구는 곱하기로 증가하는 것이다. 빈민이 늘어나고 각지에서 탐관오리들이 판을 쳤다. 게다가 건륭제 말기에 정치와 행정이 다소 느슨해지면서 무력의 근간을 이루던 팔기제가 약화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수백 년 전 이민족 왕조인 원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일조했던 한족 전통의 비밀결사인 백련교(白蓮敎) 세력도 활동을 재개했다.
여느 왕조에 비해 늦게 찾아오긴 했으나 드디어 청에도 말기적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대로 놓아두었다면 청은 결국 자멸하고 다른 왕조(한족 왕조)로 교체되었을까? 아니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새삼 각오를 다지고 중흥을 꿈꾸었을까? 시대가 평온했다면 둘 중 하나의 방향이었을 게다.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서세동점(西勢東漸, 서양사의 용어로는 제국주의)의 물결이 중국을 향해 휘몰아쳐오는 시대였다. 그리고 이 물결은 여느 시대처럼 단순한 왕조 교체 이상의 근본적인 변화를 중국, 아니 동양 전체에 요구하고 있었다.
4. 중국으로 몰려오는 하이에나들
전쟁 아닌 전쟁
꾸준한 한화 정책은 청을 여느 한족 제국과 별로 다를 바 없이 만들었다. 한족의 선진 문화를 본받은 것까지는 좋지만 문제는 나쁜 점도 닮는다는 데 있었다. 그중 하나가 전성기 직후 곧바로 쇠락기가 시작되는 역대 한족 왕조의 운명이다.
너무 오래 통치한 탓일까? 중국 역사상 최대 영토를 일군 건륭제는 기나긴 재위에 싫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황제가 국정에 대한 관심을 놓으면 부패가 잇따르게 마련이다. 북방 민족의 제국들은 한족 제국과 달리 환관 정치에 휘말리지 않았는데, 청도 그 점은 마찬가지였다. 다만 등잔 밑이 어두웠을 뿐이다. 우선 건륭제가 신임하고 국정을 맡긴 신하가 부정을 저질렀다. 이래저래 짜증이 난 건륭제는 1795년에 아들에게 제위를 넘겨버렸다. 그의 나이 이미 여든네 살이었으므로 이해할 수 없는 양위는 아니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황제가 누구냐가 아니라 전 사회의 기강이 해이해졌다는 점이다. 관리들은 각지에서 탐학을 일삼았고, 백성들은 탐관오리의 등쌀에 토지를 잃고 유랑민이 되기 일쑤였다. 정치가 실종되자 제국이 자랑하던 전통의 팔기군(八旗軍)도 무력해졌다. 오로지 군인 본연의 임무에만 충실하라는 뜻에서 녹봉에다 경비로 기지(旗地)라는 토지까지 받는 특혜를 누린 팔기군은 오랜 평화와 번영기를 거치며 군대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타락했다. 할 일이 사라진 군인들은 쉽게 사치와 방탕에 빠져들었다. 더구나 한인들이 만만하게 여기고 사기의 농간을 부리는 바람에 팔기군 병사들은 점차 생활이 궁핍해졌고 심지어 기지까지 팔아먹는 자도 있었다.
관리가 부패하고 백성이 곤궁해지고 사회가 어지러워지면 반란은 필연이다. 18세기 말부터 중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팔기군의 입장에서는 이제야 비로소 군인으로서 업무가 생긴 셈이었지만, 광에 처박아든 칼은 녹슬 대로 녹슬어 호미보다도 못했다. 강남의 구이저우와 윈난에서 일어난 묘족의 반란은 12년이나 걸려 겨우 진압되었고, 백련교도(白蓮敎徒)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도 9년이나 걸렸다.
여기까지는 어느 왕조에서든 쇠락기에 나타나는 평범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쯤에서 쿠데타가 성공해 제국을 멸망시키고 새 왕조를 세우는 거 정상적인 흐름이다. 그런데 당시는 단순한 혼란기가 아니었고 예전의 어느 시기와도 달랐다. 바야흐로 수천 년 동안 독자적으로 발달해온 동양과 서양의 두 문명이 합하려는 시점이었다. 수십 년만 지나면 멸망할 것 같던 청의 수명을 그 뒤로도 100년 이상 연장해준 것은 오히려 동양으로 거세게 몰려온 유럽 열강이었다.
중국 역사로 치면 명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유럽 세계는 대항해와 탐험으로 ‘발견’의 문을 열었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 정신 무장을 새로이 다졌다. 그리고 청대에 들면 유럽은 그간의 성과를 산업혁명이라는 결실로 맺었다. 15세기에 대항해시대의 문을 연 포르투갈과 에스파냐만 해도 그리스도교를 전파하고 향료를 얻으려는 목적에서 동양으로 진출했으나 17세기부터 유럽의 패자로 떠오른 영국의 경우는 달랐다. 지난번에는 향료를 ‘수입’하기 위해 동양으로 왔지만, 이번에는 산업혁명으로 국내에 넘쳐나게 된 공산물을 수출하기 위해 시장을 찾아온 것이다.
수입과 수출의 차이는 크다. 수입을 꾀한다면 상인들 간의 무역으로도 충분하지만, 수출이라면 민간 부문의 힘만으로는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
자본주의 시대 이전에 서양은 동양에 식민지를 개척하더라도 그 사회에 깊숙이 파고들어갈 힘은 없었다. 단지 산발적으로 향료와 금, 은 등을 수입하거나 약탈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침탈지를 황폐하게 만들 수는 있어도 기존의 사회구조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대에 들어 서구 열강은 자국의 공업 제품을 팔고 자국 산업을 위한 원
료와 식량을 가져갔으므로 해외 식민지의 사회경제구조를 자본주의의 종속체로 만들어 버렸다. 따라서 서구 열강의 경제적 침략은 식민지를 일회적으로 약탈하는 게 아니라 장기적이고 영구적인 수탈을 구조화하는 강력한 위협이었다.
▲ 외국인 인형 17세기에 중국에서 제작된 서양인의 인형이다. 명대에 중국인이 보는 서양인은 거의 선교사들이었으나 청대에 이르면 이런 모습의 서양 상인들이 중국으로 많이 왔다. 청대 중기까지만 해도 유럽과의 무역이 정책격으로 장려되었지만, 사회가 안정되면서 대의를 향한 관심도 점차 수그러들었다.
하지만 최초로 동양에 자본주의적 침략을 개시한 영국은 ‘선두 주자의 벌금’을 톡톡히 물어야 했다. 원래 영국은 명대 말기인 17세기부터 중국 정부의 허가를 얻어 중국과의 무역을 시작했다. 조건은 몹시 나빴다. 중국은 광둥의 광저우 한 곳만 영국에 개방했고, 공행(公行)이라는 상인 조합 한 곳을 지정해 영국 무역을 전담하게 했다. 중국은 다분히 감합 무역의 방식을 거의 그대로 적용한 것이었다. 항구와 상인 조합을 한 곳만 개방한 것은 감합을 발부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역을 하려는 자세라기보다는 형식적인 교류에 불과했다(광저우의 영국 상인들에게 예의범절까지 요구한 것은 당시 중국이 대외 무역을 어떻게 여겼는지 잘 말해준다).
그래도 무역에서 이득을 보았다면 영국으로서는 불만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과의 무역 초기에 영국은 예기치 않게 수입 역조 현상을 겪었다. 영국은 인도의 동인도회사를 통해 영국산 모직물과 인도산 면화, 기타 보석이나 시계 등 잡화를 중국에 수출하고, 중국으로부터는 차와 비단, 도자기 등을 수입했다. 그런데 영국의 주력 상품인 모직물은 중국인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면직물을 주로 입는 중국인들은 모직물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서민들은 면직물을 쓰면 되고 귀족들이야 비단이 있잖은가? 게다가 광둥은 기후가 온화해 모직물은 어울리지 않았다.
당시 4억 명에 달하는 중국 인구에 큰 기대를 품은 영국은 기대만큼 크게 실망했다. 문제는 수출만이 아니었다. 예상치 않게 수입이 크게 늘었다. 주범은 차였다. 차의 수입량이 늘면서 무역 역조는 더욱 심각해졌다. 18세기 말이 되자 수출 대금으로 받는 은보다 수입 대금으로 주는 은이 더 많았다. 이러다가는 국내산 은은 물론이고 멀리 멕시코에서 캐낸 은조차 중국으로 흘러갈 판이었다.
▲ 아편으로 타개한 무역 역조 중국과의 무역에서 적자를 본 영국은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수출해 무역 적자를 타개하기로 했다. 왼쪽은 인도의 아편 창고이고, 오른쪽은 아편을 중국에 실어 날랐던 동인도회사의 무역선이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에는 ‘신사의 나라’라는 게 없다.
이때 동인도회사는 묘수를 생각해냈다. 수출품을 바꾸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잘 먹히는 것으로, 회사는 인도산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기로 했다. 아편은 마약이므로 약용 외에는 당연히 수입이 허가되지 않았으나 물불 가릴 것 없는 동인도회사는 밀무역을 통해 중국에 아편을 수출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아편은 무역 역조를 타개하는 주력 상품이 되었다.
현대 세계에서 마약 수출국이라면 국제적 왕따를 당해야 마땅하지만 제국주의 시대에 도덕, 그것도 국제적 도덕이란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영국으로서는 애써 팔아도 팔리지 않는 모직물과 달리 스스로 시장을 개척하는 신상품 아편이 고마울 따름이었다. 반면 중국에서는 단순한 경제문제가 아니라 중대한 사회문제였다. 아편 중독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1820년대에 들어 드디어 무역 역조가 해소되었다. 은의 흐름은 중국에서 영국으로 바뀌었다. 이제 비상이 걸린 것은 중국이었다【아편의 수입은 옹정제 시절부터 도덕과 미풍양속, 국민의 건강을 해친다는 이유를 들어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명대 중기 이후부터 급격히 늘어난 사무역, 곧 밀무역은 단속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이미 중국인들의 상당수가 아편에 중독되어 있었다. 청 정부는 아편이 백성들의 심신을 갉아먹을 때는 미지근하게 대처하다가 은의 흐름이 역전되자 적극적인 단속에 나선 것이다】. 대책을 논의하던 청 조정에서는 이금론(弛禁論)과 엄금론(嚴禁論)으로 의견이 엇갈렸다. 이금론은 밀무역 자체에 문제가 있으므로 일단 아편 수입을 공식화하고(약재니까!), 지불은 대신 중국산 상품으로 하며, 민간에게는 아편 사용을 용인하되 관리나 군인에게는 금지하자는 주장이었다. 그에 비해 엄금론은 말 그대로 아편 수입을 엄격히 금지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갑론을박 끝에 결국 엄금론이 채택되었다. 원칙적으로 보면 당연히 엄금론이어야겠지만 그 주장을 실천하려면 힘이 필요했다(어떤 의미에서는 이금론이 당시의 실정에 맞는 현실적인 조치였을지도 모른다).
물론 조정은 즉각 실행에 옮겼다. 1839년 조정에서 파견된 임칙서(林則徐)는 영국 상인들에게서 2만 상자의 아편을 압류해 군중 앞에서 모두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영국 상인들에게 마카오로 철수하라고 명했다. 이제는 전쟁이다! ‘신사의 나라’ 영국은 즉각 무력 도발로 대응했고, ‘양반의 나라’ 중국은 통상 중지와 선전포고로 대응했다. 신경질적인 유럽 챔피언과 점잖은 동양 챔피언, 여기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두 챔피언의 실력이었다.
영국 의회는 원정군의 파견을 놓고 논쟁을 벌이다가 표결에 부쳤다. 그 결과 불과 아홉 표 차이로 전쟁이 결정되었다. 의회의 자유주의 세력과 지식인들이 도덕적인 취지에서 전쟁을 반대하기도 했지만, 표 차이가 적었다는 것은 그만큼 중국이 얕볼 수 없는 강적이라는 뜻이다.
▲ 중국의 아편굴 아편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청 조정에서는 아편 흡음자가 늘어나는 것을 커다란 사회문제로 여기고 있었다. 더구나 더 골치 아픈 것은 중국의 상인과 관리까지 아편 밀수로 이득을 얻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영국이 아편 수출에 힘썼다 해도 중국이 부패하지 않았다면 효과를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1840년에 아편전쟁이 터졌다. 실은 전쟁이랄 것도 없었다. 인도에 주둔한 극동 함대를 주축으로 한 영국 원정군은 순식간에 황해를 남북으로 누비며 광둥에서 톈진까지 중국의 동해안 전체를 휩쓸었다. 해전만이 아니라 몇 차례 맞붙은 육전에서도 영국군은 연전연승했다. 중국과 영국은 금세 진실을 깨달았다. 영국을 비롯해 서구 열강이 잠자는 용처럼 은근히 두려워한 중국은 실상 이빨 빠진 공룡에 불과했다.
1842년 청의 항복으로 영국과 중국은 동서양 최초의 조약이자 세계 최초의 불평등조약인 난징 조약을 맺었다【청과 러시아가 맺은 네르친스크 조약은 국경을 확정하는 정도였고 역사적 의미는 크지 않았다. 그때까지 중국은 역사상 어느 나라와도 조약을 맺은 적이 없었다. 조약이란 대등한 두 나라가 맺는 것인데, 중국과 대등한 나라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주변국의 왕을 중국이 책봉했으니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에 비해 유럽은 16세기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국제 질서를 관장하는 역할을 잃은 이후 여러 차례 대규모 국제전을 벌이고 그 결과를 조약으로 수렴하는 관행이 자리잡고 있었다】. 조약의 내용은 황당할 정도였다. 청은 홍콩을 영국에 할양하고(홍콩은 이때부터 150년이 지난 1997년 7월 1일에야 중국에 반환되었다), 다섯 항구를 개항하며, 영국과 평등한 외교 관계를 수립하고, 영국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다. 전쟁의 원인인 아편 밀수 문제는 누락되었으며, 싸움을 건 것은 영국인데도 청이 2100만 달러의 막대한 배상금을 부담해야 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것은 관세 결정권을 영국이 가지기로 한 점이었다. 그러나 근대적인 조약과 관세의 개념이 없었던 당시 청 조정에서는 서양 오랑캐와 국제조약이라는 ‘평등한 관계’(사실은 불평등 관계였지만)를 수립해야 한다는 굴욕감에만 몸을 떨었다.
▲ 서양의 화력에 무너지는 중국 아편전쟁은 전쟁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영국의 막강한 해군력 앞에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번영과 태평성대를 누렸던 중국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림은 영국의 함포 사격으로 처참하게 침몰하는 중국 군함의 모습이다.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천국
난징 조약의 또 다른 문제점은 그것이 하나의 전범이 된다는 데 있었다. 이제 중국의 실력은 백일하에 드러났으며, 유럽의 제국주의 열강은 아무도 청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동양 질서의 핵이었던 중국이 그럴진대 다른 나라는 볼 것도 없었다. 1854년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미국이 일본을 개항하는 것은 난징조약의 후속 조치나 다름없었다(당시 서구인들은 한반도를 중국의 일부로 여겼으므로 조선에 대해서는 직접 통상 요구를 하지도 않았다).
곧이어 1844년에는 미국과 프랑스가 청과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아편전쟁으로 중국의 문을 연 주체는 영국이었고 난징 조약에는 엄연히 영국에 최혜국(最惠國) 대우【최혜국 대우란 이후 다른 나라와 조약을 맺을 때 그 나라에 부여하는 이익은 모두 자기 나라에도 부여한다는 조항이다. 즉 난징 조약에서 중국이 영국에 최혜국 대우를 약정했다면, 이후 중국이 다른 열강과 맺는 모든 조약을 영국이 사후 차용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날강도 같은 조항이고 오늘날에는 국제법에도 어긋난다(중국은 국제조약의 관념 자체가 없어 그 독소적인 내용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런 터무니없고 ‘비합리적인’ 조항은 사실 서구식 ‘합리주의’와 통한다. 조약을 맺을 당시에는 미처 생각지 못했던 내용이 나중에 다른 나라와 맺게 되는 조약에서 등장할지도 모르므로 있을 수 있는 모든 상황을 조약 안에 명기해두자는 것이다】를 한다는 조항이 있었으므로 중국에서의 우선권은 영국에 있었다. 과연 영국은 그 독소적 조항을 적시에 써먹었다.
난징 조약에 큰 기대를 걸었던 영국은 예상한 만큼 무역상의 성과를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영국은 난징 조약을 더욱 불평등한 조약으로 개정하려 했으나 난징 조약에는 개정에 관한 조항이 없었다. 그런데 청과 미국이 체결한 조약에는 12년 뒤에 내용을 개정할 수 있다는 규정이 있었다. 미국과 맺은 조약을 활용할 방법이 없을까? 이때 최혜국 대우의 조항이 말을 했다. 영국은 자신이 최우선의 혜택을 받도록 되어 있으므로 다른 조약의 내용까지도 가져다 쓸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난징 조약이 체결된 지 12년이 지난 1854년에 영국은 조약의 개정을 정식으로 요청했다. 하지만 그동안 난징 조약이 극히 불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된 청 조정이 그 억지를 곧이곧대로 들어줄 리 없었다. 결국 영국은 또다시 물리력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마음먹었다. 때마침 터키에서 터진 크림 전쟁(1853~1856)으로 중국 문제는 잠시 미루어졌지만, 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다시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 세계 최초의 불평등조약 1842년 영국 군함 콘월리스 함상에서 난징 조약이 체결되고 있다. 영국 측 대표인 포틴저는 초대 중국 대사 겸 홍콩 총독이 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50년 뒤에야 홍콩이 중국에 반환될 줄은 당시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이리하여 2차 아편전쟁이 벌어졌는데, 지난번에도 손쉽게 이겼지만 이번에는 크림 전쟁에서 동지로 싸운 프랑스와 손잡기까지 했으니 승패는 볼 것도 없었다. 1857년에 연합군은 광저우를 점령하고 이듬해에는 베이징의 관문인 톈진을 함락시켰다. 할 수 없이 청 조정은 다시 불평등조약인 톈진 조약을 맺게 되는데, 여기에 러시아가 중재를 자임하고 나섰다. 프랑스와 러시아까지 참여했으니 난징 조약 때보다 입이 두 개나 늘었다. 청 조정이 조약에 불만을 품고 비협조적으로 나오자 1860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은 재차 군대를 동원해 굴복시키고 베이징 조약을 맺었다. 톈진조약으로 베이징에 외교 사절을 주재시킬 수 있게 되었고 그리스도교 포교의 자유를 얻었던 서구 열강은 베이징 조약을 통해 더 많은 개항장과 전쟁 배상금까지 얻어냈다.
열강과 조약을 체결할 때마다 불평등이 심화되자 청 조정의 무능함은 이제 백성들도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려면 세금을 늘릴 수밖에 없었으므로 백성들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었다. 사회적 불만과 불안이 팽배한 가운데 중국 역사상 가장 장기간에 가장 대규모인 ‘반란’이 일어났다. 바로 태평천국운동(太平天國運動)이다. 이 운동은 2차 아편전쟁이 벌어지기 몇 년 전부터 시작되었는데, 청 조정이 전쟁에 전념하지 못한 것은 이 사건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스도교도인 홍수전(洪秀全, 1814~1864)은 자신이 조직한 상제회(上帝會, 옥황상제의 ‘상제’인데, 그리스도를 상제라고 표현한 것이다)가 관헌의 탄압을 받자 1850년 광시 성에서 봉기했다. 반란 세력은 민중의 전국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배만반청(排滿反淸)의 구호를 드높이 외쳤다. 침략하는 서구 열강보다 청 조정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 구호가 먹힌 탓인지, 정부의 힘이 약한 탓인지 모르지만 그들은 금세 세력을 크게 떨쳐 난징을 점령하고 1853년에 태평천국이라는 나라를 수립했다.
태평천국은 그 이름에 걸맞게 이상적이고 이념적인 국가를 지향했다. 신분 차별을 철폐하자는 것까지는 여느 반란에서도 볼 수 있는 평범한 요구였으나, 금욕적인 엄격한 규율을 강조하고 사유재산 제도를 폐지하자는 주장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이 점에서 태평천국운동은 그리스도교적 요소와 19세기 초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 이념을 연상시키지만, 실은 중국적 전통도 강했다. 특히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느님의 소유)한 다음 각 지방의 토지를 아홉 개로 나누어 경작자들이 똑같이 경작하도록 한 이른바 천조전무제(天朝田畝制)는, 전국을 장악하지 못한 탓에 끝내 실천에 옮겨지지는 않았으나 수천 년 전 주나라 시대의 정전법(井田法)을 원용한 것이었다. 그 밖에 행정제도에서도 주의 예법을 모방한 게 많았다. 역시 주나라는 중국 한인들의 영원한 정신적 고향이었다.
▲ 반란인가, 건국인가 청 조정은 내부의 반란마저도 제압할 힘이 없었다. 한족의 왕조를 꿈꾼 태평천국군은 신을 뜻하는 노란색 기치를 내세우고 붉은색 군복을 입었는데, 한 말기의 황건과 명 말기의 홍건을 합친 의미일지도 모른다. 40년 뒤 조선의 동학농민군도 태평천국군처럼 외세 배척을 내세웠다가 부패한 정부가 외국군을 끌어들임으로써 외세에 의해 진압되는 비운을 겪었다.
수백 년 만의 한족 정권인 탓일까? 태평천국의 기세는 초기에 엄청났다. 난징을 수도로 삼고 태평천국은 서쪽과 북쪽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는데, 순식간에 강남 일대의 16개 성(省)과 무려 6000여개의 성(城)을 수중에 넣었다. 그들의 주력은 빈농과 유랑민의 기층 민중이었던 데다 무능한 만주족 정부에 커다란 분노를 품고 있었다. 이미 팔기군(八旗軍)이 무력해진 청 조정은 각 지방마다 자체적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대응하라고 명했다. 심지어 조정은 자치군에 관직과 군비 징수권까지 부여했다【이 조치는 훗날 아무도 의도하지 않은 역사적 결과를 낳았다. 역대 한족 왕조들을 위협한 지방의 번진들이 청대에는 성장하지 못했는데, 그 조치로 인해 부활한 것이다. 이들은 태평천국의 난이 끝나고서도 군대를 해체하지 않고 더욱 세력을 키워 중앙 정치에 일일이 간섭하게 된다. 20세기에 그 번진들은 북양군벌(北洋軍閥)로 발전해 청 제국이 무너지고 난 뒤에 군벌 정치 시대를 연다】.
이쯤 되면 사실상 제국은 와해된 상태였다. 온갖 수단을 다해도 기세 좋게 밀고 오는 태평천국군을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실제 임자는 청이 아니라 서구 열강이라는 데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이제 임자가 나설 차례였다.
태평천국운동 초창기에 서구 열강은 간섭하기는커녕 중립적이거나 오히려 반란군에게 우호적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태평천국은 서구의 그리스도교적 이념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데다 민중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며, 군대의 사기도 드높아 파죽지세로 세력을 확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난징 조약 체결 이후에도 청 조정이 조약을 성실하게 이행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열강은 공격하는 한족과 수비하는 만주족 중 누가 이길 것인가에 촉각을 곤두세운 채 중립을 표방하고 있었다.
그러나 2차 아편전쟁에서 승리하고 원하는 것을 다 얻자 열강의 태도가 달라졌다. 더 이상 중립은 필요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의 나라 일에 직접 군대를 내기는 거북하다. 그래서 열강은 직접 나서지 않는 대신 청 조정을 위해 특수부대를 편성해주었다. 서양 무기로 무장시키고 서양식 훈련을 실시하고 서양인을 지휘관으로 하는 부대를 만든 것이다. 이들은 짧은 기간에 조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병기에서 워낙 우세했으므로 가는 곳마다 태평천국군에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별명이 늘 이기는 군대, 즉 ‘상승군(常勝軍)’일 정도였다. 이 상승군과 더불어 서양식 무기로 무장한 기타 군벌의 군대들이 합세하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마침내 1864년 난징이 함락되면서 길었던 태평천국운동은 종식되었다.
자구책Ⅰ
외세의 개입이 없었더라면 태평천국 세력은 청의 뒤를 이어 중국에 다시 한족 왕조를 세울 가능성이 컸다. 역대 왕조들의 흥망을 고려해볼 때에도 그게 ‘순리(順理)’였다. 이렇게 본다면 이 역사의 순리를 간단히 거스른 서구 열강의 힘은 과연 놀라운 것이었다. 태평천국군은 순전히 서구의 우세한 무기와 화력에 당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특히 반란의 진압을 계기로 중앙 정치에 발언권을 얻게 된 증국번(曾國審, 1811~1872)과 이홍장(李鴻章, 1823~1901) 등 유력 군벌들은 서양의 힘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아편전쟁 때도 서구의 무력을 실감했으나 이번에는 우군의 입장이었으므로 바로 곁에서 똑똑히 본 터였다.
증국번과 이홍장, 좌종당(左宗棠, 1812~1885)은 서양식 무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했다. 그 결과 상하이, 푸저우 등지에 조선소와 병기 공장이 세워지고 총포와 탄약, 기선 등을 제조하기 시작했다. 중국 최초로 근대적 중공업이 탄생한 것이다. 이때부터 약 30년 동안 서양의 우수한 과학기술을 적극 도입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자는 양무운동(洋務運動)이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는 광산업과 조선업 등 군수 산업을 중심으로 한 중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서양식 무기와 군사 제도를 본받는 데서 더 나아가 유능한 인재를 서구에 보내 군사학과 군사 훈련을 이수하게 하는 등 다양한 자강책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긴박하게 돌아가는 19세기 후반의 국제 상황은 중국이 마냥 근대화와 자강에 몰두할 수 있도록 놔두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러시아가 신장 지방을 침식해 들어왔고, 프랑스가 베트남을 차지하는 등 서구 열강에 밀려 중국의 영향력이 점차 무너져가고 있었다. 또 아시아의 소국이었던 일본마저 1868년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순식간에 국력을 키워 대만을 침략하고 조선에 진출했다. 게다가 양무운동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다. 서구처럼 자본주의적 토대가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모든 산업을 국가 중심으로 성장시키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다. 그 문제점은 예기치 않은 곳에서 터져 나왔다. 1894년의 청일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명칭에 붙은 두 나라와 무관하게 한반도의 조선이 전장이었다. 여기에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
▲ 병기로 일어서자 양무운동의 일환으로 난징에 세워진 병기 공장에서 일하는 중국인들의 모습이다. 양무운동은 최초로 서양의 것을 본받자는 운동이었다. 그러나 운동의 주체인 이홍장, 증국번, 좌종당이 모두 한인 군벌이었던 것을 고려한다면 여기에도 청 조정을 불신하는 반청 의식이 있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1894년 조선에서는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이 일어났다. 반란이라 해도 제 나라 백성들이 일으킨 반란이었지만 제 힘으로 무마할 수도, 진압할 수도 없었던 조선 정부는 상국인 청에 병력을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청은 톈진조약(서구 열강과 맺은 조약과 달리 1885년 청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에 묶여 있어 조선에 파병하려면 먼저 일본 측에 통보해야 했으나 이홍장은 통보를 생략하고 즉시 병력을 보냈다. 그렇잖아도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던 일본에 그것은 군대를 보낼 좋은 구실이었다【전통적으로 조선을 속국화하고 있었던 중국의 입장에서는 사실 ‘남의 나라의 내정’에 간섭한다기보다는 지방의 반란을 진압한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또한 당시 조선의 명성황후 정권도 마치 중앙 정부에 관군을 요청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청에 군대를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일본에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 게다가 1897년 조선이 친러파의 책동으로 대한제국을 선포한 것도 일본이 바라던 바였다. 조선을 차지하려면 먼저 조선에서 청의 종주권을 떼어내야 하는데, 조선 정부가 앞장서서 그렇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청과 조선 정부의 행동은 마치 일본을 위해 멍석을 깔아주는 것과 같았다】.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 청과 일본의 군대가 맞부딪혔으니 서로 간의 전쟁을 꾀한 게 아니었다 해도 대결이 불가피했다. 마침 청으로서는 30년간 양무운동의 성과를 시험해볼 좋은 기회였고, 일본으로서는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300년 만에 중국과 벌이는 한판 승부였다. 더구나 무대는 두 나라의 직접적인 피해가 없는 한반도였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청은 물론이고 서구 열강, 심지어 일본 내에서조차 이 전쟁은 일본이 이기기 힘들다고 보았다. 비록 서구 열강 앞에 허무하게 무릎을 꿇었지만, 청은 전통의 강국인 데다 30년간의 양무운동으로 힘이 붙지 않았던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속성 근대화를 이루었다고는 하나 일본으로서는 벅찬 상대였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본 결과는 정반대로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일본은 이홍장이 직접 30년간 조련한 청의 해군을 황해에서 격파했고 육군을 평양에서 무찔렀다. 게다가 랴오둥 반도까지 진출해 중국 본토까지 노렸다. 놀란 청 조정은 급히 화의를 신청했다. 전쟁은 볼품없이 끝났고, 1895년 또 하나의 불평등조약인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중국은 아편전쟁 이후 벌어진 모든 전쟁에서 전패하는 기록을 남겼다. 그 전쟁 배상금만 모았어도 근대화의 밑천으로 삼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래도 아편전쟁의 영국은 당시 세계 최강이었으나 이제는 동양의 작은 나라에도 졌다. 한없이 초라해진 중국을 서구 열강은 다시 거세게 물어뜯기 시작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에다 이번에는 독일도 열심히 이권 다툼에 끼어들었다. 열강은 중국을 효율적으로 수탈하기 위해 각지에 철도를 부설하고 광산을 개발했다. 양무운동으로 어느 정도 성장하던 중공업은 여지없이 무너졌으며, 집 안 수공업으로 운영되던 전통의 공업도 서구 상품의 물결 속에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청일전쟁의 배상금을 물 능력이 없어 차관을 도입한 것은 서구 자본이 무차별적으로 영입되는 결과를 빚었다.
특히 뒤늦게 제국주의 식민지 경쟁에 뛰어든 독일은 이 기회에 아예 중국 영토를 열강이 분할하자고 주장했다. 다행히 중국 민중이 반발하고 열강들이 반대하여 무산되었으나 중국인들은 이제 영토마저 빼앗길지 모른다는 위기감에 젖었다【독일은 중세 내내 신성 로마 제국의 본산이었기 때문에 근대 국가로의 출발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늦었다.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의 풍부한 식민지들이 다른 열강에 의해 분할된 이후에야 비로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든 탓에 독일은 중국을 영토적으로 분할하는 데 특히 큰 관심을 보였다. 다른 열강도 그런 의도가 전혀 없지는 않았으나 수천 년간의 강력한 역사와 문명을 꾸려온 데다 영토가 넓은 중국을 정치적으로 지배하기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게다가 중국은 거리상으로도 유럽에서 너무 멀었다. 그래서 열강은 보수적이고 무능한 서태후 정권을 온존시키고 그 대신 경제적인 이득을 얻어내고자 했다】.
▲ 침몰하는 청 제국 30년의 조련도 무색하게 청나라 해군은 개전 직후부터 몰락했다. 그림은 침몰하는 청 제국의 군함인데 영국에서 빌린 함선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다.
양무운동과는 다른 뭔가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했다. 군수 산업만 육성한다고 해서 강국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광둥 지방의 지식인이었던 캉유웨이(康有爲, 1858~1927)는 하루빨리 변법(變法, 개혁)하지 않으면 중국이라는 나라 자체가 지구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판단했다.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를 이루자는 주장은 양무운동과 같았으나 캉유웨이의 변법은 그와 달랐다. 그는 서양의 무기나 제도와 같은 게 아니라 과학기술 자체를 도입해야 하며, 무조건적인 수입이 아니라 중국적인 중심을 튼튼히 마련한 조건에서 서양의 것을 접목시켜야 한다고 믿었다. 서양에 그리스도가 있다면 중국에는 공자(孔子)가 있다. 그는 공자가 기본적으로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개혁가였다고 주장하면서 유교를 역동적인 사상으로 재해석하고자 했다.
캉유웨이의 주장은 마침내 젊은 황제 광서제(光緖帝, 1871~1908)를 움직였다. 황제의 적극 지원으로 캉유웨이는 1898년 무술변법(戊戌變法)을 시행했다. 개혁 세력은 민간이 주도하는 민족자본의 육성을 최우선의 과제로 삼고 추진하는 한편, 정치제도, 과거제(科擧制), 관제와 법제, 군사 제도, 교육제도 등 거의 모든 제도를 뜯어고치고, 화폐를 통일하고, 철도를 부설하고, 특허제를 도입하는 등 거의 모든 방면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세계 어느 곳의 역사에서도 기존의 지배층이 급진적인 개혁을 받아들인 사례는 없다. 지배층 가운데 개혁의 지지자는 광서제 한 사람밖에 없었으나 안타깝게도 당시 그는 실권자인 큰어머니 서태후(西太后, 1835~1908)에게 밀려 권력에서 소외된 상태였다. 특히 군사권이 없는 게 문제였다. 개혁이 실시된 지 100여 일 만에 서태후가 이끄는 보수파는 쿠데타를 일으켜 광서제를 연금시키고 개혁파를 체포했다.
양무운동과 무술변법은 서로 초점은 달랐으나 둘 다 서양의 선진 문명을 받아들여 중국의 근대화를 이루고자 한 운동이었다. 하지만 양무운동은 실효가 없음이 입증되었고, 무술변법은 지나치게 이상에 치우쳤음이 드러났다. 서양의 것을 본받으려는 두 가지 자구책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니 이제 남은 것은 한 가지, 자기 것을 지키는 길밖에 없었다.
▲ 황제가 지원한 개혁 양무운동이 군사적인 측면에 치중했다면 캉유웨이의 무술변법은 제도적인 측면의 개혁책이었다. 사진은 왼쪽부터 개혁의 후원자인 황제(광서제), 개혁의 대표 주자(유웨이), 보수의 우두머리(서태후)다. 개혁파를 제거하는 데 성공한 서태후는 나중에 개혁을 시도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였다.
자구책Ⅱ
캉유웨이(康有爲)가 서양의 정신적 힘이 그리스도교에 있다고 본 것은 옳았다. 오랫동안의 중세를 거치며 종교적 통합을 이룬 유럽은 비록 국가는 여럿이었으나 정신적ㆍ종교적으로는 한 몸이나 다름없었다【오늘날 유럽연합이 결성된 것도 그런 배경 덕분이다. 반면 한ㆍ중ㆍ일 3국은 수천 년 동안 동질적인 한자 유교 문화권을 이루어왔어도 지역적 블록을 이루기는 어렵다】. 영국, 프랑스, 독일은 서로 경쟁하면서도 서구 전체의 이익이 문제시될 때는 즉각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다. 그러나 캉유웨이가 보지 못했던 것은, 그리스도교는 서양의 ‘정신적 힘’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중국에 온 서양의 선교사들은 그리스도교를 포교하려는 의도만 가진 게 아니었다. 16세기 명대에 온 선교사들은 유럽에서 신교가 세력을 장악한 탓에 교세 확장을 위해 멀리 동방까지 온 구교 성직자들이 대부분이었으므로 비교적 순수한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었으나, 19세기의 선교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이들은 오랜 기간 중국에 머물면서 중국의 내정과 관습, 지리 등에 밝은 ‘중국통’이 되었다. 중국에 진출하려는 제국주의 열강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은 매우 중요한 안내자‘였다. 중국의 사정을 파악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조약을 맺을 경우에도 중국어를 아는 서양인이 필요했다.
선교사들 스스로가 제국주의 침략의 앞잡이 역할을 자임하기도 했다. 1857년 톈진조약으로 그리스도교 포교의 자유가 허락되자 선교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각자 자기 모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이들은 각종 이권 다툼에 개입했고, 심지어 간첩 행위나 다름없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자체가 중국의 전통적인 가치관을 파괴하는 데다 중국인이 보기에 선교사들의 그런 행위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서양 귀신의 침략을 물리치고 유교적 전통과 질서를 지키자!” 중국 민중은 이렇게 외쳤지만 무능한 정부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역사적으로도 비밀결사의 경험이 풍부한 중국 민중은 그리스도교 세력에 대해 조직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대도회(大刀會), 가로회(哥老會), 의화권(義和券) 등의 비밀 단체들은 서서히 반그리스도교 운동을 전개해갔으며, 때로는 폭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점점 반외세적, 반제국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띠게 되었다. 그 절정이 1899년의 의화단(義和團) 사건이다.
▲ 철도를 파괴하는 의화단 개혁이 실패하면 보수로 기우는 법이다. 양무운동과 무술변법이 모두 실패하자 이제 중국은 오로지 반외세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의화단운동은 중국 민중이 들고일어났다는 점에서 달랐다. 그들은 서양의 철도와 그리스도교가 재앙을 불러왔다고 여기고 곳곳에서 철도와 교회를 파괴했다. 그림은 프랑스 신문 「르 프티 파리지엔」에 실린 것이다.
의화권은 산둥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단체였다. 당시 산둥은 중국의 분할을 주장한 독일이 터를 잡은 곳이었다. 후발 제국주의의 조급함으로 독일이 그악스럽게 나오자 의화권도 조직을 더욱 확대하고 명칭도 의화단으로 고쳤다. 급기야 그들이 공개적으로 그리스도교도들을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독일보다 먼저 급해진 것은 청 조정이었다. 서태후의 지원을 등에 업고 정부의 실권자로 군림하던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는 군대를 보내 진압하려 했으나 오히려 불에 기름을 끼얹은 격이었다. 의화단은 그것을 계기로 톈진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이제는 의화단 소속이 아닌 사람들까지도 철도를 파괴하고 교회를 불태우고 관청을 습격하는 등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화북 일대로 들불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다.
이제 서구 열강도 수수방관할 수 없는 처지였다 내버려두었다가는 공들인 탑이 송두리째 무너질지도 몰랐다. 열강은 일단 청 조정에 하루빨리 의화단 사건을 진압하지 못하면 자기들이 직접 군대를 보내 해결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조정에서는 의견이 분분했다. 40년 전의 태평천국운동이라면 반란을 공공연히 표방했으니 당연히 진압 대상이었으나 의화단은 민간 단체였으니 사정이 달랐다. 더구나 조정의 일각에서는 의화단을 이용해 외세를 물리치자는 주장도 나왔다. 고민하던 서태후는 서구 열강이 광서제에게 친정(親政)을 시킨다는 소문이 나돌자 즉각 결단을 내렸다. 서태후는 각국 공사관에 당장 중국을 떠나라고 통보하고 각 지방에 의화단을 도우라는 명을 내렸다.
2차 아편전쟁 이래 40년 만에 다시 중국과 서구 열강의 대결이 벌어졌다. 이번에는 물심양면에 걸쳐 중국 민중의 지원까지 등에 업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결과는 마찬가지, 달걀로 바위 치기였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이번의 상대는 유럽 8개국 연합군으로 전보다 더욱 막강했던 것이다. 유럽 연합군은 톈진과 베이징을 손쉽게 점령하고 쯔진청(紫禁城)을 약탈했다(대영박물관과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중국 문화재들은 대부분 이때 탈취되었다). 결국 청 조정은 또다시 백기를 들었다. 연패의 기록이 경신되면서 중국은 베이징 의정서를 체결하고 전쟁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의화단운동을 계기로 서구 열강은 중국을 정치적으로 식민지화하려는 시도를 아예 포기하게 되었다. 통째로 집어삼키기에는 입이 너무 많아진 데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중국의 문화와 강력한 민중의 항쟁을 완전히 뿌리 뽑을 수는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 베이징의 유럽 군대 태평천국운동에서도 보았듯이, 서구 열강은 평소에 서로 이해를 다투다가도 중국을 무력으로 억압하는 데는 한 데 뭉쳤다. 사진은 의화단 진압을 위해 파견된 8개국 연합군이 자금성에 입성하는 장면이다.
마지막 황제 푸이
서양의 문물을 본받으려는 자구책(양무운동과 변법)이나 서양의 것을 배척하려는 자구책(의화단운동)이나 다 실패했다. 이제 중국에는 남은 카드가 없다. 마지막으로 시도해볼 수 있는 것은 양자를 절충하는 것뿐이다. 서태후 보수파 정권은 ‘신정(新政)’이라는 이름으로 뒤늦은 변법에 착수했다.
신정의 목표는 명백했고, 그래서 그 과정도 뻔했다. 우선 군사제도를 개혁하고 서양식 군관 학교를 세웠다. 근대식 상업을 육성하기 위해 상부(商部)라는 기구를 설치했다. 그리고 교육제도를 개혁해 서양식 학교를 설립했는데, 이것으로 수 문제가 만든 이래 1400년간이나 관리 임용 제도의 근간을 이루었던 과거제(科擧制)가 폐지되었다. 그러나 통치 능력을 상실한 정부가 하는 개혁이 효과를 볼 리 없었다. 신정이 별무신통이자 서태후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그것은 입헌군주제의 도입이었다.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강국 러시아에 승리를 거두었다. 10년 전 일본에 패한 청은 새삼 일본의 힘에 감탄했다. 일본은 전통적인 전제군주국인 중국과 러시아를 이겼다. 이건 입헌군주제가 전제군주제를 이겼다는 뜻이다. 적어도 청 조정은 이렇게 해석했다. 입헌군주제가 시대적 추세라고 여긴 서태후 정권은 서둘러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만들고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형식만 갖춘다고 해서 수천 년 동안 지속된 제정, 그것도 강력한 중앙집권적 제정이 하루아침에 공화정으로 바뀔 수는 없었다. 설령 서태후 정권보다 유능한 정부라 해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혁명을 낳은 봉기 우창 봉기로 마침내 중국 최후의 제국인 청이 무너졌다. 사진은 봉기를 성공시킨 다음 날 혁명당원들의 모습이다. 이날 그들은 호북군정부를 세웠는데, 이것은 간이 정부이기는 하지만 중국 역사상 최초로 왕정이나 제정을 채택하지 않은 정부였다.
사태는 엉뚱하게 흘러갔다. 과거제(科擧制)가 없어지자 학생들은 새로 도입한 중국의 학교 제도를 외면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밖에서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조국의 실상은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도쿄의 중국 유학생들은 정부에 의한 어떠한 개혁도 무용하리라는 판단을 내리고 점차 혁명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도쿄에서 잡지를 창간하고 학교를 세우면서 조직을 이루기 시작했다. 1905년 중국동맹회라는 통합 조직이 생겨 났는데, 그 대표는 쑨원(孫文, 1866~1925)이었다. 동맹회는 중화민국이라는 새로운 국호를 정하고 삼민주의라는 강령도 채택했다.
한편 중국 내부에서도 혁명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제 혁명은 지식인들만의 구호가 아니었다. 몇 차례 봉기가 실패한 뒤 1910년 10월 10일, 드디어 양쯔 강 남안의 우창에서 지식인과 군대가 연합해 봉기를 성공시키고 중국 본토에서 처음으로 중화민국 군정을 수립했다. 훗날 이 사건은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기록되었으며, 거사가 벌어진 10월 10일은 ‘쌍십절(雙十節)’이라는 이름의 건국 기념일로 제정되었다. 우창 봉기가 성공했다는 소식은 즉시 전국으로 퍼져나가 각지에서 독립을 선언하는 사태가 잇달았다.
▲ 명의 태조 주원장을 참배하는 쑨원 2000년에 걸친 제국 체제를 타도했는데도 새 중국 정부가 돌아갈 곳은 ‘한족 제국’이었다. 신해혁명(辛亥革命)을 성공시킨 쑨원이 명 태조 주원장의 묘소를 참배하는 장면이다.
이 소식을 들은 쑨원은 서둘러 귀국했다. 1912년 1월 1일을 기해 그는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수도는 난징으로 정해졌고, 쑨원이 임시 대총통을 맡았다.
한 나라에 두 개의 정부(제국 정부와 공화국 정부)가 들어선 꼴이 되자 청 조정에서는 위안스카이에게 전권을 맡겨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러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었다. 위안스카이는 그 기회를 이용해 오히려 쑨원 측과 협상에 나섰다. 정치적 욕심보다는 조국에 공화정이 들어서는 것을 우선시한 쑨원은 선뜻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자리를 양보하겠다고 제의했다.
쑨원과의 약속에 따라 위안스카이는 거꾸로 청 황실을 정리하기 위한 해결사가 되었다. 이것은 새로 생겨난 중화민국 정부를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결국 위안스카이의 압력에 굴복해 어린 황제 선통제(宣統帝, 1906~1967)는 황실 우대를 조건으로 1912년 재위 4년 만에 퇴위했다. 그가 바로 마지막 황제로 알려진 푸이(溥儀)다(그는 ‘현역’ 신분으로 제위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선통이라는 연호 이외에 묘호는 없다). 이로써 청 제국은 297년의 사직을 끝으로 멸망했으며, 동시에 진시황(秦始皇)이 대륙을 통일한 이래 2133년 동안 지속된 중국의 제국 시대도 종말을 고했다.
▲ 마지막 황제 푸이 푸이는 1908년 서태후의 유언에 따라 두 살의 어린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가 1912년 여섯 살에 폐위된 비운의 황제였다. 즉위식장에서 지루함을 못 견딘 푸이가 울음을 터뜨리자 그의 아버지 순친왕(醇親王)은 “울지 마라, 곧 끝난단다.”라고 다독였는데, 그의 말처럼 푸이의 재위는 몇 년 안 가 끝나버렸다. 이후 푸이는 군벌과 일본의 손에 의해 여러 차례 허수아비 황제 노릇을 하다가 1967년에 사망했다.
5. 새 나라로 가는 길
험난한 공화정
시행착오를 거듭하던 중국의 근대화 노력은 결국 공화정 체제로 개혁하는 것만이 살 길이라는 결론으로 모아졌다. 19세기 이후 100여 년이나 중국의 근대화가 질척거린 것은 외세의 침략이라는 바깥 요인 때문이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정치의 무능과 부패에도 큰 책임이 있었다. 더욱이 외세야 중국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지만, 정치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개혁이 가능한 게 아닌가? 그런 점에서 공화정을 택한 것은 필연이자 올바른 결론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길 역시 쉽지 않다는 데 있었다. 서구 공화정의 역사는 로마 시대까지 무려 2000년을 거슬러 올라가며, 영국의 의회민주주의도 700년의 역사에 이른다. 근대 서구 공화정만 해도 수백 년 동안 중세와 절대주의를 거쳐 완성되었고, 그 과정에서 무수한 혁명과 전쟁을 치렀다. 과연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였다. 아무리 모방이라는 후발 주자의 이점이 있다. 해도 이 장구한 발전 과정을 단기간에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신생 공화국인 중화민국의 앞길은 험난하기만 했다.
선통제가 퇴위한 바로 다음 날부터 문제가 터졌다. 쑨원은 약속대로 위안스카이에게 대총통 자리를 양보하기로 하고 베이징에 있는 그에게 빨리 난징으로 와서 취임하라고 통보했다. 당시 중화민국의 수도는 난징이었으니 당연한 요구였지만, 위안스카이는 적들이 도사리고 있는 난징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위안스카이는 자신의 세력권인 베이징을 떠나고 싶지도 않고 대총통 자리를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는 교활한 꾀를 냈다. 베이징에서 취임하면 되지 않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적당한 구실이 필요하다. 그는 부하를 사주해 베이징에서 폭동을 일으키게 하고, 사고 수습을 핑계로 베이징에서 대총통에 취임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초장부터 어그러진 약속이 이후에 지켜질 리 없다. 애초부터 민주주의나 공화정에는 관심이 없던 위안스카이는 쑨원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제국이 무너진 틈을 타 자신의 독재 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내심 바라는 것은 총통 따위가 아니라 황제였다【당시 위안스카이는 의회 정치의 관념에 익숙지 않았으므로 공화정과 제정의 차이를 확실히 알지 못했다. 그는 대총통이 공화국의 수장이니까 황제처럼 전제권력을 가진 것으로 여겼다. 다만 대총통은 황제와 달리 임기가 있고 세습되지 않는다는 정도만 알았는데, 그에게는 바로 그 점이 불만이었다. 그는 그저 청 제국을 자신의 제국으로 대체하고 싶을 따름이었다】.
▲ 역사의 갈림길에 선 두 인물 쑨원(위)과 위안스카이(아래)는 우리 현대사에서 김구와 이승만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쑨원은 권력을 장악할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도 그때마다 분쟁을 피하기 위해 위안스카이에게 양보했다. 반면 위안스카이는 처음부터 공화정 체제에 만족하려 하지 않았고 기회만 있으면 독재나 제정 복고를 꾀했다. 결국 쑨원은 중국의 민족 지도자로 역사에 남았고, 위안스카이는 반동적 독재자로 남았다.
그래도 공화정이니까 내각과 정당까지는 갖추었는데, 껍데기일 뿐 내실은 없었다. 제대로 하려면 공화정을 담당할 정치 세력이 필요하지만, 중국 자체의 역사에서 탄생한 체제가 아니었기에 그 정치 세력이 성장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청일전쟁 이후 꾸준히 세력을 키우면서 각 지방에 할거하고 있던 군벌과 관료 출신, 자칭 개혁가 등 어중이 떠중이가 그 역할을 자임하고 앞다투어 정당을 조직했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정당들은 이내 합종연횡을 이루었다. 상당수는 여당인 공화당을 결성하고 위안스카이의 지지 세력이 되었으며, 자연히 난징 세력도 한데 뭉쳐 야당인 국민당을 창당했다.
위안스카이는 처음부터 국민당의 존재에 심히 부담을 느꼈다. 국민당은 1913년에 치러진 첫 국회의원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 보란 듯이 다수당이 되었다. 그러자 위안스카이는 국민당 의원들을 매수하고 핵심 인물을 암살하는 등 무법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독재 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국회의 동의도 얻지 않고 열강으로부터 2500만 파운드의 차관을 얻었다. 초대 대총통이 갓 제정된 헌법을 어기는 격이다. 나아가 그는 반대하는 국민당 의원들을 파면하고, 끝내는 국민당마저 해산시켜 버렸다. 다수당이 없어졌으니 태어난 지 1년도 못 되어 국회는 사실상 기능 정지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만행은 끝나지 않았다. 1914년에 정식으로 총통에 오른 그는 유명무실해진 내각책임제를 폐지하고 총통제를 실시해 완벽한 독재 권력을 구축했다. 이렇게 역사의 시계추를 반동 복고의 방향으로 되돌려놓은 뒤, 이제 그에게 남은 과제는 애초에 마음먹었던 황제가 되는 것뿐이다. 이를 위해 그는 먼저 여론을 조성한 뒤 국민대표회의라는 기구를 만들어 거기서 공화제와 입헌군주제를 놓고 투표하게 했다. 예상대로 ‘체육관 선거’의 투표 결과는 전원 입헌군주제 찬성이었다【1972년에 유신헌법을 제정해 종신 대통령을 꿈꾼 박정희는 위안스카이를 본떴을지도 모른다. 그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해괴한 기구를 만들어 거기서 대통령과 국회의원 3분의 1을 선거하게 했다. 이렇게 정부와 의회를 장악하고 대한민국을 겉모습만 공화국일 뿐 사실상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었다】.
▲ 북양군벌의 모습
드디어 위안스카이는 황제가 될 꿈에 부풀었는데, 이 문제는 워낙 사안이 중대한 탓에 전국에서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그동안 그에게 지지를 보냈던 서구 열강도 제국이 부활하는 것만은 찬성하지 않았다.
이 기회를 틈타, 일본에 망명 중이던 쑨원의 지시를 받은 국내 혁명당원들은 ‘타도 위안스카이’를 부르짖으며 군사를 일으켰다. 그들은 현재의 공화국이라는 국체를 수호한다는 의미에서 호국군(護國軍)이라고 자칭했다. 위안스카이는 그것을 무시하고 황제 즉위를 강행하려 했으나 그의 심복 부하들마저 반대하고 나섰다. 비로소 대세의 불리를 깨달은 위안스카이는 눈물을 머금고 계획을 포기했다. 울분을 억누르지 못한 그는 그 뒤 석 달 만에 병사했다.
독재자가 죽으면 분열기가 온다. 위안스카이가 죽자 그의 지배 아래 있던 북양군벌들은 일제히 각지에서 독립을 주장하고 나섰다. 이들은 옛 왕조시대의 번진들처럼 사병 조직은 물론 자기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세금을 징수하는 권리도 갖고 있었다. 그래도 옛날 번진들은 새로운 통일 왕조를 꿈꾸거나 제도를 정비하는 등 발전적인 측면도 있었고 역사적 안목도 가졌으나, 20세기의 군벌들은 근대화를 가로막는 봉건적 장애물에 불과했다. 더구나 그들은 세력 확장을 위해 각 방면으로 열강과 결탁하고 있었으니, 제국주의의 하수인이자 앞잡이이자 매국노였다.
군벌들은 정부 요직도 나누어 먹기식으로 독점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라는 우두머리가 없으니 사안마다 내분이 일었다. 때마침 유럽에서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의 참전 여부를 둘러싸고 대총통과 국무총리가 대립하는가 하면, 쿠데타를 일으켜 국회를 해산하고 선통제를 복위시키려는 군벌도 등장했다. 급기야 군벌들은 서로 무력을 동원해 치고받으면서 정권을 주고받는 무정부 상태를 연출했다.
강남에서도 군벌이 할거하는 현상은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국회가 해산된 뒤 국회의원들이 개입하고 쑨원이 영향력을 행사했기에 강북보다는 형편이 나았지만, 강남의 군벌들도 광저우를 중심으로 치열한 정권 다툼을 벌였다. 이 다툼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그들은 광둥 정부를 세우고 북양군벌과 대치했다. 이로써 강북에는 북양군벌들이 중심이 된 베이징 정부, 강남에는 서남 군벌들이 중심이 된 난징 정부가 들어섰다. 이 기묘한 ‘남북조’의 분열기를 맞아 바야흐로 중국은 끝 모를 혼돈의 구렁텅이로 빠져들고 있었다.
▲ 북양군벌의 우두머리들 군벌의 우두머리 위안스카이가 죽자 북양군벌 세력은 3대 군벌로 갈렸다. 왼쪽부터 돤치루이(段祺瑞), 장쭤린(張作霖, 장쉐량의 아버지), 펑궈장(馮國璋)이다. 수천 년의 제정이 끝나고 신생 공화정이 들어선 직후, 중국 역사에서 지극히 중요한 이 시기 10여 년 동안 중국은 이 군벌들이 정치를 좌지우지하면서 기회를 놓친다.
전혀 새로운 정치 세력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 10월 러시아에서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 터졌다. 유럽 최후의 전제군주국이던 제정러시아가 볼셰비키 혁명으로 타도된 것이다【유럽과 아시아의 전통적 전제군주국인 청과 러시아는 불과 5년의 간격을 두고 차례로 무너졌다. 공교롭게도 1910년대는 세계적으로 제국들이 무너지는 시기였다. 두 제국 이외에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는 오스만튀르크 제국이 멸망했다. 15세기 부터 터키와 발칸 반도, 동유럽 일대를 지배했던 튀르크는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의 동맹국으로 참전했다가 패배하는 바람에 해체되고 터키 공화국이 성립되었다. 수천 년간 세계를 이끌었던 제국 체제는 이미 낡은 체제가 되었던 것이다】.
러시아에는 인류 역사상 전례가 없는 새로운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섰다. 피지배층이 지배층을 무너뜨린 이 소식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특히 제국주의의 침탈로 인해 식민지ㆍ반식민지 상태에서 신음하던 세계 각지의 피억압 민중에게 그 소식은 해방의 빛줄기였다.
러시아 혁명의 이념인 마르크스주의는 국가보다 계급을 우선하는 혁명론이다. 따라서 한 나라의 성장과 발전보다는 전 세계의 피억압 민중이 단결해 제국주의 세력을 물리치는 것을 더 중요시했다. 당시 이것은 이론적으로만이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필요했다. 볼셰비키 혁명이 성공한 직후 제국주의 열강이 소비에트 연방에 간섭하면서 러시아 제국을 부활시키려 했으므로 신생국의 생존을 위해서도 반(反)제국주의 통일전선이 시급했던 것이다.
그래서 소련 공산당은 소련 내에서 혁명의 완수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제국주의의 침략을 받는 다른 나라들의 사정에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당시 소련의 주요 관심은 동유럽에 있었으나, 방대한 영토와 인구를 가진 중국이 장차 사회주의의 향방을 가늠하는 중요한 지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19년 소련은 반제국주의 운동을 담당하는 국제기구로서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조직했다.
과연 새로운 소비에트 러시아는 중국을 침탈하던 제국주의 제정러시아와는 달랐다. 코민테른은 제정러시아가 그전까지 중국에서 얻어냈던 모든 이권을 조건 없이 포기하고 중국 민중에게 반환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아울러 의화단 사건으로 발생한 배상금(20년 전의 것이 아직 지불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 혁명의 지도자 1917년 러시아 차리즘이 무너지고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사진은 혁명의 지도자 레닌이 망명지에서 페트로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군중의 환호를 받으면서 열차에서 내리고 있는 장면이다. 중국은 러시아보다 5년이나 앞서 제정을 무너뜨렸지만 보수 군벌들이 권력을 장악했다. 시민계급이나 민주주의의 경험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동서양의 두 거대 제국은 이 차이 때문에 명암이 크게 갈렸다.
중국의 뜻있는 지식인들은 소련의 조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미 그 몇 년 전부터 중국에는 근대적 교육을 받은 선각자 지식인층이 형성되어 신문화(新文化)운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던 터였다. 이런 배경에서 진보적 지식인들은 급속히 사회주의사상으로 기울었다.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이 중국에 앞날의 전망을 열어주었다면 이번에는 중국 민중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때마침 터진 1919년의 5ㆍ4운동은 중국 민중의 힘을 여실히 보여주는 일대 쾌거였다.
원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국은 군벌들의 주장에 따라 연합국 측으로 참전해 승전국 협상 테이블에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했다. 패전국 독일이 중국 내에 가지고 있던 각종 이권은 당연히 반환되어야 했다. 그런데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회의에서는 같은 승전국 입장인 일본이 제출한 21개 조만을 받아들이고 중국의 요구는 묵살되었다. 더구나 그 21개 조는 독일이 가진 중국에 대한 권리를 일본이 승계하고 나아가 만주 지역의 개발권까지 차지한다는 내용이었다.
가뜩이나 일본의 야심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던 중국 민중이 5월 4일 강력한 반일 대중운동을 벌였다. 중국 전역에서 반일 시위가 잇달았고, 일본 상품에 대한 불매운동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비폭력으로 진행되었기에 군대를 조직하거나 폭동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거의 모든 중국인이 5ㆍ4운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위로부터는 러시아 혁명이 미래를 열어주었고, 아래로부터는 중국 민중이 그 미래를 실현할 수 있는 힘을 보여주었다. 이 두 가지를 계기로 중국에서 전혀 새로운 정치 세력인 공산당이 탄생했다.
1920년 중국에 파견된 코민테른 대표 보이틴스키(Grigori Voirinsky)는 중국의 진보적 지식인들인 리다자오(李大釗, 1889~1927)와 천두슈(陳獨秀, 1879~1942)를 만나 중국공산당의 창당을 건의하고, 이를 위해 전국 각 지역에 공산주의 그룹을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이듬해 7월에 상하이에서 열린 제1회 전국대표대회에서 드디어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다. 전국대표대회라고 해봤자 각지에서 열 세 명이 모인 데 불과했다. 당시 참가자들 중에는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도 있었는데, 그조차도 이 보잘것없는 모임이 30년 뒤 중화인민공화국을 탄생시키는 주체가 될 줄은 몰랐으리라.
▲ 지식인과 농민 러시아 사회주의혁명의 소식은 전 세계 피억압 민족에게 새 시대를 알리는 종소리였다. 사진은 왼쪽부터 중국공산당의 성립에 기여한 리다자오, 천두슈, 그리고 젊은 시절의 마오쩌둥이다. 인상에서 드러나듯이 리다자오와 천두슈는 지식인 출신이고, 마오쩌둥은 농민의 아들이다.
한 지붕 두 가족
초라하게 시작한 중국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금세 세력을 확장했다. 코민테른은 쑨원과도 접촉해 혁명당과 혁명군을 조직하라고 권고했다. 당시 코민테른은 국민당과 공산당이 합작을 이루어 함께 반제국주의 투쟁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수행하는 통일전선 전술을 권장하고 있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아직 조직력에서 미약한 공산당이 국민당의 조직을 이용해 세력을 키울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그에 따라 공산당원들은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해 일부는 중앙 집행위원에 올랐다. 이로써 국민당과 공산당은 1924년에 1차 국공 합작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념과 노선이 크게 다른 두 세력이 하나의 조직에 속해 있다는 것은 언제나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공산당 세력은 국민당 내에서 이념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규합하면서 국민당 좌파를 이루었고, 나머지 국민당 세력은 자연히 우파로 포진했다. 그런 상황에도 합작이 깨지지 않고 그런대로 굴러갈 수 있었던 이유는 지도자와 과제가 공통적이었기 때문이다. 쑨원은 당의 구심점으로서 합작에 충실했고, 남북이 분열된 상태에서 광둥의 국민당 정부로서는 무엇보다 북벌이 최우선 과제였던 것이다. 그런데 1925년에 그 두 가지 요소가 거의 동시에 사라져버린다.
우선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고 추앙받던 쑨원이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치고 사망했다. 부드러운 권위로 양측을 중재하고 조정하던 지도자가 없어지자 국민당 내에서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더욱 노골화되었다. 북벌의 경우에는 조건이 유리해진 게 오히려 합작에 독이 되었다.
1925년 5월 15일, 일본이 관리하던 상하이의 방적 공장에서 일본인 감독이 노조 간부를 사살하는 사건이 터졌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서 학생과 노동자들이 들고일어났는데, 5월 30일 가두시위 과정에서 경찰의 발포로 열세 명이 죽으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상하이의 노동자 전체가 총파업에 들어갔고,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벌였으며, 상인들마저 가세했다. 이 5ㆍ30사건을 계기로 중국 전역에 다시 반제국주의 의식이 퍼졌다. 국민당은 노동운동을 지원하면서 중국 민중의 확고한 지지를 얻어내는 성과를 올렸다. 반면 제국주의와 결탁한 북부 군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으며, 새로운 정치적 대안으로서 국민당이 떠올랐다.
불리할 때는 쉽게 단결하지만 유리할 때는 쉽게 분열하게 마련이다. 상황이 크게 호전되자 그동안 안으로 높아왔던 국민당 내부의 분열이 밖으로 터져버렸다. 국민당은 왕징웨이(汪精衛, 1883~1944)를 중심으로 좌파가 결집하고(공산당원이 아닌 왕징웨이를 우두머리로 삼을 만큼 당시 공산당은 좌파의 핵심이 되지 못했다) 장제스(蔣介石, 1887~1975)를 중심으로 우파가 모이는 뚜렷한 분열 현상을 보였다. 북벌이 눈앞에 다가오자 남쪽에 치우친 광저우는 수도로서 적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국민당은 천도를 계획하는데, 장제스의 우파는 후보지로 난창을 주장했으나 좌파의 주장에 밀려 새 수도는 우한으로 정해졌다. 굴러온 돌이 박혀 있는 돌을 빼낸 격이었다. 장제스는 스승인 쑨원의 명으로 소련에 군사 유학도 갔다 왔지만(그 덕분에 장제스는 황푸黃埔 군관학교의 교장을 역임했는데, 그가 권력의 핵심으로 부상한 데는 이 학교의 졸업생들이 지지한 덕이 컸다), 타고난 반공주의자였다【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냉전시대라면 몰라도 1920년대에 반공주의는 때 이른 감이 크다. 그 무렵에는 소련을 제외하고 세계 어디에서도 공산당이 집권하지 못했으며, 유럽과 미국도 소련이 공산주의 국가라고 해서 백안시하지 않았다. 당시 장제스는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혐오하기보다 장차 공산당과 권력을 놓고 경쟁하리라는 것을 감지했을 것이다. 나중에 그가 민족 해방과 반제국주의의 과제마저 팽개치고 권력 획득에 혈안이 되는 것으로 미루어 충분히 그렇게 추측할 수 있다】.
▲ 만년의 쑨원 부부 광둥군 장교들 한가운데 쑨원과 그의 아내 쑹칭링(宋慶齡)이 앉아 있다. 쑨원은 흔히 중국 혁명의 아버지라고 불리지만, 실상 그 별명에 어울리는 활동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금융 재벌의 딸인 쑨원의 아내 쑹칭링과 장제스의 아내 쑹메이링은 중국 현대사와 깊은 연관을 맺고 있는 자매다.
때마침 국부군(國府軍, 국민당의 군대)이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한 것은 장제스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마뜩잖은 합작을 피해 그는 상하이로 옮겨 우한 정부와 딴살림을 차렸다. 그러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저장(浙江)의 한 재벌이 그에게 경제적 지원을 보장했다. 게다가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일본의 5개국이 공동성명을 통해 공산당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장제스는 날개를 달았고, 왕징웨이의 우한 정부는 초조해졌다. 장제스와 결탁할까, 아니면 그에게 등을 돌리고 공산당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까? 그러나 공산당이 후베이와 후난에서 급진적인 토지개혁을 실시하자 왕징웨이는 장제스와 손을 잡았다. 결국 공산당은 국민당에서 이탈해 지하로 숨어들었다. 이로써 4년간에 걸친 어색한 밀월, 1차 국공 합작은 끝났다.
우한 정부가 기어들고 공산당이 당을 떠나자 장제스는 국민당의 최고 실력자가 되었다. 한껏 고무된 그는 국민당의 통일을 중국의 통일로 연장하고자 했다. 국부군은 총공세로 북벌에 나서 불과 2개월 만에 20년간 중국 북부를 지배했던 북양군벌을 모조리 무찌르고 베이징을 점령했다. 10년간의 이상한 ‘남북조시대’가 끝났다. 통일을 이룬 장제스는 드디어 새 중앙 정부를 수립했다. 난징을 수도로 했기 때문에 이것을 난징 정부라고 부른다.
한편 지하로 들어간 중국공산당은 난징 정부의 노골적인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1927년 하반기에 몇 차례 봉기를 일으켜 해륙풍 소비에트와 광둥 코뮌 같은 소비에트 체제를 건설했지만, 그마저도 얼마 버티지 못하고 국부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실패했다. 그해 9월 마오쩌둥은 공산당 중앙의 명령에 따라 추수봉기(秋收蜂起, 추수기의 농민 봉기)를 일으켰다가 크게 실패하고 정치국원의 자리에서도 쫓겨났다. 그러나 그 실패는 마오쩌둥에게 더없이 귀한 약이 되었다.
작전도 실패하고 당 중앙에서도 쫓겨난 참담한 신세로 마오쩌둥는 겨우 1000명가량의 잔여 병력만 이끌고 징강산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그 덕분에 본의 아니게 몇 개월의 휴식기를 가지게 되었는데, 이 시기의 정치 실험을 통해 그는 장차 중국의 지도자가 되는 데 필요한 경험을 얻게 된다.
마오쩌둥은 징강산에 장시(江西) 소비에트를 건설하고 사회주의적 토지 혁명을 실시했다. 모든 토지를 몰수한 다음 농민들의 가족 수에 따라 재분배하는 것이었는데, “능력에 따라 생산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한다.”라는 공산주의 원칙의 구현이었다. 그것도 적지 않은 성과였지만, 더 중요한 것은 중국 혁명의 주력군이 될 홍군(紅軍)을 창설했다는 점이다.
국부군과 달리 공산당의 군대는 농민이 주축이었다. 자발적으로 모인 병사들이었으므로 사기는 높았으나 정규적인 군사 훈련을 받지 못했고 군의 핵심이라 할 군기가 서 있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그들에게 군사 훈련을 실시하고 프롤레타리아 정신에 따른 엄격한 규율을 제정해 홍군이라는 정식 군대로 조련했다. “인민에게서 바늘 하나, 실 한 오라기도 얻지 않는다.”라는 홍군의 강고한 규율은 이때 정해진 것이다.
국민당의 극심한 탄압에 움츠러든 공산당은 근본적인 노선을 재정비해야 했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계급은 노동자다. 노동계급은 자본주의사회를 경제적으로 지탱하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상황은 달랐다. 중국은 전통적인 농업 국가였고 농민이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했다. 근대적 공업이 발달하면서 노동계급도 성장했지만 아직 농민에 비하면 힘에서나 세력에서나 미치지 못했다.
이론(마르크스주의)과 현실(중국적 상황)이 다른 만큼 공산당의 노선도 두 가지로 나뉘었다. 처음에는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아 공산당이 탄생했으므로 정통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중심이 있었으나 점차 중국의 현실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부터 농촌을 근거지로 삼아야 한다고 믿은 마오쩌둥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인 리리싼(李立三, 1896~1967)이 이끄는 당 지도부에 불만을 품었다. 그러던 차에 당 지도부가 붕괴하는 사태가 일어난다.
▲ 상하이의 장제스 부하들은 희색이 만면한 데 반해 장제스(가운데)는 그렇지 않은 표정이다. 하기야 중국의 대권을 꿈꾸는 그가 난징 정권의 수반 정도에 만족할 리 없다. 그는 특유의 뚝심으로 우한 정부를 박차고 나와 결국에는 우한 정부까지 휘하에 끌어들였다. 사진의 장제스는 국공합작 따위에 관심이 없는 듯한 표정이다.
1930년 공산당 지도부는 대도시를 거점으로 하는 도시 혁명론을 방침으로 정하고 홍군에게 창사(長沙)를 총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국부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데다 미국의 군수 지원을 받아 우수한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무모한 전투는 무참한 패배를 낳았다. 마오쩌둥도 이 작전에 참여했으나 대세가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지도부와 무관하게 독자적으로 휘하 군대를 후퇴시켰다.
이 사태로 리리싼(李立三)은 실각하고 당권은 소련 유학파의 손으로 넘어갔다. 현명한 판단으로 병력의 손실을 막은 마오쩌둥은 한껏 입지를
굳혔다. 1931년에 개최된 제1차 전국 공농병(工農兵) 대표대회에서 그는 공산당 주석의 자리에 올랐다. 당을 조직한 지 11년 만에 드디어 당권을 장악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비록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홍군이 대도시 총공격에 나설 정도로 성장한 데 위협을 느낀 장제스는 탄압을 넘어 본격적인 ‘토벌’로 방침을 변경했다. 그에 따라 1930년 말부터 1933년까지 4차에 걸쳐 대대적인 공산당 토벌이 전개되었다. 그런데 결과는 장제스의 의도와 정반대였다. 공격이 계속될수록 홍군은 약화되기는커녕 오히려 병력과 무기가 증가했다.
국부군은 정부의 군대인 데 반해 홍군은 인민의 군대였다. 무기에서만 뒤질 뿐 사기에서 크게 앞섰고 전략과 전술에서도 앞섰다. 홍군은 화력이 우세한 국부군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기습전으로 맞서는 한편 작은 승리를 거둘 때마다 적의 무기를 노획하고 투항자를 홍군에 받아들였다. 마오쩌둥의 유명한 유격전과 지구전 전술이 통하기 시작한 것이다.
적에게서 한 수 배운 장제스는 1933년 말의 5차 토벌 작전에서 마오쩌둥의 전술을 모방했다. 지구전이라면 우리가 적보다 못할 게 없잖은가? 그는 단숨에 홍군을 섬멸해버리겠다는 욕심을 버리고 한 지역을 점령할 때마다 경제를 봉쇄하는 조치를 내렸다. 수복 지구에서는 농민들에 대한 선무 공작과 더불어 ‘신생활운동’을 전개했다. 이 전술로 홍군을 고립시키고 유격전을 무력화시키는 데 큰 효험을 보았다. 홍군은 점점 세력권을 잃으면서 근거지인 장시 소비에트로 밀려났다. 급기야 1934년에는 이곳마저 국부군의 포위망에 갇혔다.
▲ 농촌을 지나는 대장정 1934년 근거지를 버리고 탈출할 때는 그것이 역사적인 대장정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1년에 걸친 혹독한 대장정은 홍군에게 두 가지 성과를 가져다주었다. 하나는 자칫하면 전멸할 뻔한 홍군의 주력이 살아남았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사진에서 보듯이 중국의 드넓은 농촌 지대를 지나면서 민중에게 홍군에 대한 신뢰감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겨울을 눈앞에 둔 그해 10월, 마오쩌둥은 중대한 결심을 한다. 근거지를 버리고 탈출하는 것이다. 홍군이 태어난 곳이자 7년이나 근거지로 삼았던 장시 소비에트를 포기하는 것은 살을 깎아내는 듯한 아픔이었으나 홍군의 주력을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방책이었다. 8만 6000여 명의 홍군은 비교적 느슨한 서쪽의 포위망을 뚫고, 역사에 대장정(大長征)이라고 기록된 기나긴 행군에 나섰다.
그로부터 꼭 1년 만인 1935년 산시의 새 근거지에 도착하기까지 홍군은 열여덟 개의 험준한 산맥과 열일곱 개의 큰 강을 건너며 약 1만 킬로미터를 행군했다. 게다가 국부군과 지방 군벌군의 집요한 추격을 뿌리치면서 행군해야 했다. 장정 도중에 새로 홍군에 편입되는 농민들도 적지 않았으나 끊임없는 전투와 가혹한 행군으로 사망한 병사들의 수가 훨씬 많았다. 장정을 마치고 난 뒤 홍군의 수는 거의 10분의 1로 줄어 있었다.
그러나 대장정이 가져온 승리감은 병력의 손실을 충당하고도 남았다. 온갖 역경을 헤치면서 홍군은 더욱 정예화되고 사기가 높아졌으며, 장정 중에 거쳐간 곳곳에서 혁명의 씨를 뿌렸다. 홍군 병사들과 고난을 함께하며 장정을 이끈 마오쩌둥은 소련 유학파를 물리치고 당권을 완전히 장악했다. 이후 마오쩌둥은 1975년에 사망할 때까지 어느 누구에게도 당권을 위협받지 않았다.
▲ 장정이 끝난 뒤 마오쩌둥(왼쪽)이 대장정 직후 외국 기자와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다. 홍군의 명장으로서 나중에 팔로군 총사령관이 된 주더와 마오쩌둥의 두 번째 아내 허즈전(賀子珍)도 함께 하고 있다.
안이 먼저냐, 바깥이 먼저냐
장제스가 공산당의 토벌에 여념이 없던 1931년 9월 18일에 만주에서는 한밤중의 정적을 뚫고 느닷없이 포성이 울렸다. 만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의 관동군이 남만주철도 폭파사건을 조작하고, 그것을 구실로 만주의 중국군을 기습한 것이다. 이 9ㆍ18사건이 바로 만주사변의 시작이다. 본국 정부의 승인도 없이 관동군이 독자적으로 시작한 전쟁이었으므로 선전포고 같은 절차도 없었다(사실 일본은 임진왜란壬辰倭亂부터 태평양전쟁에 이르기까지 숱한 침략 전쟁을 도발했으나 한 번도 선전포고를 한 적이 없다). 관동군은 단기전으로 만주를 점령해버릴 속셈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일본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서구 열강이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만주를 중점적으로 개발했다. 관동군은 일본이 건설한 남만주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1905년부터 만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1920년대에는 만주에 투자된 외국자본 중 70퍼센트 이상이 일본의 자본일 정도로 일본은 만주 경영에서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한창 뻗어가던 일본 경제는 1929년의 대공황으로 제동이 걸렸다. 미국과 유럽에 비하면 공황의 직접적인 피해는 적었지만, 일본은 이미 에너지를 포함해 경제의 상당 부분을 미국에 의존하는 처지였다. 게다가 여느 나라들처럼 번영과 안정을 꾀하는 게 아니라 중국 침략, 나아가 아시아 정복을 꿈꾸고 있었으므로 그 위기를 단지 극복하기보다 도약의 계기로 만들어야 했다. 일본의 정치를 장악한 군부는 군국주의다운 해법을 내놓았다. 만주를 경략하는 정도를 넘어 아예 점령하는 것만이 일본의 유일한 활로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만주사변은 그저 관동군의 독자적인 결정이었던 것만은 아니다.
▲ 허수아비 제국 1932년 만주를 손에 넣은 일본은 괴뢰정권 만주국을 세웠다. 만주를 즉각 영토화하기보다 잠시 허수아비 정권을 내세우는 게 정치적 부담이 적었을 것이다. 사진은 동원된 만주의 어린 소녀들이 만주국기와 일장기를 손에 들고 흔드는 장면이다.
당시 만주는 청년 군벌인 장쉐량(張學良, 1898~2001)이 지배하고 있었으나, 관동군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고 손쉽게 만주 전체를 장악했다. 이참에 만주를 완전한 일본 영토로 만들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겠지만, 서구 열강의 보는 눈이 많은 마당에 아직 그러기에는 일렀다. 그래서 일본은 그 이듬해인 1932년 청 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푸이를 불러 만주국이라는 괴뢰 국가를 만들었다.
물론 장쉐량이 관동군을 막아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텃밭에서 제대로 싸움 한 번 해보지도 못하고 적에게 그렇듯 쉽게 만주를 내줄 수 있는 걸까? 사실 여기에는 단지 군사력의 차이만이 아닌 정치적ㆍ정략적 의도가 있었다. 장쉐량은 장제스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의 근거지를 침략하는 관동군에 저항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럼 장제스는 왜 그런 지시를 내렸을까?
당시 장제스의 국민당에게 적은 공산당과 일본, 이렇게 둘이었다. 장제스는 ‘먼저 국내를 안정시킨 뒤 외세를 몰아낸다’는 것을 기본 노선으로 삼았던 것이다(일본보다 공산당이 자신의 권력 기반에 더 큰 위협 요소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자연히 그의 일차 목표는 공산당과 홍군이었다. 일본의 위협이 노골화되는 상황에서도 그는 오로지 ‘토벌’에만 전력투구했다. 자기 혼자만 그랬다면 그런가 보다 싶겠지만, 그는 휘하의 군벌인 만주의 장쉐량에게도 일본에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항일’에는 여력이 없었으므로 장제스는 일본의 만주 침략 문제를 국제연맹에 의뢰했다. 그러나 일본은 장제스보다 훨씬 과감한 행동으로 그의 기대를 여지없이 깨버린다. 만주에서 물러나라는 국제연맹의 권고를 받자 1933년에 아예 국제연맹을 탈퇴해버린 것이다. 나아가 일본은 국제 여론과 중국 국내 여론의 비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항일운동의 중심지인 상하이를 공격했다.
그래도 장제스는 초지일관 공산당만을 겨냥했다. 오로지 일본과의 전면전을 피하겠다는 생각에서 그는 일본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중국 민중의 항일운동까지 가혹하게 탄압했다. 대문 앞에 대적이 쳐들어왔는데도 방 안의 식구를 닦달하는 그의 태도를 보고 중국 민중의 마음은 결정적으로 공산당에 기울었다.
관동군이 베이징과 선양 사이의 러허 성까지 진격해오자 그제야 장제스는 황급히 대응에 나섰다. 그러나 그의 대응은 중국 민중이 고대하던 응전이 아니라 굴복이었다. 1933년 5월 31일, 그는 일본과 탕구(塘沽) 정전협정을 맺고 일본의 만주 점령을 사실상 양해했다. 심지어 협상 도중에 서북 군벌 펑위샹(馮玉祥, 1882~1948)의 군대가 러허를 수복하기 위해 관동군을 공격하려 하자, 장제스는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이유로 13개 사단을 보내 펑위샹을 제압했다.
사실상 중국의 단독 지배자인 장제스가 외세를 물리쳐야 한다는 민족적 열망을 뒤로한 채 자신의 권력욕을 앞세우는 것은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더없이 유리한 조건이었다. 19세기 말에 독일도 후발 제국주의인 탓에 중국 침탈에 특히 그악스럽게 굴었지만, 더 후발 제국주의인 일본은 독일보다 한술 더 떴다. 만주를 점령해 중국 침략의 기반을 닦은 뒤 일본은 더 멀리까지 손을 뻗쳐 1935년에는 화북에도 괴뢰정권을 세웠다.
국민당과 달리 공산당은 항일을 최우선으로 들고나왔다. 봉건 지주층의 지를 기반으로 하는 국민당과는 이념적으로도 다른 데다 피착취계급을 대변한다는 명분으로도 당연히 항일에 몰두해야 했지만, 국민당이 항일을 포기했으니 전략적으로도 항일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직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몰아치는 국민당의 집요한 공격을 견디기란 쉽지 않았다. 뭔가 전환점이 필요했다. 인력과 비용이 들지 않는 전환점은 바로 정치적 입장을 명확히 표방하는 것이었다. 대장정 중이던 1935년 8월 1일에 마오쩌둥은 내전을 중지하고 항일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자는 8ㆍ1선언을 발표했다.
때가 때인지라 이 선언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오랜 정쟁과 내전에 진저리가 난 중국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즉각 중국 전역에서 호응이 잇달았다. 민간단체들도 일제히 내전 중지와 항일 구국에 일로매진하자고 외쳤다. 이쯤 되자 국민당 지도부도 거국적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내전이 우선 과제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장제스 혼자만 남았다.
이런 분위기를 등에 업고 장제스의 병적인 의지를 꺾은 사람은 바로 장쉐량이었다. 그는 일본이 만주를 침략할 때 장제스의 지시로 저항하지 않았다가 졸지에 국내 여론의 거센 비난을 혼자 뒤 집어쓴 바 있었다. 심지어 그가 이끄는 동북군 내에서도 텃밭을 일본에 빼앗기고 시안까지 쫓겨난 데 대해 병사들의 불만이 컸다. 마침 동병상련의 친구도 있었다. 관동군에 맞서 싸우려 했다가 장제스에게 호되게 당한 서북 군벌의 펑위샹이다.
1936년 5월, 장쉐량은 펑위샹과 함께 공산군과 공동으로 항일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수상한 느낌을 감지한 장제스는 그해 12월 장쉐량에게 압력을 가하고 내전을 독려하기 위해 시안에 왔다. 부하가 반기를 들었는데도 그는 그 부하의 의지와 그 반기의 의미를 충분히 읽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게 적의 소굴로 찾아든 장제스, 마치 2200년 전 유방(劉邦)이 항우가 있던 홍문(鴻門)을 찾아간 사건을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장제스가 유방일 수 없고 장쉐량이 항우일 수도 없지만, 더 큰 차이는 그때 유방을 구한 번쾌가 없다는 점이다.
일단 장쉐량은 상관인 장제스에게 내전을 중지하고 함께 항일에 나서자고 탄원했다. 하지만 그럴 거라면 장제스는 시안에 오지도 않았다. 상관의 명령을 따를 것이냐, 대세를 좇을 것이냐 고민하던 장쉐량은 12월 12일 새벽에 장제스의 숙소를 덮쳐 장제스와 휘하 막료들을 체포해버렸다. 이 쿠데타를 시안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부하에게 체포된 하극상의 상황에서도 장제스는 완강했다. 장쉐량은 그렇다면 그를 죽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때 번쾌는 없었어도 번쾌의 역할을 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장제스를 살리는 게 장차 통일전선에 유리하리라는 판단에서 공산당이 파견한 저우언라이(周恩來, 1898~1976)와, 장제스가 남편이므로 당연히 살려야만 하는 그의 아내 쑹메이링(宋美齡, 1897~2003)이 바로 그들이다.
훌륭한 품성과 뛰어난 논리로 이름을 날린 저우언라이와 누구보다도 가까운 아내, 둘 중 누구의 설득이 더 주효했는지는 모르지만, 장제스는 마침내 장쉐량의 제안을 수락했다(그는 장쉐량이 자신을 죽이려는 각오까지 했다고는 생각하지 못한 탓에 고집을 부렸을 것이다). 이로써 국민당과 공산당은 결별한 지 9년 만에 2차 국공합작을 이루었다.
▲ 아버지의 원한으로 펑텐(선양) 군벌 장쉐량의 아버지인 장쭤린은 일본과 결탁했다가 일본의 만주 침략이 노골화되면서 결별했다. 그러자 1928년에 관동군은 그가 타고 가던 열차를 폭발시켜 살해했다. 이런 배경에서 아버지의 뒤를 이은 장쉐량이 일본에 어떤 감정을 가졌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근거지를 침략하는 일본군에 저항하지 말라는 장제스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다. 그러나 쌓인 울분은 몇 년 뒤 시안 사건에서 터져 나온다.
합작의 성과와 한계
1차 합작은 군벌이 신생 공화정을 위협하는 대내적 상황에서 이루어졌지만, 2차 합작은 바깥의 일본 제국주의에 공동으로 맞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이 달랐다. 공동의 적을 눈앞에 둔 만큼 1차 때와 달리 이번 합작은 일단 결정이 난 뒤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열세에 놓여 있다가 합작에 한껏 고무된 공산당은 토지개혁이나 계급투쟁 등 사회주의의 기본 이념에서 크게 양보하고, 필요하다면 홍군이라는 명칭도 바꾸겠다고 제안했다. 공산당의 전향적인 자세에 국민당도 기분 나쁠 리 없었다. 양당 간에는 자못 따뜻한 화해의 기류가 흘렀다. 행정 수반은 장제스가 맡았으며, 홍군은 국부군 내로 편입되었다.
곧이어 합작의 효과를 과시할 만한 사건이 터졌다. 1937년 7월 7일, 베이징 외곽의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일본군과 중국군의 충돌이 일어났다. 그날 밤 야간 훈련 중이던 일본군 병사 한 명이 실종되자 일본은 이것을 구실로 이튿날 군대를 출동시켜 루거우차오를 점령했다. 이 사건을 7ㆍ7사변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원래는 별다른 명칭이 붙을 필요도 없을 만큼 사소한 사건이었다.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지, 일본 측의 조작인지는 모호하지만, 이후의 사태를 보면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 사흘 뒤 양측은 간단한 협정을 맺고 사태를 확산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보고를 접한 일본 정부는 필요 이상으로 격분하면서 대규모 군대를 보내 응징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설령 그 사건이 우연한 사고였다 해도, 어떻게든 전쟁의 꼬투리를 찾기 위해 혈안이던 당시 일본 정부로서는 좋은 구실이었다.
합작으로 무장한 중국도 이번에는 단호한 자세를 취했다. 양측의 조건이 맞아떨어져 루거우차오 사건은 일약 중일전쟁이라는 전면전으로 비화되었다(1945년까지 8년간 지속되었기에 중국 역사에는 8년 전쟁이라고도 기록된다). 16세기의 임진왜란(壬辰倭亂), 19세기의 청일전쟁에 이어 일본은 또다시 중국과 3차전을 벌이게 되었다. 임진왜란에서는 중국이 이겼고 청일전쟁에서는 일본이 이겼으니 이제 최종 결정전인 셈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렇게 큰 규모의 전쟁이 될 줄은 일본도, 중국도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임진왜란이나 청일전쟁 때와 달리 일본은 처음부터 자신만만했다. 만주사변 이후 6년 간 소규모 국지전으로 시험해본 결과 중국의 실력은 백일하에 드러났다. 문제는 전쟁이 몇 개월이나 갈 것이냐에 있다. 이게 당시 일본군의 생각이었다. 당시 유럽 세계는 에스파냐 내전과 파시즘의 성장으로 온통 뒤숭숭했으므로 일본은 세계 여론의 주목을 받지 않기 위해 가급적 단기전으로 끝내고자 했고, 또 그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3개월이면 화북 전체를 점령할 수 있을 테고, 그러면 난징의 국민당 정부도 항복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여겼다.
▲ 전쟁을 낳은 다리 루거우차오는 원 대에 마르코 폴로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감탄한 이래 마르코 폴로교라고도 불려왔다. 만주사변 이후 중국 침략에 별다른 진척을 보이지 못하던 일본은 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삼아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일본의 낙관은 국공합작에 대한 과소평가였다. 우선 장제스가 예전과 달리 강력한 대일 항전을 선언하고 나섰다. 게다가 규모와 화력에서 압도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늘 국부군과 대등한 전투를 벌인 홍군이 항전에 동참했다. 화북의 홍군은 팔로군(八路軍)으로, 화남과 화중의 홍군은 신사군(新四軍)으로 편성되었다. 홍군을 이끌던 주더(朱德, 1886~1976), 펑더화이(彭德懷, 1898~1974), 린뱌오(林彪, 1907~1971) 등 유격전의 명수들은 비로소 ‘진정한 적’을 맞아 벼르고 있었다.
베이징과 톈진을 함락시킬 때까지는 그런대로 일본의 일정에 들어맞았다. 그러나 일본군은 산둥과 산시에서 팔로군의 거센 공격을 받았고, 상하이에서는 장제스가 이끄는 정예 부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이미 예정된 3개월‘을 넘어섰고, 일본 측의 희생도 예상외로 엄청났다. 전쟁 개시 5개월 만에 간신히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그 분풀이로 30만 명의 양민을 학살하는, 인류 역사상 유례없이 잔인한 난징 대학살을 일으켰다.
단기전의 구상은 실패했지만 일본은 역시 강했다. 난징을 점령하자 황해에 면한 중국의 요지는 모조리 일본의 수중에 떨어졌다【초기 전황은 100년 전 아편전쟁에서 영국이 순식간에 중국의 동해안 일대를 제압한 것과 비슷했다. 그렇게 보면 중국은 100년 동안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한 셈이다. 그러나 100년 전과의 차이는 적의 자세였다. 아편전쟁에서 영국은 중국을 영토적으로 점령하거나 정치적으로 지배하려는 게 아니라 단지 경제적 이권만 뜯어내려 했을 뿐이다. 그 반면 중일전쟁에서 일본은 대륙 전체를 한반도처럼 식민지화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초기에 압도적인 우세를 보인 것은 똑같지만 이후의 사태는 크게 달랐다】. 국민당 정부는 수도를 서쪽의 우한으로 옮겼다가 우한이 점령당하자 다시 오지인 충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렇게 후퇴를 계속하면서도 항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일본은 광저우마저 점령해 중국의 해안 전체를 장악했다. 이때부터 국민당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군수품을 보급받기 시작했는데, 항구라는 항구는 모조리 일본에 점령당한 탓에 보급품을 미얀마와 윈난을 거쳐 육로로 운송해야 했다(당시 미국은 일본에도 석유와 철, 기계 부속 등 군수물자를 대량 수출하고 있었으니 중국만 도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단기전의 문제점은 바로 이 시기부터 드러나기 시작했다. 전선이 너무 넓어져버린 것이다. 일본군의 병력으로 베이징에서 광저우까지 남북으로 무려 2000킬로미터에 달하는 중국의 동해안 일대를 완벽하게 통제하기란 불가능했다. 그 반면 중국은 내륙으로 몰린 덕분에 근거지만을 집중 방어할 수 있었으므로, 일본군은 내륙 방면으로 더 이상 진격하기도 어려웠다. 더구나 단기전을 계획한 일본군은 처음부터 도시와 철도, 도로, 통신선을 중심으로 정복했기 때문에 중국 서부의 산악 지대로 갈수록 기동성이 현저하게 떨어졌다. 중국은 전면전을 피하고 홍군의 특기인 초토화 작전과 치고 빠지는 유격전으로 맞섰다.
42.195킬로미터를 뛰는 마라톤에서도 35킬로미터 지점이 가장 어렵다고 했던가? 일본군은 2000킬로미터 이상을 숨 가쁘게 달려 왔지만, 우한에서 충칭까지 600킬로미터를 앞두고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여기서 전선은 교착되었다. 1938년 말부터 1941년 말까지 3년간 전쟁은 전형적인 지구전과 소모전의 양상이었다.
▲ 제국주의의 학살극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패잔병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수많은 양민을 학살했다. 사진은 당시 양쯔 강 연안에 쌓인 중국인들의 시신이다. 공식적으로는 12만 9000명이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었으나 실제로는 30여만 명이 죽었다.
원하던 형세는 아니었지만 일본도 이제는 장기전의 태세를 취해야 했다. 한 가지 방법은 만주를 점령할 때 써먹은 수법이었다. 일본은 베이징과 몽골, 상하이, 난징 등 주요 점령지마다 괴뢰정권을 세웠다. 특히 난징 정부는 매우 깔끔하게 구성되었다. 일찍이 국민당 좌파의 중심인물로 장제스와 맞수였던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해 일본의 품에 안긴 것이다. 정치 지도자에서 좌파의 변절자로, 또 민족의 매국노로 변신한 왕징웨이는 1940년 3월에 일본이 모든 괴뢰정부를 난징 정부로 통합하자 통합 괴뢰정부의 수반, ‘허수아비의 왕’이 되었다【마침 3개월 뒤인 1940년 6월 독일은 일본의 전례를 커닝이라도 한 것처럼 프랑스를 점령하고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비시 괴뢰정권을 구성했다. 공교롭게도 왕징웨이가 과거에 국민당의 핵심 지도자였듯이 페탱도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의 영웅이었다. 왕징웨이는 지병으로 일본에 건너가 치료를 받다가 1944년에 죽었고, 페탱은 독일로 도피했다가 종전 직후 재판에서 종신형을 받고 대서양의 요새에 갇혀 쓸쓸하게 여생을 보내다 1951년 아흔다섯 살로 죽었다】.
지구전이 계속되자 중국 측에도 문제가 생겼다. 1938년까지 2년 동안, 일본군에 전반적으로는 밀리는 가운데서도 합작은 완벽했다. 장제스는 충칭 정부 내에 공산당원들을 받아들였고, 공산당 기관지의 발간까지도 허용했다. 전선에서 홍군은 눈부신 활약을 보였다. 이렇게 공동의 적이 압박할 때는 통일전선이 제대로 통했으나 전선이 교착되자 사정이 달라졌다. 다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갈등이 시작된 것이다.
장제스는 비록 상황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합작하게 되었지만, 공산당의 근절이 먼저라는 신념은 결코 굽히지 않았다. 1939년부터 그는 공산당의 활동을 감시하기 시작했고, 한동안 중단한 사상 통제도 재개했다. 합작의 정신에 등을 돌리기는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당 간부들에게 근거지 확대에 70퍼센트의 노력을 기울이고, 국민당을 대하는 데 20퍼센트, 대일 항전에는 10퍼센트만 할애하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전쟁 초기와 달리 일본군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고 유격전으로 질질 끌면서 후방에 변구(邊區, 해방구)를 건설하는 데 집중했다.
전선의 교착이 길어지면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불화의 골은 깊어져만 갔다. 급기야 양측은 무력 다짐까지 벌이기에 이르렀다. 먼저 배신한 것은 장제스였다. 1941년 10월에 그는 황하 이남에 있던 홍군에게 황허 이북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홍군은 마지못해 따랐는데, 그것은 장제스의 교활한 계략이었다. 그는 8만 명의 군대를 동원해 홍군을 습격했다. 7일간의 전투 끝에 7000명의 신사군이 궤멸을 당했다. 이 완난(皖南)사변으로 2차 국공 합작은 사실상 결렬되었다.
이렇게 적정이 내분되어 있을 때 만약 일본군이 총공세에 나섰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러나 당시 일본도 그럴 처지가 못 되었다. 중국을 점령하는 게 여의치 않자 일본은 1940년 9월에 유럽의 독일, 이탈리아와 3국 군사동맹을 맺었다. 초록은 동색이라고, 파시즘 국가들이 한데 뭉친 것은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겠지만, 그간 일본이 에너지를 의존했던 미국이 석유 수출을 중단해버렸다. 일본은 노선을 전면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일본은 중국에서 기수를 돌려 동남아시아를 먼저 정복하기로 했다. 여기서 등장한 게 이른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라는 구호다. 아시아가 함께 번영하자는 뜻이니 구호 자체로만 보면 지지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모든 아시아 국가를 일본이 지배하겠다는 의도를 ‘공영’이라는 문구로 미화한 것뿐이었다. 나아가 일본은 그 노선에 걸림돌이 되는 미국에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결심했다. 1941년 12월, 일본 공군이 진주만을 기습하면서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바야흐로 아시아에서도 세계대전이 시작된 것이다.
▲ 장제스식 외교 종전이 가까워지자 장제스는 ‘전쟁 이후’를 위해 서방과의 눈치 외교에 주력했다. 1945년 2월 처칠과 루스벨트, 스탈린(왼쪽부터)이 참가한 얄타 회담에서 스탈린은 독일이 항복하면 소련이 극동 전선에 참전하겠다고 약속했다. 연합국 측은 이 정보를 장제스에게 알리지 않으려 했으나 장제스는 이를 눈치 채고 처남을 모스크바에 보내 스탈린으로부터 장차 자신을 중국의 지도자로 승인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인 그에게 스탈린과의 접촉은 지금 보아도 파격이다. 항일보다 반공이 먼저인 장제스였으나 반공과 권력 중에서는 권력을 택한 것이다.
사회주의 공화국의 탄생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일본과 싸우는 중국은 자연히 연합국의 반파시즘 국제 통일전선의 일부가 되었고, 중일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일부가 되었다. 그 덕분에 중국은 미국과 영국, 소련 등 연합국 측의 직접적인 군사 원조를 받기 시작했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 혼자만의 힘으로 강대국 일본을 맞아 선전한 중국은 비로소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항일 전쟁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미국의 주선으로 중국이 연합국 4대 강국에 포함되어 장제스는 1943년 12월의 카이로 선언에서 루스벨트, 처칠과 자리를 함께하는 영광을 누렸다.
전황은 크게 호전되었어도 한 번 금이 간 국민당과 공산당의 관계는 전혀 회복되지 않았다. 회복은커녕 제2차 세계대전이 종전을 향해 달려갈수록 ‘전쟁 이후’를 염두에 둔 양측의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1944년에는 양측의 험악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미국에서 특사를 파견해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만남을 주선했으나 그것도 별무신통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길고 긴 전쟁이 끝났다. 중일전쟁으로 치면 8년, 세계대전으로 치면 6년, 태평양전쟁으로 치면 4년이었다. 승전국은 원하는 평화, 패전국은 원치 않는 평화를 얻었지만, 중국 대륙에서는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종전이 이루어지자 양측의 갈등과 경쟁은 순식간에 수면 위로 떠올랐다.
처음에는 신경전이었다. 홍군의 지휘관 주더가 홍군을 동원해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려 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그다음 날 주더에게 그 조치를 취소하라면서, 일본군 측에 국부군에게만 투항하라고 명했다. 그 조치에 반발해 주더는 일본군에게 홍군에게만 투항하라고 명했다.
마침 홍군에게 유리한 조건이 있었다. 종전 일주일 전에 참전을 선언하고 전쟁이 끝나자마자 만주로 들어온 소련군이 일본군에게서 압수한 무기와 장비를 홍군에게 넘겨준 것이었다. 소련 덕분에 만주를 선점한 공산당은 각지에서 국민당에 앞서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내는 활발한 기동력을 보였다. 그러나 장제스가 믿는 도끼는 따로 있었다.
이미 전쟁 중에도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전쟁 이후’를 준비하는 방식은 서로 판이하게 달랐다. 마오쩌둥은 곳곳에 해방구를 건설하면서 후방의 농촌 지역을 장악하는 데 주력한 반면, 장제스는 휘하의 군 조직을 철저히 유지하면서 서구 열강과의 외교에 주력했다. 그 결과 장제스는 종전 후 연합국 측의 중추로 떠오른 미국으로부터 국민당 정부를 지원한다는 확고한 약속을 얻어냈다. 병력으로나 외교로나 마오쩌둥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에 있던 장제스는 종전 즉시 미루어둔 내전을 재개한다는 방침이었으며, 이 내전에서 손쉽게 승리할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 홍군의 활약 국공합작으로 홍군은 신사군과 팔로군으로 편성되어 항일전에 참여했다. 이 사진은 팔로군 기병대의 모습이다. 합작의 성과는 금세 드러났다. 유격전에 능한 홍군은 곳곳에서 화력이 우세한 일본군을 괴롭히는 전과를 올렸다.
1945년 12월, 미국의 주선으로 장제스와 마오쩌둥의 회담이 이루어졌고, 이듬해 1월에는 양당 간에 정전협상이 체결되었다. 일견 평화가 깃들듯 보였다. 그러나 장제스는 오로지 단독 정권만 염두에 두었을 뿐 협상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먼저 배신한 측은 당연히 장제스였다. 1946년 3월에 열린 국민당 중전회(中全會)에서 장제스는 협정을 팽개치고 반공을 가결해버렸다【타고난 반공주의자라는 점에서 장제스는 한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과 비슷하다. 같은 세대의 두 사람은 완고한 성품도 비슷하고 지독한 권력욕도 닮았다. 이승만은 중국의 정황과 비슷한 해방 직후의 한반도에서 민족 지도자 김구는 물론 미군정까지도 권하는 좌우 합작을 줄기차게 거부하고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해 결국 뜻을 관철시켰다(단독정부가 아니었다면 과연 그가 초대 대통령이 될 수 있었을까?) 장제스와 이승만은 자신의 집권을 위해 조국의 분단마저도 마다하지 않은 권력의 화신이었다. 그뿐 아니라 분단 이후 집권하고 나서 독재로 일관한 것마저도 아주 잘 어울리는 동류다. 다만 장제스의 대만보다 이승만의 남한이 더 크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승만이 좀 더 성공했다고 할까?】.
하지만 공산당은 장제스의 계획과 상관없이, 또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갔다. 각지에서 농민들을 사회주의 이념으로 이끌고,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해 농민들에게 분배하는 토지 혁명을 활발히 전개했다. 국민당의 지지층인 지주들은 당연히 아우성을 질렀다.
바야흐로 내전은 출발 신호만 기다리고 있는 셈이었다. 도발은 역시 장제스가 먼저였다. 1946년 6월에 그는 공산당의 근거지인 해방구들을 향해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일본이 물러갔으므로 이제는 앞뒤 잴 것 없이 무조건 전면전이다. 당시 국부군은 총 병력 430만 명에 미국의 군수물자와 미군의 지원까지 등에 업었으니, 120만 명의 병력에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구식 무기로 무장한 홍군과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초반에는 예상대로 국민당의 압승지세(壓勝之勢)였다. 국부군은 상하이와 난징 등 강남부터 착실하게 땅따먹기를 시작하더니 1947년 3월에는 마침내 홍군의 수도라 할 산시의 옌안까지 손에 넣었다.
옌안은 12년 전 대장정의 최종 기착지이자 새 근거지였으니 그곳을 잃은 홍군의 심정이 어땠을까? 하지만 그것은 홍군의 전략이었다. 모든 면에서 열세인 홍군은 처음부터 전략적 후퇴를 거듭했다. 전면전을 피하고 유격전으로 임했을 뿐 아니라 도시를 포기하고 농촌을 확보했다. 국부군은 전투마다 승리했으나,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이 그랬듯이 도시와 교통로만 점령하고 병참선이 늘어지면서 병력이 분산되었다. 게다가 점령지마다 장제스 특유의 독재와 억압으로 일관하는 바람에 지역 민중의 지지를 전혀 얻지 못했다. 그 반면 홍군은 점령지마다 농민들을 고무하고 입대시켜 오히려 패배할수록 병력이 증가했다.
▲ 연안에 온 특사 큰 전쟁이 끝났는데도 중국에서 내전이 재개될 조짐이 보이자 1946년 1월 미국 트루먼 대통령의 특사 조지 마셜이 흥군 근거지인 옌안까지 찾아왔다. 그러나 장제스는 미국이 추선한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내전에 돌입했다. 사진은 왼쪽부터 저우언라이, 마셜, 주더, 그리고 한 사람 건너뛰어 마오쩌둥이다.
전환점의 신호탄으로 마오쩌둥은 옌안이 적의 수중에 들어간 시기에 홍군을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이라는 명칭으로 바꾸었다. 그 명칭에 걸맞게 국면은 거짓말처럼 급변했다. 인민해방군은 밀릴 때까지 밀린 다음 소도시부터 하나씩 수복하기 시작했다. 국부군이 장악한 대도시는 자연히 고립 상태에 빠졌다.
1947년 말에 마오쩌둥은 비로소 자신감을 보이며 내전이 전환 국면을 맞이했다고 선언했다. 과연 이듬해인 1948년 초부터 인민해방군은 대대적인 공세로 전환했다. 병력은 이미 비등해졌고, 전투의 주도권은 인민해방군으로 넘어왔다. 그 해 말에는 린뱌오의 부대가 만주 전체를 수중에 넣었다. 이어 한 달 만에 화북을 장악하고, 쉬저우에서 벌어진 내전 사상 최대 규모의 전투인 회해(淮海) 작전에서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의 부대가 한 달간의 혈전 끝에 국부군의 정예 부대를 격파했다.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국부군은 이후 지리멸렬에 빠졌고, 인민해방군은 드디어 이듬해 1월 베이징을 점령했다.
그제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장제스는 서구 열강에 도움을 청하는 한편 공산당에 평화 교섭을 제의했다. 그러나 열강과 공산당 양측에서는 서로 약속이라도 한 듯 아무런 회신도 보내지 않았다. 그것은 곧 대세가 정해졌다는 뜻이었다. 장제스는 결국 총통에서 하야하고 이종인(李宗仁)에게 총통 대리를 맡긴 뒤 대만 철수를 준비했다.
1949년 4월, 인민해방군은 양쯔 강을 넘어 별다른 전투 한 번 없이 남하하면서 난징과 항저우, 상하이, 우한, 광저우 등지를 차례로 점령했다. 8월 1일, 장제스는 대만으로 도망갔고, 9월에 인민해방군은 중국 본토를 모조리 손에 넣었다. 그리고 1949년 10월 1일, 수도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식으로 수립되었다. 2000년이 넘는 제국의 역사는 20세기 초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붕괴했지만, ‘새로운 중국’이 탄생하기까지는 그 뒤로도 40년의 진통이 더 필요했다.
▲ 역사상 최초의 공화국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선언했다. 청이 멸망한 이후 40년 가까이 분열되었던 중국 대륙이 다시 통일되었고, 중국의 오랜 왕조사가 끝났다. 크게 보면 한족과 이민족이 번갈아 지배했던 역사도 끝나고, 이제야 비로소 완전한 통합이 이루어졌다.
중국식 사회주의의 문제
중국공산당은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을 취한 정당이다. 1920년 전국대표회의에서 공산당을 창립한 코민테른 대표 보이틴스키(Grigori Voirinsky)와 중국의 지식인 리다자오(李大釗), 천두슈(陳獨秀)는 모두 마르크스주의자였다. 그들에 비해 이론적인 깊이는 부족했지만, 그들과 창당을 함께한 마오쩌둥도 마르크스주의자였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처음부터 그들과 달랐다.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한 마르크스는 원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난다고 믿었다.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면 낡은 체제가 되어 자동으로 붕괴한다. 그 과정에서 사회 발전의 다음 단계인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떠한 사회 질서도 그 내부에서 발전할 여지가 있는 모든 생산력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또한 그 물질적 존재 조건이 낡은 사회 자체의 태내에서 충분히 성숙하기 전까지는 새롭고 고도한 생산관계가 결코 나타나지 않는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혁명을 주도하는 세력은 노동계급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를 대량으로 배출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거쳐야만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사회주의를 위해서는 경제적 생산력이 어느 정도의 수준에 올라 있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도 자본주의 단계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선진 자본주의는커녕 자본주의 단계에 접어들지도 않은 국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일어났다. 1917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러시아는 정치적으로 제정이었고, 경제적으로는 봉건 체제였다. 그런 상태에서 레닌의 볼셰비키 당은 정치적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말한 것처럼 경제적 조건에 따라 자연스럽게 일어난 혁명이 아니라 인위적인 혁명이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상당히 벗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어쨌든 그 혁명은 성공했고, 노동자와 병사가 소비에트를 이루어 권력을 장악했다. 그런데 중국은 혁명에 성공한 것만 같을 뿐 모든 조건이 러시아보다 더 나빴다. 러시아만 해도 자본주의 단계에 들어서지는 못했어도 엄연한 제국주의 강국이었다. 하지만 중국은 20세기 초까지 정치적으로 러시아보다 더 후진적인 제정이었고(그래도 제정러시아에는 초보적인 의회에 해당하는 젬스트보가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러시아보다 뒤졌다(중국의 노동계급은 수에서나 계급의식에서나 제정러시아의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소련도 ‘정상적인’ 사회주의국가로 볼 수 없다면 중국은 더할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과연 사회주의혁명과 사회주의국가가 가능할까? 그래서 1949년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 출범한 중화인민 공화국은 여러 가지 이론적ㆍ현실적 문제를 안고 있었다.
마오쩌둥은 분명히 사회주의자였지만 그가 구상한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달랐다. 우선 중국은 노동자보다 농민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 점에 주목한 마오쩌둥은 기존의 사회주의 이론을 수정해, 노동자가 아니라 농민이 사회주의혁명을 주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농민의 지지를 얻어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고, 인민해방군도 거의 농민으로 구성되었다.
사실 노동자와 농민의 차이는 크지 않다. 피착취계급이라는 점에서 처지가 같고, 따라서 해방을 지향하는 계급의식도 별로 다를 바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단계를 생략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는 사회주의혁명을 이루기 전에 이미 해결되었어야 하는 문제들이 사회주의국가를 수립한 뒤에 과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주의 중국에서 경제와 정치의 두 측면으로 나타났다.
나라는 새로워졌으나 오랜 전란으로 중국의 경제는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토지개혁이었다. 20세기 중반까지 반세기 가까이 중앙 정부가 없었다가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주의 체제가 들어섰다. 게다가 농민에 기반을 둔 공화국이었다. 그런 만큼 토지개혁은 새 정부의 가장 절실한 과제였다.
공산당 정부는 매년 수십만 명을 각지의 농촌으로 파견해 당의 정책을 농민들에게 설명하고 지역 실정에 맞게 토지개혁을 시행했다. 농민에 대한 착취를 일삼은 부농과 봉건지주는 재판으로 다스리고, 그들의 토지를 몰수해 경작자인 농민에게 재분배했다. 토지와 더불어 농구, 가축, 가옥까지 재분배했으니 가히 중국 역사 상 최대 규모의 개혁이었다. 개혁의 성과는 금세 나타났다. 1952년까지 2년여의 기간 동안 중농 20퍼센트, 빈농 70퍼센트였던 토지 점유율은 정반대로 비례가 역전되었다. 아직 생산성은 무척 낮았으나 수천 년간 봉건적 지배층이 토지를 소유하고 농민을 착취하던 구조가 타파된 것은 장차 농업 생산력에서도 큰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농업정책은 중국 사회의 해묵은 모순을 해소하는 취지가 강했고, 진짜 중요한 것은 공업 분야의 개혁이었다. 자본주의 단계를 생략한 문제점은 여기서 드러난다. 자본주의사회가 경제적 생산력을 증대시킬 수 있는 이유는 사적 이윤의 추구를 제도적으로 허용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영리를 추구하는 기업 활동이 경제성장에 필수적이다. 그런데 사회주의 사회에는 사적 기업이 없는 것이다.
물론 중국에 기업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근대 이후 생겨난 기업들은 대부분 서구 열강이 중국을 수탈하기 위해 설립했거나 군벌이나 고위 관료 등 전통의 세력 가문들이 소유하고 있었다. 공산당 정부는 이런 기업들을 몰수해 국영기업으로 바꾸고 제국주의 자본과 관료 자본을 국유화했다. 그렇다면 사적 기업이 없는데 어떻게 생산력을 증대시킬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거대한 국영 ‘기업’을 출범시켰다. 그것이 바로 1958년에 설립한 인민공사(人民公社)다. 인민공사는 원래 각지에 세워진 집단농장들을 통합하면서 생겨났으므로 농업 기반의 조직이었으나 얼마 가지 않아 생산 부문 전체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최소 생산 단위인 생산대는 상부 조직인 생산대대가 관리하고, 이 생산대대들이 인민공사로 통합되었다.
인민공사는 사회주의국가가 운영하는 조직인 만큼 착취를 위한 기관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윤 추구를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자본주의 기업이나 다름없었다.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하지만, 사회주의 중국에서는 인민공사가 인민을 착취한 것이다. 국가의 경제력 전체는 커졌어도 ‘착취’이기 때문에 그 혜택은 인민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착취의 근절이 사회주의의 경제적 목표라면 중국식 사회주의는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 오히려 신속하게 서구 열강을 따라잡기 위해 국가의 주도로 무리한 계획경제를 추진한 탓에 중국 인민들의 고통은 더욱 가중되었다【이 문제는 소련식 사회주의도 마찬가지다. 1917년 혁명으로 집권한 볼셰비키는 사회주의 신생국 소련의 경제를 일거에 성장시키기 위해 신경제정책을 도입했다. 처음에는 경공업과 소매업 같은 소규모 생산 분야에서 사적 소유와 경영이 허용되었으나 이내 농장의 사유, 이윤 추구도 장려되어 사실상 자본주의를 부분적으로 도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덕분에 1920년대에 소련은 잠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었지만, 1930년대부터는 다시 철저한 계획경제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이후 소련은 내내 경제적 약점에 시달렸다. 20세기 소련이 해체된 것은 근본적으로 경제의 실패가 원인이다】.
▲ 대약진 운동 중국 공산당 지도부는 1958년 비약적인 생산력 향상을 위해 대약진 운동을 제창했다. 이런 생산 증대 운동과 더불어 중소 규모의 집단농장을 대구도 인민공사로 개편하는 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였다. 위 포스터에는 “비약적인 성장을 이어가자[继续大跃进]”라고 씌어 있다.
이것이 자본주의 단계를 생략한 데 따르는 경제적 문제라면, 정치적 문제는 제왕적 사회주의다.
서구에서 자본주의는 의회민주주의 정치제도와 쌍둥이처럼 함께 생겨나 함께 발달했다. 자본주의는 의회민주주의의 경제적 표현이고, 의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정치적 표현이다. 그러나 중국은 제국 시대를 끝내고 수십 년간의 분열기를 겪은 뒤 곧바로 사회주의로 이행했기 때문에 의회민주주의가 성립할 토양이 없었다.
그 결과 중국은 명색이 사회주의 ‘공화국’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예전의 제국들처럼 1인 집권 체제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말하자면 ‘사회주의 황제’인 셈인데, 지위가 세습되지만 않았을 뿐 절대 권력에다 임기가 정해지지 않은 종신 권력인 것은 옛날의 천자와 다를 바 없었다(북한처럼 권력 세습까지 이루어지는 변종 사회주의도 있다).
공화국의 건국자인 마오쩌둥이 송을 건국한 조광윤이나 명을 건국한 주원장(朱元璋) 같은 초대 황제라면, 그의 사후 화궈펑(華國鋒), 덩샤오핑(鄧小平), 장쩌민(江澤民) 등으로 이어지는 권력자들의 계보는 그대로 황실의 계보나 마찬가지다【이 점 역시 소련도 겪은 문제다. 혁명 이후 레닌-스탈린흐루쇼프-브레즈네프로 일인자 계보가 이어지는 소련의 권력 구조는 옛 러시아 제국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소련과 중국에 비해 마이너에 속하는 사회주의국가들도 비슷한 현상을 보인다. 루마니아의 게오르기우데지는 1952년부터 죽을 때까지 집권했고, 그의 뒤를 이어 1965년부터 집권한 차우셰스쿠는 1989년 공산당이 무너질 때까지 권좌에 있었다. 쿠바의 카스트로는 사회주의혁명을 성공시킨 1959년부터 지금까지 무려 50년 동안이나 쿠바의 독보적인 일인자로 남아 있다. 이런 권력 구조는 명백히 과거 제국 체제로의 퇴행이다】. 헌법상 최고 권력기관은 2000~3000명의 인민 대표로 구성되는 전국인민대표회의(전인대)가 있지만, 이것은 1년에 한 번 소집되는 데다 실제로는 공산당의 최고 지도자가 결정권을 장악하고 있다. 형식적으로 전인대는 최고 지도자를 선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나 대부분 이미 정해진 인물이 선출된다. 게다가 전인대는 의회민주주의의 용어로 말하면 입법부와 행정부를 겸하므로 의회민주주의의 기초인 삼권분립의 원칙에서도 벗어난다.
중국은 공화국이라는 명칭을 취했으나 공화정과 의회민주주의는 중국에서 자생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중국은 수천 년의 역사에 걸쳐 천자 한 명이 천하를 지배하는 방식에 익숙했다. 중국의 지배층만이 아니라 피지배층인 인민들도 그랬다.
경제와 정치에서 드러난 현재 중국 사회의 이중성은 장차 중국의 미래를 두 가지로 예상케 한다. 하나는 서구에서 탄생하고 발달한 의회민주주의 - 자본주의자본주의 체제를 완벽하게 소화하는 길이다. 중국 공산당과 사회주의는 이미 그런 조짐을 보이고 있다. 중국의 공산당은 서구의 정당이라기보다 사실상 의회와 같은 기능을 하며【냉전시대의 반공 이데올로기에 젖은 사람들은 사회주의국가를 일당독재라고 여기지만, 사실 공산당을 서구식 공화정의 용어로 비유하면 ‘정당’이라기보다 ‘의회’에 가깝다. 그러므로 일당독재를 비판하려면 먼저 미국의 의사당 캐피털(Capitol)이 왜 워싱턴 한 곳에만 있느냐고 비판해야 한다】, 사회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에 걸맞지 않게 주식시장이 존재한다. 또 다른 가능성은 중국에 수천 년의 역사적 전통이 반영된 새로운 체제가 등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 어떤 형태가 되리라고 예상할 수도 없고 예상 자체가 무의미하다.
앞의 길이라면 ‘글로벌’로 향하는 인류 역사의 기본 흐름에 중국도 완전히 편입될 것이다. 또한 뒤의 길이라면 중국은 강력한 ‘로컬’을 이루어 글로벌의 흐름에 맞서 세계사의 새로운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의 미래가 어느 길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바로 중국 국민이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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