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산골임을 시인이 묘사하는 방식
東峯雲霧掩朝暉 | 동쪽 봉우리에 구름 끼고 이슬 내려 아침 해를 가려서 |
深樹棲禽晩不飛 | 깊은 숲속에 자던 새 늦도록 날질 않네. |
古屋苔生門獨閉 | 옛집 이끼 껴 문 홀로 닫혀 있어, |
滿庭淸露濕薔薇 | 온 뜰에 맑은 이슬이 장미를 적셨다네. |
『소화시평』 권상 106번에 처음으로 소개된 최경창의 「제낙봉인가(題駱峯人家)」라는 시는 전형적인 당풍(唐風)의 시다. 시를 해석한 것만으로도 그 상황이 그려지기 때문이다. 앞에서 봤던 지천 황정욱의 시와 시적 미감이 확연히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이 시 한편을 통해 여기서 말하는 인가가 얼마나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여실히 알 수 있다. 시인은 한 번도 집이 ‘깊숙한 곳에 있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구름과 이슬이 해를 가린 상황, 그래서 새마저도 늦잠을 자는 상황에 대해 묘사한 후에, 이끼 낀 집 문, 그리고 그 안 정원에 핀 장미를 적신 이슬만을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정황만을 묘사하고 있는데 우리는 머릿속으로 ‘이곳은 정말 으쓱하고 깊은 곳에 있구나’라는 정감을 갖게 되니 이게 바로 시인의 자질이라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우회적으로 말했지만 선명하게 그 느낌이 전달되며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오히려 분명하게 드러나는 상황 말이다.
여기서 새는 집이 산속 깊은 곳에 있다는 걸 알려주는 메타포로 활용되고 있다. 당시(唐詩)를 읽다보면 새를 통해 정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을 많이 접하게 된다. 그 중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작품이 고경명의 「어주도(漁舟圖)」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똑같이 4구에 ‘자던 새’가 등장한다. 하지만 위의 시와는 달리 여기선 자던 새가 일어나 물가 안개 속으로 날아가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 새는 자다가 갑자기 왜 날아갔던 것일까? 물론 실제적으론 새가 날아가는 것은 시인의 상상일 뿐 어떤 이유 때문에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늘 날아오고 날아가는 새는 사람이 생각하는 인과(因果)와는 상관없이 활동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은 상상력을 펼친다. 바로 3구에 ‘몇 가락 젓대소리, 강 위에 달이 환해지자[橫笛數聲江月白]’라고 읊고 있기 때문이다. 즉, 새는 젓대소리와 환해지는 달빛에 잠을 깬 것이다. 그리고 여기엔 기막히게도 눈까지 내린 상황이다. 눈 내린 땅에 해까지 비치니 너무나 눈부셔 잠이 깰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시인은 상상한 것이고, 그 때문에 자던 새는 ‘어이쿠 밤인 줄 알았는데 대낮처럼 환하기만 하니 착각한 건가’라는 생각을 하며 일어났다고 본 것이다. 시인이 상상력이 참 재밌기만 하다.
이처럼 두 시를 통해 볼 수 있는 새라는 메타포를 활용하는 방식에서 시인의 상상력을 충분히 맛볼 수 있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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