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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하권 64. ‘나 이제 시 안 쓸래요’라는 의미를 담아 시를 쓴 최립 본문

연재/한문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하권 64. ‘나 이제 시 안 쓸래요’라는 의미를 담아 시를 쓴 최립

건방진방랑자 2021. 10. 29.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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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이제 시 안 쓸래요라는 의미를 담아 시를 쓴 최립

 

 

소화시평권하 64에 초대된 인물은 최립이다.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최립이 왜 중국으로 사신을 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시대적으로 어떤 상황이었는지 중요하기 때문이다.

 

보통 사신 가는 일은 국가적인 대사를 처리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박지원이 지은 열하일기라는 책은 청나라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단의 일부로 함께 청나라로 가게 되며 겪게 된 일들을 써놓은 책이다. 축하사절단이니 가는 길이 무겁지 않고 마치 여행을 하듯 그 상황들을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축하해주기 위해, 또는 중국과 조선의 우호를 증진하기 위해 오고 가는 사절단의 경우엔 무겁지 않게 가벼운 마음으로 그 상황을 담아내는 시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때는 당연히 천자국에 대한 칭송과 함께 아부조의 내용이 들어가게 된다. 가장 대표적인 시가 계유정조봉천전구호(癸酉正朝奉天殿口號)나 이색의 입근대명전(入覲大明殿)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시들에 대한 상식만을 가지고 최립의 시를 읽게 되면 수련부터 경련까지는 그래도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미련에선 난관에 부딪히게 된다.

 

이때 조선은 임진왜란이 발발했고 윤근수를 정사로 삼아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게 된다. 최립은 부사 자격으로 이 대열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두 가지 목표를 이루기 위해 명나라로 가게 됐는데 세자의 책봉 문제와 함께 명나라 군대의 파견을 요청하러 간 것이다. 실제로 이 사신단을 통해 이여송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가 파견된 것이니 실질적인 성과를 이뤘다고 볼 수 있지만 조선의 상황이 상황인 만큼 이 사절단의 행렬은 절대로 여행하듯 가벼울 순 없었다. 바로 이런 배경 지식으로 이 시를 봐야만 한다. 여기에 덧붙여 이 시는 윤근수가 지어준 시에 대해 자신도 수창을 해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지어야만 했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寸閑爭得救長忙 짧은 틈이지만 어떻게 하면 사행의 바쁨을 벗어날까.
筋力全衰志獨强 근력은 모두 쇠했어도 뜻만은 굳세다네.
藍水玉山秋九日 남수와 옥산를 읊조리던 중구일이요,
荻花楓葉夜潯陽 갈대꽃과 단풍잎 속 비파 듣던 밤 깊은 심양이네.
劍能射斗誰看氣 검은 두우성을 쏠 만하지만 누가 그 기운을 살피겠는가?
衣未朝天已有香 옷은 조천하지 않았는데도 이미 향내가 있구나.
莫說登高能賦事 높은 곳에 오르면 시 읊을 줄 알아야 한다 말하지 말라.
裁詩排悶悶難忘 시를 지어 번민 털어내려 해도 번민은 그대로 인 걸. 簡易文集卷之七

 

수련에선 윤근수를 은근히 칭송하고 있다. 바쁜 사행길 속에서 정사인 윤근수는 시간을 내어 자신에게 시를 줬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근력은 비록 쇠했을진 몰라도 뜻만은 굳세다고 하며 그런 윤근수를 띄우고 있다.

 

함련은 전고(典故)가 있기 때문에 단순히 읽어서는 절대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3구에선 두보가 남수와 옥산이란 시를 읊조리던 중구일의 때라는 것을 통해 시간적인 배경을 넌지시 알려주고 있고 백거이가 늙은 기녀가 부르는 비파소리에 눈물짓던 심양(瀋陽)이라는 것을 통해 공간적인 배경을 알려주고 있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이 구절에서 단순히 시간적인 배경과 공간적인 배경만을 알려주는 정도로 끝나선 안 된다. 굳이 두보와 백거이를 인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보는 전란을 겪으며 피폐해진 사회를 한시를 그려냈다. 그처럼 두보를 인용한 걸 통해선 자신도 그런 전란의 피폐함 속에 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백거이는 왜 등장시킨 걸까? 그건 백거이가 늙은 기녀의 비파소리에 눈물지었듯이 윤근수가 써준 편지가 자신의 심금을 울릴 정도로 훌륭한 시였다는 걸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함련의 내용을 통해 시공간적 배경을 드러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전란을 간접적으로 드러냈고 윤근수가 써준 편지에 대한 칭찬까지 은유적으로 드러냈다. 정말 잘 짜여진 한 편의 부분이라 감히 말할 수 있겠다.

 

경련에서도 전고(典故)를 사용하며 윤근수를 한없이 칭송한다. 윤근수의 실력은 두우성조차 쏘아 맞출 정도로 출중하지만 아쉽게도 그의 능력을 알아봐줄 사람이 없다고 말하고 있으며 조천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몸엔 천자의 감화를 입었을 때 나는 향기가 이미 가득하다고 말하고 있다. 최근에 개봉한 기생충이란 영화를 통해 냄새야말로 얼마나 사람의 존재를 무의식중에 나누게 하는 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냄새야말로 계급이 사라진 이 시대에 엄연히 작동하고 있고 그에 따라 나눠지고 있는 새로운 계급제이니 말이다. 그처럼 여기서 표현되는 향기라는 것도 단순한 인품의 향기를 넘어선 벼슬하는 사람들이 지니게 되는 관리로서의 향기도 포함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윤근수를 띄워주고 나선 미련에서 문의가 갑자기 확 바뀐다. 위에서도 말했다시피 수련부터 경련까진 그저 일반적인 사행에서 쓰여지는 시들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유미주의적인 색채가 흐르고 한껏 전고까지 인용해가며 자신의 상관인 윤근수를 칭송하는 내용을 적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미련에선 완전히 내용의 톤이 달라진다. 예로부터 높은 곳에 오르면 시를 지을 줄 알아야 한다[登高能賦]’라는 말이 있었나 보다. 그건 마치 높은 곳에 오르면 호연지기가 생긴다는 관용적인 표현처럼 쓰였던 말인 듯하다. 그런데 이런 말에 대해 최립은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입단속을 시킨다. 왜 관용적으로 쓰는 이 말에 최립은 불쾌감을 드러내는 것일까? 그건 바로 시를 지어 걱정을 떨쳐내려고 해도 걱정은 떨쳐나가지 않기 때문이라고 최립은 말한다. 축하사절단으로 사행을 가는 것이라면 한바탕 시도 짓고 그 상황들을 묘사하며 호기를 부릴 수도 있다. 사행을 가는 것도 관리로서의 특권이기 때문에 그런 감상을 시를 담아 털어내다 보면 감정이 더 극대화될 테니 말이다. 하지만 때가 때인 만큼 그리고 자신들의 역할이 큰 만큼 한가롭게 시나 지으며 서로를 칭송해주며 있을 순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수창해야 하기에 시를 짓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이렇게 한가롭게 시나 쓰고 있으면 됩니까라고 윤근수에게 따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는 배경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여기저기 전고(典故)가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매우 어려운 시였다.

 

 

 

 

 

 

 

인용

목차

상권 목차

하권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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