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속에서 희망을 찾는 황정욱의 한시
『소화시평』 권하 64번에 초대된 사람은 황정욱이다. 이 시 또한 황정욱의 삶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황정욱도 호소지의 한 명인 노수신과 마찬가지로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았고 손녀가 선조의 아들인 순화군과 결혼하며 외척의 지위까지 누리며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임진왜란 당시에 왜적과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게 되어 유배를 가게 됐고 거기서부터 인생은 180도 꼬이게 된다. 노수신은 해배된 후에 다시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간 반면, 황정욱은 재기하지 못하고 울분을 안은 채 살다가 죽게 된다.
午憩東樓缷馬鞍 | 오후에 동루에서 쉬려 말안장을 푸니 |
窮陰忽作暮天寒 | 섣달이라 홀연 저녁 기운 차갑구나. |
紅塵謾說歸田好 | 세상살이할 땐 공연히 ‘전원으로 돌아가길 좋아한다’고 말만 하다가 |
白首猶歌行路難 | 늙어서는 오히려 이백의 「행로난(行路難)」을 노래하는 구나. |
天或試人聊自遣 | 하늘이 혹 사람을 시험하면 겨우 스스로 맘 달래고 |
雨還留客蹔求安 | 비가 도리어 객을 붙들면 잠깐이나마 편안함을 구해야지. |
明朝刮目鄕山碧 | 내일 아침은 고향산의 푸름에 눈을 비비며 보게 될 것이니, |
且費今宵一夢闌 | 또한 오늘 밤을 다 허비하여 한바탕 꿈 꿔야지. 『芝川集』 卷之二 |
이 시의 배경은 아마도 모함을 받고 파직된 후의 소감을 담은 듯하다. 자신이 청로(請老)하겠다고 해서 벼슬을 그만 둔 경우라면 이렇게까지 비분강개에 싸일 필요는 없지만 억울한 누명을 당했고 그에 따라 삶이 180도 달라졌으니 억울하고 환장할 지경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되었는가?’라는 생각도 들 법하다.
수련에선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누원에 도착한 시각이 오후라는 것도 알 수 있고 음력 10월이라 춥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렇게 계절적인 배경과 시간을 동시에 드러내며 자신의 심정을 우회적으로 드러냈다고 볼 수도 있다.
함련에선 젊어서 잘 나갈 적엔 곧잘 ‘나 전원으로 돌아갈래’라는 말을 부질없이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사람이 한참 잘 나갈 땐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시골에 내려가 농사나 지으며 살고 싶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그건 현재의 바쁜 삶에 대한 회의감이기도 할 테지만, 그보단 그냥 하는 소리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그처럼 황정욱도 곧잘 은둔하는 삶도 좋은 거 아닌가 라는 소리를 했다는 거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진 못했다. 그러니 바로 그 다음 구절에선 지금 현재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며 그때 그 말을 했던 대로 은둔하며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후회를 하는 것이다. 그걸 은유적으로 백발이 된 지금도 여전히 「행로난(行路難)」이란 노래를 부른다는 말로 풀어내고 있다.
날씨도 춥고 지금의 내 심정도 쓰디쓰며 거기에 후회까지 몰려오는 상황이다. 과연 이렇게 수련과 함련을 통해 상황을 전개했는데 과연 그렇다면 경련에선 어떤 말을 할까? 그러니 내 인생 정말 최악이다라는 논조를 이어갈까? 아니면 전구(轉句)라는 표현에 맞게 문의를 확 뒤집을까?
하늘이 간혹 사람을 시험하더라도 겨우 스스로 그 심기를 털어내며 비가 도리어 나그네 머물게 하니 잠시나마 편안함을 구하겠다고 했다. 역시 전구라는 의미에 맞게 문의를 확 뒤집은 것이다. 그리고 이 시구를 통해 ‘불행 속에서도 긍정적인 의미 찾아내기’라는 자기개발서에 나올 법한 이야기를 14글자로 표현한 것이다. ‘삶이 내 맘 같지 않지만 그럼에도 그걸 털어낼 수 있는 용기’가 있다는 것이고 비가 내려 갈 길을 가지 못하게 된 건 비극이지만 ‘그래 까짓 것 그 덕에 여기서 하루 더 묵으며 쉴 수 있게 됐으니 그것도 좋지’라는 마음가짐이다. 수련과 함련에선 삶의 비극을 극한까지 몰고 가더니, 경련에선 그걸 모두 뒤집으며 그래 이런 상황도 나쁘지만은 않다고 자위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미련에선 이 순간을 더욱 즐기는 이야기로 마무리 짓고 있다. 내일 아침이면 눈을 비비며 고향을 보게 될 테니, 오늘 밤은 한 바탕 꿈이나 꾸며 누려봐야지라고 마무리 짓고 있다. 이걸 요샛말로 하면 ‘욜로(You Only Live Once)’라 할 수 있다. 한 번 뿐인 인생 허비하지 말고 지금을 누리자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자신은 비극의 한 가운데 있지만, 그럼에도 그 비분강개에만 빠져 나 자신을 좀 먹진 않겠다는 결단이기도 하다.
그런데 미련에서 재밌는 부분이 있다. ‘일몽란(一夢闌)’이란 한자가 완전히 다른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一夢闌 | |
한바탕 꿈을 꿔야지 | 한 번 꿈에서 깨야지 |
‘란(闌)’엔 무성하다, 한창, 끝나다, 다하다와 같은 의미가 같이 있다. ‘난신(亂臣)’이란 예를 통해 한자엔 상반된 뜻이 같이 들어 있는 경우에 대해 말했었고 왜 그와 같은 일이 생겼는지를 말했는데 이 글자에도 그와 같은 상황이 있는 것이다. 이런 상반된 의미에 따라 마지막 구절의 해석도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且費今宵一夢闌 | |
또한 오늘 밤을 다 써서 한바탕 꿈이나 꿔야지. | 또한 오늘 밤을 다 허비하니 한 번 꿈에서 깨야지. |
전자의 의미대로 해석할 경우 오늘 밤 다시 오진 않을 테니 맘껏 꿈을 꾸며 누린다는 뜻이 될 것이고, 후자의 의미대로 해석할 경우 일장춘몽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뜻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자는 좀 더 긍정적인 의미로 상황을 보려하는 반면, 후자는 부정적으로 현실을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와 닿는지는 각자 다르겠지만, 나는 좀 더 긍정적으로 마무리 짓는 전자의 해석이 맘에 든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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