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하권 64. 노수신의 ‘친구야 보고 싶다’를 한시로 표현하는 법 본문

연재/한문이랑 놀자

소화시평 감상 - 하권 64. 노수신의 ‘친구야 보고 싶다’를 한시로 표현하는 법

건방진방랑자 2021. 10. 29. 16:09
728x90
반응형

노수신의 친구야 보고 싶다를 한시로 표현하는 법

 

 

由來嶺海能死人 고개와 바다 거쳐 오려고 하면 사람이 죽을 수 있으니,
不必驅馳也喪眞 힘들게 말달려 죽을 필욘 없네.
日暮林烏啼有血 석양에 숲의 까마귀 울음에 피가 있고
天寒沙雁影無隣 날씨 차가운 모래사장 기러기 그림자 짝이 없네.
政逢蘧伯知非歲 정이 거백옥이 49년의 삶이 잘못됨을 안 50살이 되었고
空逼蘇卿返國春 부질없이 소무가 귀국하던 때가 닥쳐왔네.
災疾難消老形具 질병은 없애기 힘든 늙은 형구(刑具)이니,
此生良覿更何因 다시 어느 인연으로 이 생애에 즐겁게 만날 수 있을까. 穌齋先生文集卷之四

 

소화시평권하 64에 초대된 사람은 노수신이다. 이 시를 해석하기 이전에 노수신이 어떤 상황에서 이 시를 지었는지 안다고 좀 더 이해하기 쉽다. 노수신은 승승장구하는 삶을 살았지만 을사사화에 연루되며 진도에서 19년이나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물론 그 후에 해배되며 다시 정점에 오르는 삶을 구가하게 되지만 이 시는 바로 진도에서 유배할 당시에 친구들에게 보낸 시라는 점이 중요하다.

 

수련은 나는 외진 곳에 있기 때문에 그대들이 나를 보러 이 먼 곳까지 오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처럼 교통이 발달되어 있지 않은 시기에 말을 타고 산 넘고 물 건너간다는 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일임에 분명하다. 지방의 풍토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동하는 도중에 산적을 만나거나 맹수를 만나거나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수신은 나를 보러 이 먼 곳까지 목숨 걸고 오지 말라고 만류한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선 안 된다. 그건 마치 외지에 살고 있는 자식이 어머니 생신을 축하하러 고향에 내려가려 하니 어머니가 뭘 힘들게 오려고 그래. 내려오지 않아도 괜찮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 설혹 어머님이 오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니 그냥 이번 생신엔 집에서 쉬자라는 생각으로 선물만 보내드렸다간 꽤나 긴 시간 동안 기분이 몹시 상해 있는 어머님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처럼 이 말을 통해 노수신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이 와서 볼 수 있으면 좋겠어라는 속뜻을 담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 속뜻이 담겨 있는지는 함련을 통해 여실히 알 수 있다. 함련에선 자신이 얼마나 친구들을 그리워하고 있는지 직접적으로 묘사하고 있지 않고 주변의 상관물을 통해 우회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석양이 내린 숲의 까마귀는 까아까악 운다. 늘 들었던 까마귀 소리지만 지금은 친구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친 터라, 그 까마귀 울음 소리에 마치 피를 토하는 듯한 격정적인 마음이 있는 것처럼 들린 것이다. 그리고 늘 보아오던 모래톱의 기러기인데, 이때는 자신의 감정이 이입되어 몹시도 외로워 보인다. 피 토하는 듯한 그리움, 외기러기에 투영된 사무침까지, 노수신은 몹시도 두 명의 친구들이 그리웠던 것이다.

 

 

 

 

경련에선 전고(典故)를 통해 자신의 나이와 머지않아 해배될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거백옥50살이 되던 해에 그 전까지 삶이 매우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통해 50살을 표현할 때 지비세(知非歲, 그간의 세월을 잘못 살았다는 것을 알다)’라는 단어를 쓰게 됐다. 그리고 소무는 전한시대 때 흉노족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지만 그곳에서 억류당해 무려 19년 간이나 머물다가 돌아온 인물이다. 노수신 또한 진도에서 19년 간 유배생활을 했으니 소무와 같은 기간을 보냈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러니 소무의 고사를 인용하며 자신도 머지않아 해배되리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경련을 통해서는 자신의 나이를 밝히고 있고 머지않아 이곳에서 풀려날 거라는 걸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고 고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해배된 후에 자신이 직접 보러갈 테니 그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런데 미련에선 그런 긍정적인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여전히 비관적인 이야기만을 한 채 끝을 맺는다. 늙어감에 따라 병도 깊어지고 있기 때문에 만나고 싶은 맘은 깊고도 간절하지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 시의 문면에 흐르는 정조는 그리움이지만, 그걸 표현하는 방식은 간접적이었으며 매우 우회적이었다. 보고 싶은 오라고 하지도 않았으며, 내가 직접 보러 가겠다고 하지 않았다. 말은 계속 중심을 파고들지 못한 채 변두리만을 살짝살짝 건드리는 것 같아, ‘왜 이런 식으로 시를 써서 친구에게 줬지?’라는 의문이 생길 법도 하다. 하지만 우린 알고 있다. 직접적으로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것보다, ‘너와 함께 있던 하루는 마치 한 시간 같았어라는 우회적인 표현이 더 깊은 감동을 자아낸다는 걸 말이다. 노수신의 이 시를 읽은 친구들도 이 날만은 깊은 그리움에 맘이 울컥했을 것이다.

 

 

 

 

 

 

 

인용

목차

상권 목차

하권 목차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