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송욱이 송욱을 찾아다니다
송욱宋旭이 취해 자다가 아침에야 술이 깼다. 드러누워 듣자니 솔개가 울고 까치가 우짖으며 수레 끄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떠들썩하였다. 울타리 아래서는 방아 찧는 소리, 부엌에서는 설거지 하는 소리. 늙은이가 소리치고 아이가 웃는 소리, 계집종이 잔소리하자 사내종이 헛기침 하는 소리, 무릇 문밖에서 벌어지는 일은 하나도 모를 것이 없는데, 유독 제 소리만은 없는 것이었다. 宋旭醉宿, 朝日乃醒. 臥而聽之, 鳶嘶鵲吠, 車馬喧囂. 杵鳴籬下, 滌器廚中. 老幼叫笑, 婢僕叱咳. 凡戶外之事, 莫不辨之, 獨無其聲. 이에 그만 멍해져서 말하였다. “집안사람들은 모두 있는데, 나만 어째 혼자 없는 걸까?” 눈을 둘러 살펴보니, 저고리는 옷걸이에, 바지는 횃대에 있고, 갓은 벽에 걸려 있고, 허리띠는 횃대 끝에 매달려 있었다. 책상 위엔 책이 얹혀 있고, 거문고는 가로 놓이고, 비파는 세워져 있었다. 거미줄은 들보에 얽혀 있고, 파리는 창문에 붙어 있었다. 무릇 방안의 물건도 모두 그대로 있지 않은 것이 없는데 유독 자기만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乃語矇矓曰: “家人俱在, 我何獨無?” 周目而視, 上衣在楎, 下衣在椸, 笠掛其壁, 帶懸椸頭. 書帙在案, 琴橫瑟立, 蛛絲縈樑, 蒼蠅附牖. 凡室中之物, 莫不俱在, 獨不自見. 급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서 그 자던 곳을 살펴보니, 베개를 남쪽으로 놓고 자리를 폈는데 이불은 그 속이 들여다보였다. 이에 송욱이가 발광이 나서 벌거벗은 몸으로 나갔구나 하며 몹시 슬퍼하고 불쌍히 여겨, 나무라고 또 비웃다가 마침내 그 의관을 끌어안고, 가서 옷을 입혀주려고 길에서 두루 찾아다녔지만 송욱은 보이지 않았다. 急起而立, 視其寢處, 南枕而席, 衾見其裡. 於是謂旭發狂, 裸體而去, 甚悲憐之, 且罵且笑, 遂抱其衣冠, 欲往衣之, 遍求諸道, 不見宋旭. |
어느 날 아침 술에서 깨고 보니 세상은 그대로인데 내가 나를 찾을 수가 없다. 나는 어디 있는가? 모든 것을 그대로 남겨두고 벌거벗은 채 어디로 사라졌는가? 여기서 우리는 자못 심각한 자아분열의 현장을 목도하게 된다. 창밖의 세계, 방안의 세계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다만 그 속에 있어야 할 나만이 실종된 것이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의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찌된 일일까?’ 그는 생각했다. 결코 꿈은 아니었다. 약간 좁긴 해도 제대로 된 사람 사는 방이라 할 수 있는 그의 방은 낯익은 네 개의 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그레고르는 창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흐린 날씨가 –창턱 함석 위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온통 우울하게 만들었다. ‘좀 더 잠을 청해 이런 어리석은 일을 잊도록 하자.’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그럴 수가 없었다.
-『변신』, 카프카 지음/이주동 옮김, 솔출판사 간, 109쪽
흡사 위 카프카의 「변신」 첫 대목을 연상시키는 이 글은 자기 정체성을 상실해 버린 한 인간이 절망적 현실 앞에서 급기야 미쳐버린 이야기이다. 그래서 실종된 자아를 찾아나서는 이야기이다.
흥미로운 것은 정작 나는 사라졌는데, 나 자신을 객체화하여 바라보는 의식만은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이다. 무력한 현실의 벽 앞에 비대해진 자의식의 과잉으로 읽힌다. 송욱이가 드디어 발광이 났구나. 아! 이 불쌍한 인간! 그것이 벌거벗은 채 나돌아 다닐 생각을 하니 애처롭고 민망하여 의관을 품에 안고 온 길거리를 찾아 다녔다. 헌데 찾아다닌 그 사람은 누구인가? 송욱인가 아닌가? 점장이에게 가서 점을 친다. 송욱은 어디 있는가? 그렇다면 점치는 그 사람은 누구인가?
2. 자신의 과거시험지를 자신이 채점하다
드디어 동곽東郭의 소경에게 가서 점을 쳤다. 소경은 점을 치며 말하였다. “서산대사西山大師께서 갓끈이 끊어져 구슬이 흩어졌구나. 저 올빼미를 불러다가 헤아려보게 하자꾸나.” 둥근 동전이 잘 구르다가 문지방에 부딪쳐 멈추자, 동전을 주머니에 넣으면서 축하하며 말하였다. “주인은 놀러 나갔고, 객은 깃들어 쉴 곳이 없구나. 아홉을 잃고 하나만 남았으니, 이레 뒤에는 돌아오겠구나. 이 점괘가 크게 길하니 마땅히 과거에 높이 붙겠구려.” 遂占之東郭之瞽者, 瞽者占之曰: “西山大師, 斷纓散珠, 招彼訓狐, 爰計算之.” 圓者善走, 遇閾則止. 囊錢而賀曰: “主人出遊, 客無旅依. 遺九存一, 七日乃歸. 此辭大吉, 當占上科.” |
점장이는 주인은 놀러가고 없고, 객만 남아 깃들어 쉴 데도 못 찾고 헤매고 있다고 한다. 그래도 구슬 아홉을 잃었지만 하나는 남았으니 7일 후엔 돌아오리라고 한다. 돌아올 뿐 아니라, 과거에 좋은 등수로 급제할 괘라고 축하까지 한다. 아홉 개 구슬에서 하나만 남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점장이의 점괘이니 우리는 가늠할 길이 없다. 그렇다면 송욱의 발광은 과거에 붙지 못해 생긴 병인가? 과거에 급제만하면 깨끗이 나을 병인가?
송욱이 크게 기뻐하여, 매번 과거를 베풀어 선비를 시험할 때마다 반드시 유건儒巾을 쓰고 나아가서는, 문득 제 시험 답안에다 스스로 비점批點을 치고 높은 등수를 큰 글씨로 써 놓곤 하였다. 그래서 한양 속담에 반드시 이루지 못할 일을 두고 송욱宋旭이가 과거에 응시하기라고 말하곤 한다. 군자가 이말을 듣고 말하였다. “미치긴 미쳤지만 선비로구나! 이는 과거에 나가긴 해도 과거에 뜻을 두지는 않은 것이다.” 旭大喜, 每設科試士, 旭必儒巾而赴之, 輒自批其券, 大書高等. 故漢陽諺, 事之必無成者, 稱宋旭應試. 君子聞之曰: “狂則狂矣, 士乎哉. 是赴擧而不志乎擧者也.” |
그래서 마침내 송욱은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을 잃는 일도 없이 과거 시험 때마다 자신있게 유건儒巾을 눌러쓰고 어깨를 쫙 펴고 시험장에 들어가, 제 답안지에 잘 썼다고 비점批點을 찍고는 제가 제 붓으로 등수까지 써놓고 나왔다. 과연 점괘는 효험이 있었구나.
사람들은 송욱더러 미쳤다 하고, 군자는 미치긴 했어도 선비라고 한다. 또 이건 무슨 소리일까? 과거에 나가면서 과거를 염두에 두지 않으니 미친 것이요, 과거 같지 않은 과거에 응시하면서 급제할 마음을 까맣게 잊었으니 선비인 것이다. 어차피 과거 급제란 요행수가 아닌가? 설사 급제한들 그것은 재앙의 시작일 뿐이다. 그러니 과거 시험장에 들어앉아 희희낙락 제가 제 답안지 채점까지 해버리니 통쾌하지 아니한가?
3. 송욱처럼 완전히 미치길
그리고 나서 글은 갑자기 계우季雨의 이야기로 건너뛴다. 이번에는 술미치갱이 이야기다. 술을 오죽 좋아 했으면 제 호를 주성酒聖이라 했을까. 성聖이란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니 그도 정신이 온전한 사람은 아닌 게다.
그런 그를 보고 이번엔 연암이 정문에 일침을 놓는다. “술에 취해 잊으려 말고, 맨 정신으로 잊어보게. 이왕지사 미치광이가 되려거든 큰 미치광이가 되어 보게.” 무엇을 생각지 말라는 것인가? 무슨 생각을 걷어내라 함인가? 기껏 겉만 번드르한 자들을 향해 혐오감을 비치는 것은 미치광이가 아니다. 그것은 미치광이가 아니라 오히려 아직 그가 제 정신을 지녔다는 징표다. 큰 미치광이는 그 안에 들어가 그들과 한 통속이 되어 노닌다. 송욱이 과거 시험장에 들어가 제 답안지에 제가 점수를 매기듯이 말이다. 그러고 보면 술 먹고 세상을 삐딱하게만 바라보는 자네는 아직 미치광이가 아닐세. 정말 미치광이가 되어 보게. 어줍잖게 미치지 말고 말일세. 정말이지 나도 미치고만 싶네 그려.
그리하여 계우는 제 집의 이름을 ‘염재念齋’라 하였다. 그렇다면 염재는 ‘생각하는 집’인가? 아니면 ‘생각을 잊는 집’인가? 이 집의 화두는 바로 ‘생각’이다. 그놈의 생각만 없어도 한 세상 편히 지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바깥 세상의 소리도, 방안의 물건도 모두 제 자리에 놓여 있듯, 송욱은 여태도 술 덜깬 표정으로 그 이불 속에 팔자 좋게 누워 있었을 터인데, 그놈의 생각 때문에 그는 극심한 자아분열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렇다면 ‘염재’란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집’이겠구나.
연암은 이렇게 말하며 글을 끝맺는다. “대저 송욱은 미친 사람이다. 또한 이로써 나 스스로를 권면해 본다.” 송욱의 미친 짓으로 스스로를 권면하겠다니, 자신도 송욱과 같은 미치광이가 되었으면 싶다는 뜻이다. 그도 아직은 계우처럼 맨 정신으로는 미칠 수가 없었던 게다. 이 세상을 버텨내려면 아예 송욱처럼 신나게 미쳐 보든지, 아니면 마음속에서 그 미치겠다는 ‘생각’마저 걷어내 버리든지 할 일이다. 어정쩡하게 술에 취해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결코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미치자! 그것도 완전히 미치자! 그렇지 않으면 아무 생각 없는 멍청이가 되자! 그것만이 이 흐린 세상을 건너가는 방법이 될 테니까. 나는 연암의 이 글에서 그 배면에 묻어나는 안타까운 한숨을 읽는다.
- 『논어論語』 「양화陽貨」 12에 “子曰: 色厲而內荏, 譬諸小人, 其猶穿窬之盜也與.”라 한데서 따온 말이다. 얼굴빛은 위엄이 있으면서 마음이 유약함을 이른다. 집주集注는 실상은 없이 이름만 훔쳐 항상 남들이 알까봐 전전긍긍하는 자를 말한다고 했다. [본문으로]
4. 전후의 안쓰러운 내면풍경
함께 떠오르는 현대시 한 수. 김윤성金潤成 시인의 작품으로 제목은 「추억에서」이다. 『한국전후대표시집韓國戰後代表詩集』에 실려 있다.
낮잠에서 깨어 보니
방안엔 어느새 전등불이
켜져 있고,
아무도 보이지 않는데
어딘지 먼 곳에서 단란한
웃음소리 들려온다.
눈을 비비고
소리나는 쪽을 찾아보니
집안 식구들은 저만치서
식탁을 둘러앉아 있는데
그것은 마치도 이승과 저승의
거리만치나 멀다.
아무리 소리질러도
누구 한 사람 돌아다 보지 않는다.
그들과 나 사이에는 무슨 벽이 가로 놓여 있는가
안타까이 어머니를 부르나
내 목소리는 산울림처럼
헛되이 되돌아올 뿐.
갑자기 두려움과 설움에 젖어
뿌연 전등불만 지켜보다
어머니 어머니
비로소 인생의 설움을 안
울음이 눈물과 더불어 한없이 쏟아진다.
아마도 가위 눌린 꿈 한자락을 노래한 것임 직하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가 문득 부딪치는 벽, 두려움과 설움들. 단란한 웃음소리는 언제나 어딘지도 모를 먼 곳에서만 들려오고, 뿌연 전등불 아래서 누구 한사람 돌아다보지 않는 희미한 시계視界, 정작 나는 어디 있는가 하는 존재 증명을 위해 내쏟는 한없는 눈물과 울음들은 또 그것대로 전후戰後의 안스러운 내면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송욱처럼 심각한 자기 실종으로까지 이어질 것 같지는 않다.
▲ 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5. 아홉은 죽어나가는 과거시험
다시 연암으로 돌아가서, 과거에 합격한 이웃 사람에게 보낸 축하 편지 한통을 읽어 보자. 과거 시험에 대한 연암의 평소 생각이 잘 드러나 있다. 제목은 「하북린과賀北隣科」이다.
무릇 요행을 말할 때는 ‘만에 하나’라고들 하지요. 어제 과거에 응시한 사람은 수만 명도 더 되는데, 이름이 불리운 사람은 겨우 스무명 뿐이니 참으로 만분의 일이라 할 만합니다. 문에 들어설 때에는 서로 짓밟느라 죽고 다치는 자를 헤일 수도 없고, 형과 아우가 서로를 불러대며 찾아 헤매다가 서로 손을 잡게 되면 마치 다시 살아온 사람을 만난 듯이 하니, 그 죽어 나간 것이 ‘열에 아홉’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제 그대는 능히 열에 아홉의 죽음을 면하고 만에 하나의 이름을 얻었구려. 나는 무리 가운데에서 만분의 일에 영예롭게 뽑힌 것을 축하하지 않고, 다시는 열에 아홉이 죽는 위태로운 판에 들어가지 않게 된 것만 가만히 경사롭게 여깁니다. 즉시 몸소 축하해야 마땅하겠으나, 나 또한 열에 아홉의 나머지인지라, 바야흐로 드러누워 끙끙 앓으면서 용태가 조금 나아지기를 기다리고 있다오. 凡言僥倖, 謂之萬一. 昨日擧人, 不下數萬, 而唱名纔二十. 則可謂萬分之一. 入門時, 相蹂躪, 死傷無數, 兄弟相呼喚搜索, 及相得握手, 如逢再生之人. 其去死也, 可謂十分之九. 今足下能免十九之死, 而乃得萬一之名. 僕於衆中, 未及賀萬分之一榮擢, 而暗慶其不復入十分九之危場也. 宜卽躬賀, 而僕亦十分九之餘也, 見方委臥呻楚, 容候少閒. |
과거에 급제했다고 이웃에서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던 모양이다. 모두冒頭에서 과거급제는 요행수일 뿐이라고 말을 걸쳐 놓고, 이른바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재를 선발한다는 과거시험, 열이 들어가면 아홉이 죽어나오는 그 시험에 급제한 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축하하고 싶은 맘이 없고, 이제 다시는 그 난장판에 끼지 않아도 되게 된 것만을 축하한다고 했다.
본문 중에 열에 아홉이 죽어 나간다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퍼뜩 앞서 「염재기念齋記」에서 무슨 말인지 종잡을 수 없던, 점장이가 아홉을 잃고 하나만 남았으니 좋은 징조라고 하던 점괘 풀이를 환기하게 된다. 정작은 연암 자신도 그 시험장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여태도 앓아 드러누워 있노라고 했다.
그가 보기에 당시 조선의 사회는 썩어 문드러질 대로 문드러져 제 정신을 지닌 지식인이라면 아예 미쳐 버리거나 끙끙 앓아 드러누울 수밖에 없는 구제불능의 상태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6. 연암이 과거시험을 절망스럽게 본 이유
박종채朴宗采는 『과정록過庭錄』(1-15 / 22)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당시 선군의 문장은 명성이 이미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울리었다. 매번 과거 시험이 있을 때마다 시험을 주관하는 자가 반드시 끌어당기려 하였으나, 선군은 그 의도를 간파하고 혹은 응시하지 않거나 혹은 응시는 하되 시권試券을 제출하지 않으셨다. 하루는 과장科場에 있으면서 고송古松과 노석老石을 그리니, 세상에서는 서투르고 물정을 모른다고들 비웃었다. 그러나 이는 대개 달갑게 여기지 않는 뜻을 보이신 것이었다.
선군은 회시에 응시하지 않으려 하였으나 친우들이 억지로 권하는 자가 많아 드디어 마지 못해 과장에 들어갔다가 시권을 제출하지 않고 나오셨다. 식견이 있는 사람들은 이를 듣고 모두들, 나아감에 구차하지 않으니 옛 사람의 풍모가 있다 하였다. 장인인 유안옹遺安翁은 이때 고향집에 계셨다. 그 아들 이재성李在誠에게, “아무개가 회시에 응시하는 것은 나로서는 그다지 기쁘지 않다. 그 사람 역시 어찌 생각이 없겠는가”하셨다. 시권을 제출하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몹시 기쁘게 여기셨다.
-『역주과정록』, 박종채 저/김윤조 역주, 태학사 간, 31쪽과 37쪽
그는 왜 모든 선비들이 목숨을 걸고 벌떼같이 달려드는 과거 시험장에서 백지를 제출하거나, 한가롭게 고송古松 따위를 그리며 앉아 있었던 걸까? 과거 시험이란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송욱처럼 미치지 않고는 견딜 길 없던 세상, 경국제세經國濟世의 포부를 실현하겠다고 익힌 공부가 국가 사회를 위해 쓰일 수 없고, 고작 권문權門에 빌붙어 일신의 영달을 구하는 데만 쓸모 있게 된 세상, 달아 삼켜 놓고 쓰다고 뱉는 그런 세상에 대한 절망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때의 그 세상은 눈앞의 지금과도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
그러니 차라리 저 장주莊周의 훨훨 나는 호접몽胡蝶夢의 자유경自由境을 부러워도 해볼 일이다. 그런데 명나라 장조張潮는 『유몽영幽夢影』에서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니 장주의 행운이었고,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되니 나비의 불행이었다. 莊周夢爲胡蝶, 莊周之幸也. 胡蝶夢爲莊周, 胡蝶之不幸也”고 그나마도 톡 쏘았다. 그렇지만 장주와 나비의 행불행幸不幸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꿈 속 꿈의 잠꼬대 같은 소릴 뿐이다. 그럴진대 과연 발가벗고 방을 뛰쳐나간 나는 여태 어디서 헤매 돌고 있는 걸까?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정말 나일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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