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중간에 처하겠다
애초에 우리의 관심사는 장님의 비단옷과 밤길의 비단옷 사이에 우열을 갈라 따지는 일이었으니, 그 대답은 정령위와 양웅 중 어느 편이 더 나은가를 헤아려 보면 해결될 수 있을 터이다. 그런데 그것을 청허선생은 “난 몰라! 난 몰라!”했고, 연암은 다시 청허선생에게나 가서 물어보라고 했으니, 문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대답을 어디에서 찾을까? 다음 『장자莊子』 「산목山木」에 보이는 삽화가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법 싶다.
장자가 산 가운데로 가다가 가지와 잎새가 무성한 큰 나무를 보았다. 나무 베는 사람이 그 곁에 멈추고도 베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으니, “쓸 만한 곳이 없다”고 하였다. 장자가 말하기를, “이 나무는 쓸모없음을 가지고 그 타고난 수명을 마치게 되었구나”라 하였다. 장자가 산에서 나와 친구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친구가 기뻐 하인에게 거위를 잡아서 삶으라고 명하니, 하인이 묻기를 “한 놈은 잘 울고 한 놈은 울 줄 모르는데 어느 놈을 잡을까요?” 하자, 주인이 말하기를 “울지 못하는 놈을 잡아라”라고 하였다.
이튿날 제자가 장자에게 묻기를, “어제 산 속의 나무는 쓸모없음을 가지고 타고난 수명을 마칠 수 있었고, 오늘 주인의 거위는 쓸모없음을 가지고 죽었으니, 선생님께서는 장차 어디에 처하시렵니까?”라고 하자, 장자가 웃으면서 말하였다. “나는 장차 재材와 불재不材,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사이에 처하려네. 재材와 불재不材의 사이란 옳은 듯하면서도 그른 것이니 폐단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야. 만약 대저 도덕道德을 타고서 떠다닌다면 그렇지가 않겠지. 기림도 없고 헐뜯음도 없으며, 한 번은 용이 되고 한 번은 뱀이 되어 때와 더불어 함께 변화하면서 오로지 한 가지만 하기를 즐기지 않을 것이요, 한 번은 올라가고 한 번은 내려가서 조화로움을 법도로 삼아 만물의 근원에서 떠다니며 노닐어 사물로 사물을 부릴 뿐 사물에 부림당하지 않을 터이니 어찌 폐단이 될 수 있겠는가? 이는 신농神農과 황제黃帝의 법칙일세. 대저 만물萬物의 정情이나 인륜人倫의 전함 같은 것은 그렇지가 않다네. 합하면 떨어지게 마련이고, 이루고 나면 무너지며, 모가 나면 꺾이고, 높으면 말이 있게 되며, 유위有爲하면 공격당하고, 어질면 도모함을 당하며, 못나면 속임을 당하고 마니, 어찌 폐단 면하기를 기필할 수 있겠는가? 슬프다. 너희들은 이를 기억해 두어라! 그것은 오직 도덕道德의 고장에서만 가능한 일임을 말이다.”
숲 속의 큰 나무는 쓸모없음으로 인해 제 타고난 수명을 누릴 수 있었고, 친구 집의 거위는 쓸모없음으로 인해 제 목숨을 잃었다. 둘 다 쓸모없기는 마찬가지인데 이제 그 결과는 반대로 되었다. 혼란스러운 제자가 선생님은 어디에 처하시겠느냐고 하자, 장자는 천연스레 그 ‘가운데’에 처하겠노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우리는 옷과 살의 사이, 혹은 나막신과 가죽신의 중간에서 사물의 진실을 파악할 수 있다던 연암의 문답이 기실은 장자의 패러디임을 짐작하게 된다. 그렇다면, 밤길의 비단옷과 장님의 비단옷 사이의 우열은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장자식으로 대답하자면 나는 그 중간에 처할 뿐이다. 그러나 인간 세상에서 ‘재材’와 ‘불재不材’의 사이에 처하겠노라는 장자의 판단은 언제나 또 다른 시비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들은 언제나 이것 아니면 저것이기를 요구한다. 나막신이냐 가죽신이냐, 밤길의 비단옷이냐 장님의 비단옷이냐, 살이냐 옷이냐, 그도 아니면 정령위이냐 양웅이냐 중 양자택일 할 것을 부단히 강요한다. 어느 것이 나은가? 어느 편에 설까? 합치기 아니면 갈라서기요, 이루기 아니면 무너지기며, 전부가 아니면 전무全無일 뿐이다. 그 중간항은 어디에도 설 데가 없다.
여의주와 말똥을 변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청허선생 뿐이니, 내가 무슨 말을 하겠는가?” 珠丸之辨, 唯聽虛先生. 在吾何云乎?” |
이런 세상에서 ‘가운데’에 처하겠다는 어중간한 처신은 욕 얻어먹기에 딱 좋을 뿐이다. 그러기에 장자는 “슬프다! 제자야 잘 기억해 두어라. ‘가운데’에 처하더라도 아무 문제가 없는 곳은 오직 세상 어디에도 존재치 않는 ‘도덕지향道德之鄕’에서일 뿐이라는 사실을.” 그래서 연암도 이렇다 할 똑 부러진 대답을 내지 못하고, 다시금 문제를 슬그머니 있지도 않은 청허선생에게로 되돌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최종적인 대답은 청허선생과 마찬가지로 “난 몰라, 난 몰라!”였던 셈이다. 자! 그렇다면 우리가 처해야 할 그 ‘중간’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 전문
인용
2. 이가 사는 곳
3. 짝짝이 신발
5. 중간에 처하겠다
5-1. 총평
7. 이 작품집에 나는 모르고 그대들만 아는 코골이는 알려주시라
7-1. 총평
'책 > 한문(漢文)'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간은 어디인가? - 7. 이 작품집에 나는 모르고 그대들만 아는 코골이는 알려주시라 (0) | 2020.03.24 |
---|---|
중간은 어디인가? - 6. 글의 생명은 진정성의 여부에 달렸다 (0) | 2020.03.24 |
중간은 어디인가? - 4. 자네의 작품집은 여의주인가 말똥인가 (0) | 2020.03.24 |
중간은 어디인가? - 3. 짝짝이 신발 (2) | 2020.03.24 |
중간은 어디인가? - 2. 이가 사는 곳 (0) | 2020.03.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