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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비슷한 것은 가짜다 - 16. 스님! 무엇을 봅니까? 본문

책/한문(漢文)

비슷한 것은 가짜다 - 16. 스님! 무엇을 봅니까?

건방진방랑자 2020. 3. 24.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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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라지는 연기

 

 

담배가 방생한 연기는 지금

어디쯤 자유로이 날아가고 있을까

 

우리들 삶을 연기와 같다고 말하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고 말하지만

 

담배연기,

담배연기를 보며

허무와 자유는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박상천의 방생放生5란 작품이다. 시인은 삶이란 흔적도 없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담배 연기와 같은 거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유롭지만 그러기에 허무한 거라고 말한다. 내 입에서 품어져 나간 담배 연기,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 담배 연기, 분명히 있었지만 찾을 길 없는 담배 연기. 그는 왜 담배 연기를 보며 허무와 자유를 같이 떠올렸을까? 자취도 없이 사라졌으니 허무하고, 얽매임 없이 제멋대로 날아가고 있기에 자유롭다고 했다. 그런데 허무는 자유로운가? 자유는 과연 허무한 것인가? 담배 연기는 허무한가? 우리네 인생은 자유로운가? 인생이 허무한 줄은 알아도, 그 속에 자유가 있는 줄은 알지 못하기에 삶의 번민은 늘어만 가는 것이다.

앞에서 염재기念齋記를 읽었으니 이번에는 관재기觀齋記를 읽어 보기로 한다. 염재念齋가 생각하는 집이라면 관재觀齋는 바라보는 집이다.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본단 말인가? 눈앞에 보이는 것은 우리에게 생각을 일으키고, 그 생각의 덩어리들에 둘러싸여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니,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을유년 가을, 나는 팔담八潭에서부터 거슬러 가서 마하연摩訶衍으로 들어가 치준대사緇俊大師를 방문하였다. 대사는 손가락을 깎지 껴서 인상印相을 만들고는 눈은 코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동자童子가 화로를 뒤적이며 향에 불을 붙이는데, 연기가 동글동글 한 것이 마치 헝크러진 머리털을 비끌어 매어 놓은 것도 같고, 자욱한 것은 지초芝草가 무성히 돋아나는 듯도 하여, 그대로 곧게 오르다가는 바람도 없는데 절로 물결쳐서 너울너울 춤추듯 흔들려 마치 가누지 못하는 것 같았다.
歲乙酉秋, 余溯自八潭, 入摩訶衍, 訪緇俊大師. 師指連坎中, 目視鼻端. 有小童子, 撥爐點香, 團如綰鬉, 鬱如蒸芝, 不扶而直, 無風自波, 蹲蹲婀娜, 如將不勝.

스승은 가부좌를 틀고 인상印相을 엮은 채 좌선삼매坐禪三昧에 빠져 있다. 곁에서 동자승은 향에 불을 붙이려고 화로를 뒤적인다. 이윽고 불이 붙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난다. 둥글둥글 묶은 머리 모습도 같고 무성히 돋아나는 지초의 모양인가도 싶다. 연기는 아무 방해 받는 것이 없이 곧장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그러더니 어디서 바람이 불어온 것도 아닌데 갑자기 요동을 치더니만 너울너울 흔들려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2. 향이라는 허상에 사로잡히다

 

 

동자가 홀연히 묘오妙悟를 발하여 웃으며 말하였다.
공덕功德이 이미 원만하다가 지나는 바람에도 움직여 도는구나. 내가 부처를 이룸도 한낱 무지개를 일으킴이로다.”
대사가 눈을 뜨며 말하였다.
얘야! 너는 그 향을 맡은게로구나. 나는 그 재를 볼 뿐이니라. 너는 그 연기를 기뻐하나, 나는 그 공을 바라 보나니. 움직이고 고요함이 이미 적막할진대 공덕은 어디에다 베풀어야 할꼬?”
동자가 말하였다.
감히 여쭙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대사가 말하였다.
너는 시험 삼아 그 재의 냄새를 맡아 보아라. 다시 무슨 냄새가 나더냐? 너는 그 텅빈 것을 보거라. 또 무엇이 있더냐?”
童子忽妙悟發, 笑曰: “功德旣滿, 動轉歸風. 成我浮圖, 一粒起虹.” 師展眼曰: “小子汝聞其香, 我觀其灰. 汝喜其烟, 我觀其空. 動靜旣寂, 功德何施?” 童子曰: “敢問何謂也?” 師曰: “汝試嗅其灰, 誰復聞者? 汝觀其空, 誰復有者?”

허공에 흩지는 연기를 바라보던 동자는 마음에 문득 스치는 생각이 있었겠지. 그렇다! 온방에 가득히 피어오르던 연기가 곧장 하늘로 닿을 듯하더니 보이지 않는 바람에도 견뎌내지 못하고 흩어져 버렸구나. 내가 부처를 이루려고 용맹정진하면서 원만한 공덕을 쌓는 것은 허공으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연기와 같다. 그런데 그 연기는 바람에 움직여 흔들리다가 어느 순간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나의 피나는 수행으로 얻은 원만한 공덕도 어느 순간 아무 것도 아닌 무로 화해버리고 마는 것이 아닐까? 그럴진대 내가 공덕을 쌓아 부처를 이루겠다는 소망은 비온 뒤 잠시 섰다가는 이내 사라져 버리고 마는 무지개와 같은 허망한 꿈이 아닐까? 큰 스님!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이 저 연기와 같이 허망한 것이로군요. 모든 집착을 버려야하는 것이로군요. 부처가 되겠다는 생각도, 번뇌를 끊겠다는 마음도 저 연기처럼 허공에 던져 버려야 하는 것이로군요.

스님은 그제야 조용히 눈을 뜨며 말한다. 얘야! 너의 코는 아직도 향기에만 빠져 있구나. 나는 그것이 타고 남은 재를 볼 뿐이니라. 향기는 아름답고 재는 쓸모없다는 그 분별의 마음을 내 속에서 걷어 내거라. 향기에 도취되지 말고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되는 그 이치를 헤아려야지. 네 눈은 왜 허공 위로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만을 기뻐하지? 그러기에 바람에 흔들려 연기가 사라지면 슬픔이 생기는 것이 아니냐. 연기가 사라지면 향기도 스러지고, 다만 재와 허공이 남을 뿐이다. 그렇다면 연기는 허공이요 향기는 재인 것을. 무엇이 기쁘고 무엇이 슬플 일이라더냐?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요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인 것을. 연기에 눈을 뺏기고 향기에 코를 뺏기고서 무지개의 허망한 아름다움만을 뒤쫓는다면 공덕이 있다한들 무엇에다 베풀겠느냐? 너는 지금 무엇을 깨달았다는 것이냐? 어서 그것을 내 놓아 보아라.

스님! 무슨 말씀이신지요. 제자는 심히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얘야! 저기 타고 남은 재가 있지? 너 거기에 코를 대고 냄새를 맡아 보아라. 향기가 남아 있느냐? 너 저 허공을 살펴 보거라. 무슨 연기가 남아 있더냐? 아까는 분명히 있었으되 이제는 맡을 수 없고, 좀 전에 또렷이 있었지만 어느 새 찾을 길이 없다. 이라는 이름, 연기라는 허상을 좀체 놓지 못하니 미망迷妄이 생기고 집착이 생기는 게야. 그것을 놓아 버릴 줄 알아야지.

 

 

 

 

 

3. 분명히 있지만 없는 것

 

 

동자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말했다.
옛날에 스승님께서 제 정수리를 문지르시며 제게 다섯 가지 계율을 내리시고 제게 법명法名을 주셨습니다. 이제 스승님께서 말씀하시길, 이름은 내가 아니요, 나는 곧 공이라 하십니다. 은 형체가 없는 것이니 이름은 장차 어데다 베푼답니까? 청컨대 그 이름을 돌려드리렵니다.”
대사가 말하였다.
너는 순순히 받아서 이를 보내도록 해라. 내가 예순 해 동안 세상을 살펴보았으되, 사물은 한 자리에 머무는 법 없이 도도히 모두 가버리는 것이더구나. 해와 달도 흘러가 잠시도 쉬지 않느니, 내일의 해는 오늘이 아닌 것이다. 그럴진대 맞이한다는 것은 거스르는 것이요, 끌어당기는 것은 애만 쓰는 것이니라. 보내는 것을 순리대로 하면, 너는 마음에 머무는 것도 없게 되고, 기운이 막히는 것도 없게 되겠지. 에 따라 순응하여 명으로써 아를 보고, 로써 떠나보내 이로써 물을 보면, 흐르는 물이 손가락에 있고 흰 구름이 피어날 것이니라.”
童子涕泣漣如, : “昔者夫子摩我頂, 律我五戒, 施我法名. 今夫子言之, 名則非我, 我則是空, 空則無形, 名將焉施? 請還其名.” 師曰: “汝順受而遣之. 我觀世六十年, 物無留者, 滔滔皆往. 日月其逝, 不停其輪. 明日之日, 非今日也. 故迎者逆也, 挽者勉也. 遣者順也, 汝無心留, 汝無氣滯. 順之以命, 命以觀我, 遣之以理, 理以觀物. 流水在指, 白雲起矣.”

스님! 그럼 저더러 어찌하란 말씀이신가요? 예전 제게 법명法名을 내리시며, 살생하지 말고 도적질하지 말며, 간음하지 말고 망령된 언동을 하지 말며, 술을 마시지 말라는 계율을 주셨지요. 그래 놓고 이제 와서 향이 곧 재이고 연기는 곧 공이라 하시며, 이름은 내가 아니요 나는 곧 공이요 무일 뿐이라고 하십니다 그려. 제자는 심히 의혹하나이다. 그렇다면 제게 이름이 무슨 소용이랍니까? 제게 주신 그 이름 다시 돌려드리렵니다. 스님!

제자야! 너는 아직도 이름에 집착하고 있구나. 집착을 끊겠다고 이름마저 버린다면 너는 과연 누구냐? 또 이름을 버릴진대 과연 집착도 끊어지게 되는 것일까? 이름만 버려서 집착을 끊을 수 있다면 무에 어려울 것이 있겠느냐? 향을 사르면 연기가 피어오르고, 연기는 허공에 사라져 버린다. 타고 남은 재에는 향기가 없고 사라진 연기는 찾을 길이 없으니, 그 향기와 연기는 분명히 있었으되 어디에도 없는 것을.

내 육십 평생을 살다보니 만물의 소장消長하는 이치가 꼭 이와 같더구나. 사물은 어느 것 하나 그 자리에 머무는 법이 없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 소멸하는 것일 뿐이니라. 우리네 인생도 저와 같아서 무엇을 이룬다 함도 허망할 뿐이고, 무엇을 남긴다 함도 덧없을 따름이다. 그저 왔다가 바람결에 사라져 버리는 연기와 같은 것을. 그것이 비록 한때는 아름다운 향기였다 할지라도 지나고 나면 싸늘히 식은 재에 불과한 것을. 제자야! 명심하도록 해라. 내일은 오늘이 아니요, 오늘은 어제가 아니니라. 그러니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을 오늘로 끌어올 수가 없고, 가버린 어제를 오늘에 붙들어 둘 수는 없는 것이야. 그저 해와 달이 쉬지 않고 운행을 계속하듯, 오는 인연 마다않고 가는 인연 연연치 말아야지. 순리로 받아들여 순리대로 보내면 되는 것을. 네 마음에 아무 것도 들이지 않고, 네 생각에 엉킨 집착도 없이 천명天命에 순응하여 천명으로 를 바라보고 이로써 떠나보내 을 살핀다면, 네 손가락 끝에서 강물이 흘러가고 흰 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날 것이니라. 그저 이름만 버린다고 될 일이 아니니라. 네가 이 이치를 알겠느냐? 깨달을 수 있겠느냐!

 

 

 

 

 

 

4. 태를 바꿔가며 변해가네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이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알 수 없어요의 전문이다. 향은 타고 나면 재가 남지만, 만해는 그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된다고 썼다. 타고 남은 재에서 단지 허무虛無와 공적空寂만을 본다면 그것은 깨달음이랄 수도 없다. 그처럼 그칠 줄 모르며 타는 나의 가슴이 있어, 재가 되고 허공이 된 뒤에도 허무적멸虛無寂滅로 스러지지 않고 알 수 없는 향기가 되고 작은 시내의 노래가 되며, 오동잎의 파문이 되어 전 우주를 껴안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5. 무엇을 보려는가

 

 

내가 이때 턱을 받치고 곁에 앉아 이를 듣고 있었는데 참으로 아마득하였다.
백오伯五 서상수徐常修가 그 집을 관재觀齋라고 이름 짓고서 내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대저 백오가 어찌 치준緇俊 스님의 설법을 들었단 말인가? 드디어 그 말을 써서 기로 삼는다.
余時支頤, 旁坐聽之, 固茫然也. 伯五名其軒曰: 觀齋. 屬余序之. 夫伯五豈有聞乎俊師之說者耶. 遂書其言, 以爲之記.

내 친구 서상수徐常修가 제 집 이름을 관재觀齋라고 지었다. 여보게, 백오伯五! 자네는 관재에서 도대체 무엇을 보겠다는 것인가? 타고남은 재를 보는가? 허공으로 흩어지는 연기를 보는가? 허망한 이름을 보는가? 부질없는 공덕을 보는가? 마음에 머물리는 집착을 걷어내고, 을 따라 아를 보고, 에 실어 물을 보게. 그것이야 말로 실답게 보는것이 아니겠는가?

 

 

 

 

 

6. 벗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이 담긴 편지들

 

 

짤막한 편지글 두 편을 함께 더 읽어본다. 두 편 모두 벗을 향한 애틋한 그리움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별의 말이 간절해도, 이른바 천리 길에 그댈 보내매 마침내는 한번 이별일 뿐이라는 것이니 어찌 하겠소. 다만 한 가닥 가녀린 정서情緖가 이리저리 감겨 면면이 끊어지지 않으니, 마치 허공 속의 허깨비 꽃과도 같구려. 와도 어디서 조차 오는지 모르겠고, 떠나가도 다시금 애틋할 뿐이라오.
別語關關, 所謂送君千里, 終當一別, 柰何柰何. 只有一端弱緖, 飄裊纏綿, 如空裡幻花. 來卻無從, 去復婀娜耳.

답경지答京之, 즉 경지에게 보낸 답장의 엽서다. 벗과 헤어진 뒤 그 연연하고 애틋한 정서를 절묘하게 포착한 소품이다. 잘 가시게, 잘 있게. 이별의 말을 나누자 어느 새 가슴 한 구석이 메어져 온다. 무어라 꼭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가녀린 명주실이 온 몸을 이리저리 감싼 듯 떨칠길 없는 면면한 정서가 내 마음 위로 흐른다. 그것은 분명히 있으되 볼 수가 없으니 허공 속의 환화幻花가 아니겠는가? 이런 정서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사라지는 것일까?

 

 

접때 백화암百華菴에 앉았노라니, 암주菴主인 처화處華가 먼데 마을에서 바람결에 들려오는 다듬이 소리를 듣고는 그 비구인 영탁靈托에게 게를 내려 말하였다.
탁탁톡톡 하는 소리 어디 먼저 떨어질꼬?”
그러자 영탁靈托이 손을 맞잡고 말하였다.
먼저도 아니요 나중도 아니거니, 어디에서 이 소리를 듣겠습니까?”
頃坐百華菴, 菴主處華, 聞遠邨風砧, 傳偈其比丘靈托曰: “椓椓礑礑, 落得誰先?” 托拱手曰: “不先不後, 聽是那際?”

그리고 나서 연암은 뚱딴지 같은 선문답禪問答을 늘어놓는다. 깊은 밤 먼데 마을에서 겨울 옷을 다듬이질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탁탁톡톡, 탁탁톡톡. 리듬을 타고 쉴 새 없이 들려오는 그 소리를 듣다가 문득 백화암百華菴의 주지인 처화處華 스님이 상좌에게 질문을 던진다. “저 다듬이 소리가 허공으로 올라갔다가 가장 먼저 떨어지는 곳이 어디 쯤인고?” 영탁靈托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이렇게 대답한다. “스님! 앞에도 없고 뒤에도 없으니 소리는 무슨 소리를 듣는답니까?” 소리가 떨어지는 지점을 묻는데, 아예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고 한다. 동문東問에 서답西答으로 사제 간의 선문답은 싱겁게 끝이 나고 말았다. 사실 앞인지 뒤인지를 굳이 따져 헤아리는 분별지分別知를 마음에서 걷어내고 보면, 소리의 집착을 넘어서는 대자유의 경계가 펼쳐지는 법이다.

 

 

어제 그대가 정자 위에서 난간을 돌며 서성거릴 때 저는 또 다리 어귀에서 말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 사이의 거리가 하마 1리 남짓 되더군요. 그때 우리 두 사람이 서로 바라보던 곳은 또 어디쯤이었을까요?
昨日足下, 猶於亭上, 循欄徘徊, 僕亦立馬橋頭, 其間相去已爲里許. 不知兩相望處, 還是那際.

어제 내가 그대와 헤어진 뒤 그대는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정자 난간을 세며 돌고, 나도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다리 어귀에서 말을 세우고 그대가 서성이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소. 그때 우리 두 사람이 바라보던 그 지점은 어디였을까요? 허공의 환화와 같은 그리움이 만나던 지점은 앞이였던가요, 뒤였던가요? 아니, 우리의 마음은 애초에 떨어짐이 없이 하나였는데, 만나기는 어디서 만난답니까?

 

 

저물녘 용수산龍首山에 올라 그댈 기다렸지만 오시질 않더군요. 강물만 동편에서 흘러와서는 어디로 가는지 보이지 않더이다. 밤이 이슥하여 달이 떠오길래 정자 아래로 돌아왔지요. 늙은 나무가 희뿌연데 사람이 서 있길래, 나는 또 그대가 나보다 먼저 그 사이에 와 있는가 생각했었다오.
暮登龍首山, 候足下, 不至. 江水東來, 不見其去. 夜深泛月, 而歸亭下. 老樹白而人立, 又疑足下先在其間也.

답창애答蒼厓다섯 번 째 편지이다. 오기로 한 벗은 기다려도 오지 않고, 강물만 멀리서 흘러와서는 또 어둠 속으로 흘러가 버린다. 밤 깊어 달이 둥실 떠오길래 만나기로 한 정자 아래로 돌아오는데 희뿌연 나무 아래를 보니 사람이 하나 우두커니 서 있다. 반가운 마음에 그대가 나를 놀래 주려고 그 사이에 먼저 와 있는가 했더라는 사연이다. 길게 마음에 여운을 남긴다.

뭐 연기처럼 왔다가 티끌로 스러지고 마는 허무한 인생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따뜻한 편지라도 한통 주고받으며 산다면 세상 사는 재미가 그 얼마나 푸근할 것이랴. 옛글을 읽다 보면 참 우리가 멋도 없이 사는구나 싶을 때가 많다. 앞서 본 치준緇俊 스님에 대한 이야기는 연암의 풍악당집서楓嶽堂集序에도 다른 삽화로 실려 있다.

 

 

 

 

인용

지도 / 목차 / 한시미학 / 연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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