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밤과 쌀 같은 문집을 내밀며
소천암小川菴이 우리나라의 민요와 민속, 방언과 속기俗技를 두루 기록하였는데, 심지어 종이연에도 계보가 있고, 아이들 수수께끼에도 풀이를 달아 놓았다. 후미진 뒷골목의 흐드러진 인정과 익숙한 모습들, 문에 기대서거나 칼을 두드리거나, 어깨짓으로 아양 떨고 손바닥을 치며 맹세하는 시정市井 사람들의 모습이 실려 있지 않은 것이 없는데다 제각금 조목조목 엮어 놓았다. 입과 혀로는 분변하기 어려운 것도 반드시 드러내었고, 생각이 미치지 못하던 바도 책을 열면 문득 실려 있다. 무릇 닭 울고 개 짖으며 벌레가 날고 좀이 꿈틀대는 것도 모두 그 모습과 소리를 얻었다. 이에 있어 십간十干으로 배열하고는 이름 지어 『순패旬稗』라 하였다. 小川菴雜記域內風謠民彛方言俗技, 至於紙鷂有譜, 丱謎著解. 曲巷窮閭, 爛情熟態, 倚門鼓刀, 肩媚掌誓, 靡不蒐載, 各有條貫. 口舌之所難辨, 而必則形之; 志意之所未到, 而開卷輒有. 凡鷄鳴狗嘷, 虫翹蠡蠢, 盡得其容聲. 於是配以十干, 名爲旬稗. |
『순패旬稗』는 어떤 책인가? 소천암小川菴이란 이가 우리나라의 민요와 민속, 방언과 속기俗技를 적어 놓은 책이다. 종이연의 종류와 아이들 수수께끼, 민간의 노래와 사투리에서부터, 닭 울고 개 짖는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실려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장사치들이 제 손바닥을 치면서 한 푼도 남지 않는다고 엄살을 떠는 이야기며, 몸 파는 여자가 어깨 짓을 하면서 남정네를 유혹하는 모습도 이 책을 펴면 만날 수가 있다.
하루는 소매에서 꺼내 내게 보여주며 말하였다. “이것은 내가 아이 적에 장난삼아 써본 것일세. 그대는 홀로 먹을 것에 강정이란 것이 있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쌀가루를 술에 재었다가 누에 만하게 잘라 따뜻한 구들에 말려서는 기름에 지져 부풀리면 그 모양이 고치와 같게 되지. 깨끗하고 예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 속은 텅 비어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는 않고, 성질이 잘 부서지는 지라 훅 불면 눈처럼 날려버린다네. 그런 까닭에 무릇 사물 중에 겉모습은 예쁘지만 속이 텅 빈 것을 강정이라고들 말하지. 이제 대저 개암과 밤, 찹쌀과 멥쌀은 사람들이 천하게 여기는 바이나, 실지가 아름답고 참으로 배를 부르게 한다네. 그래서 하늘에 제사지낼 수도 있고, 큰 손님에게 폐백으로 드릴 수도 있지. 대저 문장의 방법도 또한 이와 같다네. 그런데도 사람들은 개암이나 밤, 찹쌀과 멥쌀을 낮고 더럽게 여기니, 그대가 나를 위해 이를 변론해주지 않으려나?” 一日袖以示余曰: "此吾童子時手戱也. 子獨不見食之有粔米余乎? 粉米漬酒, 截以蚕大, 煖堗焙之, 煮油漲之, 其形如繭. 非不潔且美也, 其中空空, 啖而難飽, 其質易碎, 吹則雪飛. 故凡物之外美而中空者, 謂之粔米余. 今夫榛栗稻秔, 卽人所賤. 然實美而眞飽, 則可以事上帝, 亦可以贄盛賓. 夫文章之道, 亦如是, 而人以其榛栗稻秔, 而鄙夷之. 則子盍爲我辨之?" |
뜬금없이 이 책을 가져온 소천암은 연암에게 다짜고짜 이렇게 말한다.
“자네, 강정을 먹어본 적이 있던가? 쌀가루를 술에 재어 구들에 말린 후 기름에 튀겨 내면 누에고치 모양이 된다네. 깨끗하고 예뻐 먹음직스럽긴 해도, 속이 텅 비어있어 아무리 먹어도 배는 부르질 않지. 그뿐인가? 이게 잘 부서져서 훅 불면 눈가루 같이 날려 버린다네. 그래서 사람들이 겉만 번지르하고 실속은 없는 것을 두고 ‘속 빈 강정’이라고 말하지 않던가? 개암이나 밤, 찹쌀과 멥쌀 따위는 흔히 보고 늘 먹는 것이어서 사람들이 우습게보지만, 이것을 먹으면 배가 부르고, 또 몸에도 이롭단 말일세. 그래서 제사상에도 오르고 폐백 음식도 이걸 쓰지 않던가? 나는 글 쓰는 일도 이것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하네. 겉만 번지르하고 알맹이는 없는 그런 글보다, 겉보기엔 평범해 보여도 읽고 나면 생각에 잠기게 하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그런 글이 정말 좋은 글이란 말이지. 정말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알맹일 거란 말일세. 그런데 사람들은 속빈 강정만 예쁘다 하고, 개암이나 밤, 찹쌀과 멥쌀은 낮고 더럽다하여 거들떠보지도 않으니 어찌 하겠나? 자네 생각을 말해주지 않으려나?”
2. 일상을 담아낸 이 글의 가치
소천암은 이렇게 연암에게 자신이 지은 책과 함께 화두 하나를 던져 놓고 가버렸다. 『순패』를 다 읽고 난 연암은 소천암에게 이렇게 대답한다.
“여보게, 소천암! 나는 이렇게 생각하네. 꿈에 장자가 나비로 된 것은 믿지 않을 수가 없다고 보네. 장자의 꿈이야 내가 장자가 아닌 이상에야 어찌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증명해 낼 수 있겠는가? 그런데 한나라 때 장수 이광李廣이 밤길을 가다가 범을 보고 화살을 매겼는데, 이튿날 가서 보니 그게 범이 아니라 바위였더란 이야기, 또 그 화살이 바위에 깊숙이 박혀 있더란 이야기는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단 말이야. 아무리 범인 줄 알고 쏘았다 해도 화살이 바위를 꿰뚫는 이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게 정녕 사실이라면 지금도 그 바위에 화살이 박혔던 자리가 남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말이야. 이런 종류의 일은 금세 눈으로 보아 확인할 수 있는 일이기에 사람들이 잘 납득 않는 법이거든.
그런데 자네의 『순패』는 모두 이광의 화살 같은 것일세 그려. 실려 있는 내용이란 것이 모두 지금 내 눈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일상의 일들뿐이니, 하나도 신기할 구석이 없는데다, 옳고 그름이 그 즉시 드러나게 되니 말일세. 비록 그렇기는 해도 이것이 아주 의미 없지는 않다고 보네. 해묵은 장도 새 그릇에 담고 보면 새 장 맛이 나고, 평범한 이야기도 장소가 바뀌면 그럴듯한 이야기가 되지 않던가? 나는 자네의 이 책이 바로 새 그릇이요 다른 장소라고 보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이야기, 누구나 으레 그러려니 하고 여기던 일들을 막상 이렇게 갈래를 나누어 꼼꼼히 기록해 놓고 보니, 참으로 보배로운 한 권이 책이 되었군 그래.
자네는 앞서 속빈 강정과 밥 이야기를 했었지? 매일 먹는 밥이고 보니 시큰둥하게 생각하다가 어쩌다 강정을 보면 먹음직스런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나? 그렇지만 속빈 강정만 먹고는 살 수가 없으니 문제가 되지. 늘상 보는 것들은 관심을 끌지 못하고 새로운 것은 호기심을 일으키지만, 새롭다고 해서 곧 가치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일세. 말하자면 자네의 이 책은 속빈 강정을 내던지고, 개암이나 밤, 쌀밥 따위의 일상적인 것을 취한 것일세.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우습게 보아 넘기겠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네. 알맹이는 없이 번지르하게 꾸미기에만 급급한 허황한 글놀음 보다야 백번 낫다고 보네.
- 한나라 때 이광李廣이 밤길을 가다가 범이 웅크려 있는 것을 보고 화살을 매겨 쏘았는데, 밝은 날 가서 보니 범이 아니라 바위였다. 그런데 화살은 그 바위에 깊숙이 꽂혀 있었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3. 알맹이는 갖추되 수사도 신경 쓴 작품집
이 책을 보는 자는 소천암小川菴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고, 노래가 어느 지방의 것인지를 물어볼 필요도 없이 바로 알 수 있을 걸세. 이에 있어 잇대어 읽어 가락을 이루게 되면 성정性情을 논할 수도 있을 것이고, 화보畵譜를 붙여 그림을 그린다면 수염과 눈썹까지도 징험해낼 수 있을 것이네. 재래도인䏁睞道人이 일찍이 논하기를, ‘석양 무렵 한 조각 돛단배가 잠깐 갈대숲 사이에 숨어 있으니, 뱃사공과 어부가 비록 모두 텁석부리에 쑥대머리라 해도 물가를 따라가며 바라보노라면, 심지어 고사高士 육노망陸魯望인가 의심하게 된다’고 한 적이 있네. 아아! 도인道人이 나보다 먼저 얻었도다. 그대는 도인을 스승으로 모셔야겠네. 찾아가서 징험해보게나!“ 覽斯卷者, 不必問小川菴之爲何人, 風謠之何方, 方可以得之. 於是焉, 聯讀成韻, 則性情可論, 接譜爲畵, 則鬚眉可徵, 재(目宰)睞道人嘗論: '夕陽片帆, 乍隱蘆葦, 舟人漁子, 雖皆拳鬚突鬢, 遵渚而望, 甚疑其高士陸魯望先生.‘ 嗟呼! 道人先獲矣. 子於道人師之也, 往徵也哉!” |
이제 이 책을 읽어 보면 소천암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가 마치 눈앞에 서 있는 것처럼 떠오르고, 여기에 실린 노래는 가락까지 흥얼흥얼 따라 부를 수가 있지. 이 책을 곁에 두고서 아끼어 읽는다면 옛적의 민요인 『시경詩經』을 오늘에 읽어 성정性情을 바로 갖게 되는 것과 같은 보람을 얻게 될 걸세. 아예 그림까지 붙인다면 지금 세상의 사람 사는 모습이 그대로 뒷날까지 남을 수 있지 않겠나? 자네 참으로 애썼네.”
그리고 나서 연암은 재래도인의 이야기를 꺼낸다. ‘재䏁’는 옥편에 있지도 않은 글자이고 ‘래睞’는 삐딱하게 흘겨본다는 뜻이니, 재래도인이란 이른바 ‘삐따기 도인’인 셈이다. 그런데 이 삐따기 도인이 누군고 하니, 바로 이덕무李德懋이다. 글자의 출입은 있지만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보면 연암이 인용한 재래도인의 말이 그대로 실려 있다.
꽁깍지만한 배에 고기 그물을 싣고, 석양 무렵 맑은 강에 두 폭 돛을 달고서 갈대 우거진 속으로 떨쳐 들어가니, 배 가운데 탄 사람이 비록 모두 텁석부리에 쑥대머리일지라도 물가를 따라가며 바라보면 고사高士 육노망陸魯望 선생인가 싶어진다. 荳殼船載魚網, 夕陽澄江懸二幅帆, 拂拂入蘆葦中, 舟中人, 雖皆拳鬚突鬢, 然遵渚而望, 疑其高士陸魯望先生. |
고기 그물을 싣고 쌍포 돛을 단 배야 일상에서 흔히 보는 풍경이지만, 강물이 맑고 때가 석양인데다 하필 들어가는 곳이 갈대숲이고 보니, 그 안에 타고 있을 텁석부리에 쑥대머리 어부도 저 당나라 때 고사인 강호산인江湖散人 육구몽陸龜蒙일 것처럼만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른바 해묵은 장도 그릇을 바꾸고 보니 입맛에 새롭더라는 이야기의 부연이다. 그렇지만 연암이 끝에서 이덕무의 말을 끌어와 그를 스승으로 모시라고 한 것은, 텁석부리 쑥대머리를 고사 육노망 선생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솜씨는 아직도 부족하니 좀 더 노력하라는 주문으로 나는 읽었다.
「순패서旬牌序」의 이야기를 다시 간추리면 이렇다. 실속 있는 것은 겉보기에 좋아 보이지 않는다. 알맹이 없는 것일수록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속빈 강정으로는 배를 채울 수가 없다. 그러니 실속 없이 겉꾸미기에 연연하지 말아라. 화장만으로는 본바탕의 추함을 가릴 수가 없다. 그럴 듯해 보이려고 애쓰지 말아라. 알맹이 없이는 소용이 없다. 문제는 겉모습이 아니라 속 내용이다. 그렇지만 속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텁석부리 쑥대머리라면 누가 거들떠보겠는가? 그러기에 문장의 수사는 바로 해묵은 장을 새 맛 나게 하는 ‘새 그릇’인 셈이다. 일상적인 이야기인데도 듣는 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도록 만드는 ‘다른 경계’인 셈이다.
4. 편지에 으레 쓰던 문장을 쓰지 말라
이어서 다시 한편의 글을 더 읽기로 한다. 「영대정승묵자서映帶亭賸墨自序」이다. 당시 척독尺牘, 즉 편지글의 병통에 대해 쓴 글인데, 문집에 이미 앞의 60자가 결락되어 있어 문맥을 소연히 파악하기가 힘들다.
‘다음과 같이 삼가 아뢴다’는 이른바 ‘우근진右謹陳’이란 말은 진실로 속되고 더럽다. 유독 모르겠거니와 세상에 글 짓는 자를 어찌 손꼽아 헤일 수 있으리오만, 판에 찍은 듯이 모두 이 말을 먹지도 못할 음식을 주욱 늘어놓듯이 쓰니, 공용 격식의 글머리나 말 머리에 으레 쓰는 투식의 말 되기에야 어찌 해가 되겠는가? 「요전堯典」의 ‘옛날을 상고하건데’란 뜻의 ‘왈약계고曰若稽古’나, 불경佛經의 ‘나는 이렇게 들었노라’란 뜻의 ‘여시아문如是我聞’은 바로 지금의 ‘우근진’일 뿐이다. 所謂右謹陳, 誠俚且穢. 獨不知世間操觚者何限, 印板總是餖飣餕餘, 則何傷於公格之頭辭發語之例套乎? 堯典之‘曰若稽古’, 佛經之‘如是我聞', 迺今時之右謹陳爾. |
‘우근진右謹陳’이란 당시 편지글에서 습관처럼 쓰던 말이다. 편지 쓰는 사람들은 백이면 백 어김없이 약속이나 한 듯이 이 말을 쓴다. 격식을 따지는 공문서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일상 쓰는 편지글에서야 굳이 이 말만은 꼭 써야하는 까닭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서경書經』 「요전堯典」을 보면 글이 시작되는 곳마다 ‘왈약계고曰若稽古’를 되뇌고 있고, 그 많은 불경에는 어김없이 ‘여시아문如是我聞’이 서두에 적혀 있다. 그 ‘여시아문’ 중에는 부처님이 직접 하지 않은 자기 말도 얼마나 많겠는가 말이다. 그러고 보면 습관처럼 쓰는 투식의 말은 예나 지금이나 있는 것이었구나.
『서경書經』에서 썼고, 불경에서도 쓰고 있으며, 지금 편지 쓰는 사람들도 한결 같이 모두 다 쓰고 있으니, 나도 덩달아 ‘우근진’을 쓴다 해서 해될 것은 무언가?
홀로 봄 숲에 우는 새는 소리마다 각각 다르고, 해시海市에서 보물을 살펴보면 하나하나가 모두 새롭다. 하주荷珠, 즉 연잎에 구르는 이슬은 절로 둥글고 초박楚璞은 깎지 않아도 보배롭다. 그럴진대 척독가尺牘家가 『논어論語』를 조술祖述하고 풍아風雅를 거슬러가며, 그 사령辭令은 정자산鄭子産과 숙향叔向에게서 배우고, 장고掌故는 유향劉向의 『신서新序』와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世說新語』를 본받는다면, 그 핵실核實하고 꼭 알맞은 것이 홀로 책策에 뛰어났던 가의賈誼나 주의奏議에 능했던 육지陸贄일 뿐이 아닐 것이다. 저가 고문사古文辭로 한번 이름이 나게 되면 단지 서序와 기記가 으뜸이 되는 줄만 알아, 허황된 것을 얼기설기 엮거나 엉뚱한 것을 끌어 당겨 와서는, 이러한 것들이 소가小家의 묘품玅品이 됨을 배척하면서, 볕드는 창 깨끗한 안석에서 졸다가 베개로 고이기나 한다. 獨其聽禽春林, 聲聲各異, 閱寶海市, 件件皆新. 荷珠自圓, 楚璞不劚, 則此尺牘家之祖述論語, 泝源風雅, 其辭令則子産叔向, 掌故則新序世說, 其核實剴切, 不獨長策之賈傅, 執事之宣公爾. 彼一號古文辭, 則但知序記之爲宗, 架鑿虛譌, 挐挹浮濫. 指斥此等爲小家玅品, 明牕淨几, 睡餘支枕. |
그러나 봄날 숲 속에 우는 새는 그 소리가 제각금 모두 다르다. 페르샤의 보물가게에는 하나도 같은 보석이 없다. 연잎 위로 구르는 이슬은 동글동글 둥글고, 화씨和氏의 구슬은 굳이 가공하지 않더라도 진秦나라의 열다섯 성과 맞바꿀 수가 있다. 세상 사물은 이렇듯 한결 같지가 않은데, 유독 글 쓰는 사람들은 한결같은 투식만을 금과옥조로 여긴다. 조금만 낯설거나, 처음 보는 것이 나오면 그들은 도무지 이것을 용납할 수가 없는 것이다.
좋은 편지글을 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우근진’의 투식을 버려야 한다. 편지글의 모범은 당송팔대가의 글에만 있지 않고, 『소황척독蘇黃尺牘』에만 있지도 않다. 그것은 『논어』 속에도 있고 『시경』 속에도 있다.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정자산鄭子産과 숙향叔向의 외교 문서나, 유향劉向의 『신서新序』와 유의경劉義慶의 『세설신어世說新語』 같은 고사故事 책 속에도 있다. 봄 숲의 새 울음처럼, 페르시아의 보석처럼, 편지글의 내용과 형식은 제각금 달라야 한다. 꼭 이래야 한다는 법은 없다. 하주荷珠는 하주대로, 초박楚璞은 초박대로의 가치가 있다. 왜 천편일률로 하는가? 왜 각기 다른 개성을 하나의 틀 속에 부어 획일적으로 찍어내는가?
▲ 정조가 어렸을 때 쓴 한글편지
5. 누구나 쓰는 말이 들어 있지 않은 편지 모음집
근엄하고 엄숙한 것이 예禮이기는 하다. 옷소매를 넓게 펴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예는 예이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데 있어서는 그것이 예가 될 수가 없다. 어버이를 기쁘게 하려고 나이 70에 때때옷을 입고서 재롱을 떨었다는 노래자老萊子의 이야기를 꺼낼 것도 없다. 진정한 효孝는 어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일 뿐, 근엄한 것과는 관계가 없다. 다소 경망스레 보이더라도 어버이가 기뻐하신다면 그것이 예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 『예기禮記』에 그렇게 나와 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우긴다. 사서四書에 적혀 있으니 어버이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비례非禮가 된다고 우긴다. 그렇지만 그 사서 가운데 『논어』를 보면 공자께서도 농담을 하지 않으셨던가 말이다. 『시경』에도 늦잠 투정하는 남정네의 애교가 실려 있지 않던가 말이다. 어떻게 모두 융통성 없이 곧이곧대로만 하는가? 뻗을 자리를 보고 뻗어라. 그것은 결코 아무 때나 휘둘러도 좋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가 아니다.
편지글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 한유韓愈가 쓰고 소동파蘇東坡가 쓰고, 황산곡黃山谷이 썼다 해서 내가 꼭 써야 할 이유는 없다. 소동파 이전에, 황산곡 이전에도 ‘우근진’이 있었던가? 그 이전에도 편지글은 있었다. 그렇지만 ‘우근진’ 없이도 잘만 썼다. 그런데 왜 지금만 꼭 ‘우근진’이 있어야 한다는 말인가? 정작 한유는 ‘무거진언務去陳言’ 즉 글을 쓸 때 진부한 말을 제거하기에 힘쓰라고 하였다. 그런데 후인들은 한유가 그렇게 썼으니까, 소동파가 그렇게 썼으니까 하면서 그 말을 앵무새처럼 되뇌인다.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 되었다.
우연히 책 상자를 살펴보다가, 때가 마침 추운 겨울인지라 바야흐로 창문을 발랐는데, 예전에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글로 끼적거리다 남은 것을 얻으니, 모두 50여칙이었다. 어떤 것은 글자가 파리 대가리만 하고, 어떤 것은 종이가 나비 날개처럼 얇다. 어떤 것은 장독 덮개로 쓰기에는 조금 남고, 어떤 것은 대바구니에 바르기에는 부족하였다. 이에 뽑아서 한 권을 베껴 쓰고 방경각放瓊閣의 동루東樓에 보관해 두었다. 임진년(1772) 10월 초순, 연암거사는 쓴다. 偶閱巾笥, 時當寒天, 方塗窓眼, 舊與知舊書疏, 得其副墨賸毫, 共五十餘則. 或字如蠅頭, 或紙如蝶翅, 或覆瓿則有餘, 或糊籠則不足. 於是抄寫一卷, 藏棄于放瓊閣之東樓. 歲壬辰孟冬上瀚. 燕巖居士書. |
추운 겨울날 창문을 바르려고 종이를 꺼내다가 함께 옛날 벗들에게 부치느라 써둔 편지의 초고 뭉치가 나왔다. 그래서 버리기 아까워 수습한 것이 바로 『영대정승묵映帶亭賸墨』이다. 내 편지글에는 그 흔해 빠진 ‘우근진’ 하나 없으니 사람들은 대단히 잘못되었다고 나무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그 말이 추하고 더럽다고 여길 뿐, 그 말 안 들어 간 것이 조금도 부끄럽지가 않다.
- 『禮記』 「內則」에 “及所, 下氣怡聲, 問衣襖寒”이라 하였고, 「檀弓」上에는 “左右就養無方”의 말이 있다. 어버이를 봉양함에 기운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기쁜 목소리로 덥고 추움을 물으며, 좌우에서 봉양함에 나아감은 곳을 가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 『論語』 「陽貨」에 나오는 말이다. 子游가 武城의 원이 되었는데, 공자가 그곳에 갔다가 거문고에 맞추어 노래부르는 소리를 듣고는 빙그레 웃으며, 닭잡는데 어찌 소잡는 칼을 쓰느냐고 하자, 子游가 “군자가 도를 배우면 사람을 사랑하고, 小人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쉽다”고 한 공자의 말로 대답하자, 공자가 그의 말이 옳다고 하며 앞서 한 말은 농담이었다고 한 것을 두고 한 말. [본문으로]
- 『詩經』 鄭風 「女曰雞鳴」에 나온다. [본문으로]
6. 연암의 개성 넘치는 표현이 담긴 편지들
이제 연암의 『영대정승묵』에 실린 편지글 세 편을 읽으며 이번 글을 마무리 하겠다.
어린아이들 노래에 이르기를, “도끼를 휘둘러 허공을 치는 것은 바늘 가지고 눈동자 찌름만 같지 못하네”라 하였소. 또 속담에도 있지요. “삼공三公과 사귈 것 없이 네 몸을 삼갈 일이다”라는 말 말입니다. 그대는 잊지 마십시오. 차라리 약한 듯 굳셀지언정 용감한 체 하면서 뒤로 물러 터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이오. 하물며 외세의 믿을만한 것이 못됨이겠습니까? 孺子謠曰: “揮斧擊空, 不如持鍼擬瞳.” 且里諺有之: “无交三公, 淑愼爾躬.” 足下其志之. 寧爲弱固, 不可勇脆. 而況外勢之不可恃者乎? |
「여중일與中一」, 즉 중일中一이란 이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이다. 아마 그가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 무슨 일을 해결해 보려고 애쓰는 것을 보고 안쓰러워 보낸 글이지 싶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도끼를 휘두른대도 목표물을 맞히지 못하면 헛힘만 빠질 뿐이다. 차라리 작은 바늘로 상대의 급소를 찌르는 편이 훨씬 낫다. 굳이 높은 벼슬아치에게 연줄을 대려고 애쓸 것 없다. 내가 내 몸가짐을 바로 해 애초에 그런 일이 없도록 했어야 했다. 겉으로 위세등등하면서 뒤로 무른 것보다는 외유내강이 훨씬 더 낫다. 외세는 결코 믿을 것이 못된다. 경전의 말을 끌어오는 대신 아이들의 동요와 민간의 속담을 인용해 충고를 던진 것이다. 속빈 강정이기보다 매일 먹는 밥과 해묵은 장맛으로 쓴 글이다.
정옹鄭翁은 술이 거나해질수록 붓이 더욱 굳세어졌었지요. 그 큰 점은 마치 공만 하였고, 먹물은 날리어 왼쪽 뺨으로 떨어지곤 했더랍니다. ‘남南’자를 쓰다가 오른쪽 내려 긋는 획이 종이 밖으로 나가 방석을 지나자, 붓을 던지더니만 씩 웃고는 유유히 용호龍湖를 향해 떠나갑디다. 지금은 찾아볼 수가 없군요. 鄭翁飮逾豪而筆逾健. 其大點如毬, 墨沫飛落左頰. 南字右脚過紙歷席, 擲筆笑, 悠然向龍湖去. 今不可尋矣. |
「답창애答蒼厓」, 즉 창애蒼厓 유한준兪漢雋에게 보낸 아홉 번째 편지글이다. 전문이래야 42자에 불과한데, 鄭翁이 술이 거나한 채로 글씨 쓰는 광경이 마치 눈앞에 보이는 것만 같다. 글은 모름지기 이렇게 살아 움직이는 맛이 있어야 한다.
귀에 대고 하는 말은 듣지를 말고, 절대 남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며 할 얘기라면 하지를 말 일이오. 남이 알까 염려하면서 어찌 말을 하고 어찌 듣는단 말이오. 이미 말을 해 놓고 다시금 경계한다면 이는 사람을 의심하는 것인데, 사람을 의심하면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 하겠소. 附耳之言勿聽焉, 戒洩之談勿言焉. 猶恐人知, 奈何言之, 奈何聽之? 旣言而復戒, 是疑人也, 疑人而言之, 是不智也. |
「답중옥答仲玉」의 첫 번째 편지이다. 원래 세상일이란 것이 그렇다. 귓속말은 대부분 떳떳치 못한 말이다. ‘이건 절대 비밀인데’ 하며 하는 이야기는 으레 그 말까지 함께 옮겨지게 마련이다. 역시 전문이래야 44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간결한 필치 속에 이미 자신이 하고픈 말은 다 담고 있다. 글이란 이렇게 맵짜야 한다.
속빈 강정 같은 시, ‘우근진右謹陳’일 뿐인 문학, 판에 박힌 투식, 나는 이런 것들을 거부한다. 봄 동산의 새 인양, 페르시아의 보석같이, 연잎 위를 구르는 이슬처럼 영롱한 목소리가 듣고 싶다. 눈에 시고 귀에 젖도록 보고 들었으되 전혀 새롭고, 새 그릇에 담은 해묵은 장맛 같이 웅숭깊은 그런 시가 읽고 싶다. 실상은 텁석부리 더벅머리일지라도 고사 육노망처럼 바라보게 만드는 그런 글과 만나고 싶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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