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이 작품집에 나는 모르고 그대들만 아는 코골이는 알려주시라
이로 볼진대 얻고 잃음은 내게 달려 있지만 기리고 헐뜯음은 남에게 있다. 비유하자면 이명耳鳴이나 코골기와 같다. 어린아이가 마당에서 놀고 있는데, 그 귀가 갑자기 우는지라 놀라 기뻐하며 가만히 옆의 아이에게 말하였다. “얘! 너 이 소리를 들어 보아라. 내 귀가 우는구나. 피리를 부는 듯, 생황을 부는 듯, 마치 별처럼 동그랗게 들려!” 옆의 아이가 귀를 맞대고 귀 기울여 보았지만 마침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자 이명이 난 아이는 답답해 소리 지르며 남이 알아주지 않음을 한탄하였다. 以是觀之, 得失在我, 毁譽在人. 譬如耳鳴而鼻鼾. 小兒嬉庭, 其耳忽鳴, 啞然而喜, 潛謂隣兒曰: “爾聽此聲. 我耳其嚶. 奏鞸吹笙, 其團如星.” 隣兒傾耳相接, 竟無所聽, 閔然叫號, 恨人之不知也. |
이어서 연암은 이명耳鳴, 즉 귀울음과 코골기의 비유를 다시 들고 나온다. 비유에 들어가기에 앞서, 전제로 내건 것은 ‘득실재아得失在我, 훼예재인毁譽在人’이다. 얻고 잃음은 내게 달려 있고, 그 결과를 두고 좋으니 나쁘니 하며 기리고 헐뜯는 것은 남의 손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내가 마음에 차는 것은 남들이 헐뜯고, 내가 마음에 차지 않는 것을 또 남들은 좋다고 칭찬한다. 내 마음에 차는 것이 남의 눈에도 차보이면 좀 좋을까? 그러나 내 생각과 남의 생각은 같지 않게 마련이어서 우리의 판단은 항상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의 득실得失일까? 아니면 남의 훼예毁譽일까? 나의 득실이 우선 중요하지만 그 판단이 잘못될 수 있기에 문제이고, 남의 훼예를 무시할 수 없지만 그것에 끌려 다닐 수만은 없기에 또 문제가 된다.
일찍이 시골 사람과 함께 자는데, 코를 드르렁드르렁 고는 것이 게우는 소리 같기도 하고, 휘파람 소리 같기도 하고, 탄식하거나 한숨 쉬는 소리 같기도 하며, 불을 부는 듯, 솥이 부글부글 끓는 듯, 빈 수레가 덜그덕거리는 듯하였다. 들이마실 때에는 톱을 켜는 것만 같고, 내쉴 때에는 돼지가 꽥꽥거리는 듯하였다. 남이 흔들어 깨우자 발끈 성을 내면서 말하기를, “내가 언제 코를 골았는가?”하는 것이었다. 嘗與鄕人宿, 鼾息磊磊, 如哇如嘯, 如嘆如噓, 如吹火, 如鼎之沸, 如空車之頓轍, 引者鋸, 吼噴者豕狗, 被人提醒, 勃然而怒曰: “我無是矣.” |
이명은 나는 듣지만 다른 사람은 결코 들을 수가 없다. 코골기는 다른 사람은 다 들어도 정작 나는 듣지 못한다. 그럴진대 이명이 밤길에 비단옷이요, 정령위의 불로장생이라면, 코골기는 장님의 비단옷이요, 양웅의 『태현경』이라고 할 만하다. 내 귀에서 나는 이명을 남들이 듣지 못한다고 안타까워하는 꼬마는 밤길에 비단옷을 입고 가며 그 옷 입은 자랑을 못해 안달이 난 사람이며, 자신이 800살 먹은 사실을 남들이 인정해 주지 않아 속상해하는 정령위일 뿐이다. 나의 코고는 소리를 남이 먼저 알았다고 해서 화를 발칵 내는 시골 사람은 비단옷 입은 장님이거나, 살아 생전 좋은 날이라곤 보지 못한 양웅의 안쓰러움 쯤이 될 터이다.
아아! 자기가 혼자 아는 것은 언제나 남이 알아주지 않아 걱정이고, 자기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은 남이 먼저 앎을 미워한다. 어찌 다만 코와 귀에만 이 같은 병통이 있겠는가? 문장 또한 이보다 심함이 있을 뿐이다. 이명은 병인데도 남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안타까워 하니 하물며 그 병 아닌 것임에랴! 코골기는 병이 아닌데도 남이 일깨워 주는 것에 성을 내니, 하물며 그 병임에랴! 그러므로 이 책을 보는 자가 기왓장 자갈돌이라 해서 버리지 않는다면 화공畵工의 번지는 먹에서 흉악한 도적의 뻗친 수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명을 듣지 않고 내 코골기를 깨닫는다면 작가의 뜻에 거의 가까워질 것이다. 嗟乎! 己所獨知者, 常患人之不知, 已所未悟者, 惡人先覺. 豈獨鼻耳有是病哉! 文章亦有甚焉耳. 耳鳴病也, 閔人之不知, 況其不病者乎! 鼻鼾非病也, 怒人之提醒, 況其病者乎! 故覽斯卷者, 不棄瓦礫, 則畵史之渲墨, 可得劇盜之突면. 毋聽耳鳴, 醒我鼻鼾, 則庶乎作者之意也. |
그런데, 정작 남이 안 알아준다고 화를 내는 이명이 사실은 병증의 결과이며, 남이 먼저 알았다고 성을 내는 코골기가 사실은 병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나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좋다고 여기는데, 남들이 여기에 동의해주질 않으니 나는 화가 난다. 내 판단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은 전혀 고려에 두지 않는다. 반대로 남들이 내게 이것이 잘못되었다 하고 인정할 수 없다고 해도 나는 화가 난다. 그 지적이 정말 옳은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보지 않는다.
글을 쓴다는 것은 오직 ‘참’을 추구하는 것일 뿐이다. 그 ‘참’을 위해서라면 그것이 추하든 악하든 나는 가리지 않겠다. 구슬과 옥이라 해도 ‘참’이 아니라면 나는 버릴 것이고, 자갈돌 기왓장이라 해도 그것이 ‘참’일진대 나는 그것을 추구하리라. 다른 사람이 그것을 말똥구리의 말똥이라고 비웃어도 상관치 않을 것이고, 여룡의 여의주라고 추켜세운다 해도 기고만장하지 않으리라. 우리의 ‘진정지견眞正之見’은 내 이명에 현혹되지 아니하고, 내 코골기를 직시하는 데서 마련될 수 있음을 나는 믿는다. ‘참’은 바로 그 지점에 존재한다.
그렇다면 내가 서 있을 곳은 어디인가? 이명과 코골기의 ‘사이’, 이것과 저것의 ‘중간’ 지점일 뿐이다. 이것은 결코 중용의 미덕을 두둔하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곳이 구체적으로 과연 어디에 있느냐고 누가 내게 재차 묻는다면 나는 ‘도덕지향道德之鄕’에 가서 청허선생聽虛先生에게나 물어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으리라.
▲ 전문
인용
2. 이가 사는 곳
3. 짝짝이 신발
5. 중간에 처하겠다
5-1. 총평
7. 이 작품집에 나는 모르고 그대들만 아는 코골이는 알려주시라
7-1. 총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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