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음산한 빛에 놀라 명문을 부탁하다
「주공탑명」은 윤광심尹光心(1751-1817)이 엮은 『병세집幷世集』과 이규경李圭景(1788-1856)의 『시가점등詩家點燈』에 연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수록되었을 만큼 당대 문인들에게서 그 예술성을 인정받았던 작품이다. 행간이 미묘할 뿐 아니라, 전체 글이 중층의 비유로 이루어져 있어 의미 파악이 쉽지 않다.
첫 단락은 명銘을 쓰게 된 전후 사실을 적고 있다. 주공麈公 스님의 입적 사실과 다비식을 거행하는 과정에서 생긴 이상한 일들, 그리고 사리 수습 및 부도탑浮圖塔을 세우려고 탑명塔銘을 자신에게 청탁해 온 일 등을 기술하였다.
주공麈公 스님이 입적한 지 엿새되던 날 적조암寂照菴 동대東臺에서 다비를 하였다. 그곳은 온숙천溫宿泉 노송나무 아래에서 열 걸음 거리도 되지 않았다. 밤마다 항상 빛이 있었는데, 벌레의 등에서 나는 초록빛이나 물고기 비늘의 흰빛, 썩은 버드나무의 검은빛과도 같았다. 대비구大比丘 현랑玄郞이 대중들을 이끌고서 마당을 돌다가 재계하고 두려워 떨며 마음으로 공덕 쌓기를 맹서하였다. 나흘 밤이 지나서야 스님의 사리 3매를 얻어, 장차 부도浮圖를 세우려고 글과 폐백을 갖추어 나에게 명銘을 청하였다. 釋麈公示寂六日, 茶毗于寂照菴之東臺, 距溫宿泉檜樹下不十武. 夜常有光, 蟲背之綠也, 魚鱗之白也, 柳木朽之玄也. 大比邱玄郞率衆繞場, 齋戒震悚, 誓心功德. 越四夜, 迺得師腦珠三枚, 將修浮圖, 俱書與幣, 請銘于余. |
주공麈公 스님이 입적한지 엿새 만에 다비식을 거행하는데, 그곳은 적조암寂照菴의 동대東臺였다. 회檜나무 그늘 아래 동대東臺에선 이후로 밤마다 이상한 빛이 떠돌았다. 반딧불 같기도 하고, 희뜩한 물고기 비늘 빛인가도 싶고, 또 어찌 보면 썩은 버드나무의 거므스레한 빛인 것도 같았다.
밤마다 나타난 이 녹綠ㆍ백白ㆍ현玄의 세 가지 빛은 대체 어떤 의미를 나타내고 있을까? 연암이 즐겨 빌려 읽었다는 이덕무李德懋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이와 관련된 언급이 보인다.
물고기의 부레나 밤버섯은 모두 밤중에 빛을 낸다. 썩은 버드나무는 한밤중에는 마치 인불[燐火] 같다. 고양이가 캄캄한 밤에 등을 털면 불빛이 번쩍번쩍 한다. 이 네 가지 것들은 음陰의 종류이지만 음陰이 지극하게 되면 밝음과 통하게 된다. 魚膠栗茸, 皆夜有光. 朽柳夜如燐. 烏圓之背, 黑夜拂之, 火光燁燁. 玆四者, 陰類也. 至陰通明 |
이 인용에 따르면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벌레의 등에서 나는 초록빛이나 물고기 비늘의 흰빛, 썩은 버드나무의 검은빛”이란 다름 아닌 ‘지음至陰’한 기운이 뿜어내는 ‘밝음’을 나타낸다. 무리와 함께 마당을 돌다가 스승의 시신을 안치한 대좌臺座 위로 밤마다 떠돌던 음산한 빛을 보고 그것을 스승의 남은 넋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령스런 기운으로 알았던 현랑玄郞 등은, 돌아가신 스승의 정신이 아직도 여기 머물러 자신들을 질책하는가 싶어, 놀라 두려워 떨며 공덕功德 쌓기를 다짐했던 것이다. 다시 그렇게 나흘이 지난 뒤에야 거기에 답하기라도 하듯 주공 스님은 3과顆의 사리를 남겨 응험하였다. 감격한 제자들은 이 일을 자세히 적어 연암을 찾아와 사리탑에 명문銘文 써줄 것을 간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2. 이상한 불빛과 지황탕의 거품
내가 평소에 불가佛家의 말을 잘 알지 못하지만 애써 부탁하는지라, 이에 시험삼아 물어 보았다. “여보시게 현랑玄郞! 내가 옛날에 병으로 지황탕地黃湯을 복용할 적에 즙을 걸러 그릇에 따르는데 자잘한 거품이 부글부글 일지 뭔가. 금싸라기나 은별도 같고, 물고기 아가미에서 나오는 공기 방울 같기도 하고 벌집인가도 싶더군. 거기에 내 모습이 찍혀있는데, 마치 눈동자에 부처가 깃들어 있기나 한 듯이 제각금 상相을 드러내고, 영낙없이 성性을 머금었더란 말일세. 그런데 열이 식고 거품이 잦아들어 마셔 버리자 그릇은 그만 텅 비고 말더란 말이야. 앞서는 또렷하고 분명했는데 누가 자네에게 그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겠나?” 余雅不解浮圖語, 旣勤其請, 迺嘗試問之曰: “郞! 我疇昔而病, 服地黃湯, 漉汁注器, 泡沫細漲, 金粟銀星, 魚呷蜂房. 印我膚髮, 如瞳栖佛, 各各現相, 如如含性. 熱退泡止, 吸盡器空, 昔者惺惺, 誰證爾公.” |
다시 여기에 두 번째 단락이 이어진다. 연암은 현랑의 요청에 불교를 잘 모른다며 사양한다. 통상적으로 이 대목은 주공麈公의 일생 사적事跡이 기술되어야 할 장면인데, 연암은 정작 독자들이 궁금해 하는 주공 스님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든다. 그것은 지황탕의 비유이다.
이 비유를 풀어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지황탕을 복용할 때, 약탕관에 끓여 건巾으로 받쳐 내어 막대를 엇걸어 즙을 짜내면, 부글부글 거품이 일어 그릇 위를 덮는다. 그 모양은 꼭 물고기가 뱉어내는 물방울 같고 벌집 모양인가도 싶다. 그런데 그 거품방울 하나하나 마다 신기하게도 내 모습이 모두 찍혀 있다. 현상함성現相含性이란 말 그대로 내가 어떻게 백이 되고 천이 되어 헤일 수 없는 상相 속에 제각금 성性을 드러낼 수 있을까? 그런데 약이 식어 거품이 잦아들어 다 마셔 버리자, 거품 위에 떠있던 수백 수천의 나는 그만 간곳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많던 나들은 어디로 갔을까? 좀 전엔 분명히 있었는데 금세 찾을 길이 없는 나, 좀전에 내가 보았던 것은 허깨비였을까? 그렇지 않다. 그러나 거품이 사라지고 난 지금, 금방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그 많던 나의 실체를 증명해 보일 방법이 없다.
무슨 얘길까? 주공이 며칠 밤을 이상한 빛으로 떠돌다가 세 개의 사리를 남기고 떠났듯이, 인간이 이 세상에 왔다가 가는 것은 지황탕 위에서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거품과도 같은 것일 뿐이다. 밤마다 허공을 떠돌던 이상한 빛을 누가 증명해 보일 수 있을까? 주공이 남긴 단 세 개의 사리가 그것의 증명이 될 수 있을까? 그 사리를 담은 부도를 세워 거기에 내 글을 적어 새기면 주공이 이 세상에 왔다 간 존재 증명이 될 수 있을까? 주공은 분명히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 그가 죽은 뒤에는 밤마다 이상한 빛이 떠돌았었다. 이 사리탑이, 또 거기에 새긴 탑명이 그것을 증언할 수 있을까? 그것은 마치도 분명히 있었지만 있지 않은 지황탕 위의 거품, 또 거기에 비쳐 보이던 나의 모습과도 같은 것은 아닐까?
이쯤에서 우리는 앞서 「관재기觀齋記」에서 살펴 본 바 있는 치준緇俊 스님과 동자童子와의 문답을 떠올리게 된다. 향을 피우자 몽글몽글 피어오르던 연기가 마침내 허공으로 사라져 버리고 재만 남은 것을 두고 묘오妙悟를 발한 동자에게, 향을 맡지 말고 재를 보며 연기를 기뻐하지 말고 공空을 바라보라고 하던 치준 스님의 일갈과 이 대목은 매우 유사하다.
3. 현학적인 수사의 한계를 간파하다
현랑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아我로써 아我를 증명할 뿐, 저 상相이란 것은 상관할 것 없겠습지요.” 내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마음으로 마음을 본다고 하니, 마음이란 게 몇 개나 있더란 말인고?” 郞叩頭曰: “以我證我, 無關彼相.” 余大笑曰: “以心觀心, 心其有幾.” |
그러자 현랑은 공손한 태도로 대답한다. “선생님! 저 외물의 상相으로써야 무엇을 증명할 수 있겠습니까? 단지 마음으로 보아 마음으로 느껴 깨달을 따름입지요. 거품 같은 외물이야 상관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에 연암은 크게 웃는다. “상相과는 무관하다? 마음으로 마음을 본다? 그럴진대 그대는 어찌하여 스승이 남긴 사리라는 상相에 집착하여 탑을 세우려 하는가? 마음으로 마음을 본다니, 마음을 증명하는 그 마음은 또 어떤 마음이란 말인가?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일진대 어찌 아我로써 아我를 증명할 수 있으랴! 아我는 본시 허무虛無이고 적멸寂滅인 것을. 그대의 그 말이 심히 허탄하지 않은가?”
이렇게 윗글의 비유와 문답을 풀어보면, 대개 연암이 「주공탑명」을 통해 하려 했던 이야기의 맥락이 짚힌다. 요컨대는 스승의 시신 위로 떠돌던 이상한 빛과 스승이 남기고 간 3과의 사리, 어쩌면 지황탕 위의 거품과도 같을 뿐인 그것을 스승의 전부인양 여겨 사리탑을 세우겠다고 수선을 떠는 현랑玄郞 등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다.
연암의 지황탕 비유를 통한 힐난에 현랑은 ‘이아증아以我證我, 무관피상無關彼相’이라는 자못 현학적 수사로 대답을 비껴가려 했다. 그러면서도 저는 정작 ‘피상彼相’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고 거기에 얽매여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존재로서의 ‘아我’와 그것이 ‘아’임을 증명하는 ‘아’는 별개의 ‘아’일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아’와 무관한 ‘상相’일 수도 없다. 현랑은 아로써 아를 증명할 뿐이기에 저 바깥의 상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했지만, 정작 그는 아로써 상을 보고, 상으로써 아를 증명하려 든 셈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증심상조證心相照의 담연湛然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4. 스님의 죽음은 사리가 아닌 씨 속에 담겨있다
그리고 나서도 연암은 주공의 생애에 대해서는 조금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선문답처럼 시 한 수를 현랑에게 던진다. 지황탕의 비유가 이번에는 높은 나무 가지에 걸린 열매의 비유로 전개된다. 정상적인 글이라면 이른바 탑명塔銘이 들어설 자리이다. 그런데 그는 비슷한 성격의 다른 글에서 예외 없이 그랬던 것처럼 분명하게 ‘명왈銘曰’이라 하지 않고, 단지 ‘내위계시왈乃爲係詩曰’이라고만 말하여 아예 명을 쓰지 않을 작정임을 슬며시 내비쳤다. 아니 명銘 뿐 아니라 명에 앞서 기술되었어야 마땅할 주공의 생애마저도 완전히 외면해 버리고 있다.
乃爲係詩曰: 이에 시로 잇대어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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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리 맞은 나뭇잎은 죄 떨어지고, 벌레 먹은 잎새 사이로 미처 덜 익은 감 하나가 내걸려 있다. 열매에는 벌레가 갉아 먹어 드러난 씨앗이 보인다. 그 아래엔 군침을 흘리며 그 과일을 올려다보는 꼬맹이들이 있다. 돌멩이도 던져 보고, 장대를 이어도 보지만 종내 어찌 해볼 도리가 없다. 그러다 느닷없이 불어온 바람에 그 열매는 땅에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여전히 허공만 바라보며, 군침을 삼키면서 바라보던 그 감을 까마귀와 까치가 먹어 버린 줄로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무슨 얘길까? 서리 맞아 잎을 다 떨군 나무에 걸린 열매 하나, 혹은 벌레가 먹어 드러난 씨앗은 바로 세상을 뜬 주공의 시신 위로 떠돌던 이상한 빛이거나, 시신을 태우고 난 재에서 추스려 낸 세 알의 사리와 대응된다. 그것만 군침 흘리며 바라보던 꼬맹이들은 마당을 돌며 그 빛을 보고 두려워 떨던 현랑의 무리다. 어느덧 땅에 떨어져 찾을 길 없게 된 열매는 다비 끝에 한줌 재로 화해버린 주공의 육신이다. 발을 동동 구르는 아이들은 안타까워 부도라도 세우겠다고 다짐하는 현랑 등이다. 그러나 정작 열매는 땅 위에 떨어져 있는 것을 그들은 모른다. 정작 주공의 정신은 다 타버린 한 줌 재 속에 살아 숨 쉬고 있음을 현랑은 알지 못한다. 열매를 열매 되게 하는 이치가 씨 속에 담겨 있다. 그러나 주공을 주공되게 하는 이치는 과연 세 알의 사리 속에 담겨 있는 것일까? 한 개의 작은 씨 속에 한 그루 커다란 나무의 생생불식生生不息하는 이치가 담기어 있듯, 주공이 남기고 간 세 알의 사리 속에서 우리는 주공의 본래면목本來面目과 만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것은 지황탕 위에 잠시 끓어오르다 스러져버린 거품 방울 같은 것은 아닐까? 현랑이여! 그대는 지금 마음으로 마음을 전할 수 있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주공탑 앞으로 나아가서 주공의 사리를 보며 자네의 그 마음을 주공께 전하여 그것을 증명해 보여주게나.
인仁이 곧 천지만물의 생생불식지리生生不息之理라고 말한 것은 정자程子이다. 씨는 곧 인仁이니 거기에는 생생불식生生不息의 이치가 담겨 있다. 정작 아이들은 허공만 보며 열매를 찾는다. 현상의 세계에 존재하던 주공은 세 개의 사리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현랑 등은 스승이 남긴 정신은 잊은 채 사리만 받들고 있다. 땅에 떨어진 씨 속에 담긴 생생불식의 실리實理, 그것은 만물 위에 구현되어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기에 그것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이심전심以心傳心하고 증심상조證心相照하는 미묘법문微妙法文이 아니며, 불립문자不立文字ㆍ교외별전敎外別傳ㆍ직지인심直指人心ㆍ견성성불見性成佛하는 이언절려離言絶慮의 깨달음일 수도 없다. 그것은 천하가 천하되게 하고 사물이 사물 되게 하는 공변된 이치일 뿐이다. 스승의 육신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사리뿐이다. 그러나 스승의 정신은 한낱 사리 속에는 없다. 그러니 사리에 집착함은 이심전심의 논법과도 배치되고 더욱이 생생불식의 이치와는 거리가 멀다. 그럴진대 탑은 무엇 때문에 세우려 하는가? 대개 이것이 연암이 이 글을 통해 말하고자 한 본 뜻이 아닌가 한다.
이렇게 해서 주공의 사리를 수습해서 스승이 남기고 가신 ‘마음’을 길이 전해 보겠다는 현랑의 ‘마음’이 허망한 줄을 알았다. 그것은 지황탕 위 거품에 비친 상相을 돌에다 새기려는 것이나 진배없다. 그러니 연암은 애초부터 탑명을 쓸 생각이 조금도 없었던 셈이다. 그래서 제목을 ‘주공탑명麈公塔銘’이라 해놓고도 짐짓 딴전을 부려 시 한 수를 적고 말았던 것이다.
5. 수많던 거품 속의 나는 순식간에 사라지네
박영철본 『연암집』에서는 이것으로 글이 끝난다. 그러나 『병세집』과 『시가점등』에는 게송 부분이 여기에 덧붙어 있다. 네 번째 단락은 지황탕의 비유를 부연하여 설명하겠다는 말로 시작된다. 승려의 탑명이기에 게송의 형식을 빌어 왔다. 이 게송의 부연으로 해서 지황탕의 비유는 다시금 생생하게 의미를 드러내게 된다.
게송은 다시 세 개의 의미단락을 이룬다. 첫 부분은 지황탕 위 거품의 현상함성現相含性 하는 실상實相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나는 거품 속의 나를 바라보고, 거품 속의 나는 또 나를 바라본다. 내 눈동자 속에 거품이 있고, 거품 속에는 내 눈동자가 있다. 거품 속의 나와 내 눈 속의 거품은 같은가 다른가? 어느 것이 실상이고 어느 것이 허상인가? 내가 웃으면 거품 속의 나도 웃고, 내가 눈을 감으면 저도 따라 눈을 감는다. 그러니 나는 거품이고 거품은 곧 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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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지는 두 번째 부분은 분명히 존재하는 그 상相을 형상으로 나타내는 일이 불가능하며, 직접 파악하려 들면 자취도 없이 사라지더라는 이야기를 적었다. 거품 위의 상을 어떻게 그려내고, 조각하고, 아로새길 수 있으랴! 분명히 존재하던 거품이 잠깐 사이에 스러져 자취를 감추자, 거품 속에 깃들어 있던 천백의 나도 동시에 사라져 버렸다. 나는 어디로 갔는가? 좀 전의 나는 내가 아니었던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 곁에 있던 주공은 이제 세 알의 사리만 남겨 놓고 사라져 버렸다. 과연 주공은 어디로 갔는가? 우리 곁에 있던 주공은 주공이 아니었던가?
- 이하의 게송偈頌 부분은 박영철본 『연암집燕巖集』에는 누락되어 있다. 연암 재세시在世時에 윤광심尹光心(1751-1817)이 당대 문장가들의 시문을 엮어 펴낸 『병세집幷世集』과, 이덕무李德懋의 손자인 이규경李圭景(1788-1856)의 『시가점등詩家點燈』에는 이 대목이 그대로 실려 있다. 이 부분이 어떤 이유로 『연암집』에 빠지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전체 글의 주제와 미묘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본다. [본문으로]
6.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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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부분은 앞 부분에 대한 연암의 총평이다. 요컨대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자취는 포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내가 증명하려 들고 증거 삼고 싶어 하는 모든 것들이 포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럴진대 인생이란 하나의 포말일 뿐이 아닌가. 이미 스러진 과거의 포말이 있고, 눈앞에서 영롱한 모습을 비춰내는 현재의 포말이 있으며,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포말도 있다. 주공은 이미 스러진 과거의 포말이요, 이 글을 돌에 새기려는 현랑은 현재의 포말에 지나지 않는다. 또 천백년 뒤에 이 비석을 읽을 그 어떤 이들 역시 미래의 포말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앞서 그 거품 위에 비쳤던 내 모습은 내가 아니라 거품일 뿐이 아닌가? 그렇다면 거품 위에 거품이 비춰진 것일 뿐이 아니겠는가? 거품은 허무요, 거품은 적멸이니, 거기에 내 모습이 비춰졌다 해서 기뻐할 것도 없고, 그 모습이 사라졌다하여 슬퍼할 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주공이 이상한 빛으로 떠돌다가 세 알의 사리를 남겼다하여 감격할 것도 없고, 다시 볼 수 없는 스승을 그려 슬퍼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이상 「주공탑명」을 네 개의 의미 단락으로 나누어 살펴보았다. 처음에는 탑명을 쓰게 된 경과를 말하고, 이어 지황탕의 비유로 탑명을 써달라는 요청이 마땅찮음을 밝혔다. 그리고 다시 명銘 대신 계시係詩로 나무에 달린 열매와 씨앗이라는 새로운 화제를 꺼냈고, 끝에 와서 다시 앞서 지황탕의 비유를 게송偈頌의 형식을 빌어 부연하였다. 결국 전체 글 어디에도 「주공탑명」에서 기술되었어야 마땅한 주공에 대한 기술은 찾아볼 수가 없다. 주공에 대한 기술이 없기에 결국 탑명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본문에 이어 계시係詩와 게송偈頌을 장황하게 부연한 것은 주공의 탑명이면서도 주공도 탑명도 없는 이 기형적인 글에 대한 글쓴이의 입장 표명인 셈이다.
연암은 이 글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단순히 현랑玄郞과 같은 대비구조차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존재와 무無의 문제를 정면으로 지적하여 그의 미망迷妄을 깨우쳐 주려 했던 것일까? 아니면 깨달음의 눈으로 볼 때만 볼 수 있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세계, 허무적멸虛無寂滅이면서 동시에 생생불식生生不息한 천지만물의 오묘한 이치를 우리에게 열어 보이려 했던 것일까? 그것은 아마도 이 두 가지를 포괄하는 지점에 놓여 있을 것이다.
다음은 신동집 시인의 「오렌지」란 작품이다.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도 있고, ‘찹잘한’ 속살을 깔 수도 있지만 결국 ‘아무도’ 손을 댈 수 없는 것이 있다. 시를 읽다가 그때 「주공탑명」을 쓰던 연암의 심정도 시인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할 수 없는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는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도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는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도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에 있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에 있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거죽엔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오 누구인지 잘은 몰라도.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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