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청산에 살으리랏다
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閑 | 뭇 새들 높이 날아 사라져 가고 외론 구름 홀로 한가로이 떠간다. |
相看兩不厭 只有敬亭山 | 서로 보아 둘 다 싫증나지 않는 것은 경정산(敬亭山) 너 뿐이로구나. |
이백(李白)의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이란 작품이다. 속세의 시름을 지닌 채 경정산을 찾은 나그네는 산정(山頂)에서 물끄러미 산 아래를 굽어보고 있다. 그때 저 골짜기 아래로부터 새떼들은 산 위로 비상한다. 새떼의 돌연한 비상을 쫓다가 마침내 아득히 사라진 그 자리에서, 시인은 문득 ‘홀로’ 유유히 떠가는 구름을 발견한다. 새들은 그다지도 바쁘게 어디로 사라져 간 것일까. 왁자지껄 무리를 지어 들끓다가 사라진 새떼는 사실 시인이 물 아래에서 지고 올라온 욕망과 번뇌의 찌꺼기는 아니었을까. 산 위에 올라선 시인은 그러한 번뇌와 시름을 훌훌 벗어 던지고 어느새 정처도 없고 집착도 없이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의 마음이 되었던 것이다. 경정산은 언제나 인간사에 지친 나를 이렇듯 감싸 안고 어루만져 준다. 시인의 경정산을 향한 예찬은 허세도 과장도 없는 사실로만 느껴진다.
필자에게 이 시는 “산새도 날아와/ 우짖지 않고// 구름도 떠가곤/ 오지 않는다.// 인적 끊인 곳/ 홀로 앉은/ 가을 산의 어스름”으로 시작되는 박두진의 「도봉(道峰)」을 연상시킨다. 그의 말대로 “삶은 오직 갈수록 쓸쓸하고/ 사랑은 한갖 괴로울 뿐”일지라도, 산에 서면 청산은 “산아, 우뚝 솟은 푸른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 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청산도(靑山道)」 1연)의 위안으로 상처 입은 가슴을 어루만져 준다.
다시 김부식(金富軾)은 「제송도감로사차혜원운(題松都甘露寺次惠遠韻)」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俗客不到處 登臨意思淸 | 속객의 발길 닿지 않는 곳 올라서니 생각이 해맑아 지네. |
山形秋更好 江色夜猶明 | 산 모습 가을이라 더욱 고웁고 강 물빛 밤인데도 외려 밝아라. |
白鳥高飛盡 孤帆獨去輕 | 해오라비 높이 날아 사라져가고 외론 돛만 홀로 가벼이 떠가네. |
自慙蝸角上 半世覓功名 | 부끄럽다. 달팽이 뿔 위에서 공명(功名)을 찾아다닌 나의 반평생. |
속객(俗客)의 자취가 끊어진 곳을 속객(俗客)이 홀로 찾았다. 산마루에 올라 툭 터진 시계(視界)에 서니, 함께 짊어지고 온 속된 생각도 말끔히 씻어진다. 3ㆍ4구의 자안(字眼)은 ‘갱(更)’과 ‘유(猶)’에 있다. 낙엽이 지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나무, 여름날의 화려에 견주면 보잘 것 없어야 할 그 모습은 조촐해서 ‘더욱’ 좋다. 밤이면 빛을 잃고 검게 흐를 강물빛은 밤인데도 ‘오히려’ 신비한 밝음을 간직하고 있다. 빛을 잃은 밤, 낙엽이 진 가을 산은 모든 번화한 시기를 지나 보내고 물끄러미 스스로를 반추해보는 시간이다. 헐벗어 더욱 좋은 산, 밤이건만 오히려 맑은 강물빛은 집착과 욕망을 벗어 던져 더욱 투명해진 시인의 마음과 등가적 심상을 이룬다. ‘텅빈 충만’의 세계다.
5ㆍ6구는 앞서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의 3ㆍ4구를 환골(換骨)하였다.
衆鳥高飛盡 孤雲獨去閑 | 뭇 새들 높이 날아 사라져 가고 외론 구름 홀로 한가로이 떠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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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鳥高飛盡 孤帆獨去輕 | 해오라비 높이 날아 사라져가고 외론 돛만 홀로 가벼이 떠가네. |
원시의 허사 ‘중(衆)’ 대신에 ‘백(白)’을 끼워 넣었고, 6구는 실사(實辭) ‘운(雲)’의 자리에 ‘범(帆)’을, 허사 ‘한(閑)’의 위치에 ‘경(輕)’을 바꿔 넣은 것이다. 밤 강물 위로 해오라비는 깃을 치며 날아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가고, 날던 새를 따라가다 시선이 멈춘 그 자리에 외론 돛단배가 가볍게 강물 위로 미끄러져가고 있다. 깊은 밤, 색채의 대비도 선명하게 포물선을 그으며 시계를 벗어나는 해오라비. 홀로 어둠 속을 미끄러지듯 경쾌하게 사라지는 돛단 배. 모두 얽매이고 집착하며 아웅다웅하던 속세에서는 생각지 못할 정경들이다. 그제야 시인은 새삼 공명(功名)에 얽매여 시비를 다투고 영욕에 집착하던 삶이 얼마나 구차하고 부끄러운 것이었던가를 깨닫는다. 돌아보면 그것은 달팽이 뿔 위의 싸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높이 날아가 ‘스러진[盡]’ 것은, 또 홀로 가볍게 ‘가버린[去]’ 것은 해오라비도 돛단배도 아니고, 반평생 공명을 향해 있던 부끄러운 집착일 터이다. 이제야 그는 속객으로 들어온 가을 산사(山寺)에서 속객(俗客)의 태를 벗고, 거듭남의 정화감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자연은 우리에게 떳떳한 삶의 모습을 일깨워준다. 일상에 찌들어 생기를 잃고 풀이 죽어 있을 때, 자연은 인간에게 소생의 원기를 불어 넣어 준다.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때의 고금을 떠나서 자연이 예술의 변함없는 경배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자연은 그의 품안에 아무나 품어 안지는 않는다.
대저 천하의 온갖 물건을 다 끌어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보는 것은 부귀(富貴)한 사람의 즐거움이다. 장송(長松) 그늘에서 다북한 풀을 깔고 앉아 시내물이 졸졸 흘러가는 소리를 듣다가 돌샘의 물을 떠 마시는 것은 산림(山林)에 사는 사람의 즐거움이다. 그러나 산림에 사는 선비는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을 보더라도 그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간혹 마음으로 하고 싶은 것이 있더라도 힘을 헤아려 얻을 수 없어 그만둔 자는 물러나 이곳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저 부귀한 사람은 능히 온갖 물건을 이르게 할 수 있지만 아우를 수 없는 것이 있으니 오직 산수山水의 즐거움이 그것이다.
구양수(歐陽修)가 「부사산수기(浮槎山水記)」에서 한 말이다. 부귀의 즐거움이 있고, 산림의 즐거움이 있으니, 이 두 가지가 나란할 수 없을 때는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가? “길고 긴 세월 동안 온갖 세상 변하였어도 청산은 의구하니 청산에 살으리라”는 노래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가곡으로 뽑힌 것을 보면, 첨단과학의 시대에서도 산수자연(山水自然)을 향한 선망과 동경은 더해만 가는 모양이다.
인용
1. 가어옹과 뻐꾸기 은사
2. 청산에 살으리랏다
3. 요산요수의 변
4. 들 늙은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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