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答京之 (12)
건빵이랑 놀자
6. 아깝구나, 연암이 세초하여 없앤 책들 아들 박종채朴宗采는 아버지 연암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연암협에 계실 때 혹은 종일 마루를 내려오지 않고 혹은 어떤 사물을 주목하여 눈길을 돌리지 않고 침묵하여 말이 없는 채 두어 시간을 넘기곤 했다. 其在燕峽也, 終日不下堂, 或遇物注目, 瞪默不言者移時.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아무리 지극히 미미한 물건, 예컨대 풀이나 짐승이나 벌레라도 모두 지극한 경지가 있으니, 조물주가 만든 자연의 현묘함을 볼 수가 있다”하셨다. 嘗言: “雖物之至微, 如艸卉禽蟲, 皆有至境, 可見造物自然之玅.” 매양 냇가 바위에 앉아 들릴 듯 말 듯 읊조리거나 느릿느릿 걷다가 문득 멍하니 무엇을 잊어버린 듯 하셨다. 때로 오묘한 깨달음이 있으면 반드시 붓을 잡고 기록을 해서, 깨알 ..
5. 세상을 관찰함으로 읽는 책 여기서 다시 연암의 글 한편을 읽기로 하자. 제목은 「답경지지이答京之之二」이다. 독서를 정밀하고 부지런히 하기로는 포희씨만한 이가 없다. 그 정신과 의태意態는 천지만물을 포괄망라하고 만물에 흩어져 있으니, 이것은 다만 글자로 쓰이지 않고 글로 되지 않은 글일 뿐이다. 후세에 독서를 부지런히 한다고 하는 자들은 거친 마음과 얕은 식견으로 마른 먹과 썩어 문드러진 종이 사이에 눈을 부비며 그 좀오줌과 쥐똥을 엮어 토론하니, 이는 이른바 술지게미와 묽은 술을 먹고 취해 죽겠다는 꼴이다.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讀書精勤, 孰與庖犧? 其神精意態, 佈羅六合, 散在萬物, 是特不字不書之文耳. 後世號勤讀書者, 以麤心淺識, 蒿目於枯墨爛楮之間, 討掇其蟫溺鼠渤, 是所謂哺糟醨而醉欲死. 豈不哀哉!..
4. 통해야만 오래도록 생명력을 유지한다 그런 까닭에 늙은 신하가 어린 임금께 고하는 것과 고아와 과부의 사모함을 알지 못하는 자와는 더불어 소리를 논할 수가 없다. 글을 짓더라도 『시경』의 생각이 없으면 더불어 국풍國風의 빛깔을 알 수가 없다. 사람이 이별해보지 못하고, 그림에 먼 뜻이 없다면 더불어 문장의 정경情境을 논할 수가 없다. 벌레의 더듬이와 꽃술을 좋아하지 않는 자는 모두 문심文心이 없는 것이다. 솥과 그릇의 형상을 음미하지 못하는 자는 비록 한 글자도 모른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故不識老臣之告幼主, 孤子寡婦之思慕者, 不可與論聲矣. 文而無詩思, 不可與知乎國風之色矣. 人無別離, 畵無遠意, 不可與論乎文章之情境矣. 不屑於蟲鬚花蘂者, 都無文心矣. 不味乎器用之象者, 雖謂之不識一字可也. 『주역周易』「..
3. 글로 드러나는 情과 境 무엇을 일러 정情이라 하는가? 말하기를, 새가 울고 꽃이 피며, 물은 초록이요 산이 푸르른 것이다. 何如是情? 曰: 鳥啼花開, 水綠山靑. 또한 글에는 정情이 있다. 글의 정이란 무엇인가. 새가 울고 꽃이 피며, 물은 초록빛이요 산은 푸른빛이라고 했다. 나는 외롭다. 나는 슬프다. 나는 기쁘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기쁘다고 쓰지 않고, 지저귀는 새들의 노래 소리로 들려준다. 나는 외롭다고 말하는 대신 가을하늘을 나는 외기러기의 울음에 얹을 뿐이다. 돌아오지 않는 님이 그리워 가슴이 아플제면 나는 그 님과 헤어지던 그 버드나무 아래서 뭣 모르고 우는 꾀꼬리 소리를 듣고 서 있다. 아아! 그렇구나. 내가 내 감정을 말하지 않아도 사물이 대신 이야기해 준다. 그래서 새는 울고 꽃은 ..
2. 글로 드러나는 소리와 빛깔 그렇다면 글에 소리[聲]가 있는가? 말하기를, 이윤伊尹의 대신大臣 노릇 할 때와 주공周公이 숙부叔父 역할을 할 때 내가 그 말소리는 듣지 못하였어도 그 소리를 상상해 본다면 정성스러울 따름이었으리라. 고아孤兒인 백기伯奇와 기량杞梁의 과부寡婦를 내가 그 모습은 못 보았지만, 그 소리를 떠올려 보면 간절할 뿐이었으리라. 未聞其語也,然則文有聲乎? 曰: 伊尹之大臣, 周公之叔父, 吾 想其音則款款耳. 伯奇之孤子, 杞梁之寡妻, 吾未見其容也, 思其聲則懇懇耳. 먼저 ‘성聲’이다. 그렇다. 글에는 그 배면에서 울려나오는 소리가 있어야 한다. 이윤伊尹과 주공周公, 백기伯奇와 기량杞梁, 그 옛 사람의 음성을 나는 접한 적이 없는데도, 그 글을 읽으면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하고 안타까운 소리가..
1. 세상을 보며 글자를 만들었던 포희씨 연암은 40세 전후로 지금의 파고다 공원 뒤편인 전의감동典醫監洞에 머물러 살았다. 이 시기 전후 몇 년간의 글을 묶어 『종북소선鍾北小選』이라 이름 짓는다. 이글은 이 묶음의 첫머리에 얹은 것이다. 연암 문학론의 최상승最上乘 문자로 그 문학 정신의 울결鬱結이 이 한편에 녹아 있다. ▲ 전의감동에 살 때의 울분은 醉踏雲從橋記에 담겨 있다. (사진 출처 - [연암을 읽다]) 우주라는 기호를, 만물이라는 텍스트를 어떻게 읽어야 좋을까? 연암은 이 「종북소선자서鍾北小選自序」에서 그 방법을 성색정경聲色情境이란 네 항목에 담아 이야기한다. 다시 처음의 원문으로 되돌아가서 그의 설명에 귀를 기울여 보자. 아아! 포희씨庖犧氏가 죽으매 그 문장文章이 흩어진지 오래로다. 그러나 벌레..
6. 가련한 공기족들의 미련한 판단능력 이제 큰 소리로 스스로를 비유하여 사슴이라 말한다면 얼마나 어리석겠습니까? 마땅히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게 될 것입니다. 만약 다시금 형체의 크고 작음을 비교하고 보는 바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려 한다면, 그대나 나나 모두 망녕될 뿐이리이다. 사슴이 과연 파리보다야 크겠지만, 코끼리가 있지 않습니까? 파리가 과연 사슴보다야 작겠지만 만약 개미로 본다면 코끼리의 사슴에 있어서와 한 가지일 겝니다. 今乃大言自况曰麋, 何其愚也? 宜其見笑於大方之家也. 若復較其形之大小, 辨所見之遠近, 足下與僕, 皆妄也. 麋果大於蠅矣, 不有象乎? 蠅果小於麋矣, 若視諸蟻, 則象之於麋矣. 연암은 계속해서 말한다. 이제 내가 스스로 사슴이라 비유한데 대해, 그대가 크기로 따져서 자신을 파리에 비..
5. 자기중심으로 모든 걸 판단하는 사람들 우연히 거친 성질을 기리다가 스스로를 사슴에다 견준 것은 사람이 가까이 가면 놀라는 까닭에서였지 감히 스스로 크다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주신 글월을 받자오매, 스스로를 말 꼬리에 붙은 파리에다 비유하셨으니 또 어찌 그다지도 작단 말입니까? 그대가 진실로 작게 되기를 구한다면 파리도 오히려 크지요. 개미가 있지 않습니까? 偶頌野性, 自况於麋, 所以近人則驚, 非敢自大也. 今承明敎, 自比於驥尾之蠅, 又何其小也? 苟足下求爲小也, 蠅猶大也. 不有蟻乎? 윗 글과는 성격이 조금 다르지만, 역시 바라봄의 문제에 대해 논한 글을 한 편 더 읽어본다. 「답모答某」는 연암이 누군가에게 답장으로 보낸 편지글이다. 아마 이보다 앞선 편지에서 연암이 스스로를 겁 많은 사슴에 견준..
4. 천지만물이 모두 하나의 서재 내가 또 말하였다. “대저 하늘과 땅 사이에 흩어져 있는 것이 모두 이 서책의 정기일세. 그럴진대 본시 바싹 가로막고 보아 한 방 가운데서 구할 수 있는 바가 아닐세. 그래서 포희씨가 문장을 봄을 ‘우러러 하늘을 보고, 굽어 땅을 살폈다’고 한 것이야. 공자께서 그 문장을 봄을 크게 여겨 이를 이어 말씀하시기를, ‘편안히 거처할 때는 그 말을 익힌다[玩]’고 하셨지. 대저 익힌다 함이 어찌 눈으로만 보아 살피는 것이겠는가? 입으로 음미하여 그 맛을 얻고, 귀로 들어 그 소리를 얻으며, 마음으로 마주하여 그 정채로움을 얻는 것일세. 이제 자네가 창에 구멍을 뚫고서 눈으로 이를 전일하게하고, 유리알로 받아 마음으로 이를 깨닫는다고 하세. 비록 그러나 방과 창이 텅비지 않고는..
3. 넓게 읽되 요약해야 하고 번뜩 깨우쳐야 한다 낙서가 놀라 말하였다. “그렇다면 장차 어찌해야 할지요?” 내가 말했다. “그대는 저 물건 찾는 사람을 보지 못했던가? 앞을 보자면 뒤를 잃게 되고, 왼편을 돌아보면 오른편을 놓치고 말지. 왜 그럴까? 방 가운데 앉아 있으면 몸과 물건이 서로 가리게 되고, 눈과 허공이 서로 맞닿기 때문일 뿐이야. 차라리 몸을 방밖에 두어 창에 구멍을 뚫고 살펴보아 한 눈의 전일함으로 온 방안의 물건을 다 보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일세.” 낙서가 사례하여 말하였다. “이는 선생님께서 저를 ‘약約’, 즉 요약함을 가지고 이끌어 주시는 것이로군요.” 洛瑞驚曰: “然則將奈何?” 余曰: “子未見夫索物者乎? 瞻前則失後, 顧左則遺右, 何則? 坐在室中, 身與物相掩, 眼與空相逼故爾. 莫若..
2. 의미 없는 독서에 대해 완산完山 이낙서李洛瑞가 책을 쌓아둔 방에 편액을 걸고 소완정素玩亭이라 하였다. 내게 기문記文을 청하므로, 내가 이를 나무라며 말하였다. “대저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치면서도 눈이 물을 보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인가? 보는 바의 것이 모두 물이고 보니 물이 없는 것과 한가지인게지. 이제 자네의 책은 용마루에 가득차고 시렁을 꽉 채워 전후좌우 할 것 없이 책 아닌 것이 없으니, 물고기가 물에서 헤엄치는 것과 같단 말일세. 비록 동중서董仲舒의 전일專一함을 본받고, 장화張華의 기억력에 도움 받으며, 동방삭東方朔의 암기력을 빌려온다 해도 장차 스스로 얻지는 못할 것일세. 그래도 괜찮겠나?” 完山李洛瑞, 扁其貯書之室, 曰素玩. 而請記於余, 余詰之曰: “夫魚游水中, 目不見水者, 何也? 所見..
1. 나비 놓친 사마천의 심정으로 읽어라 그대가 태사공의 『사기』를 읽었다 하나, 그 글만 읽었지 그 마음은 읽지 못했구료. 왜냐구요. 「항우본기」를 읽으면 제후들이 성벽 위에서 싸움 구경 하던 것이 생각나고, 「자객열전」을 읽으면 악사 고점리가 축筑을 연주하던 일이 떠오른다 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늙은 서생의 진부한 말일 뿐이니, 또한 부뚜막 아래에서 숟가락 주웠다는 것과 무에 다르겠습니까. 아이가 나비 잡는 것을 보면 사마천의 마음을 얻을 수 있지요. 앞발은 반쯤 꿇고 뒷발은 비스듬히 들고, 손가락을 집게 모양으로 해가지고 살금살금 다가가, 손은 잡았는가 싶었는데 나비는 호로록 날아가 버립니다. 사방을 둘러 보면 아무도 없고, 게면쩍어 씩 웃다가 장차 부끄럽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는, 이것이 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