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 사람 공자
子路宿於石門. 晨門曰: “奚自?”
石門, 地名. 晨門, 掌晨啓門, 蓋賢人隱於抱關者也.
子路曰: “自孔氏.”
自, 從也, 問其何所從來也.
曰: “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
與, 平聲.
○ 胡氏曰: “晨門知世之不可而不爲, 故以是譏孔子. 然不知聖人之視天下, 無不可爲之時也.”
해석
子路宿於石門. 晨門曰: “奚自?”
자로가 석문에서 묵었다. 석문의 관리가 “어디서 왔나?”라고 물었고,
石門, 地名.
석문(石門)은 지명이다.
晨門, 掌晨啓門,
신문(晨門)은 새벽에 성문 열어주길 관장한 사람이니
蓋賢人隱於抱關者也.
대체로 현인으로 문지기에 은둔한 사람이다.
子路曰: “自孔氏.”
자로는 “공씨에게서 왔소.”라고 말했다.
自, 從也, 問其何所從來也.
자(自)는 ‘~부터’이니 어느 곳으로부터 왔는지 물은 것이다.
曰: “是知其不可而爲之者與?”
그러자 석문의 관리는 “안 될 줄 알면서도 하는 사람이로구나.”라고 말씀하셨다.
與, 平聲.
○ 胡氏曰: “晨門知世之不可而不爲,
호인(胡寅)이 말했다. “석문의 관리가 세상이 불가한 줄 알면 하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故以是譏孔子.
이것으로 공자를 놀린 것이다.
然不知聖人之視天下, 無不可爲之時也.”
그러나 성인이 천하를 볼 때에 할 수 없을 때가 없음을 알지 못했다.”
○ ‘논어’에는 공자나 제자가 은자(隱者)를 만난 이야기가 있다. ‘헌문(憲問)’의 이 장(章)에는 새벽에 성문 여는 일을 맡아 보던 은자가 등장한다. 성명을 알 수 없어 신문(晨門)이라고 불렀다. 이렇게 ‘논어’의 편찬자들은 은자의 일이나 물건을 근거로 보통명사를 만들고 고유명사로 대용했다. 은자들은 공자를 비판했지만 여기에는 존경과 애정의 뜻이 담겨 있었다. 그렇기에 그 비판을 통해 거꾸로 공자의 위대한 인격을 더 잘 이해할 수가 있다.
숙(宿)은 유숙(留宿)이다. 석문(石門)은 노(魯)나라 지명이다. 단, 정약용은 제(齊)나라 지명으로 보았다. 해자(奚自)는 해자래(奚自來)의 래(來)가 생략되었다. 해(奚)는 ‘어디’라는 뜻의 의문사, 자(自)는 ‘∼로부터’라는 뜻의 개사(介詞, 전치사와 후치사)다. 의문사가 개사의 빈어(목적어)일 때 그 빈어는 도치된다. 자공씨(自孔氏)의 자(自)도 개사다. 시(是)는 공자를 가리킨다. 지기불가이위지자(知其不可而爲之者)는 세상이 어찌 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세상 구원을 위해 노력하거나 자신의 덕을 기르는 자라는 뜻이다. 여(與)는 추정과 감탄의 어조를 나타내는 종결사다.
은자인 신문(晨門)은 공자의 실천을 수긍(首肯)하지 않았으나, 그도 ‘나라가 무도(無道)할 때 숨는다’는 철학을 지녔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의 영조(英祖)가 경연에서 지적했듯이, 은자들은 궁벽함을 찾고 괴상한 짓을 하는 색은행괴(索隱行怪)의 부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공자는 달랐다.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허물하지 않으며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우면서 위로 천리에 통달하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심경호 고려대 한문학과 교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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