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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사전 - 24. 곡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24. 곡

건방진방랑자 2019. 11. 11. 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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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

양을 세는 단위, 10()1()이다.

 

곡강(曲江)

연못 이름인데, () 나라 때에는 봄에 그 해의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한 자들을 모두 곡강의 정자에 모아 놓고 잔치를 베풀었다. 구당서(舊唐書)卷十三 덕종기(德宗紀)

 

곡강(曲江)

낙동강(洛東江)으로 연결되는 삼귀정 남쪽의 큰 내 이름이다.

 

곡강등방(曲江磴榜)

() 나라 때 진사(進士)에 급제한 사람들이 합격자 발표 뒤에 곡강정(曲江亭)에서 크게 잔치를 벌이곤 하였는데, 이를 곡강회(曲江會)라고 하였다.

 

곡강원(曲江苑)

과거에 함께 급제했음을 말한다. () 나라 때에 봄이면 그 해의 과거 급제자들에게 장안의 곡강원에서 잔치를 내렸던 데서 온 말이다.

 

곡강지(曲江池)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의 하수(河水)가 구불구불 흘러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데, 성도(成都) 사람들이 명절이면 찾아와 노닐었던 승지(勝地)이다. () 나라 때에는 부용원(芙蓉園)으로 불렸다.

 

곡격견마(穀擊肩摩)

수레의 바퀴통이 부딪치고 어깨가 스침. 시가(市街)가 번화한 모습을 형용하는 말을 뜻하는 고사성어다.

 

곡고화과(曲高和寡)

곡이 높으면 화답하는 사람이 적다. 곡조가 높을수록 가락을 맞추며 따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적어진다. 사람의 재능이 너무 높으면 따르는 무리들이 더욱 적어지는 것을 말한다.

 

곡곡(曲曲)

굴곡이 많은 산천이나 도로의 굽이굽이, 방방곡곡의 준말이다.

 

곡구(谷口)

중국 섬서(陝西) 예천현(醴泉縣) 동북에 있는 지명인데, 한 성제(漢成帝) 때의 은사 정박(鄭樸)이 그곳에서 도를 닦고 조용히 지내며 대장군 왕봉(王鳳)이 예우를 갖춰 초빙하였으나 뜻을 굽히지 않았다 하여 절개가 청고(淸高)하다는 것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고사전(高士傳)卷中

() 나라 정박(鄭樸)의 호이다. 성제(成帝) 때 대장군 왕봉(王鳳)의 초빙에도 응하지 않은 채 곡구(谷口)에 집을 짓고 살면서 곡구자진(谷口子眞)이라고 호를 지은 뒤 수묵(守黙)하며 수도(修道)하였다. 정자진(鄭子眞)으로 널리 알려졌다. 한서(漢書)72, 「『고사전(高士傳)

지명(地名)으로 은자가 사는 곳을 말한다. 양웅(揚雄)법언(法言)』 「문신(問神)곡구의 정자진(鄭子眞)은 뜻을 굽히지 않고 암석(巖石) 아래에서 밭을 갈며 살았는데 그 이름이 경사(京師)를 진동하였다.”라고 하였다.

 

곡구거(谷口去)

숨은 선비. 서한(西漢) 정박(鄭璞)은 자가 자진(子眞)인데 성제 때에 외척대신(外戚大臣) 왕봉(王鳳)이 예의를 다해 초빙해도 응하지 않고 곡구(谷口)에서 살면서 호를 곡구자진(谷口子眞)이라고 했다 한다. 한서(漢書)卷七十二 「『고사전(高士傳)

 

곡구노자(谷口老子)

곡구(谷口)에 집을 짓고서 묵수(黙守)하며 수도(修道)만 했던 한() 나라 정자진(鄭子眞)을 말한다. 한서(漢書)72

 

곡구사경서(谷口事耕鋤)

서한(西漢) 말엽에 고사(高士) 정자진(鄭子眞)이 지조를 굽히지 않고 곡구란 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그 이름이 경사(京師)를 진동하였다 한다. 법언(法言)』 「문신(問神)

 

곡구요(谷口謠)

() 나라 고사(高士) 정자진(鄭子眞)이 곡구현(谷口縣)에 집을 짓고 수도하면서 지은 무언(無言)의 노래를 이른다.

 

곡구자진(谷口子眞)

() 나라 때의 은사 정자진(鄭子眞)은 곡구에 살면서 수도(修道)에 전심하여, 일찍이 대장군(大將軍) 왕봉(王鳳)의 예빙(禮聘)을 받고도 응하지 않았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한서(漢書)卷七十二

 

곡구정자진(谷口鄭子眞)

곡구(谷口)는 섬서성(陝西省)에 있는 지명이고, 자진(子眞)은 정박(鄭朴)의 자()이다. 정자진이 곡구에 살면서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암석 아래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는데, 이름이 경사(京師)에 진동하였다. 법언(法言)』 「문신(問神)

 

곡궁(哭窮)

() 나라 완적(阮籍)이 나가 놀 때 수레 가는 대로 길을 가다가 길이 끝나면 문득 통곡하고 돌아왔다.

 

곡궤주(曲几誅)

글을 올바르게 쓰지 못하고 우회해서 쓴다는 평판을 말한다. 곡궤(曲几)는 구불구불 좋지 못한 목재로 만든 다궤(茶几)를 말한 것으로 유종원(柳宗元)의 참곡궤문(斬曲几文)황후가 심은 물건은 무엇보다 곧아야 한다. 그리하여야 성주가 그것을 가지고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皇后植物 所貴乎直 聖主取焉 以建家國].”이라고 하였다.

 

곡단(曲端)

남송(南宋) 때 사람으로 병략(兵略)에 뛰어나서 일찍이 하인(夏人)과 금병(金兵)을 물리쳐 공을 세우기도 하였으나, 성질이 강퍅하여 자기 재능만 믿고 상관(上官)을 능멸하곤 하다가, 끝내 위국공(魏國公) 장준(張浚)에 의해, 그가 일찍이 기둥에 써 붙였던 관중으로 가서 사업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도리어 강가에 와서 고깃배를 띄우도다[不向關中興事業 却來江上泛漁舟].”라고 한 시가 바로 남도(南渡)한 임금을 가리킨 말이라는 것으로 죄가 얽어져 마침내 공주(恭州)의 감옥에 송치되었다. 그에게 평소 매일 4백 리씩을 달리는 철상(鐵象)이란 말이 있었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철상이 애석하다[鐵象可惜]’는 말을 연호(連呼)하고 나서 마침내 형신(刑訊)을 받다가 죽었다. 송사(宋史)卷三百六十九

 

곡도궁(哭途窮)

() 나라 완적(阮籍)이 수레를 타고 가다 길이 막히면 문득 통곡하고 돌아왔다는 궁도지곡(窮途之哭)’의 고사가 유명하다. 진서(晉書)』 「완적전(阮籍傳)

 

곡돌(曲突)

곡돌사신(曲突徙薪)의 준말로, 선견지명을 발휘하여 화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을 말한다.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순우곤(淳于騉)이 옆집의 굴뚝이 곧게 뻗어 장작더미 옆으로 나 있는 것을 보고는, 화재의 위험이 있다고 경고하며 굴뚝을 구부리고 장작을 옮기도록(曲突徙薪) 충고하였는데, 그 말을 듣지 않다가 과연 집을 태웠던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 「곽광전(霍光傳)

 

곡돌모(曲突謨)

곡돌은 굴뚝의 방향을 굽혀 다른 쪽으로 돌린다는 뜻이다.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의 순우곤(淳于騉)이 이웃사람의 굴뚝이 위로 똑바르게 세워져 있고 그 곁에 섶나무가 쌓여 있는 것을 보고는 굴뚝을 굽혀 다른 쪽으로 돌리고 섶나무를 멀리 옮기라고 충고하였으나, 이웃사람은 그 말을 듣지 않다가 결국 불이 나고 말았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장래에 있을 재앙을 미리 대비하는 계책을 말한다.

 

곡돌사신(曲突徙薪)

()를 미연에 방지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어느 집에서 구들을 곧게 놓아 아궁이와 굴뚝이 바로 통하게 하고 그 옆에다 나무를 쌓아 놓았다. 손님이 와서 보고 주인더러 구들을 굽게 고치고 나무를 옮겨 쌓아서 굴뚝 옆에 두지 말라.”라고 하였으나 주인은 듣지 않다가 곧 화재가 났다는 고사가 있다.

 

곡두(鵠頭)

서체(書體)의 이름인데, () 나라 때 왕문도(王文度)에게 이 곡두서체로 쓴 조판(詔板)을 내렸던 고사에서, 전하여 임금의 조서(詔書)를 가리킨다.

 

곡란암자(鵠卵菴子)

이자현(李資玄)이 살았던 초암(草菴)을 말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46 춘천 조(春川條)고려 이자현이 문수사 골짜기 그윽한 곳에 식암을 짓고 살았는데, 둥그렇기가 고니 알 같고 겨우 두 무릎을 세울 만하였다[作息菴 團圓如鵠卵]”고 하였으며, 그의 시도 함께 수록하여 소개하고 있다.

 

곡량적(穀梁赤)

춘추에 주()를 낸 사람인데, 그의 주해는 특히 춘추의 경문(經文)에 매우 충실했다고 한다.

 

곡려(谷蠡)

흉노(匈奴) 번왕(藩王)의 봉호(封號)로 좌우로 나뉘어 있었다.

 

곡령(鵠嶺)

개성(開城)에 있는 송악산(松嶽山)의 이칭(異稱)이다.

 

곡령송청(鵠嶺松靑)

최치원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흥할 것을 알고, 고려태조에게 곡령에 솔이 푸르고 계림엔 잎이 누르다[鵠嶺靑松鷄林黃葉]”라는 글을 올렸다.

 

곡령청송(鵠嶺靑松)

신라 말기(末期)최치원(崔致遠)이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 글을 보냈는데 곡령의 푸른 솔이요, 계림의 누른 잎이라.”라고 하는 문구가 있었다. 이것은 송도(松都)는 일어나고 경주(慶州)는 망하리라.”는 뜻이다.

 

곡례(曲禮)

예기(禮記)의 편명이다.

 

곡로명(鵠鷺明)

벼슬한 사람이 조회(朝會)에 차례대로 서는 것을 곡()과 노()의 항렬(行列)에 비유한다.

 

곡록평(穀祿平)

등문공(滕文公)이 정지(井地)에 대하여 묻자,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대체로 인정(仁政)은 반드시 경계(經界)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니, 경계가 바르지 못하면 정지가 고르지 못하며, 곡록이 평()치 못하게 된다[夫仁政, 必自經界始. 經界不正, 井地不鈞, 穀祿不平].”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곡망계강진(哭望桂江津)

조정에서 쫓겨나 계강 가에서 불우하게 보냈던 당() 나라 유종원(柳宗元)을 이른다. 계강은 또한 여주(驪州)를 관통하는 한강(漢江)의 별칭이기도 하다.

 

곡망사롱(鵠亡使籠)

제왕(齊王)순우곤(淳于髡)을 시켜서 고니를 초왕(楚王)에게 드리도록 했는데 도중에 고니를 날려보내고 빈 조롱[]만 갖다 주었다는 고사가 있다. 사기(史記)

 

곡목구곡목(曲木求曲木)

굽은 나무는 굽은 나무를 쓰도록 한다. , 한번 굽은 나무를 재료로 하면 계속해서 굽은 나무를 써야만 해 전체가 다 구부러지게 된다. 인사(人事)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처음부터 직목(直木) 과 같은 인물을 쓴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곡봉(鵠峯)

곡령(鵠嶺)으로 개성에 있는 송악산(松嶽山)의 별칭이다.

 

곡부(曲阜)

지명(地名). 예기(禮記)』 「명당위(明堂位)成王封周公於曲阜라고 보이고,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주에 少昊自窮桑 登帝位 窮桑在魯北 後徙曲阜라고 보인다.

 

곡성산(穀城山)

지금의 산동성 동아현 동북에 있던 황산(黃山)을 말한다.

 

곡성황석(穀城黃石)

곡성은 산명(山名)이다. 전한(前漢) 때 이상 노인(圯上老人)이 장량(張良)에게 이르기를 “13년 뒤에 제북(濟北)의 곡성산 밑에서 황석(黃石)을 보거든 그 돌이 바로 난 줄 알라[異日見濟北穀城山下黃石, 卽我也].”라고 하였다.

 

곡수(曲水)

굽은 물줄기를 이른다. 왕희지의 난정기(蘭亭記)流觴曲水라 하였다. ()나라 왕희지(王羲之)가 회계군(會稽郡) 내사(內史)로 있을 때 삼짇날 오현(吳縣)의 난정(蘭亭)에서 당시의 명사 42인과 함께 모여 좌우에 흐르는 시냇물에 술잔을 띄워 마시며 시를 짓고 즐겼다.

 

곡수(谷水)

골짜기의 물.

 

곡수유상(曲水流觴)

3월 삼짇날 문인(文人)들이 모여서 굽이쳐 흐르는 물결에 잔을 띄우며 시()를 짓고 노니는 잔치를 말한다. 진서(晋書)속석전(束晳傳)진 무제(晉武帝)3월 삼짇날 곡수(曲水)하는 뜻을 묻자 속석(束晳)이 말하기를 옛날에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에 성을 쌓고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웠으므로 일시(逸詩)술잔은 물결을 따라 흐르네[羽觴隨波流]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왕희지(王羲之)난정(蘭亭)의 모임도 여기에서 비롯한 것입니다라고 했다.”라 하였다.

 

곡신(谷神)

골짝 속이 텅 비어 있는 곳. 전하여 형체도 그림자도 아무 것도 없는 공허한 곳으로 현묘(玄妙)한 도()를 말하는데 오장(五臟)의 신()으로도 사용한다.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6에 곡신불사(谷神不死)란 말이 있는데, 신기(神氣)를 수양하여 죽지 않는다는 말이다.

 

곡앵고비(谷鶯高飛)

꾀꼬리가 그윽한 골짜기에서 높은 나무로 옮아간다는 것은 출세를 말한다.

 

곡약(鵠鑰)

따오기 모양으로 만든 금문(禁門)의 열쇠이다. 북사(北史)금문의 열쇠를 곡약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곡역(曲逆)

지금의 하북성 완현(完縣) 동남에 있었던 한나라가 설치한 현이름이다.

 

곡연(曲宴)

()은 적다는 뜻으로, 임금이 내원(內苑)에서 신하들에게 간단히 베푼 잔치를 말한다.

 

곡오사(哭吾私)

소식문집(蘇軾文集)63 제구양문충문공(祭歐陽文忠文公)크게는 천하를 위해 슬퍼하고 작게는 내 사사로운 일로 곡한다[蓋上以爲天下慟 而下以哭吾私]”라 하였다.

 

곡옥(曲沃)

원래 춘추 때 당진국이 발흥했던 곳으로 지금의 산서성 문희현(聞喜縣)에 있었으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르러 하남성 섬현(陝縣) 서남의 위()나라 령의 고을을 칭했다.

 

곡용삼백(曲踊三百)

자신의 몸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이는 동작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진 문공(晉文公)의 신하 위주(魏犨)가 가슴에 부상을 당한 상태에서, 앞으로 뛰며 손뼉을 세 번 치고(距躍三百)위로 뛰며 손뼉을 세 번 쳐서(曲踊三百), 그의 몸이 무사하다는 것을 과시하여 죽음을 면한 고사가 있다. 춘추좌전(春秋左傳)僖公 28

 

곡우(曲郵)

지금의 섬서성 임동현(臨潼縣) 동쪽이다.

 

곡우금악갱지기(梏牛禁惡更知幾)

곡우(梏牛)의 곡()은 즉, 소뿔(牛角)로부터 손상을 피하기 위해 소뿔에 씌운 기구이다. 주역(周易)대축괘(大畜卦) 육사효(六四爻)동우의 곡이니 크게 길하다[童牛之梏 元吉]”라 하였는데, 그 전()소의 성질은 본시 뿔로 잘 들이받으므로, 횡목(橫木)으로 곡을 만들어 뿔에 씌워서 그 들이받음을 막는다는 뜻인데, 뿔이 아직 나지 않은 동우(童牛) 때부터 서두르면 힘은 작게 들고 공은 크므로 크게 길하다는 것이다[牛之性, 觝觸以角, 故牿以制之, 若童犢, 始角而加之以牿, 使觝觸之性, 不發則易而无傷, 以況六四, 能畜止上下之惡於未發之前則大善之吉也].”라고 하였다.

 

곡일(穀日)

곡식을 점치는 날이라는 뜻으로, 음력 정월 초여드렛날을 일컫는 말이다.

 

곡전(曲旃)

깃대 끝이 비스듬하게 굽은 깃발을 말한다. 고대 황제나 왕이 스승을 모시기 위해 사용했던 의장용 깃발로 이것을 장식으로 세워 둔 것은 제왕의 권위를 넘본 참람한 행위였다.

 

곡절(曲折)

구부러져 꺾임, 문맥(文脈) 따위가 단조(單調)롭지 아니하고 변화(變化)가 많음. / 인용: 原詩上(홍석주)

이런저런 복잡(複雜)한 사정(事情)과 내용(內容), 까닭. 어미(語尾), 어간(語幹)의 변화(變化)와 활용(活用).

순탄(順坦)치 못하거나 변화(變化)가 많은 경로(經路)나 상태(狀態) / 곡조에서 음이 높고 낮게 오르내리는 것.

 

곡좌(曲座)

고려시대 도병마사(都兵馬使)의 합좌(合座) 때에 수상(首相)이 앉는 자리를 말한다.

 

곡풍(谷風)

시경(詩經)의 편명인데 부인이 지아비에게 버림을 받고 지은 시이다.

 

곡피(谷皮)

곡수(谷樹)의 껍질. 머리 싸매는 망건을 만들 때 쓰인다.

 

곡학아세(曲學阿世)

정도(正道)를 벗어난 학문으로 학문(學問)을 왜곡(歪曲)하여 세속(世俗)에 아부(阿附)한다. 학문을 굽히어 세속에 아첨한다. 학문을 왜곡시켜 시류나 이익에 영합한다. 지식인의 양심을 저버리고 정도(正道)를 벗어난 학문으로 권력에 붙어서 세상을 어지럽히는 무리를 가리킨다. / 유의어: 어용학자(御用學者)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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