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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사전 - 23. 고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23. 고

건방진방랑자 2019. 11. 11.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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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

도려내다. 깎아내다.

 

고가(袴歌)

지방관의 선정(善政)을 비유한 말이다. 후한(後漢) 때 염범(廉范)이 촉군태수(蜀郡太守)가 되어 선정을 베풀자, 백성들이 좋아하여 노래하기를 염숙도가 어찌 그리 늦게 왔는고 …… 평생에 속옷도 없었는데 지금은 바지가 다섯 벌이라네[廉叔度 來何暮 …… 平生無襦 今五袴]”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고각(鼓角)

군중(軍中)에서 쓰는 북과 뿔피리를 말한다.

 

고각광가(叩角狂歌)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 영척(寗戚)이 쇠뿔을 두드리며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환공(桓公)이 그를 등용한 고사이다. 사기(史記)八十三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고각상환공(叩角相桓公)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역척(寗戚)이 곤궁하여 남의 소를 먹이면서 소의 뿔을 두드리며, 노래를 지어 불렀더니 제환공(齊桓公)이 듣고 그가 어진 사람인줄 알고 불러 보고 정승을 삼았다 한다. 사기(史記)八十三 노중련추양열전(魯仲連鄒陽列傳)

 

고각장소식(鼓角將蘇軾)

()소식(蘇軾)이 왕안석(王安石)의 미움을 사 중앙에 붙어있지 못하고 항주(杭州호주(湖州황주(黃州)등 여러 고을의 외직을 전전하면서 많은 혜정(惠政)을 남겼으므로 그 고을을 떠날 때면 백성들이 풍악을 갖추어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한다.

 

고각훤(鼓角喧)

북소리와 나팔소리. 군중에서 연주하는 군악을 말한다.

 

고강조명(高岡鳥鳴)

천하태평의 상서를 말한다. 시경(詩經)대아(大雅) 권아(卷阿)봉황이 울어대니 저 높은 언덕이로다[鳳凰鳴矣 于彼高岡].”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고개지(顧凱之)

남송(南宋) 때 산음령(山陰令)을 지내고, 명나라 때에는 이부상서(吏部商書)를 지냈다.

 

고객(估客)

상인(商人)’을 말한다.

 

고객락(估客樂)

악부의 이름으로, 원작은 제 무제(齊武帝)가 즉위한 후, 포의(布衣) 시절에 번등(樊鄧)에서 노닐던 일을 추억하여 지은 노래인데, 그 내용은 사람이 한번 간 뒤로 아주 소식이 없음[一去無消息]을 뜻하고 있다. 이백(李白)의 고객락에는 뱃사람이 거센 바람을 타고, 배 갖고 멀리 행역을 갔는데, 마치 구름 속의 새와 같아, 한번 가서는 종적이 없네.”라 하였다.

 

고갱(菰羹)

줄풀 국. 줄풀()은 강호(江湖)에서 많이 자라는 것으로 말()도 먹이고 사람도 나물로 먹을 수 있다 한다. 중국 강남(江南) 지방에는 채소가 귀하여 이 풀을 많이 먹었다고 하는데 진서(晉書)장한전(張翰傳)가을바람이 일어나면 늘 오중(吳中)의 줄나물이 생각난다.”라 하였다.

 

고거(故居)

고향을 말한다.

 

고건(櫜鞬)

활집과 화살통을 이른 말이니, 전하여 전쟁에 나가는 무인(武人)을 말한다. / 인용: 소화시평 상권18

 

고검두우기(古劍斗牛氣)

() 나라 무제(武帝) 때 하늘의 두우(斗牛) 사이에 자기(紫氣)가 서려 있는 것을 보고, 뇌환(雷煥)이 그 분야에 속하는 예장(豫章)의 풍성현(豐城縣)에서 용천(龍泉)과 태아(太阿)의 두 검을 발굴했던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36

 

고견불락무(高堅不落無)

높고 굳으니 무에 떨어지지도 않는다. 성인의 도학이 높고 굳은 데가 있으니 이는 분명한 정체가 있는 것으로 허무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논어(論語)』 「자한(子罕)우러러보면 더욱 높고 뚫으려 하면 더욱 굳으며 쳐다보면 앞에 있다가 갑자기 뒤에 있기도 하다.”라 하였다.

 

고경(杲卿)

() 나라 안고경(顔杲卿)을 가리킨다.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누차 공을 세워 의기를 떨치다가 마침내는 식량과 화살이 떨어져 포로로 잡힌 뒤 끝까지 항거하며 꾸짖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구당서(舊唐書)187안고경전(顔杲卿傳)

 

고경(孤卿)

종일품 문관인 찬성(贊成) 벼슬이다.

 

고경영위대질차(鼓罄寧爲大耋嗟)

인간 만사 성쇠(盛衰)와 시종(始終)이 떳떳한 도리임을 알고 장구를 두드리며 노래 부르듯 천명에 순응해야 한다는 뜻으로 주역(周易)이괘(離卦) 구삼효(九三爻)해가 기울고 있는 밝음이니, 장구 치며 노래 부르지 않으면 대질(大耋)을 슬퍼하는 것이어서 흉하리라.”라 하였다.

 

고고(枯槁)

메마르다.

 

고고(枯搞)

몸이 야위다.

 

고고(叩叩)

문 같은 것을 똑똑 두드리는 모양, 정성스러운 모양, 친절하게 묻는 모양.

 

고고(呱呱)

아이의 울음소리, 아이가 세상에 처음 나오면서 우는 소리.

 

고고(杲杲)

해가 아직 뜨지 않아 어두운 모양.

 

고고(暠暠)

흰 모양.

 

고고자허(孤高自許)

자기만이 고결하다고 자부한다.

 

고고지성(呱呱之聲)

아기가 세상에 출산하면서 처음 우는 소리. 출생을 말한다.

 

고공(考工)

소부(少府) 산하의 관청으로 기계의 고안이나 제작을 담당했다.

 

고공(苦空)

이 세상의 사물은 중생의 모든 몸과 마음을 핍박하여 괴롭게 하므로 고()라 하고, 만유(萬有)는 모두 인연의 화합으로 생기는 것이어서 하나도 실체나 제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공()이라 한다.

 

고공지(考工地)

()나라 관제(官制)에 고공(考工)은 기계를 만드는 관청이다. 무제(武帝)의 외숙 전분(田蚡)이 승상(丞相)으로 있으면서 고공에 속한 땅을 청구하여 집을 넓히려다가 무제에게 거절을 당하였다.

 

고관(罟冠)

고고관(罟罟冠)의 준말로, () 나라 시대에 귀부인(貴婦人)들이 착용했다고 한다.

 

고관대작(高官大爵)

지위가 높은 큰 벼슬자리. 또는, 그 직위에 있는 사람을 이른다.

 

고광(古狂)

명 나라 화가 두근(杜菫)의 호이다. 산수를 잘 그리고 인물화 역시 백묘(白描)의 고수이다.

 

고굉군(股肱郡)

사기(史記)』 「난포계포열전(季布欒布列傳)에서 효문제(孝文帝)는 한 사람이 계포를 칭찬하는 말만 듣고 계포(季布)를 어사대부(禦史大夫)로 임명하러 불렀다가 다른 사람이 계포를 헐뜯는 말을 듣고선 만나지 않고 돌려보냈다. 그러자 계포가 이에 대해 불만을 얘기하자 효문제(孝文帝)는 계포를 장안(長安)에 부른 이유에 대해 하동은 나의 팔 다리 같은 군이기 때문에 특별히 그댈 불렀을 뿐이다[河東吾股肱郡, 故特召君耳].”라고 했다. 하동(河東)은 장안(長安)을 지킬 수 있는 요충지이다. / 인용: 詰楊吏(허격)

 

고굉지신(股肱之臣)

임금이 팔 다리 같이 믿고 중히 여기는 신하. 군주의 정치를 보좌하는 신하를 이른다. 서경(書經)/ 유의어: 주석지신(柱石之臣), 동량지재(棟梁之材), 사직지신(社稷之臣). / 인용: 태사공자서

 

고구무녀(高丘無女)

나라 걱정을 할 틈도 없다는 뜻의 자조적(自嘲的)인 표현이다. 초사(楚辭)』 「이소(離騷)홀연히 뒤돌아보며 눈물을 흘림이여, 고구에 여인 없음이 못내 슬프도다[忽反顧以流涕兮 哀高丘之無女].”라고 하였는데, 그 주()고구(高丘)는 초() 나라의 산 이름이고 여인은 신하를 비유한 말인데, 초 나라에 현신(賢臣)이 없는 것을 걱정하여 슬픈 심정으로 눈물을 흘린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고구빙력(高衢騁力)

길거리를 치달리며 재력(才力)을 발휘함을 말한다. 참고로 문선(文選)에 있는 왕찬(王粲)등루부(登樓賦)冀王道之一平兮 假高衢而騁力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고구산악(鈷丘剷惡)

고구(鈷丘)는 중국 영주부(永州府)에 있는 고무담(鈷鉧潭) 서쪽의 작은 언덕을 가리킨다. () 나라 유종원(柳宗元)의 고무담서소구기(鈷鉧潭西小丘記)에 의하면, 고무담 서쪽에 조그마한 언덕이 있어 경치가 매우 뛰어나서 이곳을 구입하여 친구들과 함께 노닐면서, 예초(穢草)와 악목(惡木)을 모두 베어 버리고 가목(嘉木)과 미죽(美竹) 등을 구경하며 즐겼다고 하였는데, 곧 이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유하동집(柳河東集)卷二十九

 

고구잠(苦口箴)

자기의 잘못을 말해주는 충고(忠告)를 가리킨다. 고구는 입에 쓴 독한 약을 말하는데, 사기(史記)』 「유후세가(留侯世家)충고해 주는 말은 귀에 거슬리지만 행실에 이롭고 독한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다.”라 하였다.

 

고국교목(故國喬木)

맹자(孟子)』 「앙혜왕(梁惠王)교목(喬木)이 있어서 고국(故國)이 아니요, 세신(世臣)이 있기 때문에 고국이라고 하는 것이다.”라는 말에서 기인하여, 누세(累世) 훈구지신(勳舊之臣)이나 그 집안을 고국교목(故國喬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고군분투(孤軍奮鬪)

수가 적고 뒤에서 돕는 군사도 없는 고립된 군대가 용감하게 힘에 겨운 적과 분발하여 힘껏 싸움. 도와주는 사람 없이 혼자의 힘으로 일을 힘겹게 헤쳐 나감. 외로운 군력(軍力)으로 분발(奮發)하여 싸운다는 데서, 홀로 여럿을 상대로 하여 싸우는 것을 말한다.

 

고군섭(高君涉)

군섭(君涉)은 고부천(高傅川)의 자()이다.

 

고궁(固窮)

곤궁한 환경에서도 자신의 뜻을 굳게 지키는 것을 말한다. 논어(論語)』 「위령공(衛靈公)군자는 곤궁해도 도를 고수하지만, 소인은 곤궁하면 아무렇게나 행동한다[君子固窮 小人窮斯濫矣].”라 하였다. 참고로 두보(杜甫)의 시에 사방을 경영할 장부의 뜻을 지녔거늘 어찌 고궁을 사양할 수 있으리요[丈夫四方志 安可辭固窮].”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2 前出塞 / 유의어: 고궁불실도(固窮不失道)

 

고근(孤根)

두보(杜甫)의 시에 외로운 바위 뿌리 깊이 잠긴 염여퇴(灩澦堆), 서쪽에서 오는 큰 물 구름 낀 하늘이 걱정되네[灩澦旣沒孤根沈 西來水多愁太陰].”라는 표현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19 灩澦

 

고근약식(孤根弱植)

친척이나 가까운 후원자가 없음을 말한다.

 

고금낭(古錦囊)

() 나라 시인 이하(李賀)가 길을 갈 때에는 오래 되어 다 해진 비단 자루(古錦囊)를 아이 종에게 메고 가게 하다가 시상(詩想)이 떠오르면 시를 지어 그 자루 속에 던져 놓고는 집에 돌아와 다시 그 시들을 꺼내어 작품을 완성했던 고사가 전한다. 이하소전(李賀小傳)

 

고금동서(古今東西)

예와 지금, 동양과 서양. 때와 지역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고금일구맥(古今一丘貉)

()나라 양운(揚惲)이 말하기를 ()나라가 충량(忠良)한 신하를 죽여서 멸망하더니, 예와 지금이 한 언덕에 사는 담비와 같다.”라 하였다.

 

고금일마(古今一馬)

공손용자(公孫龍子)에 있는 말인데, 흰말(白馬)과 말()이 다르니 같으니 하던 끝에 붙은 말이다.

 

고기(皐夔)

훌륭한 신하를 지칭하는 말로 쓰인다. ()는 고요(皐陶)인데 우순(虞舜) 당시의 형관(刑官)이며, ()는 우순 당시의 악관(樂官)이다.

 

고기직설(皐夔稷契)

() 임금 때의 신하였던 고요(皐陶), (), 후직(后稷), (), 현신(賢臣)을 가리킨다.

 

고담준론(高談峻論)

고상하고 준엄한 언론. 잘난 체하고 과장하여 말함을 이른다.

 

고당(高堂)

부모의 별칭이다. 어버이의 거소(居所)를 말한다. / 인용: 李少婦詞(최경창)

 

고당무협몽(高唐巫峽夢)

고당(高唐)은 운몽택(雲夢澤)에 있었던 초() 나라의 대관(臺觀).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唐賦) 주에 적제(赤帝)의 출가하지 못하고 죽은 딸 요희(姚姬)를 무산(巫山) 남쪽에 장사지냈는데, 초 회왕(楚懷王)이 고당에 놀러 나와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 무산에 있는 계집이라고 자칭하는 미녀를 만나 풍정을 나눴다.”라 하였다.

 

고당부(高堂賦)

()의 송옥(宋玉)이 쓴 고당부. 초 나라 양왕(襄王)이 운몽호(雲夢湖)에 나가 놀면서 고당관(高唐觀)을 구경하고 꿈에 무산(巫山)의 신녀(神女)를 만나 운우(雲雨)의 정을 나누었다는 내용으로, 후세에 와서 고당(高唐무산(巫山양대(陽臺) 등을 남녀가 만나 즐기는 장소로, 운우(雲雨)를 남녀의 정사로 표현하게 된 것이 모두 이 고당부를 근거로 하여 시작되었다. 문선(文選)

 

고당신몽(高唐神夢)

고당(高唐)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의 누대(樓臺) 이름으로, 운몽택(雲夢澤) 속에 있는데, 초나라 양왕(襄王)이 이곳에서 놀다가 꿈속에서 무산(巫山)의 선녀(仙女)를 만나 놀았다고 한다.

 

고대광실(高臺廣室)

높은 대()와 넓은 집이란 뜻에서, 굉장히 크고 좋은 집을 이른다. / 유의어: 고루거각(高樓巨閣), 고각대루(高閣大樓)

 

고도(苦道)

3·6도의 과보를 받는 것이다.

 

고도(皐陶)

고요라고도 읽을 수 있으며 순() 임금의 현상(賢相)이다.

 

고두사죄(叩頭謝罪)

머리를 조아려 사죄하며 용서를 청한다.

 

고량문수(膏粱文繡)

진수성찬에 화려한 옷 등 사치스럽게 사는 생활을 이른다.

 

고량자제(膏梁子弟)

부귀한 집에서 자라나서 고생을 모르는 사람을 이른다.

 

고량진미(膏梁珍味)

살진 고기와 좋은 곡식으로 만든 맛있는 음식을 이른다. / 유의어: 산해진미(山海珍味), 진수성찬(珍羞)

 

고려공사삼일(高麗公事三日)

고려의 정책이나 법령은 사흘들이로 바뀜. , 시작한 일이 오래 가지 못함의 비유. 사람들이 무슨 일에 참을성이 부족하여 자주 변경함을 지적한 말이다. / 유의어: 작심삼일(作心三日), 조령모개(朝令暮改), 조변석개(朝變夕改).

 

고려도경(高麗圖經)

송 나라 서긍(徐兢)이 고려에 사신(使臣)으로 와서 고려의 풍속과 제도를 기록하고 그림까지 그려 붙이고 고려도경(高麗圖經)이라 이름하였다. 책은 지금까지 전하나 그림은 없어졌다.

 

고려산(高麗山)

강화부(江華府)에서 서북쪽으로 5()에 있다. 고려 고종(高宗)을 이 산에다 장사했는데 이것이 바로 홍릉(弘陵)이다.

 

고력사(高力士)

당 현종의 환관(宦官)으로 총애를 입어 정권을 농락하였다. 여러 번 승진,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이 되고 제국공(齊國公)에 봉해졌다.

 

고련풍(苦練風)

음력 3곡우(穀雨) 무렵에 부는 최후의 화신풍(花信風)을 말한다.

 

고로(菰蘆)

갈대인데, 곧 은자가 사는 곳을 말한다.

 

고로(孤露)

부모가 죽으면 몸을 보호하던 옷을 벗은 것 같다는 뜻에서 부모가 죽은 것을 말한다.

 

고룡(古龍)

남원(南原)의 옛 이름이다.

 

고륜신마(尻輪神馬)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조물주가 나의 꽁무니를 점점 변화시켜 수레바퀴로 만들고, 나의 정신을 말로 변화시킨다면 내가 이를 이용하여 타고 다닐 것이니, 어찌 다시 수레가 필요하겠는가[浸假而化予之尻以爲輪 以神爲馬 予因以乘之 豈更駕哉].”라는 말이 나온다.

 

고륜지해(苦輪之海)

고뇌가 끊임없이 돌아가는 인간 세계를 이른다.

 

고릉(觚稜)

궁궐의 가장 높은 곳. 전각(殿閣) 지붕의 기와등(瓦脊)을 말한다. 반고(班固)서도부(西都賦)고릉에 올라 금작에 깃든다[上觚稜而棲金爵].”라 하였는데, 왕관국은 학림(學林)에서 서도부에 말한 고릉은 기와등으로, 동철(銅鐵)로 봉작(鳳雀)을 만들어 장식한다.”라고 하였다. / 인용: 詰楊吏(허격)

 

고리(苦李)

도변고리(道邊苦李)의 준말이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하나인 왕융(王戎)이 어렸을 적에 길가의 오얏나무를 보고는 따 먹을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필시 맛이 쓸 것이라고 말한 고사에서 유래하여, 도변고리(道邊苦李)는 용렬한 인간, 혹은 무용지물의 뜻으로 곧잘 쓰이게 되었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아량(雅量)

 

고리곤(鼓吏褌)

고리(鼓吏)는 북을 치는 아전으로 예형(禰衡)을 가리킨다. 그는 삼국(三國) 시대 명사였는데, 조조(曹操)가 그를 모욕 주기 위하여 고리로 삼자, 그는 여러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부모가 물려준 결백한 몸을 보여 준다면서 속옷만 걸치고 북을 치며 어양곡(漁陽曲)을 노래하였다. 후한서(後漢書)』 「예형전(禰衡傳)

 

고리자다(苦李子多)

() 나라 왕융(王戎)이 여러 사람과 함께 길을 가다가 오얏나무 열매가 많이 열린 것을 보고 사람들은 땄으나 왕융은 손을 대지 아니하며 길가의 오얏나무에 많은 열매가 그대로 있는 것을 보니 반드시 먹을 수 없는 쓴 오얏일 것이다.”라 하더니, 과연 쓴 열매였다.

 

고립무원(孤立無援)

고립(孤立)되어 구원(救援)받을 데가 없음을 이른다. / 유의어: 고립무의(孤立無依)

 

고마이간(叩馬而諫)

주 나라의 무왕(武王)이 주()를 정벌하려고 하자, 백이(伯夷)ㆍ숙제가 말 굴레를 잡고서 간하기를 아버지가 죽어서 장사도 치르지 않았는데 창을 잡고 정벌을 하니, 효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라 하였다. 사기(史記)61 백이열전(伯夷列傳)

 

고만(高巒)

부평(富平) 서쪽 바다의 조그만 섬이다. 여지승람엔 고란(高鸞). 고려사(高麗史)』 「최해전(崔瀣傳)엔 고란(孤蘭)이라 되어 있다.

 

고만수(苽蔓水)

5월의 물을 이른다. 5월에 오이 덩굴이 뻗으므로 이렇게 부른다 한다.

 

고매(高禖)

귀신 이름이다. 천자(天子)가 태자(太子)를 점지해 달라는 뜻으로 고매신에게 융숭한 예를 갖추어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예기(禮記)』 「월령(月令)

 

고맥국(古貊國)

춘천(春川)을 가리킨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46 춘천도호부(春川都護府)

 

고면(顧眄)

남들로부터 중망(重望)의 시선이 집중됨을 이른 말이다.

 

고면염수(膏面染鬚)

늙은 사람이 젊게 보이기 위해서 얼굴에 기름을 바르고 흰머리를 검게 염색하는 것을 말한다.

 

고명(誥命)

오품관(五品官) 이상의 고관을 임명할 때에 수여하는 직첩(職牒)을 말한다.

 

고명지실귀지감(高明之室鬼之瞰)

양웅(揚雄) 해조(解嘲)에서 온 말인데, 즉 고명한 집은 반드시 귀신이 해치려고 한다는 뜻으로, 전하여 성하면 반드시 쇠하게 되는 이치를 뜻한 말이다.

 

고모복(皐某復)

사람이 죽은 뒤에 초혼(招魂)하는 의식을 말한다. 예기(禮記)』 「예운(禮運)의례(儀禮)』 「사상례(士喪禮)사람이 죽으면 지붕 위에 올라가 옷을 가지고 혼을 부르며 말하기를 아아, 아무개여 돌아오라[皐某復]’고 하고 세 차례를 반복한다.”라 하였다.

 

고목사회(枯木死灰)

형체는 마른 나무가 서 있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마음은 불 꺼진 재처럼 아무 생각이 없음을 이른다. 사람의 무위무심(無爲無心)함을 비유한다.

 

고목생화(枯木生花)

마른 나무에서 꽃피듯 잘됐다. 곤궁한 사람이 크게 행운을 얻었다. 망한 집안에서 인물이 났다.

 

고목한아(古木寒鴉)

주학년이 갈가마귀 떠났어라. 고목만 우뚝하고 나그네 당도하자 석양이 아스라하네[古木崢嶸鴉去後 夕陽迢遰客來初]”라는 고시(古詩)의 시정(詩情)을 취하여 그린 그림을 두고 한 말이다.

 

고무담(鈷鉧潭)

()나라 때의 문장가인 유종원(柳宗元)고무담기(鈷鉧潭記)를 지었다.

 

고문(高門)

지금의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서남의 고문원(高門原)을 말한다.

 

고문(古文)

과두문자(蝌蚪文字) 등을 말한다.

진시황(秦始皇)이 중국의 문자를 금문(今文)으로 통일하기 전에 사용했던 선진시대의 문자이다.

 

고문상서(古文尙書)

() 나라 공왕(恭王)공자(孔子)의 구택(舊宅)을 헐었을 때 벽 속에서 서경(書經)가 나왔는데 이것은 고체(古體)인 선진 시대(先秦時代)과두문자(蝌蚪文字)로 씌어져 있었기 때문에 고문상서(古文尙書)’라 이름 하였다. 고문상서는 모두 45편으로 금문상서보다 16편이 많다.

 

고문성사(高門盛事)

() 나라 우정국(于定國)의 아버지 우공(于公)이 대문을 높이 세우면서 자손 중에 자신의 음덕(陰德)으로 귀하게 될 자가 나올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과연 정국이 승상이 되고 영()이 어사대부가 되었다는 고사가 전해 온다. 한서(漢書)』 「우정국전(于定國傳)

 

고미(菰米)

포아풀과에 속하는 다년 생의 수초(水草)이다. 잎은 자리를 만드는 데 쓰이고 열매와 어린 싹은 식용으로 쓰인다.

 

고민령(告緡令)

다른 사람의 숨겨진 재산을 고발하도록 장려한 법령으로, 신고 된 재산은 고발한 자와 정부가 절반씩 차지했다. ()이란 1(1,000)마다 20전씩 소득세를 바치는 세법의 하나이다.

한나라 무제 때 재산을 은닉하여 세금을 포탈한 상인들을 적발하여 세금으로 추징한 법령이다. ()은 동전을 꿰는 끈을 말하나 1천 전을 꿴 화폐의 단위이다. 한무제는 부상(富商)과 대고(大賈), 고리대금업자 등의 상업자본가를 압박하여 대대적인 흉노정벌로 고갈된 국가재정을 채우기 위해 시행한 중요 정책이다. 원수(元狩) 4년 기원전 119, 산민령(算緡令)을 반포해서 대상(大商), 대고(大賈), 고리대금업자 등에게 스스로 소유재산을 신고토록 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재산세를 징수했다. 2천 전, 2() 120전에 해당하는 1()을 납부토록 했다. 그러나 상인 등의 상업자본가들이 재산을 은닉하여 신고하지 않거나, 신고하더라도 재산을 줄여 신고함으로 해서 산민령의 효과가 크게 나타나지 않자, 다시 고민령(告緡令)을 반포했다. 양가(楊可)를 등용하여 고민령의 시행을 감독시켰는데 재산을 은닉하거나 속여 신고한 사람을 고발하여 사실로 확인될 경우에는 고발당한 사람은 그 재산을 전부 몰수당하고 동시에 1년 동안 변경에 가서 군역에 복무해야 했으며, 몰수한 재산 중 절반을 고발한 사람에게 포상금으로 지불한다는 내용의 법이었다. 이 법이 발표되자 전국각지에서는 서로 다투어 고발함으로 해서 대상업자본가는 완전 몰락하게 되었으며, 국가는 수 억 전의 돈과 함께 상업자본가 소유의 광할한 농지 및 노비들을 재정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고민령은 근 10년간 시행했다가 원봉(元封) 원년인 기원전 110년에 가서야 비로소 중지했다.

 

고밀(高密)

후한(後漢)의 정현(鄭玄)이 고밀 사람이므로 그를 이르는데, 금문상서(今文尙書) 이십팔 편(二十八篇)에 대해서 정현이 일찍이 주해(註解)를 해 놓았으나, 당 태종(唐太宗) 정관(貞觀) 연간에 공영달(孔穎達)이 상서정의(尙書正義)를 지으면서 동진 원제(東晉元帝) 때 매색(梅賾)이 만든 위공전(僞孔傳)만을 오로지 채택하고, 정현의 주해에 대해서는 위작(僞作)이라고 단정하여 이를 배척했다.

지금의 산동성 고밀현(高密縣) 경내에 있었던 고을이다.

 

고반(考槃)

세상에 나가지 않고 은거(隱居)한 현인을 말한다. 고반은 시경(詩經)위풍(衛風) 고반서(考槃序)고반은 장공(莊公)이 선공(先公)의 업을 계승하지 못하여 현인으로 하여금 물러나 궁하게 살게 한 것을 풍자한 시이다.”라고 하였는데, 후세에서 은거하며 궁하게 산 것의 대칭으로 사용하였다. / 현자가 세상을 피하여 은둔해 살면서 즐거움을 이루는 곳을 이른다. 시경(詩經)위풍(衛風) 고반(考槃)고반이 시냇가에 있으니, 석인의 마음이 넉넉하도다[考槃在澗 碩人之寬].”라고 하였는데, 주에 ()는 이루는 것이요, ()은 즐거움이다.”라 하였다.

 

고반재간(考槃在澗)

어진 사람이 은거한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위풍(衛風) 고반(考槃)시냇물 골짜기에 안식처를 마련하고, 숨어사는 어진 선비 혼자서 즐겁네. 저 혼자 자고 깨고 혼자 말하여도, 즐거운 이 재미를 못 잊겠다 다짐하네[考槃在澗 碩人之寬 獨寐寤言 永言弗諼]”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고방(孤芳)

뛰어나게 고결(高潔)한 인품을 비유한 말인데, 안연지(顔延之)제굴원문(祭屈原文)에는 물은 견방을 꺼리고 사람은 명결함을 꺼린다[物忌堅芳 人諱明潔]”라 하였고, 이백(李白)의 시에는 뭇 모래는 밝은 구슬을 더럽히고 뭇 풀들은 고고한 향초를 능멸하도다[群沙穢明珠 衆草凌孤芳]”라 하였다.

 

고백(古柏)

사헌부를 이른다. 옛날 어사대(御史臺)에 백수(柏樹)를 심었으므로 이른 말이다.

 

고변(告變)

정권을 뒤엎으려는 반역 행위를 고발한다는 말이다. / 유의어: 상변(上變)

 

고병(高棅)

() 나라 학자이다. 호는 소대(嘯臺) 또는 만사(漫士). 박학(博學)하고 문장에 능했으면 특히 시에 뛰어났다. 저서에, 소대집(嘯臺集)·당시품휘(唐詩品彙)등이 있다. 뒤에 이름을 정례(廷禮)로 고쳤다.

 

고복(鼓腹)

배불리 먹고 기뻐하여 배를 두드린다는 뜻으로, 태평(太平)을 즐기는 것을 형용한 말이다. () 임금 때에 천하가 태평하자, 한 노인이 배를 두드리며 노래하기를 우물 파서 물 마시고 농사지어 밥 먹으니 임금의 힘이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고 하였다는 데서 온 말이다.

 

고복(顧腹)

부모가 자식을 항상 보살펴 기르는 것을 이른다. 시경(詩經)소아(小雅) 육아(蓼莪)아버지는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는 나를 기르시되 …… 나를 돌보시고 나를 반복하여 돌보시며 들며 나며 나를 안아 주셨네[父兮生我 母兮鞠我 …… 顧我復我 出入腹我].”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고복격양(鼓腹擊壤)

배를 두드리고 발로 땅을 구르며 노래한다. 곧 의식(衣食)이 풍부하여 안락하며 태평 세월을 즐기는 일을 말한다. 태평세월(太平歲月)을 의미한다. 중국의 요()임금 때, 한 노인이 배를 두드리고 땅을 치면서 요임금의 덕을 찬양하고 태평을 즐긴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 유의어: 태평성대(太平聖代)

 

고봉준령(高峯峻嶺)

높이 솟은 산봉우리와 험준한 산마루를 이른다.

 

고봉표맥(高鳳漂麥)

()는 문통(文通), () 나라 때 사람이다. 한 번은 아내가 밭에 가면서 보리를 마당에 널어놓고, 그에게 닭을 보라고 부탁하였는데, 마침 비가 와서 보리 멍석이 떠내려갔으나 그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장대만 들고 글을 읽었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卷一百十三

 

고봉피세(高鳳避世)

고봉(高鳳)은 후한(後漢) 때의 명유로서 항시 공부에만 열중하였으므로, 일찍이 자기 마당에 널어놓은 보리가 큰비에 떠내려가는 것도 모르고 공부만 했었다. 그 뒤에 조정에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후한서(後漢書)卷七十三 은일열전(逸民列傳)고봉(高鳳)

 

고부(鼓缶)

주역(周易)이괘(離卦) 구삼(九三)해가 저무는 격이니 평범한 장군이나 두들기며 노래하고 즐겨야지 그렇지 않고 늙음을 한탄하기만 하면 나쁘다.”라 하였다.

 

고부발계(姑婦勃磎)

장자(莊子)』 「외물(外物)방안에 공간이 없으면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장소를 서로 다투어 반목한다[室無空虛, 則婦姑勃谿].”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 유의어: 발계(勃磎) / 인용: 懊惱曲(신국빈)

 

고분(鼓盆)

고분(叩盆)과 고분가(鼓盆歌)와 같다. 장자(莊子)』 「지락(至樂)장자(莊子)의 아내가 죽어서 혜자(惠子)가 위문하러 찾아갔는데 장자(莊子)가 걸터앉아 동이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莊子妻死, 惠子吊之, 莊子則方箕踞鼓盆而歌].”라고 하였다. 후세에 아내가 죽었을 때 사용하는 고사이다. / 유의어: 고분비(叩盆悲), 고분가(鼓盆歌), 고분지탄(叩盆之嘆), 고분지통(鼓盆之痛), 고분지통(叩盆之痛) / 인용: 與人(박지원)

 

고분(孤憤)

한비자(韓非子)가 지은 글의 편명(篇名)으로, 홀로 외로이 곧아 세상에 용납받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다는 뜻이다. 고립무원에 처한 법술가(法術家)들이 권신들의 방해를 받아서 자신의 재주와 지혜를 중용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 유의어: 고분문한비(孤憤問韓非)

 

고불일(顧不一)

정건(鄭虔)에 대해 지은 시 중의 神翰顧不一 體變鍾兼兩에 보인다. 분문집주에는 虔好書及畵 恨無紙 慈恩寺貯柿葉數屋 歲取隸書 歲久皆遍……書苑曰虔善草隸 呂摠云 虔書如風送雲收霧慛月上 鍾兼兩 鍾繇鍾會也 父子善隸書皆盡其妙라 주해했고, 두시언해에는 신기라 왼글 쓰기 한 가지 아니로소니 체를 개변하여 종유를 따라 두 가지를 한다.”라고 하였다. 고개지는 진() 나라 사람인데, 그에게는 재절(才絶화절(書絶치절(癡絶) 즉 삼절(三絶)이 있다고 한다.

 

고비(皐比)

호피(虎皮)를 말한다. 옛날에 스승이 앉는 자리에는 반드시 호피(虎皮)를 깔았고 강학(講學)하였으므로 강석(講席)을 고비라 칭한다. 후대에는 사석(師席)의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고비(鼓鼙)

적이 쳐들어올 때 신호로 치는 북. 전하여 전쟁 또는 군사(軍事)를 말한다.

 

고빙(叩氷)

얼음을 두드린다는 뜻이다. 소학(小學)』 「선행(善行)에 나오는 왕상(王祥)의 이야기에서 유래했으며, 사자소학(四字小學)에선 얼음을 깨뜨려서 잉어를 얻음은 왕상의 효도니라[叩氷得鯉 王祥之孝].’라고 말했다.

 

고사(瞽史)

()나라 때의 두 관직명으로, 고는 악관(樂官)이고 사는 음양·천시(天時예법에 관한 문헌을 담당하였다. / 인용: 無命辯(홍석주)

 

고사(姑射)

장자(莊子)에 나오는 산 이름으로 고야라고도 읽히며, 후대에는 신선(神仙)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장자(莊子)소요유(逍遙遊)

 

고사(孤楂)

외로운 등걸이란 뜻이다.

 

고사고(古史攷)

책명. 촉한(蜀漢)의 초주(樵周)가 편찬하였는데 모두 25편이다.

 

고사빙부(姑射氷膚)

고야산(姑射山)에 신인(神人)이 사는데, 살결은 빙설(氷雪) 같고, 예쁘기는 처녀(處女)와 같으며, 바람과 이슬만 마시고 산다 한다. 장자(莊子)소요유(逍遙遊)

 

고사성어(故事成語)

옛날 있었던 일에서 만들어진 어구(語句)를 말한다.

 

고사전(高士傳)

() 나라 황보밀(皇甫謐)이 편찬한 은사(隱士)의 전기(傳記)이다. 원래는 72인이었는데 뒤에 첨가되어 지금은 96인이 전한다.

 

고삭(皐朔)

매고와 동방삭(東方朔)’을 합칭한 것이다.

 

고산(孤山)

() 나라 은사(隱士) 임포(林逋)를 가리킨다. 그가 서호(西湖)의 고산에 집을 짓고 은거하면서 학() 두 마리를 길렀는데, 놓아두면 창공을 날다가 다시 우리로 돌아오곤 하였다. 또한 그는 항상 거룻배를 타고 서호에 떠다녔으므로 혹 그가 없을 때 손이 찾아오면 동자(童子)가 나와서 학의 우리만 열어놓는다. 그럼 그는 학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서 손이 찾아왔음을 알고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한다. 송사(宋史)卷四百五十七 임포전(林逋傳)

 

고산사(孤山士)

() 나라 때, 항주(杭州)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서 살았던 은사(隱士) 임포(林逋)를 가리킨다.

 

고산앙(高山仰)

높은 덕을 앙모함인데 시경(詩經)소아(小雅) 거할(車舝)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환한 길을 따라 가리로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 하였다.

 

고산앙지(高山仰止)

과거의 위대한 인물에 대해 경배(敬拜)하고 흠모(欽慕)하는 것을 말한다. 시경(詩經)소아(小雅) 거할(車舝)높은 뫼를 우러르며 큰 길을 따라간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고산유수고금음(高山流水古琴音)

지기(知己)들끼리 서로 아끼는 절륜한 기예를 말한다. 백아(伯牙)가 태산에 뜻을 두고 거문고를 연주하면 종자기(鍾子期)높고 높아서 태산과 같도다.”라 하였고, 흐르는 물에 뜻을 두고 연주하면 다시 호호탕탕하여 흐르는 물 같도다.”라고 평했다는 고사가 전한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회남자(淮南子)』 「수무훈(修務訓), 여씨춘추(呂氏春秋)孝行覽 본미(本味)

 

고산유수곡(高山流水曲)

종자기(鍾子期)와 백아(伯牙)는 모두 춘추(春秋) 때 사람으로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탔으며, 종자기는 거문고 곡조를 잘 알았다. 백아가 거문고를 탈 적에 종자기는 이를 감상하였는데, 백아가 뜻을 태산(太山)에 두고 거문고를 타니 종자기는 , 훌륭하다. 거문고 소리여! 높고높아 태산과 같구나.”라 하였다. 조금 후에 백아는 다시 뜻을 흐르는 물(流水)에 두고 거문고를 타니 종자기는 , 훌륭하다 거문고 소리여! 넓고넓어 흐르는 물과 같구나.”라 하였다. 뒤에 종자기가 죽자 백아는 이제는 세상에 다시 내 곡조를 알아줄 사람(知音)이 없다.”라고 하고는 거문고를 부수고 거문고 줄을 끊어 버렸다. 태산은 높은 산(高山)의 뜻이므로 고산이라 바꿨으며, ()하여 고묘(高妙)한 악곡(樂曲)고산 유수곡이라 하였다. 열자(列子)』 「탕문(湯問), 회남자(淮南子)』 「수무훈(修務訓), 여씨춘추(呂氏春秋)孝行覽 본미(本味)

 

고산처사(孤山處士)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숨어살았던 송() 나라 임포(林逋)를 말한다. 장가도 들지 않고 자식도 없이 오직 매화와 학()을 기르며 살았으므로 당시에 매처학자(梅妻鶴子)라고 불렀던 고사가 전한다. 송사(宋史)457·世說新語補 棲逸

 

고삽(苦澁)

난삽(難澁)과 같다.

 

고상(考祥)

길상(吉祥)과 흉상(凶祥)을 상고하는 것으로, 주역(周易)이괘(履卦) 상구(上九)이행한 것을 보아 길상과 흉상을 고찰한다[視履 考祥]”라고 하였다.

 

고상곡(枯桑穀)

상곡(桑穀)은 뽕나무와 닥나무이다. 옛날 상 나라의 조정에 뽕나무와 닥나무가 함께 나와 자랐으므로 이것을 큰 변괴라 하였는데 상() 나라의 임금인 무정(武丁)이 두려워하여 덕을 닦자, 이들 나무가 말라죽고 상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 한다. 사기(史記)』 「은본기(殷本紀)

 

고상시(高常侍)

이름은 적(), ()는 달부(達夫)로 당() 나라 때 시인(詩人)이다. 나이 50에야 시를 짓기 시작했지만 재사(才思)가 특출했으며 벼슬은 산기상시(散騎常侍)에 이르렀다. 당서(唐書)卷一百四十三 고적전(高適傳)

 

고색창연(古色蒼然)

오래되어 옛날의 풍치가 저절로 들어나 보이는 모양이다.

 

고생권리시(高生卷裡詩)

고생(高生)은 당() 나라 시인 고적(高適)을 가리킨다. 간의대부(諫議大夫)를 거쳐 몇 차례나 절도사(節度使)로 나가 난을 평정하다가 나이 50이 되어서야 시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변새(邊塞)의 이정(離情)을 잘 읊어 잠삼(岑參)과 함께 고잠(高岑)으로 병칭되었다. 신당서(新唐書)143

 

고선(枯禪)

세상사 다 잊고 앉아서 참선(參禪)만 하는 승려를 이른다.

 

고선행(高善行)

선행은 의병장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의 아들인 고용후(高用厚)의 자()이다.

 

고성낙일(孤城落日)

외로운 성에 해는 짐. 도와 줄 사람도 없는 외롭고 서글픈 사정. 해가 지는 배경으로 성() 하나만이 외로이 있다. 스러질 때가 얼마 남지 않아 근심되고 서러운 지경을 비유하는 말이다. / 유의어: 사고무친(四顧無親), 고립무원(孤立無依).

 

고성방가(高聲放歌)

큰소리로 떠들고 마구 노래 부름을 이른다.

 

고소(苦笑)

씁쓸한 웃음, 쓴웃음.

 

고소(顧邵)

자는 효칙(孝則), 오군(吳郡) 사람. 27세이 집안을 일으켜 예장태수(豫章太守)가 되었다.

 

고소(姑蘇)

중국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에 있는 고소산을 말한다.

 

고소대(姑蘇臺)

강소성(江蘇省) 오현(吳縣)의 서쪽 고소산(姑蘇山)에 있는 누대(樓臺)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월왕(越王) 구천(句踐)은 오왕 부차(吳王夫差)에게 회계산(會稽山)에서 크게 패한 후 쓸개를 씹으며(嘗膽)복수할 것을 꾀하다가 저라산(苧蘿山)에서 얻은 미인 서시(西施)를 부차에게 바치니, 부차는 그의 미모에 혹하여 고소대를 크게 짓고는 날마다 유희(遊嬉)에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았으며 이것을 간하는 충신 오자서(伍子胥)를 죽였다. 이때문에 결국 오 나라는 월 나라에게 멸망을 당했는데, ()의 대부 범려(范蠡)는 성공한 다음 공명을 피하여 고소대에 있던 서시와 함께 오호(五湖)에 배를 띄우고 스스로 치이자피(鴟夷子皮)라고 성명을 고친 다음, 월 나라를 떠나 한가하게 살았다. 사기(史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

전국시대(戰國時代) 때에 오나라 오자서(伍子胥)가 오나라가 오래지 않아 망할 것을 탄식하기를 마침내 고소대(姑蘇臺)에 들사슴들이 노는 것을 보리라.”라 하더니, 과연 오나라가 망하고 뒤에 그 땅에 나라를 세운 이도 그것을 거울삼아 경계()할 줄 모르고 여러 나라가 망하였음을 탄식한 것이다.

 

고소록(姑蘇鹿)

오자서(伍子胥)가 오왕(吳王)에게 간()하다가 들어주지 않고 죽임을 당하면서 마침내 나라는 망하고 궁중 안 고소대(姑蘇臺)에 들사슴이 와서 놀게 될 것이다.”라 하였다.

 

고소미록유(姑蘇麋鹿遊)

고소(姑蘇)는 춘추 때의 오() 나라 서울이었다. 오 나라가 망하여 그 서울이 쑥밭이 되어 산짐승이 와서 놀게 되었다.

 

고소원신겸(故素怨新縑)

옛 시에 새 여자는 비단을 잘 짜고, 옛 여자는 깁을 잘 짠다네.”라 하였다. 고소(故素)는 전의 아내를, 신겸(新縑)은 새 아내를 말한다.

 

고송유수(古松流水)

소식(蘇軾)이 말하기를 予嘗獨遊廬山白鶴觀……聞棋聲於古松流水之間……이라 하였다.

 

고수(誥授)

나라에서 공신(功臣)과 그 선조(先祖)에게 작호(爵號)를 내리는 영전(榮典)인데, 진대(晉代)에 시작되어 당대(唐代)에 와서 갖추어졌으나, 그 제도는 왕조마다 같지 않았다. 청대(淸代)에서는 본인에게 내리는 봉작(封爵)을 수()라 하고 증조부모·조부모·부모·처에게 내리는 작호 중에 생존한 이에게는 봉(), 죽은 이에게는 증()이라 하였다. 5품 이상관에게 내리는 고명(誥命)은 고수·고봉(誥封고증(誥贈)이라 하고 6품 이하관에게 내리는 고명은 칙수(勅授칙봉(勅封칙증(勅贈)이라 하였다. 1품관은 작호가 증조부모·조부모·부모에까지 미치고 3품관 이상은 조부모·부모에까지 미치며 7품관 이상은 부모와 처에까지 미치고 9품관 이상은 겨우 자기 몸에만 미쳤는데, 여기에는 각각 정한 예가 있어 예수(例授예봉(例封예증(例贈)이라 하였다.

 

고시(楛矢)

고나무로 만든 화살. 두만강 근처는 옛날 숙신(肅愼)이란 나라가 있었는데, 옛날 중국 기록에 숙신 나라에서 고시(楛矢)를 보냈다는 말이 있다.

 

고시(高柴)

()는 자고(子羔)공자의 제자이다. 고시는 성격이 인효(仁孝)하나 우직하였다.

 

고시(高視)

이광필에 대해 지은 高視笑祿山 公又大獻捷이라고 한 데 보인다. 두시언해에는 높이 보아서 녹산(祿山)을 웃거늘이라고 풀이했고 高視笑祿山 言思明笑祿山而自矜也라고 분문집주에는 주해하였다.

 

고시멸진장(高是滅秦將)

조고는 처음 진시황(秦始皇)의 환관으로 있다가, 진 시황이 죽은 뒤에는 간계를 써서 승상 이사(李斯)와 짜고 조서(詔書)를 고쳐 진 시황의 장자인 부소(扶蘇)를 죽이고, 차자인 호해(胡亥)를 이세(二世)로 삼아 자신이 승상이 되었으며, 그 후 다시 이세마저 죽이고는 자영(子嬰)을 옹립한 후 또 다시 자영을 죽이려고 했으나, 자영이 앞질러 그의 삼족을 멸하였다. 그 후 자영마저 항우(項羽)에게 살해됨으로 진 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사기(史記)卷六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고식지계(姑息之計)

집안의 부인과 자식만을 생각하는 계책을 말한다. 고식(姑息)의 본뜻은 부녀자와 어린아이이다. 근원적인 해결책이 아닌 임시방편의 계책. 우선 당장 탈 없이 편하고자 하는 계획. / 유의어: 고식책(姑息策), 하석상대(下石上臺), 미봉책(彌縫策)

 

고식척영(孤息隻影)

외로운 몸에 그림자 뿐이라 붙일 곳 없이 떠도는 외로운 신세를 말한다.

 

고신씨(高辛氏)

중국 상고시대 오제(五帝)의 하나인 제곡(帝嚳)을 말한다. 고신(高辛)은 그가 봉()해진 지명이다. 사기(史記)』 「오제본기(五帝本紀)

 

고신원루(孤臣寃淚)

임금의 사랑을 잃은 외로운 신하의 원통한 눈물을 이른다.

 

고신척영(孤身隻影)

외로운 몸과 그 몸의 그림자 하나뿐. 붙일 곳 없이 떠도는 외로운 신세라는 뜻이다.

 

고심참담(苦心慘憺)

몹시 애를 쓰며 근심 걱정을 많이 함을 이른다.

 

고심초사(苦心焦思)

마음을 괴롭히며 애를 태움. 노심초사(勞心焦思)와 같은 뜻이다.

 

고아(羔兒)

명주(名酒)인 양고주(羊羔酒)의 별칭이다. 양고(羊羔)라고도 한다.

 

고아주(羔兒酒)

송 나라 때 찹쌀과 양고기 등으로 빚은 맛좋은 술 이름인데 흔히 양고주(羊羔酒)라 부른다.

 

고안(羔雁)

선비가 처음 서로 만날 때 보내는 예물(禮物)을 말한다. 예기(禮記)』 「곡례(曲禮)염소와 기러기를 수놓은 비단 보자기로 싼다.”고 한 소()염소는 떼지어 있으면서도 앞질러 가지 않는 뜻을 취하고, 기러기는 절후(節候)를 기다려 날아가는 뜻을 취한 것이다.”라 하였다.

 

고애곡풍수(孤哀哭風樹)

부모가 죽어 봉양할 수 없게 된 슬픔을 말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 9권에 나무는 고요히 있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려고 하나 부모가 기다려 주지 않는다[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也]”라고 하였다.

 

고야(姑射)

묘고야(藐姑射) 산에 사는 신인(神人)을 말한다. 장자(莊子)소요유(逍遙遊)먼 곳에 있는 고야산에 선인이 살고 있는데, 살갗은 얼음이나 눈과 같고 나긋나긋하기는 어린 여자와 같다.”라고 하여, 얼음처럼 투명한 피부를 갖고 처녀처럼 생기발랄하며, 바람을 호흡하고 이슬을 마시며, 구름을 타고 용을 부리면서 사해(四海) 밖에 노닌다고 했다. / 유의어: 고야선(姑射仙), 고야작(姑射綽)

 

고양(枯楊)

무덤가에 심는 나무로 백양목(白楊木)이다.

 

고양(羔羊)

시경(詩經)국풍(國風) 소남(召南)의 편명인데 덕행이 고결(高潔)한 사대부들을 비유한 시이다.

 

고양구도(高陽舊徒)

술을 아주 좋아하여 모든 일에 얽매이지 않고 방탕하게 노는 사람을 말한다. 사기(史記)97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패공(沛公)이 군사를 이끌고 진류(陳留)를 지날 적에 역생(酈生)이 군문(軍門)에 와서 알현하기를 청하였다. ……사자(使者)가 나와서 말하기를, ‘패공께서 한창 천하를 경략하는 일을 하고 있어서 유인(儒人)을 볼 겨를이 없다고 하십니다.’하니, 역생이 눈을 부릅뜨고 칼을 쓰다듬으면서 사자에게 질타하기를 가라. 다시 들어가서 패공에게 나는 고양의 술꾼이지 유자가 아니라고 하라[吾高陽酒徒 非儒人也].’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 유의어: 고양구주도(高陽舊酒徒), 고양도(高陽徒), 고양주도(高陽酒徒)

 

고어(皐魚)

옛날 효자의 이름이다.

 

고어멸성(皐魚滅性)

친상(親喪)을 당해 너무 슬퍼한 나머지 자신의 생명을 잃은 것을 말한다. 춘추시대(春秋時代) 고어(皐魚)가 모친상을 당해 통곡하면서 나무가 조용해지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봉양하려 하나 어버이가 계시지 않는구나[樹欲靜而風不止 子欲養而親不待也]”하고 슬퍼하다가 죽은 고사가 있다. 한시외전(韓詩外傳)9

 

고어지사(枯魚之肆)

매우 곤궁한 처지를 이른다. 장자(莊子)는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 하루는 양식이 떨어져 감하후(監河侯)에게 꾸러 갔다. 감하후는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저의 형편 역시 어렵습니다. 조세를 거둬들인 후에 은자 300냥을 빌려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장자(莊子)는 그의 말에 화를 내며 내가 어제 길을 가다가 길가의 마른 구덩이 속에 있는 물고기 한 마리를 보았습니다. 그 물고기는 나를 보고는, ‘저는 본래 동해에 살았는데 불행히 회오리바람에 밀려 물이 말라 버린 이 구덩이에 떨어져 죽게 되었습니다. 저에게 물 한 통만 가져다 주어 구해 주십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하겠다. 나는 지금 남쪽의 여러 왕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곳에는 물이 많으니 물을 가져와 너를 구해주겠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물고기는 화를 내며 그것이 가능합니까? 지금 저에게는 물 한 통만 있으면 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이 서강(西江)의 물을 가져올 때까지 기다린다면 저는 이곳에 없고 일찌감치 어물전에나 가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不如早索我 于枯魚之肆].’라고 말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장자(莊子)』 「외물(外物)/ 유의어: 철부지급(轍鮒之急학철부어(涸轍鮒魚).

 

고역사(高力士)

당 현종(唐玄宗) 때 환관(宦官)이니 소잠(蕭岑) 등을 평정한 공으로 은총과 신임(信任)이 지극하였다. 이백(李白)이 청평사(淸平詞)를 지을 때에 고역사를 시켜 신을 벗기게 한 까닭으로 혐의를 품고 참소하여 마침내 이백을 파출(罷出)시키는 데 이르렀다.

 

고염무(顧炎武)

청 나라 초기의 고증학자. 호는 정림(亭林)이다.

 

고영중(高瑩中)

고려(高麗)의 문신으로 옥구 고씨(沃溝高氏)의 시조이다. 벼슬은 태복경(太僕卿)이었다. 고려사(高麗史)

 

고예(顧倪)

동진(東晉) 때의 문인화가로서 특히 인물화에 뛰어났던 고개지(顧愷之)와 원() 나라 말기의 문인화가로서 특히 산수화에 뛰어났던 예찬(倪瓚)을 합칭한 말이다.

 

고오(枯梧)

말라죽은 오동나무. 남이 의심할 만한 소지가 있으면 아무리 옳은 말 옳은 행동을 하여도 상대로부터 미쁨을 받지 못한다는 뜻으로 쓰인다. 어느 집에 말라죽은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이웃에 사는 사람이 집에 말라죽은 오동나무가 서 있으면 상서롭지 못하다고 말하여, 그 말을 들은 주인이 그 나무를 베어버렸다. 그러자 그 이웃 사람이 와서 그 오동나무를 자기 집 땔감으로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그 주인은 좋지 않은 안색을 하며 말하기를 기껏 자기 집 땔감을 구하기 위하여 나더러 이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하였군.”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열자(列子)』 「설부(說符)

 

고옥산(顧玉山)

이름은 덕휘(德輝) 또는 아영(阿瑛), 자는 중영(仲瑛), 옥산은 호이다. 성격이 호탕하여 손님들과 시주(詩酒)를 즐겼고, 벼슬을 시키려 하매 도피했다. 저서로 옥산박고(玉山璞稿초당명승집(草堂名勝集)등이 있다. 신원사(新元史)卷二百三十八, 명사(明史)卷二百八十五

 

고와(高臥)

속세의 정을 끊고서 뜻을 고상하게 가지고 지내는 것을 말한다. () 나라 사안(謝安)이 몇 차례나 조정의 부름에 응하지 않은 채 동산에 높이 누워[高臥東山] 지냈던 고사에서 유래한다. 진서(晉書)』 「사안전(謝安傳)

() 나라 사안(謝安)이 동산에 높이 누워(高臥東山) 임금의 분부에도 응하지 않았던 고사와 도잠(陶潛)이 북창 아래에 드러누워[高臥北窓之下] 스스로 복희씨 시대의 사람이라고 했던 고사에서 유래한 것이다. 진서(晉書)』 「사안전(謝安傳), 은일(隱逸)』 「도잠전(陶潛傳)

 

고와노원안(高臥老袁安)

원안(袁安)은 후한(後漢)의 여양(汝陽). 사람됨이 근엄하고 무게가 있어, 그가 궁했을 때 낙양(洛陽)에 큰 눈이 내렸는데, 이때 나와서 먹을 것을 구걸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원안은 꿈쩍도 않고 벌렁 누워 있었다고 한다. 후한서(後漢書)』 「원안전(袁安傳)

 

고와지(高臥地)

() 나라 사안(謝安)동산고와(東山高臥)’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 유유자적하게 은거 생활을 즐길 만한 땅을 말한다.

 

고왕독맥(孤往獨驀)

고독하나 힘차게 나아가는 것을 말한다.

 

고요(皐陶)

() 임금 때의 명신(名臣)이다.

 

고요(咎陶)

()의 신하로 훌륭한 법관(法官)이었던 고요(皐陶)의 별명이다.

 

고요(咎繇)

우순(虞舜)의 신하 고요(皐陶). ()로서 오형(五刑)을 맡아 바로잡았다. 서경(書經)』 「순전(舜典)

 

고용단학빈흥예(高墉但學賓興藝)

주역(周易)해괘(解卦) 상육(上六)공후는 높은 성 위에서 새매를 쏘았다.”라고 한 것과 주례(周禮)사도교관지직(司徒敎官之職) 대사도(大司徒)지방 고을에서 세 가지 일로 모든 백성을 가르쳐서 그들을 손님의 예로 대우하여 나라에 천거하는데……셋째는 육예(六藝)로서, 예법·음악·활쏘기·말달리기·글씨쓰기·셈하기 등이다.”라고 한 것에서 나온 말이다.

 

고우(皐羽)

송말(宋末)의 절신(節臣) 사고(謝翶)의 자이다. 그는 원병(元兵)이 임안(臨安)까지 내려왔을 때, 승상 문천상(文天祥)이 개설한 연평(延平)의 부()에서 자의참군(諮議參軍)으로 있다가, ()에 구류되었던 문천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서대통곡기(西臺慟哭記)를 짓고 산수(山水)를 즐기며 유유자적하였다.

 

고우(藁牛)

입춘(立春) 날 토우(土牛) 대신 짚으로 만들어 쓰던 소를 말한다. 조선시대 함흥 지방의 풍속인데 짚으로 소를 만들고 멍에를 씌워, 관청 뜰에서 밭가는 시늉을 하였다.

 

고운(孤雲)

신라 사람 최치원(崔致遠)의 호이다. 최치원은 장년의 나이에 벼슬을 버리고 이곳저곳을 떠돈 뒤 마지막으로 가야산(伽倻山)으로 들어가 가야금을 뜯으면서 지내다가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한다. 창원도호부 회원현(會原縣)에 최치원이 노닐었다는 월영대(月影臺)가 서 있고, 또 글을 새긴 돌이 있으나 벗겨지고 부서졌다는 기록이 전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32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

 

고운선(孤雲仙)

고운(孤雲)최치원(崔致遠)의 호인데, 그가 신선이 되어 갔다는 전설이 있다.

 

고울(高鬱)

경북 영천(永川)의 옛이름이다.

 

고월(古月)

()의 은어(隱語)이다. 이태백(李太白)의 시에 狂風吹古月 竊弄章萃臺長風挂席勢難廻 海動山傾古月推의 구절이 있다. 이태백집(李太白集)3 司馬將軍歌, 7 永王東巡歌 / () 나라 고염무(顧炎武)는 이 시구에 나오는 고월(古月)이 분명 호()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일지록(日知錄)李太白詩註

 

고유(高兪)

서경(書經)』 「순전(舜典)에 나오는 요왈유(堯曰兪)’란 글귀이다.

 

고유호묘(苦腴豪妙)

소동파집(蘇東坡集) 증시승도통(贈詩僧道通)시에 웅장하고 오묘하며 괴롭고 살지기는 금총과 밀수 그 둘이 있을 뿐이지[雄豪而妙苦而腴 祇有琴聰與蜜殊]”라고 하였다.

 

고육(顧陸)

중국의 유명한 화가 고개지(顧愷之)와 육탐미(陸探微)를 말한다.

 

고육지계(苦肉之計)

적을 속이기 위해, 자신의 희생을 무릅쓰고 꾸미는 계책을 이른다.

 

고육지책(苦肉之策)

매우 궁박한 상태에서 자기 자신의 희생을 각오하고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 꾸미는 계책을 말한다.

 

고의(古意)

옛날 시대의 일을 거론하면서 은근히 당시의 폐풍(弊風)을 풍자하는 시로서, 의고(擬古)나 효고(傚古)와 같은 시제(詩題)이다.

 

고의간록(古義干祿)

집안이 가난하면 어버이 봉양을 위해서라도 부득이 벼슬을 해야만 하는데, 그럴 경우에는 관문(關門)을 지키거나 목탁(木鐸)을 치며 돌아다니는[抱關擊柝] 등의 일을 하는 말단 관리가 적합하다는 말이 맹자(孟子)』 「만장(萬章)에 나온다.

 

고의성명체(古意星名體)

고의(古意)는 전대(前代)의 고사를 소재로 해서 자신의 뜻을 은연중에 표현할 때의 시제(詩題)를 말하고, 성명체는 각 구()마다 별 이름을 삽입하여 짓는 시로서 잡체(雜體)의 하나이다.

 

고의시(古意詩)

시체 이름으로 의고(擬古) 또는 효고(效古)와 같은 뜻이며, 흔히 전대의 고사를 읊어 자기의 뜻을 붙이는 시이다.

 

고이(高李)

() 나라의 시인 고적(高適)이백(李白)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고이(考異)

문자(文字)의 의이(疑異)를 고정(考訂)함을 말한다.

 

고이순(高而順)

조선조의 문신이요, 의병장인 고경명(高敬命)의 자가 이순(而順)이다.

 

고인(高人)

세속을 초탈한 사람. 흔히 은사를 가리킨다.

 

고인(皐歅)

춘추시대(春秋時代) 진 목공(秦穆公) 때의 말의 상[馬相]을 신통하게 보았다는 구방인(九方歅), 또는 구방고(九方皐)라고도 하는 동일인(同一人)이다. 열자(列子)』 「설부(說符)

 

고인여조박(古人餘糟粕)

제환공(齊桓公)이 책을 읽는 것을 보고 바퀴 만드는 사람이 왕께서 읽고 있는 것은 옛사람이 남긴 술지게미입니다[君之所讀者 古人之糟粕而夫].”라고 말한 고사가 전한다. 장자(莊子)』 「천도(天道)

 

고인칭서의(古人稱逝矣)

조정에서 떠나가서 다시는 벼슬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한 고조(漢高祖)나 역시 이로부터 떠나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인혹리(故人酷吏)

고시(古詩)大暑酷吏去 淸風故人來라는 글귀가 있다.

 

고인환(故人歡)

오대(五代) 때에 범질(范質)이 벼슬하기 전에 다점(茶店)에 들어갔는데, 마침 여름이므로 손에 부채를 들었다. 그 부채에 글쓰기를 큰 더위에 혹리가 가고, 맑은 바람에 고인이 온다(大暑去酷吏 淸風來故人)”라고 하였다. 얼굴이 험상궂게 생긴 한 사나이가 앞에 와서 말하기를 혹리(酷吏)를 어찌 큰 더위에만 비할 것이겠소. 상공(相公)께서 다른 날에 이 폐단을 깊이 살피시오.”라 하고는 가버렸다. 범질이 다점에서 나와 그 부근에 있는 신사(神詞)에 들렸더니, 신상(神像)이 곧 조금 전에 본 그 사람이었다. 그 뒤에 범질이 후주(後周)의 재상(宰相)이 되어 첫 머리에 형서(刑書)를 정리하여 형통(荊統)을 만들었다.

 

고잠(高岑)

성당(盛唐) 시대의 시인이었던 고적(高適)과 잠삼(岑參)을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고장(藁葬)

선영(先塋)으로 가지 않고 임시로 다른 곳에 장사하는 것을 말한다.

 

고장(孤掌)

한 무제(漢武帝) 때 감로(甘露)를 받기 위해 세웠다는 선인장(仙人掌) 즉 승로반(承露盤)의 별칭이다.

 

고장강(顧長康)

동진(東晉) 때 박학(博學)하고 재기(才氣)가 뛰어났던 문인화가(文人畫家)인 고개지(顧愷之)를 말한다. 장강은 그의 자이다.

 

고장군(故將軍)

벼슬을 아주 그만두었음을 비유한 말이다. 옛 장군은 한() 나라의 장군 이광(李廣)을 이른다. 이광이 일찍이 파직되고 나서 시골에 있을 적에 기병(騎兵) 하나만을 데리고 나가 술을 마시고 돌아오다 패릉정(霸陵亭)에 이르렀을 때 패릉위(霸陵尉)가 술에 취해 이광의 행차를 막자, 그 기병이 옛 이 장군(李將軍)이라고 말했던 데서 온 말인데, 이광은 그 후 다시 벼슬에 등용되었다. 사기(史記)』 「이장군열전(李將軍列傳)

 

고장난명(孤掌難鳴)

한쪽 손바닥으로는 소리내기가 어려움. 혼자 힘으로는 일을 하기가 어려움을 이른다.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뜻으로 상대가 없이는 무슨 일이나 이루어지기 어려움을 비유하는 말이다. / 유의어: 독장불명(獨掌不鳴), 독불장군(獨不將軍), 독목불성림(獨木不成林).

 

고재(沽哉)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여기에 아름다운 옥이 있다고 할 때, 이것을 상자 속에 그냥 보관해 두어야 합니까, 아니면 제값을 받고 팔아야 합니까?”라고 묻자 공자(孔子)팔아야지, 팔아야 되고 말고. 나 역시 제값을 주고 살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沽之哉 沽之哉 我待賈者也].”라고 대답한 고사가 있다. 논어(論語)자한(子罕)

 

고저부위(固儲副位)

고조(高祖)가 말년에 척부인(戚夫人)에게 혹하여 여후(呂后)의 아들인 태자를 폐하려 하매 여후가 장량(張良)에게 꾀를 물어서 상산(商山)에 숨어 있는 이름 높은 사호(四皓)라는 네 노인을 불러다가 태자를 보좌하게 하니 고조(高祖)태자는 벌써 날개가 생겼다.”라 하고는 폐하지 아니하였다.

 

고적(高適)

당 현종(唐玄宗) 때 사람으로 자는 달부(達夫).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를 지냈다. 그는 나이 50이 넘어서야 시를 짓기 시작하였으나 아주 시에 능하였다. 저서로는 고상시집(高常詩集)이 있다. 당서(唐書)卷一百四十三 고적전(高適傳)

 

고정(鼓庭)

고려 태조가 천안에 왕자성(王字城)을 쌓고 10만의 군사를 주둔시켜 마침내 견훤(甄萱)을 항복시켰는데, 바로 그 진영(陣營)을 둔 곳이 고정이라고 한다.

 

고정(古井)

마음이 마치 물 없는 우물에 파도가 일지 않는 것처럼 조용함을 비유하는 말이다.

 

고정(考亭)

()의 주희(朱熹)를 말한다. 고정은 복건성(福建省) 건양현(建陽縣)에 있는 지명인데, 주희가 만년에 거했던 곳으로, 고정서원(考亭書院)의 사액(賜額)을 받으면서 그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주희가 그곳에다 창주 정사(滄洲精舍)를 짓고 그곳에서 기거하자 많은 제자들이 그리로 모여들어 세상에서 그들을 일러 고정학파(考亭學派)라고 하였다. 복건통지(福建通志)

 

고조환패(高祖還沛)

유방이 영포(英布)의 반란을 진압한 후 돌아오던 중 고향 패(지금의 강소 패현)를 지나게 되었는데, 거기에서 계속하여 십여 일을 머물렀다. 고조본기(高祖本紀)

 

고종용영(高宗用說)

() 나라 고종(高宗)이 현신(賢臣) 부열(傅說)을 얻고 나서 만약 가뭄이 들면 너를 써서 큰비가 내리게 하리라.”라고 하였다는 고사(書經)가 있다.

 

고주(孤注)

도박하면서 가지고 있는 판돈을 전부 거는 것을 말한다.

 

고주(羔酒)

양고기와 술을 말하는데, 고주(羔酒)로 전가(田家)의 낙()을 삼는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고주시(孤舟詩)

두보(杜甫)등악양루(登岳陽樓)라는 유명한 시에 친지와 벗들은 한 자의 소식 없고, 늙고 병든 몸 외로운 배 타고 가네[親朋無一字 老病有孤舟].”라는 구절이 있다.

 

고주일척(孤注一擲)

노름꾼이 노름에 계속하여 잃을 때 최후에 나머지 돈을 다 걸고 모험을 하는 일을 가리키는 말로 전력을 기울여 어떤 일을 모험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고죽(觚竹)

()나라 때 제후국으로 오늘날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 남쪽에 있었다. 고죽(觚竹)은 고죽(孤竹)으로도 표기한다.

 

고죽(孤竹)

옛날 나라 이름이었는데, 그 땅이 백이(伯夷숙제(叔齊) 형제가 난 곳이다.

특생(特生)의 죽()을 말한다.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로, () 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고사리만 캐 먹다가 죽은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말한다.

 

고죽기(孤竹飢)

백이(伯夷숙제(叔齊)를 말한다. 백이와 숙제는 고죽국(孤竹國) 임금의 두 아들로서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었으므로 하는 말이다. 사기(史記)卷六十一 백이열전(伯夷列傳)

 

고죽이제청(孤竹夷齊淸)

고죽은 외따로 난 큰 대를 말하는데 이것으로 퉁소를 만든다. 백이(伯夷숙제(叔齊)는 은() 나라 말엽의 청렴한 의사(義士)들로서 고죽국(孤竹國)의 왕자들이었으므로, 외따로 난 대를 빌어 고죽국의 백이·숙제를 말하였다. 사기(史記)卷六十一 백이열전(伯夷列傳)

 

고죽제형(孤竹弟兄)

형제간인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가리킨다. 이들의 묘가 고죽성(孤竹城)에 있다.

 

고죽청풍(孤竹淸風)

고죽성은 옛날에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봉해진 고죽국(孤竹國)이 있었던 곳이며, 맹자(孟子)가 이들을 평하여 성인(聖人) 가운데에서 청()한 자라고 하였다. 맹자(孟子)만장(萬章)

 

고진(孤辰)

10개의 천간(天干)을 일()로 삼고 12개의 지지(地支)를 진()으로 삼아 육갑(六甲)을 따지다 보면, 천간과 서로 배합되지 않는 지지가 나오게 되는데, 이를 고진이라 하여 옛날 복자(卜者)들이 흉하게 여겼다. 예컨대 갑자순(甲子旬)의 경우에는 술()과 해()가 없는데, 이 술과 해가 없는 때가 바로 고진이 된다.

 

고진감래(苦盡甘來)

쓴 것이 다하면 단 것이 옴. 나쁘고 어려운 일 다음에는 좋은 일이 다가옴을 이른다. 세상이 돌고 돌아 순환함을 이른다. 반대말로 흥진비래(興盡悲來)가 있다.

 

고질(痼疾)

단단히 난 병, 쉽게 낫지 않는 병. 쉽게 고칠 수 없는 병을 말한다.

 

고채(菰菜)

줄의 연한 줄기로 만든 나물이다. () 나라 장한(張翰)이 가을바람을 맞고는 고향의 고채와 순채국 맛을 그리워하며 벼슬을 곧장 그만두고 귀향했던 고사가 있다. 진서(晉書)』 「張翰傳/ 두보(杜甫)의 시에 어떡하면 차가운 수정 지니고, 서늘한 가을 고채 맛을 볼거나[乞爲寒水玉 願作冷秋菰].”라는 구절이 있다.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15

 

고채갱(菰菜羹)

() 나라 장한(張翰)이 낙양(洛陽)에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보고는 고향의 고채국(菰菜羹)과 농어회가 생각이 나서 곧장 벼슬을 버리고 떠나온 고사가 전한다. 세설신어(世說新語)』 「식감(識鑑)

 

고청(告請)

부탁해 구하다라는 말이다.

 

고취(鼓吹)

① 『남사(南史)』 「공규전(孔珪傳)집안에 풀이 무성한 가운데 개구리가 울자, 어떤 이가 묻기를 후한 때 진번(陳蕃)처럼 세상을 깨끗이 청소할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인가?’라고 하니, 공규가 대답하기를 나는 지금 개구리 노래 소리를 양부(兩部) 고취(鼓吹)로 여기고 있는데, 하필 진번을 본딸 것이 있겠는가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음악의 연주(演奏)를 말한다.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면 저절로 흥이 나는 것처럼 용기나 기운을 북돋워 일으키거나 의견, 사상 등을 열렬히 주장하여 불어넣음을 말한다.

 

고취부(鼓吹部)

궁중의 음악을 맡은 악대를 말한다.

 

고칙성(高則誠)

이름은 명(), 자는 칙성이다. 원말명초 절강 서안(瑞安) 사람으로 비파기(琵琶記)의 작자이다. 채중랑(蔡中郞) 전기(傳奇)는 즉 비파기로 채중랑은 이 전기 속의 주인공의 한사람이다.

 

고침(藁砧)

고악부(古樂府)에서 아내가 남편을 부르는 은어(隱語)로 쓴 말이다.

 

고침단금(孤枕單衾)

홀로 쓸쓸히 자는 여자의 이부자리. 외로운 베개()와 홑이불(). 주로 젊은 여자가 혼자 쓸쓸히 잠을 이르는 말이다. / 유의어: 독수공방(獨守空房), 독숙공방(獨宿空房).

 

고침단명(高枕短命)

베개를 높이 베면 오래 못산다.

 

고침안면(高枕安眠)

베개를 높이 하여 편히 잘 잔다. 근심 없이 편히 잘 잠. 안심할 수 있는 상태의 비유하는 말이다.

 

고침이와(高枕而臥)

베개를 높이하고 잠. 마음 편안히 잠잘 수 있음을 말한다.

 

고침한등(孤枕寒燈)

외로이 자는 방안의 쓸쓸한 등잔을 이른다.

 

고타(高駝)

높이 내달리다.

 

고태의연(古態依然)

옛 모습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음을 이른다. / 유의어: 구태의연(舊態依然).

 

고토(顧菟)

기웃기웃 하는 토끼.

 

고퇴(敲推)

시문(詩文)의 자구(字句)를 여러 번 생각하여 고치는 일을 말한다. ()의 가도(賈島)는 과거(科擧)를 보려고 경사(京師)에 나귀를 타고 오다가 시를 지었는데 달 아래에서 중은 문을 민다[僧推月下門]”라는 글귀를 얻고는 퇴() 자를 고() 자로(子路)고칠까 망설이며 결정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한유(韓愈)에게 물으니, 한유는 () 자가 퇴() 자보다 좋다.”라 하였다. 당시기사(唐詩紀事)卷四十

 

고평(高平)

범중엄(范仲淹)이 지은 백이송(伯夷頌)고평(高平)의 범중엄(范仲淹)이 짓다.”라는 말이 나오고, 소식(蘇軾)이 범중엄(范仲淹)의 외손(外孫)을 위해 지은 만사(挽詞)에도 고평의 풍도를 지니고 있었다[高平風烈在]”라는 말이 나온다. 소동파시집(蘇東坡詩集)35 滕達道挽詞 二首

 

고평사령로(高平沙嶺路)

모두 북경으로 가는 사신이 육로로 갈 때 지나가는 곳의 지명이다. 우가장(牛家莊)과 반산(盤山)의 사이에 있는데, 비가 오면 진흙 수렁이 되어 건너기가 몹시 어려운 곳이다.

 

고표(高標)

한어대사전(漢語大詞典)무리에서 빼어난 사람을 비유한다[比喻出類拔萃的人].”고 쓰여 있다. / 인용: 薌娘謠(이광정)

 

고풍(古風)

시체(詩體)의 하나로, 근체시(近體詩)에 상대되는 고체시(古體詩)를 말한다. 오언(五言)과 칠언(七言)을 많이 애용하는데, 대우(對偶)를 요구하지 않으며 평측(平仄)이나 용운(用韻) 면에서도 비교적 자유롭다.

 

고풍나부(高風懦夫)

고풍(高風)은 드높은 풍도(風度)이고 나부는 연약하여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이다. 맹자(孟子)』 「만장(萬章)백이의 풍도를 듣게 되면 무식한 탐부(貪夫)는 청렴할 줄 알고 나약한 자는 의로운 뜻을 세울 줄 알게 된다[聞伯夷之風者 頑夫廉 懦夫有立志]”라 하였다.

 

고한행(苦寒行)

고악부 가사(古樂府歌辭)의 이름으로 길을 가다가 혹한을 만나 지은 옛 청상곡(淸商曲)이다.

 

고헌(高軒)

()의 이하(李賀)는 겨우 일곱 살에 문장에 능하다는 소문이 났다. 당시의 문장가였던 한유(韓愈)와 황보식(皇甫湜)이 믿지 않고 직접 찾아가 시를 짓게 하여 시험하였더니, 이하가 즉석에서 고헌과(高軒過)라는 시를 지어 귀빈이 찾아왔다는 뜻을 읊었다. 당서(唐書)』 「이하전(李賀傳)

 

고헌과(高軒過)

() 나라 이하(李賀)7세 때 지은 글의 제목이다. 뜻이 전()하여 어린이가 지은 글을 말한다. 당서(唐書)육예전(六藝傳)이하가 7세 때에 벌써 글을 잘 짓는다 하여 한유(韓愈황보식(皇甫湜)이 믿지 않았는데, 한번은 그 집을 지나다가 시를 짓게 하니, 글을 짓고는 고헌과라 제목을 달자 두 사람이 크게 놀랐다.”라 하였다. 고헌과(高軒過)는 높은 수레가 들렀다는 말이다.

 

고현칠원(苦縣漆園)

노자(老子)장자(莊子)를 가리킨다. 노자는 고현(苦縣) 사람으로 성은 이씨(李氏)이고 이름은 이() 또는 중이(重耳)이며, 자는 담(), 또는 백양(伯陽)이다. \장자(莊子)는 몽() 땅 사람으로 이름은 주()인데 일찍이 몽 땅 칠원(漆園)의 아전이 되었다. 사기(史記)卷六十三 노자한비열전(老子韓非列傳)

 

고협(鼓篋)

옛날에 입학(入學)할 때 치르던 일종의 의식(儀式)으로, 책을 싸 짊어지고 가서 배움을 청한다는 뜻이다(入學鼓篋, 孫其業也). 예기(禮記)』 「학기(學記)4

 

고호두(顧虎頭)

호두(虎頭)는 중국 동진(東晉)의 화가(畫家) 고개지(顧愷之)의 소자(小字)이다. 그가 일찍이 금릉(金陵) 와관사(瓦棺寺)의 벽에 유마힐(肹摩詰)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눈동자를 그려 넣을 즈음에 관중으로부터 3일 동안 백만 전()을 얻어 절에 보시했다는 기록이 전해 온다. 송서(宋書)81·남사(南史)35

 

고호류(賈胡留)

고호(賈胡)는 서역(西域)의 상인(商人)이란 뜻이다. 옛날 복파장군(伏波將軍) 마원(馬援)이 서역의 상인처럼 한 곳에 이르르면 문득 머물곤 하였으므로 실리(失利)를 했다[伏波類西域賈胡 到一處 輒止 以是失利]는 기사가 전해 온다. 후한서(後漢書)』 「마원전(馬援傳)

 

고화(膏火)

기름과 불. 기름은 불을 밝힐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저를 태워 주위는 밝게 하지만 그 대신 저는 타서 없어지는데, 마치 인간도 그 재능이 인정되면 그 재능을 이용하여 남은 다스리지만 역시 언젠가는 그 재능으로 인하여 화를 당하는 수가 있음을 비유한 것이다. 장자(莊子)인간세(人間世)

밤에는 기름불로 밝은 것을 얻고 낮에는 불같은 햇빛으로 밝게 되므로, 기름과 불이라 하여 주야(晝夜)를 말하는 것이다.

기름을 태워 불을 밝히는 것으로, 야간에 등불을 밝혀 부지런히 학문함을 비유한다.

 

고화(敲火)

한유(韓愈)석고가(石鼓歌)목동들 부싯돌 쳐 불을 일으키고 소는 뿔로 비벼대니, 누가 다시 손을 대어 소중히 어루만질까[牧童敲火牛礪角 誰復著手爲摩挲].”라고 하였다. 목동들이 무지하여 석고(石鼓)를 부싯돌 대용으로 쓴다는 뜻이다. / 인용: 題梁學官金剛山錄後(정유길)

 

고화(苦火)

서경(書經) 홍범(洪範)불은 염상인데 염상은 쓴 것을 만든다[火曰炎上 炎上作苦]”고 하였다.

 

고화(誥花)

오화관고(五花官誥)의 준말로, 옛날 증직(贈職)에 봉()하는 조서(詔書)를 오색의 금화(金花) 무늬가 있는 비단으로 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고화열유갱(苽花說儒坑)

진시황(秦始皇)이 서적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죽였는데, 이때 소평(召平)은 진()의 동릉후(東陵侯)였다. 진이 망하자 벼슬하지 않고 장안(長安)의 성문 동쪽에서 오이를 심어 먹고 가난하게 살았다. 사기(史記)卷五十四 소상국세가(蕭相國世家)

 

고화쟁전박(膏火爭煎迫)

이 말은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산의 나무는 쓸모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 해를 당하고, 기름은 불이 붙기 때문에 스스로 저를 태운다[山木自寇也 膏火自煎也].”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즉 사람도 능력이 있기 때문에 화를 당함을 비유한 말인데, 사람들이 이욕에 급급하여 스스로 화를 재촉함을 말한다.

 

고황(顧况)

당 덕종(唐德宗) 때의 시인. 자는 포옹(逋翁), 호는 화양진일(華陽眞逸)이다. 시서화(詩書畫)에 모두 능였다. 저서에는 화평(畵評)·화양집(華陽集)가 있다.

 

고황(膏肓)

()는 가슴 아랫쪽, ()은 흉부와 복부 사이의 막을 말하여, 다스릴 수 없는 고질(痼疾)을 말한다. 좌전(左傳)에 진후(晉侯)가 병이 있어 이름난 의원을 청했더니, 의원은 병이 벌써 고()의 밑 황()의 위에 들어갔으니 치료할 수 없습니다.”라 하였다. ()는 심()의 밑이요, ()은 격()의 위이다. / 인용: 嶺南歎(윤현)

 

고황부천석(膏肓負泉石)

당나라 은사(隱士) 전유암(田遊巖)이 기산(箕山)에 들어가 사는데, 고종(高宗)이 친히 그 집에 찾아가니, 유암이 야복(野服)으로 나와 영접하였다. 고종이 선생은 근일에 평안하신가.”라 하니, 대답하기를 ()은 연하고질(煙霞痼疾)이요, 천석고황(泉石膏肓)입니다.”라고 하였다.

 

고황유치평성재(高皇遺恥平城在)

한 고조(漢高祖)가 흉노(匈奴)를 토벌하러 평성(平城)에 갔다가 백등(白登)에서 7일 동안이나 포위되는 수모를 겪은 뒤 진평(陳平)의 계책으로 간신히 빠져 나왔던 고사가 있다. 한서(漢書)』 「고제기(高帝記)

 

고황재천석(膏肓在泉石)

산수(山水)를 너무도 사랑하여, 마치 불치(不治)의 고질병처럼 되었다는 말이다.

 

고황제(高皇帝)

() 나라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을 가리킨다.

 

고황지질(膏肓之疾)

약이나 침으로 고칠 수 없는 중병을 말한다.

 

고황천석심녕속(膏肓泉石心寧俗)

산수(山水)를 사랑하는 것이 너무 정도에 지나쳐서 마치 불치(不治)의 고질과 같이 되면 마음이 속되지 않다는 말이다. 고황(膏肓)은 곧 심장과 격막 사이의 부분인데 이곳에 병이 들면 침이나 약으로 고칠 수 없다 한다. 좌전(左傳)성공(成公) 10년에 병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심장()의 아래, 격막() 위에 있으니 어찌할 수가 없다.”라 하였다.

 

고후(故侯)

옛 진() 나라 때의 동릉후(東陵侯) 소평(邵平)을 이르는데, 동릉후 소평이 진 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포의(布衣)가 되어 장안성의 청문 밖에 오이를 재배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한다.

 

고희(古稀)

70. 두보(杜甫)의 시 곡강(曲江)사람이 칠십까지 살기가 예로부터 드물었다[人生七十古來稀]”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

 

 

인용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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