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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7. 난중의 명가(정두경)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7. 난중의 명가(정두경)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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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두경(鄭斗卿, 1597 선조30~1673 현종14, 君平, 東溟)이항복(李恒福)의 문인으로 정언(正言)ㆍ교리(校理) 등을 역임하고 만년에 참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뒤에 대제학에 추증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어적십난(禦敵十難)의 상소를 올렸으며 1650년 풍시(諷詩) 27수를 효종에게 올려 호피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그는 을사사화(乙巳士禍)의 간흉(奸凶) 정순붕(鄭順朋)의 증손으로 이것이 그의 사회적 진출에 멍에가 된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의 조상 중에는 ()과 같은 문사(文土)가 있으며 아버지 지승(之升)도 문명(文名)을 떨쳐 대대로 문장가를 배출한 가계(家系)를 이어 그 역시 시명(詩名)으로 일세(一世)를 울렸다. 임병양난(壬丙兩亂) 이후 숙종대(肅宗代)에 이르는 소단(騷壇)의 불모(不毛)에서 우뚝 솟아 이민구(李敏求)와 더불어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시인이 되었다.

 

정두경(鄭斗卿)은 시서(詩書)에 모두 능통하였는데 특히 그의 가행체(歌行體)는 당대 임숙영(任叔英)의 변려문(騈儷文)과 함께 중국의 문인들과 비견될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스스로도 이백(李白)과 두보는 감당할 수 없으나 고적(高適)과 잠삼(岑參) 등은 혹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하다[李杜則不敢當矣, 至於高岑輩 或可比肩. 종남총지(終南叢志)25]” 할 정도로 시문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다.

 

남용익(南龍翼)호곡시화(壺谷詩話)40에서 오율(五律)과 칠절(七絶) 모두 그의 특장인데 칠언(七言)의 가행체(歌行體)이백(李白)두보(杜甫)와 흡사하니 우리나라에서는 전에 없던 것[五律七絶皆其所長, 而至若七言歌行則彷彿李杜 我國前古所未有也]”이라 하여 정두경의 가행체를 고평(高評)하였다.

 

시의 풍격은 주로 장건(壯健)ㆍ웅혼(雄渾)한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작시(作詩)에 있어 전고(典故)와 용사(用事)를 엄격히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학자의 안광(眼光)에 비친 정두경의 시세계는 부정적인 부분도 없지 않았다. 김창협(金昌協)농암잡지(農巖雜識)외편 63에서 그의 시에 대하여 그 의기(意氣)가 앞사람의 그림자만 좋아 그 시가 비록 청신호준(淸新豪俊)하고 세속의 악착스럽고 썩은 기운이 없지만 그 정치한 말과 오묘한 의사(意思)는 고인(古人)의 깊은 경지를 엿볼 수 없고, 멋대로 휘달렸지만 시가(詩家)의 변요(變要)를 극진히 하지 못했다[鄭東溟 …… 意氣追逐前人影響, 故其詩, 雖淸新豪俊, 無世俗齷齪庸腐之氣. 然其精言妙思, 不足以窺古人之奧, 橫騖旁驅, 又未能極詩家之變].”라 하여 엄중하게 비판하고 있다.

 

 

대체로 웅혼(雄渾)한 시작(詩作)들의 속성이 진밀(縝密)하지 못한 데 있기 때문에 이러한 비평은 감수하지 않을 수 없다. 정두경(鄭斗卿)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다음의 두 작품, 새상곡(塞上曲)마천령상작(磨天嶺上作)도 이러한 비판의 표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작품을 차례로 보인다.

 

새상곡(塞上曲)은 다음과 같다.

 

花門藩將氣雄豪 화문의 번장은 기개가 웅장하여
八尺長身帶寶刀 팔척 장신에 보검을 차고 있네.
大獵天山三丈雪 천산의 세 길 눈 속에서 사냥을 하고
帳中歸飮碧蒲萄 장막으로 돌아가 푸른 포도주를 마시네.

 

위 시는 악부제(樂府題)로 된 가행체(歌行體)의 노래로 정두경의 웅호(雄豪)하고 준일(俊逸)한 풍격을 잘 보여준 것 중의 하나다. 일종의 군가(軍歌).

 

오랑캐 장군의 웅호한 기개를 군더더기 없이 박진감 넘치는 필치로써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상황에 대한 섬세한 묘사를 생략하고서도 상황을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듯이 느끼게 하는 것이 이 시의 높은 곳이라 할 수 있다.

 

 

다음은 정두경(鄭斗卿)마천령(磨天嶺)이다. 마천령을 읊은 역대의 시들 중에서도 백미(白眉)로 칭상을 받은 작품이다. 원제(原題)마천령상작(磨天嶺上作)으로 정두경의 웅호준일(雄豪俊逸)한 시풍을 잘 보여준다.

 

不向磨天嶺上看 마천령 정상을 보지 아니하고
誰知行路上天難 누가 알리요? 행로가 하늘에 오르기보다 어려움을.
地形自作三韓險 땅의 형세는 절로 삼한을 험벽하게 하였고
海氣能令六月寒 바다 기운은 능히 유월에도 춥게 하네.
雪裏千峯連朔漠 눈 속의 천봉은 북쪽 변방으로 이어졌고
雲邊一道走長安 구름가의 외길은 장안으로 치달리네.
美人回首音塵闕 미인에게 머리를 돌려도 소식은 없고
欲寄芳華恐歲闌 편지를 부치려해도 한 해가 저물까 두렵네.

 

마천령은 함경남도 단천군과 함경북도 학성군의 경계에 있는 험준한 고개이다. 마천령의 험준한 산세와 풍기를 호기롭게 묘사하고 있어 그 후속수단으로서의 마무리가 결코 쉬울 것 같지 않았으나 시인은 미련(尾聯)에서 과시한 연군지정(戀君之情)으로 이를 잘 극복하고 있다.

 

미련(尾聯) 상구(上句)미인회수(美人回首)’회수미인(回首美人)’으로 도독(倒讀)해야 하며 미인(美人)’은 물론 임금을 가리킨다. 미련(尾聯) 하구(下句)욕기방화(欲寄芳華)’을 보내려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 역시 편지를 보내는 것이 되어야 한다. 멀고 험벽한 곳이기 때문에 임금으로부터는 소식도 없고 글을 올리려 해도 이날 저날 벼르기만 하다가는 또 한 해가 지나갈까 두렵다는 것이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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