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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3. 도선가의 명작 본문

책/한시(漢詩)

한시사, 목릉성세의 풍요와 화미 - 3. 도선가의 명작

건방진방랑자 2021. 12. 21. 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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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도선가(道仙家)의 명작(名作)

 

 

도교(道敎)는 그 시원(始原)에서부터 신선사상(神仙思想)과 쉽게 습합(習合) 전승(傳承)되어 온 본래적 성격 때문에 문학사상으로서의 도교(道敎)는 따로 말하는 것이 어려울 수 밖에 없다. 특히 성리학(性理學)이 일방적(一方的)으로 통행(通行)한 조선조의 분위기에서 도교는 불교보다도 더 깊숙히 숨은 채 겉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때문에 도통(道統)을 잇고 있는 인물들의 자세한 면모는 그리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은밀히 전해져 내려온 도가(道家) 관계의 서적들인 행동전도록(海東傳道錄)청학집(靑鶴集)등과 홍만종(洪萬宗)해동이적(海東異蹟)등을 통해서야 도가(道家)로 인정할 수 있는 인물들의 명호(名號)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조여적(曺汝籍)청학집(靑鶴集)에는 김선자(金蟬子)ㆍ채하자(彩霞子)ㆍ취굴자(翠窟子) 등 익명성이 강한 이름을 보이고 있으며, 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 단군(檀君)혁거세(赫居世)동명왕(東明王) 등 우리나라 역대 도가(道家)들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도맥(道脈)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은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이다. 이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도맥(道脈)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두 사람은 최치원(崔致遠)김시습(金時習)이며 이 중 김시습(金時習)은 조선시대 도맥(道脈)의 전수자로 되어 있다. 김시습은 자신의 도()을 홍유손(洪裕孫)정희량(鄭希良)ㆍ윤군평(尹君平)에게 전했고, 이 가운데 정희량(鄭希良)이 승() 대주(大珠)에게 이를 전했고, 다시 악 대주(大珠)가 정렴(鄭磏)과 박지화(朴枝華)에게 전했다 한다[時習授天遁劍法鍊魔其訣於洪裕孫, 又以王涵記內丹之要授鄭希良, 參洞龍虎秘旨授尹君平 …… 鄭希良授僧大珠, 大珠授鄭磏朴枝華 …… 「道藏總說)」 『分類五洲衍文長箋散稿18].

 

김시습에서 정희량(鄭希良)을 거쳐 정렴(鄭磏)과 박지화(朴枝華)로 전해진 이 도맥(道脈)에서 흥미로운 것은 익명이나 다름없는 여타의 도가(道家)들과는 달리 이들 모두가 시인으로도 유명하여 각 시선집에 작품이 다수 뽑혀 있다는 사실이다. 사승관계(師僧關係)로 묶여 있는 김시습과 정희량(鄭希良), 정희량(鄭希良)과 정렴(鄭磏)ㆍ박지화(朴枝華)의 직접적인 관계는 이들의 문집에 남아 있는 기록으로는 확인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정렴(鄭磏)과 박지화(朴枝華)가 밀접한 친분관계를 유지했다는 것은 그들의 문집에 산견되는 작품들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으며, 이들 사이에는 정렴(鄭磏)의 동생이며 박지화(朴枝華)의 문인인 정작(鄭碏)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정렴(鄭磏, 1506 중종1 ~ 1549 명종4, 士潔, 北窓)과 정작(鄭碏, 1533 중종28~1603 선조36, 君敬, 古玉) 형제는 정순명(鄭順朋)의 장남(長男)과 오남(五男)이다.

 

아버지 정순붕은 처음에는 조광조(趙光祖) 등 기묘제현(己卯諸賢)과 친분을 맺은 신진사류(新進士流)의 일인으로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죽음만을 면하여 17년간 폐출(廢黜)되었다가 다시 등용된 후 만년에 이르러는 윤원형(尹元衡)의 세도에 의부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키는 데 큰 활약을 함으로써 임백령(林百齡)ㆍ정언각(鄭彦慤)과 함께 을사삼간(乙巳三奸)으로 폄척(貶斥) 당하게 되었다. 정렴(鄭磏)이 벼슬을 버리고 과천(果川) 청계산(淸溪山)과 양주(楊州) 괘라리(掛羅里)에서 은거생활을 하면서 도가(道家) 쪽으로 더욱 경도하게 된 것은 아버지 정순붕과 아우 정작(鄭碏)과의 갈등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으리라 짐작된다조경(趙絅), 북창선생양광변(北窓先生佯狂辨)에 정현이 그의 형 정렴을 죽이더라도 을사상화(乙巳上禍)를 빨리 진행해야 된다고 아버지 정순붕을 설득하는 장면이 보인다.

 

정렴(鄭磏)에 대한 여러가지 기록에는 그가 어릴 때부터 특별한 사승 관계 없이 각종 잡기에 능통했던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北窓生而靈異, 博通三敎. 其修攝似道, 解語類禪, 而倫常行誼一本吾儒, 以至方技衆藝各臻奧妙, 然皆非學而得也 -張維, 北窓古玉兩先生詩集序/ 北窓先生生而栗天地自然之氣, 於衆藝不學而通. -李景奭, 北窓古玉兩先生詩集序) / 北窓先生磏質稟自然, 生而神異. 道貫三敎, 其歸本於儒, 方技衆藝, 皆不學自解. -吳䎘, 北窓古玉兩先生詩集序].

 

을사전문록(乙巳傳聞錄)국조기사(國朝記事)를 인용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 의하면 그의 재주는 천문(天文)ㆍ지리(地理)ㆍ음악(音樂)ㆍ의약(醫藥)ㆍ복서(卜筮)ㆍ산수(算數)ㆍ중국어(中國語)에 두루 능할 뿐 아니라 새나 짐승의 말까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한다[及長, 無所不通, 如天文地理音樂醫藥卜筮算華語, 皆不學而能. -李仲悅, 乙巳傳聞錄/ 及長, 無所不通, 如天文地理音樂醫藥卜筮筭數華語, 皆不學而能 …… 亦解鳥獸音. -李肯翊, 燃藜室記述].

 

중국에서 여러 나라의 사신과 각각 그 나라의 말로 대화를 나눈다든지 새나 짐승의 말을 이해하여 앉은 채 먼 곳의 일을 알아낸다는 등의 신비적 도가의 분위기를 보이는 일화 외에 수련 도가로서 정렴(鄭磏)의 모습을 가장 약여(躍如)하게 보이는 것은 의약(醫藥)에 대한 그의 조예이다【『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 주로 신비적 도가로서의 정렴이 그의 중국 기행을 중심으로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음률(音律)에 밝아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천문(天文)에 밝아 관상감(觀象監) 교수(敎授), 의약에 밝아 혜민서(惠民署) 교수(敎授)를 겸임하였던 그는 인조(仁祖)의 병세가 깊어졌을 때 다른 의사들과 함께 임금을 진맥하기도 하였다[鄭北窓磏與內醫諸提調入診. -朴東亮, 寄齋雜記].

 

도가(道家)에서 중요시한 양생술(養生術)이 곧 의약(醫藥)의 연구로 이어지는 것으로 정렴(鄭磏)은 그의 양생술(養生術) 이론을 용호비결(龍虎秘訣)에 남기고 있다【「용호비결(龍虎秘訣)은 이능화(李能和)조선도교사(朝鮮道敎史)에 인용되어 있다.

 

정렴(鄭磏) 자신은 43세로 비교적 단명했지만, 그에게서 도가적 연단술을 배운 아우 정작(鄭碏)은 상처(喪妻)한 후 36년간 혼자 살면서 여색을 가까이 않고 70세의 수를 누렸다[其弟碏, 號古玉, 亦異人也. 從兄得修煉之學, 獨居三十六年, 不近女色, 嗜酒能詩, 又深於醫方, 多神效. -洪萬宗, 海東異蹟/ 好淸淨, 入金剛山得修鍊之道. 中年妻死, 不更娶, 斷欲三十六年, 以壽終. -許穆, 淸士列傳, 記言]

 

 

박지화(朴枝華, 1513 중종8~1592 선조25, 君實, 守庵)는 서얼(庶孼) 출신의 시인으로, 유불도(儒佛道) 삼교에 두루 통했다는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문인(門人)이다. 그도 유불도(儒佛道) 삼교에 깊은 조예가 있었으며 신선수련(神仙修煉)을 했다는 평을 받았다[嘗從徐花潭受業 …… 儒道釋三學, 著功俱深. -洪萬宗, 海東異蹟)/ 外史氏曰 世稱朴守庵, 學神仙修煉術者. -張志淵, 逸士遺事卷二]

 

그는 북창(北窓)과 교유가 깊었고 북창(北窓)의 아우 정작(鄭碏)을 문인(門人)으로 받았다[與北窓交相善, 北窓之弟古玉丈人師塾之 -許穆, 朴守庵事, 記言].

 

이들은 모두 도가(道家)를 지향하면서도 그 근본을 유가(儒家)에 두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정렴(鄭磏)ㆍ정작(鄭碏) 형제는 아버지와 형제가 바람직한 유가(儒家)의 도에서 일탈했기 때문에, 박지화(朴枝華)는 서얼 출신의 한계 때문에 도가(道家) 쪽으로 경사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정렴(鄭磏)이 후손에게 남긴 유훈(遺訓)에서 유가(儒家)의 덕목(德目)을 강조하고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에 의거하여 제사(祭祀)를 행하며 초학자의 길잡이로 근사록(近思錄)소학(小學)을 읽으라는 내용을 남긴 것과 박지화(朴枝華)가 수련법(修練法)을 묻는 제자들의 청을 거절한 일화에서 확인된다[事父母以孝悌爲本, 待妻子以和順爲先, 居家以節儉爲要, 處世以謙退爲務. …… 凡祭祀一依朱文公家禮 …… 近思錄小學書初學之逕蹊, 而世俗不之看. -鄭磏, 遺訓/ 好修鍊之術, 入金剛七年而返, 弟子請問其術, 先生曰 遺世獨行之士或爲之, 非學者之先務也. -許穆, 朴守庵事, 記言]

 

 

1547(명종2)에 정렴(鄭磏)ㆍ정작(鄭碏)ㆍ박지화(朴枝華)가 함께 봉은사(奉恩寺)를 놀러가면서 배안에서 지은 시에는 이들의 긴밀한 친분관계가 잘 나타나 있다.

 

먼저 정렴의 휴박군실지화사제군경 향봉은사 주중작(携朴君實枝華舍弟君敬, 向奉恩寺, 舟中作)부터 본다.

 

孤烟橫古渡 落日下遙山 외로운 연기 옛 나루에 빗기고 지는 해는 먼 산에 떨어지네.
一掉歸來晚 招提杳靄間 외로운 배 느지막히 돌아오는데 절은 아득한 노을 사이에 있네.

 

이 시는 국조시산(國朝詩刪)기아(箕雅)대동시선(大東詩選)에 모두 선록(選錄)되어 있는데 허균(許筠)은 이에 대해 그 시람은 기이한데 시 또한 맑고도 고원하다[其人異也, 詩亦淸遠]’라 했다. 정렴(鄭磏)이 노을이 질 때 배 안에서 멀리 보이는 봉은사(奉恩寺)의 모습을 탈속(脫俗)의 분위기로 담담하게 그리고 있음에 비해 박지화(朴枝華)는 자연물과 동화하려는 정신적 지향을 보이고 있다.

 

孤雲晚出岫 幽鳥早歸山 구름은 저녁에 산동굴에서 나오고 새는 일찍 산으로 돌아가네.
余亦同舟去 忘形會此間 나도 함께 배를 타고 떠나가니 이 사이에서 때마침 이 몸 있는 줄도 잊었네.

 

도잠(陶潛)귀거래사(歸去來辭)에 보이는 운무심이출수 조권비이지환(雲無心以出峀, 鳥倦飛而知還)’점화(點化)하여 서경(敍景)으로 기()ㆍ승구(承句)를 구성하고 전()ㆍ결구(結句)에서 자연과 함께 동화된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日暮暝煙合 蒼茫山外山 해 저물어 어둠과 이내 잘 어울리고 아득히 산 밖에 또 산이 있네.
招提問何處 鐘定翠微間 묻노니 절은 어느 곳에 있는지, 종소리 산중턱에서 그친다.

 

정작(鄭碏)은 이때 나이가 열다섯으로 산외산(山外山)’을 찾고자 하는 지향과 아울러 장형(長兄)과 사부에게 자신이 아직 모르는 것을 묻고자 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시평보유(詩評補遺)에서는 이 세편의 시를 비교하면서 북창(北窓)의 시가 다른 둘에 비해 당시(唐詩)의 수준에 가장 가깝다는 평가를 내린 바 있다[鄭磏(北窓, 溫陽人, 縣監. 嘗携其弟古玉碏朴守菴枝華)向奉恩寺, 舟中作詩曰: ‘孤烟橫古渡, 落日下遙山. 一掉歸來晚, 招提杳靄間.’ 守菴次之曰: ‘孤雲晚出岫, 幽鳥早歸山. 余亦同舟去, 忘形會此間古玉次之曰: ‘日暮暝煙合, 蒼茫山外山. 招提問何處, 鐘定翠微間.’ (北窓最逼唐) -詩評補遺上篇]

 

 

한편으로 이들과 같은 시기에 도가적(道家的) 지향을 보여준 또 한 명의 시인으로 양사언(楊士彦, 1517 중종12~1584 선조17, 應聘, 蓬萊海容完邱滄海海客)이 있다. 앞에서 본 세 사람과의 교유 흔적은 보이지 않지만 호를 봉래(蓬萊)라 한 것과 단사부(丹砂賦)등 문집에 산견되는 작품들을 통해 그의 도가적 지향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선취(仙趣)를 잘 보여주는 국도(國島)를 보인다.

 

金玉樓臺拂紫煙 금옥루대에 자주빛 연기 스쳐가니
鳳獜洲渚下羣仙 용이 노는 구름 길에 뭇 신선(神仙) 내려오네.
靑山亦厭人間世 푸른 산도 인간세상 싫어했던지
飛入滄溟萬里天 푸른 바다 만리 속으로 날아 들어갔네..

 

전편의 배경 설정이 전혀 비인간(非人間)의 별세계로 조성되고 있어 시인의 도선가적(道仙家的) 시세계를 끌어내어 보이기에 충분하다.

 

허균(許筠)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 봉래(蓬萊)가 풍악(楓岳)에서 읊은 삼오칠언시(三五七言詩)제발연반석상(題鉢淵磐石上)를 두고 선풍도골(仙風道骨)이 있다[深有仙風道骨]’고 하였거니와, 홍만종(洪萬宗) 또한 소화시평(小華詩評)에서 국도(國島)를 가리켜 속태를 벗어났다[脫去塵臼]’고 평하고 있다.

 

 

 

 

인용

목차 / 略史

우리 한시 / 서사한시

한시미학 / 고려ㆍ조선

眞詩 / 16~17세기 / 존당파ㆍ존송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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