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알맹이는 갖추되 수사도 신경 쓴 작품집
이 책을 보는 자는 소천암小川菴이 도대체 어떤 사람이고, 노래가 어느 지방의 것인지를 물어볼 필요도 없이 바로 알 수 있을 걸세. 이에 있어 잇대어 읽어 가락을 이루게 되면 성정性情을 논할 수도 있을 것이고, 화보畵譜를 붙여 그림을 그린다면 수염과 눈썹까지도 징험해낼 수 있을 것이네. 재래도인䏁睞道人이 일찍이 논하기를, ‘석양 무렵 한 조각 돛단배가 잠깐 갈대숲 사이에 숨어 있으니, 뱃사공과 어부가 비록 모두 텁석부리에 쑥대머리라 해도 물가를 따라가며 바라보노라면, 심지어 고사高士 육노망陸魯望인가 의심하게 된다’고 한 적이 있네. 아아! 도인道人이 나보다 먼저 얻었도다. 그대는 도인을 스승으로 모셔야겠네. 찾아가서 징험해보게나!“ 覽斯卷者, 不必問小川菴之爲何人, 風謠之何方, 方可以得之. 於是焉, 聯讀成韻, 則性情可論, 接譜爲畵, 則鬚眉可徵, 재(目宰)睞道人嘗論: '夕陽片帆, 乍隱蘆葦, 舟人漁子, 雖皆拳鬚突鬢, 遵渚而望, 甚疑其高士陸魯望先生.‘ 嗟呼! 道人先獲矣. 子於道人師之也, 往徵也哉!” |
이제 이 책을 읽어 보면 소천암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가 마치 눈앞에 서 있는 것처럼 떠오르고, 여기에 실린 노래는 가락까지 흥얼흥얼 따라 부를 수가 있지. 이 책을 곁에 두고서 아끼어 읽는다면 옛적의 민요인 『시경詩經』을 오늘에 읽어 성정性情을 바로 갖게 되는 것과 같은 보람을 얻게 될 걸세. 아예 그림까지 붙인다면 지금 세상의 사람 사는 모습이 그대로 뒷날까지 남을 수 있지 않겠나? 자네 참으로 애썼네.”
그리고 나서 연암은 재래도인의 이야기를 꺼낸다. ‘재䏁’는 옥편에 있지도 않은 글자이고 ‘래睞’는 삐딱하게 흘겨본다는 뜻이니, 재래도인이란 이른바 ‘삐따기 도인’인 셈이다. 그런데 이 삐따기 도인이 누군고 하니, 바로 이덕무李德懋이다. 글자의 출입은 있지만 이덕무의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에 보면 연암이 인용한 재래도인의 말이 그대로 실려 있다.
꽁깍지만한 배에 고기 그물을 싣고, 석양 무렵 맑은 강에 두 폭 돛을 달고서 갈대 우거진 속으로 떨쳐 들어가니, 배 가운데 탄 사람이 비록 모두 텁석부리에 쑥대머리일지라도 물가를 따라가며 바라보면 고사高士 육노망陸魯望 선생인가 싶어진다. 荳殼船載魚網, 夕陽澄江懸二幅帆, 拂拂入蘆葦中, 舟中人, 雖皆拳鬚突鬢, 然遵渚而望, 疑其高士陸魯望先生. |
고기 그물을 싣고 쌍포 돛을 단 배야 일상에서 흔히 보는 풍경이지만, 강물이 맑고 때가 석양인데다 하필 들어가는 곳이 갈대숲이고 보니, 그 안에 타고 있을 텁석부리에 쑥대머리 어부도 저 당나라 때 고사인 강호산인江湖散人 육구몽陸龜蒙일 것처럼만 여겨진다는 것이다. 이른바 해묵은 장도 그릇을 바꾸고 보니 입맛에 새롭더라는 이야기의 부연이다. 그렇지만 연암이 끝에서 이덕무의 말을 끌어와 그를 스승으로 모시라고 한 것은, 텁석부리 쑥대머리를 고사 육노망 선생으로 여기게끔 만드는 솜씨는 아직도 부족하니 좀 더 노력하라는 주문으로 나는 읽었다.
「순패서旬牌序」의 이야기를 다시 간추리면 이렇다. 실속 있는 것은 겉보기에 좋아 보이지 않는다. 알맹이 없는 것일수록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속빈 강정으로는 배를 채울 수가 없다. 그러니 실속 없이 겉꾸미기에 연연하지 말아라. 화장만으로는 본바탕의 추함을 가릴 수가 없다. 그럴 듯해 보이려고 애쓰지 말아라. 알맹이 없이는 소용이 없다. 문제는 겉모습이 아니라 속 내용이다. 그렇지만 속 내용이 아무리 좋아도 텁석부리 쑥대머리라면 누가 거들떠보겠는가? 그러기에 문장의 수사는 바로 해묵은 장을 새 맛 나게 하는 ‘새 그릇’인 셈이다. 일상적인 이야기인데도 듣는 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도록 만드는 ‘다른 경계’인 셈이다.
▲ 전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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