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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비슷한 것은 가짜다 - 20. 제2의 나를 찾아서 본문

책/한문(漢文)

비슷한 것은 가짜다 - 20. 제2의 나를 찾아서

건방진방랑자 2020. 3. 25.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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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벗을 찾겠다고 하면서 상우천고를 외치다

 

 

옛날에 벗을 말하는 자는 벗을 두고 혹 제이오第二吾라 하기도 하고, ‘주선인周旋人이라고도 하였다. 이런 까닭에 글자를 만든 자가 자에서 빌려와 자를 만들고, ‘자와 자로 자를 만들었으니, 새에게 두 날개가 있고 사람이 양 손이 있는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古之言朋友者, 或稱第二吾, 或稱周旋人. 是故造字者, 羽借爲朋, 手又爲友. 言若鳥之兩翼, 而人之有兩手也.

벗은 2의 나이다. 나를 위해 온갖 일을 다 나서서 주선해 주는 사람이다. ‘이란 글자는 자의 모양을 본떴고, ‘자는 자에 자를 포개 놓은 모양이다. 진정한 벗이란 새의 양 날개나, 사람의 두 손과 같이 어느 하나가 없어서는 안 될 만큼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임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말하는 자는 천고千古의 옛날을 벗삼는다고 한다. 답답하구나, 이 말이여! 천고의 사람은 이미 화하여 흩날리는 티끌이나 서늘한 바람이 되었는데, 그 장차 누가 나를 위해 제이오第二吾가 되며, 누가 나를 위해 주선한단 말인가?
然而說者曰: “尙友千古”, 鬱陶哉是言也! 千古之人, 已化爲飄塵泠風, 則其將誰爲吾第二, 誰爲吾周旋耶?

그러나 이 한쪽 날개와 다른 편 손과 같은 벗을 두고, 사람들은 턱도 없이 상우천고尙友千古를 말하곤 한다. 상우천고라니, 그것은 아득한 천고의 고인을 벗으로 삼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어떻게 내 오른팔이 되고, 내 왼편 날개가 되며, ‘2의 나가 되고, 나를 위해 주선해주는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벗이란 지금 내 곁에 있을 때 의미가 있을 뿐이다. 곁에 마음 나눌 벗이 없고 보니, 답답한 나머지 나온 말이라고는 하지만, 안타깝구나 상우천고의 그 말이여!

 

 

 

 

 

 

2. 벗을 찾겠다고 하면서 후대를 기다리다

 

 

양자운揚子雲이 당시 세상에서 지기知己를 얻지 못하자, 개연히 천세千歲 뒤의 자운子雲을 기다리고자 하였다. 우리나라의 조보여趙寶汝가 이를 비웃어 말하기를,
내가 나의 태현경太玄經을 읽어, 눈으로 이를 보면 눈이 양자운이 되고, 귀를 기울이면 귀가 양자운이 되며, 손으로 춤추고 발로 뛰는 것이 각각 하나의 양자운이거늘, 어찌 반드시 천세의 멂을 기다린단 말인가?”라 하였다.
揚子雲旣不得當世之知己, 則慨然欲俟千歲之子雲. 吾邦之趙寶汝嗤之曰: “吾讀吾玄, 而目視之, 目爲子雲, 耳聆之, 耳爲子雲, 手舞足蹈, 各一子雲, 何必待千歲之遠哉?”

양웅揚雄태현경太玄經을 지을 때, 곁에서 그 어려운 책을 누가 읽겠느냐고 퉁을 주자, ‘나는 천년 뒤의 양자운을 기다릴 뿐일세라고 대답하였다. 이를테면, 아득한 훗날에라도 나를 알아줄 단 한 사람만 있으면 그뿐이라는 것이니, 이번에는 천고 앞의 고인이 아니라 천고 뒤의 후인後人을 벗 삼겠다는 것이다. 그 황당함은 상우천고하겠단 말보다 훨씬 더 심하지 않은가?

양웅의 이 말을 듣고 난 조보여趙寶汝는 자못 딱하다는 투로 이렇게 말한다. “내가 내 지은 글을 소리 내어 읽으면 내 입이 바로 나의 양자운이 되고, 그 소리를 들으면 내 귀가 바로 나의 양자운이 될 것이다. 그 글을 읽고 즐거워 나도 몰래 덩실 춤을 추면 내 손과 발이 바로 나의 양자운일 뿐이다. 내가 나를 알아주면 그뿐이지, 굳이 아득한 천년 뒤를 기다릴 것이 무에란 말인가?”

 

 

내가 다시 답답해져서, 이 말에 곧장 발광해버릴 것만 같아 말하였다.
눈은 보지 못할 때가 있고, 귀는 듣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럴진대 이른바 춤추고 뛰는 양자운을 장차 누구로 하여금 듣게 하고, 누구로 하여금 보게 한단 말인가? 아아! 귀와 눈, 손과 발은 한 몸에서 나란히 난 것이므로 내게 이보다 가까운 것은 없다. 그런데도 오히려 장차 믿을 수 없는 것이 이와 같으니, 누가 능히 답답하게 위로 천고의 앞으로 거슬러 가고, 답답하게 천세의 뒤를 더디 기다린단 말인가?”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벗은 반드시 지금의 당시 세상에서 구해야 함이 분명하다 하겠다.
吾復鬱陶焉, 直欲發狂於斯言曰: “目有時而不睹, 耳有時而不聞, 則所謂舞蹈之子雲, 其將孰令聆之孰令視之? 嗟乎! 耳目手足之生並一身, 莫近於吾. 而猶將不可恃者如此, 則孰能鬱鬱然上溯千古之前, 昧昧乎遲待千歲之後哉? 由是觀之, 友之必求於現世之當世也明矣.”

내가 이 말을 듣고서, 앞서 상우천고하겠다던 사람의 말을 들을 때보다 더 답답해져서, 곧장 미쳐 길길이 날뛸 지경이 되고 말았다. “자네는 지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과 발로 춤추며 뛰는 것을 말하는가? 눈은 자주 보지 못하고, 귀도 소리를 듣지 못할 때가 있네. 이제 자네가 자네의 글과 만나 기뻐 덩실 춤을 추었다 하세. 그것을 증명해 줄 단 한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내 눈과 내 귀와 내 입과 내 손과 내 발조차 내가 믿을 수 없거늘, 있었는지도 모를 천고의 앞이나, 있지도 않은 천고의 뒤를 벗 삼겠다고 하니, 답답해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네 그려.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데, 천고를 믿고 기대겠다니 원 어디 당키나 한 일인가?”

벗은 2의 나이다. 내 마음의 눈과 귀가 되고, 손발이 되어줄 주선인이다. 그가 없이는 나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한다. 그가 없으면 나는 장님이 되고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가 된다. 일어나 춤출 수도 없고 옴짝달싹 할 수도 없다. 그가 있기에 비로소 내 눈도 눈 구실을 하고, 내 귀도 귀 구실을 하며, 손발은 비로소 신명이 올라 한바탕 덩실 춤을 추게 된다.

 

 

 

 

 

3. 중국인의 문집을 읽고서 만나고 싶어지다

 

 

아아! 내가 회성원집繪聲園集을 읽고는, 나도 모르게 심골心骨이 끓어올라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며 말하였다.
내가 봉규씨封圭氏와 더불어 태어남이 이미 이 세상에 나란하니, 이른바 나이도 서로 같고 도도 서로 비슷하다는 것이다. 홀로 서로 벗하지 않을 수 있으랴? 진실로 장차 벗 삼으려 할진대, 어찌 서로 만나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땅이 서로 떨어짐이 만리라 한들 그 땅을 멀다 하겠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아아, 슬프다! 이미 서로 봄을 얻을 수 없다면 진실로 벗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봉규씨의 신장이 몇 자나 되고 수염이나 눈썹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알 수 없다면 내가 같은 세상의 사람이라 한들 무슨 소용이리오. 그렇다면 내가 장차 어찌해야만 할까. 내 장차 천고를 벗 삼는 방법을 가지고 그를 벗 삼아야 할까?
嗟乎! 吾讀繪聲園集, 不覺心骨沸熱, 涕泗橫流曰: “吾與封圭氏, 生旣幷斯世矣, 所謂年相若也, 道相似也. 獨不可以相友乎? 固將友矣, 獨不可以相見乎? 地之相距也萬里, 則爲其地之遠歟?”
: 非然也. 嗟乎! 嗟乎! 旣不可得以相見乎, 則顧可謂之友乎哉? 吾不知封圭氏之身長幾尺, 鬚眉如何. 不可知則吾其於幷世之人, 何哉? 然則吾將奈何? 吾將以尙友之法, 友之乎?

나는 중국사람 곽집환郭執桓이 지은 회성원집繪聲園集을 읽었다. 그의 글을 읽자 나도 몰래 눈물과 콧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그는 나와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 자이다. 나이도 비슷하고 품은 생각도 비슷하다. 아아! 그도 나와 꼭 같은 울분을 품고 있었구나. 내가 지닌 마음을 그도 꼭 같이 지녀 있었구나! 내 마음과 그의 생각 사이에 다른 점이 없는지라, 나는 마치 2의 나를 만난 듯이 반가워 나도 몰래 눈물과 콧물을 줄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를 친구로 삼아야 하리라. 그렇다면 나는 그를 만나보지 않으면 안 되리라.

그러나 나는 결코 그를 만날 수가 없다. 분명 그와 나는 같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건만, 그는 중국의 산서山西에 있고 나는 해동海東의 구석에 살고 있으니 무슨 수로 만나본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나는 천고를 벗 삼겠단 말을 들었을 때의 답답함보다, 천년 뒤의 양자운을 기다리겠단 그 말을 들었을 때의 발광하고 싶은 마음보다 더 큰 답답함과 터질 듯한 안타까움을 지니지 않을 수가 없다. 글로 만날 때 그는 분명 2의 나처럼 친숙한데, 정작 나는 그의 얼굴을 알지 못하고, 수염은 어떻게 났는지, 태도는 어떠한지를 알 수가 없다. 막막하고 아득하기가 마치 천년 앞뒤의 사람과 다름이 없구나. 나는 그를 벗으로 삼고 싶은데, 어찌하면 좋을까? 나도 결국 옛 사람을 상우천고하듯 그를 사귀어 볼밖에 다른 수가 없는 걸까? 아아! 답답하구나. 가슴이 터질 것만 같구나.

 

 

 

 

 

4. 진정한 벗 찾기의 어려움

 

 

봉규씨의 시는 훌륭하다. 그 대편大篇은 소호韶頀의 음악을 펴는 듯하고, 단장短章은 옥구슬이 쟁그랑 울리는 것만 같다. 그 음전하고 온아함은 마치 낙수洛水의 놀란 기러기를 보는 것 같고, 드넓고도 소슬함은 마치 동정호에 떨어지는 낙엽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다. 나는 또 알지 못하겠구나. 이를 지은 자가 양자운인지, 아니면 이를 읽는 자가 양자운인지를.
아아! 말은 비록 달라도 글의 법도는 같으니, 다만 그 기뻐 웃고 슬퍼 우는 것은 번역하지 않고도 통한다. 왜 그런가? 이란 겉꾸미지 못하고, 소리는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 장차 봉규씨와 더불어 한편으로 후세의 양자운을 기다림을 비웃고, 한편으로는 천고를 벗 삼는다는 말을 조문하련다.
封圭之詩盛矣哉. 其大篇發韶頀, 短章鳴璁珩. 其窈窕溫雅也, 如見洛水之驚鴻; 泓渟蕭瑟也, 如聞洞庭之落木. 吾又不知其作之者, 子雲歟? 讀之者, 子雲歟?
嗟乎! 言語雖殊, 書軌攸同, 惟其歡笑悲啼, 不譯而通. 何則? 情不外假, 聲出由衷. 吾將與封圭氏, 一以笑後世之子雲, 一以弔千古之尙友.

이제 그의 글을 읽으면 그의 내면 풍경이 다 떠오른다. 장편의 거작은 마치 요순堯舜의 음악이 울려 퍼지는 것만 같고, 짤막한 작품도 쟁반에 구르는 옥구슬처럼 영롱하다. 낙수洛水의 놀란 기러기의 날갯짓도 있고, 동정호로 떨어지는 구슬픈 낙엽소리도 담겨 있다. 나는 그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그가 되고, 그가 나인 것 같은 착각에 깜짝 놀라곤 한다. 사는 땅이 다르고 쓰는 언어가 달라도 그의 글을 읽으면 그의 내면과 동화될 수가 있다. 어째서 그럴까? 그의 글에는 참된 정이 실려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소리는 폐부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아아! 그는 천만리의 밖에 있어 결코 대면하여 볼 수 없지만, 그는 2의 나임에 틀림없다. 후세의 양자운을 기다릴 것도, 아득한 천고의 고인을 찾아 헤맬 것도 없다. 그는 나다.

글의 본지에만 충실하게 읽는다면, 이 글은 연암이 회성원집繪聲園集을 읽고서, 마치 가까이에서 익히 알던 벗과 같은 지기의 심정을 느꼈음을 말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천고의 아득한 옛날에서나 벗을 찾고, 천세의 아득한 뒷날에서나 자기를 알아줄 사람을 찾는다는 말 속에 담긴 깊은 슬픔을 헤아려 볼 일이다. 연암 또한 천고의 위에서거나 천세의 뒤에서 벗을 찾을 수밖에 없는 처연한 심정을 반어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당대에 정말 제 2의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는가 싶어 기뻐했더니, 결국 그는 아무리 만나려 해도 만날 길이 없는 아득한 천만리 밖의 사람이 아닌가 말이다. 글의 끝에서 자신이 봉규씨와 함께 후세의 양자운과 천고의 벗을 웃고 조문한다 함은, 연암 자신이 봉규씨의 글에서 느낀 진한 동심同心의 교호交互를 알게 해준다. 결국 진정한 붕우, ‘2의 나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치 않는다. 그럴진대 사람들이 천고를 벗 삼고, 천세 뒤를 기다림은 또 당연한 것이 아닌가?

이 글에서 연암이 제기하고 있는 붕우의 문제는 마장전馬駔傳에서 말하고 있는 우정의 문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붕우의 사귐이 세명리勢名利의 획득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 세상에서, 진정한 우정의 소재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회성원집발繪聲園集跋에서 연암은 지식인들이 현세에서 벗을 구하지 않고 천고나 천세 후의 지기를 말하는 것을 처음에는 비웃는 듯한 어조로 출발하여, 당시 세상에서도 벗을 구하지 못하는 주제에 이미 썩어 흙먼지가 되어 버린 고인이나, 눈앞에 있지도 않은 천고 뒤의 후인을 벗 삼겠다는 것이 무슨 소리냐고 나무라고는, 끝에 가서는 결국 자신도 회심의 벗과 직접 대면하지 못하고 상우천고 하듯 할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으로 마무리 지음으로써, 진정한 붕우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 없는 세상에 대한 절망을 다른 층위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5. 친구들아 다들 잘 지내고 있니

 

 

여인與人, 즉 벗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편지에 나오는 성흠聖欽은 이희명李喜明(1749-?)의 자이고, 중존仲存은 연암의 처남인 이재성李在誠(1751-1809)이다. 백선伯善은 누구의 자인지 분명치 않다. 성위聖緯는 이희명李喜明의 형인 이희경李喜經(1745-?)이고, 재선在先박제가朴齊家(1750-1805), 무관懋官이덕무李德懋(1741-1793)를 말한다. 젊은 시절 함께 어우러져 즐거운 시간을 나누었던 벗들이자 제자들이다.

 

 

한참 무더운 중에 그간 두루 편안하신가? 성흠聖欽은 근래 어찌 지내고 있는가? 늘 마음에 걸려 더욱 잊을 수가 없네. 중존仲存과는 이따금 서로 만나 술잔을 나누겠지만, 백선伯善은 청파교靑坡橋를 떠나고 성위聖緯도 운니동雲泥洞에 없다 하니, 이 같은 긴 여름날에 무엇 하며 지낼는지 모르겠구려. 듣자니 재선在先은 벼슬을 하마 그만 두었다던데, 돌아온 뒤로 몇 번이나 서로 만나보았는가 궁금하이. 저가 조강지처를 잃은데 더하여 무관懋官 같은 좋은 친구마저 잃었으니, 아득한 이 세상에서 외롭고 쓸쓸해 할 그 모습과 언어는 보지 않고도 가늠할 만하네 그려. 또한 하늘과 땅 사이의 궁한 백성이라 말할 만할 것이오.
劇暑中, 僉履起居連勝否? 聖欽近作何樣生活否? 懸懸尤不能忘也. 仲存時得相逢飮酒, 伯善失靑橋, 聖緯無泥洞, 則未知如此長日, 何以消遣否. 在先聞已罷官云, 未知歸後幾番相逢否. 彼旣喪糟糠之妻, 又喪良友之如懋官者, 悠悠此世, 踽踽凉凉, 其面目言語, 不見可想. 亦可謂天地間窮民.

박제가는 1793년 이동직李東稷이 올린 문체 관련 상소로 인해 왕의 지적을 받아 자송문自訟文을 지어 올린다. 그 전 해인 17929월에는 조강지처인 덕수 이씨가 세상을 떴다. 당시 박제가는 부여 현감으로 재직 중이었다. 또 편지에서 1793125일에 세상을 뜬 이덕무의 죽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편지는 17936월쯤 안의安義 현감으로 있을 당시 안의에서 서울로 보낸 것임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보낸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편지는 먼저 이희명의 근황을 묻는 것으로 시작된다. 애틋한 무슨 사연이 있었던 듯하다. 처남인 이재성과는 이따금 만나 술잔을 기울이겠지만, 백선은 이사 가고 없고 이희경도 운니동 집에 있지 않다 하니, 길고 긴 여름날에 무슨 재미로 나날을 보내시는가? 문체 파동으로 자송문을 쓴 뒤 박제가는 벼슬을 그만 두고 서울로 올라가 지낸다던데, 그래 그새 몇 번이나 만나 보았던가? 그가 조강지처를 잃은 데다 절친한 벗 이덕무마저 먼저 떠나보냈으니, 내 이 먼 시골에서도 이즈음 그의 표정과 언어를 짐작할 만하네 그려. ! 슬프고 슬픈 일일세.

 

 

 

 

 

6. 지음을 잃고 보니 나는 천하의 궁한 백성이네

 

 

아아! 슬프다. 나는 일찍이 벗 잃은 슬픔이 아내 잃은 아픔보다 심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아내를 잃은 자는 오히려 두 번, 세 번 장가들어 아내의 성씨를 몇 가지로 하더라도 안 될 바가 없다. 이는 마치 옷이 터지고 찢어지면 깁거나 꿰매고, 그릇과 세간이 깨지거나 부서지면 새것으로 바꾸는 것과 같다. 혹 뒤에 얻은 아내가 앞서의 아내보다 나은 경우도 있고, 혹 나는 비록 늙었어도 저는 어려, 그 편안한 즐거움은 새 사람과 옛 사람 사이의 차이가 없다.
嗚呼痛哉! 吾嘗論, 絶絃之悲, 甚於叩盆. 叩盆者, 猶得再娶三娶, 卜姓數四, 無所不可, 如衣裳之綻裂而補綴, 如器什之破缺而更換. 或後妻勝於前配, 或吾雖皤, 而彼則艾, 其宴爾之樂, 無間於新舊.

박제가가 사랑하던 조강지처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지음知音의 벗 이덕무마저 잃었으니, 그 슬픔을 어이 헤아릴 수 있겠나? 그러나 생각해 보세. 아내를 잃은 슬픔이야 다시 장가들어 새 부인을 맞이하면 잊혀질 수도 있고, 또 나중 얻은 아내가 먼저 번 아내보다 내게 더 잘해 주면 편안히 즐거워질 수도 있을 것이니, 벗 잃은 슬픔을 어찌 여기에 견줄 수 있겠는가?

 

 

벗을 잃는 아픔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다행히 내게 눈이 있다 해도 누구와 더불어 내가 보는 것을 함께 하며, 귀가 있다 해도 누구와 더불어 듣는 것을 함께 하며, 입이 있더라도 누구와 더불어 맛보는 것을 함께 하며, 코가 있어도 누구와 더불어 냄새 맡는 것을 함께 하며, 다행히 내게 마음이 있다 해도 장차 누구와 더불어 나의 지혜와 깨달음을 함께 하겠는가?
至若絶絃之痛, 我幸而有目焉, 誰與同吾視也; 我幸而有耳焉, 誰與同吾聽也; 我幸而有口焉, 誰與同吾味也; 我幸而有鼻焉, 誰與同吾嗅也; 我幸而有心焉, 將誰與同吾智慧靈覺哉.

지음의 벗을 잃고 보니, 좋은 것이 있어도 함께 볼 사람이 없고, 귀가 열려 있어도 함께 듣지 못하며, 맛진 음식을 앞에 두고도 같이 먹자 권할 수가 없고, 좋은 내음을 앞에 두고 같이 맡아 보지도 못할 것일세. 함께 할 벗이 곁에 없고 보니 전날에 그 좋던 모든 것들이 하나도 흥이 나지 않게 되고 말 것일세 그려. 내게 어떤 깨달음이 이르러도 그것을 기뻐하며 함께 나누질 못하니, 나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닌 셈일세. 그러니 천지간의 한 궁한 백성窮民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7. 백아가 종자기를 잃고 나서의 심정처럼

 

 

종자기가 죽으매, 백아가 석 자의 마른 거문고를 끌어안고 장차 누구를 향해 연주하며 장차 누구더러 들으라 했겠는가? 그 기세가 부득불 찼던 칼을 뽑아들고 단칼에 다섯줄을 끊어 버리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그 소리가 투두둑 하더니, 급기야 자르고, 끊고, 집어던지고, 부수고, 깨뜨리고, 짓밟고, 죄다 아궁이에 쓸어 넣어 단번에 그것을 불살라버린 후에야 겨우 성에 찼으리라. 그리고는 스스로 제 자신에게 물었을 테지.
너는 통쾌하냐?”
나는 통쾌하다.”
너는 울고 싶지?”
그래, 울고 싶다.”
소리는 천지를 가득 메워 마치 금석金石이 울리는 것 같고, 눈물은 솟아나 앞섶에 뚝뚝 떨어져 옥구슬이 구르는 것만 같았겠지. 눈물을 떨구다가 눈을 들어 보면 텅 빈 산엔 사람 없고 물은 흘러가고 꽃은 피어 있다.
너는 백아를 보았니?”
나는 보았다.”
鍾子期死矣, 爲伯牙者, 抱此三尺枯梧, 將向何人鼓之, 將使何人聽之哉? 其勢不得不拔佩刀, 一撥五絃. 其聲戛然, 於是乎, 斷之絶之觸之碎之破之踏之, 都納竈口, 一火燒之. 然後乃滿於志也. 吾問於我, : “爾快乎?” : "我快矣." "爾欲哭乎?" : "吾哭矣." 聲滿天地, 若出金石. 有水焉, 迸落襟前, 火齊瑟瑟. 垂淚擧目, 則空山無人, 水流花開. “爾見伯牙乎?” “吾見之矣.”

예전 백아가 제 친구 종자기를 잃고 나서의 심정을 나는 지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네. 제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던 유일한 벗이 훌쩍 세상을 버렸을 때, 그리하여 저 혼자 남아 거문고 앞에 마주 섰을 때, 이제는 거문고를 연주해 보았자 그 소리를 알아들을 단 한 사람이 없음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을 때, 백아의 그 심정이 어떠했겠나? 그는 주머니에서 칼을 꺼내 들었겠지. 그리고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거문고 줄을 부욱 그어 끊어 버렸을 테지. 투두둑 줄이 끊어지자, 그 아끼던 거문고를 끌어내어 도끼로 찍어 부수고,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발로 짓밟아 빠개고, 마침내 아궁이 속에 털어 넣어 불 태워 버리고 말았겠지. 그래서 마침내 제 분신 같던 거문고가 사라져 버린 친구처럼 한줌 재로 화해버리자, 그제야 그는 아까의 그 기막혔던 심정이 조금 풀렸으리라.

비로소 그는 저 자신에게 이렇게 물었을 것이다. “그래, 거문고를 다 때려 부숴 불태워 버리고 나니 속이 후련한가? 그래도 소리 내어 울고 싶은가? 그렇다면 숨기지 말고 엉엉 소리 내어 실컷 울어 보게나.” 그리하여 마침내 터져 나온 그 울음소리는 금석金石이 울리듯 천지를 가득 메우고, 옥구슬 같은 눈물은 옷섶으로 뚝뚝 덜어졌겠지. 한참을 그렇게 울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둘러보면 텅 빈 산엔 아무도 없고, 물은 흘러가고 꽃은 피어 있었을 것이네. 여보게 자네! 그때 그 백아의 심정을 알겠는가, 모르겠는가? 나는 알 것만 같네. 그 심정 그 표정이 역력히 떠오르네 그려. 지금 박제가의 이덕무 잃은 슬픔도 꼭 이렇지 않겠나? 아니 이덕무를 잃은 내 마음도 꼭 종자기 잃은 백아의 심정이라네. 아아! 큰 소리로 한 번 엉엉 소리쳐 울고 싶다네.

원문으로 보면 백아가 제 거문고를 때려 부수는 장면의 단지斷之, 절지絶之, 촉지觸之, 쇄지碎之, 파지破之, 답지踏之는 그 동작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거니와, 끝에 나오는 텅빈 산엔 사람 없고, 물은 흘러가고 꽃은 피어 있다.空山無人, 水流花開란 말은 본래 소동파蘇東坡십팔대아라한송十八大阿羅漢頌에서 한 말이다. 텅빈 산에는 사람이 없는데 물은 그대로 흘러가고 꽃은 가만히 피어 있다. 그 물 그 꽃이건만 텅빈 산에 홀로 앉아 바라보자니, 마음속에 일어나는 묘용妙用이 있다. 그래서 추사秋史고요히 앉은 곳 차를 반쯤 마셔도 향기는 처음 같고, 묘용妙用이 일어날 때 물은 흘러가고 꽃은 피어 있네.靜坐處茶半香初, 妙用時水流花開라고 노래한 바 있다. 말하자면 이것은 물과 아 사이에 아무런 간극이 없는 회심일여會心一如의 경지를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의 문맥에서는 백아의 고산高山 유수流水의 노래를 떠올릴 때, 산과 물은 전과 같건만 그 곁에 함께 있어 줄 한 사람의 지기가 없는 허탈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봄이 온당할 터이다.

 

 

 

 

 

8. 한 명의 나를 알아주는 지기를 만난다면

 

 

앞서 세상을 떴다던 이덕무는 일찍이 한 사람의 지기, 단 한 사람의 2의 나를 그려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글을 남겼다.

 

 

만약 한 사람의 지기를 얻게 된다면 나는 마땅히 10년간 뽕나무를 심고, 1년간 누에를 쳐서 손수 오색실로 물을 들이리라. 열흘에 한 빛깔을 이룬다면, 50일 만에 다섯 가지 빛깔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를 따뜻한 봄볕에 쬐어 말린 뒤, 여린 아내를 시켜 백번 단련한 금침을 가지고서 내 친구의 얼굴을 수놓게 하여 귀한 비단으로 장식하고 고옥古玉으로 축을 만들어 아마득히 높은 산과 양양히 흘러가는 강물, 그 사이에다 이를 펼쳐 놓고 서로 마주보며 말없이 있다가, 날이 뉘엿해지면 품에 안고서 돌아오리라.
若得一知己, 我當十年種桑, 一年飼蠶, 手染五絲, 十日成一色, 五十日成五色. 曬之以陽春之煦, 使弱妻, 持百鍊金針, 繡我知己面, 裝以異錦, 軸以古玉, 高山峨峨, 流水洋洋, 張于其間, 相對無言, 薄暮懷而歸也.

뽕나무를 10년 길러 제법 무성해지면, 그제야 누에를 먹이겠다. 누에가 실을 뱉으면 오색으로 곱게 물을 들여야지. 열흘에 한 가지씩 50일 만에 물을 들여 봄볕에 쬐어 말려야지. 오색실이 뽀송뽀송하게 마르거든 아내에게 부탁하여 내 친구의 얼굴을 그 실로 수놓게 하겠다. 그것도 한 반년은 걸리겠지. 그런 뒤에 귀한 비단으로 배접하고 표구해서 고옥古玉으로는 괘를 달아야지. 그것을 들고서, 저 백아가 종자기를 앞에 앉혀두고 연주하던 드높은 산과 양양히 흐르는 강물로 나아가 이것을 걸어놓고 마주보며 말없이 앉아 있겠다. 날이 다 저물도록 그렇게 있다가 오겠다. 단 한 사람의 지기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를 위해 나는 기꺼이 이렇게 하겠다. 단 한 사람의 지기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네들이 그토록 찾아 헤매었어도 결국 만날 수 없었던 그 한 사람의 지기, 단 한 사람의 2의 나, 결국 시대의 어두운 동굴을 헤매며 느꼈던 푸른 고독과 절망의 다른 이름일 뿐일 것이다. 나는 이들 글에서 그네들의 뿌리 깊은 슬픔을 넉넉히 읽을 수 있다. “너는 백아를 보았니?” “나는 백아를 보았다.”

 

 

 

 

 

 

인용

지도 / 목차 / 한시미학 / 연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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