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왜 사냐건 웃지요
백지 편지에 보내온 센스 가득한 아내의 답장
옛 사람의 글에는 야단스러움이 없다. 간결하게 할 말만 하고, 때로 아무 말도 않기도 한다. 그래도 마음은 글자 사이로 흘러, 행간에 고여 넘친다. 예전 중국의 곽휘원(郭暉遠)이란 이가 먼 데로 벼슬 나가 있다가 집에 편지를 보냈는데, 착각하여 백지를 넣고 봉하였다. 그 아내가 오랜만에 온 남편의 편지를 꺼내 보니 달랑 백지 한 장뿐이었다. 답시를 보냈다.
碧紗窓下啓緘封 | 푸른 깁창 아래서 봉함을 뜯어보니 |
尺紙終頭徹尾空 | 편지지엔 아무 것도 써 있질 않더이다. |
應是仙郞懷別恨 | 아하! 우리 님 이별의 한 품으시고 |
憶人全在不言中 | 말 없는 가운데 그리는 맘 담으셨네. |
청나라 원매(袁枚)의 『수원시화(隨園詩話)』 「기부(寄夫)」에 나오는 이야기다. 아내의 난데없는 답장을 받아든 곽휘원은 아마 그때까지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했을 것이다.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경우이긴 하지만, 일껏 편지를 써 놓고 백지를 봉해 부치는 곽휘원의 약간 모자란 듯한 멍청함이 오히려 매력적이다. 정작 원매도 쓰다달다 말없이 단지 그녀의 답장만을 실어 놓고 말을 멎고 말았다. 정말 마음이 통하는 사람 사이에 언어란 원래 불필요한 것이다.
말이 아닌 가슴으로 통한 이야기
본래 동양의 예술 정신은 다변(多辯)과 요설(饒舌)을 싫어한다. 긴장을 머금은 함축을 소중히 여긴다. 진(晋)나라 때 환이(桓伊)란 사람은 피리를 잘 불기로 유명했다. 왕희지의 아들 왕휘지(王徽之)가 시냇가에 배를 대고 있는데, 환이가 언덕 위로 지나가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때까지 서로 인사가 없던 터였다. 왕휘지가 사람을 보내 말했다. “듣자니 그대가 피리를 잘 분다는데, 나를 위해 한 곡 연주해주겠는가.” 환이는 당시 높은 신분이었는데, 그 또한 평소 왕휘지의 명망을 듣고 있었다. 두 말 없이 수레에서 내린 그는 호상(胡床)에 걸터앉아 그를 위해 세 곡의 노래를 연주하였다. 연주가 끝나자 그는 말없이 다시 수레에 올라 그 자리를 떠나갔다. 두 사람 사이에는 한 마디의 말도 직접 오가지 않았다.
예전 카알라일(Tomas Carlyle, 1795~1881, 스코트랜드에서 태어나 애든버러 대학에서 수학과 신학을 공부한 세계적인 영국의 유명한 사상가이며 역사가이고 평론가)과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 미국 보스턴에서 태어난 미국의 시인이자 사상가)이 처음 만나 30분가량을 아무 말 않고 앉았다가는 오늘은 퍽 재미나게 놀았다며 악수하고 헤어졌다는 싱겁고도 이상한 이야기가 있지만, 실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언어는 부질없는 군더더기일 뿐이다.
왜 산에 사냐고 물으니, 그냥 산다 하지요
問余何事棲碧山 | 어찌하여 푸른 산에 사냐 묻길래 |
笑而不答心自閒 | 웃고 대답 아니 해도 마음 절로 한가롭네. |
桃花流水杳然去 | 복사꽃 흐르는 물 아득히 떠 가거니 |
別有天地非人間 | 또 다른 세상일래, 인간이 아니로세. |
이백(李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이다. 산속에 묻혀 사는 나에게, 왜 답답하게 산속에 사느냐고 묻는다. 묵묵부답(黙黙不答), 싱긋이 웃기만 하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말한다고 한들 그가 내 마음을 어이 헤아릴 것이랴. 또 낸들 무슨 뾰족한 대답이 있을 리 없다. 그저 “산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나, “왜 사냐 건 웃지요” 밖에는. 복사꽃이 물 위로 떠가니, 상류 어디엔가 무릉의 도원이 있지나 않을런지.
잠자다 일어나니, 분별하려는 기심조차 사라져 버렸네
다음은 고려 때 최유청(崔惟淸)의 「잡흥(雜興)」 시 연작 가운데 한 수이다.
春草忽已綠 滿園蝴蝶飛 | 봄풀 어느덧 저리 푸르러 동산 가득 나비가 날아다닌다. |
東風欺人垂 吹起床上衣 | 봄바람 잠든 나를 속여 깨우려 침상 위 옷깃을 불어 흔드네. |
覺來寂無事 林外射落暉 | 깨고 보면 고요히 아무 일 없고 숲밖엔 저녁 해만 비치고 있다. |
依檻欲歎息 靜然已忘機 | 난간에 기대어 탄식하려다 고요히 이미 기심(機心) 잊었네. |
연초록 푸르른 동산에 나비 떼들이 꽃을 찾아 날아다니는 꿈같은 봄날의 스케치이다. 감미로운 햇살에 곤한 봄잠이 깊어 있던 그를, 짓궂은 봄바람은 자꾸만 일어나라고 옷자락을 흔든다. 이 아름다운 봄날을 잠으로만 보내서야 되겠느냐는 점잖은 충고다. 무슨 일인가 싶어 부시시 일어나보면, 여전히 나비 떼는 날아다니고, 동산은 싱그럽고, 어느덧 햇살만이 뉘엿해 있을 뿐이다. 기운 햇살의 빗긴 볕을 받아 반짝이는 물상들의 모습을 바라보던 시인은 자기도 모르게 ‘아!’하는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입술을 채 벗어나기도 전에 입안을 맴돌다 고요히 사라지고, 어느덧 내가 누구인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잊고 말았다는 것이다.
시인이 보여주는 영상을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어느새 시인 대신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선잠을 깨어 바라보는 봄날 해질녘 광경의 황홀함 속에서 그가 느낀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 느낌조차 무화(無化)시켜 버리고, 기심(機心) 즉 분별하고 헤아리는 마음마저 앗아가 버린 것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이 시는 이렇듯 모든 것이 기화(氣化)해 버리고 남은, 순수한 결정의 세계를 노래한다. 그래서 내가 봄 동산이 되고, 그 동산의 나비가 되어 봄날의 석양 속으로 훨훨 날아가 버리는 느낌을 노래한다. 필설로 옮기려 하는 순간 증발해 버리듯 사라져 버린 기심, 사물과의 순간적인 만남이 가져다주는 이러한 생취(生趣)를 설명적 언어로 옮기려는 시도는 얼마나 허망한가. 그러고 보면 언어는 참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도구에 불과하다.
인용
1. 싱거운 편지
2. 왜 사냐건 웃지요
4. 내 혀가 있느냐?
5. 어부가 도롱이를 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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