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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휘사전 - 169. 송 본문

어휘놀이터/어휘사전

어휘사전 - 169. 송

건방진방랑자 2020. 4. 26.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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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송가장(宋家墻)

전국 때 초() 나라 송옥(宋玉)의 호색부(好色賦)의 일절에, “초나라에 미인이 많되 신()의 마을만한 데가 없고, 신의 마을에 미인이 많으나 신의 집 동녘 집 처녀가 으뜸이온데, 그녀가 신의 담을 엿본 지가 3년이로되 신이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나이다.” 하였다.

 

송간갈도(松間喝道)

관원이 출입할 때에 벽제(辟除)하는 것을 갈도(喝道)라 하는데, 소나무 사이에 갈도(喝道)하는 것은 당 나라 이의산(李義山)이 열거(列擧)한 몇 가지 살풍경(殺風景)의 하나이다. 그것은 산에 놀러가는 사람은 한가하고 맑은 취미를 찾는 것인데, 관원이 소나무 숲 사이에 벽제(辟除) 소리를 높이 하는 것을 조롱하는 말이다.

 

송강(松江)

당나라 육귀몽(陸龜蒙)의 호()는 천수자(天隨子)인데, 송강(松江) 보리(甫里)에 살면서 집 전후에 기()와 국화를 심어서 반찬하였으며, 차를 좋아하여 고저산(顧渚山) 밑에 다원(茶園)을 두었다.

 

송강(淞江)

오군(吳郡)의 화정현(華亭縣)에 있는 강 이름으로, 특히 맛좋은 농어가 나와서 유명하다. () 나라 때 장한(張翰)은 낙양(洛陽)에 들어가 벼슬을 하다가 가을바람이 일자, 자기 고향인 오중(吳中)의 농어회가 생각나서 이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송강어(松江魚)

() 나라 송강에서 난 노어(鱸魚)를 말하는데, 이 농어회가 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한다.

 

송강왕(宋康王)

전국시대(戰國時代) ()나라의 마지막 군주로 이름은 언(). 그의 형을 밀어내고 스스로 왕이 됨. 사방으로 전쟁을 일으키고 방탕무도했으며 여러 신하를 함부로 죽여 제후(諸侯)들이 그를 걸송(桀宋)’이라 부른다. 나중에 제() 민왕(湣王)이 위()ㆍ초()와 함께 송()을 정벌하여 강왕(康王)을 죽이고 그 땅을 셋으로 나눠 가진다.

 

송강정(松江亭)

전라남도 담양에 있는 정자.

 

송경(宋璟)

당 현종(唐玄宗) 때의 명재상으로 요숭(姚崇)과 함께 현종의, 개원(開元)의 선치(善治)에 공이 많았다.

 

송경(松京)

개성(開城)의 별칭이다.

 

송경(誦經)

전택(田宅)과 노비를 팔아 죄수를 풀어달라고 뇌물을 쓰는 것을 말한다. 풍속에서 이른바 신명에게 기도하여 명을 구한다는 뜻이다.

 

송경(宋牼)

() 나라와 초() 나라가 전쟁 준비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이를 알리기 위해 유세 길에 나섰다가 맹자(孟子)와 석구(石丘)에서 만났던 사람이다. 맹자(孟子)』 「고자(告子)

 

송경문(宋景文)

경문은 송() 나라 송기(宋祁)의 시호이다. 용도각학사(龍圖閣學士)를 거쳐 사관 수찬(史館修撰)이 되어 구양수(歐陽修)와 함께 당서(唐書)를 편찬하였는데, 본기(本紀)ㆍ지()의 표제(表題)는 구양수가 붙였고 열전(列傳)의 표제는 송기가 붙였다. 저서로는 송경문집(宋景文集)이 있다.

 

송곡(松谷)

조선조 때 문신으로 성명은 이서우(李瑞雨). 자는 윤보(潤甫), 송곡은 그의 호이다. 그는 시문에 뛰어나고 글씨에도 이름이 높았음.

 

송과우(宋寡尤)

과우는 송언신(宋言愼)의 자이다.

 

송관(松關)

산골 마을에서 집안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늘어선 소나무가 자연적으로 이룬 문을 말한다.

 

송광평(宋廣平)

당 나라 피일휴(皮日休)가 말하기를, “송광평(宋璟)은 강직하기가 쇠마음 돌창자(鐵心石腸)인 줄 알았더니 그의 지은 매화부(梅花賦)를 본즉 맑고 고와서 그의 사람됨과는 다르다.” 하였다.

 

송구영신(送舊迎新)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 한다는 뜻이다.

 

송국유존(松菊猶存)

귀거래사(歸去來辭)세 오솔길 그동안 돌볼 이 없었는데, 그래도 솔과 국화 남아 있구나[三徑就荒 松菊猶存].”라는 말이 있다.

 

송궁(送窮)

송궁문(送窮文)은 당() 나라 때 한유(韓愈)가 지은 글로서, 즉 궁귀(窮鬼)들을 내보내는 뜻을 서술한 것이다.

 

송궁문(送窮文)

한유(韓愈)의 문장인데, 고문진보(古文眞寶)후집에도 보인다.

 

송궁일(送窮日)

음력 정월 29일을 이름

 

송귀봉작(宋龜逢灼)

현명한 사람이 화를 당하는 데에 비유한 말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송 원군(宋元君)의 꿈에 청강(淸江)의 사자(使者)라고 자처하는 자가 자신이 어부 여저(余且)에게 붙잡혔다고 말하자, 원군이 꿈을 깨고 나서 그 어부 여저를 불러다가 조사한 결과 그가 과연 신귀(神龜)를 잡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 거북을 잡아 72회나 껍데기를 지져 점을 쳤는데 그때마다 점이 꼭꼭 맞았었다.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해서 공자가 말하기를 그 신령한 거북이 원조의 꿈에 나타날 수는 있었으나 여저의 그물은 피하지 못하였고, 그 지혜는 72회의 점에서 길흉을 어김없이 맞추었지만 제 창자를 도려내는 근심은 피하지 못했다.”고 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장자(莊子)』 「외물(外物)

 

송귀장(送鬼檣)

궁귀(窮鬼)를 보낼 때 쓰인 돛대. 한유(韓愈)송궁문(送窮文)한 구절을 인용한 말이다.

 

송규암(宋圭庵)

규암은 송인수(宋麟壽)의 호이다.

 

송기(宋祁)

송 나라 때의 학자. 구양수(歐陽修)를 도와 당서(唐書)편찬에 종사했으며, 이 뒤에도 거의 전 생애를 사관(史官)과 한림직(翰林職)으로 일생을 마쳤다.

 

송기(宋祈)

() 나라 용도각(龍圖閣) 학사로서 구양수(歐陽修)와 함께 신당서(新唐書)를 편찬하였는데, 그가 당 태종을 ()무왕(武王)에 비하였다.

 

송대부(松大夫)

진시황(秦始皇)이 태산(泰山)에 올라갔다가 창졸에 폭우를 만나 큰 소나무 밑에서 피하고 나서 그 소나무에 오대부(五大夫)의 벼슬을 봉해 주었다. 사기(史記)卷六 진시황본기(秦始皇本紀)/ 인용: 見蒼松根入水中(홍만식)

 

송도(松濤)

소나무에 세차게 부는 바람 소리를 비유한 말이다.

 

송도계원(松都契員)

자기 권세를 믿고 상대방을 얕보는 것을 말한다. 한명회(韓明澮)가 불우하였을 당시 만월대(滿月臺)의 부료(府僚)들 모임에 끼이기를 청하였다가 거절을 당했는데 그 후 세조(世祖)를 도와 원훈(元勳)이 되고 나자 그때 모임을 했던 사람들이 그를 거절했던 일을 후회하였다.

 

송도군(宋道君)

송 나라의 휘종(徽宗)을 말한다. 휘종은 도군황제(道君皇帝)라고 자칭하였으며, 그림을 잘 그렸다.

 

송도육익(宋都六鷁)

춘추(春秋), “여섯 마리 날아 송 나라 수도를 지나가다[六鷁退飛 過宋都].”라는 기사(記事)가 있는데, 여기의 뜻은 출세하지 못하고 후퇴(後退)만 한다는 것이다.

 

송뢰(松籟)

바람이 솔가지 사이를 지나가는 소리를 말한다. .

 

송료(松醪)

송진(松津)을 넣어서 빚은 술을 이른다.

 

송류(松留)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의 별칭이다.

 

송리(宋理)

() 나라 때에 가장 성행했던 이학(理學)을 이른다.

 

송림굴(松林窟)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말사(末寺)인 송림사의 석굴(石窟), 참선 기도를 하는 수행 도량으로 널리 알려졌다.

 

송림무촉녹(松林無觸鹿)

묘소가 아무 탈 없이 잘 보존되고 있다는 말이다. () 나라 허자(許孜)가 양친의 묘소 주위에 소나무 묘목을 심어 놓았는데, 사슴이 망쳐 놓은 것을 보고서 사슴이 어찌 유독 내 마음을 몰라 주는가.” 하고 탄식한 그 다음 날, 맹수에게 죽은 사슴의 시체가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진서(晉書)』 「효우전(孝友傳)許孜

 

송모옥(松毛屋)

소나무 가지로 지붕을 이은 집.

 

송무록촉(松無鹿觸)

() 나라 때 효자(孝子)인 허자(許孜)가 자기 어버이가 죽었을 때 친히 흙을 져다가 봉분을 짓고, 곁에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는데, 이때 마침 사슴이 와서 그 심어놓은 소나무를 뿔로 받아버렸으므로, 허자가 슬퍼하여 말하기를 사슴은 유독 생각할 줄을 모르느냐?”고 하였더니, 그 다음날 갑자기 그 사슴이 어느 맹수(猛獸)에게 잡혀 죽어 그 소나무 밑에 버려져 있었다는 고사에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卷八十八

 

송무백열(松茂栢悅)

소나무가 무성해지니 잣나무가 기뻐한다는 뜻으로, ‘친구의 잘 됨을 기뻐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송문(松門)

외롭고 쓸쓸한 규방(閨房)을 가리킨다. 백거이(白居易)의 시에 松門到曉月徘徊 柏城盡日風蕭瑟 松門柏城幽閉深 聞蟬聽燕感光陰이라는 구절이 있다. 백락천시집(白樂天詩集)4 陵園妾

 

송백(宋白)

송 태종(宋太宗) 때 문신으로 자는 태소(太素). 이방(李昉)과 함께 문원영화(文苑英華) 천여 권을 편찬하였다.

 

송백후조(松栢後彫)

송백(松柏)이 맨 뒤에 시든다.”이 말은 논어(論語)』 「자한(子罕)편에, “子曰 歲寒然後 知松栢之後彫也라 보인다.

 

송백후조장(松柏後凋章)

논어(論語)』 「자한(子罕)날씨가 추위진 뒤에야 비로소 송백이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歲寒然後 知松柏後凋].” 한 장을 말한다.

 

송백희(宋伯姬)

노 선공(魯宣公)의 딸로서 송 공공(宋恭公)에게 출가하였는데, 공공이 죽자 백희(伯姬)는 과부로 살았다. 경공(景公) 때에 이르러 백희의 집에서 밤에 불이 나니, 좌우에서 백희더러 불을 피하라고 말하자, 백희는 말하기를, ‘부인의 행동이 밤에는 당()을 내려가지 않는다.’ 하고, 드디어 불에 타서 죽었다.

 

송부(松府)

송경(松京) 즉 개성(開城)을 가리킨다. 송악산(松岳山) 밑에 있던 고려의 서울이란 뜻으로 조선조 때 불렸던 이름이다.

 

송부(宋賦)

전국시대(戰國時代) 초 나라 송옥(宋玉)의 사부(辭賦)로 고당부(高唐賦)를 말한다. 초 양왕(楚襄王)과 무산(巫山)의 선녀가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나눈 것을 노래하였다.

 

송부하시(宋賦何詩)

송옥(宋玉)의 부와 하손(何遜)의 시라는 뜻이다. 송옥은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사람인데 일설에는 굴원(屈原)의 제자라고 한다. 하손은 양() 나라 사람으로 시를 잘 지었다.

 

송비공개(松飛孔蓋)

공자가 길에서 정자(程子)를 만나 일산을 비스듬이 기울이고 이야기한 일이 있다. 여기서는 솔이 일산과 같다는 말이다.

 

송비홍(送飛鴻)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낸다는 뜻으로, 혜강(嵇康)의 형수재공 목입군증시(兄秀才公穆入軍贈詩)……눈으로는 돌아가는 기러기를 보내고 손으로는 오현금(五絃琴)을 탄다……[目送歸鴻 手揮五絃].” 하였다.

 

송산(松山)

중국 봉천(奉天) 금남현(錦南縣) 남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서쪽에 송산보(松山堡)가 있는데 여기서 명군과 청군이 싸워 청나라 군대가 이겼다. / 인용: 女史行(이규상)

 

송삼백(誦三百)

사신의 임무를 맡을 만한 자질을 갖추었다는 뜻이다. 공자가, “시경(詩經)삼백 편을 외우고서도 사신으로 나가 혼자서 처결하지 못하면 비록 많이 외운다 한들 어디에 쓰겠는가.” 하였다. 논어(論語)』 「자로(子路)

 

송서(送西)

서반(西班)으로 보냄. 본래 문관(文官)인 사람에게 무관(武官)인 중추부(中樞府)나 오위(五衛)의 벼슬을 주는 것.

 

송설(松雪)

() 나라 때 명필 조맹부(趙孟頫)의 호이며, 그의 서체를 또한 송설체(松雪體)라 한다.

 

송설체(松雪體)

조맹부의 서체.

 

송섬(宋纖)

() 나라 때의 은사(隱士)로 일찍이 주군(州郡)의 부름에 전혀 응하지 않고 주천(酒泉)의 남산(南山)에 은거하면서 수천 명의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는데, 한번은 주천태수(酒泉太守) 마급(馬岌)이 그를 만나 보려고 찾아갔으나, 그가 굳이 거절하고 만나 주지 않으므로, 마급이 그를 사람 가운데 용(人中之龍)이라고 감탄하면서 시()를 지어 석벽(石壁)에 새기었으니, 그 시에 붉은 낭떠러지는 백길이요 푸른 절벽은 만길이나 되는데 기이한 수목들이 울창하여 등림처럼 무성하구나 옥 같은 사람이 여기에 있으니 오직 나라의 보배인데 집은 가까우나 사람이 머니 실로 내 마음을 애타게 하네[丹崖百丈 靑壁萬尋 奇木蓊鬱 蔚若鄧林 其人如玉 維國之琛 室邇人遐 實勞我心].”라고 하였다. 진서(晋書)卷九十四

 

송성구(宋聖求)

성구는 송상인(宋象仁)의 자(),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장렬히 전사한 송상현(宋象賢)의 아우이다.

 

송송(悚悚)

두려워하는 모양

 

송송(㩳㩳)잡는 모양

 

송시삼백(誦詩三百)

외국에 사신으로 나가 혼자서 임무를 훌륭히 수행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 삼백 편을 외우되, 사방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이 왼들 무엇하리오.” 한 데서 온 말인데, 시경(詩經)에 밝은 사람은 사리에 통달하여 말을 잘할 수 있기 때문에 이른 말이다. 논어(論語)』 「자로(子路)

 

송시전대(誦詩專對)

전대는 외국에 사신 가서 단독으로 응대하여 군명(君命)을 완수하는 것을 이른 말로, 공자(孔子)가 이르기를 시 삼백 편을 외우고도 정사를 맡기면 해내지 못하고, 사방에 사신 가서 전대하지 못한다면 비록 많이 외더라도 어디에 쓰겠는가[誦詩三百 援之以政 不達 使於四方 不能專對 雖多亦奚以爲].” 한 데서 온 말이다. 논어(論語)』 「자로(子路)

 

송악(松岳)

개성(開城)의 별칭이다.

 

송양지인(宋襄之仁)

()나라 양공(襄公)의 인정. 자신의 처지를 모르고 부질없이 베푸는 인정. , 쓸데없는 인정을 베풀었다.

 

송연(松煙)

소나무를 태운 그을음. 먹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송옥(宋玉)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의 시인으로, 그의 스승 굴원(屈原)의 신세를 애달프게 여겨 구변(九辯)초혼(招魂)을 지었으며, 이 밖에 풍부(風賦)고당부(高唐賦)신녀부(神女賦)등도자호색부(登徒子好色賦)등을 지었다.

 

송옥부웅풍(宋玉賦雄風)

송옥은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굴원(屈原)의 제자로서, 그가 일찍이 초 양왕(楚襄王)의 교사(驕奢)함을 염려하여 풍부(風賦)를 지어서 임금을 풍간하였는데, 그 풍부에 맑고 시원하여 이목(耳目)을 발명시키는 것이 바로 대왕(大王)의 웅풍(雄風)이다.” 하였다.

 

송옥비곤(宋玉悲鵾)

송옥은 전국시대(戰國時代) 때 초() 나라의 문장가로 그의 초사(楚辭)구변(九辨)곤계(鵾鷄)가 슬피 운다.” 하였다.

 

송옥비사(宋玉悲辭)

송옥은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사람으로 굴원(屈原)의 제자인데, 굴원이 추방당함을 민망스럽게 여겨 구변(九辯)를 지어 자기 선생의 뜻을 대신 나타냈다.

 

송옥시(宋玉詩)

송옥이 대언부(大言賦)와 소언부(小言賦)를 지었는데, 대언부는 천지간에 가장 큰 것을 읊었고, 소언부는 천지간에 가장 작은 것을 읊었다.

 

송옥이생비(宋玉易生悲)

송옥(宋玉)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 사람으로 굴원(屈原)의 제자이다. 굴원의 방축(放逐)을 슬퍼하며 지은 그의 유명한 시 구변(九辨)’悲哉 秋之爲氣也로 시작하여 쓸쓸한 가을 풍경을 묘사하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다. 초사(楚辭)6

 

송옥추(宋玉秋)

처량한 가을빛을 보고 인생살이가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전국시대(戰國時代) () 나라의 시인인 송옥이 굴원(屈原)의 일을 슬퍼하면서 지은 구변(九辯), “슬프구나 가을의 기운됨이여, 소슬해라 초목이 떨어져서 쇠하누나.” 하였다.

 

송운(松雲)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승병장 유정(惟政)의 호이다. 선조(宣祖) 37(1604) 국서(國書)를 지니고 일본에 건너가 강화(講和)를 맺고 우리나라 포로 35백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송원(宋遠)

시경(詩經), “누가 송 나라 멀다더냐, 한 돛대로 건너가리.” 하는 구절이 있다.

 

송위일주관(松爲一柱觀)

()은 집을 말한 것으로, 분재(盆栽)해 놓은 소나무가 마치 한 기둥으로 된 누각 같음을 의미한 말이다.

 

송일고(宋一股)

대사간 송순(宋諄)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아비를 버리고 도망갔다가 돌아와 보니 아비가 실종되어 없자 불에 타다 남은 다리뼈 하나를 찾아서 아비의 다리라고 표통(表筒)에 담아서 장사를 치렀는데, 당시 사람들이 송일고또는 표통영장(表筒永葬)’이라고도 하였다 한다.

 

송자(宋子)

임진왜란(壬辰倭亂) 초기에 동래 부사로 장렬히 순국한 송상현(宋象賢)을 가리킨다.

 

송자애(宋子哀)

춘추시대(春秋時代) () 나라의 경()인 고애(高哀)를 가리킨다. 고애는 송공(宋公)을 의롭지 못하다고 여기어 송 나라를 떠나 노() 나라로 망명해 왔는데, 춘추(春秋)에서는 그의 망명을 옳게 여겼다. 좌박(左博)文公十四年

 

송적팔경도(宋迪八景圖)

() 나라 화가(畵家) 송적(宋迪)이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를 그렸다.

 

송정(松政)

예전에, 나라에서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금하는 일을 하는 정치를 말한다. / 인용: 僧拔松行(황상)

 

송정백(宋定伯)

남양(南陽)의 송정백이 밤길을 가다 귀신을 만났는데, 자신도 귀신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몇 리를 함께 간 후, 귀신은 걷기가 너무 피곤하니 교대로 업고 가자고 건의한다. 귀신이 정백을 업고 가더니 너무 무겁다고 여기며 정백의 신분을 의심하자, 그는 나는 방금 죽어서 무거울 따름이요.”라고 해명하며 교묘하게 속인다. 강을 건널 때, 귀신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송정백 쪽은 물소리가 찰랑찰랑하고 울려 거듭 귀신의 의심을 샀다. 송정백은 다시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강을 건너는 것이 습관이 되지 않았다.”라고 하며 속인다. 송정백은 길에서 귀신과 한담할 때, 대화 가운데서 귀신이 사람의 침을 무서워한다는 약점을 알아낸다. 완시에 곧 도착할 즈음, 송정백이 귀신을 높이 들어 올리자 귀신은 질겁하여 소리를 질렀지만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완시에 도착하여 귀신을 땅에 내던졌다. 귀신은 양으로 변하였고, 이에 송정백은 침을 뱉어 양이 다시 변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귀신을 팔아 1,500냥을 얻었다.

 

송조(宋朝)

춘추시대(春秋時代) 때 미남으로 이름난 송 나라 공자 조(公子朝)인데, ()나라에 벼슬하여 대부(大夫)를 지내면서 위 나라 영공(靈公)의 부인인 남자(南子)와 간통하였다.

 

송주(送酒)

도연명(陶淵明)중양절(重陽節)에 마실 술도 없이 무료한 가운데 국화꽃을 따며 시름을 달래고 있을 때, 자사(刺史)인 왕홍(王弘)이 백의사자(白衣使者)를 보내 술을 전달케 했던 고사가 전한다. 속진양추(續晉陽秋)

 

송죽지절(松竹之節)

소나무ㆍ대나무와 같이 변하지 않는 절개.

 

송창계(宋窓鷄)

() 나라 때 연주자사(兗州刺史) 송처종(宋處宗)이 일찍이 닭 한 마리를 사다가 매우 사랑하여 길렀다. 닭장을 창 앞에 놓아두었더니 한번은 닭이 사람의 말을 하므로 송처종이 그와 함께 종일토록 현어(玄語)를 담론하였던 바, 이로 말미암아 그는 현도(玄道)에 크게 통했다고 한다.

 

송천(松川)

양응정(梁應井)의 호로서 자는 공섭(公燮).

 

송추(松楸)

소나무와 가래나무로, 이를 묘역(墓域)에 많이 심는다 하여 선대 무덤의 별칭으로 쓰인다.

 

송추만목배근원(松楸滿目培根遠)

높은 덕을 쌓은 선조(先祖)들의 후광을 듬뿍 받고 뿌리가 굳건하게 자라나리라는 말이다. 송추(松楸)는 선영(先塋)의 나무들을 말한다.

 

송추비구(誦箒比丘)

석가여래의 제자에 주리반특가(周利盤特迦)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머리가 매우 둔하여 잊기를 잘하였다. 한번은 여래가 그에게 모든 것을 잊어야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는 뜻으로 빗자루로 쓸어버리라라는 말을 가르쳐주고 이것을 외게 하였으나 그는 빗자루가 생각나면 뒷 부분인 쓸어 버리라는 말이 잊혀지고, 뒷부분이 생각나면 다시 앞부분이 잊혀졌다. 이 때문에 송추 비구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부처는 하도 딱하여 다시 그에게 안거(安居)를 가르쳐 선() 공부를 시켰더니, 그는 마침내 도()를 통하여 훌륭한 제자가 되었다 한다. 능엄경(楞嚴經)卷五

 

송파(松坡)

조선 명종 때 문신 이중계(李重繼)의 호이다. 자는 술부(述夫). 광해군 때 호조 정랑(戶曹正郞)으로 춘추관 기주관(春秋舘記注官)을 겸임하였고,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서궁에 유폐되자 이를 탄핵하다 삭탈 관직을 당했다. 선조실록(宣朝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송풍입정(松風入鼎)

차를 끓이는 법에 끓는 소리가 솔바람(松風)처럼 세게 하라는 말이 있다.

 

송한갈도(松閒喝道)

갈도는 귀인이 출입할 때에 사람 비키라고 벽제(辟除)하는 호령이다. 당나라 이상은(李商隱)이 몇 가지 살풍경(殺風景)을 말한 한 가지에 송간갈도(松間喝道)가 들었다.

 

송현우상설(松縣憂霜雪)

송백(松柏)은 원래 서리와 눈에도 끄덕 없으니 걱정할 것이 없는데도 걱정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송화(頌花)

신년 축사(新年祝詞)를 말한다. 유진(劉臻)의 아내 진씨(陳氏)가 총명하고 글을 잘 지었는데, 일찍이 정월 초하룻날에 초화송(椒花頌)을 지어 올린 데서 온 말이다. 진서(晉書)』 「열녀전(列女傳)

 

송화양(宋華陽)

송시열(宋時烈)을 말한다. 송시열이 충북 괴산(槐山)의 화양동(華陽洞)에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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