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요로원(要路院)의 두 선비②
‘서울 것’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감쪽같이 속았던 자신이 부끄럽고, 깜찍하게 속였던 ‘시골내기’가 맹랑했다. 이에 본격적으로 서울 것과 시골내기는 시 짓기 시합을 벌이는데, 여기에 동원된 시체(詩體)라는 것이 앞서 소개한 바 있던 잡체시들이다. 인명(人名)을 넣어 짓는 인명시(人名詩)로 겨루고, 연구(聯句)로 주거니 받거니 시합하고, 다시 육언(六言)으로 실갱이를 하다가, 종내 3ㆍ5ㆍ7(言)의 층시(層詩)로 옮겨 가고, 약명체(藥名體)로 승부를 결하였다. 서울 것은 시골내기에게 끝내 한 번도 이기지 못하고 참패를 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이번엔 거꾸로 시골내기가 오행시(五行詩)로 겨룰 것을 제안하고 나섰다. 짓는 방법은 첫 구 첫 자에 ‘목(木)’자를 넣고, 끝 자에는 ‘토(土)’로 맺으며, 둘째 구 첫 자는 ‘수(水)’자로 열어 끝 자는 ‘화(火)’자로 닫으며, 그 가운데에 ‘금(金)’자를 넣어 오행(五行)의 구색을 갖추는 것이다. 시골내기가 먼저 운을 뗀다.
萍蹤何處至 花月滿虛堂 | 부평 같은 자취 어드메서 이르렀나 꽃 달만 빈 집에 가득하도다. |
두 구절의 첫 자 ‘평(萍)’과 ‘화(花)’는 머리에 ‘초(艸)’를 얻었으니, ‘목(木)’에 속하고, ‘지(至)’와 ‘당(堂)’은 파자(破字)하여 아래 반을 취하면 ‘토(土)’가 된다. 그러자 서울 것이 한참을 끙끙대다가, 겨우 한 구절을 잇고 4구를 마저 채우지 못한 채 손을 들고 말았다.
流影金樽照 | 흐르는 그림자 금술잔에 어리니 |
‘류(流)’는 ‘수(水)’에 속하고 ‘조(照)’는 ‘화(火)’로 받쳐져, 그 가운데 ‘금金’을 얹어 오행을 갖추었다. 하지만 4구가 빠졌으니 시 짓기 시합은 끝나지 않았다. 그가 한 구절을 마저 잇지 못하자 시골내기가 다음 한 구절로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瀅然飮白光 | 맑게 흰 빛을 마시는 도다. |
‘형(瀅)’에 ‘수’가 들어 있고, ‘광(光)’은 ‘화’에서 나온다. ‘음(飮)’은 요령부득인데, 가만히 보니 음운이 ‘금(金)’에 속한다. 기상천외의 재치로 시골내기가 서울 것에게 압승을 확정짓는 순간이었다.
「요로원야화기」는 단순하게는 갖은 시체(詩體)를 놓고 두 선비가 각축을 벌인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거들먹거리는 서울 것을 KO시킬 만큼의 시재(詩才)를 지녔으면서도 정작 시골내기는 청운(靑雲)의 벼슬길에 명함 한 번 내밀어 보지 못했고, 전전하는 여관마다 천덕꾸러기 신세였을 뿐이었다. 모처럼 서울 것 하나가 제대로 걸려 분풀이는 했지만, 뒷맛은 언제나 씁쓸하다.
인용
3. 눈물이 석 줄①
4. 눈물이 석 줄②
5. 김삿갓은 없다①
6. 김삿갓은 없다②
7. 김삿갓은 없다③
12. 한시(漢詩) 최후의 광경①
13. 한시(漢詩) 최후의 광경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