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슬픈 웃음, 해체(解體)의 시학(詩學)③
『도시시와 해체시』라는 책에서 이러한 시엔 “풍자정신 앞에 신성한 것, 숭고한 것, 초월적인 것은 아무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생각해 보았는가’하는 세계에 대한 지적 반응이다. 지적 반응은 희극적 태도다. 희극적 태도는 한마디로 세상을 ‘우습게’ 보는 태도.(p.21)”가 담겨 있다고 말하고 있다. 우스운 것 앞에서 뜻밖에 진지해지고, 진지한 것을 단번에 희화화해버리는 시인의 희극적 태도는 한마디로 세상을 우습게 보는 태도에서 출발한다.
書堂乃早知 房中皆尊物 | 서당을 진작부터 알고 있나니 방 가운덴 모두 다 존귀한 물건뿐. |
生徒諸未十 先生來不謁 | 생도는 모두 열 살도 안 되어 선생이 와도 인사할 줄 모른다. |
김삿갓이 고약한 시골 훈장을 기롱한 시로 전한다. 겉보기에는 심상한 시골 서당의 풍경을 노래한 듯하지만 각 구절 뒤의 세 글자를 독음으로 읽으면 흉측한 욕설이 된다. 다섯 글자로 시 흉내만 낸 것이지 정말 고약한 장난이다. 김삿갓의 세상을 향한 비뚤어진 욕설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僧首團團汗馬閬 | 동글동글 중 머리통 땀 난 말 불알 같고 |
儒頭尖尖坐狗腎 | 뾰족한 선비 대가리는 앉은 개 좆 같구나. |
聲令銅鈴零銅鼎 | 목소리는 구리방울로 구리 솥을 치는 듯 |
目若黑椒落白粥 | 눈깔은 검은 후추 흰 죽에 떨어진듯. |
아마도 변성기를 거치지 않은 듯 쨍알쨍알 하는 목소리의 중과, 어디 박혔는지 한참 찾아야 할 지경으로 눈이 작은 선비가 합세해서 김삿갓을 구박했던 모양이다. 위 시는 이때 김삿갓의 반격으로 전해지는데, 승속(僧俗)을 불문하고 무차별 공격을 감행하는 형국이다. 경박하기 그지없고, 언어에 대한 일말의 애정도 찾아 볼 수 없다. 이게 무슨 시인가?
시인은 현실의 온갖 추악한 모습을 비정하게 들추어낼 뿐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 -147쪽
해체시에서 세계는 온갖 추악과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해체주의 시인들은 절대적 진리도 선도 가치도 믿지 않는다. 김병익의 기술을 빌리면 그들에게 ‘믿을 수 있는 것, 전할 수 있는 것,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욕설과 요설의 비틀린 언어는 이런 허무주의적 공허의식의 산물이다. -152쪽
일찍이 홍기문(洪起文, 1903~1992)은 김삿갓의 시를 두고 비천한 재담이지 시가 아니라고 혹평한 바 있고, 근세의 한학자 여규형(呂圭亨, 1848~1921)은 이런 시풍이 유행하여 정통의 한시가 타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이 소문이 이웃나라에 알려질까봐 걱정이라는 시를 남기기까지 했다.
풍자 일변도는 비가적(悲歌的) 세계관으로 연결된다. 매우 역설적이지만 비가적 세계관은 불만을 삶의 완벽한 기교로 채용한다. 그래서 비가적 시인에게는 계속 짖어야 될 부정의 세계를 언제나 필요로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존재 근거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세계가 바뀌면 그 바뀐 세계의 불만의 요소를 또 발견해야 한다. 비가적 세계관은 상황의 거대함과 자아의 왜소함 사이의 그 엄청난 불균형을 과장한다. 그것은 넋두리와 하소연의 무기력한 어조를 띤다. -21쪽
대체로 김삿갓의 장난시를 대할 때마다 필자가 느끼게 되는 감정은 서글픔과 씁쓸함이다. 경국제세(經國濟世)에의 포부를 품고 배우고 익힌 학문과 지식을 고작 이깟 희학질에 썼더란 말인가? 그인들 이런 시를 짓고 싶었으랴만, 그로 하여금 이런 장난질에 몰두하게끔 강요한 현실이 역으로 희대의 민중시인을 낳았다는 이 역사의 아이러니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의 시에서 이나 벼룩, 욕설과 섹스 등 비시적 대상의 시화가 지배적 특징으로 나타나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비록 김삿갓의 경우 조부의 훼절에 말미암은 개인적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는 하나, 김삿갓의 시정신은 당대 조선사회가 처했던 제반 역사 환경의 변모에 의해 안받침 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사회적 성격을 부여받고 있다. 시는 그 사회를 비추는 거울인 까닭이다.
인용
3. 눈물이 석 줄①
4. 눈물이 석 줄②
5. 김삿갓은 없다①
6. 김삿갓은 없다②
7. 김삿갓은 없다③
12. 한시(漢詩) 최후의 광경①
13. 한시(漢詩) 최후의 광경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