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유의 한계에서만 타자를 경험할 수 있다
장자철학의 고유성은 바로 자신의 철학체계에 타자를 도입했다는 데 있다. 타자는 사유라는 사변적 공간에서가 아니라 항상 삶이라는 실천적 공간에서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타자가 사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타자는 내가 ‘그것은 이러저러할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이 좌절될 때, 즉 사유가 스스로 부적절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경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사실 타자는 우리의 사유를 발생시키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타자와 직면하는 오직 그 경우에만 ‘그것은 이러저러할 거야’라고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으로 이 말은 타자란 항상 사유의 한계에서만 경험될 수 있는 어떤 것임을 말해준다. 사유라는 더듬이로 이리저리 더듬어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또 이것과 어떻게 관계해야 할지 모르는 그 지점이 바로 ‘타자’를 경험하는 지점이다. 결론적으로 삶의 공간에서는 분명히 조우하고 있지만 사유의 공간에서는 좌절을 경험하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타자다.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항상 사유하고 있는가?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할 때, 그리고 밥을 먹을 때, 직장에 가기 위해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갈 때, 친구를 만나서 인사를 할 때, 작별의 인사를 할 때, 우리는 사유하고 있는가? 이런 친숙한 세계에서 사유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 경우 사유는, 자신이 영위하는 삶의 규칙과 너무나 밀접하게 결합되어 자신의 고유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무사유에 가깝다. 그러나 이런 친숙한 세계에 타자가 도래하면, 우리의 사유는 그때서야 비로소 사유로서 깨어나게 된다. 이처럼 타자는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친숙하고 편안한 세계에 낯섦과 불편함을 가지고 오는 무엇이다. 따라서 그것은 규칙적이고 편안한 삶을 불규칙적이고 불편한 삶으로 변화시킨다. 아마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갑자기 다가오는 사랑일 것이다. 집으로부터 회사로 가는 도중,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정지한 것처럼 모든 관심이 그 사람에게 몰입된다. 우리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혹은 왜 여기에 서 있는지조차 생각할 수 없이 그 사람에게 몰입하게 된다. 한 마디로 나는 나를 잊게 된다.
이런 강렬한 첫 만남에서 우리는 분명 그 사람을 만나고 있지만,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혹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가 없다. 사유가 사유로 깨어난다는 것은 이처럼 ‘도대체 알 수가 없다’는 한탄으로부터 시작된다. 역설적이게도 사유는 모르겠다는 경험에서 가장 사유다울 수 있다. 다시 말해 사유는 답을 알 수 없는 것에 답을 모색하는 경험에서만 본래적인 사유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위의 사례로 다시 돌아가 보자. 나는 한 눈에 그(혹은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일까? 우리는 쉽게 자신이 지금 조우하고 있는 타자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사실 모르겠다는 한탄의 진정한 의미는 타자라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타자를 모르겠다는 나의 판단은, 내가 지금 자신의 삶이 얼마나 제약된 것이며 따라서 유한한 것이었는지를 무의식적으로 반성하고 있다는 것과 동시적인 사태다.
▲ [운영전]에서 운영이 김진사에게 반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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