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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I. 들어가는 말 본문

고전/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I. 들어가는 말

건방진방랑자 2021. 6. 30.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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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장자를 읽는 이유와 그 의미

 

 

1. 고전과 조우하여 전혀 다르게 생성되기 위해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책만큼 시간과 생성이라는 주제를 우리에게 시사하는 것은 없다. 지금 내 앞에 방금 서점에서 구입한 책이 있다고 해보자. 이 책은 우리에게는 미래의 시간이자, 나를 이러저러하게 다르게 생성시킬 수 있는 잠재성이다. 이 책의 20페이지를 읽고 있다고 하자. 그러면 우리에게는 이 책을 통해서 이미 읽은 19페이지들이라는 과거와 지금 펼쳐져 있는 20페이지의 현재,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그 많은 미래가 생성된다. 그러나 사실 이미 읽었다는 이 19페이지들도 흘러간 과거라기보다는 어느 때이든 미래로 생성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당장이라도 다시 읽었던 앞 페이지들도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의 책이 열어 주는 다층적인 시간 속에서 자라왔고, 또 자라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자라날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책이 이런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책들은 그저 한 장 한 장 넘겨지고는 끝내 잊혀지게 되는 운명에 빠져 있다. 이렇게 책에는 다시 넘겨지는 책이 있는가 하면 한 번 넘겨지면 잊혀져 버리고 마는 책이 있다. 우리는 자신이 매번 넘기고 다시 넘기는 책, 나아가 세대를 거쳐서 다시 또 넘겨지는 책을 고전(古典)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고전은 덧없는 세상에서 영원성을 획보한 행복한 책이다.

 

고전의 이런 힘은 어머니의 품과도 같이 여러 세대를 걸쳐서 우리들을 다르게 생성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 우리는 고전을 통해 다르게 변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가 다르게 변함에 따라 고전의 의미도 다르게 변하게 된다. 어릴 적에 읽었던, 그래서 자신을 이전과는 다르게 변화시켰던 동일한 고전을 어느 날 문득 낡은 책장에서 꺼내 읽는 순간, 우리는 그 고전에서 전혀 다른 새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 새로움의 의미를 되물으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변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 어린 시절에 읽었던 의미와 지금 나이 들어 읽고 있는 의미 중 어느 것이 옳은가? 나아가 앞 세대가 읽었던 의미와 지금 세대가 읽고 있는 의미 중 어느 것이 옳은가? 그러나 이런 질문은 잘못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고전을 통해 매번 다르게 생성될 것이고, 또 그렇게 생성될 때마다 고전은 우리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의미라는 것 자체가 아주 때늦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무나 사랑해서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았던 사람이 죽었을 때, 우리는 그 사람과 함께 만들었던 모든 사건들에 대해 아름다운 의미를 사후에 부여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어떤 고전에 대해 그것의 의미를 알았다고 말할 때, 이것은 그 고전과 헤어진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의미는 항상 결별의 절차와 동시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고전은 영원히 늙지 않는 여인이 기다리는 주막집처럼 항상 결별의 장소다. 우리는 고전으로 매번 돌아갈 수 있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매번 다르게 생성되어 떠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장자라는 고전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별하기 위한 만남이 될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장자라는 책의 의미는 우리의 앞 세대들 혹은 그 이전의 사람들이 부여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만의 장자로부터의 결별 의식이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만의 결별 의식을 수행해야만 한다. 오직 이런 결별 의식을 통해서만 우리는 자신이 어떻게 생성되었고, 또 그만큼 장자의 의미가 어떻게 변형되었는지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장자라는 고전과 조우해서 우리는 전혀 다르게 생성되어야만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쓸데없이 시간 낭비를 하는 셈이 된다.

 

 

 

 

 

2. community가 아닌 society에 살려 했던 사람

 

 

21세기 한국에 살고 있는 우리가 중국이라는 다른 공동체의 전통에 속하는 사상가, 그것도 2000여 년 전에 살았던 장자를 다루려고 하는 것일까? 장자가 성인(聖人)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중국 철학사에서 공인된 그의 중요성 때문인가? 한 마디로 왜 지금 우리는 장자와 대화해야만 하는가? 그것은 장자의 삶과 그의 사상이 주는 고유성 때문이다.

 

우리가 쉽게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장자가 중국이란 하나의 통일된 공동체에 속하지 않았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단지 회고적으로(retrospectively) 재구성될 경우에만 그는 중국이라는 단일 공동체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사실 그는 많은 나라들과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복수적인 차이의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이 활동했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다양성과 차이를 상징하는 시대였다. 단지 통일된 공동체라는 이념과 시선 속에서만 이 시대는 혼란의 시대로 보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기 동안 인간의 삶과 사상이 가장 자유로웠을 뿐만 아니라 생동하고 있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제자백가라고 불렸던 당시 지식인들은 공동체와 공동체 사이에서 살았던 사람들이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의 말(탐구)을 빌리자면, 이 시기 동안 모든 사람들에게는 공동체(community)가 아닌 사회(society)에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사회란 단일한 규칙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의미하기보다는, 타자와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인간이 어떤 이유에서든 공동체를 계속 지향하고 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떤 통일된 질서와 중심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잡고 싶어한다. 이 말은 우리가 이런 통일된 질서와 중심에 저항하는 타자를 동화시키려 하거나 아니면 배척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타자에 대한 억압은 기본적으로 자신에게 존재의미와 이유를 부여하는 통일된 질서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일 수밖에 없다. 결국 공동체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아울러 타자도 통일된 질서와 중심에 복종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는 점에서,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기를 결단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사회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타자를 긍정하며, 따라서 자신을 긍정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통일된 질서란 자신과 타자의 삶을 위해서 마련된 것이지, 결코 그 자체로 숭고한 목적을 지닌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는 공동체냐 아니면 사회냐는 갈림길에 서 있다. 하트(Michael Hardt)와 네그리(Antonio Negri)의 지적(제국)이 옳다면 우리는 지금 전세계적 규모에서의 자본주의 공동체의 탄생, 즉 제국(帝國) 탄생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 우리가 장자의 사상을 다루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장자가 2000여 년 전 송()이라는 작은 나라 속에서 사회(society)를 살았던 것처럼, 우리도 지금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 속에서 사회를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역사가 사태들과 사건들의 반복이 아니라, 구조의 반복이라는 교훈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장자는 정치철학자라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다. 이것은 그가 직접적이고 전면적으로 타자를 긍정하는 사회를 이론적으로 모색한 사람은 아니었다는 것을 말한다. 다만 그의 철학이 지닌 궁극적 귀결이 사회의 이론적 기초를 모색하는 데 이르게 된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장자는 타자와의 소통[]을 직접적으로 문제삼고 있고,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을 사유하였으며, 나아가 이런 소통을 몸소 실천하려고 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공동체(community) 통일된 질서, 맹목적 복종 타자의 자기화
사회(society) 질서는 숭고한 목적은 아님 타자 인정

 

 

 

 

 

3. 사유의 한계에서만 타자를 경험할 수 있다

 

 

장자철학의 고유성은 바로 자신의 철학체계에 타자를 도입했다는 데 있다. 타자는 사유라는 사변적 공간에서가 아니라 항상 삶이라는 실천적 공간에서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해서 타자가 사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타자는 내가 그것은 이러저러할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이 좌절될 때, 즉 사유가 스스로 부적절함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 경험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사실 타자는 우리의 사유를 발생시키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타자와 직면하는 오직 그 경우에만 그것은 이러저러할 거야라고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역으로 이 말은 타자란 항상 사유의 한계에서만 경험될 수 있는 어떤 것임을 말해준다. 사유라는 더듬이로 이리저리 더듬어도 도대체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또 이것과 어떻게 관계해야 할지 모르는 그 지점이 바로 타자를 경험하는 지점이다. 결론적으로 삶의 공간에서는 분명히 조우하고 있지만 사유의 공간에서는 좌절을 경험하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 타자다.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져보자. 우리는 항상 사유하고 있는가? 아침에 일어나서 세수를 할 때, 그리고 밥을 먹을 때, 직장에 가기 위해서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갈 때, 친구를 만나서 인사를 할 때, 작별의 인사를 할 때, 우리는 사유하고 있는가? 이런 친숙한 세계에서 사유는 작동하지 않는다. 이 경우 사유는, 자신이 영위하는 삶의 규칙과 너무나 밀접하게 결합되어 자신의 고유성을 상실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히려 무사유에 가깝다. 그러나 이런 친숙한 세계에 타자가 도래하면, 우리의 사유는 그때서야 비로소 사유로서 깨어나게 된다. 이처럼 타자는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는 친숙하고 편안한 세계에 낯섦과 불편함을 가지고 오는 무엇이다. 따라서 그것은 규칙적이고 편안한 삶을 불규칙적이고 불편한 삶으로 변화시킨다. 아마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갑자기 다가오는 사랑일 것이다. 집으로부터 회사로 가는 도중, 우리는 어떤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갑자기 세상이 정지한 것처럼 모든 관심이 그 사람에게 몰입된다. 우리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혹은 왜 여기에 서 있는지조차 생각할 수 없이 그 사람에게 몰입하게 된다. 한 마디로 나는 나를 잊게 된다.

 

이런 강렬한 첫 만남에서 우리는 분명 그 사람을 만나고 있지만,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혹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알 수가 없다. 사유가 사유로 깨어난다는 것은 이처럼 도대체 알 수가 없다는 한탄으로부터 시작된다. 역설적이게도 사유는 모르겠다는 경험에서 가장 사유다울 수 있다. 다시 말해 사유는 답을 알 수 없는 것에 답을 모색하는 경험에서만 본래적인 사유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위의 사례로 다시 돌아가 보자. 나는 한 눈에 그(혹은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일까? 우리는 쉽게 자신이 지금 조우하고 있는 타자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사태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사실 모르겠다는 한탄의 진정한 의미는 타자라기보다는 자신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타자를 모르겠다는 나의 판단은, 내가 지금 자신의 삶이 얼마나 제약된 것이며 따라서 유한한 것이었는지를 무의식적으로 반성하고 있다는 것과 동시적인 사태다.

 

 

[운영전]에서 운영이 김진사에게 반하는 장면

 

 

 

4. 차이를 통할 때만 새로운 나로 생성된다

 

 

어떤 사람을 새롭게 만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사전에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언젠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점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그 사람과 자주 만났기 때문에 그 사람의 외적인 행동과 그 사람의 내면 사이의 연관관계를 파악하게 된 것일까? 그러나 타자를 알게 되는 진정한 이유는 내가 이미 그 사람과 삶의 수준에서 조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우한 타자에 맞추어 무의식적인 삶의 수준에서 자신을 조절하게 된다. 그래서 첫 만남의 설레임 속에서 가능했던 (혹은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다경험은 아주 오래된 부부처럼 얼굴만 보아도 상대방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는 경험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겠다경험으로부터 얼굴만 보아도 알게 되는 경험으로의 이행, 불편함과 낯섦의 경험으로부터 편안함과 친숙함의 경험으로의 이행이 함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두 경우의 나는 전혀 이질적인 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타자와 조우하기 이전의 나는 타자와 조우한 후 그 타자에 맞게 조절된 나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결국 나는 항상 타자와의 조우와 그로부터 유래한 소통의 결과이지 흔적일 뿐이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타자와의 소통이 아니겠는가? 타자와 조우할 때에만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할 수 있고, 또 앞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나로 생성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타자와 조우하지도, 따라서 소통하지도 못하는 나는 사실 전혀 나로서 의식될 수도 없다. 그저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갈 것이며, 어제 했던 일을 다시 하고는 지쳐서 집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마치 프로그램된 로봇처럼 말이다.

 

이처럼 타자를 도입하게 되면 우리의 사유와 삶은 완전히 다르게 이해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제 내가 중심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가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내가 타자와 조우해서 생기게 된 차이가 중심이 된다고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차이는 불편함과 낯섦이 체험되는 삶의 공간으로부터 경험되는 것이다. 차이는, 나로 하여금 불편함에서 편함으로 혹은 낯섦에서 친숙함으로 이행하게끔 강제한다는 점에서, 발생론적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차이를 통해서 기존의 동일성을 버리고 새로운 동일성을 확보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나로 생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생성이라는 개념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이 개념이 필연적으로 차이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생성ㆍ동일성ㆍ사유ㆍ삶 등의 철학적인 핵심 범주들은 타자와 그 타자와의 차이가 전제되어야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타자와의 소통을 사유했으며 실천하고자 했던 장자의 철학이 현재에도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중국 철학 전통에서 거의 유일하게 동일성보다는 차이라는 이념에 서 있었던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영화 [자산어보]의 장면. 창대는 차이가 있는 존재 정약전을 만나 다른 존재로 변했다. 

 

 

 

5. 우화로 글을 쓴 이유

 

 

삶의 과정에서 우리는 항상 타자와 조우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신이 아니라 유한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자와 조우할 때, 우리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남아 있다. 그 하나는 차이보다 동일성을 긍정하는 경우다. 우리는 조우한 타자로부터 발생하는 차이를 억압하고 지배하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타자를 삶의 짝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장자처럼 동일성보다 차이를 긍정하는 경우다. 이것은 우리가 타자를 삶의 짝으로 긍정하고 타자에 맞게 자신의 동일성을 새롭게 구성하는 경우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자라는 고전도 상이한 두 가지 방식으로 독해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우리가 기존의 선입견, 예를 들면 장자는 문명을 비판하면서 대자연과의 화해를 주장했다든가, 아니면 장자는 예술적인 정신적 자유를 주장했다든가라는 선이해를 가지고 장자를 독해하는 방법이다. 사실 이와 같은 독해 방법은 장자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려는 자세이기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던 장자에 대한 이해를 확인하는 태도에 불과하다. 따라서 이런 식의 독해는 비록 장자를 읽었다고 할지라도 읽지 않은 것과 차이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우리가 권고하고 싶은 둘째 방법은 장자를 읽으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던 장자이해를 비우고 새로운 의미를 생성시키면서 독해하는 방법이다. 이런 독해 방법에 따르는 경우에만, 우리는 장자와 더불어 전혀 새로운 의미를 생성할 수 있을 것이다.

 

장자는 그 내용에서 뿐만 아니라 형식에서도 타자에 대한 민감한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이 책의 거의 대부분은 짧은 우화나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자유롭게 창공을 날아가는 대붕에 대한 이야기’, ‘소를 능숙하게 잡는 포정이라는 백정에 대한 이야기’, ‘원숭이와 원숭이 키우는 사람 사이에 진행되는 조삼모사에 대한 이야기등을 들 수 있다. 이처럼 장자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논문 형식이 아니라 재미있는 이야기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가장 깊이 있고 심오한 통찰력을 가진 장자가 자신의 사상을 이런 형식으로 전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그가 자신의 글을 읽고 있던 독자와 그 독자를 통해 생성되기를 바랬던 효과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글을 마치 아름다운 여인처럼 만들었다. 아름다운 여인과 만날 때, 우리는 그녀에게 매혹되고 그녀가 지금 원하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매혹적인 장자의 이야기들과 만나면, 우리는 이 이야기들에 빨려 들어가고 이것들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만약 장자가 논문 형식으로 어떤 것을 주장하였다면, 우리는 직접적으로 그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평가하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장자는 재미있는 우화나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평가로부터 전적으로 자유롭게 된다. 우리는 일단 그의 이야기들을 읽고 그 내용을 기억하게 된다. 우리들 중 어떤 사람들은 직접 장자가 우리에게 말하려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라도 삶을 살아가면서 ! 그래서 장자에서는 그런 이야기가 있었구나!’라고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이야기만큼 우리의 기억에 오래 남을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 있는 장자이해란 하나의 이념에 불과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장자를 읽기 전과 읽은 후 스스로 완전히 달라지게끔 독해해야 한다는 데 있다. 이것은 또한 장자가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고전은 영원히 살기 위해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독자를 필요로 하는 법이다. 고전이 하나의 고정된 의미 속에 박제가 되어갈 때, 고전은 죽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박제가 된 고전을 통해서 우리는 다르게 생성될 수 없는 법이다. 이 책은 박제가 된 장자를 다시 고전으로 살려내려는 의도에서 쓰여진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전으로서의 장자를 읽고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면서 장자로부터 떠나려고 쓰여진 것이기도 하다. 장자가 중국의 철학과 문화에 대해 지니는 위상을 고려한다면, 우리의 이런 작업은 중국적 정신이나 의식의 핵심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판이란 작업은 처음에는 외부로 향해지는 것 같지만 바로 그 다음에는 자신으로 향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장자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비판할 수 있는 새로운 자리를 취하게 될 것이다.

 

 

 

 

 

 

2. 장자라는 책의 구성과 편찬자

 

 

1. 장자가 남기고 싶었던 진정한 가르침

 

 

통행되는 장자의 판본은 곽상(郭象: 252~312)이 편집한 것으로, 33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33편은 내편, 외편, 그리고 잡편으로 묶여 있는데, 내편7, 외편15, 그리고 잡편11편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서기 1세기 경에 반고(班固)가 지은 한서(漢書)』 「예문지(藝文志)를 보면, 장자는 전체 52편으로 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사마천(司馬遷)사기(史記)』 「노장신한열전(老莊申韓列傳)에서 장자는 10여만 언을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통용되는 곽상의 판본에 따르면 장자64606자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곽상이 편집한 것은 사마천과 반고가 본 장자중 약 3분의 1 정도가 유실된 판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사실 이 52편의 고본은 위진(魏晉)시대에도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나라 사람 육덕명(陸德明)경전석문(經典)』 「서록(序錄)을 보면 한서』 「예문지장자52이란 사마표(司馬彪)와 맹씨(孟氏)가 주석을 붙인 것이 이것이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육덕명이 말한 맹씨가 누구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진서(晉書)를 보면 사마표는 진()의 비서랑(祕書郞)을 지낸 사람이다. 그렇다면 이미 위진시대에도 이 고본이 통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덕명은 이 고본에 대해 장자내편7, 외편28, 잡편14, 해설3편으로, 모두 52편이라고 말한다.

 

위진시대에는 이 고본 외에도 이 고본을 추린 선집본이 있었다. 그것이 바로 최선(崔譔)과 향수(向秀)가 주석을 붙인 27편으로 된 판본과 이이(李頤)가 주석을 붙인 30편으로 된 판본이다. 그렇다면 이런 위진시대의 다양한 장자판본을 기초로 해서 곽상은 지금 통용되는 33편의 장자를 자신의 주를 달아 완성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한서』 「예문지에 기록되어 있는 장자의 구성과 곽상이 편집한 장자에서는 모두 내편7편으로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라고는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경전석문에 따르면 최선의 판본도 내편7편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위진시대에도 내편7편은 거의 확정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결국 우리는 곽상이 비록 장자를 약 3분의 2로 줄였다고 할지라도, 그는 내편의 체제 자체는 거의 건드리지 않았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이런 우리의 추론은 내편외ㆍ잡편편명으로도 강화될 수 있다. 왜냐하면 내편7편의 제목(소요유, 제물론, 양생주등등)은 모두 전체 편의 요지라고 생각되는 세 글자로 이루어져 있는 반면, 외ㆍ잡편20편 대부분 천하, 지북유, 추수등등)은 각 편에서 시작되는 처음 몇 글자를 추려 편의 이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고본 장자가 편찬했던 내편이 곽상의 판본에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추정은 장자』 「내편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내편에 속한 일곱 편 가운데 제일 마지막 편이 응제왕(應帝王)이고, 이 편의 가장 마지막에 기록되어 있는 우화가 바로 유명한 혼돈(混沌) 이야기.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남쪽 바다의 임금을 숙()이라 하고, 북쪽 바다의 임금을 홀()이라 하였으며, 그 중앙의 임금을 혼돈이라고 하였다. 숙과 홀이 때때로 혼돈의 땅에서 만났는데, 혼돈은 그때마다 그들을 극진히 대접했다. 숙과 홀은 혼돈의 은덕을 갚을 길이 없을까 의논하면서 말했다. 사람에게는 모두 일곱 구멍이 있어, 보고, 듣고, 먹고, 숨쉬는데, 오직 혼돈에게만 이런 구멍이 없으니 구멍을 뚫어줍시다. 하루에 한 구멍씩 뚫어주었는데, 칠일이 지나자 혼돈은 죽고 말았다.

南海之帝爲儵北海之帝爲忽, 中央之帝爲渾沌. 儵與忽時相與遇於渾沌之地, 渾沌待之甚善. 儵與忽謀報渾沌之德, : “人皆有七竅以視聽食息此獨無有, 嘗試鑿之.” 日鑿一竅, 七日而渾沌死.

 

 

우리는 여기서 일곱 구멍[七竅]라는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외부와 연결되는 감각기관은 아홉 구명[九竅]으로 일컬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물론(齊物論)에서도 확인될 수 있는 사실이다. 전통적으로 아홉 구멍이란 눈구멍 둘, 귓구멍 둘, 콧구멍 둘, 입구멍 하나, 소변구멍 하나, 대변구멍 하나를 합쳐서 부르는 것으로, 인간이 세계와 관계하는 아홉 가지 감각적인 통로를 의미한다. 그런데 혼돈 이야기에서는 아홉 구멍이 아니라 일곱 구멍을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혼돈 이야기의 논점이 구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곱이라는 숫자에 있다고 보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만약 혼돈 이야기의 핵심이 감각기관을 상징하는 구멍에 있다는 전통적 해석이 옳다면, 이 이야기에서는 일곱 구멍이 아니라 아홉 구멍이라고 표기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곱 구멍이라는 표현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 그것은 지금까지 독자가 읽은 내편7편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보아야만 한다. 결론적으로 위의 우화는 장자 본인이 지은 것이라기보다는 장자를 최초로 편찬한 그의 후학들이 지은 것이라고 추정할 수가 있다.

 

장자의 최초의 편찬자들은 지금까지 독자가 읽은 내편7편의 내용을 독자들이 글자 그대로 맹신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그들의 경고에 따르면 우리는 내편7편을 읽은 후 장자 본인이 우리에게 남기고 싶었던 진정한 가르침, 혼돈이라고 상징되는 핵심 취지를 파악해야만 할 것이다

 

 

 

 

 

 

2. 황로학파가 고본 장자를 편찬했다

 

 

내편7편의 편명이 세 글자로 되어 있다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52편의 장자, 고본의 편찬자가 누구인지를 추론할 수 있다. 이것은 한대(漢代)의 위서(緯書)의 편명이 지닌 특징, 즉 세 글자로 편명이 구성된다는 특징과 일치하는 것이다. 결국 장자고본은 늦어도 기원전 2세기경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학자들은 이 고본의 편찬자들을 곽상 판본의 외ㆍ잡편중 천()으로 시작되는 편들인 천지(天地), 천도(天道), 천운(天運), 천하(天下)각의(刻意)를 지은 사람들로 추정하고 있고, 이들을 황로파(黃老派)라고 부른다.

 

황로(黃老)라는 표현은 황제(黃帝)와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당시 제자백가(諸子百家)들에게는 각각 자신의 사상이 전통적으로 심오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반대파의 사상가들이 존경하는 인물들보다 더 오래되고 권위적인 인물을 자신의 사상적 기원으로 선전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 예로는 공자(孔子)가 주공(周公)을 강조하자 묵가(墨家)는 주공보다 앞서서 살았던 우()임금을 강조했던 경우를 들 수 있다. 따라서 자신들의 사상적 기원으로 가장 오래된 전설적인 임금인 황제(黃帝)를 다룬다는 점에서, 황로파들은 시기적으로 가장 늦은 학파라고 할 수 있다.

 

공자(孔子) 묵가(墨家) 황로파(黃老派)
주공(周公) ()임금 황제(黃帝)
후대 학파일수록 더 오래된 사람을 강조함

 

 

황로파들의 사상적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그들은 인간의 자율적인 도덕함양을 강조하는 유가(儒家)와 인간의 행위를 법에 의해 강제하려는 법가(法家)를 절충하려고 하였다.

둘째, 그들은 천()이라는 범주를 도()나 덕()이라는 범주보다 더 강조한다. 그들은 하늘이 어떤 목적이나 이념을 실현하려고 움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특정 인간들을 위해서 운행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들어, 군주도 하늘처럼 사사로움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무위(無爲) 정치의 이념이다. 여기서 무위란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적으로 결정하고 행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들 황로파가 장자고본의 편찬자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장자의 마지막 편인 천하(天下)에 기술되어 있는 철학사의 특징에도 있다. 왜냐하면 천하(天下)에 등장하는 철학사는 기본적으로 황로사상이 지닌 절충주의적 시각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절충주의적 시각에 따라 유가 혹은 법가나 묵가를 사상적으로 거부하지 않았다. 나아가 노자나 장자마저도 이들 법가나 유가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고유한 학파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이 밖에도 이들 황로파가 고본 장자의 편찬자라는 것은 내편의 편명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우선 제물론(齊物論)이라는 편명에서 제물(齊物)이라는 표현은 내편 내의 편명일 뿐만 아니라, 천하(天下)에서 신도(愼到)를 평가할 때도 등장하는 개념이다. 여담이지만, 우리나라의 장자 연구자들은 관례적으로 첫 대면에서 심각한 얼굴로 다음과 같이 묻고는 한다. “제물론은 제물(齊物)의 논()‘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개별적인 논의[物論]를 가지런히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한 마디로 이런 식의 질문은 쓸데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사변적인 논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제물(齊物)이라는 개념 자체가 장자가 아닌 신도를 평가할 때 천하(天下)편에 나오는 것임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내편의 다른 편명들은 황로파가 고본 장자의 편찬자였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대종사(大宗師)라는 편명에 나오는 대종(大宗) 혹은 종()은 앞에서 열거한 황로파의 편들에서 중심적인 용어로 등장하는 개념이다. 응제왕(應帝王)이라는 편명에 나오는 제왕(帝王)이라는 용어도 내편에서는 편명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나오지 않고, 오히려 외ㆍ잡편특히 이 황로파의 편들에서 집중적으로 출현한다. 더군다나 응제왕(應帝王)편을 직접 읽어 보면, 우리는 그 편에 기재된 내용이 제왕에 대응한다[應帝王]는 편 이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3. 장자에 대한 선입견을 뚫을 때 장자와 만나게 된다

 

 

통용되는 33편의 곽상의 판본은 선집임에도 불구하고, 내편7편을 거의 건드리지 않고 유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곽상의 판본에 실린 내편7편이 장자를 최초로 편찬한 한대의 고본 장자내편과 크게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더군다나 곽상 당시에 아직도 이 고본 장자와 최소한 세 종류의 선집본 장자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함부로 자신이 선집한 장자에 자신의 글을 삽입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이런 추론은 장자라는 책의 진위문제를 제기한 소식(蘇軾, 1037~1101) 이래로 주장되었던 지금까지의 많은 학자들의 일반적인 의견과 일치한다. 이런 의견에 따르면 내편에는 기원전 4세기 말에 살았던 장자 본인의 사상이 그래도 온전히 들어 있고, 외ㆍ잡편은 장자에게 직ㆍ간접적으로 사상적 영향을 받은 장자 후학들에 의해 이루어진 일종의 논문집의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비록 곽상 판본에 고본 형태의 내편이 보존되어 있다고 할지라도, 내편이 기원전 4세기 말에 살았던 장자의 사상을 온전히 담았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장자고본의 편찬자가 황로파들이라면, 이들이 편찬한 내편도 그들의 절충주의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절충주의자들이 천하(天下)편에서 장자의 사상을 기술한 것을 보면, 이들이 결코 장자 본인의 사상을 의도적으로 왜곡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천하(天下)에서 그들은 장자를 제외한 다른 사상가들, 예를 들면 묵가송견(宋鈃) 등을 기술할 때, 현재의 관점에서 보아도 인정할 만한 균형잡힌 감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는 최선(崔譔)ㆍ향수(向秀)ㆍ이이(李頤)ㆍ곽상을 거쳐 완성되는 선집 과정에서 이질적인 사상 경향들이 유입되었을 수도 있다는 데 있다. 그러나 이 문제도 내편의 전체 사상에 대한 가장 포괄적이고 정합적인 이해를 통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장자라는 책 자체는 현재의 우리에게 해석학적 모험을 요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통용되는 장자에 대한 선입견이나 편견을 뚫어야만 한다. 예를 들어 통용되는 하나의 선입견에 따르면, 장자의 철학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을 인위적으로 제어하거나 조작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긍정하자는 주장이라고 이해된다. 그러나 이런 반문명적이고 반인위적인 사상경향은 장자 본인의 사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외ㆍ잡편에 실려 있는 장자 후학들의 사상에 불과한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곽상을 포함한 역대 주석가들의 주석과 해석뿐만 아니라 장자에 실려 있는 장자 후학들의 사상도 뚫고 지나가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는 장자 본인의 사상과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2000여 년 전에 살았던 장자 본인의 사상에 대해 쌓이고 쌓인 다양한 의미들과 해석들이라는 먼지를 털어 내야 우리는 중국 철학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진지하고 영민했던 고독한 철학자, 전쟁과 논쟁의 혼란 속에서 인간의 삶과 소통의 진실을 탐구했던 철학자, 그러나 결코 비관적이지만은 않았고 인간에 대해 희망 섞인 미소를 보였던 철학자를 만나서 대화하고, 그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모든 대화가 항상 의미와 해석의 충돌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장자와 대화하려는 우리의 노력도 많은 저항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우리 노력이 저항에 부딪혀 혹이 날 때에만, 우리는 장자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 주세페 아르침볼도(Giuseppe Arcimboldo),  채소 기르는 사람(The Vegetable Gardner)  \

 

 

 

 

3. 두 명의 장자와 조릉에서의 깨달음

 

 

1. 장주(莊周)와 장자(莊子)

 

 

장자는 관직이 없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가 어느 때 태어나서 어느 때 죽었는지, 혹은 그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다행스럽게도 장자에는 장자에 대한 많은 우화들이 나오기 때문에, 우리는 이 우화들을 통해서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간접적으로 추론해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 우화들을 자세히 읽어보면 두 명의 장자가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명은 장자(莊子)라고 불리는 사람이고, 다른 한 명은 장주(莊周)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장주는 바로 우리가 다루려는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철학자의 실명을 지칭하고 있다. 반면 장자라는 표현은 말 그대로 장 선생님이라는 경칭이다. 이로부터 우리는 장자에는 두 가지 상이한 관점으로부터 이루어진 장자에 대한 우화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장자로 쓰여져 있는 우화들은 장자 후학들이 자신들의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기록된 것이라면, 장주로 쓰여져 있는 우화들은 이와는 달리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 장자학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먼저 장 선생님이라고 쓰여져 있는 우화를 한 편 읽어보도록 하자. 소요유편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얘기가 나온다.

 

 

혜시(惠施) 선생님이 장 선생님에게 말했습니다.

나에게 큰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사람들이 가죽나무라 하네. 그 큰 줄기는 뒤틀리고 옹이가 가득해서 먹줄을 칠 수가 없고, 작은 가지들은 꼬불꼬불해서 자를 댈 수 없을 정도라네. 그래서 길가에 서 있지만 목수들이 쳐다보지도 않는다네. 지금 자네의 말도 이처럼 크기만 하고 쓸모 없어서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걸세.”

그러자 장 선생님이 말했습니다.

자네는 너구리나 살쾡이를 본 적이 없는가? 몸을 낮추고 엎드려 먹이를 노리다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높이 뛰고 낮게 뛰다 결국 그물이나 덫에 걸려 죽고 마네. 이제 저 들소를 보게. 그 크기가 하늘에 뜬구름처럼 크지만 쥐 한 마리도 못 잡네. 이제 자네는 그 큰 나무가 쓸모 없다고 걱정하지 말고, 그것을 어디에도 없는 마을[無何有之鄕]’ 넓은 들판에 심어 놓고 그 주위를 하는 일 없이[無爲] 배회하기도 하고, 그 밑에서 한가로이 낮잠이나 자게. 도끼에 찍힐 일도, 달리 해치는 자도 없을 걸세. 쓸모 없다고 괴로워하거나 슬퍼할 것이 없지 않은가?”

惠子謂莊子曰: “吾有大樹, 人謂之樗. 其大本擁腫而不中繩墨, 其小枝卷曲而不中規矩. 立之塗, 匠者不顧. 今子之言, 大而無用, 衆所同去也.” 莊子曰: “子獨不見狸狌乎? 卑身而伏, 以候敖者; 東西跳梁, 不避高下; 中於機辟, 死於罔罟. 今夫斄牛, 其大若垂天之雲. 此能爲大矣, 而不能執鼠. 今子有大樹, 患其無用, 何不樹之於無何有之鄕, 廣莫之野, 彷徨乎無爲其側, 逍遙乎寢臥其下. 不夭斤斧, 物無害者, 無所可用, 安所困苦哉!”

 

 

장자 후학들에게 있어 장 선생님은 어떻게 기억되고 있는가? 중요한 것은 이들에게 장 선생님은 이미 신성시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아니 정확히 말해 기억했으면 하고 바라는 장자는 이미 평범한 인간의 냄새가 사라지고 마치 달통한 성인인 것처럼 등장하고 있다. 사상적으로 혜시는 장자에게 언어와 논리의 엄밀함과 정치 현실의 냉혹함을 가르쳐 주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이야기에서 혜시는 오히려 식견이 보잘 것 없는 일상인을 상징하고 있다. 쓸모 없는 나무에서 쓸모를 찾는 장자와는 대조적으로, 혜시는 일상적 통념으로 쓸모 없는 나무는 쓸모 없다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반면 장자는 쓸모 있음쓸모 없음이라는 이분법을 비판하면서 쓸모 없음도 쓸모 있도록 하는 자유로움을 찾아야 한다고 점잖게 혜시를 가르치고 있다. 결국 이 우화를 쓴 장자 후학들에게는 자신의 스승 장 선생님의 위대함만이 보이고, 대정치가이자 논리학자였던 혜시의 위대함은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장주로 쓰여진 우화들은 이와는 전혀 다른 장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우화로는 외물(外物)편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장주(莊周)의 집은 가난해서, 그는 감하후에게 곡식을 빌리려고 갔다.

그 제후가 말했다.

좋다. 나는 곧 내 땅에서 나오는 세금을 얻게 되는데, 너에게 삼백

금을 빌려주겠다. 그래도 되겠는가?”

그러자 장주는 화를 내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어제 이곳으로 올 때, 길 중간에서 소리치는 무엇인가가 있었습니다. 제가 마차바퀴 자국을 돌아다보니, 거기에는 잉어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잉어에게 잉어 아닌가! 너는 무엇하고 있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잉어는 저는 동해의 왕국에서 파도를 담당하는 신하인데, 당신은 한 국자의 물로 나를 살릴 수 없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말했습니다. ‘좋다. 나는 지금 남쪽으로 오나라와 월나라의 왕에게 유세하러 가는 중이니, 서강의 물길을 네가 있는 곳으로 향하도록 하겠다. 그래도 되겠는가?’ 그러자 그 잉어는 화를 내면서 말했습니다. ‘저는 없으면 살 수 없는 그런 것을 잃었습니다. 제게는 살 수 있는 곳이 지금 없습니다.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은 나를 살릴 수 있는 한 국자의 물입니다. 만일 그것이 당신이 말할 수 있는 전부라면, 당신은 건어물 진열대에서 저를 찾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莊周家貧, 故往貸粟於監河侯. 監河侯曰: “. 我將得邑金, 將貸子三百金, 可乎?”

莊周忿然作色曰: “周昨來, 有中道而呼者, 周顧視車轍, 中有鮒魚焉. 周問之曰: ‘鮒魚來, 子何爲者耶?’ 對曰: ‘, 東海之波臣也. 君豈有斗升之水而活我哉!’ 周曰: ‘! 我且南游吳越之王, 激西江之水而迎子, 可乎?’ 鮒魚忿然作色曰: ‘吾失我常與, 我無所處. 我得斗升之水, 然活耳. 君乃言此, 曾不如早索我於枯魚之肆.’”

 

 

이 이야기 속의 장주는 재화와 관직에 초연했던, 나아가 스스로의 즐거움에 만족했던 장 선생님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띠고 있다. 한 국자의 물이 없어 사경을 헤매는 잉어처럼, 그는 약간의 곡식을 빌리러 제후에게 갔다. 그러나 그 제후는 나중에 자신의 고을에서 세금을 걷게 되면 그때서야 삼백 금을 주겠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장자의 그런 딱한 사정을 모르고 있었거나, 알면서도 그렇게 말한 것이다. 그러자 장자는 자신의 딱한 처지를 잉어에 비유하면서 그 제후에게 분통을 터뜨리고 있다. 아마도 이 사건은 장자가 칠원(漆園)이라는 정원의 관리직을 내던진 후에 생긴 사건일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 칠원의 관리자라는 벼슬이 장자에게 유일한 관직이었다. 그는 이후에 어떤 관직에도 머물지 않는다. 우리는 지식인으로서 장자가 그 알량한 벼슬이나마 버리자마자 얼마나 궁핍하게 생활했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른 우화를 보면 장자는 자신의 아내가 옷이나 이불을 수선하면서 번 돈으로 근근이 생활했었던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는 권력과 부의 중심부에 있었던 나머지 다른 동시대 지식인들과는 달리 삶이 얼마나 수고로운지를 여실히 체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고난의 삶은 그가 우화의 소재로 삼고 있는 인물들의 면면에 잘 반영되어 있다. 그들은 선천적인 불구자, 후천적으로 형벌을 받아 다리를 잘린 사람, 광인(狂人), 목수, 백정 따위다. 재미있는 것은 장자가 자신의 우화에 등장시킨 이들이 결코 불행한 삶을 영위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있다. 오히려 이들은 정치가들이나 지식인들과는 달리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의 소중한 삶을 어떻게 영위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삶의 달인들로 그려져 있다. 아마도 이런 우화들을 통해 장자는 한편으로는 정치인과 지식인들을 조롱하려고 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강한 애정을 표현하려고 했던 것 같다. 우리가 장 선생님(장자)보다는 장주로 기록되어 있는 우화들에 관심을 가져야만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장주로 기록된 우화들은 그가 인간이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문제들을 고민했던 철학자였음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장주(莊周) 장자(莊子)
기원전 4세기에 살았던 철학자 후학들이 스승을 높여 부른 명칭
일상인이자 사람냄새가 남 이상화된 달통한 철학자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한 기록 장자학파에 속한 존경심에 의한 기록

 

 

 

 

 

2. 삶에 조우할 수밖에 없는 타자를 사유하다

 

 

장주로 기록된 우화들 가운데 장자철학이 지닌 문제의식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조릉(雕陵)이라는 사냥터에서 장자가 경험했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산목(山水)편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다.

 

 

장주(莊周)가 조릉의 울타리 안에서 노닐고 있을 때, 그는 남쪽에서 온, 날개의 폭이 일곱 자이고 눈의 크기가 한 치나 되는 이상한 까치를 보았다. 그 까치는 장주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가 밤나무 숲에 앉았다.

莊周游於雕陵之樊, 睹一異鵲自南方來者. 翼廣七尺, 目大運寸, 感周之顙, 而集於栗林.

 

장주는 말했다. “이 새는 무슨 새인가? 그렇게 큰 날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날아가지 못하고, 그렇게 큰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를) 보지도 못하는구나.”

莊周曰: “此何鳥哉! 翼殷不逝, 目大不睹.”

 

장주는 자신의 치마를 걷어올리고 걸음을 재촉하면서, 석궁을 들고 그 새를 겨냥했다. 그때 그는 한 마리의 매미를 보았다. 그 매미는 방금 아름다운 그늘을 발견해서 그 자신[其身]을 잊고 있었다. 나뭇잎 뒤에 숨어 있던 사마귀 한 마리가 (자신이 얻을) 이익 때문에 자신이 노출되었다는 것을 잊고서 그 매미를 낚아챘다. (장자가 잡기 위해 석궁으로 겨냥하고 있던) 그 이상한 까치도 (자신이 얻을) 이익 때문에 자신의 생명[其形]을 잊고서 사마귀를 잡으려는 중이었다.

蹇裳躩步, 執彈而留之. 睹一蟬方得美蔭而忘其身. 螳螂執翳而搏之, 見得而忘形. 異鵲從而利之, 見利而忘其眞.

 

장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말했다. “! 사물들은 본질적으로 서로에게 연루되어 있고, 하나의 종류가 다른 종류를 부르는구나!”

莊周怵然曰: “! 物固相累, 二類相召也.”

 

아니나 다를까 그가 자신의 석궁을 던지고 숲으로부터 달려 나왔을 때, 사냥터지기가 그에게 욕을 하면서 달려왔다. 장주는 집으로 돌아와서 3개월 동안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인저(藺且)가 물었다. “선생님께서 무엇 때문에 요사이 밖으로 나오시지 않으십니까?”

捐彈而反走, 虞人逐而誶之. 莊周反入, 三日不庭. 藺且從而問之, “夫子何爲頃間甚不庭乎?”

 

그러자 장주가 대답했다. “지금까지 나는 외부로 드러나는 것[]만을 지켰지 나 자신을 잊고 있었다. 나는 혼탁한 물로 비추어 보았을 뿐 맑은 연못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게다가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이미 다른 풍속에 들어가서는, 그곳에서 통용되는 규칙을 따르라고 하신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얼마 전 내가 조릉에서 놀고 있을 때, 나는 내 자신을 잊었다. 이상한 까치가 나의 이마를 스치고 날아갈 때 나는 밤나무 숲을 헤매면서 나의 생명을 잊었고, 밤나무 숲의 사냥터지기는 나를 범죄자로 여겼다. 이것이 내가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있는 이유다.”

莊周曰: “吾守形而忘身, 觀於濁水而迷於淸淵. 且吾聞諸夫子曰: ‘入其俗, 從其令.’ 今吾游於雕陵而忘吾身, 異鵲感吾顙, 游於栗林而忘眞. 栗林虞人以吾爲戮, 吾所以不庭也.”

 

 

매미를 노리는 사마귀, 그 사마귀를 노리는 이상한 까치, 그리고 그 까치를 노리는 장자. 장자는 이런 연쇄적 과정에 깜짝 놀라 석궁을 버리고 그 자리를 피해 되돌아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도 그곳을 지키던 사냥터지기의 노림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장자는 조릉에서 각 개체들이 타자와 연루되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깨달음의 귀결로 장자는 타자와의 연루됨을 끊어 버리려고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끊어버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지 이런 연루됨은, 서로를 죽이는 것과 같은 좋지 않은 관계가 아니라, 서로를 살리는 것과 같은 좋은 관계로 전화되어야만 한다. 장자는 유일하게 이름이 알려져 있는 제자인 인저에게 자신은 혼탁한 물로 세계를 비추어 보았지, 맑고 깨끗한 연못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음[觀於濁水而迷於淸淵]‘을 토로한다. 여기서 혼탁한 물[濁水]이 선입견의 은유라면, 맑은 연못[淸淵]은 그런 고착된 자의식과 선입견이 제거된 맑은 마음을 상징한다. 결국 장자는 타자와 연루되어 살아가는 삶이 만약 맑은 연못과 같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면, 결코 자신의 삶을 파괴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어지는 구절에서 그는 자신의 스승에게 들은 말, 다른 풍속 속에 들어가면, (자신이 살던 곳의 풍속을 버리고) 그 풍속의 규칙을 따르라[入其俗, 從其令]‘라는 말을 언급한다. 고요하고 맑은 물이어야 섬세하게 자신에게 비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비출 수 있듯이, 다른 풍속에 들어가서도 맑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그 풍속의 규칙을 따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장자의 깨우침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그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거리가 있다. 통속적인 장자 이해에 따르면 그는 일체의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초탈한 자유를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유한성을 생각해볼 때, 일체의 것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초탈한 자유는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또 그것이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관념적으로만 그럴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것은 장자의 시선에는 다른 풍속과 그 풍속을 지배하는 다른 규칙이 들어와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그가 결코 정신적인 자유에만 머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 조우할 수밖에 는 타자를 사유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3. ‘조릉에서의 깨달음이란 길라잡이

 

 

우리는 조릉에서 장자가 터득한 깨달음을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개별자들의 삶은 타자와 밀접하게 관계될 수밖에 없다는 것,

둘째: 타자와의 적절한 관계맺음은 맑은 연못과 같은 맑은 마음으로서만 가능하다는 것. 앞의

깨달음은 인간 삶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유한성에 대한 통찰이다. 유한에 대한 자각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바깥에 외부가 있다는, 즉 자신의 외부에 타자가 존재한다는 자각과 동시적인 사태이기 때문이다. 반면 뒤의 깨달음이 함의하고 있는 것은 자신으로 환원불가능한 타자와의 소통이 우리 마음에서 가능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장자에게 혼탁한 물[濁水]로 비유되는 마음과 맑은 연못[淸淵]으로 비유되는 마음의 차이는 중요하다. 전자의 마음이 타자와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마음의 상태라면, 후자의 마음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편의상 앞으로 혼탁한 물과 같은 마음을 인칭적 마음이라고 부를 것이고, 맑은 연못과 같은 마음을 비인칭적 마음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편의 때문만은 아니다.

 

혼탁한 물로 비유되는 마음은 기본적으로 선입견이 있는 마음인데, 그 마음은 나는 나다라는 인칭성(personality)을 철학적으로 전제하기 때문이다. 반면 맑은 연못으로 비유되는 마음은 나는 나다라는 인칭성이 제거된 마음이기 때문에 비인칭성(impersonality)으로 규정될 수 있다.

 

혼탁한 물[濁水] 맑은 연못[淸淵]
타자와의 소통을 불가능하게 함 타자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함
인칭성(personality) 비인칭성(impersonality)

 

 

앞으로 우리는 인칭성과 비인칭성이라는 개념을 빈번히 사용할 생각이다. 이 개념 쌍은 원래 사르트르(J. P. Sartre)가 썼던 것인데, 최근에 들뢰즈(G. Deleuze)가 다시 복원하여 사용함으로써 유명해졌다. 사르트르는 자아의 초월성(La Transcendence de l'égo)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내가 책을 읽고 있는 동안, 책에 대한 의식, 소설의 주인공에 대한의식이 존재한다. 그렇지만 는 이런 의식 속에 거주하지 않는다. 이런 의식은 단지 대상에 대한 의식이자 스스로에 대한 비정립적인 의식일 뿐이다. () 무반성적인 의식에는 어떤 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 내가 시내전차를 잡으려고 따라갈 때, 내가 시간을 볼 때, 내가 그림을 응시하는 데 몰두할 때, 어떤 도 존재하지 않는다. 반드시 따라 잡아야만 할 시내전차 따위에 대한 의식, 그리고 의식에 대한 비정립적인 의식만이 존재한다.

 

 

사르트르에게 반성되지 않은 영역에는 자아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절대적으로 자발적이며 순수하게 지향적인 (즉 비인칭적인) 의식만이 있을 뿐이다. 자아에 대한 인칭적 의식은 단지 이런 비인칭적인 순수 자발적인 의식을 반성할 때에만 출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칭적 의식은 비인칭적인 의식에 비해 항상 이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점은 사르트르의 인칭성과 비인칭성이란 개념이 의식 철학이라는 한계 안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개념을 의식 철학적 전제들 너머로 확장해서 사용하려고 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비인칭적 의식은 책을 읽고 있는 의식, 영화를 보고 있는 의식 등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이런 사례의 의식들에는 기본적으로 나에 대한 의식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책이나 영화를 지향하고 있는 의식이 함축적으로 나라는 자의식을 기반으로 해서만 작동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사르트르의 비인칭적 의식도 기본적으로 나에 대한 의식을 무의식적으로 함축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예를 들어 책을 읽고 있거나 영화를 보고 있을 때 만약 나라는 의식이 부재하다면 우리는 책의 내용이나 영화의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영화에 몰입한다고 해도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그 내용의 흐름이 기억난다면 그것은 기본적으로 인칭적 자의식이 기..억의 구심력으로 작동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인칭성이라는 개념을 더 근본적으로 사유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성적이지 않은 지향적인 대상 의식이라는 사르트르의 생각을 비판해야만 한다. 대상에 대한 의식마저도 지워졌을 때에만 비인칭성이란 개념은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갖게 된다. 왜냐하면 대상이 대상이라는 형식 속에 머물러 있는 채로 지향된다는 것은 동시에 내가 나라는 형식 속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저기에 있는 것이 사과라고 의식하는 경우, 암암리에 그 사과에 대한 의식은 여기에 있는 것이 나라는 의식을 수반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칸트(I. Kant)의 말처럼 대상에 대한 의식은 주체 자신에 대한 의식을 수반하고 있다고 우리는 보아야 한다. 장자철학에서 비움()이라는 개념이 지닌 중요성도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비움은 대상 의식의 제거가 인칭적 자의식의 제거의 첩경임을 간파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장자가달성하고자 하는 비인칭적 실존상태인 허심(虛心)은 인칭적 자의식뿐만 아니라 대상 의식마저도 제거된 유동적 상태라고 보아야 한다.

 

어쨌든 장자에게 이 조릉에서 터득한 깨달음이라는 경험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모든 학문이 자신만의 고유한 문제의식과 질문으로부터 출발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도 사적이고 고유해 보이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단지 철학은 사적이고 고유한 질문을 보편적인 질문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는 데서 다른 학문과의 차이를 보일 뿐이다.

 

장자의 철학을 이해하려 할 때 이런 조릉에서 터득한 깨달음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복잡한 논리들과 애매한 우화들을 파고 들어 가다 보면 우리는 타자와 타자와의 소통이라는 그의 문제의식을 매번 발견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조릉에서 터득한 깨달음은 우리가 장자를 읽어나갈 때 만약 길을 잃게 되면 반드시 기억해야만 하는 장자 이해의 원점과도 같은 것이며, 동시에 장자안에서 장자 본인의 저술과 그렇지 않은 저술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조릉에서 터득한 깨달음은 장자철학의 가능성과 한계가 공존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용

지도 / 목차 / 장자 / 수업 / 삶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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