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차이를 통할 때만 새로운 나로 생성된다
어떤 사람을 새롭게 만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사전에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놀라운 점은 언젠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우리는 그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점이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그 사람과 자주 만났기 때문에 그 사람의 외적인 행동과 그 사람의 내면 사이의 연관관계를 파악하게 된 것일까? 그러나 타자를 알게 되는 진정한 이유는 내가 이미 그 사람과 삶의 수준에서 조절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우한 타자에 맞추어 무의식적인 삶의 수준에서 자신을 조절하게 된다. 그래서 첫 만남의 설레임 속에서 가능했던 “그(혹은 그녀)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모르겠다”는 경험은 아주 오래된 부부처럼 얼굴만 보아도 상대방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아는 경험으로 변하게 되는 것이다.
“당신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경험으로부터 얼굴만 보아도 알게 되는 경험으로의 이행, 불편함과 낯섦의 경험으로부터 편안함과 친숙함의 경험으로의 이행이 함축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두 경우의 나는 전혀 이질적인 나라는 것을 의미한다. 타자와 조우하기 이전의 나는 타자와 조우한 후 그 타자에 맞게 조절된 나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결국 나는 항상 타자와의 조우와 그로부터 유래한 소통의 결과이지 흔적일 뿐이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타자와의 소통이 아니겠는가? 타자와 조우할 때에만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할 수 있고, 또 앞으로 전혀 다른 새로운 나로 생성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타자와 조우하지도, 따라서 소통하지도 못하는 나는 사실 전혀 나로서 의식될 수도 없다. 그저 어제와 마찬가지로 아침에 일어나서 밥을 먹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갈 것이며, 어제 했던 일을 다시 하고는 지쳐서 집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마치 프로그램된 로봇처럼 말이다.
이처럼 타자를 도입하게 되면 우리의 사유와 삶은 완전히 다르게 이해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제 내가 중심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가 중심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서 내가 타자와 조우해서 생기게 된 차이가 중심이 된다고 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차이는 불편함과 낯섦이 체험되는 삶의 공간으로부터 경험되는 것이다. 차이는, 나로 하여금 불편함에서 편함으로 혹은 낯섦에서 친숙함으로 이행하게끔 강제한다는 점에서, 발생론적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이 차이를 통해서 기존의 동일성을 버리고 새로운 동일성을 확보함으로써 전혀 새로운 나로 생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생성이라는 개념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이 개념이 필연적으로 차이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생성ㆍ동일성ㆍ사유ㆍ삶 등의 철학적인 핵심 범주들은 타자와 그 타자와의 차이가 전제되어야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타자와의 소통’을 사유했으며 실천하고자 했던 장자의 철학이 현재에도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는 중국 철학 전통에서 거의 유일하게 동일성보다는 차이라는 이념에 서 있었던 철학자였기 때문이다.
▲ 영화 [자산어보]의 장면. 창대는 차이가 있는 존재 정약전을 만나 다른 존재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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