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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Ⅳ. 말과 길 본문

고전/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Ⅳ. 말과 길

건방진방랑자 2021. 6. 30.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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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과 길

 

 

말하기는 숨을 쉬는 것만이 아니다. 말하기에는 말하려는 것(= 의미)이 있다.

夫言非吹也, 言者有言.

 

말하기의 의미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실재로 말을 한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어떤 말도 하지 못한 것인가? 아니면 만일 우리가 말한다는 것이 새들의 지저귐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런 구별의 증거는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其所言者特未定也. 果有言耶? 其未嘗有言耶? 其以爲異於鷇音, 亦有辯乎? 其無辯乎?

 

도는 무엇에 가리어져 진실한 도와 거짓된 도의 구분이 생긴 것일까? 말하기는 무엇에 가리어져 시비판단이 생긴 것일까? 우리가 어디로 가든 도가 부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디에 있는 말하기가 부정될 수 있겠는가?

道惡乎隱而有眞僞? 言惡乎隱而有是非? 道惡乎往而不存? 言惡乎存而不可?

 

도는 작은 것의 완성으로 가리어지고, 말하기는 화려한 수사들로 가리어진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유가와 묵가의 시비 판단의 다툼이 있게 된 것이다. () 도는 걸어가는 데서 이루어지고, 사물들은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처럼 보인다.

道隱於小成, 言隱於榮華. 故有儒墨之是非. () 道行之而成, 物謂之而然

 

 

 

 

 

1. 중국 철학에서 도()의 의미

 

 

1. 도는 실천적 진리

 

 

성급한 연구자들은 장자가 언어를 부정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장자를 노자와 동일한 사유를 전개한 사람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생긴 선입견으로부터 기원한 것이다. 도덕경(道德經)1을 보면, ‘도를 도라고 하면 (그것은) 항상된 도가 아니다[道可道非常道]’라는 구절이 나온다. 왕필(王弼)과 같은 역대의 주석가들과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이 구절이 언어적으로 표현된 도는 진정한 도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해한다. 나아가 우리의 사유가 언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우리가 사유를 통해서는 결코 도를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사실 매우 단순하다. 이들에 따르면 도는 초월적이며 일원적인 통일된 실체이자 현상적 세계의 모든 개별자들의 발생 이유이자 존재 근거다.

 

따라서 분리 작용과 구별 작용을 하는 인위적인 언어나 사유로는 결코 도에 대해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왕필은 도와 개별자들 사이의 관계를 일원적인 나무의 뿌리와 다원적인 나무의 가지들이라는 유로 이해했다. 그에 따르면 가지들에는 하나하나 이름을 붙일 수 있지만, 그 가지들을 존재론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뿌리에 대해 이름을 붙이면 그 뿌리가 마치 하나의 가지인 것처럼 오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진(先秦) 철학사에서 도는 이런 형이상학적이고 존재론적인 것으로만 이해되었던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여기서는 간단히 도라는 글자의 발생과 의미 변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도라는 글자의 기원이 될 만한 어떤 문자도 상()갑골문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초기에 도라는 문자는 길, 기술(art), 이끌다, 말하다 등을 의미했었다. (way)이라는 의미로 쓰인 도는 몇몇 청동 명문(銘文)들에서 확인될 수 있다. 기술(art)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도의 초기 용례는 시경(詩經)대아(大雅) 생민(生民)편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후직의 농업은 경계 짓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誕后稷之穡, 有相之道].” 이끌다라는 의미로 쓰인 도라는 문자는 기원전 1000년이 지날 무렵 청동으로 되어 있는 우정(禹鼎)’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나중에 이 글자는 촌()자가 덧붙여져서 도()로 쓰인다. 말하다라는 의미로 쓰인 도의 용례는 시경(詩經)용풍(鄘風) 장유자(牆有茨)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전 왕들의 방법이나 이념을 의미하는 선왕지도(先王之道)와 같은 (추상적인) 방법이나 이념이란 의미로 쓰인 도는 서주 청동기에서는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시경에 나오는 가능한 사례들도 (구체적인) 길을 문학적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이고, 상서(尙書)』 「주서(周書)에서도 도는 전적으로 말하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나오고 있을 뿐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도라는 개념이 추상적으로 세계의 근거나 이념을 의미하는 것으로 쓰이게 된 것은 선진 사상계에서도 매우 늦은 시기에 속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존재론적이고 실체론적으로 이해된 도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직접 도라는 말이 선진 철학사에서 어떤 의미와 맥락으로 쓰이고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물론 그 시작은 중국 최초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는 공자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논어』 「이인(里仁)편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 같은 구절이 나오는데, 이 구절을 생각해 보는 것으로 우리의 논의를 시작하도록 하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아침에 도에 대해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 우리는 이 구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문제의 핵심에 이를 수 있다. ‘왜 공자는 아침에 도에 대해 들었는데, 바로 죽을 정도로 좋다고 하지 않고 저녁까지 기다리고 있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공자가 들으려고 했던 도가 사변적이거나 이론적인 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그가 추구했던 진리가 ‘1+1=2’와 같은 산술적 진리라면, 공자는 이 진리를 듣는 순간 바로 죽어도 좋다고 술회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하고 있다. 아침과 저녁 사이는 무엇을 함축하는가? 이 거리는 단순히 시간적인 거리만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이 거리는 바로 실천과 삶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아침에 그가 들은 도는 실천적 진리일 수밖에 없다. 비록 ! 그렇게 하면 되는구나!’라고 깨우쳤다고 할지라도, 그런 깨우침을 실천했을 때에만 실천적 진리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2. 공자가 朝聞道, 夕死可矣라고 말한 이유

 

 

최소한 공자에게 있어 도란 용어는 길, 방법, 기술 등과 같이 실천적인 진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수영을 잘 하는 방법을 듣고 ! 이제 죽어도 좋을 정도로 행복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오직 그 방법을 가지고 직접 물에 뛰어들어 수영을 해보고, 그 방법을 몸에 익혔을 때에만,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결국 공자가 들은 도는 실천적 진리였던 것이다. 실천적 진리는 이론적 진리와는 차이가 난다. 가령 물은 액체다라는 이론적 진리는 우리가 물과 어떤 관련을 맺어야 하는지, 혹은 우리가 물에 대해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지 전혀 말해주지 않는다. 반면 물에서는 손을 이렇게 휘젓고 발은 이렇게 놀려야 한다는 실천적 진리는 직접적으로 우리가 물 속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조금 더 생각해보면, 우리는 사변적 진리가 항상 실천적 진리로부터 추상화(abstraction) 혹은 형식화(formula- tion)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물과 이러저러하게 관계맺음 갖는 실천적 양식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물은 액체다라는 이론적 진리를 전혀 이해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실천적 진리는 이론적 진리를 함축하지만, 이론적 진리는 실천적 진리를 함축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다.

 

길버트 라일(Gilbert Ryle)마음의 개념(Concept of Mind)을 보면 이론적 앎(know-that)과 실천적 앎(know-how)이라는 구별이 나온다. 전자의 예로는 ‘1+1=2라는 것을 안다는 것을 들 수 있고, 후자의 예로는 더하기를 할 줄 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여기서 라일의 실천적 앎이 공자의 도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천적 앎과 도의 차이점은, 전자가 삶의 과정을 통해서 맹목적으로 배운 실천적 앞을 기술하고 있다면, 후자는 주체적이고 의지적인 실천적 앎의 이상(ideal)을 표현하고 있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도는 단순히 자전거 타는 방법, 수를 세는 방법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인간의 삶의 방식이라는 이념적인 수준도 포함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자전거는 바퀴가 두 개다를 안다자전거를 탈 줄 안다는 전혀 다른 종류의 앎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전거 바퀴가 두 개다라는 앎은 자전거를 탈 줄 안다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라는 점이다. 자전거를 탈 줄 알게 되면, 자전거를 타는 사람과 자전거는 이제 분리불가능한 관계에 묶이게 된다.

 

누군가가 나는 자전거를 탈 줄 안다고 주장했을 때, 우리는 이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우리는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에게 타 봐!”라고 요구하고, 타는지 못 타는지[]를 시간을 두고 관찰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실천적 진리나 도의 진리성은 삶의 과정을 통해서, 실천을 통해서만 확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문맥에서 중국 철학은 항상 지행합일(知行合一)과 언행일치(言行一致) 등을 강조했던 것이다. 효도를 해야 가정이 평화로워진다는 것을 알기만 한다면, 이것은 단지 사변적인 이해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실제로 더 중요한 것은 효도는 실천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오직 이럴 경우에만 우리는 이런 사람에 대해 효를 할 줄 안다[知孝]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중국 철학에서 강조했던 지()나 언()은 실천적 함축을 가질 수밖에 없는 앎이자 이야기다. 이제 우리는 공자가 왜 아침에 도에 대해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말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공자도 누군가에게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들었을 때, 그것이 실제로 옳은 방법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실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점에서 우리는 중국 철학에서의 도가 왜 말로 될 수 없는 것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실천을 통해서만 보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3. 도란 실천적 함축과 실행을 통해서만 전달된다

 

 

비록 장자 후학들이 지은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실천적 진리로서의 도의 의미, 즉 기술, 방법, 길이라는 본래적인 도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유명한 윤편(輪扁) 이야기를 직접 읽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천도(天道)편에 실려 있다.

 

 

환공(桓公)이 회당의 높은 곳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윤편은 회당 낮은 곳에서 수레바퀴를 깎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나무망치와 끌을 밀쳐두고 올라와서 환공에게 물었다. “공께서는 지금 무슨 말들을 읽고 계십니까?”

齊桓公讀書於堂上, 輪扁斲輪於堂下. 釋椎鑿而上, 問桓公曰: “敢問公之所讀者, 何言邪?”

 

환공이 성인의 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윤편은 그 성인은 살아 있습니까?”라고 묻자 환공은 그는 죽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윤편은 말했다. “그렇다면 공께서 지금 읽고 있는 것은 옛 사람들의 찌꺼기가 아닙니까?”

公曰: “聖人之言也.” : “聖人在乎?” 公曰: “已死矣.” :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그러자 환공이 말했다. “수레바퀴 깎는 장인인 주제에 네가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것을 논의하려고 하는가! 만일 네가 자신의 행위를 변명할 수 있다면 괜찮겠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너는 죽을 것이다.”

桓公曰: “寡人讀書, 輪人安得議乎? 有說則可, 無說則死.”

 

그러자 윤편은 말했다. “저는 그것을 제 자신의 일에 근거해서 본 것입니다. 만일 제가 너무 느리게 바퀴를 깎으면, 끌은 미끄러져서 움켜잡히지 않습니다. 만일 너무 빠르면 그것은 꼼짝 못하게 되어 나무에 말려들게 됩니다. 너무 느려서도 안 되고, 너무 빨라서도 안 됩니다. 저는 그것을 손으로 느끼고 그것에 마음으로 대응합니다. 입은 그것을 말로 옮길 수 없고, 거기에는 제가 저의 아들에게 전달할 수 없고 저의 아들도 또한 제게서 배울 수 없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것이 나이 70이 되도록 제가 바퀴를 깎고 있는 이유입니다. 옛 사람은 자신이 전할 수 없는 것과 함께 이미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공께서는 지금 옛 사람들의 찌꺼기를 읽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輪扁曰: “臣也, 以臣之事觀之, 斲輪徐則甘而不固, 疾則苦而不入. 不徐不疾, 得之於手, 而應於心, 口不能言. 有數存焉於其間, 臣不能以喩臣之子, 臣之子亦不能受之於臣. 是以行七十而老斲輪. 古之人, 與其不可傳也, 死矣. 然則, 君之所讀者, 古人之糟魄已夫.

 

 

환공이라는 제후가 성인(聖人)이라고 숭상되는 사람들의 글을 읽고 있을 때, 제후에 비해 너무나도 천한 윤편이라는 장인이 글로는 결코 성인이 말하려고 했던 것을 알 수 없기에 결국 성인의 경전 자체는 하나의 찌꺼기에 불과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은 그가 결코 성인을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자신이 수레바퀴와 소통해서 그것에 정통했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아들에게 소통 자체를 전할 수가 없듯이, 성인도 그 당시 세계와 소통한 사람임에는 분명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는 없었을 뿐이다. 그래서 윤편이 환공에게 한 질문, 당신이 읽고 있는 경전을 쓴 성인이 지금 살아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윤편의 이 질문은 만약 그 성인이 환공과 동시대의 사람이라면 그의 소통의 흔적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음을 함축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차피 환공이라는 군주가 읽고 있는 것은 단순한 수레바퀴 깎는 방법에 대한 책이 아니고, 정치와 통치에 대한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성인이 환공이 직면하고 있는 정치적 상황과는 전혀 다른 조건 속에서 소통했었던 사람이라면, 결국 성인의 글은 환공이 자신이 처한 정치적 상황과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하나의 선입견으로 작용할 뿐이라는 것이다.

 

환공이 읽고 있는 경전에는 천하를 다스리는 도가 실려 있다. 그것은 경전에 나타난 성인이 천하와 소통하면서 얻은 사후적 흔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분명 성인은 실천을 통해서 천하를 다스리는 도를 얻은 사람이다. 이 점에서 성인은 천하를 다스리는 도를 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성인은 지행합일(知行合一)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성인이 조우하던 천하와 환공이 조우하고 있던 천하는 전혀 다른 세상이다. 마치 수영장에서 수영하는 법과 급류에서 수영하는 법이 다르듯이 말이다. 여기에 바로 사변적으로 이해된 도, 지적으로 이해된 도의 부적절함이 있다. 왜냐하면 도란 지금 바로 여기에서 생생하게 살아서 우리를 괴롭히는 문제들을 실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윤편은 자신이 얻은 수레바퀴 깎는 도를 결코 언어로는 자신의 자식에게조차도 전해줄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도란 실천적 함축과 실행을 통해서만 전달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윤편의 아들이 윤편이 강의한 수레바퀴 깎는 도에 대해 아무리 유려하고 이론적으로 상세하게 들었다고 할지라도, 만약 그가 실제로 그렇게 깎지 못한다면, 그는 도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도는 실천을 함축할 때에만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2. “길은 걸어다녔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道行之而成]

 

 

1. 걸어갔기에 완성된 길

 

 

이제 직접 발제 원문을 읽어보자. 발제 원문의 핵심은 하단부에 놓여 있다. 그러나 발제 원문의 하단부는 너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 구조는 마치 새끼를 꼬듯이 도를 중심으로 삼은 이야기들과 언어를 중심으로 삼은 이야기들이 교차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분을 명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편의상 이 구조를 풀어헤칠 필요가 있다. 원래 문장들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도는 무엇에 가리어져 진실한 도와 거짓된 도의 구분이 생긴 것일까? 말하기는 무엇에 가리어져 시비판단이 생긴 것일까? 우리가 어디로 가든 도가 부재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디에 있든 말하기가 부정될 수 있겠는가? 도는 작은 것의 이룸으로 가리어지고, 말하기는 화려한 수사들로 가리어진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유가와 묵가의 시비 판단의 다툼이 있게 된 것이다. () 도는 걸어가는 데서 이루어지고, 외물들은 우리가 그렇게 말하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道惡乎隱而有眞僞? 言惡乎隱而有是非? 道惡乎往而不存? 言惡乎存而不可? 道隱於小成, 言隱於榮華. 故有儒墨之是非. () 道行之而成, 物謂之而然.

 

 

이것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첫째는 도의 의미 계열인데, 이것은 도는 작은 이룸으로 가리어져서 진실한 도와 거짓된 도의 구분이 생긴 것이다. 원래 도는 걸어가는 데서 이루어진 것이다로 재구성될 수 있다.

두 번째는 언어의 의미 계열인데, 이것은 언어는 화려한 수사들로 가리어져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시비판단이 생긴다. 원래 사물들은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 그렇게 된 것이다로 재구성될 수 있다.

 

먼저 도의 의미 계열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장자는 길은 걸어가는 데서 이루어진다[道行之而成]’고 말한다. 다시 말해 도는 내가 타자와 소통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전에 이러저러하게 규정된 도가 있어 그것을 내가 학습하고 내면화함으로써 타자와 소통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장자의 도는 공자의 도에 대한 생각과 차이를 보인다. 공자에게 도란 이미 이전의 성인(聖人)들이 걸었던 길이기 때문에 절대로 틀릴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그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은 인간들이 이런 절대적으로 완전한 길로 걸어가지 않으려는 데 있었다. 공자가 생각했던 도는 이전의 주나라의 예의제도[周禮]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자신을 이겨서 예를 회복해야 한다[克己復禮]’고 권고했던 것이다. 이런 지점에서 장자는 다음과 같이 되물으면서 도를 더 근본적으로 사유한다.

 

그렇다면 성인이라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들이 갔다고 하는 길을 걸었던 것일까?’ 자신들 이전에는 전혀 있지도 않았던 길을 성인들은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는가? 예를 들어 농사짓는 방법[]과 약초를 이용하는 방법을 만들었던 신농(神農)이라는 성인은 어떻게 이런 방법들을 만들었는가? 전설에 의하면 신농은 몸소 풀 하나하나를 먹으면서 약초와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해 냈다고 한다. 그는 어느 때는 독초를 먹어 몇 날을 쓰러져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다고 한다. 결국 성인이 걸어갔던 그 길은, 즉 그 도라는 것은 이렇게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우리는 깎아지른 절벽 양쪽을 가로지르고 있는 동아줄로 이루어진 다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지금은 당연히 그 다리가 설치돼 있어 사람들이 편안하게 걸어다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다리를 만들기 위해서 누군가가 반대쪽 절벽 위로 올라가야만 했다는 것을 잊고 있다. ‘길은 걸어가는 데서 완성된다[道行之而成]’고 말했을 때, 장자는 공자보다 더 철저하게 도를 사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장자는 도()를 넘어서 이것을 발생시키는 운동을 사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도보다는 행()이라는 글자에 장자 사유의 핵심이 있었던 셈이다.

 

 

 

 

 

2. 도란 타자와의 소통 흔적이다

 

 

()이라는 글자를 더 근본적으로 생각해보도록 하자. 이 글자는 인격적으로는 걸어간다’, ‘다닌다’, ‘움직인다의 의미로 쓰이고, 비인격적으로는 작용된다’, ‘운행된다’, ‘흐른다의 의미로 쓰인다. 우선 비인격적인 예를 먼저 들어보자. ‘물이 흘러간다고 해보자. 물은 어떻게 흐르는가? 물은 기본적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결국 물이 흘러간다는 것은 차이(difference)를 전제로 해서만 가능한 사건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느 곳으로 가려고 할 때, 아니 정확하게 가고자 할 때, 우리는 자신이 속한 곳과 차이나는 곳으로 가려고 한다. 예를 들어 보부상이 사과를 메고 장사를 하러 갈 때 그는 어느 곳으로 가겠는가? 사과가 많이 나는 곳으로 그는 결코 가지 않을 것이다. 가급적 사과가 희귀한 곳으로 갈 것이다. 자신이 속한 곳에서 흔히 산출되는 상품을 들고 마찬가지의 상품이 많은 곳으로 장사가는 보부상은 없을 것이다. 이처럼 행()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차이가 전제되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행()은 동일성이 있는 곳에서는 발생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방금 만나서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은 서로에게서 가장 큰 차이를 느끼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차이에 빠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두 연인이 결혼을 해서 오랜 시간 함께 살다보면 이 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극도로 좁혀질 수밖에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차이가 극도로 좁혀지면서, 이 두 사람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들로 생성된다는 점이다. 결국 소통은 차이로부터 동일성의 발생을 가능하게 하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차이나는 두 연인이 사랑이라는 소통의 운동을 통해서 각각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사람들로 만들어진다. ‘나는 이러저러하다는 자기 동일성은 차이를 통해서, 그리고 차이를 가로지르는 소통의 운동에 의해서 전혀 다른 것으로 변하게 된다. 이처럼 행이라는 말은 차이를 가로지르는 비약의 운동, 즉 소통을 상징하는 말이다.

 

신이 아닌 이상 우리 인간은 타자와 관계를 맺어야 살 수 있는 유한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살아가는 한, 또는 인간이 살아갈 수 있으려면 타자와의 소통은 불가피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소통의 흔적으로서의 도도 불가피하게 생기게 될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도라는 것은 어디에 간들 없을 수 있겠는가(道惡住而不存)?’라고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도는, 수영을 잘하는 사람에게도, 소를 잡는 사람에게도, 낚시를 하는 사람에게도, 매미를 잡는 사람에게도, 원숭이를 키우는 사람에게도, 없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소도 잘 잡을 수 있을까?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도는 세계를 포괄하는 동일한 원리일 수는 없다. 장자에게 도는 정확히 도들이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이다. 수영하는 사람의 도, 원숭이를 잘 키우는 사람의 도, 정치를 잘하는 도 등 기본적으로 장자의 도는 복수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것은 모든 도들이 철저하게 상호 무관하다는 말이 아니다. 도들은 동일하지 않지만 유사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도들은 타자와의 소통의 흔적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도들은, 나와 타자 사이의 소통의 흔적이라는 점에서, 나의 조건과 타자의 조건에 의해 제약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전혀 다른 존재였던 창대와 정약전은 소통함으로 서로 변해갔다. 영화 [자산어보]의 장면.

 

 

 

3. 사진 같은 마음과 거울 같은 마음

 

 

문제는 자신의 도가 가진 태생적 제약성을 망각하고, 우리가 자신의 도를 보편적이라고 자임하는 데 있다. 이런 착각 속에서 소통의 흔적으로서의 도는 절대적 기준이자 원리로 추상화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눈길을 걷고 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이 걸었던 길에는 발자국이 남게 되고, 바로 그것이 길[]이 된다. 애초에 정해진 어떤 길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구체적이든 추상적이든 모든 길은 이런 식으로 생긴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긴 길은 뒷사람들에게는 안전한 길로 보이게 된다. 그래서 이 길을 가는 사람들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고, 어느 사이엔가 이 길은 절대적인 길로 변해버린다. 절대적인 길은 이제 모든 인간들에게는 결코 회의될 수 없는 절대적인 방법이자 매개로 보인다. 결국 이렇게 되면 우리는 왜 도가 있어야 하는지?’를 망각하게 된다. 이런 망각은 기본적으로 우리가 자신이 소통을 해야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유한자라는 것을 망각한다는 것을 함축하고, 따라서 우리가 타자를 망각하는 데로 귀결된다.

 

바로 여기에서 도는 작은 이룸에서 은폐된다[道隱於小成]’는 장자의 지적이 의미를 가진다. 이 작은 이룸[小成]이란 고착된 자의식의 출현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런 소통의 사후적 흔적만이 유일무이한 절대적인 도라고, 그래서 참된] 도라고 주장하게 된다. 또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의 눈에는 다른 사람의 소통과 그 흔적은 거짓된[] 도로 드러나게 된다. 결국 작은 이룸 혹은 고착된 자의식이 장자가 도는 어디에 숨어서 참과 거짓이 생기게 되는 것일까[道惡乎隱而有眞僞]?’라고 물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특정한 소통의 흔적(=)을 마음이 성심의 형태로 담아 두고 절대적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런 마음은 거울이 아니라 사진으로 비유될 수 있는 마음일 것이다. 이런 사진과 같은 마음은 다른 타자와 조우할 때 결코 그 타자와 소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응제왕(應帝王)편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언어의 주인이 되지 말고, 사유의 창고가 되지 말고, 일의 담당자가 되지 말고, 인식의 주인이 되지 말라. 몸으로는 무한한 타자와의 소통을 다하고, 자연스럽게 주어진 것을 다하지만, 얻은 것을 드러내지 말라. 역시 비울 뿐이다.

無爲名屍, 無爲謀府, 無爲事任, 無爲知主. 體盡無窮, 而游無朕. 盡其所受乎天而無見得, 亦虛而已!

 

지인(至人)의 마음씀은 거울과 같아 일부러 보내지도 않고 일부러 맞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대로 응할 뿐 저장해 두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개별적인 것들을 이기고 상함을 받지 않는다.

至人之用心若鏡, 不將不逆, 應而不藏, 故能勝物而不傷.

 

 

 

 

 

4. 거울을 닦듯이

 

 

우리는 장자가 마음을 거울에 비유한 논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거울은 나무 앞에 있으면 나무를 비춘다. 이 거울이 사람 앞에 있으면 사람을 비춘다. 이것은 너무 자연스러워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거울은 항상 무언가를 비추고 있다. 그러나 이 거울이 사람을 비출 때, 이 전에 비추던 나무의 상을 지니고 있으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혹은 이 거울이 항상 사람만을 비추려는 거울이면 어떻게 될까? 장자가 거울의 비유로 마음을 설명하려는 논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점에서 장자에게 거울은 때가 끼었든 맑든 항상 무엇인가를 비추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장자의 거울은 우리 인간의 삶과 마음이 세계-내적임 또는 타자와 소통하는 것임을 나타내는 비유다. 그러므로 거울의 비유는 태양과 같은 초월적 비춤을 상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거울은 타자를 항상 비추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인간의 삶과 마음이 세계ㆍ내적이며 동시에 타자ㆍ관계적임을 상징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거울의 상은 거울 자체의 소통 역량과 타자에 의해 규정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지향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도 마음 자체의 소통 역량과 타자에 의해 규정된다. 거울의 상이 유한하고 특정한 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거울이 비추고 있는 타자의 단독성(singularity) 때문이다. 다시 말해 거울 앞에 사과가 아니라 꽃이 있다는 사실이 바로 특정한 거울의 상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거울의 맑은 소통 역량 자체는 무한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장자가 허심(虛心)을 강조했던 이유도 바로 본래적 마음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소통 역량을 회복해야 타자와의 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비추고 있는 우리의 마음, 즉 타자와 소통하는 우리의 구체적 마음은 분명 유한하고 특정한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런 유한성과 제약성이 우리 마음이 지닌 무한성으로부터 유래된 것이 아니라, 타자의 단독성으로부터 유래된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것도 비추지 않는 거울은 거울일 수 없듯이, 어떤 구체적 삶의 문맥도 반영하지 않는 마음은 마음일 수 없다. 또한 모든 것을 비추는 거울도 어떤 것도 비출 수 없는 거울과 마찬가지로 거울일 수 없다. 왜냐하면 논리적으로 절대적인 있음은 절대적인 없음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거울을 닦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장자가 허심을 강조하는 이유는 마음으로 하여금 타자와 잘 소통해서 새로운 삶의 문맥을 잘 비추어내려는 데 있다. 빈 마음[虛心]은 결코 앞으로 어떤 것도 비추지 않으려는 허무주의적인 마음이나, 아니면 모든 것을 비추겠다는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마음을 의미할 수는 없다. 아무 것도 비추지 않겠다는 허무주의적인 거울, 모든 것을 비추겠다는 초월적인 거울, 그리고 어떤 것만을 비추겠다는 성심의 거울 등, 이 모든 거울은 비본래적인 거울일 뿐이다.

 

 

 

 

 

 

3. “사물들은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처럼 보인다[物謂之而然].”

 

 

1. 자본론이전과 이후의 노동자

 

 

다음으로 언어의 의미 계열이 무엇을 함의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자. 장자는 외물들은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처럼 보인다[物謂之而然]”라고 말하고 있다. 장자에 따르면 우리 앞에 분절되고 구분되어 현상하는 어떤 대상[]도 그런 분절과 구분을 본질적으로 자신의 본성으로 가지고 있지는 않다. 단지 대대(待對)의 논리로 작동하는 언어가 특정 공동체나 이로부터 구성된 자의식에 의해 사용됨으로써 그 대상은 그런 논리에 의해 분절되어 현상하는 것일 뿐이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떤 타자에 대해 이러저러하다고 부여한 이름이나 속성은 본질적으로 그 타자와는 필연적인 관계가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과일을 석류라고 부른다[]고 하자. 이제 석류라는 이름은 이 과일을 지시하는 개념이 된다. 이렇게 어떤 사물에 명칭을 부가해서 부르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깊게 우리의 몸에 각인된다. 그 증거로 우리는 자신이 석류라는 이름만 들어도 입에 침이 고이게 된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쉽게 석류라는 개념의 자의성을 망각하게 된다. 다른 문명권의 사람들도 과연 석류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우리와 같은 반응을 보일까?? 그렇지 않다. 그들은 예를 들면 석류가 아닌 파머그래닛(pomegranate)이라고 들었을 때에만 그런 반응을 보일 것이다.

 

우리는 단지 자신이 명명한 것에서 다시 그 이름을 재발견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언어를 매개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단지 타자와 자의적인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일체의 매개도 거부하고 동시에 우리와 전적으로 무관한 타자 자체는 칸트의 말을 빌리면 초월적 가상에 불과한 것이다. 여기서 타자와 맺는 자의적 관계란 우리가 타자와 아무렇게나 관계를 맺어도 된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사정은 그 반대인데, 왜냐하면 이 자의성은 공동체의 규칙에 의해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언어의 자의성은 공동체의 수준에서만 말해질 수 있는 것이다. 특정 공동체에 태어나서 맹목적으로 언어의 규칙을 배운 우리에게 언어는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실존의 조건들이자 한계로서, 즉 필연적인 것으로서 현상한다. 결국 장자가 외물은 우리가 그렇게 불러서 그런 것처럼 보인다[物謂之而然]”고 할 때, 그는 지금 개체의 수준에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수준에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언어에 대한 장자의 사유는 이 위()라는 글자에 그 관건을 두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특정 공동체를 벗어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 자체를 벗어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는 특정한 언어 사용에서 자유로울 수는 있지만 언어 자체를 폐기할 수는 없다. 여기에 장자가 언어는 우리가 어디에 있든 부정될 수 있겠는가[言惡乎存而不可]?”라고 말한 의미가 있다. 장자는 지금 무조건적으로 언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언어의 불가피성, 공동체의 규칙이라는 우리의 실존적 조건을 기술하고 있다. 이 점에서 장자는 언어의 한계와 그 가능성을 사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언어 사용의 규칙들이나 개념들이 변할 때, 그것들이 조직하는 세계도 우리에게는 다르게 체험된다. (John Searle)은 다음과 같이 말한 적

이 있다.

 

 

세계를 경험할 때, 우리는 경험들 그 자체를 형성하도록 돕는 언어적 범주들을 통해 세계를 경험한다. 세계는 우리에게 대상들과 경험들로 분리된 채 도래하지는 않는다. 대상으로 간주되는 것은 이미 우리의 표상(representation) 체계의 기능이고, 우리가 자신의 경험 속에서 세계를 경험하는 방식은 그런 재현 체계에 의해 영향 받고 있다. () 실재(reality)라는 우리의 개념은 우리의 언어적 범주들의 문제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우리가 자신이 가진 개념적 체계들을 변화시킬 때 우리는 다른 세계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 이런 예로는 보이지 않은 손에만 의지했던 고전경제학을 비판하면서 마르크스(K.Marx)자본론을 썼을 때, 노동자들은 전혀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다시 말해 자본론이전의 노동자들과 이후의 노동자들은 질적으로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2. 현실주의에 저항하는 법

 

 

특정한 개념 체계를 통해서 다양한 세계들이 다르게 분절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런 해석된 세계들 너머로 하나의 유일한 세계가 실재하는 것은 아니냐는 반문이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반문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역사적 존재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인간은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로 되어가는 이념적 존재다. 물론 인간이 특정한 공동체 속에 던져져서 이 특정한 공동체의 규칙을 맹목적으로 배운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규칙이든 인간을 철저하게 규정할 수는 없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인간은 이 규칙을 문제삼고, 이 규칙을 넘어서서 새로운 규칙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바로이 점이 인간이 지닌 역사성을 설명해 준다.

 

우리는 현실 세계가 특정한 관념들과 이념들로 구성된 세계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나라의 많은 현실주의자들은 세계화 시대에 어울리게 영어 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많은 대학들과 회사들도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미국인 수준의 영어 능력을 요구하고 있고, 그래서 많은 젊은 주부들도 경쟁적으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영어를 조기에 숙지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다. 그러나 특정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그 언어의 분류체계가 함축하는 특정한 세계관 또는 삶의 규칙을 배운다는 것을 함축한다. 일제시대에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미명으로 이루어진 창씨개명과 일본어 교육을 강조했던 그 당시 식민지 지식인들에 대해서, 현재의 많은 지식인들은 그들을 친일파라고 규정하고 그들의 반민족적 행위를 개탄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거의 모든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행하고 있는 모습은, 언젠가 우리가 미국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친미파라고 규정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우리의 사정은 어떠한가? 어느 명문 사립대학의 총장은 영어로 강의할 수 있는 교수를 채용한다고 의기양양하게 떠들고 있고, 또 어느 명문 공대 대학원은 아예 수업을 영어로 진행한다고 자랑하고 있다. 또 민족사관학교라는 거창한 이름을 가진 어느 사립 고등학교는 많은 학생들을 미국의 명문대에 직접 진학시키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친일이 자명한 현실이었다면, 지금에는 친미가 자명한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현실주의자들은 특정한 관념체계만을 유일한 현실로 인정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관념론자라고 할 수 있다.

 

고착화된 관념론에 불과한 이른바 현실주의라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서, 우리는 새로운 관념(= 이념)을 고안하고 이것에 어울리는 새로운 현실을 창조해야만 한다. 바로 여기에 철학의 존재 이유가 있다. 철학이 이런 새로운 이념의 창조행위가 아니라면 무엇일 수 있겠는가? 따라서 철학은 주어진 현실을 정당화하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철저하게 비판적인 사유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의 위기, 좁게는 철학의 위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기존의 제도권 내의 인문학과 철학이 창조의 작업을 한 번이라도 수행했던 적이 있었는가? 우리가 겸허히 받아들여야 할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나라에 인문학이나 철학이 존재했던 적이 없었다고 말해야 한다. 이런 솔직한 술회(述懷)로부터 우리의 철학은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보조국사 지눌(知訥)의 말처럼 우리는 자신이 넘어진 자리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3. 합리적 철학이 망각한 것들

 

 

이제 다시 장자의 언어에 대한 이해로 돌아가 보도록 하자.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장자에게 인간의 사회적 삶에서 언어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러나 언어는 삶의 연관을 떠나 메타적인 이론체계로 변할 때 그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장자는 이런 본래 기능을 망각하고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대표적 사례로 세계의 기원과 통일에 대한 거대담론이나 혹은 언어를 가지고 유희하는 혜시(惠施)를 언급하고 있다. 제물론(齊物論)편을 보면 혜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고 있다. “세계(天地)는 나의 더불어 태어났고, 만물들과 나는 하나다[天地與我並生, 而萬物與我爲一].” 혜시에 따르면 내가 태어났기 때문에 이 세계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하늘은 내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에 우리 위에서 높고 파랗게 펼쳐져 있는 것이고, 땅도 내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기 때문에 우리 밑에서 우리를 든든하게 받쳐주고 있는 것이다. 나를 떠난 세계나 세계를 떠난 나는 단지 추상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삶의 지평에서 나는 세계와 불가분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이것은 이 세상의 모든 개별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 앞에 있는 컵도 나와 관련해서만 의미를 지니는 것이지, 결코 나와 무관한 컵이나 컵과 무관한 나는 사변을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을 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혜시는 이 세계와 이 세계 속의 개별자들과 나는 하나로 통일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이어지는 구절에서 장자는 이런 혜시의 사유를 다음과 같이 비판하고 있다.

 

 

이미 하나라고 여긴다면 우리에게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미 우리가 하나라고 말했다면, 우리에게 말이 없을 수 있겠는가? ‘하나하나라고 말하기는 둘이 되고, 또 그 둘과 하나는 셋이 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면, 아무리 숙련되게 계산 잘 하는 사람도 그 끝을 잡을 수 없는데, 평범한 사람은 어떻겠는가!

旣已爲一矣, 且得有言乎? 旣已謂之一矣, 且得無言乎? 一與言爲二, 二與一爲三. 自此以往, 巧曆不能得, 而况其凡乎!

 

 

장자에 따르면 세계의 통일성을 신봉하고 있는 혜시가 만약 세계의 통일성을 진정으로 확신한다면 세계의 통일성에 대한 어떤 언어적 주장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세계의 통일성에 대한 언어적 표현이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이 세계의 통일성 바깥에 위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계의 통일성을 언표하게 되면 세계는 통일되지 않았음을 함축할 수밖에 없다는 역설에 빠지게 된다. 결국 이런 역설에 빠지지 않기 위해 세계의 통일성이라는 사태와 그 사태를 지칭하는 언어적 표현을 다시 통일시키려는 다른 언설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사실 세계가 통일되었다는 말 자체도 이 세계 속에 속해 있는 거야.” 이런 식으로 계속 진행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 세계의 통일성은 고사하고 무한히 많은 언설들을 메타적으로 증식시킬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분명세계의 통일성과 모순되는 상황일 수밖에 없다.

 

이처럼 장자에 따르면 세계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혜시와 같은 사람들은 결코 세계의 통일성을 말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오히려 통일성을 말하면 말할수록 통일성은 훼손되기 마련이다. 혜시로 대표되는 합리적 철학의 옹호자들은 언어 자체의 작동 논리인 대대(待對) 관계를 무한히 증폭시켜서 거대담론을 형성했다. 그들은 합리적 철학의 거대담론을 구성하고 있는 언어가 일상 언어의 쓰임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합리적 철학의 담론은 진리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이자 체계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일상 언어는 진리에 도달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방해되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 철학의 담론마저도 일상 언어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결코 이해될 수 없는 것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이런 담론은 기본적으로 일상 언어로부터 추상화와 체계화를 거쳐서 탄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신들의 담론이 이런 추상화의 결과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될 때, 합리적 철학은 유한한 삶이 조우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을 결국 망각하게 된다.

 

결국 장자가 언어는 화려한 수사들로 은폐된다[言隱於榮華]”고 말할 때, 앞의 언어[]가 일상적 삶 속에서 쓰이는 본래적 언어를 의미한다면, 뒤의 화려한 수사들[榮華]은 삶과 무관하게 구성된 거대담론이나 변론들을 의미한다. 여기서 영화(榮華)라는 말은 원래 나무를 화려하게 덮고 있는 무성한 꽃들과 잎들을 가리킨다. 이런 문학적 표현으로 장자가 의도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번성한 꽃과 잎들이 나무가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은폐시키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변적이고 메타적인 언어도 우리가 구체적인 삶의 세계에 자리를 잡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은폐시킨다는 것이다. 아무리 울창한 잎들과 꽃들로 덮인 나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단지 특정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무로부터 기원한 것일 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화려한 수사들도 특정한 삶의 문맥에서 출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자명한 사실을 망각한 사변적이고 메타적인 담론들은 모든 인간들의 다양한 삶의 세계를 자신들의 이론체계로 재단하려고 한다. 그래서 옳고 그름의 다툼이 생기게 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말하기는 무엇에 가리어져 시비판단이 생긴 것일까[言惡乎隱而有是非]?”라는 질문의 대답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4. 대화란 타자와의 상호조율 과정이다

 

 

그렇다면 장자 본인의 언어 사용은 어떠한가? 당연히 그의 언어는 화려한 수사들로 은폐된, 다시 말해 사변적이고 메타적인 성격과는 무관한 것이다. 흔히 도가사상은 언어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장자가 비판했던 언어가 사변적이고 메타적인 합리적 철학의 언어였을 뿐이라는 점을 망각했기 때문에 생긴 오해다. 그는 결코 모든 언어를 부정했던 적이 없다. 오히려 그는 언어의 한계와 가능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언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장자의 후학들은 그의 자유로운 언어 사용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언(寓言), 중언(重言), 그리고 치언(巵言)이다. 그런데 이런 세 종류의 문체들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왜 장자가 이처럼 다양한 문체들을 사용하였는지에 대한 이유다. 이것은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려고 했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다. 그는 혼자만의 자유를 만끽하려고 했던 사람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삶과 그것의 진실에 대해 말하려고 했던 사람이다. 다시 말해 그는 고독한 유아론자, 또는 홀로 삶을 즐기려는 은둔자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장자의 언어 사용이 다양해진 이유는 바로 그가 대화를 추구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대화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장자는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의 전언을 전할 수 있는 문체를 선택한다. 아니 정확하게 말해 문체를 새로 창조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장자는 어떤 때는 세상 사람들이 권위를 부여하는 성인의 말을 빌려서 이야기하기[重言]도 하고, 어떤 때는 재미있는 우화형식으로 이야기하기[寓言]도 하고, 어떤 때는 대화 상대방의 의식상태와 삶의 상황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기[巵言]도 한 것이다. 장자의 다양한 문체들은 그가 경전의 권위에 입각해서 일방적인 학설을 설파하는 지식인이 아니라, 대화 상대방을 고려하는 진정한 대화의 정신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장자의 세 가지 문체를 단지 문학적 수사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강조해야 할 것은 그가 동시대 사람들이나 아니면 후세 사람들과 대화하려는 진지한 자세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체는 아마도 치언일 것이다. 치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곽상의 주석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곽상은 치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라는 잔은 꽉 채우면 기울어지고, 비우면 (잔의 주둥이가) 위를 향하게 된다. 이것은 옛 것에 집착하지 않음을 상징한다. 그것을 언어에 비유하면, 타자에 따르고 사태의 변화를 따라서 오직 그것들을 따르기에 나날이 나온다라고 말한 것이다. ‘나날이 나온다는 것은 나날이 새로워짐을 말한다. 나날이 새로워지면 자연스러운 나누어짐을 다할 수 있고, 자연스런 나누어짐을 다하면 조화롭게 된다.

王云: “卮器滿卽傾, 空則仰, 隨物而變, 非執一守故者也. 施之於言, 故隨人從變, 己無常主也.” 郭云: “日出, 謂日新.” 和以天倪.

 

 

곽상에 따르면 치는 술을 가득 부으면 넘어져서 술을 쏟아내고,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나는 잔이다. 여기서 치라는 잔이 장자 본인이라면, 여기에 담기는 술은 대화 상대방을 비유한다고 할 수 있다. 대화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 대화란 기본적으로 나와 타자 사이의 부단한 상호조율의 과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화 상대방이 분노에 가득 차서 이야기한다면 우리는 그것에 맞추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이런 경우 만약 우리가 실실 웃으면서 이야기한다면 대화가 과연 이루어지겠는가? 또 상대방이 농담을 했을 때 우리가 정색을 하는 경우도 대화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5. 말의 의미는 타자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는 장자가 언어를 부정하고 있다는 성급한 판단을 이제 비판할 수 있게 되었다. 발제 원문의 시작 부분부터 장자는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 ‘언어는 숨을 쉬는 것이 아니다[言非吹也].’ 왜냐하면 언어라는 것은 말하려는 것, 또는 의미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장자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논의를 더욱더 심화시킨다. ‘이런 말하려는 것 또는 의미하는 것이 있다고 해도, 만약 우리가 말하려고 한 것의 의미가 확정되지 않았다면,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기서 한 가지 결정적으로 중요한 의문이 생긴다. 주체가 언어를 통해 무엇인가를 의미하고 있지만 그가 의미하려는 것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분명 주체 입장에서 의미는 이미 확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질문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래서 의미가 확정되지 않았다면[其所言者特未定也].’이라는 장자의 진술은 무척 중요하다. 왜냐하면 지금 장자는 언어를 숙고하기 위해서 타자를 도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장자는 지금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만일 주체가 언어를 통해서 자신이 의미하려는 것을 확정하였지만 타자가 그런 주체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면, 주체가 사용한 언어는 언어일 수 있겠는가?

 

말하려는 사람에게는 분명 전달하려는 의도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그에게 말과 의미 사이에는 확정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문제는 말을 듣는 상대방(= 타자)의 지위다. 의미는 항상 타자와의 역동적인 관계에서, 즉 타자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다. 만약 어떤 강사가 진지한 말을 할 때 청중이 웃는다면 그의 강의는 농담이 될 것이고, 반대로 농담을 했는데 청중이 진지한 표정을 보인다면 그의 강의는 진부한 강의가 될 것이다. 이처럼 듣는 사람은 말하는 사람의 말을 결정할 힘을 가지고 있다. 어떤 특정한 전언을 전달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의 의미는 항상 타자에 의해 결정되기 마련이다. 물론 이 강사는 자신이 모든 것을 다 말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강사는 나중에 그들의 보고서나 시험 답안지를 보고서 자신의 이야기가 전혀 다르게 이해되었고 나아가 다른 식으로 전개되는 경험을 곧 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상대방이 말하는 사람과 같은 공동체에 속하는가 아니면 그렇지 않은가의 여부다. 일인칭적으로는 말과 그것의 의미 사이에는 확정된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타자를 도입하게 되면 이 확정된 관계는 동요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언어 규칙이 상이한 이방인에게 말을 건넸지만 그 이방인은 우리가 한 말의 의미를 전혀 모를 때, 우리가 한 말은 과연 말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 경우 우리 입강에서는 분명히 말을 한 것이지만, 이방인의 입장에서는 분명 말을 하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다. 역으로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확정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예를 들어 우리와 같은 공동체에 속한 사람이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의미 있는 행동을 했을 때를 생각해 보자. 이 경우 우리 입장에서도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분명 말은 의미 있게 작동한 것이다. 이처럼 말과 말하려는 것, 언어와 의미 대상 사이에는 직접적인 필연성이 없다. 왜냐하면 언어와 그 의미는 항상 말을 듣는 타자와 관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6. 인간의 말과 새소리는 구별되지 않는다

 

 

 

언어에 대한 고찰을 심화하기 위해 장자는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를 도입하고 있다. ‘인간의 말과 새들의 소리는 구별되는가? 구별되지 않는가[其以爲異於鷇音, 亦有辯乎]?’ 일단 이 의문에 대해 장자는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고 있다. 아마도 장자는 우리로 하여금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숙고하도록 함으로써 언어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파악하도록 유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일단 장자의 질문에는 가능한 답이 두 가지 있을 수 있다.

첫째, 인간의 말과 새 소리는 구별된다.

둘째, 구별되지 않는다.

사실 인간의 말과 새 소리가 구별된다는 것은 상식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음과 같이 질문을 던질 수 있다면 이런 상식적인 주장이 생각만큼이나 그렇게 자명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낯선 언어를 쓰는 사람의 말과 새 소리는 우리에게 무의미한 소리로 현상한다는 점에서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러나 그 낯선 언어를 쓰는 사람이 자신의 공동체에서 사용하는 말이나, 또는 어린 새가 자기의 어미에게 지저귈 때의 새 소리는 의미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점에서 인간의 말과 새 소리가 구별된다는 상식적인 주장에는, 쓰임[]과 일상성[]을 강조하는 장자의 통찰이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이런 상식적인 주장은 인간과 새가 다르다는 전제된 통념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새 소리가 우리 인간에게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이유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의 쓰임이 새들이 모여 사는 새의 공동체라는 삶의 문맥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낯선 언어를 구사하는 이방인의 말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말은 새 소리와 구별되지만, 그 이유는 새 소리가 그 자체로 쓰임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와는 무관한 쓰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인간의 말은 새 소리와 구별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인간의 말과 새 소리는 모두 각각의 삶의 문맥에서 쓰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자는 지금 쓰임을 강조하는 문맥주의 혹은 상대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일까?? 인간의 말과 새소리를 비유하면서 장자는 우리의 삶이 숙명적으로 유아론적일 수밖에 없다는 비관적인 생각을 우리에게 전하려는 것일까? 성급한 대답을 자제하고 그의 이야기를 조금더 경청하도록 하자.

 

 

 

 

인용

지도 / 목차 / 장자 / 수업 / 삶과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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