Ⅴ. 대대(待對)와 무대(無對)
어떤 것도 저것 아님이 없고, 어떤 것도 이것 아님이 없다. 만일 당신이 당신 자신을 저것으로 간주한다면, 자신을 보지 못하고, 그렇지 않고 만일 당신이 자신을 이것으로 여긴다면 자신을 알게 될 것이다.
物無非彼, 物無非是. 自彼則不見, 自知則知之.
따라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저것은 이것으로부터 나오고, 이것은 또한 저것에 따른다.” 이것이 이것과 저것이 동시에 생긴다는 의견이다.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런 설명에 따르면) 동시에 생긴다는 것은 동시에 소멸한다는 것이다. 또 동시에 소멸한다는 것은 동시에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을 긍정하는 것은 동시에 이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故曰: 彼出於是, 是亦因彼. 彼是方生之說也. 雖然, 方生方死, 方死方生; 方可方不可, 方不可方可;
만일 이것인 상황에 따르면[因是] 이것이 아닌 상황에 따르는 것[因非]이고, 이것이 아닌 상황에 따르면 이것인 상황에 따르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저것이고, 저것은 또한 이것이다. 저것도 또한 시비판단으로 정립되고, 이것도 또한 시비판단으로 정립된다.
因是因非, 因非因是. 是亦彼也, 彼亦是也. 彼亦一是非, 此亦一是非,
그렇다면 저것과 이것은 진실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은 것일까? 저것과 이것이 대대하지 않은 경우를 도의 지도리라고 부른다. 한번 그 축이 원의 중앙[環中]에 서게 되면, 그것은 무한하게 소통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옳다도 하나의 무한한 소통으로 정립되고, 아니다도 하나의 무한한 소통으로 정립된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방법은 밝음을 사용하는 것[以明)]이다”라는 말이 있다.
果且有彼是乎哉? 果且無彼是乎哉?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以應無窮. 是亦一無窮, 非亦一無窮也. 故曰莫若以明.
1. 동일성의 논리와 대대(待對)의 논리
1. 서양철학과 중국철학의 차이
서양 철학과 중국 철학은 어디에서 구분되는가? 많은 다양한 지점에서 서양 철학과 중국 철학은 차이가 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서양 철학이 기본적으로 동일성(identity)을 사유했었다면 중국 철학은 관계(relation)를 사유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버지라는 개념을 생각해보자. 이 경우 서양 철학이 아버지가 아버지일 수 있는 동일성을 묻는다면, 중국 철학은 아버지와 자식 사이의 관계와 같은 관계성을 묻는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우리 앞에 의자가 있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서양 철학은 의자가 의자로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동일성을 찾는다. 의자는 네 다리가 있고 그 위에 앉을 수 있는 받침대가 있는 모양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런 형상을 가져야만 의자일 수 있다. 이런 형상이 바로 의자 자체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양 철학에서는 형상인과 질료인이라는 구분들이 중요하다. 여기서 형상인이 의자의 설계도면이라면, 질료인은 아직 의자가 되지 않은 나무토막들을 가리킨다. 결국 서양 철학은 기본적으로 제작이라는 관심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중국 철학에서는 의자는 기본적으로 나와 어떤 관계에 있느나를 사유하려고 한다. 의자는 기본적으로 내가 앉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리가 세 개가 있다고 해도 만약 그것이 앉을 수 있는 것이라면 의자라고 부를 수가 있다. 반면 다리가 네 개라고 해도 만약 그것이 내가 누울 수 있는 것이라면 침대라는 다른 사물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의자는 나와의 관계를 통해서 의자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철학에서는 개별자와 관계라는 구분이 중요하다. 어떤 것에 내가 앉으면 그것은 의자가 되지만, 만약 내가 그것을 불태우면 그때 그것은 장작이 된다. 이처럼 중국 철학의 도식은 기본적으로 사용이라는 관심에 의해 규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M.Heidegger)가 말한 것처럼 서양 철학의 진리가 빛이나 태양으로 상징된다면, 중국 철학에서의 진리는 태극 무늬로 상징된다. 태극 무늬를 보면 붉게 표시되는 북쪽과 파랗게 표시되는 남쪽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붉은 색과 파란 색의 경계는 일직선이 아닌 파문 형태로 그려져 있다. 태극 무늬에서 우리가 이 태극원의 중점을 지나게 선을 긋는다고 해보자. 그렇게 선을 그어보면 우리는 항상 그 선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반원에는 반드시 붉은 색과 파란색이 함께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국 송나라의 신유학자인 정호(程顥)는 이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모든 개별자들은 홀로 있을 수가 없고, 반드시 짝이 있기 마련이다[萬物無獨, 必有對].” 이처럼 서양 철학이 어떤 개별자 하나하나의 동일성을 추구할 때, 중국 철학은 그 개별자의 짝과 그 사이의 관계를 추구해 나간다. 예를 들어 남자의 동일성을 용감함이라고 서양 철학에서 주장한다면, 중국철학에서는 남자란 여자와 짝하는(= 관계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2. 동일률을 추구하는 서양철학
서양 철학의 이런 고유성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다툼과 논쟁을 근본으로 삼는 그리스 철학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옳고 그름에 대한 그들의 논쟁, 혹은 동일성이 무엇이냐는 논쟁은 보편적인 것에 의한 근거 제시, 곧 정당화의 절차로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이들의 동일성을 모색하는 논쟁은 보편자에 대한 탐색, 그리고 탐색된 보편자에 의해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발전해 갔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삼단논법의 경우를 살펴보자. ‘모든 인간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도 인간이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도 죽는다.’ 이 경우 우리는 ‘이 삼단논법을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이 주장하고 싶은 것이 무엇일까?’라고 질문을 보아야 삼단논법이 지닌 핵심적 문제틀에 이를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라는 주장일 것이다. 이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이 사람은 앞의 두 명제들을 찾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람은 이렇게 발견된 두 명제들을 전제로 삼아서 자신이 주장하고 싶은 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우리는 삼단논법 구성의 동기가 주어진 문제의 결론에 대하여 그것을 증명해 줄 전제들을 찾는 데 있다는 점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결국 삼단논법은 법정의 논리에 가까운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검사라고 해보자. 그리고 살인사건이 발생했다고 하자. 우리는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 ‘사람을 고의로 죽이는 경우는 사형에 처한다’ 등의 법, 조문들을 통해서 살인범을 찾지는 않는다. 오히려 어떤 사람을 용의자로 지목하고, 그 사람을 살인범으로 증명해서 사형을 구형하기 위해서 증거들을 찾아 헤매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증거들을 법조문에 기록된 일반원리들과 결합시켜서, 그 용의자가 살인범이고 따라서 사형을 구형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검사로서 우리가 발견하는 증거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알리바이다. 다시 말해 용의자가 범죄 현장에 있었느냐의 여부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검사로서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진술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용의자가 범죄 현장에 있었기도 하고 없었기도 하다’라는 식의 진술이다. 범죄 현장에 있었다면 범죄 현장에 없을 수 없고, 만약 범죄 현장에 없었다면 범죄 현장에 있을 수 없다. 여기에 바로 모순율이라는 것이 작동한다. 결국 용의자의 정체(= 동일성)를 밝히기 위해서 검사로서 우리는 모순율이라는 원리를 지켜야만 한다.
따라서 동일성을 추구하는 서양 철학의 탐구 형식은 모순율로 규정될 수 있다. 여기서 모순율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어떤 것이 참이면서 동시에 거짓이라는 진술을 피해야 한다는 원리를 말한다. 예를 들면 ‘이 꽃은 붉고 동시에 붉지 않다’는 주장은 모순율을 어긴 주장이 된다. 그러나 왜 이런 주장을 해서는 안 될까? 예를 들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지만 미워하기도 해’라는 모순된 문장을 흔히 쓰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문장을 통해서 그 사람이 지금 나와 애매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런 애매한 경우에 빠질 때 서양 철학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면서 그 사람의 정체(= 동일성)를 밝히려고 한다. “그 사람은 사랑하면서 동시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모순율에 어긋나는 주장이기 때문이야. 분명 그 사람은 나를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 거야. 어느 것이 옳을까?” 우리는 여기서 서양 철학이 지닌 거친 이분법적 속성과 이로부터 기인하는 폭력성을 짐작하게 된다. 사랑이 싹틀까 말까 하는 애매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 “당신은 나를 사랑하는 거야 아니면 사랑하지 않는 거야?”라고 질문하게 되면, 아마도 이 사람은 사랑하려던 마음을 접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쨌든 서양 철학에서 모순된 주장은 무용할 뿐만 아니라 해결되어야 할 문제일 뿐이다. 서양 철학에서 ‘이 꽃은 붉고 동시에 붉지 않다’는 명제는, 이 꽃의 정체(= 동일성)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런 것도 알려주지 않는 명제일 뿐이다. 결국 서양 철학은 변화를 포착하는 데 무력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붉은 꽃은 언젠가 붉기도 하고 붉지 않기도 한 상태를 거쳐서 시들어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워하던 사람이 언젠가 사랑스럽게 된다거나 혹은 혁명이라는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에 대해서 서양 철학은 무능력할 수밖에 없다. 이 점에서 우리는 서양 철학이 어느 시점을 마치 사진처럼 고착화시켜서 사유한다고, 따라서 공간화된 사유라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누군가에게 어제 본 붉은 꽃을 가지고 오라고 시켰을 경우, 그런데 그 꽃은 이미 시들고 있는 경우, 그 사람은 결코 그 꽃을 가지고 올 수 없을 것이다. 그 붉은 꽃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제 마음 속에 사진처럼 가지고 있는 기억에서나 가능할 뿐이다. 이처럼 서양 철학이 동일성(= 또는 정체성)을 추구할 때 최종적으로 피해야 할 것은 바로 모순율이었다. 다시 말해 모순을 피하겠다는 이런 의지는 동일률을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에 다름아닌 것이다. 서양 철학에서 ‘이 꽃은 붉다’는 문장은 붉지 않음을 배제한 다음에야 출현할 수 있는 명제다. 정확히 말해 ‘이 꽃은 붉다’는 문장은 ‘이 꽃은 붉지 않은 것이 아니다’를 나타내고 있다는 말이다. 이처럼 서양의 동일성에로의 추구는 차이와 타자적인 것을 배제한 다음에야 가능하다는 점이 중요하다.
3. 관계로 파악하되 동일성을 놓지 않았던 중국철학
앞에서 우리는 서양 철학과 달리 중국 철학은 관계를 강조한다고 말한 바 있다. 중국 철학에서의 관계 논리를 대대(待對)의 논리라고 부르도록 하자. 여기서 대대라는 말은, ‘의존한다’는 뜻의 대(待)라는 말과 ‘짝한다’라는 뜻의 대(對)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서로 의존하면서 짝한다’는 의미다. 『도덕경』 2장을 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온다. “있음과 없음은 서로를 낳고, 어려움과 쉬움은 서로를 이루고, 깊과 짧음은 서로를 드러나게 한다[有無相性, 難易相成, 長短相較].” 한 유한자는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다. 이 말은 역설적으로 들린다. 그러나 현상에 대한 규정이 항상 이런 식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게 관찰된다. 예를 들면 계란은 수박과 있으면 작다는 규정을 받지만, 콩과 있으면 크다는 규정을 받는다. 관계를 떠나서는 그다. 작다라는 식의 규정은 거의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떤 유한자 X는 Y와의 관계 하에서 개념 쌍[대대개념]의 규정을 수용한다. 만약 X가 ‘크다/길다/있다(大/長/有)’는 규정을 받으면, 이 X와 조우한 Y는 ‘작다/짧다/없다(小/短/無)’라는 규정을 받게 된다. 흔한 이해에 따르면 노자의 사상은 ‘언어로는 실재를 기술할 수 없다’는 언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서양의 개념적 논리에 입각해서 바라본 견해일 뿐이다. 만약 누군가가 노자에게 ‘계란은 크다’라고 말한다면, 그는 이런 식의 진술에 대해서는 부정적일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계란은 콩보다 크다’라고 한다면, 노자는 이 진술을 결코 부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노자를 포함해서 중국 철학 전통에서 진술에 등장하는 크다라는 술어는 플라톤 식으로 큼 자체(the large itself)와 같은 개념의 동일성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다. 오히려 중국 철학 전통에서 개념적 규정은 항상 대대의 논리에 따라 진행된다. 다시 말해 어떤 것에 크다는 규정이 부여되면, 그것과 관계하는 다른 것에는 이미 작다는 규정이 부여된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개별자가 두 개의 다른 개별자와 동시에 관계하고 있다면, 그 개별자는 동시에 작다와 크다로 규정될 수 있다. 이런 예로는 사과가 딸기와 수박과 동시에 관계하고 있다면, 이 사과는 작다와 크다고 동시에 규정될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선생님과 관계하면 제자로 규정되고, 학생들을 만나면 선생님으로 규정된다. 또 나는 나의 아버지와 만나면 자식으로 규정되고, 내 자식과 만나면 아버지라고 규정된다. 이처럼 자식이라는 규정은 아버지라는 규정과 분리불가능하게 상호의존되어 있는 규정이고, 선생님이라는 규정도 이와 마찬가지로 제자라는 규정과 대대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태극 무늬도 음과 양이라는 상이한 규정을 동시에 품고 있게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중국 전통의 윤리 중 유명한 삼강오륜(三綱五倫)도 바로 이런 대대의 논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ㆍ부위자(父爲子綱)ㆍ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하는데, 이것은 글자 그대로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다. 또 오륜은 오상(五常) 또는 오전(五典)이라고도 하는데, 부자유친(父子有親)ㆍ군신유의(君臣有義)ㆍ부부유별(夫婦有別)ㆍ장유유서(長幼有序)ㆍ붕우유신(朋友有信)의 다섯 가지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道)는 친애함(親愛)에 있으며,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구별이 있으며,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 사이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뜻한다. 이처럼 삼강오륜도 기본적으로 대대의 논리로 점철되어 있다. 군신, 부자, 부부, 장유, 친구 사이는 기본적으로 사회에서 가능한 관계를 모두 망라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국 철학의 모든 개념 규정은 대대 관계에 있는 다른 개념과 하나의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의미를 갖고 작동하는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런 대대 관계는 공자, 노자, 『주역』 모두에 공통된 전제다. 표면적으로 서양 철학에서는 모순을 근원적으로 해소해서 동일성을 추구했다면, 중국 철학은 이것을 근본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중국 철학도 명확하게 동일성을 추구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중국 철학도 가능성[潛ㆍ隱ㆍ陰]과 현실성[顯ㆍ陽]의 논리를 도입해서 모순을 대대의 논리로 배치해 해소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모순을 배제하려는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이런 가능성과 현실성의 논리는 출현될 수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어떤사람이 지금 아버지를 만났을 때 자식이라는 규정과 동시에 아버지라는 규정을 동시에 실현해서는 안 된다. 이 경우에는 아버지라는 규정은 가능성의 층위에만 머물러 있어야 한다.
결국 중국 철학 일반의 고유성을 규정한 제자백가들도 서양 철학 일반의 고유성을 규정한 그리스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모순을 피하려고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단지 서양 철학자들과 중국 철학자들 사이에는 모순을 피하려는 해법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예를 들면 어느 한 시점에서 장미가 붉다고 할 때, 그리스 철학자들은 붉은 장미꽃은 붉을 뿐이지 노랄 수 없다는 것에 만족한다. 반면 선진(先秦) 철학자들은 붉은 장미꽃도 언젠가 시들어 노랗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따라서 이들은 붉은 장미에게서 노랑은 다만 숨어 있다[潛]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장미꽃이 동시에 노랗거나 붉다는 모순을 중국 철학자들도 수용하지는 않는다. 이 점에서 이들 중국 철학의 철학자들은, 서양 철학의 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동일성을 추구했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2. 대대 논리의 해체: 무대(無對)
1. 데라다와 장자
현대 프랑스 철학자들의 공헌은 전통 서양 철학의 동일성의 논리를 해체했다는 데 있다. 그러나 현대 프랑스 철학이 지닌 중요성은 그들이 단순히 동일성을 해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동일성 그 자체가 차이에 의해 작동하고 기능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는 데 있다. 색깔을 예로 들어 보자. 논의를 간단히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세상이 흑백이라는 두 색깔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보자. 이 경우 검정색이 검정색으로 식별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검정색이 흰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반대로 흰색이 흰색으로 식별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흰색이 검정색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흰색이라는 동일성은 검정색과의 차이로부터 가능하고, 역으로 검정색이라는 동일성은 흰색과의 차이로부터 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논의는 무한히 확장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남자는 자체로서 동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자와의 차이를 통해서 의미를 가지게 되고, 선진국은 자체로서 동일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후진국과의 차이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지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극찬해 마지않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차이에 대한 논리는 중국 철학의 대대라는 관계의 논리와 매우 유사해 보인다. 물론 여기서 우리는 현대 프랑스 철학의 차이에 대한 논리가 단순히 중국 철학의 논리와 같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현대 프랑스 철학에서 차이에 대한 논리가 기본적으로 현상학적인 지평에서 논의되지만, 중국 철학에서 대대에 대한 논리는 주로 존재론적이거나 사회철학적인 지평에서 논의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불교철학에서, 특히 『중론(中論)』의 공(空)의 논리에서 논의했던 대대나 차이에 대한 논리는 현상학적 지평(= 고통과 집착의 현상학)에서 주로 논의되었다는 점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단지 상이한 두 철학 전통이 공유하고 있는 내적인 논리 형식의 유사성이다. 다시 말해 현대적인 차이의 논리이든 아니면 전통 중국 철학에서의 대대의 논리이든, 이 두 논리는 모두 ‘A는 - A의 의미를 통해서만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여자는 남자가 아님으로, 역으로 남자는 여자가 아님으로 정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차이에 대한 논리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데리다(J. Derrida)는 자신의 동일성 해체 전략을 『철학의 여백들(Margins of Philosophy)』에서 피력한 적이 있다.
철학자의 담론이 언어의 울타리 안에서 갇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 여전히 그 언어 안에서 그리고 그 언어가 제공하는 대립 쌍들을 가지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데리다에 따르면 우리는 동일성을 해체하기 위해 차이를 도입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차이를 넘어설 수는 없는 존재다. 그의 이런 주장은 ‘텍스트의 바깥은 없다’는 그의 유명한 선언으로 압축되어 표현된다. 바로 이 점에서 장자철학이 지니는 근본적 비판정신이 의미를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장자철학은, 전통 중국 철학에서 자명하다고 생각하는 대대의 논리를 철저하게 해체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현대적인 차이의 논리마저도 문제삼을 수 있는 지점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김형효는 『노장사상의 해체적 독법』이란 자신의 야심만만한 책에서 데리다와 장자 사이의 해체적 전략의 유사점을 설득력 있게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우리는 데리다와 장자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점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데리다에게 텍스트의 바깥은 없고, 따라서 우리는 차이 체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장자에 따르면 텍스트는 꿈과 같이 구성된 것이고, 따라서 우리는 차이의 체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2. 저것과 저것 아닌 것
이제 발제 원문으로 되돌아가 보자. ‘어떤 것도 저것 아님이 없고, 어떤 것도 이것 아님이 없다[物无非彼, 物无非是].’ 원칙적으로 세계는 소[牛]인 것과 소 아닌 것이라는 대대 논리로 설명 가능하다. 젖소ㆍ황소ㆍ물소 등이 소인 것에 속한다면, 대통령ㆍ염소ㆍ원자폭탄ㆍ오사마 빈 라덴ㆍ미적분학 등은 모두 소 아닌 것에 속할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소인 것과 소 아닌 것이라는 논리에만 해당될 수 있는가? 추상적으로 만일 우리가 개념 A를 사용하고 싶다면, 또 세계는 A인 것과 A 아닌 것으로 설명될 것이다. 이처럼 장자는 세게를 분할하는 핵심적인 논리가 대대 관계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아울러 이런 대대 관계에 의해 분할되어 우리에게 현상하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자의적이라는 것도 암시하고 있다.
장자는 대대 논리를 저것을 의미하는 피(彼)라는 개념과 이것을 의미하는 시(是)라는 개념으로 정리하려고 한다. 그런데 장자는 왜 언어를 분석하면서 많은 가능한 예들 중 하필이면 대명사에 해당하는 이것과 저것을 예로 삼고 있을까? 아마도 이것과 저것이라는 대명사처럼 마치 지시대상을 확실히 가지고 있어 보이는 것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또 지식인들의 옳고 그름[是非]의 논쟁에는 기본적으로 이쪽과 저쪽이라는 의식, 즉 이것과 저것이라는 기본적인 구분이 전제되어 있다는 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또 다른 의문이 생겨난다. 왜냐하면 저것과 이것으로 장자는 피와 시를 사용하고 있는데, 관용적으로 ‘저것(혹은 저쪽)’과 ‘이것(혹은 이쪽)’을 나타내는 말은 피(彼)와 차(此)이기 때문이다. 장자가 관용적인 피차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피시라는 용어를 쓴 이유를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론해 볼 수 있다. 장자는 이쪽이라는 의식이 이미 옳음(혹은 이것이다)이라는 판단을 낳을 수 있는 계기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결국 장자가 피시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이런 언어의 대대 관계 속에는 고착된 자의식의 계기와 아울러 그런 자의식에 근거한 인식 혹은 시비판단을 비판할 수 있는 계기도 전제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의 모든 것들은 저것이라고 불릴 수도 있고, 이것이라고 불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혹은 자신에 대해 이것이라는 말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저것이라는 말을 동시에 알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저것 아님으로 정립되기 때문이다. 그 역이라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장자에 따르면 어떤 개념 A를 이용한 단언은 -A가 아님을 단언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기호적으로 A ≠ (-A)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장자에 따르면 결국 ‘이것과 저것은 동시에 생기는[彼是方生]’ 것이다. 장자의 이런 생각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질 수 있다. 즉 장자의 이런 언어에 대한 이해도 또 하나의 옳음[是]을 주장하는 담론이 아닌가? 장자는 이런 식의 반론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자신이 말한 언어의 대대 관계에 대한 언명, 즉 ‘이것과 저것이라는 개념은 동시에 생긴다’라는 표현을 다시 한 번 뒤틀어 버린다. ‘이것과 저것이라는 개념이 동시에 생긴다’고 말할 때의 동시에 생긴다[方生]도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동시에 소멸한다[方死]는 의미를 대대적으로 전제해야 한다. 그렇다면 결국 장자는 언어의 의미가 그 자체의 대대 논리를 전제로 한다는 자신의 주장을 유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런 언어에 대한 이해를 근거로 자유롭게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3. 우는 사람을 대하는 두 가지 태도
단순히 동시에 생긴다[方生]는 관념이 동시에 소멸한다[方死]는 관념을 함축한다는 지적으로 우리는 이것과 저것이란 대대 관계를 해체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에 대해 장자는 발제 원문에서 다음과 같은 결정적인 진술을 하고 있다. “스스로를 저것[彼]으로 여기면 자신을 보지 못하고, 스스로를 이것[是]이라고 여기면 자신을 알게 된다[自彼則不見, 自是則知之].” 한문에서 자신을 의미하는 자(自)라는 글자는 동사와 결합되어 쓰이는 경우 재귀문을 형성하게 된다. 예를 들어 자동(自動)이라는 표현은 문법적으로 ‘자신이 자신을 움직인다’로 번역된다. 따라서 위 원문에 나오는 자피(自彼)는 ‘자신이 자신을 저것이라고 여긴다’ 번역되고, 자시(自是)는 ‘자신이 자신을 이것이라고 여긴다’로 번역된다.
‘자신을 저것으로 여긴다’는 사태와 ‘자신을 이것으로 여긴다’는 사태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간단한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내 앞에 어떤 사람이 슬픔에 젖어 하염없이 울고 있다고 해보자. 이런 경우 나는 그 사람에 대해 두 가지 경우로 반응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내가 마치 스스로 그 슬픔에 빠진 사람인 것처럼 같이 슬퍼하는 경우다. 물론 이 경우는 ‘내가 저 사람과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얼마나 슬프겠는가?’라는 판단 끝에 이루어지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갓난아이들에게 자의식이 생기기 전에는 나와 너라는 구별이 생기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나와 너라는 구별은 바로 자의식의 출현과 동시적인 사태라고 할 수 있다. 갓난아이들이 여럿이 모여 있는 경우, 그 중 한 아이가 울게 되면, 모여 있는 모든 갓난아이들은 동시에 울곤 한다. 바로 이 경우가 자피(自彼)의 한 사례다.
다음으로 우리는 슬픔에 빠진 사람에 다음과 같이 반응할 수도 있다. 우리는 슬픔에 빠진 사람은 슬픔에 빠진 사람이고 나는 나라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하면서, “왜 우느냐?”고 위로하곤 한다. 갓난아이들에게 자의식이 생기면, 그들은 이전처럼 집단적으로 울지 않는다. 오히려 이 경우 어떤 아이가 울면 멀뚱멀뚱 바라보면서 자신이 하던 놀이를 계속하기 마련이다. 이것은 이제 아이들이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자의식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로 이 경우가 자시(自是)의 사례다. 우리는 자시(自是)의 사례가 ‘이것과 저것이 동시에 생긴다[方生]’의 경우를 설명하고 있다면, 자피(自彼)의 사례는 ‘이것과 저것이 동시에 소멸한다[方死]’의 경우를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자시(自是)와 자피(自彼)의 의식
장자는 지금 우리로 하여금 갓난아이로 되돌아가라고 권하는 것일까? 이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장자가 권고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분명 장자철학에서 갓난아이는 하나의 이념으로 도입되어 있다. 다시 말해 어른으로서 우리는 갓난아이로 상징되는 유동성을 확보해야 삶을 잘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삶을 잘 영위하기 위해 서 타자와 잘 소통해야 함은 말할 나위도 없다. 「경상초(庚桑楚)」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처럼 순진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는 하루 종일 울어도 목이 쉬지 않고, 또 하루 종일 주먹을 쥐고 있어도 손이 저리지 않는다. 또 하루 종일 보면서도 눈을 깜빡거리지 않는다. 길을 가도 가는 곳을 알지 못하고, 앉아 있어도 할 일을 알지 못한다. 외부의 타자에 순응하고, 그 타자의 흐름에 자기를 맡긴다. 이것이 삶을 기르는 방법이다.
能兒子乎! 兒子終日嘷而嗌不嗄, 和之至也; 終日握而手不掜, 共其德也; 終日視而目不瞬, 偏不在外也. 行不知所之, 居不知所爲, 與物委蛇而同其波. 是衛生之經已.
흔히 더럽고 추한 사람을 보면 어른들은 인상을 쓰지만, 갓난아이는 오히려 그런 사람과 어울려 즐겁게 놀 수 있다. 이것은 갓난아이가 자신이 조우하는 타자를 어떤 기준에 의해 평가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어른들이 항상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의식, 즉 자시(自是)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갓난아이는 나와 너가 분리되지 않는 의식, 자피(自彼)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은 자피라는 의식의 상태로부터 자시라는 의식의 상태로 이행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런 식으로 우리는 ‘나는 남자다’라든가, ‘저기에 있는 여자는 아름답다’라든가, 아니면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현실적인 어른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른으로서의 우리는 진정으로 자신의 삶의 주인일 수 있으며, 나아가 타자와 잘 소통할 수 있는가? 갓난아이는 거울을 보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상이 자기의 모습인지를 알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 어른들은 거울을 보고 그 거울에 비친 상이 자신의 모습인지를 안다. 그래서 우리는 얼굴에 묻은 것을 지우기도 하고 화장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거울에 비친 상이 자신의 모습인지를 알 수 있을까? 왜냐하면 우리는 거울에 비친 상과 자신의 모습을 동시에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우리는 한 번도 우리의 눈으로 자신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이 없지 않은가? 따라서 거울에 비친 상과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서 ‘거울에 비친 상은 네 모습이 맞다’고 말해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거울의 상과 자신의 모습 이외의 제3자가 바로 공동체의 규칙이다. 이 공동체의 규칙은 내가 무엇을 한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내가 원해서가 아니라, 공동체의 타자가 원해서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해명해준다. 이런 이해에 따르면 우리는 스스로를 공동체의 규칙이 욕망하는 대상으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서 구성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스스로를 나라고 여기는 자시(自是)라는 의식의 진정한 주인은 누구인가? 나와 너, 추녀와 미녀, 즐거운 것과 불쾌한 것 등의 구분은 결국 나를 통해서 작동하고 있는 공동체의 규칙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결국 어른으로서의 우리는 공동체의 규칙이 꾸고 있는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하면서, ‘저기에 있는 여자는 아름답다’고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처럼 평가를 내린다. 이런 메커니즘 속에서 과연 타자와의 소통은 가능하기라도 한 것일까? 바로 이런 질문에서 장자가 저것과 이것이 동시에 소멸한다[彼是方死]‘고 말한 자피(自彼)라는 해체의 논리가 의미를 지니게 된다.
5. 나는 내 자신을 잃다
대대의 논리에 의해 A와 -A가 동시에 소멸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을 시(是)라고 여기던 고착된 자의식이 스스로 자신을 피(彼)라고 여겨야만 한다. 그렇게 되면 자피(自彼)라는 의식 속에서 시(是)와 피(彼)는 겹치게 되면서, 대대의 논리는 해체될 수 있는 실마리를 얻게 된다. 우리는 대대 논리의 해체를 무대(無待)라고 부를 수 있는데, 이것을 기호로 표시하면 ‘A = -A’라고 쓸 수 있다. 무대가 무엇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제물론(齊物論)」편에 가장 먼저 나오는 남곽자기(南郭子綦)와 그 제자 안성자유(顔成子游)의 대화를 읽어보도록 하자.
남곽자기가 탁자에 의지하고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짝을 잃어버린 것과 같아 보였다. 안성자유는 그 앞에 시중들면서 서 있었는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디에 계십니까? 몸은 진실로 시든 나무처럼, 마음은 꺼진 재처럼 만들 수 있습니까? 오늘 탁자에 기대고 앉은 사람은 어제 탁자에 기대고 앉았던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자 남곽자기가 말했다. “현명하게 그것을 너는 질문하는구나, 자유야! 지금 나는 내 자신[吾]을 잃었는데, 너는 그것을 아느냐?”
南郭子綦隱几而坐, 仰天而噓, 嗒焉似喪其耦. 顔成子游立侍乎前, 曰: “何居乎? 形固可使如槁木, 而心固可使如死灰乎? 今之隱几者, 非昔之隱几者也?” 子綦曰: “偃, 不亦善乎而問之也! 今者吾喪我, 汝知之乎?
안성자유에게 자신의 스승 남곽자기는 시든 나무, 꺼진 재와 같이 죽음의 이미지로 현상하고 있다. 다시 말해 그에게 남곽자기는 살아있으면서도 동시에 죽어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남곽자기는 지금 살아있으면서 동시에 죽은 상태, 즉 삶= 음이라는 무대의 상태를 체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 남곽자기는 살아있다고 규정하기도 어렵고 죽었다고도 규정하기도 어려운 애매한 상태에 있다. 이 애매한 무대의 상태 속에서 남곽자기는 “나는 내 자신을 잃었다[吾喪我]”고 술회한다. 여기서 아(我)는 인칭적 자아나 고착된 자의식을 가리킨다. 따라서 오상아(吾喪我)란 주체의 소멸이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칭성을 제거한 주체, 비인칭적인 주체를 달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인칭적 자아를 상실했다고 하더라도 나[吾]는 남아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만약 남곽자기에게서 일체의 주체 형식이 소멸했다면, 그는 자신의 제자에게 오상아(吾喪我)라고도 술회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분명 삶 죽음을 나타내는 A=-A라는 무대(無侍)의 공식은 모순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형식논리에 따르면 어떤 것도 A라는 규정을 받는 동시에 -A라는 규정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장자가 제안하는 대대 관계의 해체, 즉 무대는 기존의 형식논리에 입각해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무대의 공식으로서 A= -A는 A라는 규정과 -A라는 규정이 겹쳐지는 공간, 그래서 언어와 그것에 의해 작동하는 사유의 분별작용이 불가능해지는 공간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형식논리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에게 이 공간은 칼날과 같이 날카로운 선으로 보여서 결코 안주할 수 없다고 여겨지겠지만, 무대의 마음을 가진 사람에게는 넓고 편안해서 여유 있게 안주할 수 있는 삶의 공간으로 여겨질 것이다. 우리는 이 공간이 허(虛)나 무위(無爲)의 공간이지만 동시에 소통[通]과 무불위(無不爲)의 공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 공간은 허무주의적이거나 신비주의적인 초월의 경지를 나타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공간은 형이상학적인 사변이나 논리적인 사변의 세계가 소멸되고, 실천적인 삶의 세계가 열리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3. 도의 지도리[道樞]와 밝음을 쓴다[以明]의 의미
1. 수영을 배우는 어른과 아이의 차이
이어지는 발제 원문을 보면 장자는 마음의 무대(無待)의 상태를 도의 지도리[道樞]라고 부르고 있다. 우선 원문을 자세히 읽어보도록 하자.
저것과 이것이 대대하지 않는 경우를 도의 지도리라고 부른다. 한번 그 축이 원의 중앙[環中]에 서게 되면, 그것은 무한한 소통을 하게 된다.
彼是莫得其偶, 謂之道樞. 樞始得其環中, 以應無窮.
여기서 도추(道樞)는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무대의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도추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비유를 통해 이 개념의 의미를 알아보도록 하자.
우선 우리는 돌아가는 물레의 중심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돌아가는 물레에 물건을 올려놓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만약 중심에 정확하게 올려놓지 못하면, 그 물건은 바깥으로 튕겨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정확하게 그 물건을 돌아가는 물레의 중심에 올려놓으면 그것은 움직이면서도 움직이지 않는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움직이면서 동시에 움직이지 않은 상태도 바로 A=-A라고 표현되었던 무대의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장자는 이런 마음의 상태를 ‘원환의 중심을 얻은 것[得環中]’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또 도추를 소용돌이나 혹은 태풍으로 비유할 수도 있다. 소용돌이나 태풍의 주변부는 너무나 거칠고 위험하지만 그 중심부는 고요해서 맑은 하늘이 보일 정도로 안정되고 평온하다. 겉으로 보기에 이 중심부는 비워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하게 비워져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비어 있는 상태는 강렬한 소용돌이를 가능하게 하는 부동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결국 소용돌이 내부의 비어 있음은 외부의 강렬한 운동과 동시적인 사태인 것이다.
장자에게 남겨진 문제는 도추의 상태가 모든 세속적인 것들을 초월한 절대자의 경지로 오해될 여지가 있다는 데 있다. 장자는 이어지는 구절에서 도추의 상태는 마음이 자신의 본래의 자리를 얻어서 무한하고 복수적인 타자들에 대응할 수 있는 상태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여기서 잠깐 도추의 마음이 어떻게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지 비유적으로 설명해보도록 하자. 다시 수영을 예로 들어보자. 갓난아이를 물에 넣으면 그 아이는 자유자재로 수영을 하고 노닌다. 반면 어른은 물에 들어가면 허우적거리며 대개는 물에 가라앉아 죽을 고비를 넘기기 마련이다. 도대체 갓난아이와 어른 사이에 이런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어른들이 ‘물은 물이고 나는 나다’는 고착된 자의식을 가지고 있는데, 갓난아이들은 이런 종류의 자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른들처럼 물이 나와는 무관한 물로 현상하게 되면, 그 물은 공포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갓난아이들은 물과 자신을 구별하지 않고 자신의 몸을 물처럼 느낀다. 이처럼 갓난아이들은 스스로를 물이라고 여기는 자피(自彼)의 상태에 있을 수 있다.
2. 원환의 중심을 얻어라
갓난아이들은 결코 물을 물로 대상화하지 않는다. 이 말은 갓난아이들이 ‘나는 나다’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갓난아이들은 조우하는 타자에 맞게 자신을 조절할 수 있는 것이다. 조우하는 타자에 맞게 자신을 조절할 수 있기 위해서, 주체는 기본적으로 유동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장자가 생각하는 우리의 본래적 마음은 바로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유동성을 가지고 있는 자기조절의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물은 네모난 그릇에 담기면 네모난 모양으로 드러나게 되고,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근 모양으로 드러난다. 또 물은 도저히 묘사하기 힘든 복잡한 모양의 그릇이라고 해도 그 그릇에 담기면 그 복잡한 모양으로 그대로 드러난다. 아이의 마음이 이처럼 유동적인 물과 같다면 어른들의 마음은 어떤가? 그들의 마음은 마치 물이 둥근 그릇에 담긴 뒤 얼어서 둥근 모양을 계속 띠고 있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이 둥근 얼음은 네모난 그릇을 만나게 되면 갈등과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다. 자신의 둥긂을 자기 동일성으로 생각하고 있는 얼음에게 네모난 그릇은 자신의 동일성을 파괴하려고 하는 공포의 대상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런 타자에 대한 공포는 둥근 얼음이 자신의 동일성이 둥긁에 있다고 착각하는 데서 기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둥근 얼음의 둥긁은 이전의 타자와 조우해서 생겼던 흔적이 굳어져서 생긴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른들이 물을 두려워하는 것은 그들이 육지와 소통했던 흔적이 굳어져서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른들이 갖는 ‘나는 나고 물은 물이다’라는 자의식의 내용 중 ‘나는 나다’라는 규정은 사실 ‘나는 육지에서 걷는 사람이다’라는 내용으로 풀이될 수 있다. 이처럼 자시(自是)하는 마음은 기본적으로 유동적 자기조절 역량이 굳어져 버린 흔적에 다름 아니다. 장자가 자피(自彼)하는 의식, 즉 무대의 마음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어른으로서 우리가 갓난아이와 같은 유동성을 회복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관건은 고착된 자의식, 즉 자시(自是)하는 마음을 버리는 데 있다. 장자는 이런 마음을 자피(自彼)하는 마음이라고 혹은 도추(道樞)라고 이야기한다. 따라서 장자가 권고하는 ‘원환의 중심을 얻은 것[得環中]’ 또는 비움[虛]이 일종의 정적주의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런 고요함이 역동성의 이면이라는 것, 비움이 타자와의 민감한 소통과 동시적 사태일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장자는 무대의 마음이 무한한 것에 대응할[應無窮]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무한[無窮]은 마음 밖의 타자의 복수성과 다양성을 함축하는 무한이다. 이런 타자의 복수성과 다양성에 기인하는 무한성을 현실적 무한성(actual infinity)이라고 부르도록 하자. 마음이 이런 타자의 무한성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라면 마음도 당연히 무한성을 담보하게 되는데, 우리는 이런 무한성을 잠재적 무한성(virtual infinity)이라고 부를 수 있다. 거울을 비유로 들어보자. 거울 자체의 밝게 비출 수 있는 역량이 잠재적 무한성을 비유한 것이라면, 거울 바깥의 다양하고 복수적인 타자들이 현실적 무한성을 비유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정한 거울의 상, 즉 사과를 비치고 있는 거울의 상은 거울 자체의 밝게 비출 수 있는 역량과 거울 바깥의 사과로 규정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영을 잘 하는 갓난아이의 마음은 자기 조절의 역량과 이 갓난아이 바깥의 물로 동시에 규정될 수 있다.
3.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에 매진하다
발제 원문을 보면 장자는 대대 관계가 해소되어 드러나는 진정한 마음[虛心]으로 세상의 타자와 조우하는 도주의 이야기를 마치면서 갑자기 밝음을 쓰는 것[以明]이 좋다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도대체 밝음을 쓴다고 한 장자의 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밝음을 쓴다는 개념은 「제물론(齊物論)」편에 세 번 등장한다. 앞에서 다룬 원문이 그 하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만일 당신이 그들(儒家와 墨家)이 부정하는 것을 긍정하고 그들이 긍정하는 것을 부정하려고 한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밝음을 쓰는 것이다[欲是其所非而非其所是, 則莫若以明]’라는 구절에서 나온다. 아쉽게도 이 두 번째 구절로도 우리는 도대체 밝음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직접적으로 밝음을 쓴다는 말의 의미를 장자가 개념규정한 구절이 「제물론」편에 나온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살펴볼 다음 구절이다.
완전함과 불완전함이 있기 때문에 소씨(昭氏)가 악기를 탄다. 만일 완전함과 불안전함이 없다면 그는 악기를 타지 않았을 것이다. 악기를 연주하는 소문(昭文), 자신의 막대기에 의지해 있는 사광(師曠), 오동나무에 기대에 있는 혜시(惠施), 이 세 사람의 인식은 아마도 가장 완성된 인식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름이 후대에까지 전해진 것이다. 그렇지만 단지 그들이 선호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을 뿐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이 선호하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을 밝히려고 했다.
有成與虧, 故昭氏之鼓琴也; 無成與虧, 故昭氏之不鼓琴也. 昭文之鼓琴也, 師曠之枝策也, 惠子之據梧也, 三子之知幾乎皆其盛者也, 故載之末年. 唯其好之也以異於彼, 其好之也欲以明之.
다른 사람들은 밝힐 수 없는 데도 그들을 밝히려 했기에 그들은 궤변의 어두움으로 자신들의 삶을 마쳤다. 그리고 그들의 후예들도 또한 소씨의 현악기 줄로 삶을 마쳤지만, 자신의 삶이 끝날 때까지 완전함이 없었다.
彼非所明而明之, 故以堅白之昧終. 而其子又以文之綸終, 終身無成.
이와 같은 데도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나도 완전하다. 아니면 그들은 완전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타자도 나도 완전하지 않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어지럽히고 혼란시키는 (논리나 사변의) 현란함은 성인이 경멸하는 것이다. 옳다는 판단[爲是]은 사용하지 않고 일상적인 것에서 깃들도록 해야 한다. 이것을 밝음을 쓴다[以明]라고 말한다.
若是而可謂成乎, 雖我亦成也; 若是而不可謂成乎, 物與我無成也. 是故滑疑之耀, 聖人之所圖也. 爲是不用而寓諸庸, 此之謂 “以明”.
이 이야기에 따르면, 완전함[成]과 불완전함[虧]이라는 대대의 논리가 있기 때문에 소씨(昭氏)라는 아주 탁월한 음악 연주자가 악기를 연주하고, 이 대대의 논리가 없어진다면 그는 악기를 연주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 그럴까? 원문에 따르면 그는 다른 사람보다 더 완전해지려고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에게 완전함은 좋은 것이고 불완전함은 나쁜 것이라는 사전에 미리 정해진 가치 판단이 없었다면, 그는 완전한 연주를 향해 그렇게 노력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탁월한 연주가로 후세에 알려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장자는 이런 종류의 사람으로 소씨 이외에 음률에 정통했던 사광(師曠)과 변론의 대가인 혜시(惠施)를 들고 있다. 이 세 사람은 모두 자신의 완전함에는 이미 완전불완전이라는 가치평가가 내재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이 점에서 이들은 진정한 주체라기보다 차라리 완전불완전이라는 대대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노예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더군다나 장자가 보았을 때, 이들의 완전함은 모두 제한된 영역 내의 완전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신의 완전함이 보편적이라기보다는 제한적인 것, 따라서 유한한 것임을 망각하고 있다. 그래서 만약 이들이 자신만의 완전함을 보편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다면, 이들의 완전함은 고착된 자의식의 기준이나 근거로 기능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처럼 장자가 보았을 때 그들은 자신들만이 선호하는 것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것을 적용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그렇지만 이들과는 선호함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들의 완전함은 전혀 소용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도 자신만이 잘 하고 그래서 좋아하는 것[所好]이 있기 때문이다. 소씨ㆍ사광ㆍ혜시 이외의 다른 모든 사람들도 술을 잘 마신다든가, 소를 잘 잡는다든가, 농사를 잘 짓는다든가 하는 자신들만의 좋아하는 바를 갖고 있다. 그런데도 앞서의 세 인물은 자신들만이 선호하는 것을 자랑하려는 우매함으로 평생을 보냈다. 이런 우매함은 단지 이들에게서만 끝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후예들도 자신들의 스승들의 흔적을 따랐지만 이들에게는 스승들이 지녔다고 인정되는 완전함마저도 없었다. 왜냐하면 스승의 완전함이 이들에게는 이제 도달할 수 없는 이상(ideal)으로 추상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삶을 망각하고 스스로 도달할 수 없는 이상에 매진함으로써 불완전을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장자에 따르면 만일 우리가 소씨를 포함한 이 세 사람에게 완전함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다면, 완전하지 못한 우리들도 완전하다고 할 수 있고, 만약 그들에게 완전함이란 규정을 내릴 수 없다면 타자나 우리들에게도 완전하다는 규정을 내릴 수 없게 된다. 왜냐하면 각각의 삶의 주체는, 자신의 삶의 문맥에서는 완전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삶 자체가 제한되어 있으므로 다른 삶의 문맥에서 보면 또 불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일상에 깃들도록 하라
방금 읽었던 이야기를 통해 장자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단지 이런 부정적인 의미만은 아니다. 발제 원문 마지막 부분에서 장자는 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장자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즉 “이것이라고 여기는 인식이 쓰여지지 않고 그것을 일상에 깃들게 해야 한다[爲是不用而寓諸庸]!” 이어서 장자는 바로 이것이 자신이 밝음을 쓴다[以明]라고 했을 때 의미했던 것임을 명확히 한다. 여기서 옳다고 여기다 또는 이것이라고 여기다로 번역되는 위시(爲是)는 대대의 논리에 따라 그리고 고착된 자의식에 근거해서 수행되는 인식이나 판단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위시라는 의식은 앞에서 살펴본 자시(自是)에 근거하고 있는 사유와 판단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장자가 위시라는 판단을 부정할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런 예측과는 달리 장자는 이 위시를 그 자체로 부정하고 있지 않다. 장자에 따르면 위시는 그 자체로 부정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다만 제약되어야 할 뿐이다. 다시 말해 “위시는 일상에 깃들어야 한다.” 우리는 이런 장자의 권고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이 『철학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에서 표어처럼 사용하는 말이 있다. “생각하지 말고, 보아라!” 여기서 본다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도록 하자. 가령 어떤 사람이 방안에 있다고 해보자. 그런데 그 방의 문은 안으로 잡아당기면 열리지만 밖으로 밀면 열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람은 방문은 밀어야 열린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결코 이 방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 사람은 방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갇혀 있다고 해야 한다. 어쨌든 이 사람은, 만일 그 문은 밀지 않고 당겨야 열린다는 사실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계속 갇혀 있게 될 것이다. 결국 비트겐슈타인에게 본다는 것은 미리 예단하지 않고 주어진 사태에 맞게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경우 두 가지 생각이 가능하다. 하나는 ‘방문은 밀어야 열릴 것이다’이고, 다른 하나는 ‘방문은 잡아당겨야 열릴 것이다’이다. 중요한 것은 전자의 생각이나 후자의 생각도 모두 미리 사태에 맞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결코 생각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생각은 사태에 대한 어떤 시선의 변경 속에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장자가 이명(以明)을 ‘이것이라고 여기는 인식이 쓰여지지 않고 그것을 일상에 깃들게 해야 한다[爲是不用而寓諸庸]’라고 정의할 때, 그는 비트겐슈타인의 이런 통찰을 공유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저용(寓諸庸)에서 저(諸)는 문법적으로 지어(之於)의 줄임말이다. 그래서 이 말은 ‘그것을 일상[庸]에 깃들게 하라’라고 번역된다. 장자는 결코 위시(爲是)를 그 자체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단지 이런 생각의 활동을 온전한 자리에 두고자 하는 것이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이렇게 일상에 깃들게 된 위시를 장자는 인시(因是)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위시의 주체가 고착된 자의식의 기준으로서 과거의식이라면 인시의 주체는 오히려 사태나 타자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명(以明)에 대한 장자 본인의 정의인 ‘이것이라고 여기는 인식이 쓰여지지 않고 그것을 일상에 깃들게 해야 한다’는 구절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왜냐하면 이 구절은 위시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위시의 고유한 자리가 구체적인 삶의 세계에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위시가 삶의 세계에 깃들게 되었을 때, 위시는 자의식의 동일성에 근거한 인칭적 판단을 벗어나게 된다. 오히려 이 경우의 위시, 즉 인시는 사태의 고유성 및 단독성과의 소통과 이런 소통의 결과로 임시적으로 구성된 자의식(= 임시적 자의식) 속에서 작동하게 된다. 이렇게 위시가 임시적이고 비인칭적으로 작동하는 유동적인 판단이 되었을 때, 그것은 인시로 변화하게 된다.
인용
'고전 > 장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Ⅶ. 단독자[獨]의 의미 (0) | 2021.07.01 |
---|---|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Ⅵ. 꿈과 깨어남 (0) | 2021.07.01 |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Ⅳ. 말과 길 (0) | 2021.06.30 |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Ⅲ. 새를 새로 키우는 방법 (0) | 2021.06.30 |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Ⅱ. 한계가 없는 앎과 한계가 있는 삶 (0) | 2021.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