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이 된 스님을 담은 호음의 시
『소화시평』 권하 61번은 서두부터 간단명료하게 ‘옛 사람이 스님에게 준 시가 많다[古人贈僧詩, 多矣].’라고 말하며 훅 치고 들어온다. 저번에 김형술 교수의 특강과 박동섭 교수의 특강에 대한 후기를 쓸 때 이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충분히 이해시키기 위해 세심하게 결을 가다듬으며 서두를 정성껏 전개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두 분의 교수님처럼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 분위기 자체를 압도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처럼 이 글에서 홍만종은 말하고 싶은 걸 짧고도 굵게 단번에 내뱉으며 연이어 네 편의 시를 첨부하며 마지막엔 네 편에 시를 단 두 글자의 평가하며 마무리 짓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아주 심플하면서도 말하고자 하는 게 분명해 보이는 편이라 할 수 있다.
踏盡千山更萬山 | 수천 산 밟고 나면 수만 산을 또 갔으니, |
滿腔疑是碧孱顔 | 스님의 속에 든 것은 필시 푸르고 우뚝한 모습이리라. |
他年縱未超三界 | 다른 해에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더라도 |
猶與婆娑作寶關 | 사바세계에 머뭇거리며 절집을 짓겠지. |
호음이 스님에게 준 시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말인지 유추하기가 쉽지 않았다. 1구야 산속에 사는 스님을 현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지만 그 다음 구절부터 턱턱 막힌다. 스님은 늘 산속을 다닐 테니 천만 봉우리를 다 걸으면 다시 만만 봉우리를 걷게 될 테다.
그런데 2구의 가슴 가득 우뚝 솟은 산인가 의심해본다는 건 무슨 뜻일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교수님과 수업하면서 이 부분이 명확해졌다. 그건 바로 스님의 내면이 산과 같이 푸르고 우뚝 솟은 모습을 가지게 됐을 거라 생각한다는 내용이었으니 말이다. 흔히 무언가에 빠진 사람을 지금은 ‘덕후’라는 표현을 쓰지만 조선시대엔 ‘벽(癖)을 지녔다’는 표현을 썼었다. 벽에 대한 생생한 보고서 한 편을 우린 연암의 글에서 볼 수 있는데 그게 바로 「대나무를 외치다 대나무가 된 사내를 위한 헌사[竹塢記]」라는 글이다. 여기서 친구 양호맹이 얼마나 대나무를 좋아했는지 그래서 좋아한 나머지 얼마나 그 모습조차도 대나무와 같아졌는지를 아주 유쾌하게 묘사하고 있다. “앉으나 서나 ‘죽오!’, 잠깐 사이에도 ‘죽오!’라 했다. 매번 한 번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을 만나면 갑자기 ‘죽오’를 써 달라하고선 벽에 걸어두니, 벽의 四面이 모두 다 ‘죽오’라는 글씨였다[坐臥焉竹塢, 造次焉竹塢. 每一遇能書者, 輒書竹塢而揭之壁, 壁之四隅, 盡是竹塢]..”라고 그의 대나무에 대한 痴를 묘사한 다음에 ‘눈썹(미간)이 개(个)자로 떨리고 손가락은 마른 대나무 마디 같았으며 굳세고 가파르며 강인한 것이 문득 대나무 형상이 이루어졌다[眉拂个字, 指若枯節, 勁峭槎枒, 忽成竹形].’라고 대나무를 사랑하다가 결국 대나무가 된 양호맹을 표현하고 있다. 마치 연암의 이 글처럼 호음도 산을 늘 타고 다니는 스님은 그 내면이 이미 푸르고 우뚝 솟은 산과 꼭 닮은 모습이 되었을 거라는 구절이었던 것이다. 즉, 스님은 요즘 말로 하면 ‘산에 대한 덕질이 대단하다’라고 표현될 만했던 거다.
산에 대한 마음과 불교에 정진하고자 하는 마음을 높이 평가한 만큼 3구에선 불교의 최대 화두인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거다. 어쩌면 불교에서 윤회의 굴레를 벌어나 해탈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경지인지라, 스님 보고 함부로 해탈을 하라느니, 마라느니 쉽게 말할 순 없기에 ‘당신이 최고 경지인 해탈엔 이르지 못하더라도’라고 포석을 깐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고서 4구엔 불교용어들을 전면에 배치하고 있다. 즉 사바세계인 현실세계에 머뭇거리며 스님들이 불도에 정진하는 방을 만들 거라고 마무리 짓고 있는 것이다. 그건 임용을 공부하는 나에게 ‘너 올해 수석은 못하더라도 그래도 합격할 순 있을 거야’라고 말해주는 것과 비슷한 뉘앙스의 얘기였고, 그 속엔 스님에 수행과 내공에 대해 든든히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마음이 가득했던 것이다. 호음의 이 시를 읽고 스님은 얼굴 가득 미소가 지어졌을 것이다. 마치 지음을 얻게 된 듯한 뿌듯함으로 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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