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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임금과 수령들께 고함
予是白食者 聞言實驚惶 | 나는 공짜밥 먹는 사람이라 말을 들으니 실로 놀라고 황당해 |
蹙顙忽有泚 愴然涕汪汪 | 이마를 찡그리고서 문득 눈물이 흘러 슬퍼 주룩주룩 흘렀네 |
堂下隔千里 九重何茫茫 | 궁정의 댓돌 아래는 천 리나 떨어져 있으니 구중궁궐은 어찌나 아득하기만 한가? |
經帷雖有言 豈如親見詳 | 경연(經筵) 자리에서 비록 말하더라도 어찌 친히 보는 자세함만 같겠으리오? |
痛哭少賈生 進圖無鄭郞 | 통곡하는 가생 1은 드물고 유민도(流民圖)를 진상한 정랑은 없구나. |
孰摹民離狀 發遞達未央 | 누가 백성의 떠도는 현상을 본떠 역참에 보내 미앙궁에 전달할꼬? |
先王四十年 霈澤流汪洋 | 선왕께서 즉위한 40년 2 동안에 큰 비 같은 은택이 흘러 왕성하고 넘실대니 |
生成無札瘥 惸獨皆稻粱 | 생성함에 병조차 없고 외로운 이와 고독한 이 모두 쌀밥과 기장밥 먹었는데 |
如何至今日 有此歌隰萇 | 어찌하여 지금에 이르러 이 습지의 보리수만도 못하다고 3 노래하게 됐나? |
聖明思繼述 光燭照逾旁 | 성스럽고 밝은 임금께서 뜻 이을 것 4 생각하신다면 밝은 광명이 빛나 더욱 널리 퍼지리. |
猶溺師夏后 如傷擬周王 | 백성이 물에 빠진 것 같다면 우임금 본받고 백성이 상처 입은 것 같다면 주공 본받아 |
哀矜損正供 雨露弛秋霜 | 애처럽게 여기고 불쌍히 여겨 조세 5를 경감해주고 비와 이슬이 가을 서리 녹게 하듯 해야 하네. |
況復股肱良 魚水會一堂 | 하물며 다시 임금 보필할 어진 신하가 수어지교(水魚之交)처럼 한 궁궐에 모였으니 |
左右竭心力 思日贊贊衰 | 좌우가 마음과 힘을 다해 쇠함을 돕고 도울 것 생각해야 하네. |
弼違有法家 宣化有召棠 |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6 법가가 있고 교화를 폄에 지방관리의 선정 7이 있으니 |
賦役不加重 渥惠愈大霶 | 조세와 부역은 가중되지 않고 두터운 은혜는 더욱 크게 퍼져 |
黎民當愛賜 至治宜馨香 | 백성은 마땅히 사랑하고 은혜를 입게 되고 지극한 다스림은 마땅히 향내내리. |
有何疵政擧 而不臻時康 | 어째서 정치의 거행됨에 하자가 생겨 태평성대 오지 않는가? |
邦本一泮渙 其誰與胥匡 | 나라의 근본이 반쯤 흩어졌으니 누구와 함께 바로잡으랴? |
所憂在土崩 川決不及障 | 근심할 것은 땅이 무너지는 데에 있으니 냇물 터지면 미처 막을 수 없다네. |
인용
- 가생(賈生): 한(漢) 나라 때의 낙양 사람으로 전한(前漢) 문제(文帝) 때의 현신(賢臣)인 가의(賈誼)를 말한다. 불과 스무 살의 어린 나이로 태중대부(太中大夫)로 발탁되어 복색(服色), 제도(制度), 관명(官名) 등의 대대적인 개혁을 주장하다가 당시 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어 서른셋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본문으로]
- 조선왕조 11대 임금인 중종(中宗)이 통치하던 기간을 가리킨다. 중종은 1506년에서 1544까지 39년 동안 즉위했다. [본문으로]
- 습장(隰萇): 『시경(詩經)』 회풍(檜風) 「습유장초(隰有萇楚)」에 "습지에 보리수가 있으니 그 가지 보드랍도다. 아리땁고도 윤택하니 너의 무지함이 부럽도다[隰有萇楚, 猗儺其枝. 夭之沃沃, 樂子之無知]."라 하여, 백성들이 번거로운 정사와 무거운 구실을 견디지 못해 부른 노래다. 자신들의 삶이 습한 곳에 자라는 잡초만도 못하다는 표현이다. [본문으로]
- 계술(繼述): 선왕(先王)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효자가 선세(先世)의 업적을 잘 계승하는 것을 말한다. 『중용(中庸)』 30장에 "중니께서는 요임금과 순임금의 도를 이어받으셨고, 문왕과 무왕의 법을 지키셨으며[仲尼, 祖述堯舜, 憲章文武]."라 하였다. [본문으로]
- 정공(正供): 정당한 부담이라는 뜻으로 부세(賦稅)와 방물(方物)을 일컬음을 말한다. [본문으로]
- 필위(弼違): 임금의 잘못을 바로잡는 시신(侍臣)의 지위를 말한다. 『서경(書經)』 「익직(益稷)」의 "내가 잘못하거든 그대가 바로잡아 나를 도우라[予違汝弼]."라는 말을 줄인 것이다. [본문으로]
- 소당(召棠): 『시경(詩經)』 소남(召南)의 「감당(甘棠)」을 말한 것이다. 주(周) 나라 소공 석(召公奭)이 남국(南國)을 순시하다가 팥배나무의 밑에서 민원을 처리해 주었는데, 후세의 사람들이 그를 사모하여 그 팥배나무를 차마 베지 못하고 감당지시(甘棠之詩)를 지어 기렸다. 후세에 선정(善政)을 비유하거나 지방 관리의 정적(政績)을 치하하는 고사로 쓰이고 있다. 『사기(史記)』 卷34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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