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목민관이 시로 그린 유민도
① 유민도와 정약용
1. 유민도(流民圖)
1)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대학가에는 고통 받는 민중을 그린 걸개그림이 걸려 있곤 했다.
2) 유민도의 연원은 송나라 정협(鄭俠)에서 찾는다. 정협은 여러 차례 왕안석에게 서찰을 보내어 신법이 백성들에게 해를 입힌다고 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얼마 후 안상문의 수문장이 되는데 이때 큰 가뭄이 들어 유리걸식하는 백성들이 많았음. 정협은 이들 모습을 그려 상소문을 바치자 신종은 왕안석(王安石)의 신법(新法)을 혁파함.
3) 조선에선 임진왜란 발발한 지 1년이 된 1593년 5월 9일 『선조실록』에는 죽은 어미의 젖을 물고 있는 아이, 상처를 입고 쓰러져 있는 자, 구걸하는 남녀, 자식을 버려 나무뿌리에 묶어 놓은 어미 등이 그려져 있는 『유민도』가 있었다고 함.
4) 역대 임금이 『유민도』를 그려 병풍으로 만들어 곁에 두게 하여 백성의 고통을 잊지 않고자 하는 뜻을 표방하기도 했고, 또 관리들에게 『유민도』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어 바치게 한 것 역시 비슷한 뜻에서 나온 것임.
2. 정약용(丁若鏞)은 시로 유민도를 그렸다. 「봉지염찰도적성촌사작(奉旨廉察到積城村舍作)」
臨溪破屋如瓷鉢 | 시냇가 부서진 초가집 사기그릇 같고 |
北風捲茅榱齾齾 | 북풍에 이엉 밀려 서까래만 앙상해. |
舊灰和雪竈口冷 | 묵은 재에 눈 내려 아궁이는 차갑고, |
壞壁透星篩眼谿 | 무너진 벽에 별이 비치니 훤하다. |
室中所有太蕭條 | 집에 있는 것들 크게 쓸쓸하여 |
變賣不抵錢七八 | 팔아도 돈 7~8푼도 안 되네. |
尨尾三條山粟穎 | 개꼬리 같은 세 가닥 조 이삭 만 있고 |
雞心一串番椒辣 | 닭 심장 같은 한 꼬치의 고추는 맵기만 해. |
破甖布糊𢾖穿漏 | 깨진 술 단지를 펴서 풀칠하여 뚫기고 샌 곳에 바르고, |
庋架索縛防墜脫 | 시렁을 꽁꽁 동여매 떨어지는 것 막았네. |
銅匙舊遭里正攘 | 동 수저는 예전에 이장에게 빼앗겼고, |
鐵鍋新被鄰豪奪 | 철가마는 이번에 이웃 부자에게 빼앗겼지. |
靑綿敝衾只一領 | 푸른 비단의 해진 이불, 단지 유일하게 소유했으니, |
夫婦有別論非達 | 부부유별이란 말 달성할 수 없네. |
兒穉穿襦露肩肘 | 아이의 뚫린 저고리에 어깨와 팔꿈치 모두 드러나 있고, |
生來不著袴與襪 | 태어나서 바지와 양말 입어본 적 없지. |
大兒五歲騎兵簽 | 큰 아이 다섯 살에 기병에 올랐고, |
小兒三歲軍官括 | 작은 아이 3살에 군적에 올라 |
兩兒歲貢錢五百 | 두 아이 한 해에 돈 500을 공납하고 나니, |
願渠速死況衣褐 | 빨리 죽길 원하는데 하물며 베옷 따위랴. |
狗生三子兒共宿 | 개가 세 마리 새끼를 낳아 아이들과 함께 자고, |
豹虎夜夜籬邊喝 | 승냥이와 범은 밤마다 울타리 곁에서 울어대네. |
郞去山樵婦傭舂 | 남편은 산에 나무하러 가고 아내는 방아질로 품팔러 가기, |
白晝掩門氣慘怛 | 대낮인데도 문 닫혀 있어 스산하다네. |
晝闕再食夜還炊 | 낮에 두 번의 밥을 거르고 밤에 도리어 밥하러 불 때고 |
夏每一裘冬必葛 | 여름엔 매일 하나의 가죽옷으로, 겨울엔 반드시 갈포옷 입는구나. |
野薺苗沈待地融 | 들판의 마물 싹은 잠겨 있어 땅 녹길 기다려야 하고, |
村篘糟出須酒醱 | 마을에 술 나오려면 발효되길 기다려야 해. |
餉米前春食五斗 | 지난 봄에 관아에서 꾼 쌀 다섯 말을 먹었으니 |
此事今年定未活 | 이 일로 금년엔 정히 살기 어렵겠구나. |
只怕邏卒到門扉 | 다만 관리가 사립문에 이를까 두렵지, |
不愁縣閣受笞撻 | 관아에서 태형 맞는 건 두렵지 않네. |
嗚呼此屋滿天地 | 아! 이런 집들이 천지에 가득하니, |
九重如海那盡察 | 바다 같은 구중궁궐에서 어느 세월에 다 살피랴. |
直指使者漢時官 | 직지자사는 한나라 때 벼슬이었는데, |
吏二千石專黜殺 | 2000석의 수령도 온전히 쫓아내 죽였지. |
獘源亂本棼未正 | 폐해의 근원 어지러워 바로 잡지 못하니, |
龔黃復起難自拔 | 공수와 황패 같은 선정자(善政者)가 다시 나와도 스스로 발본색원하기 어렵겠지. |
遠摹鄭俠流民圖 | 옛날 정협의 『유민도』를 본떠 |
聊寫新詩歸紫闥 | 부족하게나마 새 시를 지어 궁궐에 보낸다. |
1) 정조(正祖)의 지우를 입어 경세제민의 뜻을 펼치던 1794년 11월 암행어사가 되어 경기 북부 지역의 민정을 살피다가 적성에 이르러 지은 작품.
2) 정약용(丁若鏞)은 『시경(詩經)』을 재해석하면서 이를 현실 비판의 한 논리로 삼음. 『시경』의 풍(風)의 개념을 대인(大人)이 군주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으로 파악하면서 국풍이 민요라는 전통적인 견해를 부정함.
3) 「모시서(毛詩序)」에서 풍(風)의 개념을 풍자와 풍화(風化)를 합친 개념으로 해석하는데 정약용은 주자(朱子)가 이 중에 풍자는 제거하고 풍화만 남겼다고 비판하면서 “옛일을 진술하여 지금 일을 풍자한다”는 정신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시 창작에 실천함.
4) 작품의 말미에서 정협의 『유민도(流民圖)』를 시로 옮겨 임금께 보고하겠다고 함.
5) 비유를 통해 그림을 그린 것처럼 묘사하여 자칫 거칠어지기 쉬운 병폐가 잘 극복됨.
6) 자신이 암행어사이지만, 자신보다 뛰어난 공수(龔遂)와 황패(黃霸) 같은 전설적인 목민관이라도 이러한 폐해를 발본색원할 수 없음을 알기에 임금께 알려 근본적인 대책이 마련되길 바라며 시를 지었음.
② 힘겨운 백성의 삶을 담아내다
1. 정협(鄭俠)의 「유민도(流民圖)」에 빗대어 현실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전통의 계승
1) 조선 초기 성현(成俔)은 「벌목행(伐木行)」를 지어 겨울철 산속에서 목재를 채취하는 백성들의 참상을 시로 그려냄.
2) 한겨울인데도 정강이가 나온 옷을 걸치고 나무를 찍느라 손등은 얼어터지고 손가락은 아예 떨어져 나가기까지 했다고 참상을 밝힘.
3) 마지막 대목에서 자신은 목민관으로서 참상을 차마 보지 못하여 오색구름으로 덮인 구중궁궐의 임금께 이를 알리고 싶지만 유민도를 그릴 재주는 없어 정협의 죄인이라 하면서 시상을 종결함.
2. 조위한(趙緯韓)의 「유민탄(流民歎)」
1) 우리말 가사로 세상에 널리 유통되어 듣는 이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2) 지금은 전하지 않으며, 광해군(光海君)에게까지 들어가 이 시를 지은 자를 물색하게 했다고 함.
3. 어무적(魚無迹)의 「유민탄(流民歎)」
蒼生難蒼生難 | 백성의 힘듦이여, 백성의 힘듦이여, |
年貧爾無食 | 흉년에 너흰 먹을 게 없구나. |
我有濟爾心 | 나는 너흴 구제할 마음은 있지만, |
而無濟爾力 | 너흴 구제할 권력은 없구나. |
蒼生苦蒼生苦 | 백성의 고통이여, 백성의 고통이여. |
天寒爾無衾 | 추위에 너흰 이불이 없구나. |
彼有濟爾力 | 저들은 너흴 구제할 권력은 있지만, |
而無濟爾心 | 너흴 구제할 마음은 없구나. |
願回小人腹 | 원하노니 소인의 마음을 돌려 |
暫爲君子慮 | 잠깐 임금을 염려하게 하고, |
暫借君子耳 | 잠시 임금의 귀를 빌려 |
試聽小民語 | 시험삼아 백성들의 말을 듣게 하소서. |
小民有語君不知 | 백성은 말을 하나 임금은 알질 못해, |
今歲蒼生皆失所 | 지금의 백성들은 다 살 곳을 잃었구나. |
北闕雖下憂民詔 | 북쪽 궁궐에선 비록 백성을 걱정하여 조칙을 내렸지만, |
州縣傳看一虛紙 | 주현에 전해짐에 한 번 보니 빈 종이일뿐. |
特遣京官問民瘼 | 다만 한양의 관리를 보내 백성의 고통 물어보려 |
馹騎日馳三百里 | 역마타고 하루에 300리를 달리더라도 |
吾民無力出門限 | 백성은 힘이 없어 문지방조차도 나서질 못하니, |
何暇面陳心內事 | 어느 겨를에 얼굴 맞대고 속내를 털어놓을꼬? |
縱使一郡一京官 | 가령 한 군에 한 명의 한양의 관리를 보내더라도 |
京官無耳民無口 | 한양의 관리는 귀가 없고, 백성들은 입이 없구나. |
不如喚起汲淮陽 | 급회양을 다시 불러 |
未死孑遺猶可救 | 죽지 않고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을 오히려 구제하는 것만 못하리. |
1) 자는 잠부(潛夫), 호는 낭선(浪仙)으로 부친은 양반가의 후손이나 모친이 관비여서 천민의 신분으로 태어남.
2)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어무적이 살던 김해 고을의 사또가 백성의 매실을 장부에 올려놓고 매실이 잘 열리지 않았어도 정해진 숫자만큼 거두어들이는 탐학을 저질렀는데, 백성들이 이를 고통스럽게 생각하여 그 나무를 베어 버렸다.”고 쓰여 있음.
3) 전설적인 목민관 급암(汲黯)을 다시 살려서 채 죽지 못한 사람이나 구제하는 것이 낫겠다고 통렬하게 풍자함.
4) 『국조시산(國朝詩刪)』에선 “시의 기교가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목민관이 거울이나 숫돌로 삼을 만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함.
5) 『성수시화(惺叟詩話)』 57번에서는 조선 최고의 고시라 칭송함.
③ 과도한 세금, 공납에 힘들어하는 백성들
1. 민중의 생활상을 고발하는 한시
1) 고려 시대 이래 고통 받는 민중의 생활을 고발하는 것이 지속적인 관습임.
2) 조선 후기엔 이런 경향의 시가 더욱 양산되었는데 정약용(丁若鏞)의 「애절양(哀絶陽)」이 가장 단적인 예임.
3) 이 작품은 1803년 강진에 유배되었을 때 지은 것임. 당시 노씨 성을 가진 농부의 아이가 태어난 지 사흘 만에 군적에 들고 마을의 이장은 소를 빼앗아 가자 그 백성은 스스로 양물을 잘라 버림.
2. 이하곤(李夏坤)의 「주분원이십여일 무료중효두자미기주가체 잡용이어 희성잡구(住分院二十餘日 無聊中效杜子美夔州歌體 雜用俚語 戱成絶句)」
宣川土色白如雪 | 선천의 흙 색깔은 희어 눈 같네. |
御器燔成此第一 | 임금의 그릇이 구워 만들어지는데 여기 것이 제일이야. |
監司奏罷蠲民役 | 감사가 주청(奏請)하길 마치면 백성들의 부역이 줄려나. |
進上年年多退物 | 진상품이 해마다 퇴짜 맞는 그릇이 많은데. |
御供器皿三十種 | 임금께 공납할 그릇 30종류인데, |
本院人情四百駄 | 본원의 뇌물은 400 바리로구나. |
精粗色樣不須論 | 정밀하고 거칠고 색이나 모양을 전혀 논하질 않고 |
直是無錢便罪過 | 다만 무전유죄(無錢有罪)로구나. |
1) 조선 후기에는 절구 연작시에 핍박받던 민중의 삶을 짧지만 인상적으로 담아냈는데 이 작품이 바로 그 작품임.
2) 좌의정을 지낸 이경억의 손자이며, 대제학을 지낸 이인엽의 아들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 진천에 내려가 학문과 서화에 힘썼으며 많은 책을 소장하기도 했음.
3) 백성들은 그릇을 굽는데 쓸 백토를 진도나 평안도 선천에서 고생스럽게 실어 와야 했고, 도공이 힘들여 만들어 진상해도 관리들이 퇴짜를 놓는 이 점점 많아짐.
4) 서른 종의 그릇을 만들어 보내지만 중간에 뇌물로 바쳐야 할 ‘인정(人情)’까지 합치면 무려 400바리나 되어야 한다.
足凍姑撤尿 須臾必倍寒 | 언 발에 일부러 오줌 누면 잠시만에 반드시 더 추워지지. |
今䄵糴不了 明年知大難 | 금년의 환곡 갚질 못했으니, 내년엔 더 어려울 것 알겠네. |
曰糴亦無痕 曰糶亦無影 | 환곡 받아도 또한 흔적도 없고 환곡 갚아도 또한 그림자도 없구나. |
賦民一桶水 官自榷官井 | 백성들의 한통 물에도 부세하니, 관리들은 관아의 우물을 독점하였네. |
催租未發聲 見面心先駭 | 세금을 재촉하는 것엔 아무 소리 못하면서도 관리 얼굴 보면 마음이 먼저 놀라. |
布直姑低昂 一任官門買 | 베 값의 오르내림은 한 번 관아에서 사는 것에 달려 있지. |
1) 총 79수로 제작되었고, 함경도 종성 지역의 민물과 풍속을 담은 것이 주를 이룬 이 연작시에 당시 핍박받던 민중의 삶을 짧지만 인상적으로 담아냄.
2) 과도한 세금 부과 문제를 담았고, 임시로 꾸어먹는 환곡이 실질적인 빈민 대책이 되지 못함을 꼬집음.
3) 작품에서 시인은 자신의 강개한 목소리를 내지 않고 냉담하게 풍속화를 그리듯이 그려 놓아 시니컬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음.
④ 목민관(牧民官)에게 보여주고자 쓴 시
1. 목민관이 읽어야 할 시
1) 민중의 참상을 시로 그려내 읽으면 소름이 끼친다.
2)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에 자신이 지은 이러한 시들을 함께 실었다. 평민 남자들은 모두 군적에 편입되었고 정약용은 백성의 뼈를 깎는 병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 적이 있다.
2. 이용휴(李用休)의 「송신사군지임연천(送申使君之任漣川)」
嬰兒喃喃語 其母皆能知 | 어린아이의 재잘대는 소리 어미는 모두 알 수 있지. |
至誠苟如此 荒政豈難爲 | 지성(至誠)이 진실로 이와 같다면, 흉년의 정치가 어찌 어려울까? |
村婦從兩犬 栲栳盛午饁 | 시골 아낙 두 마리 개 따라서 소쿠리에 점심밥 가득 담았네. |
或恐蟲投羹 覆之以瓠葉 | 혹시나 벌레가 국에 들어갈까 걱정되어 호박잎으로 덮었다네. |
1) 연천으로 사또로 가는 신광수를 보내면서 아이들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잘 헤아린다면 흉년을 다스리는 정사가 어려울 것이 없을 것이라 함.
3. 이용휴(李用休)의 「송김탁경조윤지임문주(送金擢卿朝潤之任文州)」
失手誤觸刺 不覺發通聲 | 실수로 잘못 가시에 찔리면 모르는 새에 아프다고 소리 지른다. |
須念訟庭下 露體受黃荊 | 생각하게 재판정은 나체로 가시밭에 뒹구는 곳임을. |
蜜蜂喧蕎花 茭雞出䆉稏 | 꿀벌이 메밀꽃에서 윙윙거리고 물새가 벼이삭에서 나온다면 |
謂御且徐驅 恐傷田畔稼 | 말 또한 천천히 몰아가라고 말해주게. 밭이랑에 심어놓은 것 상할까 염려되니. |
1) 정약용(丁若鏞)은 직접적으로 상황을 묘사하며 지도한데 반해 이용휴(李用休)는 간접적인 묘사로 목민관을 지도함.
2) 이용휴(李用休)의 시는 사람을 전송하는 작품이 주를 이룸. 그는 포의의 문형답게 목민관의 자세를 짧지만 인상적인 방식으로 담아내어 조선 후기 새로운 시풍을 열어젖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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