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계약
Social Contract
서양의 중세를 지탱한 것은 교회와 국가의 양대 축이었다. 양자는 종교와 정치, 신성과 세속의 영역을 분담해 중세 특유의 분권적 질서를 유지했다. 이들은 표면상으로는 갈등을 보였으나 근본적으로는 파트너였기 때문에 한쪽이 쓰러지면 어차피 다른 쪽도 견딜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으로 교회가 무너진 것은 군주 체제의 종말을 예고한 것이다.
중세에 교회는 지상에서 신을 대리하는 역할이었고 국가는 교회의 정치적 표현으로 간주되었다. 신-교회-국가의 질서가 해체되자 국가의 개념을 새로이 해명하는 일이 시급해졌다. 실제로 종교개혁 이후에 성립한 근대 국가는 중세 국가와 질적으로 다른 영토국가였다. 중세 유럽의 국가는 영토와 국민을 확정한 선(線, 국경선) 개념의 국가가 아니라 도시와 성을 중심으로 한 점(點, 거점) 개념의 국가였다. 따라서 정치적 중심은 각 지역(도시)으로 다원화되어 있었으며, 이것을 하나의 질서로 묶어준 게 바로 교회라는 종교적 중심이었다. 교회가 더 이상 그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제 질서의 축은 국가였다. 이 새로운 근대 국가를 설명하기 위해 계몽주의 삼총사인 영국의 홉스와 로크(John Locke, 1632~1704), 프랑스의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는 사회계약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가 구약성서에 나오는 괴물인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저서의 제목으로 채택한 이유는 막강한 힘을 지닌 그 괴물을 국가에 비유하기 위해서였다. 홉스는 국가를 “인간이 신의 창조를 모방해 만들어낸 인조인간“이라고 보았다.
“국가란 하나의 인격으로서, 모든 개인들은 그 안에서 상호 간의 계약을 통해 공동 행동을 하며, 자신들의 평화와 방위를 위해 모든 힘과 수단을 사용할 수 있다. -홉스, 『리바이어던』”
요컨대 국가는 (1) 인간 개개인의 능력을 넘어서는 막강한 존재이며(리바이어던), (2)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처럼 행동하고(인조인간), (3) 모든 개인들이 계약을 통해 합의한 산물이다.
홉스의 시대에 국가는 곧 군주를 정점으로 하는 왕국과 동일시되었다. 리바이어던은 절대주의를 거부하고 최초로 국민주권론을 옹호하면서 계약의 개념을 최초로 제기했으나, 홉스 자신도 왕당파와 의회파를 오락가락하는 정치적 입장을 취했을 정도로 아직까지는 왕국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명예혁명으로 의회민주주의의 기틀이 확립되는 로크(John Locke, 1632~1704)의 시대에 이르면 역사의 방향은 한층 명확해진다. 이제 의회민주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국민국가의 성립은 역사적 추세이자 대세다. 그래서 로크는 군주의 편이 아닌 신흥 부르주아지의 편에서 국가를 규정한다.
“정치권력이란 재산을 규제하고 보호하기 위해 사형을 비롯한 여러 가지 형벌을 가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들 수 있는 권리이며, 그 법률을 시행하기 위해, 그리고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공동체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이고, 이 모든 것들을 공공복지만을 위해 행사하는 권리다. -로크, 『정부론』”
홉스가 제기한 계약의 개념에 로크는 시민의 재산과 권리를 덧붙였다. 이 결과를 종합한 계몽주의 삼총사의 막내인 루소는 본격적인 사회계약론을 정립한다. 루소는 근대 국가의 모든 기구와 제도가 바로 사회계약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 홉스와 로크가 주장한 것보다 계약의 힘을 훨씬 더 강력하게 보았다.
“국가와 개인의 계약은 사회계약을 기반으로 삼고 있으므로 합법적이고, 모든 사람에게 고루 통용되므로 공평하고, 오로지 일반의 복지만을 도모하므로 유익하고, 공공의 힘과 최고 권력의 보장을 받고 있으므로 확고하다. -루소, 『사회계약론』”
그러나 루소는 계약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지는 않는다. 계약은 근대 국가의 성립을 설명해줄 뿐 국가의 구체적인 정치 과정과는 관련이 없다. 홉스와 로크의 시대에는 주권의 주인이 누구냐를 밝히는 게 초점이었지만, 루소는 ‘국민주권’이라는 생각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그것을 현실적으로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를 논한다.
”정부를 수립하는 행위는 계약이 아니라 법이며, 행정권의 수탁자는 국민의 지배자가 아니라 관리이며, 국민은 관리를 원하는 대로 임명하거나 해임할 수 있으며, 관리는 계약을 맺는 것이 아니라 국민에게 복종함으로써 그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루소, 『사회계약론』“
루소에 이르러 정치는 누가 누구를 지배한다는 식의 근대적 성격에서 벗어나 행정이라는 현대적 의미를 담기 시작한다. 관리(官吏)는 국민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다만 정부를 관리(管理)할 뿐이다. 이것이 바로 대의민주주의의 개념이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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