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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자와 21세기, 8장 - 노자식 물의 비유 본문

고전/노자

노자와 21세기, 8장 - 노자식 물의 비유

건방진방랑자 2021. 5. 9.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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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上善若水,
상선약수,
가장 좋은 것은
물과 같다.
水善利萬物而不爭,
수선리만물이부쟁,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다투지 않는다.
處衆人之所惡,
처중인지소오,
뭇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처하기를 좋아한다.
故幾於道.
고기어도.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
居善地,
거선지,
살 때는
낮은 땅에 처하기를 잘하고,
心善淵,
심선연,
마음 쓸 때는
그윽한 마음가짐을 잘하고,
與善仁,
여선인,
벗을 사귈 때는
어질기를 잘하고,
言善信,
언선신,
말할 때는
믿음직하기를 잘하고,
正善治,
정선치,
다스릴 때는
질서있게 하기를 잘하고,
事善能,
사선능,
일할 때는
능력있기를 잘하고,
動善時.
동선시.
움직일 때는
바른 때를 타기를 잘한다.
夫唯不爭, 故無尤.
부유부쟁, 고무우.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어라.

 

 

1.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문구, 상선약수(上善若水)

 

아마도 우리나라 인사동골목이나, 아니, 굳이 그런 고색창연한 구석을 찾아다니지 않아도, 뭐 고관대작님의 삐까번쩍 하는 집무실이나 회의실 등지에 가장 많이 걸려있는 액자 문구를 하나 뽑으라면, 아마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이 구절이 최다득점 금메달 깜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우리같이 한문이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사방에 붙어있는 것이 고전글귀인데,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어느 곳에든지 꼭 노자문구들이 많이 걸려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이 걸려 있는 문구가 바로 이 상선약수(上善若水)’인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같이 노자를 좋아해서 노자말씀을 사방에 걸어놓고 살고 있지만, 예수 말씀만큼 이래도 노자말씀을 이해하는 자는 없고, 우리 역사는 노자가 말하는 미덕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만 치닫고 있으니 우쩔 것인가!

 

아마도 20세기 한국역사야말로 가장 비노자적인 역사라 해야 할 것이지만, 그러기에 오히려 노자의 말씀이 매력적으로 들리는 아이러니의 역사풍진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끄럽게도 이 도올이 이렇게 대중 앞에 서 있질 아니한가?

 

 

2. 5.16 쿠데타에 일침을 가한 김덕빈 선생님

 

내가 중학교 3학년 때 516혁명이 났다. 사실 우리는 그때만 해도 쿠데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해독하기 어려운 무슨 암호인 것처럼 들렸다. 하여튼 그날 아침 조간신문엔 거대한 글씨들이 박혀 있었고, 탱크사진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심상치 않은 변화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 나의 장형 김용준은 돈암동집 툇마루에 나와 앉아 신문을 읽으며 묵묵히 고개를 끄떡이며 무거운 표정만 짓고 있었다. 우리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교를 갔다. ‘계엄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우리는 몰랐다. 큰형은 가방 들고 집문을 나서는 나에게 그냥 조심하라고만 일러주었다.

 

당시 우리 국민의 장면(張勉, 1899~1966)이라는 사람에 대한 인상은 크게 나쁠 것이 없었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고, 그 양반댁이 바로 혜화동에서 보성학교 올라가는 개천길 오른쪽에 있는 아담한 한옥집이었는데 상당히 검소한 생활을 하시는 분이었고, 또 인상에서 느낄 수 있듯이 매우 얌전하고 깨끗한 분이었다. 단지 4.19 학생혁명이후 어지러운 정국의 상황에서 볼 때, 그는 어떤 과단성 있는 카리스마를 과시하기에는 역부족인 인물이었을지도 모르고, 권력의 자기 베이스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만이 흠이었을 것이다. 내가 중학교 때 공민선생이 수업에 들어 오셔서 여자고등학교 교장선생님이나 하셨으면 편하게 사셨을 껄이라 한 표현이 생각나는데 이 말도 크게 빗나가는 말이 아닐지도 모른다.

 

내가 다녔던 보성학교에는 참으로 훌륭한 선생님들이 많았다. 학식과 인덕을 겸비한 개성있는 굵직굵직한 큰 인물들이 많았다. 1961516, 국사시간! 나에게는 참으로 인상 깊은 한 시간이었다.

 

반쪽이라는 별명이 붙어있었던 국사선생님, 어떻게 생각하면 사람의 생김새를 놓고 별명을 짓는다는 것은 좀 가혹한 느낌도 들지만, 어찌 생각하면 아예 정직하고 소박한 별명일지도 모른다. 정확한 얘기인지는 몰라도, 625 전란 때 크게 부상을 당하셨다는데, 하여튼 얼굴이 반쪽이 날라가고 없었다. 김덕빈(金德彬)선생님, 목소리조차 쳇불을 걸러 나오는 듯 아주 가냘픈 허스키에 카랑진 음성, 키는 훤칠했고 모습은 한없이 인자하였건만 말씀은 한마디 한마디 옹글진 진리의 이슬방울과도 같았다.

 

 

여러분! 오늘 우리 역사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어떠한 역사가 새롭게 전개될지라도 지금 제가 하는 말을 꼭 가슴 깊이 명심하여 두십시오. 쿠데타는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질서라는 명목 아래 혼돈을 말살해서는 아니 됩니다. 지난 일년 동안 우리 역사는 매우 무질서했고 혼돈스러웠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역사가 단군이래 처음 맞이한 민주의 가능성이었습니다. 혼돈의 과정이 없이 민주의 성립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이 시점에서 말살되기보다는 조금 더 지속 되었어야 할 혼돈이었습니다. 참으로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는 여러분들께 이런 말을 다시 하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역사라는 것을 배웠다. 김덕빈선생님은 나에게 국사를 가르쳐준 것이 아니라 산 역사를 가르쳐주셨던 것이다.

 

 

3. 김덕빈 선생님의 한 마디로 이어진 6.3데모

 

나는 중ㆍ고등학교 시절을 통해 조금도 우수한 구석이라고는 한 군데도 없는 너무도 평범하고 별볼일 없는 아이였다. 그런데 지금 중ㆍ고등학교 동창생들을 만나 이야기해보면 좀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다. 나와 분명히 한 클라스에서 김덕빈 선생님의 이러한 이야기를 들었던 학우들이 어느 누구도 이 생생한 증언을 특별히 기억하고 있질 못하다는 것이다. 진리는 항상 우리 주변에서 물 흐르듯 지나가 버린다. 어쩌다 나뭇가지라도 만나면 잠시 걸치는 거품처럼 우리 뇌리를 스치는 모양이다. 인연이 닿지 않으면 망각 속으로 묻힐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옛 스승들은 역사의 장면장면에서 진리를 설()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는 국사선생이기 전에 지사였고 선각자였고 교육자였다.

 

나는 사실 이렇게 전율이 스며드는 순간들을 통해 이미 노자(老子)를 배웠던 것 같다. 우리는 모두 질서를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혼돈을 추하다고 생각한다. 질서만이 선이요 혼돈은 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노자는 혼돈이야말로 선이라고 생각한다. 혼돈은 결코 무질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혼돈은 질서의 가능태요, 노자철학의 전문술어를 빌리면, 그것은 질서의 허(). 질서는 분명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질서가 혼돈의 이면을 갖지 못하고 고착되면, 그것은 질서가 아니라 질곡이다. 바로 김덕빈 선생님은 평범하기 그지 없었던 보성중학교 3학년 도올에게 역사를 바라보는 위대한 지혜를 혁명의 아침에 가르쳐주셨던 것이다. 그것은 좀 더 유지되었어야만 했던 혼돈이었다! 그리고 우리의 역사는 창조성이 고갈된 질서 속으로 질서 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6.3데모! 나는 당시 고등학교 학생이었지만 우리의 대학생들이 무엇을 위해 그렇게 싸워야만 했는지, 김덕빈선생님의 그 한마디 때문에,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한일회담! 한일국교정상화! 쏟아져 들어오는 차관! 물론 이러한 20세기의 물결은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에서 해방된 우리민족의 역사가 구조적으로 거치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필연적 진통이긴 했지만 당시 우리 젊은 학도들의 공포감은 아주 단순한 것이었다. 그러한 외재적 요구에 의한 제2의 개항이 궁극적으로 우리나라의 종속도를 높이고, 우리문명의 모습을 영원히 의존적인 구조로 틀지워버릴 것이라는 공포감! 이 공포감은 궁극적으로 서양제국주의가 제시하는 문명적 형태에 대한 반() 문명적 정의감이었다.

 

 

4. 슬기로운 삶의 방식을 파괴한 새마을운동

 

재건합시다! 재건복을 입고 차렷, 경넷을 붙이기 시작한 우리 국민들! 박정희대통령께서 직접 만드셨다는 새마을 노래가 울려퍼지고 새마을 운동의 열기가 한참 달아 오를 시점 나는 대학생이었다.

 

1983년 깐느 그랑프리를 획득한 이마무라 쇼오헤이(今村昌平) 감독의 희대의 명작, 나라야마 부시코오(猶山節考, The Ballad of Narayama)라는 영화를 보면, 나라야마라는 산골마을의 한 도둑집이 동네재판을 받고 식량이 다 털리게 되니까 그곳에 살던 구렁이가 빠져나가는 장면이 나온다. 아마도 지금 이런 영화장면을 보는 젊은이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을 것이다. 집에 식량을 쌓아두면 쥐가 끓게 되고, 쥐가 들끓면 반드시 구렁이가 산다. 옛날에 구렁이는 사람에게 이로운 동물이었다. 내가 살던 천안집에도 지붕 서까래에 거대한 구렁이가 넌출넌출 늠름한 자태를 걸치고 우리와 같이 살았다. 자연의 에코체인(eco-chain)의 너무도 평상스러운 모습이었다.

 

새마을 운동! 뉴 빌리지 캠페인! 좋다! 어차피 역사를 새롭게 만드는 것은 누가 해도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그러나 새마을을 만든다는 것이 어떻게 해서, 그 고도(古都)의 상징이던 덕수궁담부터 허물고, 몇천년의 우리의 삶의 정서가 깃든 초가지붕 걷어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된단 말인가? 초가지붕을 걷어내면서 거기에 둥지 틀고 살던 새들이 집을 잃고 구렁이들은 이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들과 더불어 우리 삶의 지혜로운 방식과 꿈이 다같이 사라져버리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우리는 지금 얄팍한 감상적 낭만을 얘기해서는 아니 된다. 근대화의 적이 초가지붕이라면 물론 초가지붕을 걷어내도 좋다. 그러나 막상 그 대안으로 제시된 스레이트 지붕, 방온ㆍ방풍의 작용이 전무하고 비마저

줄줄 새는, 게다가 보기 싫게 샛파랗고 샛빨갛게 형형색색으로 페인트를 입힌 천박한 모습들은 근대화ㆍ산업화의 대가로 치루기에는 너무도 억울하고 졸렬하고 옹색한 역사의 퇴보였다. 새마을 운동은 우리민족의 문화 전체의 격조를 하락시키기 시작했고, 우리 민족이 수천년 동안 자연스럽게 지녀왔던 슬기로운 삶의 방식을 단순한 생산성의 제고라는 미명하에 여지없이 파괴 시켰다.

 

 

5. 학문이란 시대정신의 소산이어야 한다

 

나는 대학교시절에 우리민족의 진정한 이념의 대결은 좌ㆍ우에 있지 않다고 판단했다. 좌든 우든 그것은 모두 근세 서양계몽주의의 말류적 발상에 불과한 것이다. 보다 근원적인 대결은 좌ㆍ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동ㆍ서에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동ㆍ서란 동양과 서양이라는 막연한 지역적 개념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서양이란 모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인간의 편의적 문명을 건설하려는 유위적 드라이브를 총칭한다. 산업ㆍ과학ㆍ예술ㆍ종교ㆍ경제 그 모든 것이 이 유위적 드라이브를 위해 총동원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동양이라고 하는 것은 그러한 유위적 드라이브에 역행하는, 인간과 자연의 공존, 공생을 모색하는, 그러면서 인간의 욕망의 억제를 감내하는 어떤 슬기로움, 즉 유위적 드라이브에 맞불을 놓는 무위적 드라이브를 말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무위적 드라이브의 허망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의 역사의 전개는 좌ㆍ우 이념의 피상적 충돌로써 점철될 뿐이며, 근원적 무위의 드라이브는 그 충돌의 수레바퀴 밑에 깔려 숨소리도 내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나에게 노자는 하나의 구원이었다. 양보할 수 없는 지혜의 기둥이었다. 그것은 내가 부둥켜 안고 울고 또 울 수밖에 없었던 나의 영혼의 의지처였다.

 

나는 대학교 때 학교신문에 새마을 운동은 문화박멸운동(culturcide movement)일 뿐이라는 논지의 글을 발표했다가 뼈아픈 곤욕을 치루기도 하였다. 윤필용 사건! 위수령! 고려대학 교정에 장갑차 진입! 나는 학우들과 군인들의 군화발에 채이고 곤봉으로 피나게 두드려 맞으며 수경사에 짐짝처럼 끌려가 온몸에 피멍이 들어야 했지만, 잊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516혁명 첫날 국사선생님의 카랑진 목소리, 우리민족은 혼돈의 지혜를 더 배워야 한다고, 외치셨던 그 목소리였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더 들려줄 수 없는 양심의 소리를 나는 노자를 통해 이 역사에 들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가 60년대 나의 영혼을 좌ㆍ우 이념의 소용돌이 속에 떠맡겼다면 나는 분명 좌익 사상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인혁당 동지들과 더불어 형장의 한 이슬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분명 목숨을 부지해서 살아남은 노자사상가는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60년대, 그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이 고리타분한 동양의 고전에 매달렸던 당시의 심정은 형장의 이슬 못지않게 반짝였던 절박한 그 무엇이었다는 것만은 자신있게 고백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그토록 절박하게 동양의 고전에 매달리지 않았더라면 오늘 이렇게 방대한 고전의 세계를 넘나들며 20세기와 21세기 두 세기를 총괄적으로 관망할 수 있는 나 도올 사상가의 모습은 이 역사에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나 개인의 학식의 과시가 아니라, 학문이란 본시 그 시대정신의 소산이라는 것을 확실히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노자라는 서물의 전공자로서 노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요, 지금 내 강의를 듣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왜 내가 노자를 말해야 하는지, 그 공유된 역사의 진실을 더불어 회고해 보자는 것이다. 지금 이 시점의 노자는 우리역사의 한 필연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6. 낮추면서 다투지 않는 물의 이미지(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於道)

 

노자가 도()를 말할 때, 가장 우리 가슴에 쉽게 와 닿는 이미지가 바로 이 ()’이라는 것이다. 물은 타오르는 불처럼 아래서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물은 항상 자신을 겸손하게 낮춘다. 항상 위에서 아래로 자신을 낮추지만 사실 아니 올라가는 곳이 없다. 산꼭대기 봉우리에도, 저 드높은 청천 하늘 꼭대기에도, 물은 아니 가는 곳이 없다. 모세관작용을 통해, 기화(氣化)작용을 통해, 물은 훨훨 타오르는 불구덩에까지 없는 곳이 없는 것이다. 자신을 항상 낮추면서도 무소부재(無所不在, omnipresence, 동시에 어디에나 존재하는)한 신의 능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다.

 

물이 자신을 낮춘다 함은 자신을 비하(卑下)시킬 줄 아는 것이다. 비하시킨다 함은 남들이 싫어하는 저 더러운 수채구멍 시궁창에까지 아니감이 없는 것이다[處衆人之所惡]. 우리는 여기서 왜 예수가 말구유간에서 태어나는 신화 구조속에서 등장했어야 하는지, 왜 중광같은 스님이 자기를 걸레중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지 그 지혜의 일단을 엿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의 이미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부쟁(不爭)’이다. 이미 3의 불상현(不尙賢)의 논리에서 나왔던 부쟁(不爭, Denial of Competition)’의 이미지가 여기 8장에서 물의 이미지로 보다 생생하게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물은 자신을 낮추며 흐른다. 그러다가 암석을 만나도 암석과 다투지 않고, 암석의 자리를 차지할려 하지도 않는다. 점잖게 스윽 비켜지나갈 뿐이다.

 

그렇지만 결국 물 앞에 당할 것은 없다. 한 방울의 낙숫물이 억만년의 바위를 뚫어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水滴穿石].

 

 

7. 물은 생명이고 물은 신이다

 

다음 물의 이미지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물은 만물(萬物)을 잘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水善利萬物]. 즉 다투지 않으면서도 가는 곳마다 모든 것을 이롭게 한다는 것이다. 물이 없으면 만물은 고사(枯死)해버리고 만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무책상조차도, 죽어있는 듯이 보이지만, 적당한 수분이 없으면 이 꼴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하물며 살아있는 나무 한 그루야! 물은 생명의 근원이다. 물이 없으면 땅도 갈러지고, 모든 농작물이 타 죽는다.

 

그러나 물이 흐르게 되면 어느 곳이나 사망의 골짜기라 할지라도 다시 생명이 소생한다. 물이 있으면 곧 모든 생명이 춤춘다. 습기가 있는 곳은 곰팡이가 슬고 썩는다 함도,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요, 생명이 끊임없이 활발히 순환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모든 기()는 생명의 충만태요, 물을 만나기만 하면 그 가능태는 현실태로 변하게 마련이다.

 

물처럼 모든 것을 이롭게 하는 것이 또 어디 있으랴! 사막에서의 물 한방울처럼 우리에게 고마운 것이 어디 또 있으랴! 그것은 H2O라는 화학물질이 아니고 바로 생명 그 자체인 것이다. 물은 곧 생명이요, 물은 곧 신()이다. 다투지 아니하면서 모든 것을 이롭게 하고 모든 것에 생명을 부여하며 무소부재(無所不在)한 것! 그것은 곧 하느님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랴! 하느님이 곧 도(), ()가 곧 하느님인 것이다.

 

 

8. 물의 소리 없는 흐름이 전해주는 희망의 메시지

 

본 장에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노자에서 그리고 있는 물의 또 하나의 중요한 모습은 평형작용(equilibrium function)이다. 그것은 지나가면서, 높은 것을 깎아내고 낮은 것을 돋아준다[損有餘而補不足], 물은 평형의 상징이다. 모든 것의 호라이즌(horizon)이 곧 수평(水平)이다. 물은 어느 곳, 어느 상태에서든지 수평(水平)을 지향한다. 수평(水平)의 지향이 곧 물의 활동성의 과정이다.

 

이러한 물의 이미지가 노자에게 있어서는 사회적 평등관의 이미지와 결부되어 있다. 노자는 칼 맑스처럼 계급의 평등을 말하지 않는다. 노자는 오직 물의 평등을 말할 뿐이다. 사회적 평등의 개념은 인간의 경제활동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모든 정신적 가치에도 포괄적으로 고려되어야 하는 개념인 것이다. 그래서 물의 평등은 단순한 계급적 획일주의나 노동가치의 분배의 평등을 초월하는 포괄적인 평등인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이론이 아니요, 우리가 살면서 터득하는 모든 가치의 포섭적인 평등의 체계(Comprehensive Equilibrium)인 것이다.

 

이러한 길()과 물()의 이미지는, 직선적인 발전만을 추구하고, 무차별적인 경제적 진보만을 추구하고, 따라서 모든 사회적 불평등의 현실을 묵살하는 군사독재정권의 압제 속에서 신음하고 있던 나에게, ‘새마을운동이라는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문화박멸운동(culturcide movement)의 수레바퀴 밑에서 끔찍스럽도록 증오스러운 나날을 보내야만 했던 나에게, 그것은 참으로 위대한 구원의 빛이었다. 물의 소리없는 흐름은, 비록 다툼이 없을지라도 우리 민족을 그러한 천박한 쟁()의 문화로부터 다시 탈출시키고야 말리라는 소망을 던져주는 어떤 근원적인 역사의 멧세지였던 것이다.

 

 

9. 물이 도에 가깝다(居善地, 心善淵, 與善仁,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

 

‘거(居善地)’로부터 시작하는 일곱구절은, 백서본(帛書本)에도 거의 비슷한 형태로 실려있다. 그런데 그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방식은 너무도 다양한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 같은 글자에 대해서도 동사ㆍ형용사ㆍ목적어의 다양한 변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居善地 거할 때는 땅을 좋은 것으로 삼고
거할 때는 낮은데 처하기를 잘하고
좋은 땅에 거하고
거할 때는 땅을 좋게 하고

 

 

이 밖에도 다른 번역의 가능성이 있겠지만,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번역해도 어느 것이 더 정답이라는 논의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일곱 구절은 물의 덕성을, 도를 구현하는 인간의 삶의 방식에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이 구절이 시작되기 전에 노자는 물[]의 모습을 묘사하고, 그것을 정돈하는 자리에서 고기어도(故幾於道)’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여기 기어(幾於)’라는 표현은 ‘~에 가깝다라는 뜻이다. 여기 숨은 주어는 []’이다. ‘수기어도(水幾於道)!’ 이것은 과연 무슨 뜻인가? 여기에 우리의 천재소년 왕필(王弼)은 또 하나의 기발한 주석을 남겨놓고 있다.

 

 

道無水有, 故曰幾也.

 

 

나는 이러한 옛사람들의 언어를 들여다 보고 있으면 좀 소름이 끼친다. 너무도 현대철학의 다양한 주제들이 이미 이 간략한 옛 사람들의 언어 속에 아주 명료하게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애매한 구석이 없이 아주 진솔하게 문제의 정곡을 찌르고 있기 때문이다.

 

 

10. 카시러가 말한 기호와 상징

 

말부르크 신칸트학파의 한 사람이며, 나치의 압제를 벗어나 영국, 스웨덴을 전전하다가 나중에는 미국 예일ㆍ콜럼비아대학에서 날카로운 지성의 혜망을 휘날리며 생애를 마감했던 20세기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카씨러(Ernst Cassirer, 1874~1945)는 그의 주저, 인간론(An Essay on Man, 1944년 초간)에서 인간을 상징적 동물이라고 규정한다. 여기서 상징이라 함은 인간의 개념적 인식이 가지고 있는 상징화(symbolization)의 능력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바라보고 있는 모든 세계, 그러니까 과학뿐만 아니라, 신화, 종교, 언어, 예술, 역사 등등의 모든 세계가 하나의 상관된 상징의 체계라는 것이다. ‘상징화란 곧 상징적 표상(symbolic representation)’이다. 상징적 표상은 곧 우리의 오성적 인식의 본질인 것이다.

 

카씨러에게 있어서 상징(symbol)과 싸인(sign)은 매우 다른 것이다. 싸인이란, 기호라는 물리적 체계와 그것이 지시하는 의미 체계와의 관계가 거의 1:1의 관계이거나 지극히 협애한 통로 속에 제한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교통신호는 빨간불=멈춤’, ‘파란불=이라는 지극히 협애한 대응관계에 국한되는 싸인일 뿐이다. 그것은 상징체계가 아니다.

 

그러나 상징의 특징은 이러한 협애한 대응관계를 초월하는 보편적 적응의 원리(a principle of universal applicability)를 가지고 있다. 상징과 상징이 지시하는 의미체와의 관계는 1:1이 아니라 1:의 관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노자가 말하는 물은 물이라는 물체가 아닌 하나의 상징(symbol)이다. 그 물이라는 상징은 저기 저 흐르는 H2O의 물리적 사실이 아니라, ()의 무한히 다양한 성격을 표상하는 현상을 기능적으로 지시하는 의미의 체계인 것이다. 싸인이란 물리적 세계에 속하지만, 상징이란 인간의 의미의 세계에 속하는 것이다. 싸인은 조작체(operator)이지만, 상징은 지시체(designator)인 것이다. 싸인은 물리적 존재이지만, 상징은 기능적 가치인 것이다.

 

 

싸인(sign) 상징(symbol)
지극히 협애한 통로 속에 제한됨 보편적 적응의 원리
1:1의 관계 1:의 관계
물리적 세계에 속함 인간의 의미의 세계에 속함
조작체(operator) 지시체(designator)
물리적 존재 기능적 가치

 

 

바로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것은 기호가 아닌 상징을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는 데 있다. 개나 새도 기호적인 언어를 소유하지만, 그 언어는 상징적 언어의 형상적이고도 보편적인 힘에는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성격의 것이다. 인간의 지능은 개념(conception)으로부터 출발하며, 개념은 모두 상징적 표현(symbolic expression)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적 형상의 창조의 총체가 곧 인간의 문화(Culture)라는 것이다.

 

 

11. 카시러와 반대되는 입장을 지닌 왕필

 

바로 이러한 현대철학의 핵심적 과제를 노자는 암시하고 있고, 이 암시를 왕필(王弼)은 보다 현시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노자(老子)는 왜 물을 말하면서 ()에 가깝다.’ 가깝다()’라는 표현을 썼을까? 이에 대하여 왕필은 너무도 명료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는 무(), ()는 유(). 그러므로 가깝다는 표현을 쓴 것이다.

道無水有, 故曰幾也.

 

 

왕필이 말하는 유()라는 것은 물리적 사실(physical fact)을 의미하는 것이다. 왕필이 말하는 무()라는 것은 상징적 체계의 총체(the total symbolic system)를 의미하는 것이다. 물이라는 물리적 유()적 사실이 도라는 상징적 무()적 체계와 정확히 대응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껏해야 가깝다라는 표현밖에는 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물리적 사실(physical fact) 水幾於道
상징적 체계(symbolic system)

 

 

이렇게 표를 만들어 놓고 보면 무엇인가 도와 물의 관계가 매우 명료하게 드러나는 듯이 보이지만,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에른스트 카씨러의 상징주의적 입장과 노자나 왕필의 입장은 전혀 반대되는 존재론적 ㆍ형이상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보다 심층적으로 재해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12. 물은 상징체계이며 도에 계속 근접해가더라도 영원히 일치될 순 없다

 

카씨러에게 있어서 상징적 체계는 상징적 형상(symbolic form)이다. 여기서 말하는 형상은 곧 우리의 개념이요, 관념이며,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플라톤(Platon: BC 427~347)의 이데아를 지칭한다. 카씨러에게 있어서 형상(Form)이란 부정되어야할 것이 아니라 긍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노자에게 있어서 형상이란 가도지도(可道之道)의 세계며, 그것은 긍정되어야 할 세계가 아니라 부정되어야 할 세계인 것이다.

 

왕필이 물은 있고[水有], 도는 없다[道無]라 했을 때, 있음[]은 단순한 물리적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라는 유[]는 이미 인간의 언어에 의하여 고착된 질서로서의 한정자라는 뜻이다. 그리고 도는 없다라 했을 때의 없음[]은 그러한 언어적 고착에 의하여 파악될 수 없는 무한정자(the Unconditioned)를 의미한다. 따라서 그 무한정자의 세계야말로 우리의 언어적 세계를 뛰어넘어 치립(峙立)하는 사실의 세계이다. 그 사실이야말로 노자에게 있어서는 상()의 세계인 것이다.

 

즉 노자의 실재(리알리티, Reality)는 카씨러가 말하는 상징적 체계가 아니라, 그러한 상징적 체계를 뛰어넘는 끊임없이 변하는 사실로서의 세계인 것이다. 노자에게 있어서 초월(the Transcendental)이란 바로 끊임없이 변하는 현상적 사실로의 복귀인 것이다. 따라서 노자ㆍ왕필의 도표는 이렇게 바뀔 수밖에 없다.

 

 

물리적 사실(physical fact) 水幾於道
상징적 체계(symbolic system)

 

 

관념의 세계(the world of idea) 水幾於道
사실의 세계(the world of fact)

 

 

두 도표를 비교해놓고 보면 우리는 매우 당혹감을 느끼게 된다. 그 대응되는 언어가 완전히 정반대로 뒤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이 두 개의 도표를 동시에 오버랩시킴으로서 동ㆍ서양을 소통시킬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는 분명 유(), 물리적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물리적 사실이라고 말하는 것은 엄밀하게 분석하면, 그것은 이미 언어화된 사실이며, 그 언어는 고착된 질서 속에 갇혀 있다.

 

()는 무(). 우리의 감관으로 쉽사리 파악할 수 없는 궁극적인 사실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의 세계는 우리에게 상징의 체계(symbolic representation)로서 밖에는 드러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왕필주석에 대한 최종적 해석은 이러하다. 물은 이미 하나의 상징체계이며, 그러한 상징체계는 끊임없이 상징체계를 벗어나 있는 도() 즉 무()의 세계에 끊임없이 근접할 수는 있을지언정[] 영원히 일치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사실 인식은 끊임없이 언어의 제약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13. 한비자와 노자의 도와 물에 대한 동일한 맥락

 

인류역사상 노자도덕경의 최초의 주해서라 할 수 있는 한비자(韓非子)해로(解老)(老子를 해석함) 편에는 도와 물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언급이 있다.

 

 

만물이 도를 얻어 죽을 수도 있고, 또 도를 얻어 살 수도 있다. 만사가 도를 얻어 패망할 수도 있고, 또 도를 얻어 성공할 수도 있다. 도는 비유하건대 물과도 같은 것이다. 물에 빠진 자가 물을 너무 많이 마시게 되면 곧 죽을 것이요, 심히 목마른 자가 적시에 알맞게 물을 마시면 곧 살아날 것이다.

萬物得之以死, 得之以生; 萬事得之以敗, 得之以成. 道譬諸若水, 溺者多飮之卽死, 渴者適飮之卽生.

 

 

여기에 왕필이 후대에 도무수유(道無水有)’라 말한 그 논지의 맥락이 이미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2장의 가치론에서 말했듯이, 도는 인간의 상대적 가치에 국한되는 그러한 것이 아니다. 만물(萬物)의 죽음()과 삶(), ()과 패()는 상황적인 상대적인 현상이다. 그러나 도()는 그러한 상대적인 현상에 국한되는 그러한 성격의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철학자 율곡선생이 말했듯이 물은 동그란 컵에 담으면 동그란 것이요, 세모난 컵에 담으면 세모난 것이다. 그것은 무자성(無自性)’이다.

 

물이라는 물적(物的) 현상 그 자체는 상황적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맥락을 띠고 우리에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올 여름 폭우가 쏟아질 때, 연천, 문산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물이란 결코 노자가 낭만적으로 그리고 있는 그러한 선리만물이부쟁(善利萬物而不爭)’하는 의젓한 모습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폭력이요, 사망이요, 무차별 파괴다. 그것은 바로 불인(不仁)한 천지(天地)의 모습이다. 그러나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아 헤매는 목마른 대상들에게 물 한방울은 생명이요, 소생이요, 죽음의 퇴치다. 이와 같이 동일한 물체가 상대적 맥락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고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물은 생()과 사(), ()과 패()의 일면을 속성으로 해서 나타나는 유()이지만, 도는 생()과 사(), ()과 패()를 초월하는 무()인 것이다. 여기 우리는 한비(韓非)의 주석과 왕필(王弼)의 주석의 내재적 맥락의 연속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14. ‘居善地, 心善淵, 與善仁의 해석

 

거선지(居善地)

 

여기서 지()는 아무래도 중성적인 의미의 이라기 보다는, 겸양의 뜻을 나타내는 낮음가치가 포섭되어 있는 말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일찍이 길과 얻음에서 이 구절을 살 때는 물처럼 땅을 좋게 하고라고 번역했는데, 요번에는 살 때는 낮은 땅에 처하기를 잘하고라고 번역하였다. 전자는 선()좋게 한다(to make it good)’로 해석한 것이고, 후자는 선()잘 한다(to be good at)’로 해석한 것이다. ‘잘 함의 가치내용을 ()’가 설명하는 것으로 풀이한 것이다.

 

 

심선연(心善淵)

 

()은 마음가짐이요, ()은 잘 함[]의 가치내용이 될 것이다. ()은 물이 깊이 있어 그윽한 모습이다. 이아(爾雅)』 「석고(釋詁), 深也라 하였고, 석천(釋天), 藏也.’라 하였다. 인간의 마음은 그윽한 물과 같이 맑고 깊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구룡폭포 밑의 깊은 웅덩이 처럼 많은 것을 담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선인(與善仁)

 

금본(今本)여선인(與善仁)’ 혹은 여선인(與善人)’으로 되어 있는데, 백서(帛書) 을본(乙本)에는 이것이 분명하게 여선천(予善天)’으로 되어 있다. 와전된 경로를 보면 이 된 것 같은데, ‘()’은 분명히 노자텍스트의 오리지날한 모습이 아니고, 후대의 사람들이 유가의 영향을 받아 고친 것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보통 ()’는 벗을 사귀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벗을 사귈 때는 인자()하기를 잘한다는 뜻으로 새기는 것이 통례로 되어있다. 그러나 ()’준다(to give)’로 새길 수밖에 없다. ‘더불어 한다(to be with)’로 새겨서는 아니될 것이다. 왜냐하면 백서(帛書) 두 본에 모두 분명 ()’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선인(與善仁)’은 분명 여선천(予善天)’의 글자의 의미와 자형의 유사성에 의한 와전이다. 그런데 ()’은 여기서 ()’으로 해석할 수가 없다. ‘여선천(予善天)’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물은 만물에게 자기를 잘 주면서도 하늘과 같은 넓은 마음으로 자기가 준 것에 거하려 하지 않는다. ‘공수신퇴(功遂身退)’의 하늘과 같은 미덕을 나타낸 말이다.

 

 

15. ‘言善信, 正善治, 事善能, 動善時의 해석

 

언선신(言善信)

 

고대 한자에 있어서 신()의 뜻은 믿음이나 신앙(Belief)의 뜻이 없다. 그것은 신험(信驗) 가능하다. 즉 증명 가능한 신실한 것이라는 뜻이 그 일차적 함의로 되어 있다. ()‘verification’, ‘verifiability’의 뜻이다. 인간의 말은 증명될 수 있어야 한다. 신험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믿음직스러워야 하는 것이다.

 

 

정선치(正善治)

 

고자(古字)에 있어서 정()과 정()은 한 글자이다. 그런데 뜻도 통한다. ()은 정치요 다스림이다. 그런데 다스림이란 곧 사회를 바르게 함[]이다. (Government)은 곧 (Correction)이요, ()은 곧 정()이다.

 

다스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치()를 지향하는 것이다. 보통 치()다스릴 치(다ᄉᆞ릴티, 石峰千字文)’라고 하는데, 실제로 요즈음 말로 다스린다 하는 것은 ()이 바르게 해당되는 것이고, ()의 본 뜻은 다스려짐이다. 즉 치()는 난(, 어지러움)과 대립되는 질서를 말하는 것이다. 정치란 바로 사회의 질서와 기강을 세우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은 항상 난()한다로 치우치기 쉬우므로 그것을 정(, 바르게)하여 치()한 상태로 가게 하는 것이 곧 정치인 것이다. 질서(Order)를 세우지 못한다면 어찌 다스린다 할 수 있으리오?

 

 

사선능(事善能)

 

여기 (0’라는 것은 섬긴다는 뜻과, 그냥 일한다즉 아르바이트(Arbeit)의 의미가 담겨 있다. 생각해보라! 칼 맑스의 아르바이트의 개념! 그러나 물의 노동은 단순히 생산을 위한 노동이 아니다. 그것은 생명의 창출을 위한 모든 다양하고도 미묘한 자연의 움직임을 포섭하는 것이다. 물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보라! 무엇으로 더러운 것을 씻을 것이며, 무엇으로 만물에게 영양을 공급할 것이며, 무엇으로 문명의 에너지를 일으킬 것인가? 물처럼 능력이 높은 것이 없다. 따라서 물과 같은 사람은 일할 때는 물처럼 능력있게 모든 상황에 대처하는 것이다.

 

 

동선시(動善時)

 

(, 움직임)과 시(, )라고 하는 것은 동양사상에 있어서는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 상관개념이다. 움직인다 하는 것은 반드시 때를 바르게 타야하는 것이다. 겨울에 장마가 질 수는 없는 것이다. 장마가 여름에 오는 것은 바로 만물이 물을 머금을 수 있는 때를 맞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에 바위가 물을 먹고 있으면 갈라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저기 저 우뚝 서있는 뫼악도 거저 우두커니 서있는 것이 아니라, 가을이 되면 월동준비를 한다. 여름 내내 머금었던 수분을 내기 시작하고 따라서 가을이 되면서 산속에서 우러나온 시냇물이 졸졸 흐르기 시작한다. 여름엔 비가 그치면 오히려 계곡에 물이 마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물은 춘하추동(春夏秋冬) 각기 때를 따라 움직인다. 우리 인생(人生)도 마찬가지로, 물의 미덕을 터득한 사람은 움직일 때는 반드시 때를 고려하여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국회의원을 출마할 것인가, 아니할 것인가? 직장을 더 다닐 것인가, 그만 둘 것인가? 이사를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시집을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이 모두가 바른 때를 탈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16. 불 같은 구원의 경쟁(競爭)에서 물같은 겸양의 부쟁(不爭)으로(夫唯不爭, 故無尤)

 

上善若水"장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나고 있다. ‘대저 오로지 다투지 아니하니 허물이 없어라[夫唯不爭, 故無尤].’

 

역시 노자가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있는 물의 덕성은 역시 다투지 않는다[不爭]’의 미덕이다. 물은 다투지 않는다. 다투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에 생명을 부여하고 모든 것을 이롭게 성취시킨다. 우리네 인생도 다툼이 없이 모든 것을 성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중동 사막문명의 사람들은 본시 사막의 각박한 환경에서 물()을 모르고 불()만 보고 자랐기 때문에 광포하고 흉포하다(fierce and fiery). 그래서 그 사막에서 태어난 종교는 마찬가지로 광포하고 흉포하고 불과도 같다. 성경의 메타포를 보면 떨기 불이니 불기둥이니 심판의 불이니 지옥의 불이니 성령과 불로 세례를 준다는 둥, 강렬한 불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을 불의 종교라 한다면 노자의 가르침을 물의 종교라 할 수 있을까?

 

기독교에 의하여 우리의 20세기 개화가 주도되어 왔다면, 이제 한 발자국 물러서서 생각해보자! 불같은 구원의 경쟁()에서 물같은 겸양의 부쟁(不爭)으로 물러서는 지혜도 배워볼 만하지 않은가? 오로지 다투지 아니 하니 허물이 없을진저(無尤) !

 

 

17. ‘上善若水水善利萬物而不爭의 판본 차이

 

8장은 백서(帛書) ()ㆍ을본(乙本)에 모두 정연하게 실려 있다. 그런데 현행 왕본(王本)과 백본(帛本)이 차이나는 점을 몇 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상선약수(上善若水)

 

우선 상선약수(上善若水)’(, 같다)’이라는 단어의 선택이 다르다.

 

 

甲本 上善治水
乙本 上善如水
王本 上善若水

 

 

갑본(甲本)치수(治水)’의 치()()’의 의미다. 그러므로 비슷하다라는 뜻이 된다.

 

 

 

수선리만물이부쟁(水善利萬物而不爭)’ 구절의 차이

 

다음 수선리만물(水善利萬物)’은 세 본이 다 공통되지만 그 다음의 부쟁(不爭)’이 큰 차이를 보인다.

 

 

甲本 水善利萬物而有靜
乙本 水善利萬物而有爭
王本 水善利萬物而不爭

 

 

갑본(甲本)유정(有靜)’은 의미가 확실하다. 그것은 물의 정적인성격을 나타내는 말이다.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도 고요하다의 뜻이 된다. 물의 고요함과 만물을 이롭게 하는 동적인 성격이 콘트라스트(contrast)를 이루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을본(乙本)이다. 을본(乙本)은 일단 ()’이라는 글자를 베끼는 과정에서 앞의 푸를 () 자를 빼먹어서[誤寫] ‘()’이 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유정(有靜)’은 의미가 통할 수 있지만, 그것의 오사(誤寫)유쟁(有爭)’은 노자철학의 맥락에서 전혀 다른 뜻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물은 만물을 잘 이롭게 하면서 만물과 잘 다툰다는 엉뚱한 뜻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될 수 없는 초사(抄寫)의 오류인 것이다. 따라서 왕본(王本)은 그 ()’()’로 고쳤다. 그래서 부쟁(不爭)’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초사(抄寫)의 오류과정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변천되어 갔다고 추론해 볼 수 있다.

 

 

有靜 有爭 不爭

 

 

이것은 초사(抄寫)의 오류과정이 발생시키는 재미있는 의미의 변천의 한 과정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이러한 추론은 정당성이 없다. 왜냐하면 같은 장 속, 바로 제일 끝 구절에 중복되는 의미가 있고[夫唯不爭, 故無尤], 그 텍스트의 모습이 이러한 추론을 정당화시켜주지 않기 때문이다.

 

 

甲本 夫唯不靜, 故无尤.
乙本 夫唯不爭, 故无尤.
王本 夫唯不爭, 故無尤.

 

 

여기에는 분명 갑()과 을본(乙本)이 모두 유정(有靜)’, ‘유쟁(有爭)’이 아닌, ‘부정(不靜)’ ‘부쟁(不爭)’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역시 노자철학에 있어서 물의 이미지는 그 정적(靜的) 성격(static character)에 있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끝까지 부쟁(不爭)’의 성격에 있음이 확연이 드러난다.

 

그렇다면 ()’()’노자백서초사(帛書抄寫) 당시에는 동음동의(同音同義)의 다른 글자[異體字]였을 뿐일 것이다. 그리고 앞의 유()는 불()의 단순한 오류로 간주되어야 한다. 최소한 갑본(甲本)의 경우 을본(乙本)과 초사(抄寫)의 전승이 다른 것이므로 그 판본에는 유정(有靜)’의 가능성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의미의 맥락이 결착되는 부분에 부정(不靜)’으로 되어 있음으로 유정(有靜)은 역시 부정(不靜)’의 오사(誤寫)로 보는 것이 가장 정당하다.

 

이와 같이 옛사람들이 한 책을 초사(抄寫)할 때 상당히 엉성하게책을 베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요즈음의 일본 장인(匠人)정도만 되어도 이런 오류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중국사람은 역시 적당적당[馬馬虎虎]한 구석이 많다. 그러한 단순한 초사의 오류를 가지고 대단한 학설을 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런 것들이 모두 노자판본을 펴놓고 들여다 보면 재미있게 읽혀질 수 있는 휴먼 드라마인 것이다.

 

 

18. 노자의 물의 비유는 전국시대 후기에 형성된 것이다

 

그런데 이 물의 비유, 노자(老子)의 도()를 말하는 데 없어서는 아니 될 이 물의 비유를 말하는 8장이 죽간(竹簡)에 있는가, 없는가? 있는가? 없다!

 

노자(老子)전체 여든 한 장 속에는 물을 비유로 해서 말한 장들이 이 8장 말고도 또 많이 있다. 정말 노자에게서 물의 상징이란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물의 상징성을 담은 다른 장들은 죽간(竹簡)에 나타나는가? 신비롭게도 죽간에는 그런 장들이 모두 빠져있다. 극히 간접적인 비유로 연결지을 수 있는 내용을 제외하고는 물에 관한 언급은 죽간(竹簡)에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 우리는 이런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노자의 물의 비유노자라는 서물의 고층대에 속하지 않는다. 물과 도의 상징적 연관은 어떠한 물의 철학의 학파의 사상과 노자가 결합함으로써 전국시대 후기에 형성된 것이다.

 

이러한 가설은 분명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가설이다. 이러한 가설을 반증할 수 있는 논리는 무수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첫째, 현대 곽점죽간(郭店竹簡)은 초사본(抄寫本)일 뿐이며, 당시에 초사(抄寫)의 대상이 된 노자라고 하는 어떠한 프로토텍스트(proto text)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었고, 또 그 프로토텍스트 자체가 갑()ㆍ을()ㆍ병() 모두 다른 전승의 것이라고 상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것은 문자학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거의 확실시될 수 있는 가설이다).

 

따라서 곽점죽간(郭店竹簡)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 나타나지 않는 부분이 곽점죽간(郭店竹簡) 당대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에 관한 노자의 부분이 다른 전승으로서 별도로 존재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러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하나의 거대한 사건이 있다. 곽점죽간(竹簡) 노자는 앞서 말했듯이 갑()ㆍ을()ㆍ병()

삼조(三組)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병조(丙組)의 끝부분에 노자(老子)병조(丙組)와 분리할 수 없는 14개의 죽간이 붙어 있는데 그 내용이 현재의 노자본 속에 들어있지 않은 생소한 내용인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자가 태일생수(太一生水, 우주의 원질인 太一이 물을 낳았다)’라고 하는, 마치 요한복음첫 구절을 연상케 하는 그런 오묘한 말로 시작하고 있어 이 14개의 죽간을 학계에서 편의상 태일생수(太一生水)(지금은 책명으로 통용되고 있다)라고 부른다.

 

 

19. 소박하게 우주의 발생을 담은 태일생수(太一生水)

 

지금 이 태일생수편을 놓고 학계에는 다양한 가설들이 난무하고 있다. 그 내용이 우리가 선진문헌에서 보기 어려운 우주발생론(Cosmogeny)의 매우 체계적인 그랜드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14개의 죽간은 양단(兩端)이 평제(平齊)하며, 길이가 26.5에 달하는 것으로 그 형제(形制)와 체제(書體)노자(老子)병조(丙組)와 완전히 동일하다. 그리고 병조(丙組)태일생수가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이 연속해서 묶여있는 합편(合編)’인 것이다. 혹자는 이 태일생수(太一生水)자체가 노자(老子)의 병조(丙組) 일부(一部)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태일생수(太一生水)노자(老子)의 일부였다는 것이다.

 

하여튼 이러한 주장의 타당성을 왈가왈부하기 전에, 태일생수(太一生水)죽간(竹簡) 노자(老子)와 동일한 계열의 사상체계를 이루는 당대의 도가(道家) 문현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헌의 주제가 바로 []’이라는 놀라운 사실이다. 그렇다면 곽점죽간(郭店竹簡)시대에 노자(老子)사상 속에 물의 사상이 없었다는 가설은 성립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물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우주론적 사유가 이미 전국초기에 형성되어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태일생수(太一生水)의 문헌학적 성격에 관하여 내가 확고한 견해를 제출하기까지는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이다.

 

당대의 문헌과의 충분한 비교검토의 과정을 요하는 것이다. 단지 이 자리를 빌어 독자들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하여 그 도입부분의 언어를 정확한 우리말 해석과 함께 여기 싣는다.

 

 

태일(太一)은 물을 낳는다. 생하여진 물은 생하는 태일(太一)을 오히려 도운다. 그리하여 하늘을 이룬다. 하늘 또한 자기를 생한 태일(太一)을 오히려 도운다. 그리하여 땅을 이룬다. 이 하늘과 땅이 다시 서로 도와서 신명(神明)을 이룬다. ()과 명()이 다시 서로 도와서 음양을 이룬다. 음과 양이 다시 서로 도와서 네 계절을 이룬다. 춘ㆍ하와 추ㆍ동이 다시 서로 도와서 차거움과 더움을 이룬다. 차거움과 더움이 다시 서로 도와서 습함과 건조함을 이룬다. 습함과 건조함이 다시 서로 도와서 한 해를 이루고 이로써 우주의 발생이 종료된다.

太一生水, 水反輔太一, 是以成天. 天反輔太一, 是以成地. 天地(復相輔), 是以成神明. 神明復相輔也, 是以成陰陽. 陰陽復相輔也, 是以成四時. 四時復輔也, 是以成凔熱, 凔熱復相輔也, 是以成溼燥. 溼燥復相輔也, 成歲而正. (여기 쓰인 문자는 교정을 거쳐 오늘 통용되는 글자로 고친 것이다).

 

 

이것은 분명 소박하지만 우주의 발생을 말하고 있는 매우 체계적인 우주론의 한 전형이다. 우리는 중국인의 우주발생론을 말할 때는, 흔히 주자학의 원류라 할 수 있는 송나라 초기의 대유학자 주렴계(周濂溪, 1017~1073)태극도설(太極圖說)을 연상하지만, 그것은 보통 불교의 우주론적 인식론이 들어온 후, 그것에 의하여 계발된 후기 도교의 어떤 도식에 의하여 흥기한 이론이라고만 생각해왔다. 그런데 그러한 발생론적 우주론이 명료하게 선진(先秦) 문헌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은 사실 유례가 없는 사건이다.

 

 

20. 太一生水태극도설(太極圖說)의 연관성

 

태극도설(太極圖說)의 앞 글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무극이면서 태극이 있도다! 태극이 움직이여 양을 낳고,

움직임이 극에 달하면 고요하게 된다. 태극이 고요하면 음을 낳고, 그 고요함이 극에 달하면 다시 움직인다. 한번 움직이고 한번 고요한 것이 서로 뿌리가 된다. 그렇지만 음으로 나뉘고 양으로 나뉘어져 두 극이 세워진다.

無極而太極, 太極動而生陽, 動極而靜, 靜而生陰, 靜極復動. 一動一靜, 互爲其根, 分陰分陽, 兩儀立焉.

 

양이 변하면 음이 그에 합하여져서 수ㆍ화ㆍ목ㆍ금ㆍ토를 낳는다. 다섯 기가 골고루 배포되어 네 계절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오행도 결국 하나의 음양이다. 음ㆍ양도 결국 하나의 태극이다. 태극은 본래 무극인 것이다.

陽變陰合, 而生水火木金土, 五氣順布, 四時行焉. 五行一陰陽也, 陰陽一太極也, 太極, 本無極也.

 

 

태극도설의 도식을 간략히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물론 이 간단한 도식과 언사 속에는 일반독자들이 헤아리기 어려운 엄청난 논쟁들이 숨어있다.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이라고 부르는 송()ㆍ명()유학 전체가 바로 이 한 도설(圖說: 원래 태극도라는 그림[]이 있고, 그 그림을 설명한[] 것이다) 하나에서 연화(演化)된 것이라 말하여도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우리나라의 조선조 문명이 이 한 구절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조금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도식의 개념의 연쇄를 살펴보면 자그만치 2,300년 동안을 땅속에 숨어있다가 1993년에나 우리 육안에 드러난 이 신비스러운 죽간자료, 태일생수(太一生水)와 모종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無極 太極 動靜 陰陽 五行 四時

 

 

태극도설(太極圖說)의 도식적 설명은 분명 어떤 일방적인 시간의 흐름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그 흐름의 종착역이 바로 사시(四時)’라고 하는 이 사실에 그동안 대부분의 태극도설(太極圖說)의 논쟁자들이 주목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 태극도설(太極圖說)의 우주발생론적 흐름은 사시(四時, 네 계절)’에서 종료되고 있는 것이다.

 

 

21. 창세기의 창조와 태일생수의 창조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태일생수(太一生水)의 우주발생론의 종구(終句)가 바로 습함과 건조함이 다시 서로 도와서 한 해를 이루고 이로써 우주의 발생이 종료된다[成歲而止]’로 끝나고 있다는 사실인 것이다. 이것은 과연 무슨 소린가?

 

동양인들에게 있어서 우주의 발생이란 우리가 보는 물리적 환경이나 물체, 즉 만물(萬物)의 창조를 의미하지 않는다. 누누이 말했듯이 동양인들이 말하는 ()’이란 고정된 이 아니라 동정(動靜)과정일 뿐이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창세기에서 말하는 식의 창조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불행하게도 물()을 실체(實體)로 파악했기 때문에 물() 아닌 어떤 것에 의하여 그 물()이 창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 동양인들에게는 물()이란 근원적으로 창조의 대상이 아니다. 만물(萬物)이란 천지(天地)의 끊임없는 과정에서 생겨나는 객형(客形)일 뿐이요, 그것은 끊임없이 생멸(生滅)하는 과정태(過程態)일 뿐이다. 그러면 창조의 대상은 무엇인가? 창조는 바로 시간의 창조인 것이다. 변화하는 시간의 창조인 것이다. 만물의 생성을 질서 지우고 있는 시간의 창조인 것이다.

 

따라서 태일(太一)’로부터 시작되는 전 과정이 ()’로 끝나고 있다는 이 사실은 곧 세(1)라는 시간의 완성을 뜻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는 물리적 시간이 아니요, 바로 생명적 시간인 것이다. 그것은 크로노메타(chronometer)로 재어질 수 있는 그러한 시간이 아니라, 삶의 시간(the Time of Life)인 것이다. 그런데 이 시간을 누가 창조하는가? 이 시간의 창조자가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이요,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다. 서양인들이 말하는 창조주는 바로 로고스(λόγος)’인 것이다. 그것은 곧 인격적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태일생수(太一生水)는 말한다. 시간의 창조주는 로고스가 아니라, 물이다. 물이 곧 시간이요, 시간이 곧 물이다. 물이 곧 생명이요, 생명이 곧 물이다. 시간이 곧 생명이요. 생명이 곧 시간이다. 태일생수(太一生水)의 도식에 있어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의 주요. 대립개념이 모두 물의 시간(변화)의 측면들일 뿐이다.

 

 

春夏 秋冬

 

 

천지(天地), 신명(神明), 음양(陰陽), 사시(四時), 열창(熱凔, ), 조습(燥濕)이 모두 수()의 변화태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각 항이 모두 1년이라고 하는 시간을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1년이라고 하는 시간을 단위로 해서 순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년은 우리 삶의 시간의 전부이다. 창세와 종말이라고 하는 더 이상의 시간의 스트레치(직선적 연장)를 가질 필요가 없다.

 

 

22. 모든 시간의 방향성은 쌍방적이다

 

우리가 태극도설(太極圖說)에서 중시해야 할 것은 바로 일동일정 호위기근(一動一靜, 互爲其根)’이라는 이 한마디다. 즉 태극(太極)의 동()과 정()에서 양과 음이 생겨나지만, 이 동(, 움직임)과 정(, 고요함)1회적 사건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과정(Process)’으로서 서로가 서로의 뿌리가 된다는 것이다. 일자가 실체적인 뿌리로 고정되어 있어서, 그 뿌리에서 가지로 일방적으로 뻗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뿌리가 된다는 것이다.

 

 

뿌리 가지
가지 뿌리

 

 

()과 정(), 음과 양의 이러한 호근적(互根的) 성격, 상보적(相輔的) 성격이 재미있게도 태일생수(太一生水)에는 모든 생성의 단계에 명료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시간의 방향성이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적이라는 것이다.

 

태일(太一)’은 복잡한 해설이 필요없다. 노자(老子)자체 텍스트 속에도 ()’개념이 계속 나온다. ‘()’에다가 크다고 하는, 그 근원성과 포괄성의 의미를 나타내는 ()’를 붙이는 것은 인간사유의 공통적 특성이다. 모든 고대문명의 신화적 언어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태일(太一)’은 한마디로 노자가 말하는 ()’의 별칭이다. 그것은 하나님이요 하느님이다. 그러나 태일(太一)은 생성의 주재자가 아니요,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를 지시할 수 있는 초월적 말씀이 아니다. 태일(太一)은 상()이요 변()이요 우주의 실상(實相)이다. 따라서 태일(太一)이 수()를 생했다 해서 태일(太一)이 창조주가 되고 수()가 피조물이 되는 그러한 논리는 쌍방적 관계에서는 성립할 수가 없다.

 

 

23. 모든 순간에 기의 교감이라는 피드백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한다면, 동시에 이 세계는 하나님을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주요 인간이 피조물이라고 한다면, 인간이야말로 창조주요 신이야말로 피조물이다. 하나님이 무제약자요 인간(세계)이 제약자라고 한다면, 인간이야말로 무제약자요 하나님은 제약자다. 하나님이 초월자요 인간이 내재자라고 한다면, 인간이야말로 초월자요 신이야말로 내재자이다. 하나님이야말로 유일자요 인간이 다자(多者)라고 한다면, 인간이야말로 유일자요 하나님은 다자(多者)인 것이다. 도대체 인간으로부터의 피드백이 없는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신()이라는 것, ()라는 것은 도무지 허깨비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God)과 세계(the World), ()와 만물(萬物)의 관계는 일방적일 수 없는 것이며, 쌍방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학생으로부터의 피드백이 없는 일방적으로 가르침을 주기만 하는 선생이라는 것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군림하고 받는 것 없이 주기만 하는 선생은 곧 허깨비선생이 되고 말 것이다. 살아있는 선생이 아니라, 죽어있는 이름뿐인 추상체가 되고 말 것이다. 내가 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고 하는 행위의 모든 순간 순간에 기()의 교감(交感)이라고 하는 피드백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 세계(God and the World), 신과 인간(God and the Man)의 관계가 모두 그러한 것이다. 신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가 말하는 물자체(Ding-an-sich)가 아니라, 끊임없이 현상으로부터 그 생성의 원인을 제공받는 과정체인 것이다.

 

태일(太一)은 물을 생()하지만, 피조물인 물은 거꾸로 창조주인 태일(太一)을 생()한다. 이렇게 상호적인 창조(Mutual Creation)의 관계를 태일생수(太一生水)반보(反輔)’ ‘부상보(復相輔)’라 부르고 있다. 현대물리학에서도 A라는 소립자가 B라는 소립자를 생성시킨다고 하는 사건은 곧 B라는 소립자가 A라는 소립자를 생성시킨다고 하는 것과 동일한 사건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일방적인 시간 위에서 실체화될 수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곧 있는 것이다. 유무상생(有無相生)인 것이다.

 

 

A B C D E F

 

 

이와 같은 A로부터 F까지의 과정은 한 과정의 단계가 한 시간의 단위로서 분리될 수가 없다. AB의 관계, BC의 관계, CD의 관계, DE의 관계, EF의 관계, 이 모든 관계들이 착종된 하나의 전체를 형성할 뿐이다. A는 또다시 B, C, D, E, F와 착종될 것이요, B는 또 다시 A, C, D, E, F와 착종될 것이 모든 항목은 모든 항목과 동시적으로 착종될 것이다. 이러한 착종의 관계를 태일생수(太一生水)부상보(復相輔)’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太一    
   
 
春夏 秋冬
 

 

 

이와 같이 모든 상보적(相補的) 관계는 착종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 한(==)ㆍ열(), ()ㆍ습()이 언급되어 있는 것은 수분의 변화상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계절이라고 하는 시간의 변화상과도 관련되지만 나중에 이것은 오윤육기(五運六氣)’의 사상으로 발전하는 모태사상임을 알 수 있고, 상한론(傷寒論)등의 한의학적 인체관의 프로토 모델이 되는 사상유형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24. ()적인 물을 학대하고 천시하는 지금 사람들

 

그리고 이러한 문제, 특히 한의학적 인체관과 관련된 우주모델의 수론적(水論的) 성격을 나타내는 고대(古代) 문헌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관자(管子)라는 방대한 서물(書物) 속에 수록되어 있는 수지(水地)라는 일편이다. 수지(水地)편의 성립이 많은 학자들이 태일생수(太一生水)보다 앞서는 것으로 보고 있으나, 나는 그 선후를 가리기 어렵다고 본다. 태일생수(太一生水)의 성립을 수지(水地)편의 영향으로 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편은 대강 동시대에 성립한 것이 거의 확실하며 얼마나 중국고대인들이 우주론적으로 을 중시했는가를 알 수 있다.

 

물이 시간의 창조자요, 하나님의 로고스적 기능을 가진 것이라고 한다면, 인간이 오늘과 같이 물을 홀대할 수 있을까? 교회에 걸려있는 십자가보다 물이 더 성스럽고, 그들이 경배하는 하나님보다 물이 더 신적(神的)이라고 한다면 과연 오늘날과 같은 몰상식한 물의 학대ㆍ천시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라는 것은 만물의 본래 근원이요, 모든 생명이 태어나는 뿌리요 터전이다.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불선, 어리석음과 현명함이 모두 여기서 생겨나는 것이다. []이라는 것은, 땅의 피[], (). 그것은 우리의 몸에 근육과 혈맥이 있어 모든 것을 소통시키고 흐르게 해주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물이야말로 모든 가능성[]을 구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地者, 萬物之本原, 諸生之根菀也, 美惡, 賢不肖, 愚俊之所生也. 水者, 地之血氣, 如筋脈之通流者也. 故曰: , 具材也.

 

어째서 그러함을 우리는 알 수 있는가? 말한다! 대저 물은 부드럽고 유약하여 깨끗하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더러움을 씻어주기를 좋아하니, 인자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깊은 물을 쳐다보면 검푸르지만 손바닥에 떠서 보면 무색투명하다. 이것이 물의 청순하고 정미로운 성질이다. 물을 됫박에 잴 때 위를 고르는 막대기를 쓰지 않아도, 그것은 됫박에 차면 스스로 멈춘다. 이것이 물의 바른 미덕이다. 물은 차이가 있을 때는 흐르지 않는 법이 없다. 그러나 평균에 이르게 되면 스스로 멈춘다. 이것이 물의 의로움이다. 사람은 모두 한결같이 위로 가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물은 자기 홀로 항상 밑으로 간다. 이것이 물의 겸양(낮춤)의 미덕이다. 낮춤(겸양)이라는 것이야말로 도()가 깃드는 곳이요, 왕자의 그릇이다. 물은 진정코 항상 낮은 곳으로 모이는 것이다.

何以知其然也? : 夫水淖弱以淸, 而好灑人之惡, 仁也; 視之黑而白, 精也; 量之不可使槪, 至滿而止, 正也; 唯無不流, 至平而止, 義也; 人皆赴高, 己獨赴下, 卑也. 卑也者, 道之室, 王者之器也, 而水以爲都居.

 

수평(재는 기구)이야말로 모든 형량의 으뜸이다. 물의 무색이야말로 모든 색깔의 바탕이다. 물의 담박함이야말로 모든 맛의 중용이다. 그러므로 물이야말로 만물의 기준이며, 모든 생명을 살리는 담박한 체액이며, 모든 시비와 득실의 바탕이다. 그러하므로 물은 채우지 아니함이 없고, 가지 않는 곳이 없다. 물은 하늘과 땅에 가득 차며, 만물 어느 것에도 깃들지 아니함이 없고, 쇳덩이ㆍ돌바위에도 생하지 아니함이 없고, 모든 생명을 활성화시키지 아니함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물을 물하느님(水神)이라 부르는 것이다.

準也者, 五量之宗也; 素也者, 五色之質也; 淡也者, 五味之中也. 是以水者, 萬物之準也, 諸生之淡也, 違非得失之質也, 是以無不滿, 無不居也. 集于天地而藏于萬物, 産于金石, 集于諸生, 故曰水神

 

 

이 웅장한 수지(水地)편의 물의 예찬의 서사시를 읊어보라! 이제 독자 여러분들은 노자의 물이 고대인들의 어떠한 우주론적 생각의 틀 속에서 태어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물은 물이 아니다. 물은 곧 신()인 것이다! 수신(水神)의 예찬! 우리가 너무도 우리의 일상적 삶의 체험 속에서 잃어버린 기도요 믿음의 송가(頌歌)가 아니던가? 물은 곧 하느님이다! 물은 만물지준(萬物之準)이요, 제생지담(諸生之淡)이요, 시비득실지질(是非得失之質)이다. 어찌하여 이 하느님을 그다지도 천시하고 학대하고 못 살게 구는가? 현대인들이여 !

 

 

25. 모든 종교제식은 청수 한 그릇이면 족하다

 

현대 생화학의 지식을 동원해 보아도 지구의 진화의 역사는 물의 진화의 역사다. 생명이 곧 물에서 탄생한 것이다. 생명이란 세포막을 통하여 물의 삼투성을 조절하는 기능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우리의 몸은 곧 물의 순환의 체계이다. 우리의 피가 곧 물이요, 예수가 우리의 죄를 위하여 흘린 대속(代贖)의 피가 곧 물이다.

 

어찌하여 이러한 물을 그다지도 성스럽지 않게 바라볼 수 있는가? 우리나라 민중의 철학을 대변한 동학의 성자(聖者),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1827~1898)선생의 이 한 말씀을 다시 한번 새겨보자.

 

 

하늘과 땅이 모두 하나의 물 덩어리다. 물이라는 것이야말로 만물의 어미다. 모든 종교의 제식은 청수 한 그릇으로 족하니라!

 

 

나는 이 상선약수(上善若水)’8장을 해설함에 있어서 우리 고대인들 의 물과 관련된 자료를 몇 가지 나열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소박한 자료의 나열에 불과하다. 이것을 앞으로 연구하려면 다양한 가설과 깊은 생각이 필요하다. 노자라는 서물의 세계는 이와 같이 무궁하다.

 

우리나라의 젊은 학도들이여! 컴퓨터 자판만 두드리고 있지 말고, 이렇게 무궁하게 재미있는 고전의 세계에 한발자욱 한발자욱 심취해봄이 어떠할지! 한문의 어학실력을 길러 이러한 고문헌의 세계를 마음대로 여행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주기를 빌고 또 고대하나이다.

 

 

 

 

인용

목차 / 서향 / 지도

노자 / 전문 / 8 / 노자한비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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