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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노자와 21세기, 16장 - 빔은 고요하면서도 고요하지 않다 본문

고전/노자

노자와 21세기, 16장 - 빔은 고요하면서도 고요하지 않다

건방진방랑자 2021. 5. 9.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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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致虛極, 守靜篤,
치허극, 수정독.
빔에 이르기를 지극하게 하고,
고요함을 지키기를 돈독하게 하라!
萬物竝作, 吾以觀復.
만물병작, 오이관복.
만물이 더불어 자라나는데,
나는 돌아감을 볼 뿐이다.
夫物芸芸,
부물운운,
대저 만물은 무성하게 자라 엉키지만,
各復歸其根.
각복귀기근.
제각기 또 다시 그 뿌리로 돌아갈 뿐이로다.
歸根曰靜,
귀근왈정,
그 뿌리로 돌아가는 것을 일컬어
고요함이라 하고,
是謂復命.
시위복명.
또 이를 일러 제명으로 돌아간다 한다.
復命曰常,
복명왈상,
제명으로 돌아감을 늘 그러함이라 하고,
知常曰明.
지상왈명.
늘 그러함을 아는 것을 밝음이라 한다.
不知常, 妄作凶.
부지상, 망작흉.
늘 그러함을 알지 못하면
망령되이 흉을 짓는다.
知常容,
지상용,
늘 그러함을 알면 모든 것을 포용하게 되고,
容乃公,
용내공,
포용하면 공평하게 되고,
公乃王,
공내왕,
공평하면 천하가 귀순한다.
王乃天,
왕내천,
천하가 귀순하면 하늘에 들어맞고,
天乃道,
천내도.
하늘에 들어맞으면 도에 들어맞는다.
道乃久.
도내구.
도에 들어맞으면 영원할 수 있다.
沒身不殆.
몰신불태.
내 몸이 다하도록 위태롭지 아니하다!

 

 

1. 빔에 이르는 것만은 극대화할수록 좋다(致虛極)

 

이 장 역시 후반부에 개념적인 단어들이 카드께임처럼 연결되는 문장은, 쉽게 생각하여 노자의 고층대가 아님을 알아차릴 수 있다. 과연! 이 장이 죽간(竹簡)에 나타나고 있지만, 죽간(竹簡)에 나타난 이 장의 모습은 서두부분, ‘부물운운 각복귀기근(夫物芸芸, 各復歸其根)’이라 한 부분까지에서 끝나고 있다. 그리고 그 문자도, 王本백서(帛書)가 어느 정도 일치하는 것에 비해 매우 다르다! 죽간(竹簡本) 텍스트에서 왕본(王本)까지의 사상적 변화를 읽을 수 있는 소중한 정보가 많이 담겨 있다. 조목조목 해설하겠다.

 

치허(致虛)’빔에 이르다는 뜻이다. 그것은 무위(無爲)의 방향이다. 이제 이런 말은 쉽게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왜 또 ()’인가? ()은 최상급(superlative)이다. 노자는 르까프를 싫어한다. 그런데 왜 최상급을 썼는가? 너무 비노자적이지 않은가? 그러나 노자의 언어를 디펜드하는 입장에서 말한다면 허()를 보지(保持)하는 행동은 극대화(to maximize) 시킬수록 좋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의 ()’의 의미에는 우주론적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은 단순한 직선적 시간관 속에서의 극단(extremity)’이 아니다. 그것은 태극적(太極的) 전체대용(全體大用, the Cosmic Whole)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학3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 극을 쓰지 아니함이 없다.

是故君子無所不用其極.

 

 

여기서 말하는 극()이란 지선(至善)에 도달하려는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 매일 매일 또 매일 새로워짐)’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즉 빔에 도달하려는 과정도 일일허 우일허(日日虛, 又日虛)의 지고의 에 도달하려는 과정(Process)인 것이다.

 

그런데 죽간(竹簡)의 텍스트는 이러한 우리의 해석에 대하여 그 정당성을 반문케 만든다. 우선 또 왕본(王本)ㆍ백본(帛本)ㆍ간본(竹簡)3본을 비교해보자.

 

 

王本 致虛極.
帛本 至虛, 極也.
簡本 至虛, 恆也.

 

 

형식적으로 백본(帛本)은 간본(簡本)과 유사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왕본(王本)과 더 상통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간본(簡本)의 극()개념을 취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내가 생각컨대, 노자의 원의는 분명 간본(簡本)에 가까울 것이다. ()은 후대에 보다 노자사상이 추상화되면서 삽입되었을 것이다. 간본의 뜻은 이러하다.

 

 

빔에 이르는 것은 천지의 항상 그러한 모습이다.

至虛, 恆也.

 

 

2. 빔은 고요하면서도 고요하지 않다(守靜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의 구절이다. ‘수정독(守靜篤)’은 허()에 상응되는 부분이 정()으로 되어있다. ‘고요함을 지키기를 돈독하게 하라!’ 여기 ()’도 어떤 의미에서는 ()’과 같은 최상급(superlative)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나 고요함을 지킨다라는 말의 함의에는 노자사상을 곡해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한 요소가 내포될 수 있다. ()에 대한 주정주의(主靜主義, quietism)적 이해방식이 그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의 세계를 ()’이라 한다면, 그 동()의 배면에 어떤 본질적인 의 세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사실 불교의 삼법인(三法印) 중의 하나인 열반적정(涅槃寂靜)’과 같은 법인(法印)의 의미는 그러한 맥락에서 해석되는 것이 원래 인도 아리안족의 사유구조였다.

 

 

현상 본체
사바(娑婆) 열반(涅槃)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노자철학에서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허()를 본체론적 (noumenal quietude)으로 이해하면 노자사상은 곧바로 희랍-아리안-인도를 잇는 2원론적 사유의 아류로 전락해버리는 것이다.

 

노자가 말하는 정()은 어떠한 경우에는 본체론적 정()이 아니다. 그것은 동지정(動之靜)이요, 모든 동()의 상태를 포용한 정()일 뿐이다. ()은 동()과 대립되는, ()2원적으로 유리되는 정()이 아니라 단지 동()의 식()한 상태를 말한 것이다. ()의 부재가 아니라 동()의 가능태로서의 고요함일 뿐이다. 노자의 정()은 곧 동()이다. ()을 동()과 분리하여 2원적으로 이해하는 모든 주정주의(主靜主義)철학에서 초월주의가 태어난 것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天國)’의 이미지도 현상적 동()의 이미지가 아닌, 초월적 정()의 이미지인 것이다. 고요함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 곧 동()을 이탈한 정()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는 정()이며 또 동시에 정()이 아니다.

 

 


?

 

 

그런데 이러한 문제에 결정적 단서를 주는 사건이 생겼다. 우선 왕()ㆍ백()ㆍ간() 3본을 비교해보자 !

 

 

王本 守靜篤.
帛乙 守靜, 督也.
簡本 守中, 篤也.

 

 

백본(帛本)에는 분명히 왕본(王本)과 동일하게 문제가 되고 있는 ()’이라는 글자가 나타난다. 그러나 죽간에 오면 ()’이라는 글자는 사라지고 없다. 여기 분명, 죽간(竹簡) 노자의 사상적 오리지날리티를 읽을 수 있다. ()이라는 주정주의적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고, ()를 형용했던 중앙(中央)’의 이미지, 곡신(谷神)의 중앙(中央)의 이미지만 있는 것이다. 간본은 노자사상의 오리지날한 고층대를 형성하는 것이 분명한 것이다. 그 뜻은 다음과 같다.

 

 

그 가운데를 지키는 것이 곧 돈독함이다.

守中, 篤也.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수중(守中)이 수정(守靜)으로 변해간 과정이 왕필의 조작이 아니라, 이미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전국말기(戰國末期)에 이미 동()ㆍ정()의 철학적 개념이 생겨났고, 그에 의하여 노자를 재해석하는 틀이 생겨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다 치더라도, 노자의 수정(守靜)은 주정주의적으로 해석될 수는 없는 것이다.

 

 

3. 봄기운이 오지 않았지만 봄의 모든 생명력을 지닌 바로 그 순간(萬物竝作, 吾以觀復. 夫物芸芸, 各復歸其根)

 

주역(周易)에는 소식괘(消息卦)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음효와 양효가 중간에 섞이질 않고, 차례대로 음효나 양효의 수가 가지런히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12개의 괘상을 일컫는 것이다. 양효가 최대로 늘어나게 되면 건괘(乾卦)가 될 것이고, 음효가 최대로 늘어나게 되면 곤괘(坤卦)가 될 것이다. 그런데 음효가 가득차게 되면 밑에서부터 양효가 자라나기(: 자랄 식) 시작하는데 그 첫 양효가 자라난 괘를 바로 복괘(復卦)라 하는 것이다. 이 복은 12 소식괘를 일년의 소장에 비유하여 말한다면 음력 십일월(十一月) 동지(冬至)에 해당된다. 아직 봄의 기운이 싹트지는 않았지만, 봄의 모든 생명력을 함장(函丈)한 새로운 생명의 가능태, 음의 어둠이 지나가고 양의 햇살이 밝아오기 시작하는 바로 그 때를 옛사람들은 복()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 복괘를 종합해설한 단전(彖傳)은 다음과 같은 만고의 유명한 성귀를 남겨놓고 있다.

 

 

복에서 우리는 그 천지의 마음을 볼 것인가!

復其見天地之心乎!

 

 

이에 대해 왕필(노자뿐 아니라, 주역(周易)도 주석을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은 또 놓칠세라, 천하 고금의 제일가는 주석을 달아 놓았다.

 

 

()이라 하는 것은 그 근본[]으로 돌아간다 하는 것을 일컫는 것이다. 천지는 그 근본뿌리를 가지고써 마음을 삼는 것이다. 피상적 현상의 모습이 천지의 마음이 아니다. 그래서 대저 움직임이 그치면 고요하지만, 고요함이 곧 움직임과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말이 그치면 침묵이 되지만, 침묵이 곧 말과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고요함은 움직임을 머금은 것이요, 침묵은 말을 머금은 것이다.

復者, 反本之謂也. 天地以本爲心者也. 凡動息則靜, 靜非對動者也. 語息則默, 默非對語者也.

 

그렇다면 천지가 비록 거대하여 만물을 풍부하게 생성시키고, 우뢰가 치며 바람이 불고, 삼라만상의 변화가 그칠 날이 없지만, 적막하고 고요하여 지극한 빔의 상태야말로 그 근본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움직임(양효)이 저 땅속(땅효의 자리, 初九)에서 쉬고 있는 복괘에서야말로 천지의 마음이 엿보이게 되는 것이다.

然則天地雖大, 富有萬物, 雷動風行, 運化萬變, 寂然至无, 是其本矣. 故動息地中, 乃天地之心見也.

 

만약 천지가 무가 아닌 유로써 그 마음을 삼는다면 온갖 다양한 만물이 서로 충돌할 뿐이고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이다.

若其以有爲心, 異類未獲具存矣.

 

 

그 얼마나 위대한 주석인가! 여기서 우리는 왕필의 상무주의(尙無主義)적 경향과, 그의 주정주의(主靜主義)적 입장의 미묘한 함의를 읽어낼 수가 있다.

 

바로 이 주역(周易)의 복()의 의미가 노자가 말하는 만물이 병작(竝作)하는데 나는 그로써 복()을 관()한다하는 구절의 복()의 의미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여기서의 ()’은 나중에는 천태종(天台宗)일심삼관(一心三觀)’의 관()의 의미로 발전한 것이다. 그것은 이미 1에서 말한, ‘관기묘(觀其妙)’의 관이요, ‘관기교(觀其徼)’의 관이다. 그것은 천지조화(天地造化)의 묘용(妙用)을 관조하는 것이다. ‘從假入空, 從空入假, 從空假入中道의 차제삼관(次第三觀)원형이 이미 노자에 배태되어 있는 것이다.

 

()은 천지(天地)의 마음이요, 천지(天地)의 뿌리다!

 

= = 天地之心

 

 

4. 주정주의(主靜主義)가 아닌 동지정(動之靜)

 

그러나 이것을 또 다시 우리는 태일생수(太一生水)의 입장에서 해석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복()을 일방적인 뿌리로의 회귀라는 개념으로 이해해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태일(太一)과 수()의 관계는 일방적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太一
 
太一

 

 

그것은 쌍방적 관계인 것이다. 태일(太一)이 수()를 생()하였지만, ()가 오히려 태일(太一)을 반보(反輔, 거꾸로 상보)할 때만이 태일(太一)은 태일(太一)이 될 수 있고, ()는 수()가 될 수 있으며, 태일(太一)은 또 다시 천()을 생성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보(反輔) 혹은 복상보(復相輔)’라고 부르는 이 묘용(妙用)이야말로 지금 노자가 말하는 관기복(觀其復)’의 복()이다. 이것은 결코 주정주의적(主靜主義的) 회귀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왕필(王弼)의 주정주의(主靜主義)의 세뇌를 받아 송명(宋明)유학의 바이블이 된 태극도설(太極圖說)은 다음과 같은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키는 불행한 구절을 남겨놓고 있는 것이다.

 

 

성인은 중정인의로써 만사를 정하고 정(고요함)으로써 그 주됨을 삼아 인극을 세웠다.

聖人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 立人極焉

 

 

그러나 여기서의 주정(主靜)’의 정()은 중국의 토착적 발상에 있어서는 어느 경우에도 열반적정(涅槃寂靜)’적인 정()으로 해석할 수 없다.

 

그것은 철저히 동지정(動之靜)일 뿐이다. 태극도설(太極圖說)의 오해가 모두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노자를 바르게 이해함으로써 이러한 후대의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이다.

 

 

5. 돌아감과 직선적 발전(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귀근왈정(歸根曰靜)’이라 한 구절의 정()의 의미를 새롭게 규정할 수 있지만, 동시에 이러한 주정주의적(主靜主義的) 언급이 죽간(竹簡)에 빠질 수밖에 없는 이유, 즉 이 장의 죽간(竹簡) 부분이 夫物芸芸, 各復歸其根.’에서 끝나고 있다는 사실의 어떤 필연성을 상기의 논의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귀근왈정(歸根曰靜)’ 이후의 문장은 노자의 고층대가 아닌 후대의 발전이 분명한 것이다.

 

여기 돌아간다[]’라는 표현은 동양인의 사유구조에 가장 근원적인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죽는다는 표현을 직선적 시간 위에서의 종료로 파악하여 삶이 끝난다는 식의 표현을 쓰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라는 표현은 생명의 시간을 직선으로 파악하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즉 죽음이란 그 뿌리로의 돌아감이다. ‘귀근왈정(歸根曰靜)’ 그 뿌리로 돌아감을 고요함이라 한다. 고요함은 죽음이다.

 

그러나 노자의 죽음은 삶의 한 형태이다. 죽음은 삶 속에 내재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크게 돌아가는 사건이 세속적 죽음으로 현현할 뿐이다. ‘돌아감이 나의 명()이다. 돌아감은 곧 나의 뿌리다. 천지생명의 본래적 자리가 곧 명()이다. 그 명()으로 돌아가는 것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요, 항상 그러한 끊임없는 과정[]이다. 돌아감은 과정이다. 그것은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 과정이다. 돌아감이 없는 직선적 발전은 파괴일 뿐이요, 절망일 뿐이요, 단절일 뿐이요, 종료일 뿐이다. 그것이 헤겔의 오류요, 맑스의 오류요, 기독교 묵시론의 오류요, 사막문명권 사람들의 절망감의 오류인 것이다. ‘돌아감은 반복이 아니다. 순환은 반복이 아니다. 순환은 끊임없는 새로움의 창조다. 돌아감이야말로 창조의 원천이다.

 

이 돌아감의 창조를 헤겔 사관에 빠진 자들은 정체(Stagnation)와 미개의 암흑으로 오인한 것이다. 발전을 외치는 자들이야말로 미개한 자들이요, 암흑구덩이를 헤매는 자들이요, 유토피아(Utopia)의 신기루에 떠도는 가련한 유령들이다. 그 돌아감의 항상됨을 알아야 우리는 비로소 개명[]하다, 밝다[] 말 할 수 있는 것이다[知常曰明], 그 돌아감의 항상됨을 모르는 자들이[不知常] 역사와 자연과 인간에 대하여 흉칙한 짓을 망령되이 일삼는 것이다[妄作凶]. 노자의 한마디 한마디가 그 얼마나 절실하게 우리의 20세기의 죄악상을 폭로하고 있는가!

 

 

6. 포용할 줄 알 때 공평무사하다(知常容, 容乃公)

 

그 돌아감의 항상됨을 알아야 비로소 우리는 포용할 줄 아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여기 용()자는 내 이름의 한 글자이다. 그런데 보통 이것을 얼굴 이라 훈하지만, 더 중요한 용()의 의미는 담는다’, ‘포용한다는 의미며, 그것은 과 의미론적으로 관련된 글자인 것이다.

 

나 혼자 잘났다고 생각하고, 나 혼자 발전한다. 생각하고, 나 혼자 구원받는다 생각하고, 나 혼자 최후의 심판의 날에 휴거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포용할 수가 없다. 그들은 남을 배타하고 타()를 배제함으로써만 자기의 발전과 구원이 가능하다고 믿는 자들이다. 그들은 결코 포용할 수가 없다. 게르만세계(the Germanic World)의 역사만이 자유의 관념의 실현의 세계사적 선두에 서있다고 포효하는 스투트가르트 태생의 사나이, 말 탄 정복의 화신 나폴레옹을, 말 탄 세계사적 정신(the World Spirit)이라고 숭고하게 쳐다보고 있는 헤겔은 제국주의의 화신일지언정, 인류를 포용할 수 있는 진정한 화해의 정신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첨단을 달리고 있다고 믿고 있는 미국인들, 오만과 편견과 자만에 빠져 자기외의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 그들에게는 용()이 없는 것이다! 그 미제국주의의 선교에 의하여 그릇된 전도의 전통을 살려간 우리나라의 보수적 기독교인들에게는 바로 그 용()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인도의 극빈한 환경 속에서 종교적 신념과 인종의 차이를 불문하고 나병환자, 배고프고 병든 사람들 모두에게 따스한 사랑의 손길을 나누어주고 있는 테레사 수녀의 모습과는 너무도 이질적인 예수장삿꾼들의 모습인 것이다.

 

우리는 포용할 수 있을 때만이 비로소 사특하지 아니하고 사사롭지 아니하고 공평무사(公平無私)할 수 있는 것이다[容乃公]. 사인(私人)이 되지 않고 공인(公人)이 된다는 것, 사적(私的) 가치에 얽매이지 않고 진정하게 공적(公的) 가치를 발휘한다는 것의 전제는 바로 포용성()이다. 포용할 줄 모르면 공()할 수 없다. 포용할 줄 모르는 신앙인은 보편적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 만인의 복음을 전파할 길이 없다. 그들의 전도는 전도가 아니라 세력의 확장이다. 그들의 구원은 구원이 아니라 함정의 구속이다.

 

 

7. 우주와 내가 한 몸임을 알아 보편적 덕성을 구현하다(公乃王, 王乃天)

 

공내왕(公乃王)! 공평할 수 있어야 비로소 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라는 글자를 놓고 사계의 고증가들은 논란이 많았다. ()은 전()이라는 글자의 오사(誤寫)라고 한결같이 주장해왔다. 무엇인가 추상적 개념이 나열되고 있는 판에 ()’이라는 사회위계질서적인 포스트(post) 개념이 영 해석하기에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백서(帛書)의 발견은 이러한 고증가들의 노력을 대부분 으로 만들었다. 왕필 텍스트의 정확성을 대부분 입증했던 것이다. 있는 텍스트를, 있는 그대로 해석할 능력이 없는 자들이 고증이라는 허울아래 자기 좁은 소견으로 텍스트를 조작해왔던 많은 교정작업이 대부분 허위였다는 사실이 입증된 것이다. ()은 왕()일 뿐, ()이 아니다! 왕필은 공내왕(公乃王)’이라는 본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주석을 달고 있다.

 

 

거침없이 공평하면 곧 두루두루 미치지 않음이 없는데 이르게 되는 것이다.

蕩然公平, 則乃至於無所不周普也.

 

 

여기 왕필(王弼)의 주석은 공()탕연공평(蕩然公平)’으로, ()무소부주보(無所不周普)’로 대응시킨 것이다. 또을 세속적인 임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의 덕성의 보편성을 말한 것으로 본 것이다. ()이 진정으로 왕()이 되기 위해서는 만인에게 골고루 그 공덕이 미쳐야 하는 것이다. ‘주보(周普)’란 바로 그 공덕이 미치는 것의 보편성(Universality), 무소부재성(Ubiquitousness)을 말하는 것이다.

 

66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강과 바다가 온갖 시내의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자기를 잘 낮추기 때문이다.

江海所以能爲百谷王者, 以其善下之

 

 

여기서도 왕()이라는 표현은 요즈음 동물의 왕 사자(라이온 킹)’와 같은 표현처럼 그 구체적인 포스트(post)를 가리킨다기보다는, 그것의 상징적 의미(symbolic meaning)를 취하고 있다. 특히 백곡왕(百谷王)’이라는 표현의 구체적 함의는 그것의 왕됨이, 곧 자기를 낮춤으로써 모든 것을 포용한다고 하는 덕성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이라는 보편적 덕성은 곧 하늘이다. 하늘은 땅의 구체성과 지역성과는 달리 추상적이고 더 보편적이다(王乃天), 왕필은 말한다.

 

 

보편적 덕성을 지닌다고 하는 것은 곧 그것이 하늘과 같아지는 데 이르는 것을 말한 것이다.

無所不周普, 則乃至於同乎天也.

 

 

이것은 우리의 민중사상인 동학(東學)인내천(人乃天)’을 말하는 것과 같다. 우주와 내가 한 몸임을 깨달아 그 보편적 덕성을 구현할 수 있다고 한다면 천주(天王, 하늘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요, 곧 내가

천주(天主), 내가 하느님인 것이다.

 

 

8. 몸의 단련을 통해 천지와 합일하려 했다(天乃道, 道乃久. 沒身不殆)

 

하늘과 같아진 사람은 도()를 체현하게 되는 것이다[天乃道]. 이에 왕필(王弼)은 다음과 같이 주석한다.

 

 

하늘과 더불어 그 덕을 합치면 곧 도를 체득하여 크게 통하게 되는 것이니, 그리하면 곧 지극한 빔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與天合德, 體道大通, 則至於極虛無也.

 

 

허무한 도()에 이르게 되면 우리는 영원할 수 있다[道乃久]. 우리가 말하는 영원은 물리적 영생이 아니다. 우리의 생명의 근원의 영속성인 것이다. 나 혼자 영원히 살려고 발버둥치며 하늘 꼭대기에 천국(天國)을 만들어 놓고 그곳에 멤바쉽을 얻으려고 애쓰는 가련한 모습은 동양인들의 세계관ㆍ가치관 속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필은 말한다.

 

 

빔의 궁극에 이르게 되면 도의 항상 그러함을 체득하게 된다. 그리하면 오히려 궁극됨이 없는 영원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窮極虛無, 得道之常, 則乃至於不窮極也.

 

 

왕필의 주석은 오묘하다. 궁극에 이르면 오히려 궁극이 사라지는 영원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도()를 체득하게 되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沒身], 이 몸이 다할 때까지, 위태로움을 모르게 되는 것이다.

 

이 마지막 구절의 왕필 해석은 매우 병가(兵家)적 전통을 전승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홍콩영화에서 경험할 수 있는 무술,’ ‘쿵후 (꽁후우, Kung-fu)’의 원류를 여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서구인들이 인간의 신체의 허약(fraility)을 받아들이고, 그 대신 영혼의 영생을 꾀했다고 한다면, 중국인들은 그렇게 신체와 영혼을 분리할 수 없는 몸(Mom)이라고 하는 토탈한 상태의 특수한 단련을 통()해 천지(天地)와 합체(合體)되는 체험을 하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인류사에 그 유례를 보기 어려운 몸의 예술, 즉 무술(martial arts)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내 몸의 빔의 단련의 경지는 물이나 불이 내 몸을 해칠 수 없고, 쇠꼬챙이나 돌덩어리가 내 몸을 상처 나게 할 수 없다. 이를 내 마음에 쓰게되면, 곧 호랑이나 코뿔소가 그 이빨이나 외뿔을 들이박을 수 없고, 창이나 칼이 그 예봉이나 칼날을 들이댈 곳이 없다. 어찌 위태로움이 있다 말할 수 있으리오!

無之爲物, 水火不能害, 金石不能殘. 用之於心, 則虎兕無所投其齒角, 兵戈無所容其鋒刃, 何危殆之有乎!

 

 

몰신불태(沒身不殆)’라고 하는 이 한마디에 대한 주석이 이와 같이 구체적인 몸의 공부(工夫)’에 관한 것이다. ()의 체현의 최후적 결론이 하나님 잘 믿고 천당가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현실적인 몸(Mom)으로 위태롭지 않게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 왕필 주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은 중간에 있는 용지어심(用之於心)’이라고 하는 한마디이다. ‘빔의 공부란 내 육체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요, 곧 내 마음에 동시에 적용되는 것이다. 무술은 육체의 공부일 뿐 아니라 동시에 내 마음의 공부인 것이다. 내 마음이 비어 있을 때 비로소 내 신체는 자유자재로 돌아가며 호시(虎兕)나 병과(兵戈)의 위험에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무술의 고수와 하수의 궁극적 차이용심(用心)’의 수준에 있는 것이다.

 

 

 

 

인용

목차 / 서향 / 지도

노자 / 전문 / 16 / 노자한비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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