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장
| 上士聞道, 勤而行之; 상사문도, 근이행지; |
훌륭한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도를 들으면 열심히 그 도를 실천할려고 노력할 것이다. |
| 中士聞道, 若存若亡; 중사문도, 약존약망; |
중간치기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 할 것이다. |
| 下士聞道, 大笑之. 하사문도, 대소지. |
그런데 하치리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도를 들으면 깔깔대고 크게 웃을 것이다. |
| 不笑, 不足以爲道. 불소, 부족이위도. |
그런데 그 하치리들이 크게 웃지 않으면 내 도는 도가 되기에는 부족한 것이다. |
| 故建言有之; 고건언유지; |
그러므로 옛부터 전해오는 말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
| 明道若昧, 進道若退, 명도약매, 진도약퇴, |
밝은 길은 어두운 것 같고, 나아가는 길은 물러나는 것 같고, |
| 夷道若纇. 上德若谷, 이도약뢰. 상덕약곡, |
평탄한 길은 울퉁불퉁한 것 같고, 윗덕은 아랫 골 같고, |
| 大白若辱, 廣德若不足, 대백약욕, 광덕약부족, |
큰 결백은 욕된 것 같고, 너른 덕은 부족한 것 같고, |
| 建德若偸, 質眞若渝. 건덕약투, 질진야유. |
홀로 서 있는 강건한 덕은 유약하여 기대 있는 것 같고, 질박한 덕은 엉성한 것 같다. |
| 大方無隅, 大器晩成, 대방무우, 대기만성, |
큰 사각은 각은 없으며 큰 그릇은 이루어진 것 같지 않고, |
| 大音希聲, 大象無形. 대음희성, 대상무형. |
큰 소리는 소리가 없고, 큰 모습은 모습이 없다. |
| 道隱無名, 도은무명, |
도란 늘 숨어 있어 이름이 없다. |
| 夫唯道, 善貸且成. 부유도, 선대차성. |
대저 도처럼 자기를 잘 빌려주면서 또한 남을 잘 이루게 해주는 것이 있을손가? |
장쾌한 선포
내 인생에서 이 장처럼 나를 호쾌하게 웃도록 만든 이벤트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 어머니가 6·25전쟁 와중에 모든 것이 빈곤하던 시절, 나를 국민학교에 집어넣었는데 때마침 한집에 나와 동갑의 장조카가 있었다. 나의 엄마는 삼촌이 조카와 같은 학년에 있으면 안된다고 해서 나를 조카보다 1년 일찍 학교에 넣었다. 내가 입학한 시점은 1953년 4월이었는데, 그때 나의 나이는 실제로 4살 10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유치원 다니는 셈 치고 초등학교를 다니라고 했는데, 심상희 선생님이라는 매우 훌륭한 1학년 담임선생님을 만나, 반에서 1·2등을 하니까 그냥 계속해서 진학하도록 한 것이다. 정신적인 문제는 둘째치고, 나는 나의 학창시절 내내 모든 것이 버겁고, 나와 나의 환경이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지만 나는 나의 삶의 환경 속에서 일종의 이단아로서 계속 살아갔다.
그래서 몸도 아팠고 고려대학교 생물과를 포기하고 한국신학대학을 갔고, 또 철학과를 갔다. 나는 고려대학교 철학과 내에서도 별종에 속했다. 나는 철학과를 들어갔을 때는 주위 아이들보다 학번이 높았고(나이는 크게 많지 않았지만 65학번 고참이었다) 또 이미 독서하는데 지독히 훈련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철학을 배운다는 일념 외로는 아무 생각도 없었고, 오로지 학문에만 정진했다. 자연히 반에서도 특출난 이단아였지만 동반학우들은 나의 공부하는 생활자세를 존중해주었다. 실제로 나와 같이 공부한 동급생 중에서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노자』를 읽을 때, 우리는 양면을 다같이 수용하면서 읽어야 한다. 그 하나는 『노자』라는 책은 노자라는 특출난 BC 6세기의 사상가가 홀로 일관되게 이 책을 지었다는 전제하에서 읽는 것이요, 또 하나는 그러한 전제가 없이 철저한 텍스트 크리틱의 관점을 다 수용하면서 춘추전국 수 세기에 걸쳐 자연스럽게 형성된 텍스트라는 생각을 가지고 읽는 것이다. 나는 동서고전문헌비평의 고등한 학문 수련을 다 거친 고전학자이지만 『노자』를 읽을 때, 『노자』라는 개인, 그 고독한 사나이, 그토록 그의 시대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우주와 인간세역사를 통관할 수있었던 그 영민한 사나이, 그 사나이의 실존적 고뇌, 불안, 걱정, 근심, 또 분노를 절절하게 느낀다. 41장 또한 도의 전모를 밝힌 위대한 한 편의 시(詩)이지만, 그 시 또한 노자 자신의 발명이 아니라 그 시대에 내려오던 말, ‘건언(建言)’【속담 같은 것, ‘건언’은 여타 선진고전에 용례가 없는 노자만의 용법이다. 세워진 말, 뿌리뽑을 수 없는 가치 있는 시대의 금언이라는 뜻이다. 이 용례는 『장자』에도 없다】으로서 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건언을 전하기 위한 도입부분으로 단막극적인 삽화를 하나 집어넣고 있는데, 이 삽화야말로 나의 삶의 답답함을 흩날려버린 장쾌하고 호쾌하고 통쾌한 노자의 실존고백이었다. 나는 이 『노자』의 고백을 들은 후로 더 이상 인간세의 잡음에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하삐리 새끼들이 내가 말하는 도를 들으면 웃긴다고 깔깔거릴 거야.
그런데 그 새끼들이 깔깔대고 웃지 않는다면 내 도는 도가 될 수 없는 거야!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
그 얼마나 장쾌한 선포인가!
대기만성의 본 뜻
나의 외할아버지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분으로서 만주의 다양한 항일독립운동단체에 자금을 댄 자금모집책의 중책을 맡은 분이었다. 나의 외조부는 수시로 서대문형무소를 들락거렸다. 원래 강화도 분인데, 엄마는 충남 공주 ‘곳짖말’이라는 곳에서도 살았다고 했다. 하여튼 나의 외조부는 한학이 출중한 분이었다. 아마도 강화학파의 훈도를 받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나의 친할아버지도 한학이 대단했는데 친할아버지는 주자학 정통파라고 한다면 나의 외조부는 노자가 말하는 이상적 인간에 가까웠다. 그의 자녀들이 모두 자기 아버지의 인품을 흠모했다. 나의 어머니의 당신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같은 것을 회상하면 나의 외조부는 큰 인격의 사람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외할아버지는 큰 딸(우리 엄마) 집을 좋아해서 일년에 한 번 정도는 꼭 와서 한 달씩 지내곤 하셨다. 나의 아버지는 장인어른이 오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독방 쓰시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분이었는데 자신의 사랑방 독방을 장인어른에게 빼앗기고 자기는 안방에서 우리와 함께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의사생활의 피곤함을 생각할 때 우리 아버지의 투정도 이해가 간다.
그런데 나는 외할아버지를 무척 좋아했다. 외할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시기만 하면 신이 났다. 사랑방에 가서 외할아버지 말씀 듣는 것이 큰 낙이었다.
외할아버지가 오시면 보료를 깔고 그 뒤로 10폭 병풍을 쳐놓는데 앞면에는 아름다운 산수화가 그려져 있었고, 그 뒷면에는 완전히 알아보기 힘든 초서로 휘갈긴 멋드러진 글씨가 끊어짐이 없이 종서(縱書)되어 있었다. 그런데 외할아버지는 나를 무릎에 올려놓고 그 초서를 한 자 한 자 다 해석해주셨다. 실로 한학이라는 것은 이렇게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초서를 읽는 외할아버지가 너무도 신기했다. 나의 외할아버지는 매우 인품이 허(虛)한 사람이었다. 심심하면 시를 쓰시고 나에게 그 시를 해석해주시고 운을 가르쳐 주셨다.
내가 국민학교 5학년쯤 어느 시절이었을 것이다. 외할아버지가 사랑방에 계셨는데 나를 무릎 위에 앉혀놓고 또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용옥아!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는 말이 있지 않느냐?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으로 세상사람들이 쓰고 있지. 그런데 그것은 『노자』라는 책에 나오는 말인데, 그 전후맥락을 살펴보면 대기만성은 그런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방무우(大方無隅), 대기만성(大器晩成), 대음회성(大音希聲), 대상무형(大象無形)라 했으니, 만(晩)은 무우의 무(無)나, 회성의 회(希)나, 무형의 무(無)나 같은 뜻이다. 그러니까 만(晩)은 늦다는 뜻이 아니고, 아니라는 부정사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대기만성은 ‘큰 그릇은 늦게 이루어진다는 뜻이 아니고, 진짜로 큰 그릇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도무지 이루어짐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지. 유생들이 늦게 이루어진다 하면서 자기 처지를 합리화하는 그런 좁은 소견머리의 말이 아니고, 정말 노자의 말씀은 큰 그릇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큰 도의 이상을 가르치시고 있는 것이란다. 용옥아! 너는 절대 만성(晩成)【늦게 이루어지는】의 인간이 되지 말고, 이루어짐이 없는 것과도 같은 큰 인격의 사람이 되어라! 일촌(一寸)의 광음(光陰)도 불가경(不可輕)인데 어찌 만성을 운운하겠느냐! 빨리빨리 건강하게 자라나거라.”
외할아버지 말씀을 들은 것은 내가 국민학교 5학년 때였다. 이 말씀은 진실로 나의 생애를 지배하는 격언이 되었다. 나는 스무 살이 되어 『노자』를 읽음으로써 외조부 말씀의 전체 맥락을 깨닫게 되었다.
| 大 | 方 | 無 | 隅 |
| 大 | 器 | 晩 | 成 |
| 大 | 音 | 希 | 聲 |
| 大 | 象 | 無 | 形 |
| 부정사 |
그리고 무(無), 만(晩), 희(希), 무(無)가 부정사(不定詞)를 의미한다는 것은 맥락상 너무도 명백했다. 그것은 통사적으로뿐 아니라 의미론적으로도 노자의 원래 의도를 명백히 전하고 있는 것이다. 만성을 ‘늦게 이루어진다’라고 하는 것은 노자적 세계관을 망각한 유가적 ‘공부’이론에 충실한 해석일 뿐이다. 그런데 이 나의 외조부 말씀을 구현시켜주는 주석이 거의 전무했다. 중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미국에서도 나는 나의 동지를 얻지 못했다. 그만큼 노자의 이해가 이미 유가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나의 동지를 발전하게 되는 위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은 다산의 ‘여유당’사건과 동일한 패턴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41장이 백서갑·을에 다 들어있을 뿐 아니라(갑은 거의 훼멸되어 글자를 알아볼 수 없다) 곽점죽간에 그대로 들어있다는 사실이다. ‘하삐리새끼들이 웃지 않으면 내 도는 도가 되기에 부족하다’는 말까지도 그대로 들어있다. 노자의 실존고백 전체가 생생하게 그대로 고층대의 문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백서본에 ‘대기만성(大器晩成)’이 ‘대기면성(大器免成)’으로 되어있는 것이다. 명백하게 나의 외조부의 주장, 아니 한학실력이 빵빵했던 조선의 선비들의 주장을 백서본이 2천 년의 세월을 지난 후에 입증하였던 것이다【이 문제에 관하여서는 이석명의 『백서노자』 [청계, 2003] p.58을 참조할 것】. 대기만성은 늦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루어지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왕필도 그렇게 해석했는데 왕필의 주해를 다 곡해하고 있다.
대기(큰 그릇)라고 하는 것은 천하 전체를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분별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반드시 이루어지지 않은 것치럼 보인다고 말한 것이다.
大器成天下, 不持全別, 故必晩成也.
마지막의 ‘부유도선대차성(夫唯道善貸且成)’은 만물의 끊임 없는 생화(生化) 과정과 도의 생생무이(生生無已)의 생명력을 시적으로 표현한 명언이다.

▲ 나는 창녕에서 이 고인돌을 보는 순간 나일강변에 있는 기자의 피라미드를 두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큰 충격이 전율로서 다가왔다. 기자의 피라미드는 강 범람시 석재 운반이 용이한 틈을 타서 모래밭 평지 위에 세우는 작업과정을 거친다. 물론 그 거석들을 치밀하게 깎아 기하학적으로 맞추어 나간 이집트인들의 공법에 찬탄을 금하지 못했지만 이 창녕의 고인돌은 매우 험준한 언덕의 정상에 세운 것으로 피라미드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불리한 여건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것은 단일 묘소로서 피라미드 이상의 위용을 지니는 것이다. 연대도 청동기시대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 수백 톤의 돌덩어리를 여기까지 사람의 손으로 끌고 와서 돌방을 만들고 고임돌 위에 안치하기까지 동원된 인력의 에너지 규모와 그 조직의 하부구조를 생각할 때 조선대륙의 남부(=나의 고구려지도로 보면 정상부) 지역의 풍요로움은 지구상의 어떠한 문명의 풍요도 뛰어넘고 남음이 있다. 우주의 배꼽이라 해야 할 것이다.
고인돌은 고조선문명의 기저이며, 전 세계 거석문화의 중추이다. 고인돌은 고조선의 거대한 축제문화였다. 국중대회(國中大會), 음식가무(飮食歌舞)의 제천(祭天) 행사였다. 고인돌의 위대성은 노예계급의 노동력을 전제로 한 것일 수 없다는 데 있다. 공동체 전체의 자발적인 참여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리고 고인돌무덤은 대소의 차이는 있으나 특별한 지배계급에 국한되지 않는다. 삶과 죽음을 귀하게 여기는 지역 공동체의 따사로움이 느껴지는 예술품들이다.
이 위대한 고인돌이 북두칠성의 형태로 7개나 있었는데 왜놈들이 이 땅을 침범하여 그 돌을 다 깨서 토목공사에 썼다고 한다. 일제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동네주민들이 돈을 걷어 이 고인돌 하나만은 깨지 말아 달라고 빌어, 살려냈다고 한다. 위대한 민족의 위대한 수난이여! 슬프도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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