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비교하지 않아야 보이는 것들
위시 이야기
‘위시(爲是)’는 ‘가느다란 줄기’와 ‘굵은 기둥’ ‘나병에 걸린 추 너’와 ‘서시 같은 미녀’ 등을 구별하는 것이다. 사물이 아무리 엉뚱하고 이상야릇한 것일지라도, 길로 그것과 소통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 ‘쪼개짐’이 있으면 ‘완전함’도 있고, ‘완전함’이 있으면 ‘망가짐’도 있다. 사물에 내가 규정한 ‘완전함’과 ‘망가짐’이 없어야 그것과 다시 소통해서 하나가 될 수 있다. 오직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이 소통해서 하나가 될 줄 안다.
故爲是擧莛與楹, 厲與西施, 恢詭憰怪, 道通爲一. 其分也, 成也; 其成也, 毁也. 凡物無成與毁, 復通爲一. 惟達者知通爲一,
‘위시’를 쓰지 않고 그것을 ‘일상[庸]’에 깃들도록 해야 한다. ‘일상’이란 ‘사용[用]’, ‘사용’이란 ‘소통[通]’을, 그리고 ‘소통’이란 바로 ‘얻음[得]’을 말한다. 이런 얻음에 이르면 거의 다온 것이다. ‘인시(因是)’할 뿐이지만 그러면서도 왜 그런 줄 모르는 것, 그것을 길이라고 한다.
爲是不用而寓諸庸. 庸也者, 用也; 用也者, 通也; 通也者, 得也. 適得而幾矣. 因是已, 已而不知其然謂之道. 「제물론」 9
비교하거나 구분하거나
인간의 눈이 멀게 된다면, 왕도 칼도 황금도 토지도 궁전도 사치품도 모두 무용지물이 될 겁니다. 그만큼 시선의 정치경제학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 삶을 옥죄는 억압사회, 즉 영토국가의 살풍경을 잘 보여주니까요. 나아가 시각은 정치경제학적 풍경만이 아니라 철학에도 짙은 그림자를 남긴다는 사실 또한 중요합니다.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인간의 인식 혹은 사유 자체가 근본적으로 ‘시각적’이기 때문입니다. 인식의 시각성이나 사유의 시각성이라고 말할 만한 사태입니다.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 밝음과 어둠, 큼과 작음, 많음과 적음, 아름다움과 추함 등등 가장 원초적인 사유의 범주들은 기본적으로 시각적입니다. 나아가 소, 말, 낙타, 사람, 꽃, 나무, 산, 강 등 개별자들을 분류하는 일반명사도 사실 너무나도 시각적이죠. “사막에는 낙타가 산다”는 말을 들으면, 사막과 낙타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가 바로 떠오르는 이유입니다. 이 점에서 플라톤의 이데아(idea), 즉 ‘에이도스(eidos)’가 ‘보다’라는 뜻의 ‘이데인(idein)’이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이데아만큼 철학이 자랑하는 본질 개념이 얼마나 시각적인지 잘 보여주는 것도 없으니까요. ‘이름’을 뜻하는 ‘명(名)’도 마찬가지로 시각적 이미지를 전제합니다. 이 한자는 ‘저녁’이나 ‘어둠’을 뜻하는 ‘석(夕)’과 ‘말’이나 ‘입’을 뜻하는 ‘구(口)’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둠 속에서는 누가 누구인지 식별하기 힘듭니다. “누구세요?” “저 장자인데요.” 밝을 때는 말하지 않아도 식별되는 것을 어둠 속에도 식별되도록 하는 것이 이름입니다. 결국 이름은 일종의 암구호, 아니면 어둠 속에서 사물을 식별하게 해주는 손전등과 같은 겁니다. 이데아든 명이든 개념은 어둠 속에서도 시각적 명료함을 얻기 위해 고안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식별되지 않는 짙은 어둠 속에서는 구분과 비교가 작동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범주나 개념 혹은 언어나 말의 힘으로 밝은 상황이든 어두운 상황이든 가리지 않고 사물을 구분하고 비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사유, 그거 별것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도 그리고 사물이 없는 곳에서도 구분과 비교를 하는 거니까요. 구분과 비교가 가장 중요합니다. 밝아서 사물들이 저절로 식별되는 곳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경우 우리 사유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더 신나게, 그리고 더 거침없이 작동합니다. 예를 들어 내 눈에 중학생과 초등학생이 보인다고 해보죠. 나는 중학생이 크다고, 혹은 초등학생은 작다고 사유합니다. 이 경우 큼과 작음이라는 범주는 내 머릿속에서 서로를 배제하며 동시에 작동합니다. 중학생은 초등학생에 비해 크고, 초등학생은 (중학생에 비해) 작다고 판단하니까요. 이 경우 나의 사유가 논쟁과 논박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겁니다. 누군가 옆에서 내가 보는 것을 본다면 그도 나처럼 이야기할 것이 분명하니까요. 물론 갑자기 중학생과 초등학생 옆으로 성인 남자나 유치원생이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크거나 작다는 우리의 판단은 비교 대상에 따라 변하게 될 겁니다. 유치원생이 비교 대상이 되면 초등학생이 크다고 말할 수 있고, 성인 남자를 비교 대상으로 삼으면 중학생이 작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큼과 작음이라는 범주는 외부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사유의 범주라는 증거일 겁니다. 크고 작음은 우리 마음에 있을 뿐 사물에는 없다고 정리해두면 좋습니다.
나의 시공간에 복수의 사물들이 들어와 구분과 비교가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의 사물만 들어와도 구분과 비교가 바로 작동합니다. 과거 경험을 기억하기 때문에 가능하죠.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나는 ‘키가 크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과거 만났던 사람들이 대부분 신장이 작았다는 걸 말해줍니다. 여기서도 큼과 작음이라는 범주는 우리 머릿속에서 서로를 배제하며 동시에 작동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내 앞에 있는 두 사람에 대한 비교가 아니라 과거 만났던 사람과 현재 만난 사람에 대한 비교일지라도 말입니다. 만약 지금 만난 사람이 과거 만난 사람들과 키가 비슷하다면, 우리는 각기 크고 작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을 겁니다. 다른 경우도 생각해보죠. 내가 ‘키가 크네’라고 생각한 사람에 대해 어떤 사람은 ‘키가 작네’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요. 그가 만났던 사람들 대부분이 키가 컸다는 걸 반영합니다. 여기서 나의 과거와 그의 과거가 다르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동일한 사람에 대해 ‘키가 크다’는 나의 생각과 ‘키가 작다’는 그의 생각이 갈리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서 논쟁과 갈등의 기원을 얼핏 엿보게 됩니다. 동일한 사람이지만 나의 눈에 그는 키 큰 사람이고, 그의 눈에는 키가 작아 보입니다. 그러니 나와 그가 말싸움을 하며 얼굴 붉힐 가능성이 생기는 겁니다. 나와 그가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을 동시에 보고 있다면 생기기 어려운 일이 벌어지고 마는 겁니다. 어쨌든 여기서도 금과 작음이라는 구분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위시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사물과 무관한 구분과 비교! 사유의 한계는 명확합니다. 특히 심각한 것은, 내가 마주친 타자를 무언가가 결여되거나 보잘 것 없거나 혹은 무가치하다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식재료가 부족해서 혹은 식재료가 완전하지 않아서 음식 만들기를 포기하는 건 어리석은 일입니다. 건성으로 대충 먹으면 몸에 좋을 리 없고, 최악의 경우 우리는 굶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제물론」 편의 ‘위시 이야기’에서 장자가 숙고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 사유의 위험성과 한계입니다. 위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기에 앞서 그레이엄(A. C. Graham, 1919~1991)이라는 중국 고대철학 연구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이야기의 제목에 들어 있는 ‘위시(爲是)’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최초로 부각시킨 학자이니까요. 1978년 출간된 『후기 묵가의 논리학, 윤리학 그리고 과학 (Later Mohist Logic Ethics and Science)』과 1981년 출간된 『장자(Chuang-Tzu: The Inner Chapters)』는 그의 매우 중요한 업적입니다. 두 저작을 통해 그레이엄은 위시(爲是)와 인시(因是) 개념을 구분합니다.
여기서 ‘위(爲)’는 동사로 ‘~라 여기다. 간주하다. 생각하다’라는 뜻이고, ‘인(因)’도 동사로서 ‘~를 따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시(是)는 명사로서 ‘이것’이라는 뜻으로, 두 개념의 경우 각각 ‘위’와 ‘인’의 목적어로 사용됩니다. 그러니까 ‘위시’는 ‘이것이라 생각한다’는 뜻이고, ‘인시’는 ‘이것에 따른다’는 뜻이 됩니다.
위시와 인시 개념을 구분함으로써 그레이엄은 「제물론」 편의 이해에 새로운 지평을 마련합니다. 그 결과 과거 주석가들의 「제물론」 풀이가 본문만큼 난해했던 이유가 밝혀집니다. 전통 주석가들은 위시와 인시 개념에 주목하지 않았기에 「제물론」편을 이해할 때 난관에 봉착했던 겁니다. 후기 묵가의 저작 『묵경(墨經)』에 대한 전인미답의 연구에 기초하기에 그레이엄의 통찰은 묵직한 의미를 갖습니다. 『묵경』에는 후기 묵가들이 장자, 혜시, 순자 등 고대 중국 제자백가들의 언어철학과 인식론을 어떻게 비판했는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묵경』이 「제물론」 편의 난해한 사유를 이해하는 실마리가 되는 이유입니다. 이제 그레이엄이 주제화했던 위시의 개념을 숙고해보도록 하죠. ‘이것이라 생각하다’에는 구분과 비교의 의미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큰 것과 작은 것, 이렇게 두 사물이 있다고 해보죠. “둘 중 어느 것이 크니?”라는 질문을 받으면, 혹은 “어느 것이 크지?”라고 자문하면, 우리는 큰 것을 가리키며 말할 겁니다. “이것이다.” 바로 이것이 위시가 가진 원초적 의미입니다. 이 경우 ‘이것이라 생각한다’는 ‘이것이 크다고 생각한다’라고 풀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위시는 구분하고 비교할 수 있는 사물이 최소 두 개 이상 있어야 합니다. 위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장자가 “‘위시(爲是)’는 ‘가느다란 줄기’와 ‘커다란 기둥’, ‘나병에 걸린 추녀’와 ‘서시와 같은 미녀’ 등을 구별하는 것”이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여기서 ‘구별하다’로 풀이한 ‘거(擧)’는 원래 ‘집어 들다’라는 의미로, 둘 이상의 것들 중 어느 하나를 뽑아내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래서 위시는 문제가 되는 것을 줄기나 기둥으로, 혹은 추녀나 미녀로 식별하는 인식 작용을 가리키게 된 겁니다.
먼저 ‘줄기’와 ‘기둥’이라는 두 가지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하고, ‘추녀’와 ‘미녀’라는 두 가지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내 눈앞에 반드시 두 개 이상의 대상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내 눈앞에 여자가 한 명뿐이더라도 우리는 그녀를 ‘추녀’라고 식별할 수도 있고 ‘미녀’라고도 식별할 수 있으니까요. 우리 마음에는 이미 미녀와 추녀에 대한 경험이 기억의 형식으로 존재합니다. 상대적으로 추녀와 많이 만났던 사람이라면 평범한 여자도 ‘미녀’로 식별하기 쉽고, 반대로 미녀와 많이 만났던 사람은 그 동일한 여자를 ‘추녀’라 식별하기 쉬울 겁니다. 외부만이든 아니면 외부와 내면에 걸쳐서든, 대상이 둘이 상이어야 비교와 구분 그리고 식별이 가능합니다. 대상의 차원에서 ‘줄기’와 ‘기둥’ 혹은 ‘추녀’와 ‘미녀’는 확연히 구분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사유의 차원에서는 ‘줄기’와 ‘기둥’ 혹은 ‘추녀’와 ‘미녀’는 서로 엮여 하나의 체계로 작동합니다. 동전을 생각해보세요. 동전을 던지면 앞면이 나올 수도 있고 뒷면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동전의 앞면과 뒷면은 확연히 구분됩니다. 그러나 앞면이 나왔다고 해서 뒷면이 없는 것이 아니고, 뒷면이 나왔다고 해서 앞면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장자는 말합니다. “‘쪼개짐’이 있으면 ‘완전함’도 있고, ‘완전함’이 있으면 ‘망가짐’도 있다.” 동전의 앞뒷면을 동시에 응시하는 장자입니다. 앞면과 뒷면을 동시에 갖추고 있기에, 우리는 동전을 던져 앞면인지 뒷면인지 결정할 수 있습니다. 큼과 작음의 눈을 가진 동전, 미와 추의 눈을 가진 동전은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있습니다. 외부에 대상이 나타날 때 이 동전을 던져 한 면을 결정하는 것, 바로 그것이 ‘위시’인 겁니다.
위시의 세계에서 인시의 세계로
위시는 인식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그것은 위시의 주체가 원인의 자리에 있다면, 위시의 대상은 그 결과의 자리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위시가 가진 사유 중심성 혹은 주체 중심성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사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위시가 가진 실천철학적 효과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가느다란 줄기보다 굵은 기둥이 더 가치 있다는, 혹은 추녀보다 미녀가 더 가치 있다는 가치평가가 위시에 전제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최소 두 가지의 비교 대상들은 동등하게 평가되기보다는 우열의 가치평가가 매겨지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우열의 가치평가가 구분, 구별 그리고 식별의 원동력이라고 하는 니체적 발상이 사실에 더 가깝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열등하다고 평가한 것과는 소통하려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추녀라고 평가한 여자를 사랑하려는 남자를 찾기 힘들고, 가느다란 줄기로 집을 지으려는 목수는 드물 겁니다. 여기서 사랑할 여자가 없다고 절망하는 남자나 집 지을 재료가 없다고 손을 놓는 목수가 생길 수 있습니다. 설령 예쁘지 않더라도 사랑할 수 있을 여자들, 비록 가늘더라도 충분히 다른 방식으로 집의 재료가 될 수 있을 줄기들은 그냥 방치되고 맙니다. 음식 재료가 부족하다고 요리 만들기를 포기한 요리사와 같습니다. 하지만 훌륭한 요리사는 자신에게 주어진 식재료에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다고 긍정합니다.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이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요리를 만듭니다.
장자는 “사물이 아무리 엉뚱하고 이상야릇한 것일지라도, 길로 그것과 소통하여 하나가 된다”고 말합니다. “엉뚱하고 이상야릇한 것[恢詭憰怪]”이라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열등한 것이자 쓸모가 없는 것들입니다. 당연히 그것은 관계할 가치가 없고 멀리해야 할 것들이죠. 그러나 비범한 영혼에게 그것은 충분히 쓸모가 있고 매력적인 것으로 긍정될 수 있습니다. 오직 그럴 때에만 우리는 그 사람이나 그 사물로 발걸음을 옮기게 될 겁니다. 그 걸어감이 반복되면 당연히 길이 만들어지겠죠. “엉뚱하고 이상야릇한 것”과 소통하려면 그것이 엉뚱하고 이상야릇한 것으로 보여서는 안 됩니다. 장자가 “사물에 내가 규정한 ‘완전함’과 ‘망가짐’이 없어야 그것과 다시 소통해서 하나가 될 수 있다”고 강조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가느다란 줄기라고 멀리하고, 추녀라고 멀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야 가느다란 줄기도 근사한 건축 재료가 되고, 추녀도 매력적인 짝이 될 수 있으니까요. 바로 이 순간 가느다란 줄기는 가느다란 줄기가 아니라 굵은 기둥보다 더 훌륭한 건축 재료가 되고, 추녀는 더 이상 추녀가 아니라 서시 같은 미녀도 아쉽지 않은 소중한 애인이 됩니다. ‘위시’와 날카롭게 구별되는 ‘인시’ 개념은 바로 이 문맥에서 읽혀야 합니다. 위시에서 우리 사유가 원인이고 외부 사물이 결과였다면, 인시에서 그 관계가 뒤집힙니다. 인시에서는 외부 사물이 원인이고 우리 사유는 그 결과가 되니까요. 그래서 인시 개념에서 ‘인(因)’이라는 글자가 명사로는 ‘원인’이 라는 뜻을 가진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만은 아닙니다. 가느다란 줄기만 있더라도 그것을 절대적 원인으로 삼아 집을 짓는 것, 추녀만 있더라도 그 여자를 절대적 원인으로 생각해 사랑을 이루려는 것, 부족한 식재료만 있더라도 그것을 절대적 원인으로 긍정해 근사한 요리를 만들려는 것, 바로 이것이 ‘인시’입니다.
‘이것이라 생각한다’는 뜻의 위시에서 ‘이것’은 다른 것과 비교되는 ‘이것’입니다. 반면 ‘이것에 따른다’는 뜻의 인시에서 ‘이것’은 비교 대상이 없는 ‘이것’입니다. 위시의 ‘시’와 인시의 ‘시’ 사이에는 이렇게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사실, 바로 여기에 장자 사유의 섬세함이 자리를 잡습니다. “위시’를 쓰지 않고 그것을 ‘일상[庸]’에 깃들도록 해야” 한다는 장자의 주장은 바로 이 간극을 건너뛰라는 요구였던 겁니다. 손약 이야기를 떠올려 보세요. 손이 트지 않게 하는 똑같은 약이지만, 송나라 사람의 일상에서 그 약은 겨울에 빨래하는 데 사용되었고 오나라 사람들의 일상에서는 수전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일상’이란 ‘사용[用]’을, ‘사용’이란 ‘소통[通]’을, 그리고 ‘소통’이란 바로 ‘얻음[得]’을 말한다. 이런 얻음에 이르면 거의 다 온 것”이라고 말을 이었던 겁니다. 손이 트지 않게 하는 약이 따뜻한 오나라에서는 쓸모가 없으리라고 판단하지 않아야 합니다. 장자의 말대로 우리는 “위시’를 쓰지 않고 그것을 ‘일상’에 깃들도록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오나라에서도 손이 트지 않게 하는 약이 버려지지 않고 자기 자리를 얻게 될 테니까요. 위시에서 인시로의 전환, 혹은 ‘비교되는 이것’이 ‘비교 불가능한 이것’으로의 전환은 이렇게도 중요합니다. 바로 이 순간 사유의 세계는 삶의 세계로 열립니다. 그래서 장자는 위시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인시(因是)’할 뿐이지만 그러면서도 왜 그런 줄 모르는 것, 그것을 길이라고 한다”고 강조했던 겁니다. 내 앞에 주어진 타자들을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것으로,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것으로 긍정하라는 것! 그래야 우리는 타자에 가까이 가려는 걸음을 자기도 모르게 내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타자 에만 적용되는 가르침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다른 것과 비교하지 말고 절대적으로 긍정해야 합니다. “나는 머리가 나빠” “나는 못생겼어.” “나는 스펙이 부족해.” 이것도 위시니까요.
내 앞에 주어진 타자들을 조금의 부족함도 없는 것으로,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것으로 긍정하라는 것!
인용
32. 수레바퀴 옆에서 / 34. 대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간 까닭
'책 > 철학(哲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35. 살토 모르탈레(날개 이야기) (0) | 2021.05.17 |
---|---|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34. 대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간 까닭(시남 선생 이야기) (0) | 2021.05.17 |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32. 수레바퀴 옆에서(당랑 이야기) (0) | 2021.05.17 |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31. 길과 말, 그 가능성과 한계(길 이야기) (0) | 2021.05.17 |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30. 망각의 건강함(공수 이야기) (0) | 2021.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