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를 잃어 땅에 묻다
네 선생 이야기가 송나라 상인의 이야기로 끝났다면 무언가 찜찜한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송나라든 월나라든 쓸모의 형이상학에 포획되어 있는 곳, 허영을 증폭시키는 국가질서가 지배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세요. 모자든 문신이든 그것은 모두 신분과 지위 혹은 부에 대한 허영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런 허영이 작동하기에 더 고급스러운 모자를 만들거나 파는 사람이 존재하고, 더 크고 아름다운 문신을 새기는 문신사도 있는 것입니다. 결국 송나라 상인은 더 큰 이득을 위해 월나라에 간 것입니다. 마치 나무 그루터기를 지키는 것이 밭일을 하는 것보다 효율이 높다고 생각했던 송나라 농부처럼 말입니다. 결국 여러 미덕에도 불구하고 송나라적인 것의 바닥에는 이익에 대한 동물적인 본능, 강력한 이기주의가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장자는 송나라적인 것을 넘어서려고 합니다. 쓸모와 허영에 사로잡힌 인간에게 하염없는 서글픔을 가졌던 장자입니다. 송나라 사람들이 품은 새로운 사유를 향한 힘, 그리고 외부성에 몸을 던지는 과감함에 새로운 방향성을 주려고 합니다. 송나라 상인 이야기 다음에 요임금 이야기를 덧붙인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어쩌면 네 선생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송나라 상인 이야기는 요임금 이야기를 위한 밑그림이나 일종의 떡밥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네 선생 이야기의 후반부 요임금 이야기는 송나라 상인 이야기만큼 짧습니다. “천하의 사람들을 다스리고 바다 안의 정치를 평정”하는 데 성공한 요임금은 중국의 절대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임금은 “막고야라는 산, 분수 북쪽에 살던 네 명의 선생을 만나고 나서 멍하게 천하를 잃어버리게 되죠.” 이 짧은 이야기를 맛보려면 ‘천하’와 ‘네 선생’이라는 단어가 그 실마리가 될 수 있습니다. 천하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하늘 아래’라는 뜻입니다. ‘하늘-하늘의 아들-정신노동자-육체노동자’, 즉 ‘천(天)-천자(天子)-대인(大人)-소인(小人)’으로 이루어진 국가 질서를 상징하는 것이 바로 천하라는 말입니다. 문제는 이 국가 질서가 지상(地上)의 모든 곳을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이죠. 물론 요임금은 처음에는 국가질서가 모든 곳에 통용된다고 믿었습니다. 설령 자신의 지배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어도 국가질서는 작동하리라 확신했던 것입니다. 마치 월나라도 모자를 쓰리라 믿었던 송나라 상인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막고야라는 산, 분수 북쪽에 살던 네 명의 선생”을 만나면서 국가질서가 미치지 않는 외부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분수(汾水)는 황하 북쪽에서 황하로 흘러들어오는 지류입니다. 유목민들이 살았던 중국 북쪽 초원지대였죠. 그곳 네 명의 선생은 모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던 월나라 사람들처럼 국가질서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죠. 바로 여기서 요임금은 ‘천-천자-대인-소인’이라는 피라미드 지배 구조가 우물 안 질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 이제 ‘네 선생’이라는 표현, 구체적으로는 “막고야라는 산, 분수의 북쪽에 살던 네 명의 선생”을 생각해보죠.
국가질서든 종교 질서든 일자와 다자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신은 하나이거나 최고신이 존재합니다. 이 일자가 만물을 관장하는 것이죠. 국가질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자는 한 명입니다. 이 한 명이 모든 피지배자를 지배할 때 인간 사회가 질서와 조화를 달성했다고 하죠. 그런데 막고야라는 산, 분수의 북쪽은 일자와 다자의 구조가 통용되지 않습니다. 스스로 선생이라 생각하고 서로를 선생이라고 생각하는 네 선생이 있었으니까요. 한 명의 천자와 네 명의 선생의 만남! 이는 상명하복의 국가질서와 자유로운 개인들의 공동체와의 마주침을 상징합니다. 월나라라는 외부성과 마주쳤을 때, 송나라 상인에게는 세 가지 행동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송나라로 되돌아오는 것, 폭력적으로 월나라를 송나라로 개조하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송나라를 버리고 월나라에 몸을 던지는 것! 마찬가지로 요임금도 세 가지 행동이 가능합니다. 중국으로 돌아오는 것, “막고야라는 산, 분수의 북쪽”을 정복하는 것, 그리고 그곳에 머물며 ‘다섯 선생’ 중 한 사람이 되는 것! 역사적으로 보아 요임금은 첫 번째나 두 번째를 선택한 듯 보입니다. 그러나 장자는 요임금이 군주의 자리를 내려놓고 네 선생 옆에 머문 것으로 해석하려 합니다. 요임금은 천하를 잃어버리기 때문이죠. 상천하(喪天下) 천하를 잃어 땅에 매장한 겁니다. 천하라는 관념 자체가 죽은 셈이죠. 다섯 번째 선생이 된 요임금을 따라 국가질서에 포획된 모든 이들이 차례차례 여섯번째, 일곱번째 선생이 되어가는 것! 어느 송나라 철학자의 꿈은 바로 이것입니다.
인용
10. 텅 빈 하늘의 바람 소리 / 12. 보편적인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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