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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35. 살토 모르탈레(날개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35. 살토 모르탈레(날개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7.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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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실토 모르탈레

날개 이야기

 

 

흔적을 끊기는 쉽지만, 땅을 밟지 않기란 어려운 법이네. 인위적인 것에 의해 부려지는 사람은 속이기 쉽지만, 자연적인 것에 의해 부려지는 사람은 속이기 어렵지. 날개가 있는 것이 난다는 것은 들어보았겠지만, 날개가 없이 난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했을 거야. 앞으로 안다는 것은 들어보았겠지만, 알지 못함으로 안다는 것도 듣지 못했을 거고. 저 텅 빈 곳을 보게! 빈방에서 밝음이 생기고, 상서로움은 고요함에 머물고 있네. 저 고요하지 않은 상태, 앉아서 달린다고 말하지. 이목을 안으로 통하게 하고 마음에서 앎을 쫓아낸다면, 귀신도 찾아와 깃들 텐데 하물며 사람들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絶迹易, 無行地難. 爲人使易以僞, 爲天使難以僞. 聞以有翼飛者矣, 未聞以無翼飛者也; 聞以有知知者矣, 未聞以無知知者也. 瞻彼闋者, 虛室生白, 吉祥止止. 夫且不止, 是之謂坐馳. 夫徇耳目內通而外於心知, 鬼神將來舍, 而况人乎! 인간세6

 

 

길보다 더 중요한 걷는 것

 

장자의 사유를 요약할 수 있는 한마디가 있습니다.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 제물론편에 등장하는 이 구절은 길은 걸어서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장자의 사유를 때로는 난해하게, 때로는 섬세하게, 혹은 섬광처럼 만드는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자신의 사유를 도행지이성으로 정리했기 때문입니다. 장자의 사유 흐름을 재구성해볼까요? 일단 장자는 이미 만들어진 길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건 분명합니다. 주어진 길을 걸으면 도착지는 뻔합니다. 만약 그 도착지가 자유와 사랑의 공동체라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도착지가 쓸모를 강요하는 사회, 혹은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면 버려지는 사회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장자의 눈에 제자백가로 불리는 여러 사상가들이 제안한 길은 억압사회나 영토국가에 귀착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한마디로 그들의 도는 지배와 복종의 길이지 자유와 사랑의 길은 아니었던 겁니다. 그래서 장자는 타자를 지배하거나 타자에게 복종하는 길에 발을 내딛지 않으려 합니다. 나아가 그는 자유와 사랑의 길이 가진 숙명을 직감합니다. 그 길은 나를 떠나서 미리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자유와 사랑의 삶을 살았다 해도 아버지가 걸어서 만든 그 길을 가서는 안 됩니다. 나는 나이고 아버지는 아버지일 뿐입니다. 아버지의 길을 걷는다는 사실 자체가 나의 자유를 심각하게 훼손할 겁니다. 물론 아버지의 길은 내게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도움 아닌 도움입니다. “너는 네 삶을 너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 아버지도 그랬다. 힘들더라도 너의 길을 만들어야 한다. 내가 나의 길을 만들었던 것처럼, 파이팅!” 놀라운 것은 자기 길을 만드는 데 성공했을 때, 아들은 아버지의 길을 긍정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아버지였으면 나도 그렇게 살았을 거야.”

 

장지는 넓게는 타자와 소통하는 길, 좁게는 타자를 사랑하는 길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 소통과 사랑의 길은 자유의 길이 기도하다는 걸 장자는 일순간도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행지이성이라는 장자의 말이 울림이 있는 겁니다. ! ()보다 행(), ‘보다는 걷는다는 것이 수천수만 배 중요하구나! 중요한 것은 타자를 사랑하는 겁니다. 산에 올라가지 않았지만 산정에 올라가고 싶다는 마음이 먼저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등산로가 없더라도 산을 올라가려면 그 마음은 모든 수고를 즐겁게 감당할 정도로 강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그런 마음입니다. 흥미로운 일입니다. 산정의 풍경과 전망이 어떤지 알 지 못한 채, 우리는 어떤 희망과 기대를 품고 산에 오르려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철학을 뜻하는 필로소피(philosophy)라는 개념이 결정적인 시사점을 줍니다. 필로소피는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philos, φίλος)’을 뜻하는 소피아(sophia, σοφία)’로 구성된 말입니다. 보통 앎이 먼저이고 사랑이 다음이어서, 철학은 앎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사랑이 먼저이고 앎은 그다음이라는 해석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우리는 타자를 사랑하기에 타자를 알게 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해 타자에 대한 사랑이 지속되는 동안만큼 우리는 그 타자를 이해하려 하는 법입니다. 역으로 말해, 타자를 알았다고 해도 우리는 그 타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수학 시험 점수가 높은 학생이 반드시 수학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설령 그가 최고의 수학자가 될지라도 그는 불행한 영혼일 뿐입니다.

 

남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이 타인을 안 다음에 사랑하려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길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은 타인을 사랑하기에 알게 되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처음 마주친 타자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타자를 경험한 사람들에 대한 평가 혹은 그 타자에 대한 체제의 정성적이거나 정량적 평가를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인간성이 좋다는 지인의 이야기를 듣고 타자를 만날 수도 있고, 아니면 스펙을 확인하고 타자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이 경우에 사랑이라는 기적이 탄생할 수 있을까요? 그 반대 경우는 더 소스라칩니다. 주변이나 체제의 평가에 따르다 사랑했을 사람을 놓쳤을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그렇다고 사랑하기에 타자를 알게 되는 경우도 완전한 해피엔딩을 약속하지는 않습니다. 빽빽한 초목을 헤치고 험난한 경사를 이겨내고 산정에 올라갔지만 그곳 풍광은 기대에 못 미칠 수도 있습니다. 풍광이 볼품없다는 걸 알았더라면 분명 그 산을 오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올라보지 않으면 그 사실을 사전에 미리 알 수는 없는 법입니다. 진정한 삶은 항상 사랑 이후에 오는 것, 사후적인 것이니까요. 산정의 풍광이 좋지 않다면 다시 그 산에 오를 일은 없을 겁니다. 올랐을 때의 풍광이 어떨지 모르지만 아름다운 전망을 기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오르기를 반복할 것이고 그에 따라 뚜렷한 등산로가 만들어질 테니까요. 장자는 스스로 걸어 자기 길을 만들기보다 타인이나 체제가 만든 길을 걸으려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합니다. 남이 사랑하는 걸 사랑하고 남이 싫어하는 걸 싫어한다면, 우리는 앵무새의 삶을 살 뿐 자기 삶을 향유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러니까 도() 혹은 길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걷는 것, 즉 행()입니다.

 

 

 

절벽 너머로 목숨을 건 도약!

 

걷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나아가 우리가 어떻게 걸어야 하는 지를 장자가 명확히 보여주는 이야기가 인간세편에 있습니다. 바로 날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날개 비유 외에도 그에 버금가는 시적 표현들로 충만합니다. 특히 걸어가는 일이고 독하리라는 느낌을 바로잡으려는 빈방[虛室]의 비유는 매력적입니다. 빈방의 비유로 장자는 우리가 타자에게 가는 과정이 사실 타자가 내게로 오는 과정이기도 하다는 걸 보여줍니다. 사실 이것은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도 아는 일입니다. 멀리 있는 미루나무에 한 발 한 발 다가가면 그 나무도 그만큼 조금씩 조금씩 내게 다가올 테니까요. 반면 카프카의 성처럼 우리가 무언가에 다가가면 갈수록 그것들로부터 멀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지 않아서 생기는 일입니다. 이는 걸어가지 않은 경우보다 더 심각한 상황입니다. 아내와, 남편과, 애인과 아들과, 딸과 잘 지내려고 노력하지만, 그럴수록 관계가 호전되기는커녕 악화되는 비극적인 상황이지요. 어딘가에 혹은 무언가에 가고 있지만 멀어지기만 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걷지 말고 멈추어야 할 겁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아주 조금 걸어 보면서 내가 가려는 곳이 내게 다가오는지 확인해봐야 합니다. 바로 그 방향입니다. 한 걸음 내가 나아가면 한 걸음 내게 다가오는 타자! 바로 그 방향으로 우리는 길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걸어감과 관련된 이 모든 가능성들! 근사한 시 한 편으로 이 모든 것을 담아낸 것이 바로 날개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시를 음미하듯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민감하게 이 이야기를 다루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 번도 살아보지 않은 자유로운 공동체일 수도 있고, 알지도 못하면서 사랑하는 타인일 수도 있고, 아니면 완전히 새로운 미지의 세계일 수도 있습니다. 날개 이야기는 그곳, 혹은 그것으로 날아가는 숭고한 장면에 대한 비장한 서사시입니다. 타자성에로의 도약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키르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헤겔이 앎과 이성이라는 변증법적 다리를 건너 절대정신, 즉 신에 이르려 했다면, 키르케고르는 그런 다리 자체를 걷어차버립니다. 키르케고르에 따르면 신은 절대적 타자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이 만든 사다리로는 인간적인 데에만 이를 뿐, 신적인 것에 이를 수 없다는 겁니다. 심연이 가로막고 있는 두 지역을 생각해보세요. 두 곳을 연결하는 다리도 없습니다. 그 한쪽 낭떠러지 끝에 서서 심연 건너편 다른 쪽을 꿈꾸는 한 인간을 떠올려보세요. 1844년 출간된 주저 불안의 개념(Begrebet Angest)에서 키르케고르는 우리에게 흥미로운 이야기 하나를 들려줍니다. 그건 절벽 끝에 서 있는 사람이 겪는 불안(Angest)’의 정체에 대한 흥미로운 분석입니다. 추락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피하려는 본능, 그리고 절벽 밖으로 몸을 의도적으로 던질 수도 있다는 가공할 만한 충동을 동시에 느낍니다. 이 두 가지 마음 상태는 서로를 증폭시킵니다. 뛰어내릴 수도 있다는 충동은 추락에의 공포를 가중시키고, 추락에의 공포는 뛰어내릴 수도 있다는 충동을 전율로 몰고 가니까요. 절벽 끝의 남자에게는 자기 몸을 던질 수도 있는 자유와 절벽 끝에 머물 수도 있는 자유가 주어진 겁니다.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라는 그의 유명한 말은 이런 문맥에서 가능합니다. 절벽이나 낭떠러지 혹은 고층 건물 옥상 난간에 서면 누구나 느끼는 감정일 겁니다. 몸을 던지지 않겠다고 결정하면 불안은, 떨림은, 현기증은 가라앉습니다. 반대로 몸을 던지겠다고 결정해도 불안은, 떨림은, 그리고 현기증은 가라앉을 겁니다.

 

두려움, 불안, 현기증에 너무 빠져서는 안 됩니다. 중요한 것은 절벽에 서 있다는 경험이니까요. 심연과 함께 내 앞에 등장한 타자성이 핵심이라는 겁니다. 심연에서 돌아서도 되고 혹은 뛰어도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절벽 끝을 뒤로 두고 자신이 살던 익숙하고 평평한 도시로 돌아온다고 해서 행복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타자를, 그리고 그 사이를 가로막는 심연을 보지 않았으면 그만이지만, 경험했다면 우리는 과거로 되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 심연 건너편의 타자는 우리 삶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닐 테니까요. 심연을 회피하는 것보다 심연을 건너려는 선택이 더 쉬운 결정일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할부의 고통보다 일시불의 고통이 더 나은 법이니까요. 살토 모르탈레(Salto Mortale)! 목숨을 건 도약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페이탈 리프(fatal leap)’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다리도 없는데 심연을 가로질러 저편으로 건너뛴다는 이야기입니다. 분명 순간적으로 목숨을 걸어야 하는 힘든 일이지만, 살토 모르탈레는 목숨을 걸지 않아서 생기는 장기적 회한보다는 쉬운 일입니다. 날개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장자가 흔적을 끊기는 쉽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절벽 끝에 이른 발자국은 남아 있지만 그 끝에서 되돌아 나온 발자국이 없다면, 우리는 그 누군가가 심연으로 추락했거나 아니면 심연 너머 저편으로 날아갔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고는 짐작할 겁니다. 누군가 목숨을 건 도약을 했다고 누군가 두려움 속에 자신이 밟고 있던 이편 절벽 끝에서 발을 뗐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심연을 건너기로 선택한 순간 그의 불안은 그의 떨림은 그의 현기증은 안개가 걷히듯 사라집니다. 편안함이 안정감이 그리고 명료함이 그 자리를 대신할 겁니다. 겉보기에 치명적인 듯 보이는 도약이, 도약한 사람에게는 경쾌한 도약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날개도 앎도 버리고 뛰어라

 

심연을 건너 저쪽으로 도약하는 데 성공했다고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는 단지 미지의 땅이 열린 셈이니까요. 방금 착지한 저편 가장자리에서부터 그는 앞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장자가 땅을 밟지 않기란 어려운 법이라고 말한 이유 입니다. 하늘로 상승하는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수직적 초 월이 아니라 문맥에서 문맥으로 수평적으로 이루어진 포월입니다. 포월(匍越)은 글자 그대로 기어서[]’ ‘넘어간다[]’는 뜻입니다. 심연 저쪽에서도 삶은 새롭게 시작됩니다. 자유로운 공동체에서의 삶일 수도 있고, 사랑하는 타인과의 삶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삼자가 보았을 때 여전히 치명적인 것으로 보이고, 도약을 감행한 자에게는 경쾌했던 그 도약이 중요합니다. 바로 장자가 이쪽과 저쪽을 갈라놓았던 심연 앞으로 우리를 다시 데려가는 이유입니다. “인위적인 것에 의해 부려지는 사람은 속이기 쉽지만, 자연적인 것에 의해 부려지는 사람은 속이기 어렵지.” 이익을 따르고 손해를 피하려는 사람, 죽음을 무서워하고 삶에 연연하는 사람은 결코 살토 모르탈레를 시도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살토 모르탈레에 몸을 맡긴 사람의 경우 이익과 손해 혹은 죽음과 삶으로 그의 도약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이미 손해도, 그리고 죽음마저 감수한 사람이니까요. 그는 진정으로 좋아하는 곳,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타자의 욕망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되찾은 사람입니다. 장자가 말한 자연적인 것에 의해 부려지는 사람입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이익과 손해, 혹은 죽음과 삶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는 사랑을 위해 죽음마저 감수할 테니까요. 사랑의 대상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새로운 삶이든 자유로운 공동체든 간에 상관없이 말입니다.

 

마침내 날개 이야기는 장자가 날개 없이 날기[以无翼飛]’알지 못함으로 알기[以无知知]’를 말하면서 정점에 이릅니다. 인간에게 심연을 건너뛴다는 것은 불안과 편안함, 떨림과 안정감, 혹은 현기증과 명료함이 교차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입니다. 인간에게는 심연을 건널 수 있는 날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날개를 가진 새에게 인간이 목숨을 걸고 뛰는 그 심연은 심연도 아닙니다. 가벼운 날갯짓 한두 번으로 훌쩍 건너면 그만이니까 요 그러니까 날개도 없이 난다는 것이 비범하고 위대하다는 겁니다. 대붕 이야기에는 곤이라는 거대한 물고기가 붕이라는 새가 되는 극적인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곤이 날개가 없는 물고기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나 곤은 물에서 물 바깥으로 목숨을 건 도약을 단행합니다. 물속의 모든 편안함을 버려야 가능한 일입니다. 바이칼 호수로 추정되는 북쪽 바다, 즉 북명(北冥)의 수면은 얇은 평면에 불과했지만, 곤에게 그건 수만 리의 심연과도 같았던 셈입니다. 이렇게 곤은 날개 없이 날았고, 마침내 그 도약에 걸맞은 날개가 생긴 겁니다. 대붕은 이렇게 탄생합니다. ‘알지 못함으로 알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여자를 혹은 그 남자를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도 사랑에 빠진 사람 이 그 여자나 그 남자를 알아가는 장면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할 겁니다. 이미 알고 있는 나라로 가는 것과 미지의 나라로 가서 그 나라를 알아가는 것, 혹은 타자를 가르치려고 하는 것과 타자로부터 배우려는 것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장자의 위대함입니다. 키르케고르가 살토 모르탈레를 독자들에게 알려주려고 여러 권의 책과 에세이를 쓸 때, 장자는 날개 없이 날기알지 못함으로 알기라는 시적 표현으로 삶과 사랑, 그리고 앎의 도약을 인상적으로 포착하니까요.

 

심연을 건너기로 작정한 사람을 다시 떠올려보세요. 그는 가장 먼저 무엇을 할까요. 이쪽 절벽 끝에서 저쪽 절벽 끝으로 뛰려면, 혹은 그 도약의 성공 가능성을 높이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가지고 있는 짐을 최소화해야 합니다. 무거운 배낭뿐만 아니라 두꺼운 외투마저 버리고 가벼움과 경쾌함을 얻어야 합니다. 내 앞을 가로막고 있는 심연은, 심연 건너편 저쪽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립니다. “네가 내게로 오려면 거의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바로 여기서 날개가 없음을 뜻하는 무익(无翼)’알지 못함을 뜻하는 무지(无知)’날개를 없앰앎을 없앰이라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의미로 심화됩니다. 날 개나 앎마저 없애야 가벼움을 얻을 수 있다는 장자의 투철함입니다. ‘없앰을 뜻하는 ()’라는 글자는 곧바로 우리를 비움을 뜻하는 허()라는 글자에 이르게 합니다. “저 텅 빈 곳을 보게! 빈방에서 밝음이 생기고, 상서로움은 고요함에 머물고 있네.” 이사 경험을 떠올려보세요. 온갖 가재도구를 트럭에 다 실은 뒤 텅 빈 집에 마지막 인사를 하러 들릅니다. 좁고 어둡다는 느낌이 사라지고 상당히 넓고 밝다는 느낌이 들어 놀라기 쉽습니다. 사실 밝음은 계속 있었던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단지 집 안의 가재도구와 인공조명이 그걸 막고 있었던 겁니다. 어쩌면 그냥 집 안을 채운 것들을 비워내서 밝음이 생겼다고 이해해도 좋습니다. 과거 방안을 가재도구로 채우고, 또 그에 어울리는 무엇을 더 채울까 고민하던 분주함, 장자의 말대로 앉아서 달리던[坐馳]” 분주한 상태가 아득하기만 합니다. 지금 빈집에 가득한 밝음은 고요하기만 합니다. 얼마나 고요한지 햇빛 사이로 먼지들이 부드럽게 부유하며 상서로운 느낌마저 듭니다. 무언가 새것이 들어올 것만 같은 그런 느낌입니다. 장자는 말합니다. “이목을 안으로 통하게 하고 마음에서 삶을 쫓아낸다면, 귀신도 찾아와 깃들 텐데 하물며 사람들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이목이 안으로 통한다는 것은 마음이 비워져야 가능합니다. 가재도구로 가득 차 있으면 방 안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비움의 힘입니다. 비웠기에 무언가 들어올 수 있습니다. 날개마저 무겁다고 없애버리고 저쪽으로 도약할 때, 저쪽은 그만큼 내게 가까워지는 법입니다.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34. 대붕이 남쪽 바다로 날아간 까닭 / 36. 두 다리의 변증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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