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   2025/02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건빵이랑 놀자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32. 수레바퀴 옆에서(당랑 이야기) 본문

책/철학(哲學)

강신주의 장자수업, 3부 등불을 불어 끄고 - 32. 수레바퀴 옆에서(당랑 이야기)

건방진방랑자 2021. 5. 17. 08:53
728x90
반응형

32. 수리바퀴 옆에서

당랑 이야기

 

 

그대는 저 사마귀를 모르지는 않겠지? 사마귀는 앞발을 사납게 치켜들고 흔들며 수레바퀴 자국에 서서 수레와 맞서려고 하네. 자신이 그 수레를 감당할 수 없음을 모르는 것이지. ()

汝不知夫螳螂乎? 怒其臂以當車轍, 不知其不勝任也. ()

 

그대는 저 호랑이 기르는 사람을 모르지는 않겠지? 그는 감히 호랑이에게 살아 있는 동물을 먹이로 주지는 않는다네. 호랑이가 살아 있는 동물을 죽이다 드러내는 성냄 때문이지. 또 그는 감히 호랑이에게 동물을 통째 먹이로 주지는 않는다네. 호랑이가 그것을 찢어발기다 드러내는 성냄 때문이네. 호랑이 기르는 사람은 호랑이가 배고프거나 배부를 경우에 때를 맞추어 호랑이의 성냄을 조절하지. 호랑이가 인간과 유()가 다른 데도 자신을 기르는 사람에게 고분고분한 이유는 그 사람이 호랑이의 기질을 따랐기 때문이고, 호랑이가 자신을 기르는 사람을 물어 죽였다면 그 사람이 호랑이의 기질을 거슬렀기 때문이네. 저 말을 아끼는 사람은 광주리로 똥을 받고 대합조개 껍데기로 오줌을 받아준다네. 마침 파리나 모기가 말 등에 들러붙으려는 것을 보고 불시에 말등을 때리면, 말은 재갈을 부수고 말을 아끼는 사람의 머리를 발로 차고 그의 가슴을 걷어차게 되네. 아끼려는 의도는 좋았지만 아끼는 방법에는 문제가 있었던 셈이네.

汝不知夫養虎者乎? 不敢以生物與之, 爲其殺之之怒也; 不敢以全物與之, 爲其決之之怒也. 時其飢飽, 達其怒心. 虎之與人異類, 而媚養己者, 順也; 故其殺者, 逆也. 夫愛馬者, 以筐盛矢, 以蜃盛溺. 適有蚊蝱僕緣, 而拊之不時, 則缺銜毁首碎胸. 意有所至而愛有所亡. 인간세11

 

 

타자와 소통한다는 것

 

인간세10에는 안합 이야기라고 부를 만한 일화가 들어 있습니다. 이 일화는 안합(顔闔)과 거백(蘧伯玉)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노나라 지식인 안합은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포악하고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위나라 태자의 사부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안합은 아무리 사부라고 해도 태자의 비위를 거스르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거백옥이라는 재야의 고수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거백옥이 안합에게 건넨 가르침, 그러니까 위나라 태자로부터 목숨을 구할 수 있는 비법은 단순합니다. “그가 갓난아기가 되려고 하면, 당신도 그와 함께 갓난아기가 되어야 한다[彼且爲嬰兒, 亦與之爲嬰兒]!” 태자가 술꾼이 되면 안합도 술꾼이 되고, 태자가 여자를 밝히면 안합도 여자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고, 태자가 도박꾼이 되면 안합도 도박꾼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안합은 그렇게 해서는 목숨을 부지할지는 몰라도 스승 노릇은 할 수 없을 겁니다. 어쩌면 그는 태자로부터는 무사할 수 있을지라도 위나라 군주로부터는 무사하기 힘들 수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안합은 태자의 스승인데, 스승이 제자를 가르치기는커녕 제자의 마음과 행동에 부화뇌동하니 말입니다. 위나라 군주나 그의 관료들이 안합을 탐탁하게 여길 리 없겠죠. 사실 안합 이야기는 장자내편의 다른 이야기들에 비해 격이 떨어집니다. 타자의 모든 것을 그대로 흉내 내고 반복하는 것은 타자와의 소통이 아닙니다. 포정이 소처럼 움직여서야 소를 잡을 수 없고, 윤편이 나무처럼 움직여서야 수레바퀴를 만들 수 없는 법입니다.

 

소통은 시체처럼 물결을 따라 함께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연어처럼 물결을 이용해 자기가 가려는 곳으로 헤엄치는 것이죠. 때로는 물결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거나, 아니면 그걸 가로질러 가는 연어를 생각해보세요. 물과 연어의 소통은 바로 이런 겁니다. 같은 인간세편에 등장하는 심재 이야기와 비교해보면 이 점은 분명해집니다. 제자 안회가 위나라에 사신으로 가야 했습니다. 문제는 위나라 군주가 성격이 포악하고 종잡을 수 없어서 그를 외교적으로 설득하기는커녕 잘못 말했다가는 죽음을 면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데 있었습니다. 스승 공자는 안회의 고민을 듣고 제자에게 그래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해둔 것이 있을 테니 말해보라고 합니다. 바로 이때 안회는 스승에게 위나라 군주의 거동에 따르겠다는 취지로 이야기합니다. 그러자 공자는 정색하며 말합니다. “비록 고루하지만 죄를 면할 수는 있겠다. 설령 그렇지만 여기에 머물 뿐이니, 어떻게 그를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雖固, 亦無罪. 雖然, 止是耳矣, 夫胡可以及化]!” 심재 이야기의 공자가 거백옥의 가르침을 들었다면 그는 같은 이야기를 했을 겁니다. “비록 고루하지만 죄를 면할 수는 있겠다. 설령 그렇지만 여기에 머물 뿐이니, 어떻게 그를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공자가 최종적으로 안회에게 마음의 비움, 즉 심재(心齋)의 비법을 가르쳐주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물결에 따라 휩쓸려 내려가는 방법이 아니라 물결에 반응해 자유자재로 헤엄치는 방법, 간단히 말해 죽은 물고기가 되는 방법이 아니라 살아 있는 물고기가 되는 방법이 중요하니까요. 공자의 심재는 구멍이 바람이 되는 방법이 아니라 구멍이 자신을 비우는 방법입니다.

 

안합 이야기 자체는 심재 이야기로 이미 극복되어 폐기되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합 이야기에는 폐기하기에 아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품고 있으니까요.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안합 이야기 후반부에 등장하는 당랑 이야기입니다. 인간세편은 장자 본인의 사유를 그나마 담고 있다는 장자내편에 속해 있습니다. 배보다 배꼽이 큰 안합 이야기도 내편에 있지만, 그 자체로는 장자적이지 않습니다. 내편을 읽을 때도 장자적인 것을 염두에 두고 비판 의식을 조금이라도 놓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어쨌든 안합 이 야기에 담기에 너무나 커다란 당랑 이야기는 사마귀[螳螂]’ 우화를 필두로, 둘째 호랑이 기르는 사람[養虎者]’ 우화, 그리고 마지막 셋째 말을 아끼는 사람[愛馬]’ 우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세 우화는 너무나 장자적입니다. 생생한 문학적 표현도 그렇지만 거기에 담긴 사유의 깊이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당랑 이야기는 당시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큰 울림을 줍니다. 안합 이야기가 진흙 덩어리라면, 당랑 이야기로 묶인 세 우화는 진흙 속에 박혀 있는 세 개의 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합 이야기에서 세 우화를 도려내 당랑 이야기라는 독립된 이야기로 부각시킨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어쩌면 안합 이야기를 만든 사람은 세 우화를 모티브로 이야기를 만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세 우화는 우리 사유를 강력하게 자극하니까요. 불행히도 그는 세 우화를 제대로 담는 데는 실패합니다. 하지만 장자편집자는 영민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성실한 사람이기는 합니다. 당랑 이야기의 중요성을 간파했기 때문에 안합 이야기를 보존하는 신중함을 드러내니까요. , 이제 당랑 이야기에 담긴 세 보석의 빛을 음미해보도록 하죠.

 

 

 

호랑이와 말 사이에 선 사마귀의 운명

 

영토국가가 대세가 되어가는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억압에 맞설 수 있을까? 지배와 복종 관계에 맞서 우리는 자유인의 자긍심을 지켜낼 수 있을까? 복종을 강요하는 국가에 적응해 기꺼이 착취를 감내하는 동료 인간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자유를 포기한 사람들에게 다시 대붕의 날개를 달아줄 수는 없는가? 장자는 세 우화로 구성된 당랑 이야기 안에 자기 고뇌 혹은 자신의 문제의식을 멋지게 새겨 넣습니다. 당랑 이야기는 먼저 사마귀 우화로 시작됩니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유명한 고사성어의 출전이 되는 우화입니다. 사마귀 한 마리가 수레와 맞짱을 뜨려고 수레바퀴 자국에 서 있는 상황입니다. 정확히 말해 사마귀는 수레의 진행을 막으려고 했던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레가 그 바퀴 자국을 따라 굉음을 울리며 육박해 들어옵니다. 그러나 사마귀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결과는 뻔합니다. 수레가 지나간 뒤 바퀴 자국에는 사마귀 한 마리가 짓뭉개져 있을 테니까요. 사마귀 우화를 마무리하면서 장자는 사마귀가 자신이 그 수레를 감당할 수 없음을 몰랐던거라고 논평합니다. 당랑거철이라는 고사성어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에 저항하는 어리석음의 비유로 통용되는 이유가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사마귀 우화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감추고 있습니다. 그 실마리는 수레를 뜻하는 ()’라는 글자에 있습니다. 기원 전 1200년경 중국 대륙에는 청동기 시절 국가의 힘과 지배계급의 우월성을 상징하는 전거(戰車)가 중앙유라시아로부터 수입됩니다. 상나라 시절 이야기입니다. 상나라 시절 고분에서 부장품으로 전거가 출토되는 것이 그 증거일 겁니다. 사마귀가 맞선 수레가 국가기구를 상징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어디선가 역사의 수레바퀴는 되돌릴 수 없다는 말을 들어봤을 겁니다. 청동기 시대와 함께 시작된 국가는 말이 끄는 전거와 함께 대지를 질주합니다. 인간을 포함해 동물종 모두가 공유했던 대지는 이제 인간이 독점하는, 특히 소수 지배계급이 독점하는 곳으로 쪼개집니다. 영토국가로의 추세는 이제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겁니다. 강자와 약자는 있어도 지배와 복종이 없었던 대지는 국가의 탄생과 함께 점점 활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때 수레바퀴 자국이 대지에 더 깊게 새겨지기 전에, 그것을 막으려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바로 사마귀로 상징되는 사람들이 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장렬한 죽음이 반복되자 생각을 전환한 사마귀들이 생깁니다. 역사의 수레를 막거나 되돌릴 수 없다면, 수레에 올라타 말고삐를 잡겠다는 발상의 전환입니다. 전거의 폭주를 막으려고 장렬한 죽음을 각오하는 방법이 아니라 전거에 올라타 전거의 속도와 방향을 결정하자는 방법입니다. 국가에 맞서지 말고 국가를 이용하자는 수정주의자의 길은 이렇게 열립니다. 사마귀 우화에 이어지는 두 우화로 장자가 숙고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호랑이 기르는 사람우화와 말을 아끼는 사람[愛馬]’ 우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주인공의 성격이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첫 번째 우화의 주인공은 사마귀지만 두 번째와 세 번째 우화의 주인공은 사람입니다. 영토국가를 상징하는 전거에 올라타는 순간 사마귀가 사람으로 변신한다는 건 무척 인상적입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전거에 맞서는 존재는 국가의 입장에서는 문명에 반하는 야만, 인간에 반하는 짐승, 혹은 지혜에 반하는 우매함으로 표상됩니다. 수레에 올라탄 사마귀가 문명화된 인간으로 표상되는 이유입니다. 설령 그들이 여전히 전거에 불만을 품고 있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거철(拒轍)’이 아니라 승거(乘車)’입니다. 수레에 올라탄 사마귀는 한 마리가 아니라 꽤 많았습니다. 제자백가라고 불리는 지식인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전거를 필요악으로 긍정한 사람들, 전거를 폐기하기보다는 전거의 폭주를 제어하려는 사람들, 바로 이들이 수정주의자들입니다. 핵심은 그들이 이제 더 이상 수레에 맞설 일도, 그래서 목숨을 잃을 일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수레를 통제하려고 생각했든 간에 이제 그들은 수레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전거에 올라타자마자 기존 승객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 어딘가에 자리를 만들어야 했습니다. 법가처럼 지배계급 근처에 자리를 만들려는 사람들도 있었고, 묵가처럼 피지배계급 옆에 자리를 만들려는 사람들도 있었고, 아니면 유가처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 가급적 그 중간에 자리를 만들려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 지식인들의 눈에 기존 승객이 호랑이 아니면 말과 같은 동물로 표상된 이유입니다. 동물이 아니라 자기와 같은 사람이 말고삐를 잡아야 전거는 별다른 문제나 저항 없이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자부심의 표현입니다. 수레에 올라탄 사마귀가 사람이 되자 이미 수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동물로 표상되는 대목에서 장자의 문학적 상상력과 정교한 구성력이 빛을 발합니다. 군주는 민중을 함부로 착취하고 심지어 죽음으로 몰고 가는 잔인한 호랑이로, 그리고 민중은 순간적 불편함과 불리함을 참지 못하고 군주를 공격할 수 있는 어리석은 말로 비유됩니다. 이제 동물처럼 어리석고 성급한 기존 승객들이 지혜롭고 진중한 새로운 승객에게 자리를 최종적으로 말고삐를 내주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정당화됩니다. 어쨌든 수레에 올라탄 사마귀가 수레에서 수행해야 할 임무는 자명합니다. 지배와 복종 관계의 윤활유가 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위로는 군주를 길들여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강도를 줄이고, 아래로는 민중을 아껴 그 들의 저항 의지를 사전에 무력화하는 양방향의 과제입니다. 장자가 호랑이 기르는 사람우화와 말을 아끼는 사람우화로 구체화한 것은 바로 이 양방향의 임무였던 겁니다.

 

 

 

수레에 맞선 사마귀들을 위하여

 

먼저 호랑이로 비유된 군주를 길들이는 우화를 살펴보도록 하죠. 이 우화에서 중요한 것은 호랑이가 인간과 유()가 다르다는 표현입니다. 호랑이는 초식동물등 자기보다 약한 동물을 찢어발겨 먹잇감으로 삼는 동물입니다. 군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군주는 압도적인 힘으로 동료 인간을 착취와 수탈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그러니까 겉보기에 같은 인간일지라도 군주에게 동정심이나 자비심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군주는 민중을 착취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니까요. 수정주의자는 그나마 군주의 포악한 성질을 그 본성에 위배되지 않는 식으로 통제하려고 고군분투합니다. 어차피 다른 동물을 잡아먹는다 해도 호랑이에게 살아 있는 동물을 통째로 던져주지 않는 것과 같은 방법입니다. 살아 있는 것을 죽이거나 먹잇감의 온전한 몸을 찢는 쾌감, 즉 지배에의 쾌감만큼은 주지 않겠다는 겁니다. 배가 고파서 동물을 죽이는 것도 심각한 문제인데, 배가 고프지 않아도 동물을 죽이려 할 테니 말입니다. 그러나 호랑이는 호랑이고 군주는 군주일 수밖에 없습니다. 억압하는 재미를 지배에의 쾌감을 영구히 없애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자신을 기르는 사람을 언제고 물어 죽일 수 있는 겁니다. 물론 호랑이가 잠시나마 고양이처럼 고분고분할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말입니다. 한비자』 「세난(說難)편에 등장하는 역린(逆鱗)’ 개념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지식인은 용을 타고 조종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날도록 할 수 있습니다. 이 순간 용은 길들여져 순한 용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용의 머리 뒤에 거꾸로 난 비늘, 즉 역린을 건드리면 용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조종하는 지식인을 물어뜯어 죽이고 맙니다. 용의 역린을 없앨 수 없고 호랑이의 성냄을 없앨 수 없듯, 군주의 내밀한 쾌감, 지배에의 쾌감은 없앨 수 없는 법입니다. 결국 호랑이를 기르겠다며 수레에 올라탄 사마귀도 수레에 맞서던 사마귀와 같은 운명에 빠지고 합니다.

 

수레에 올라탄 사마귀는 말을 아끼는 사람처럼 억압받는 민중을 아껴줍니다. 그는 지배계급이 남긴 피지배계급의 상처, 그 들이 겪은 착취와 수탈의 상처를 보듬어줍니다. 수탈에 집중하느라 재분배에 인색하면 민중의 저항은 불가피하고, 그에 따라 수레가 전복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러니 수탈을 자행하는 만큼 누군가는 재분배의 임무를 맡아야 합니다. 국민 복지를 위해 세금을 걷는다는 착시 효과를 주어야 조세저항을 막을 수 있는 법입니다. 국가 입장에서는 안정적이고 원활한 수탈을 위해 재분배를 수행하지만, 피지배계급은 국가가 재분배를 위해 수탈을 한다고 믿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자기만큼은 피지배계급을 군주인 듯 모시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말을 타거나 말을 몰 때, 말을 아끼는 사람은 말을 힘들게 하지 않습니다. “광주리로 똥을 받고 대합조개 껍데기로 오줌을 받아줄만큼 사마귀는 피지배계급에 대한 재분배에 헌신적입니다. 그러나 채찍이라는 순간적 공포와 당근이라는 순간적 이익에 길들여져 있는 말입니다. 그래서 불이익과 불편함에 대한 말의 반응은 야생마의 그것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집요하고 강렬합니다. 말을 아끼는 사람이 파리나 모기가 말 등에 들러붙으려는 것을 보고 불시에 말 등을 때리면말은 그의 머리와 가슴을 발로 차서 죽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당근과 채찍에 익숙한 말은 말을 아끼는 사람이 자기 등에 가하는 직접적 고통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합니다. 장기적 재분배를 위해 순간적 재분배에 인색한 순간 말의 저항은 바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재분배는 말들이 즉각적으로 느낄 수준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말 등에 들러붙어 있는파리나 모기를 손이나 휘저어 쫓는 수준에서 재분배를 멈추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야생마의 여유로움에 비해 이미 신경질적인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지배계급이나 피지배계급 모두 국가기구가 만든 괴물인 동시에 국가기구를 유지하는 동력입니다. 수레에 올라탄다는 것은 지배와 복종 관계를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수레에 올라타 인간의 탈을 쓰게 된 사마귀가 수레를 멈추는 방법은 쉽습니다. 수레에서 호랑이를 축출하거나 아니면 마구간의 말들을 야생에 풀어주는 겁니다. 그러나 그는 이런 노력조차도 하지 않습니다. 호랑이가 있어야 호랑이 기르는 사람도, 그리고 재갈 물린 말이 있어야 말을 아끼는 사람도 존재 이유가 있다는 걸 아는 영민한 사마귀입니다. 이것이 그가 지배계급에게는 피지배계급일 뿐이고, 피지배계급에게는 지배계급인 이유입니다. 그래서 언제든 그는 호랑이에게 찢어발겨질 수 있고, 말에 의해 흉골과 두개골이 부서질 수 있는 겁니다. 수레로 상징되는 지배와 복종 관계에 뛰어드는 것은 이처럼 치명적입니다. 결국 수레에서 사마귀는 지배와 복종 관계의 윤활유 노릇을 하다 폐기처분되고 맙니다. 여기서 사마귀의 수정주의 전략은 자기 기만적인 것으로 폭로됩니다. 차라리 수레에 맞서던 사마귀들이 위대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최소한 수레가 타협의 여지 없이 악이라는 걸 알았으니까요. 수레에 맞서던 사마귀들! 수레와 바퀴자국만을 응시하는 좁은 안목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들은 대붕이 될 수 있습니다. 인간이 되는 길과 대붕이 되는 길, 그 갈림길에 그들은 서 있었던 겁니다. 어쩌면 장자도 수레와 맞서던 사마귀였는지 도 모릅니다. 폭주하는 전거와 그것이 남긴 바퀴 자국 바깥에 거대한 초원과 우거진 산림이 있다는 걸 아는 순간, 장자는 대붕이 됩니다. 물론 그곳에서도 위험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여유와 당당함으로 충분히 살아낼 수 있는 정도입니다. 국가를 너무 과대평가하지 말고, 폭풍우나 산불 혹은 맹금 정도로 보아야 합니다. 천하로 상징되는 국가 질서쯤은 가볍게 날아 넘어가는 대붕의 길입니다. 바퀴 자국에도 잠시 머물고, 수레 위에도 잠시 머물고, 아니면 끝이 보이지 않는 먼 어딘가에도 머물 수 있는 대붕입니다. 수레에 잠시 날아든 대붕은 타인을 자유롭게 만들 수 없다는 걸 압니다. 그저 자유로운 삶을 보여주며 그들이 자유를 결단하기를 바랄 뿐! 잠시 뒤 대붕은 그 광막한 초원으로 바람만 남긴 채 날아갑니다.

 

 

 

인용

목차 / 장자 / 타자와의 소통

31. 길과 말, 그 가능성과 한계 / 33. 비교하지 않아야 보이는 것들

 
728x90
반응형
그리드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