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나로 강렬하게 서는 순간
네 선생 이야기는 ‘장보(章甫)’라는 모자를 가지고 월나라로 장사하러 떠난 송나라 상인에 대한 일화로 시작됩니다. 송나라 상인은 장보를 가지고 월나라에 들어가자마자 그야말로 멘붕에 빠지고 맙니다. 월나라 사람들은 장보건 무엇이건 모자 자체를 쓰지 않았으니까요. 그곳 사람들은 머리를 삭발에 가깝게 짧게 자르고 문신을 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송나라 상인이 되어 이 이야기를 읽어야 한다는 겁니다. 사후적으로(ex post factor)이 이야기를 읽지 말고 사전적으로(ex ante factor) 읽어야 합니다. 사후적으로 읽으면 장자가 송나라 상인의 예로 문화상대주의를 주장하고 있다는 얕은 해석만 남게 되니까요. 상인은 월나라로 들어가기 전에 혹은 사전에 월나라 사람들이 모자를 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아니, 알 수 없었다는 것이 정확할 겁니다. 그저 막연하게 월나라 사람들도 모자를 쓰리라 믿었던 거죠. 장보는 오랜 문화 전통을 자랑하는 송나라에서 만든 세련된 모자이니 월나라에서는 명품 취급을 받아 비싼 가격에 팔리리라 생각한 것입니다. 하긴 당연한 일 아닌가요. 그는 월나라에 가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그는 송나라 밖으로 과감하게 나간 겁니다. 우물안 개구리가 한 번도 나가보지 않았던 우물 밖으로 나간 셈이죠. 송나라적인 모험심이자 무모함입니다.
모자를 쓰지 않는 월나라로 모자를 팔러 간 송나라 상인이 되어보면, 우리는 외부성(externality)이나 타자성(otherness)을 경험하게 됩니다. 월나라로 들어가기 전, 그곳은 송나라와 다름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몸소 월나라에 들어간 순간 송나라 상인은 과거에 자신이 생각했던 월나라가 자기 내면이 투사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자기 내면으로 환원되지 않은 월나라, 모자를 쓰지 않는 월나라는 바로 외부성으로서의 월나라입니다. 외부성의 경험은 타자성의 경험과 함께합니다. ‘다르다’는 경험, 정확히 말해 ‘나와는 다르다’는 경험이 타자성의 경험이니까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외부성이나 타자성의 경험은 동시에 내부성(internality)과 주체성(subjectivity)의 발견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낯선 외부로서 월나라에 들어간 송나라 상인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자각하게 됩니다.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경험했을 겁니다. 외국에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 살고 있을 때 우리는 자신이 김치를 먹는 사람이라는 것을 거의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다 외국에 가면 음식 문화가 완전히 낯설어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순간 우리는 ‘아, 나는 김치를 먹는 한국인이구나’를 자각합니다. 주체는 이렇게 탄생합니다. 내가 나로 가장 강렬하게 서는 순간이 타자를 발견하는 때입니다. 특히 그 타자가 낯설고 나를 당혹시킬수록 나를 더 강렬하게 자각할 겁니다.
자기 생각 속의 월나라와는 다른 실제 월나라를 발견한 순간 송나라 상인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외부에 직면한 내부는, 혹은 타자와 마주친 주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쉽게도 네 선생 이야기는 이에 대해 침묵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가 취할 수 있는 행동, 그 경우의 수를 추정해볼 수 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세 가지일 겁니다. 첫째는 다시 송나라로 돌아오는 것이죠. 이건 아무 문제 없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가 바깥에 놀라 다시 우물 안으로 돌아오는 겁니다. 문제는 돌아와서도 그가 이전과 같을 수는 없다는 점이죠. 이미 우물 바깥을 경험해버린 개구리니까요. 둘째는 월나라를 미개하다고 규정하고 계몽하는 겁니다. 문신을 지우게 하고 억지로 모자를 쓰게 만들어 모자를 팔아먹는 겁니다. 월나라의 타자성과 외부성을 제거하고 이 나라를 송나라처럼 만드는 방법이니, 제국주의자의 길이라 할 만하죠. 세 번째는 가지고 간 장보를 깔끔하게 태워버리는 겁니다. 우물 안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의입니다. 우물 바깥의 삶을 긍정하고 새로운 타자들을 삶의 동반자로 받아들이는 겁니다. 예를 들어 그는 월나라에서 문신사가 되어 살아갈 수도 있죠. 물론 문신사가 된 이 사람은 마음만 먹으면 송나라로 돌 아갈 수도 있을 겁니다. 월나라에서만 나는 재료로 만든 모자를 가지고 말입니다. 이제 송나라 사람도 아니고 월나라 사람도 아닌, 아니 송나라 사람이면서 동시에 월나라 사람이기도 한 이 사람은 어떤 외부와 직면해도 어떤 타자와 마주쳐도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힘을 얻은 것입니다.
인용
10. 텅 빈 하늘의 바람 소리 / 12. 보편적인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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