Ⅷ. 수양과 삶의 통일
그러므로 이것이라고 여기는[爲是] 사변적 인식은 가로로 누워 있는 작은 기둥과 세로로 서 있는 큰 기둥, 추한 사람과 ‘서시와 같은 아름다운 사람’ 등을 구별하는 것이다. 사물이 아무리 엉뚱하고 이상야릇한 것일지라도, 도는 소통되어 하나가 됨을 의미한다. 나누어짐이 있으면 완전함도 있고, 완전함이 있으면 불완전함도 있다.
故爲是擧莛與楹, 厲與西施, 恢詭憰怪, 道通爲一. 其分也, 成也; 其成也, 毁也.
타자에 대해 내가 규정한 이루어짐과 허물어짐이라는 것이 없어져야, 그 타자는 나와 다시 소통해서 하나일 수 있게 된다. 오로지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이 소통해서 하나가 될 줄 안다. 이것이라고 여기는 인식을 쓰지 않고, 그것을 일상적인 것에 깃들도록 한다. 일상적인 것[庸]이란 씀을 말하고, 씀[用]이란 소통을 말한다. 그런데 소통[通]이란 바로 (나와 타자가 마땅한 자리를) 얻음이다. 이런 얻음에 이르면 지극해진 것이다. 사태에 따라 판단했을[因是]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줄 모르는 것, 그것을 도(道)라고 한다.
凡物無成與毁, 復通爲一. 惟達者知通爲一, 爲是不用而寓諸庸. 庸也者, 用也; 用也者, 通也; 通也者, 得也. 適得而幾矣. 因是已, 已而不知其然謂之道.
마음을 수고롭게 해서 하나[一]로 생각하려고 하지만 그 같음[同]을 알지 못하는 것을 일러 아침에 셋이라고 한다. 아침에 셋이란 무슨 뜻인가? 원숭이 키우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 주겠다”라고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라고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명목이나 실질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성을 내다가 기뻐했다. (그 원숭이 키우는 사람도) 있는 그대로에 따라 판단했을 따름[因是]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옳고 그름(을 자유롭게 사용함)으로써 타자와의 갈등을 완화시키고, 자연스런 가지런함에 머문다. 이를 일러 두 길을 걸음이라고 한다.
勞神明爲一而不知其同也, 謂之 “朝三”. 何謂 “朝三”? 狙公賦芧, 曰: “朝三而暮四.” 衆狙皆怒. 曰: “然則朝四而暮三.” 衆狙皆悅. 名實未虧而喜怒爲用, 亦因是也. 是以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鈞, 是之謂兩行.
1. 장자의 도(道)
1. 지행합일의 한계와 극복법
중국 철학에서 중요한 철학적 주장들 중에는 지행합일(知行合一)이라는 주장이 있다. 말 그대로 ‘앎과 실천이 하나로 통일된다’는 의미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하나로 통일된다는 것은 진리가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진리란 사유와 존재의 일치라고 정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지행합일의 주장이, 사유를 중심으로 하는 사유와 존재의 일치라는 진리관, 혹은 사유와 주체 중심적인 진리관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지행합일의 실천과 앎 중에서 먼저 정립되는 것은 다름 아닌 앎이기 때문이다. 지행합일에서의 앎은 무엇보다도 먼저 당위적 앎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당위란 지금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반드시 실현되어야만 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이런 당위적 앎이 없었다면 지행합일이라는 논의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게으른 어느 남자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운동을 해야만 해’라고 생각했다고 하자. 이 남자가 지금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런 생각은 당위적 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당위적 생각을 실천에 옮겨서 현실에서 매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 남자가 지행합일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행합일의 논의는 다음과 같은 단계로 구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첫째, 어떤 주체가 이러저러하게 살아가고 있다. 둘째, 그 주체가 자신의 삶을 비판하고 그렇게 되어야 하지만 아직은 되지 못한 자신의 삶의 이상적 모습을 정립하고, 즉 자신이 실천해야만 할 이념을 정립한다. 셋째; 이 주체는 그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당위적 사고의 과정 |
무의식 → 인식 → 실행 |
문제는 이 둘째 단계에서 그렇게 되어야 하지만 아직은 되지 못한 자신의 삶의 이상적 모습에 대한 당위적 앎의 근거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어야 하지만 아직은 되지 못한 자신의 삶의 이상적 모습이 만약 공동체가 바라는 자신의 모습, 즉 초자아가 원하는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렇다면 지행합일의 논의에서 진정한 주인은 공동체나 공동체의 규칙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주체는 단지 공동체의 규칙을 매개하는 매체에 불과하고, 지행합일이란 결국 공동체적 규칙이 모든 개체들을 통해 실현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만약 나와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타인, 즉 타자와 조우하는 경우, 지행합일은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까? 이 경우의 진정한 앎은 타자 의존적으로 발생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이 경우에도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규칙을 무의식적이든 혹은 의식적이든 타자와 관계하는 앎의 근거로 계속 고집한다면, 우리는 타자와 갈등하는 상황에 빠지게 될 것이다. 더 심한 경우에는 우리는 타자에 대해 원치 않았던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기존의 지행합일의 논의에는 타자가 빠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단순한 지행합일의 논의는 유아론적이고 독백적인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정한 지행합일의 논의는 반드시 타자를 고려해야만 한다. 이런 지행합일의 논의여야 앎의 발생과 실천의 논리를 사유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경우의 얇은 조우한 타자를 통해서 부단히 자기조정하면서 발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이렇게 했더니 저 사람이 인상을 썼다. 그렇다면 저 사람이 좋아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겠지!’라는 식으로 앎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주체는 이렇게 발생한 앎을 실천하지만, 이런 앎이 자신이 조우한 타자와의 관계에 부합되는지의 여부를 사전에 미리 결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항상 새롭게 재조정될 여지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지행합일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가져야만 한다. 첫째, 무엇보다도 먼저 주체는 타자와 조우할 수밖에 없다. 둘째, 조우한 타자와의 관계에서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자신의 처신 방법을 정립한다. 셋째, 정립된 자신의 처신 방법으로 타자와 조우한다. 넷째, 소통이 실패했다면 다시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처신의 방법을 정립한다. 다섯째, 이렇게 새로 정립된 자신으로 타자와 다시 조우한다. 이렇게 타자를 고려한 지행합일의 논의는 무한히 그리고 완성의 예감 없이 계속 진행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주체 형식을 부단히 재조정하다
앞에서 이미 읽어보았던 「달생(達生)」편에 나오는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떠올려 보자. “어떻게 해서 수영을 그리도 귀신처럼 잘하게 되었는가[吾以子爲鬼, 察子則人也. 請問: 蹈水有道乎]?”라는 공자의 질문에 대해 이 사람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다. “물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저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나를 물 속에서 밀어내면 저도 같이 그 물길을 따라 나옵니다. 물의 길을 따라서 그것을 사사롭게 나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與齊俱入, 與汩偕出, 從水之道而不爲私焉].”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타자를 고려하는 지행합일에 대한 명확한 사례를 얻게 된다. 급류를 수영하다보면, 나는 자신을 빨아들이는 물의 흐름[齊]을 만날 수도 있고 또 자신을 밀어내는 물의 흐름[汩]을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수영을 잘 한다면 나는 그런 단독적인 물의 흐름에 부합되게 수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그런 다양하고 단독적인 물의 흐름들과 더불어[與] 나는 물 속으로 빨려 들어가기도 하고 물 바깥으로 밀려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내가 이러저러하게 수영하겠다는 의지나 앎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물의 다양하고 변덕스러운 흐름들을 긍정하는 데 있다. 왜냐하면 이런 긍정으로부터 나의 움직임은 부단히 재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물의 길[水之道]이라는 표현은 오해의 여지가 있다. 이 표현은 마치 물에는 수영을 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길이 사전에 미리 내재해 있다는 식으로 오해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의 길은 물이 흘러가는 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물과 더불어 소통해서 생기는 길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물과 나의 소통의 길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물의 길은 물의 흐름만을 의미하는 것도 또는 수영을 잘 하는 방법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물의 길은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 물과 훌륭하게 소통한 뒤에만 드러날 수 있는 것, 또 이렇게 수영을 성공적으로 마친 사람만이 사후적으로 말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수영을 잘 하는 사람도 공자에게 자신은 그런 “물의 길을 사사롭게 나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不爲私].”고 말했던 것이다.
어떻게 물의 길을 사사롭게 여길 수 있겠는가? 그것은 나와 물의 만남과 조우 그리고 소통으로서 생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물이 없었다면 물의 길은 존재할 수도 없었고, 또 마찬가지로 내가 없었어도 물의 길은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물이 있고 내가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물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다시 말해 내가 물과 조우하지 않았다면 물의 길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물의 길이란 결국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소통해서 수영을 완수했을 때에만 드러나는 무엇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결국 물의 길이 드러났다는 것은 수영을 하는 사람이 이제 능숙하게 수영을 하게 된 주체로 변형되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주체가 타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타자에 맞게 자신의 주체 형식을 부단히 재조정해서 변형시킨 것 자체가 바로 도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대화처럼 보이는 독백
사유와 존재의 일치를 서양에서는 진리(truth)라고 한다면, 동양에서는 이것을 도(道)라고 한다. 사유와 존재의 일치는 사실 주체와 타자의 일치라는 근본적인 경험을 전제로 해서만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그 자체로 공허한 것과 마찬가지로, “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도 그 자체로는 공허한 질문에 불과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질문들은 마치 진리나 도가 자명하게 있는 것처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진리나 도라는 용어 자체가 무슨 의미를 지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때 우리는 길을 걷다가 만나게 되는 도인들, 즉 “혹시 도에 관심이 있으십니까?”라고 자득한 미소로 다가오는 그들과 구별되지 않게 될 것이다. 진리나 도는 모두 사유와 존재 혹은 주체와 타자의 일치라는 훨씬 더 근본적인 사태에 대한 해명으로부터 이해되어야만 한다. 우리가 이 양자 사이의 일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서, 상이하게 이해되는 진리나 도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사유(= 주체)와 존재(= 타자)의 일치로서의 도나 진리는 이 양자 중 어느 것을 기준으로 삼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진리관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대화는 말 그대로 둘(dia)이 상징하는 주체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전제로 해서 이루어지는 이야기(logos)다. 반면 독백은 말 그대로 홀로(mono) 수행하는 이야기(logos)다. 우리가 가끔 홀로 독백을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의심하고 반성해 보아야만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의 대화가 대화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독백에 불과할 때가 많다는 점이다. 아무리 앞에 타자가 있어도 그 타자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혹은 이해하려는 의지 자체가 결여된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주체의 이야기는 겉으로는 대화인 것처럼 보이지만 독백에 지나지 않는다. 대화나 독백을 의미하는 ‘dialogue’와 ‘monologue’에 들어 있는, 이야기를 의미하는 로고스(logos)라는 말은 많은 철학적 함축을 가지고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함축은 아마도 이성ㆍ법칙ㆍ진리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렵지 않게 모놀로그와 다이얼로그는 상이한 진리관을 표방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게 된다. 모놀로그가 홀로 진리를 길어 올리는 것이라면, 다이얼로그는 타자와 함께 진리를 길어 올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는 사유나 주체 중심적으로 진리나 도를 이해할 수도 있지만, 또 동시에 존재나 타자 중심적으로 진리나 도를 이해할 수 있다. 전자가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믿고 자신과 타자와 관계한다는 점에서 독단적이고 유아론적인 논의, 즉 독백(monologue)에 입각한 진리관을 가지고 있다면, 후자는 참이라는 생각을 부단히 구체적인 타자와의 관계에서 재조정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는 점에서 대화(dialogue)에 입각한 진리관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대화의 논리와 독백의 논리, 혹은 존재(=타자) 중심적인 진리와 사유(=주체) 중심적인 진리에 대한 구분은 그 자체로도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구분이 상이한 주체 형식과 관련이 되어 있다는 점이다. 현상학(phenomenology)에는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 개념은 기본적으로 ‘상호관계’나 ‘상호차이’를 의미하는 ‘inter’라는 말과 주관성 혹은 주체성을 의미하는 ‘subjectivity’라는 말이 합성되어 이루어진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호 주관성을 두 가지 상이한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이해방식은 상호를 강조해서 이해하는 것으로, 주체는 타자와의 상호 관계나 차이를 통해 발생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둘째 이해방식은 주체성을 강조해서 이해하는 것으로, 선험적 주체가 타자와의 관계나 차이를 정립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전자로 이해된 주체 형식이 대화의 논리와 존재(=타자) 중심적인 진리관과 부합되는 형식이라면, 후자로 이해된 주체형식은 독백의 논리와 사유(=주체) 중심적인 진리관에 부합되는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제물론(齊物論)」편에서 장자가 “길은 걸어간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다[道行之而成]”라고 말한 언설의 중요성이 있다.
다시 말해 도는 미리 존재하는 어떤 진리가 아니라 타자와 조우하고 소통함으로써 드러나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장자철학의 목적은, 도가 주체 및 타자와 무관하게 미리 존재하고 있었다는 생각의 부조리함을 폭로하고, 동시에 도는 주체와 타자가 소통하는 데서 생성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옹호하려는 데, 다시 말해 우리로 하여금 꿈으로부터 깨어나서 타자와 더불어 소통하는 삶을 영위하라는 전언을 주려는 데 있었던 것이다.
2. 위시(爲是)와 인시(因是)
1. 일상적 판단엔 특정 시기의 미적 규칙이 반영되어 있다
이제 발제 원문을 직접 읽어보자. 발제 원문 초반을 장식하는 것은 위(爲是)라는 개념과 인시(因是)라는 개념이다. 우선 먼저 위시라는 개념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위시는 ‘~라고 여기다’를 의미하는 위(爲)라는 글자와 ‘이것, 이쪽, 옳다, 이렇다’를 의미하는 시(是)라는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위시라는 말은 ‘이것이라고 여기다’, 혹은 ‘어떤 것을 옳다고 여기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본문에 위시라는 판단양식의 예로 장자가 들고 있는 것은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한 것이다. 일상적으로 우리는 서시와 같은 아름다운 여자를 아름답다고 판단하고 문둥병에 걸려서 얼굴이 얽은 여자를 추하다고 판단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미추(美醜)에 대한 판단을 정당화해줄 수 있는 기준은 무엇인가? 다시 말해서 서시와 같은 미인을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그 기준이 역사에 따라 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보자. 자본주의가 들어오기 이전 봉건적 시대에서 미인의 특징 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이 시대의 미인들이 모두 통통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봉건시대에서 통통함은 희소성의 원칙에 의해 가치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반복되는 가뭄과 흉년, 그리고 보리고개와 같은 열악한 경제조건 하에서 여성의 통통함은 그만큼 희소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제적 기반이었다. 어느 정도의 경제적 기반이 없다면 여성은 결코 통통하게 살찔 수 없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반면 자본주의가 들어온 후 통통함이라는 미인의 이미지는 더 이상 미인을 규정하는 특성으로 작용하지 않게 된다. 왜냐하면 경제의 발전으로 인한 풍부한 영양공급으로 거의 웬만한 여성들은 모두 통통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통통함은 결코 이제 미인의 기준이 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 시대에는 가늘고 마른 형태가 미인의 새로운 기준으로 도입된다. 이것도 물론 희소성의 원칙이 작용한 것이다. 풍부한 영양으로 어느 여성이든 쉽게 통통해질 수 있다. 따라서 이 상황에서도 경제적 여건이 허락되지 않는다면, 통통해진 몸을 날씬하게 유지할 수 없는 법이다. 저지방 음식을 먹는다거나 혹은 다이어트를 한다거나 하는 모든 노력에는 경제적 힘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결국 ‘저 여자는 아름답다’는 우리의 일상적인 판단은 특정한 시기의 특정한 공동체의 미적 규칙이 초자아로 내면화되면서 가능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일상적인 우리의 마음과 판단은 내면화된 공동체(=초자아)의 규칙에 의거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내면화된 공동체의 규칙에 따라 주체는 특정한 판단과 행위를 하는 규정된 주체로 자신을 만들 뿐만 아니라 아울러 조우하는 타자에 대해서도 이런 규칙을 강요하게 된다.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일상적인 사람들은 이렇게 특정한 공동체에 살면서 형성된 자신의 모습을 마치 진정한 자신의 모습인 양 맹신하고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만약 누군가가 공동체의 규칙에 위배되는 행동과 판단을 하게 되면, 일상적인 사람은 자신의 인격을 무시당한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결국 위시라는 판단형식은 이처럼 현재 자신의 판단이 자신의 판단이 아니라 특정한 공동체의 규칙에 입각한 판단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내면화된 규칙을 진정으로 자신이 입법한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인시(因是)’라는 주체 형식
‘나는 나다’라는 인칭적 자의식을 가진 주체, 즉 과거의식을 판단의 기준으로 맹신하면서 출현하는 고착된 자의식을 가진 주체는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이다’라는 규정성이 외부(=특정한 공동체)로부터 획득한 것이라는 점을 잊고 있다. 나아가 이런 주체는 이런 규정성은 바로 자신이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착각은 주체로 하여금 자신을 자신이라고 여기게끔 하거나 혹은 자신을 옳다고 여기게끔 만든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칭적 주체의 이런 자기 망각과 착각을 장자는 자시(自是)라는 용어로 설명한 바 있다. 어쨌든 우리는 위시라는 판단이 가능하기 위한, 혹은 같은 말이지만 위시라는 판단이 함축하고 있는, 주체 형식이 고착된 주체 혹은 인칭적인 주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저 여자는 아름답네’라고 판단할 때, 그런 판단 대상과 동시에 판단하는 인칭적 주체가 불가피한 법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위시라는 판단 형식과 그것이 함축하는 주체 형식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장자가 우리에게 권고하고 있는 판단 형식인 인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
인시(因是)라는 말은 ‘따른다 혹은 근거한다’를 의미하는 인(因)이라는 글자와 ‘이것, 이쪽, 옳다. 이렇다’를 의미하는 시(是)라는 글자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인시라는 개념은 글자 그대로 ‘옳다는 것을 따른다’를 의미한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옳다는 판단은 누가 하느냐에 있다. 만약 옳다는 판단을 내리는 것이 주체라면, 따라서 인시가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따른다’를 의미한다면, 이 경우 인시라는 개념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칭적 주체 형식에서 작동하는 판단인 위시와 전혀 구별되지 않게 된다. 그렇다면 옳다는 판단은 누가 내리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바로 타자다. 다시 말해 인시라는 개념은 ‘타자가 옳다고 하는 것을 따른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시라는 판단 형식은 타자에 따라서 옳다는 판단을 내리는 타자 중심적인 판단이라고 규정할 수 있겠다. 이 점이 바로 인시가 인칭적 주체의 구성된 초자아를 중심으로 해서 작동하는 주체 중심적인 판단 형식인 위시와 구별되는 결정적인 지점이다.
위시라는 판단 형식이 고착된 자의식으로 작동하는 인칭적 주체라는 형식을 함축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시라는 판단 형식도 이 형식에 맞는 주체 형식을 함축하고 있다. 인시라는 판단 형식으로 작동하는 주체는 옳음의 기준을 타자에 맞추려고 노력한다. 그 예로는 앞에서 살펴본 수영 잘 하는 사람을 들 수 있겠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물이 소용돌이쳐서 빨아들이면 저도 같이 들어가고, 물이 나를 물 속에서 밀어내면 저도 같이 그 물길을 따라 나옵니다. 물의 길을 따라서 그것을 사사롭게 나의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與齊俱入, 與汩偕出, 從水之道而不爲私焉].” 물이 자신을 빨아들이려고 할 때, 일상적인 사람들은 물에 빨려들지 않기 위해서 발버둥치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물에 빨려들면 자신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 이 수영 잘 하는 사람은 그 흐름을 긍정하고 자신의 몸의 움직임을 그것에 맞추려고 한다. 이처럼 인시를 하는 주체는 마치 고감도의 레이더처럼 타자에게서 분출되는 미세한 전파를 미묘하게 잡아내어 스스로를 변형하는 주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카멜레온이 주변의 환경에 따라 자신의 피부색깔을 바꾸듯이 말이다. 결론적으로 인시라는 판단 형식에 걸맞는 주체는 유동적인 주체 형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유한한 존재가 무한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
장자가 권고하고 있는 인시(因是)라는 판단형식은 표면적으로는 사태에 철저하게 순응하는 비주체적인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또 역사적으로도 그렇게 오해된 것이 사실이다. 분명 인시라는 판단형식이 주체의 자유를 제약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차피 우리 인간은 유한자이고, 따라서 자유도 제약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절대적인 자유란 사실 무한자인 신에게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가?
만약 우리가 절대적인 무한자라면 우리에게는 외부가 존재할 수 없을 것이고, 따라서 어떤 타자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자유가 인간에게 가능하다는 주장은 근본적으로 타자를 부정하는 사유를 전제로 하고 있다. 역으로 만일 우리가 자신이 외부를 가진 유한자라는 것, 다시 말해 타자와 조우할 수밖에 없는 유한자라는 것을 긍정하게 되면, 우리는 결코 절대적인 자유를 주장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인간의 자유란 조건적이며 제약적인 자유일 수밖에 없다고 말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보자. 바람이 없다면 행글라이더는 날 수 없다. 그러나 바람이 분다고 해서 행글라이더가 무조건 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바로 이 사이에 인간의 자유가 존재하는 법이다. 강한 바람이 불면 나뭇잎도 떨어지고, 지붕도 날라갈 수 있다. 그러나 행글라이더는 어떤가? 바람 속에서 유연하게 날아가는 행글라이더는 분명 만유인력과 바람의 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인간의 자유를 상징하지 않는가? 강한 바람 속에서 행글라이더는 떨어질 수도 있고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바로 행글라이더를 타고 있는 사람의 역량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미세한 바람의 움직임에 따라서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자신이 가야 될 방향으로 미묘하게 길을 잡아나가는 것 속에서 바로 행글라이더를 타는 사람의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비인칭적이고 유동적인 주체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나는 나고, 바람은 바람이야’라는 판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바람은 하나가 아니다. 실제로는 무수히 많은 바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행글라이더를 타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는 강하게 아래에서 솟구치는 바람과 조우할 것이고, 또 어떤 경우에는 좌측에서 휘몰아치는 바람과 조우할 것이고, 또 어떤 경우에는 위에서 비스듬히 내리부는 바람과 조우할 것이다. 이런 각각의 단독적인 바람의 흐름들은 상호간에 환원 불가능한 특이성을 가지고 있다. 솟구치는 바람에 맞게 자신을 조절했던 이 사람은, 바로 좌측에 휘몰아치는 바람에 맞추기 위해 이전과는 다르게 자신을 조절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이처럼 인시라는 판단 형식이 작동하는 주체는 비인칭적이고 유동적인 주체 형식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비인칭성이 주체가 나는 나라는 인칭적 자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면, 유동성은 자의식의 고착된 성격을 녹여서 타자의 흐름과 단독성에 입각해 자신의 자의식을 임시적으로 다시 구성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의 역량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오히려 자신의 것이 아닌 공동체의 규칙을 내면화해서 생긴 초자아를 자신의 내면 깊숙이 존재하는 진정한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주체, 위시라는 판단을 수행하는 인칭적인 주체가 오히려 자유롭지 못하다고 해야 한다. 만일 행글라이더를 타고 있는 사람이 새로운 바람과 조우하기 이전에 ‘아! 이 부분에는 이런 바람이 불었었지. 그렇다면 미리 이렇게 움직여야지’라고 판단하고 몸을 움직인다면, 아마도 그는 곧 추락하고 말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능동성은 무조건적일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오직 수동적 조건에서의 능동성일 수 있을 뿐이다. 예기치 못한 타자의 흐름에 맞게 자신을 조절하는 능동성만이 진정으로 현실적인 능동성일 수 있다. 왜나하면 인간은 유한자, 정확히 말해서 유한성 속에서 무한성을 확보하려는 유한한 무한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인간은 신(=무한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단순한 사물(=유한자)도 아니다. 인간 실존의 신비는 바로 그가 신과 사물 사이에 놓여 있는 중간자, 즉 유한하면서 동시에 무한한 존재라는 데 있다. 타자라는 개념이 중요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타자는 인간 삶의 유한성과 무한성을 동시에 설명해주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타자가 우리의 삶에 도래할 때 우리는 자신이 유한하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고, 또 그 타자와 소통하게 될 때 우리는 무한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양행(兩行)의 의미
1. ‘조삼모사’의 왜곡
이제 발제 원문의 후반부를 읽어보도록 하자. 이 부분은 유명한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지금 조삼모사는 하나의 고사성어로 자리를 잡았는데, 그 의미를 교과서에서는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처럼 부정적인 뉘앙스로 독해되고 있는 조삼모사 이야기는 사실 『장자』를 오해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직접 조삼모사가 나오는 부분을 읽으면 우리는 쉽게 조삼모사 이야기가 매우 긍정적인 전언을 전해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직접적으로 말해서 조삼모사 이야기는 인시(因是)를 설명하기 위해서 장자가 도입한 우화다. 만약 통상적으로 이해된 조삼모사의 부정적 의미가 옳다면, 장자가 우리에게 권고하는 판단형식인 인시는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은 사람을 속이기 위한 책략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아마도 조삼모사 이야기가 이렇게 와전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장자가 지금까지 제대로 읽혀지지 않았다는 점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조삼모사 이야기는 매우 간단하지만, 논의의 편의상 다음과 같이 부연 설명해보도록 하자. 옛날 중국에 원숭이 키우는 사람이 있었는데, 아마도 경제사정이 여의치 않자 어쩔 수 없이 원숭이의 식량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는 일방적으로 식량을 줄였던 것이 아니라 원숭이에게 사정 이야기를 하였다. 그래서 그는 원숭이 우리로 가서 다음과같이 말했다. “내일부터 ‘아침에 세 알, 저녁에 네 알[朝三暮四]의 도토리를 줄 수밖에 없는데, 괜찮겠니?” 어차피 하루에 원숭이 한 마리당 일곱 알의 도토리만 주어야 한다면, 저녁에 네 알의 도토리를 주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배가 고프면 잠이 잘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숭이들은 그의 기대와는 달리 모두 화를 냈다. 그러자 그는 원숭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그렇다면 아침에 네 알, 저녁에 세 알[朝四暮三]을 줄까?” 그러자 원숭이들은 모두 기뻐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이다. 만약 원숭이에게 한 첫 번째 제안, 즉 아침에 세 알, 저녁에 네 알[朝三暮四]을 준다는 제안에 만약 원숭이들이 기뻐했다면, 이어지는 두 번째 제안, 즉 아침에 네 알, 저녁에 세 알[朝四暮三]을 준다는 수정된 제안은 만들어질 필요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수정된 제안을 강제한 것은 누구인가? 바로 원숭이라는 타자였던 것이다. 행글라이더를 타는 사람이 새로운 바람을 조우하면 자신을 재조정하듯이, 원숭이 키우는 사람도 원숭이의 감정과 입장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재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조삼모사 이야기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시에 대한 예화로서 장자가 구성한 것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원숭이를 키우는 사람은 바로 유동적인 주체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인시의 사례는 지금도 쉽게 찾을 수 있다. 현실 속에서 누군가를 커피숍 안에서 만났다고 해보자. 우리는 처음 만난 그 사람에게 “커피를 마실래요?”라고 제안하고 그 사람의 의중을 떠본다. 만약 그 사람이 좋아한다면 다른 제안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만약 그 사람이 커피를 싫어한다면 우리는 다른 제안을 할 수밖에 없다. 만약 이런 상황에 위시라는 판단을 하는 인칭적 주체가 처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까? “커피를 좋아하지요. 아가씨, 여기 커피 두 잔!” 이처럼 인칭적 주체에게는 상대방의 뜻을 들으려는 의지와 노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즉 타자가 결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2. 소통의 완수 여부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이에 비해 인시란 타자에 따르는 판단이나 사유를 의미한다. 그것은 어떤 제3자, 일반자의 매개를 거쳐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처하고 있는 사태나 타자의 고유성 및 단독성(이 경우에는 원숭이들)에 근거하는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원숭이 키우는 사람과 원숭이들 사이의 소통은 기본적으로 원숭이 키우는 사람 쪽에서 이루어지는 소통에의 의지를 전제로 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왜 비인칭적 주체가 인칭적 주체와 소통하려고 하는지 되물어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인칭적 주체도 어차피 비인칭적 주체가 조우할 수밖에 없는 타자라는 점을 이해하면 우리는 쉽게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식량이 떨어져 이제 불가피하게 식량을 줄일 수밖에 없었던 원숭이 키우는 사람은 원숭이를 키우지 않고서는 삶을 영위할 수 없었던 것이다. 왜 그라고 해서 자신이 키우는 원숭이에게 많은 도토리를 주고 싶지 않았겠는가? 단지 자신의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전제 하에서 조삼모사이야기를 읽어야 한다. 그래야 이 이야기에서 장자가 의도했던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조삼모사 이야기에서 원숭이들은 시비 판단이라는 지적인 작용과 희노(喜怒)라는 감정적인 작용을 하는 인칭적 주체를 상징하고 있다. 이 점에서 조삼모사 이야기는 비인칭적 주체가 인칭적 주체와 소통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로 독해될 수 있다. 장자에 따르면 비인칭적인 주체 형식을 회복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불가피하게 인칭적 주체들과 관계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비인칭적 주체 형식을 회복했다는 것은 우리가 무한자나 절대자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제 타자와 잘 소통할 수 있는 역량만을 회복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주변의 일상적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역사적으로 규정되는 특수한 평가ㆍ판단ㆍ감정의 기준(=초자아)에 의해 지배되면서도, 이것을 자신의 진정한 내면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인칭적 주체들이다. 비인칭적 주체에게 이런 인칭적 주체들이 수행하는 판단과 행위는 꿈에 비유될 만한 상상적인 착각에 불과한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비록 꿈 속에 있다고 할지라도, 이들의 판단과 행위는 직접적으로 다른 존재들에게 강한 영향을 미치고, 심하면 다른 존재의 생명까지 앗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인칭적 주체들의 판단과 행위는 엄연한 물리적 현실성을 갖는다. 이 점에서 우리는 비인칭적 주체에게 왜 인시가 불가피한지를 이해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인시라는 개념이 전제하고 있는 많은 철학적 함축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이다. 인시라는 개념은 우리가 비인칭적인 마음, 혹은 비인칭적인 주체 형식으로 변형되었다고 하더라도,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해서 비인칭적 주체 형식을 갖는다는 것은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라기보다는 문제가 해결될 전망을 얻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비인칭적 주체 형식은 타자의 단독성에 따라 자신의 주체 형식을 재조정할 수 있는 역량을 가리킬 뿐이다. 더 정확히 말해서 비인칭적 주체 형식은 수양론적 공간에서만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반면 타자와 조우하는 삶의 공간에서 비인칭적 주체형식은 임시적 주체 형식으로 변형되어야만 한다.
만약 원숭이와 조우하게 되면 원숭이에 맞게 우리는 자신의 주체 형식을 임시적으로 정해야만 하고, 또 만약 어린이와 조우하게 되면 우리는 자신의 주체 형식을 어린이에게 맞게 임시적으로 정해야만 한다. 만약 비인칭적 주체 형식이 구체적인 타자와 조우했음에도 불구하고 임시적인 주체형식으로 현실화되지 못한다면, 이것은 새로운 종류의 고착된 주체 형식(=형이상학적으로 고착된 주체 형식)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비인칭적인 주체 형식이 타자와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소통의 완수 여부는 오로지 타자와 더불어 사는 삶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지 주체가 미리 결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3. 양행(兩行)을 통해 유지해야 할 것들
이 점에서 발제 원문에 등장하는 양행(兩行)이라는 논리는 간과할 수 없는 중요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장자에 따르면 “성인(聖人)은 옳고 그름[是非]으로 사태를 조화롭게 하지만 자신은 천균(天鈞)에 머문다[聖人和之以是非而休乎天釣].” 이어서 장자는 이런 상태를 바로 양행(兩行)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물론 여기서 성인이 사용하는 옳고 그르다는 판단은 인칭적인 주체 형식에 입각해서 수행되는 판단, 즉 위시가 아니다. 이것은 인식을 통해 정립된 판단[爲是]이 아니라 비인칭적인 마음으로 타자와 조우하고 소통하기 위해서 쓰여지는 판단, 즉 인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천균(天釣)이라는 표현은 글자 그대로 자연스러운 균형, 앞에서 살펴본 도추(道樞)의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표현은 무대(無待)의 마음 혹은 비인칭적인 마음을 의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양행은 두 가지 방향에서의 작용 혹은 두 가지 측면에 대한 동시적 실천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한 방향에서는 인시라는 유동적인 판단을 수행하고, 다른 한 방향에서는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비인칭적인 마음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인시를 말했던 장자가 여기서 갑자기 양행을 도입하면서 다시 비인칭적인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인시가 가능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미 비인칭적인 주체 형식을 갖고 있어야만 하는데, 여기서 다시 비인칭적 주체 형식을 유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쓸데없는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여기에는 장자의 깊은 뜻이 숨어 있다. 칸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장자는 지금 인시만을 추구하게 되면 맹목이고, 비인칭성만을 추구하게 되면 공허하다는 점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좀더 살펴보면 장자의 우려는 다음과 같이 표현될 수 있다. 구체적인 삶의 세계에서 타자에 입각해서 수행되는 판단인 인시는 분명 임시적 주체 형식을 함축하고 있다. 그렇지만 문제는 이렇게 구성된 임시적 주체 형식이 쉽게 고착된 주체 형식으로 변질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데 있다. ‘길은 누군가가 걸어갔었기 때문에 형성된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것을 망각하고 그 길만이 절대적이고 유일한 길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매번 조우할 수밖에 없는 타자들에 맞게 자신의 임시적 주체 형식을 구성할 수 있기 위해서 비인칭적인 주체형식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장자는 양행을 통해서 삶과 수양의 통일을 이야기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제 삶의 공간은 바로 수양의 공간이고, 수양의 공간은 바로 삶의 공간이게 된 것이다.
장자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리는 그가 두 가지 주체 형식을 구분하고 있고, 이 중 하나의 주체 형식을 옹호하고 있다는 점을 명확히 알아야만 한다. 첫째는 그가 부정적인 것으로 보아 제거하려고 했던 ‘나는 나’라고 집착하는 인칭적이고 고착된 주체 형식이다. 둘째는 인간이 사회에서 산다는 불가피성으로부터 유래하는 임시적인 주체 형식이다. 임시적인 주체는 구체적인 사태마다 주체의 자기조정의 역량에 의해 구성되는 주체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고착된 주체 형식이 모든 사태들에 대해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려 한다면, 장자가 권고하는 임시적 주체 형식은 새로운 타자가 도래할 때마다 그 타자와 소통하면서 새롭게 구성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고착된 주체 형식이 타자의 타자성을 배척하는 경향으로 작동한다면, 임시적 주체 형식은 타자의 타자성을 포용하려는 경향으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임시적 주체 형식의 이런 임시성이 가능한 이유는 우리가 유동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아울러 기본적으로 우리가 다양한 타자들과 조우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성으로부터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임시적 주체 형식의 임시성이 앞에서도 살펴본 비인칭적인 주체 형식이 갖고 있는 유동성을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비인칭적인 주체 형식이 구체적인 타자와 조우해서 현실화된 것이 바로 임시적 주체 형식이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여기서 장자가 양행으로 무엇을 의도하였는지 알 수 있게 된다. 그의 양행의 논리에 따르면 우리는 비인칭적 주체의 유동성과 임시적 주체의 임시성이라는 두 계기를 동시에 유지해야만 한다. 삶의 세계는 타자와의 조우와 소통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장자의 양행은 수양과 삶의 통일을 역설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체의 유동성이 수양을 통해서 존립되어 타자를 예비하는 것이라면, 주체의 임시성은 그런 수양된 주체가 삶의 공간에서 구체적인 타자를 만나서 실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용
'고전 > 장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X. 날개 없이 나는 방법 (0) | 2021.07.02 |
---|---|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Ⅸ. 타자의 타자성 (0) | 2021.07.02 |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Ⅶ. 단독자[獨]의 의미 (0) | 2021.07.01 |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Ⅵ. 꿈과 깨어남 (0) | 2021.07.01 |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 V. 대대(待對)와 무대(無對) (0) | 2021.06.30 |